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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명환
최근 ‘피해자’와 ‘피해 호소인’ 명칭을 두고 벌어진 논쟁을 지켜보며 기억 한 조각이 떠오른다. 언젠가 트라우마 내담자의 진단서를 적었는데 그 여성분이 말없이 읽다 나지막이 속삭인다 “선생님도 거리를 두......” 작은 소리였다. ‘상기인의 진술에 의하면’이란 문구를 본 모양이다. 짐작되었던 건 내 마음에도 걸렸던 문장이기 때문이다. 말줄임표로 요약되지 않는 그 마음 그 상황이 생각난다.
그동안 진단서나 소견서를 적을 때 법적인 서류에는 ‘피해자’ 호칭을 피하는 편이었다. 관례적으로도 그렇다. 간혹 피해망상(persecutory delusion)이나 사실을 왜곡하는 사례들로 인해 내담자 진술만으로 ‘피해자’를 명명하긴 애매하기 때문이다.
나는 페미니즘이 뭔지 잘 모르지만, 이번 논쟁을 지켜보며 결심한 게 하나 있다. 진단서를 발급할 때 가정폭력이나 학대, 성범죄와 같은 트라우마 내담자의 서류는 구분할 것이다. 트라우마 내담자의 진단서와 소견서엔 적극적으로 ‘피해자’라 적을 것이다. 그것이 고인이 말해왔던 신념과 같은 맥락이라 생각한다.
인권변호사이자 시민운동의 상징, 최초의 3선 서울시장. 슬퍼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고인을 추모할 권리는 존중되어야 하고 동시에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직면하려는 권리 역시 존중되어야 한다. 절제된 형태의 장례였으면 어땠을까, 피해자에 사과 한 마디 남겼더라면, 살아서 적법한 절차를 거쳤더라면, 고인의 삶의 궤적을 짐작만 할 뿐인 나 역시 마음이 복잡하다.
너무 도덕적으로 살려고 하면 다 사고가 나는 게 아니다. 다양한 '나'와 도덕성을 기반으로 한 보여지는 '나'의 삶의 궤적이 있을 때, 그 사이의 갭이 커지면 자기애적 손상(Narcissistic Injury)에 유독 취약한 사례를 목격한다.
도덕과 윤리는 우릴 보호하고 때론 억압한다. 예컨대, 민주화 세력은 더 정의롭고 도덕적일까? 올바른 사회를 위한 언행으로 자기반성의 계기가 주어져 욕망을 컨트롤하는 데 좀 더 유리하지 않을까 짐작할 뿐, 그 사람의 신념과 욕망하는 개별자는 별개의 영역이라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도덕의 압력에 짓눌린 주체인데, 삶이 온통 금지로 가로막혀 있다면 자신의 충동을 억압하면 할수록 충동은 다른 통로로 다시 회귀하게 된다. 충동의 회귀를 초래하는 건 바로 과도한 억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대의와 활동이 ‘보여지는’ 나이고 그것이 도덕적 가치를 기반으로 할 때 역설적으로 나르시시즘의 덫에 빠질 수 있다. 신화 속 나르키소스는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로부터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지는 저주에 걸리게 된다. 물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사랑에 빠지는 벌, 그건 축복이 아니라 형벌이다.
나르시시즘이 형벌인 건 자신만 모른다는 점이다. 보여지는 내가 실제 다양한 자신과 갭이 벌어져도 보여지는 나가 전부이기에 자신마저 속을 수 있다. 거짓말이 통하는 건 속이려는 심리 뿐 아니라 속고자 하는 심리가 있기 때문인데 나르시시즘은 공백 없이 자신이 자신을 속일 수 있는 상태. 자신이 잘못 하고도 도리어 성질내고 부정하는 현상을 유독 현재의 기득권에서 자주 목격한다.
나르시시즘이 힘이나 권력을 갖게 되면 대상을 도구화 하고 상대의 고통을 공감하기 어렵게 된다. 연이은 권력형 성범죄 사건들에서 왜 피해자가 비서들일까? 자신의 이미지를 비추는 거울로 도구화 했던 건 아닐까.
대부분의 사건에서 남성들은 여성의 사진을 요구하는데, 반대로 속옷 차림의 자신의 사진을 전송한 사례가 있다면 어떻게 봐야 할까?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대체로 나르시시즘과 권력에 기인하지 않을까 추측한다. 상대엔 고통의 호러물이 될 수 있고 실제 자신의 신체이미지가 초라하다는 걸 망각한다는 점에서 눈 먼 자기애이다.
도덕적으로 살려하면 할수록, 욕망을 오물 덩어리로 간주하는 한, 이를 억압하는 방식은 실패로 귀결된다. 욕망의 질서에서 언제나 문제가 되는 건 권력의 포지션이다. 욕망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욕망이 어떤 대상을 향하느냐가 서로 다른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 위치라면 달랐을까? 아무 것도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개인 차원의 성인지 감수성이나 자기 성찰뿐 아니라 그를 견제할 시스템이 요구되고 피해자 보호와 실체적 진실 규명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양면성을 갖고 있고 다면적이다. 사람이 멀티 페르소나인 한에서, 이름에 단일한 의미만이 존재한다는 건 허상에 불과하다. 고인의 인격과 지나온 업적을 해석하고 평하자는 게 아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고인을 애도하고 명복을 빈다. 동시에 피해자를 염려하고 위로하고 싶다. 양가적인 마음은 가지면 안 되나
다면적인 측면을 함께 고려할 수는 없는 걸까? 하나의 면을 전체 업적이란 이름으로 뭉개지도 말고 삶의 궤적과 신념과 같은 다면적인 면을 뭉개지도 말고, 그가 던진 질문과 피해자에 집중할 수는 없을까.
우리의 정서적 뇌는 정답을 갖고 문제를 푸는 오류를 종종 범한다. 그 사람이 나와 가치관이 비슷한 삶의 궤적을 보였고 좋은 사람이고 존경했던 자라면, 인지 부조화로 인한 심리적 불편함은 증가한다. 내가 선택한 나의 믿음을 부정해야 하는 성찰의 순간과 직면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이 부조리하지 않다고 스스로 설득하면서 생을 보내는 동물이다’. 카뮈가 한 말이다.
경찰에 신고하는 즉시 피해자이다. ‘피해 호소인’이 아닌 피해자다. 증거자료는 이미 수사기관에 제출했다고 한다. 피해자는 얼어붙어 지냈을 4년 동안 용기 있게 문제제기를 해왔다. 부서 이동도 여러 차례 요구했다는데 그 얘기에 응답하지 않은 자들은 누구인가. 적법한 절차와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입증 과정을 거쳐야 유무죄가 가려지는데, 피해자를 피해자라 부르는 명칭조차 불편해 하는 사람들은 무엇이 그토록 불편한 것인가.
나아가, 나는 한결같은 나로 존재할까? ‘나’의 통일성이라는 개념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다중적이고 흩어진 다양한 ‘나’는 불안하므로 중심을 가지려 한다. 그 시절 함께 싸우지 못한 죄책감이든 불의에 대한 분노든 신념이든, 롤 모델이나 이상적 자아를 동일시하며 중심을 가지려 한다. 그런데, 그 무엇과 나를 지나치게 동일시하게 되면 공백이 존재하지 않는다. 확증편향으로 자신에게 셀프로 좋아요,만 반복적으로 누르면서 존재는 소외된다.
나의 정체성을 지배하는 세계관은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다. 이상적 자아 모델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들조차 그 사회를 지배하는 고정관념이며 사회 구조가 생산해 내는 지식과 권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세계관, 타자의 고정관념을 나의 삶 속에서 반복할 뿐이다. 그럴 때, 존재는 소외되며 의미는 존재를 가두는 감옥으로 둔갑할 수 있다.
롤 모델이든 어떤 신념의 이상적 자아든, 그 뭔가를 동일시하고 무리에 속하면 주체는 자신이 누구인지 질문하지 않아도 되는 안정감을 획득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온함은 존재의 이면에, 그 토대에 텅 빈 허무가 있다는 진리를 잊게 한다. 가령 촛불은 정의의 메타포일 뿐,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촛불의 자리는 빈 공백이다. 진영논리 같은 고정관념에 묶이고 내 편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하는 동일시는, 결국 나를 살해하는 일이다. 나는 끊임없이 재창조 되어야 한다.
여전히 거대한 악과 싸운다고 무리 짓고 몰려다니는 사람들을 만난다. 돈키호테는 둘시네아를 악당들에 잡혀간 공주로 알고 나쁜 거인들에 용감하게 돌진하지만 그저 풍차가 있을 뿐이다. 거대한 악은 이미 존재하지 않음에도 허상과 싸우는 투사들
내가 안티조선 운동에 참여했던 어릴 때와 지금은 무엇이 같고 어떻게 다를까. 정의당의 류호정, 장혜영과 심상정은 무엇이 같고 어떻게 다를까.
작은 이야기들로 새로 써야 할 것 같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사람들은 한 발짝 물러나도 좋겠다. 그 사람 대신 후대의 젊은 사람들이 하면 된다. 자신을 살해의 현장에 전시할 수 있는 자, 그가 미래이다.미세하고 섬세한 지점에서 새로 시작하면 된다고 믿는다. 내가 생각하는 진보는 그런 것이다.
옳다고 믿는 신념이 일치하는 사람들과 잠시 동행하는 것뿐이다. 해가 뜨고 행로가 달라지면 서로 쿨하게 이별하고 새로운 여행지로 떠나는 발걸음.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새로운 출발과 그러한 새로움을 매번 다시 반복해야 하는 시지프스처럼, 무로부터 새로 창조하는, 엑스 니힐로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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