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들은 왜 성문제를 되풀이할까
천관율 기자
호수 671
승인 2020.07
위력은 저항이냐 순응이냐를 판단하기 이전 단계에서 피해자를 옭아맨다. 마찬가지로 위력은 권력자가 그 힘을 행사할지 자제할지를 결정하기 이전 단계에서 그의 행동을 결정한다. 권력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모두 길들인다.
ⓒ시사IN 이명익안희정 전 지사는 성폭행으로 3년6개월 실형을 받고 수감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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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자리에 남은 애도와 분노
피해자와 조문객에게 응답해야 할 서울시
2018년 3월6일,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사퇴했다. 비서로 일하면서 그에게 네 차례 성폭행을 당했다고 피해자 김지은씨가 폭로한 직후였다. 이후 안희정 전 지사는 3년6개월 실형이 확정되어 수감 중이다. 2020년 4월23일, 오거돈 부산시장이 사퇴했다. 오 시장은 비서를 성추행한 사실을 인정했고, 지금까지 수사가 진행 중이다. 2020년 7월9일, 박원순 서울시장이 숨진 채 발견됐다. 비서로 일하면서 그에게 4년 동안 성추행을 당했다는 피해자가 고소장을 낸 다음 날이다.
2018년 이후 한국 사회를 뒤흔든 ‘미투 운동’의 힘이 집권 더불어민주당을 직격했다. 민주당은 불과 2년 만에 지방정부 수장 셋을 성 문제로 잃었다. 그중 두 명은 차기 대선주자였다. 수도와 제2도시가 나란히 시장 공백 사태를 맞이했다. 두 도시 시장을 뽑는 2021년 4월 재·보궐 선거가 사실상 전국선거 규모로 확대됐다. 전국선거가 없는 시기에 성과를 내려 했던 청와대에도 악재다.
역설적이게도, 최대 위기를 맞이하는 지금은 민주당의 최전성기다. 민주당은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 2020년 총선을 전부 이겼다. 국회와 지방의회,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를 모조리 틀어쥐었다. 민주당이 장악한 권력은 ‘고체로 된 권력’이었다. 청와대와 국회와 지방정부는 눈에 보이는 실체가 있고, 권력이 작동하는 규칙도 헌법과 법률로 명시되어 있다. 충남도청과 부산시청과 서울시청에서 문제가 된 권력의 작동원리는 그와는 꽤 달랐다. 이것은 ‘기체로 된 권력’, 틈새마다 스며드는 권력의 문제다. 민주당은 고체로 된 권력을 장악하는 데 사상 최대로 성공하던 바로 그 시기에, 기체로 된 권력을 치명적으로 잘못 다뤘다.
세 사례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위력’이다. 성범죄 여부를 판단할 때 쓰는 잣대로 폭행, 협박, 그리고 위력이 있다. 폭행이나 협박은 이해가 쉽다. 위력은 폭행이나 협박이 없이도 요구를 들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어떤 힘이다. 하급자를 상대하는 직장 상사, 청소년을 상대하는 성인, 정신장애인을 상대하는 비장애인 등이 이런 힘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니까 위력은 위계서열에서 나오는 무형의 힘이다. 이 권력은 미묘하게 행사되고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김지은씨는 안희정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다. 그가 쓴 책 〈김지은입니다〉는 특히 정치권에서 위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다룬 보고서로도 가치가 높다. 이런 사건은 속성상 기록이 남기 어렵고, 피해자가 이름을 내걸고 자신의 사례를 기록한 자료는 아주 드물다.
대선이 끝난 직후인 2017년 6월, 김지은씨는 안희정 당시 충남도지사의 수행비서로 발탁되어 업무 인수인계를 받는다. 전임 수행비서는 안 지사의 우유 취향부터 커피에 넣을 설탕 숫자까지 세세하게 전달한 후에 이렇게 덧붙인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사님 기분’이다. 여기에 별표 두 개를 그려라. 인수인계 사항들은 모두 지사님 기분을 맞춰드리기 위한 것이다.” 김지은씨는 이 말뜻을 곧 알게 된다. 그는 이렇게 쓴다. “기분이 중요하다는 말은 무형화된 권력을 구성하는 중요한 내용이었다. 안희정은 침묵만으로도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문자 연락에 답이 늦으면 바로 ‘...’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불편한 심기의 표현이었다.”
기분이 중요할 때, 그러니까 정치권 용어로 ‘심기 경호’가 핵심 업무가 될 때, 일의 성격은 결정적으로 바뀐다. 이제 비서는 대장을 위해 일하는 사람을 넘어, 대장 본인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된다. 어떤 상황에서 대장이 불편해할 것이라고 추론해서는 늦다. 한순간만 늦어도 이미 ‘심기 경호’는 실패했다.
ⓒ연합뉴스오거돈 전 부산시장은 성추행으로 수사를 받고 있다.
내가 대장 본인처럼 불편해야 제때 반응할 수 있다. 한 비서 업무 종사자가 재판정에 김지은씨를 위한 탄원서를 제출했다. 탄원서는 이렇게 쓴다. “오찬 메뉴를 정할 때 조찬과 만찬을 고려해 메뉴가 중복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이때 비서는 ‘같은 메뉴가 반복되면 싫겠지?’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기관장이 되어 ‘또 같은 메뉴야?’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으로 일해야 동시다발적이고 돌발적인 상황도 처리할 수 있습니다.”
김지은씨도 이걸 훈련했다. 안희정 지사의 지시는 검증할 대상이 아니라 무조건 즉시 이행할 대상이었고, 지시가 없다 해도 지사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끊임없이 기분을 헤아렸다. 이것은 비서 업무의 왜곡이 아니라 본질이었다. ‘내 입장에서 판단’을 억누를수록 유능한 비서다. 김지은은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상태에서 동등한 관계의 남성 안희정에게 성관계를 요구받은 여성이 아니라, ‘안희정의 지시는 무조건 따르고, 심기는 절대로 거스르지 않기’가 몸에 밴 상태에서 성관계를 요구받은 비서였다. 그는 이렇게 쓴다. “맥주, 담배 같은 기호품도 수행비서가 사서 숙소나 집무실로 가져다주어야 했다. 미투 이후 나는 ‘왜 네 번이나 지사의 방에 갔느냐’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그날들은 사적 심부름으로 불려갔던 수백 번 중 일부다.”
ⓒ연합뉴스박원순 서울시장은 피해자가 성추행 고소장을 낸 다음 날 숨진 채 발견되었다.
이 구조를 안희정이라는 특정한 리더의 일탈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의전화는 고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 사건 피해자를 대리하고 있다. 7월15일 서울시가 민관 합동조사단을 꾸리겠다고 밝히자, 다음 날인 7월16일에 두 단체가 입장문을 냈다. 입장문은 서울시에서 일어난 사건의 본질이 “시장의 ‘기분’이 중요한 사람들에 의해 강요된 성희롱과 성차별적 업무”라고 주장했다. 서울시가 조사에 참여할 주체라기보다는 조사 대상이라는 취지다.
이렇게 보면 위력이 작동하는 방식은 외부에서 짐작하는 것과는 다르다. 위력도 일종의 강압이지만, 피해자는 강압에 저항하느냐 순응하느냐의 갈림길에서 순응을 택하는 게 아니다. 그 이전의 단계, 저항이냐 순응이냐를 판단하기 이전 단계에서 이미 위력은 작동하고 피해자를 옭아맨다. 위력은 피해자가 판단 자체를 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릴 때 가장 잘 작동한다.
수행비서라는 특수한 직역에서만 작동하는 힘도 아니다. 정치권의 대장과 참모들 관계에서 일반적으로 작동하는 힘이다. 그 이유도 김지은씨의 증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래 사진은 〈김지은입니다〉에 실린 수행비서 업무 매뉴얼이다. ‘민주주의 지도자 보필’을 핵심 목표로 제시한다. 그를 위한 2차 목표 8개로 선택의 최소화, 팩트, 보호, 외장 하드, 개인 관리, 악역, 로열티, 안테나를 열거한다. 2차 목표에는 다시 8개씩 업무 체크리스트가 붙는다. 매뉴얼의 목표는 ‘안희정 보호’로 압축할 수 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다.
유력한 정치인일수록 무대 위의 연극배우와 같은 역할을 더 자주 요구받는다. 그는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은 발언을 해야 할 일이 점점 더 많아진다. 더욱이 그 자리에서 무언가 말을 하면서도 훗날에 추궁당하거나 책임이 생길 발언은 최대한 회피해야 한다. 모든 상황에서 정치인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면 그는 사실상 아무 결정도 하지 못하는 상태로 내몰린다. 이건 그 정치인에게 손해일 뿐만 아니라,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참모들에게도 손해다.
그러므로 대장과 참모는 이런 방식으로 이해관계를 공유한다. 대장이 무언가 기억하고 판단하고 위험을 감수할 일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대장은 진정으로 중요한 몇몇 결정을 내리는 대신, 일상의 기억과 판단과 결정을 사실상 전부 참모들에게 외주 준다.
참모들은 대장의 외장 하드(외부 저장장치)가 된다. 그들은 대장의 정신적 자원을 최대한 아껴주고, 말실수를 하거나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할 ‘위험한 상황’을 최소화하는 일을 한다. 대장이 마주치는 사람의 이름과 얼굴과 인연을 눈에 띄지 않게 귀띔해주는 게 참모의 중요한 실력으로 평가받는다. 김지은씨가 공개한 업무 매뉴얼은 사실상 모든 목표가 이 ‘대장과 참모 공통의 이해관계’에 맞춰져 있다.
이 관계에서는 정치인도 참모에게 일상을 거의 온전히 의존하도록 훈련받는다. 그가 태생이 권위적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렇게 해야 대장과 참모 모두에게 이익이라는 ‘합리성’이 있기 때문에, 성정이 소탈하고 권위를 싫어하는 정치인이라도 참모에게 일상을 외주 주는 방향으로 점점 더 미끄러진다.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유력한 정치인일수록 이쪽으로 이끄는 힘은 더 강력해진다. ‘심기 경호’를 받는 정치인은 상대의 심기를 배려하지 않는다. 역시 그가 이기적인지 사려 깊은지의 문제만은 아니다. ‘심기 경호’의 목적이 대장의 정신적 자원을 최대한 아끼는 일이므로, 대장은 참모의 심기를 무시하는 게 공동의 목적에 부합하는 ‘합리적’ 태도다. 안희정 팀은 예외적인 사례가 아니라 단지 극단적인 사례였다. 이 함정이 남자 대장과 여자 참모의 관계에서 작동할 때, 권력형 성범죄는 최상의 토양을 만난다.
ⓒ시사IN 윤무영안희정 성폭력 사건 피해자 김지은씨가 쓴 책 〈김지은입니다〉에 실린 도지사 수행비서 업무 매뉴얼.
이제 위력이 작동하는 구조를 입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다. 위력은 저항이냐 순응이냐를 판단하기 이전 단계에서 피해자를 옭아맨다. 마찬가지로 위력은 권력자가 위력을 행사할지 자제할지를 결정하기 이전 단계에서 그의 행동을 결정한다. 그래서 이것은 기체로 된 권력이다. 권력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둘 다 길들인다.
법원이 권력형 성범죄를 다루는 일은 바로 이 기체로 된 권력의 문제를 다루는 일이기도 하다. 성적 접촉이 ‘명백한 동의’와 ‘명백한 강제’로만 나눠진다면 법원의 일은 매우 간명하겠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위력이 깔린 성적 접촉은 ‘명백한 동의’와 ‘명백한 강제’ 사이의 아주 넓은 회색지대에 속한다. 항거 불능까지는 아니지만 중대한 위협을 느껴 응하는 성관계, 원하지 않지만 불이익이 두려워 응하는 성관계, 원하지 않지만 상대에게 미안함이나 죄의식을 느껴 응하는 성관계 등등. 이 회색지대는 명백한 흑백지대보다 훨씬 넓고, 단계 구분이 불가능할 만큼 연속선상으로 이어져 있다.
‘합리성’의 인도를 따르는 위력
과거의 법원이 이 골치 아픈 문제를 다루는 전략은 ‘못 본 척하는 것’이었다. 법원은 폭행과 협박 등 ‘명백한 강제’에 속하는 성적 접촉만 성범죄로 보는 태도를 한동안 고수했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여성 인권의 문제를 진지하게 직면할수록 법원도 못 본 척하기 전략을 유지하는 게 불가능해졌다. 첫 여성 대법관인 김영란 대법관이 2005년에 기념비적인 판례를 남겼다(2005도3071). “피해자가 처하였던 구체적인 상황을 기준으로 판단하여야 하며, 사후적으로 보아 섣불리 (강간이 아니라고) 단정하여서는 안 된다.” 구체적인 상황을 직시하여 회색지대를 정직하게 다루라는 이 판례는 “강간 피해자라면 마땅히 이러저러한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식의 사회통념에 의존해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였다.
ⓒ연합뉴스2019년 9월9일 안희정 전 지사의 3년6개월 형이 확정되자 김지은씨 변호인단인 장윤정 변호사가 활짝 웃으며 법 정을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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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법원은 기체로 된 권력의 미묘한 작용을 잡아낼 인식틀을 얻었다. 2019년 2월, 피의자 안희정에게 3년6개월 형을 선고한 2심 판결이 나왔다. 이 판결문은 2018년 4월에 나온 대법원 판례(2017두74702)를 인용한다. “법원이 성폭행 성희롱 사건의 심리를 할 때에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도록 유의하여야 한다.” 그 유명하고 논란 많은 ‘성인지 감수성’은 사실 2005년 김영란 판례의 연장선상에서, 성범죄 사건의 회색지대를 직시하라는 표현이다(〈시사IN〉 제598호 ‘한국 사회 흔든 성인지 감수성’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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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사건에서 법원이 이렇게 방향을 제시하자 정치권도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이제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유력 정치인이라도 성추행 문제가 터지면 정치 생명이 끝난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정치가들이 기체 권력을 다루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고체 권력도 유지할 수 없다는 현실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하지만 우리가 본 것처럼 기체 권력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둘 다 길들인다. 실패는 일탈이 아니라 차라리 어떤 ‘합리성’의 인도를 따른 결과다. 문제는 그래서 어려워진다.
이제 정치인들은 덜 이기적이거나 덜 권위적인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합리성’의 인도를 따라 행사되는 위력이라는 함정을 피할 수 있어야 한다. 예외적으로 나쁜 정치인이 함정에 빠지는 게 아니라, 예외적으로 자기절제가 강한 정치인만 함정을 피해간다. 2018년 미투 운동 이후의 정치가들은 기체 권력의 힘을 다루는 법을 훈육받지 않으면 정치 생명이 위태롭다는 새로운 현실에 직면했다. 마치 김지은씨가 말단 참모로 생존하기 위해 훈육을 받았듯, 팀의 대장들도 권력을 다루는 법을 훈육받아야만 하는 시대가 열렸다. 이것은 분명 중대한 변화다. 미투 운동은 이미 많은 것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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