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연구
6·25 영웅 金白一 장군의 삶… 그들은 왜 김백일을 악질 친일파로 모는가?
“金白一은 金日成의 天敵… 만주에서 악연이 6·25까지 이어져”
글 : 이상흔 월간조선 기자
⊙ “간도특설대와 간도토벌대는 다른 부대인데 같은 것처럼 오도”
⊙ 간도특설대는 중국공산당 팔로군과 주로 싸워
⊙ “김일성과 싸운 김백일은 종북 좌파들에게 가장 미운 존재”
김백일 장군. 1951년 3월 작전회의를 마치고 복귀하던 중 비행기 사고로 순직했다.
지난 7월 20일 경남 거제시 신현읍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서 ‘별난’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거제시민단체연대협의회라는 단체의 회원들이 이날 오후 ‘흥남철수작전 기념조형물’ 옆에 있던 김백일(金白一·1917~1951) 장군의 동상에 검은 천을 덮고 쇠사슬을 묶은 것이다.
거제경실련, 거제YMCA, 거제YWCA, 거제참교육학부모회 등 10여개 단체 대표로 구성된 이들은 이날 “김백일은 악랄한 친일파로서 항일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투쟁하던 독립군의 전문 토벌대인 간도특설대의 장교였다”며 “8월 15일까지 동상을 설립한 당사자들이 직접 철거하지 않으면 시민의 이름으로 직접 철거하겠다”고 주장했다.
김백일 장군은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 지휘관인 알몬드 10군단장을 설득해 부둣가에 몰려든 10만여 명의 북한 동포를 구출하는 데 공헌했다. 함경도 도민들은 이런 김 장군의 은혜를 기리기 위하여 지난 5월 27일 그동안 십시일반 모은 성금으로 거제포로수용소에 있던 흥남철수기념 조형물 옆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거제시민단체연대협의회가 “김백일은 친일파”라며 동상 철거를 주장하고 나서자, 시의원들이 이를 이어받아 6월 9일부터 1인 릴레이 시위를 벌였다. 시의회는 지난 6월 28일 ‘친일파 김백일 동상 철거 촉구 결의안’을 채택했다. 경상남도는 “김백일 장군 동상 설치가 문화재보호법상의 절차(문화재 영향검토)를 지키지 않은 채 무단으로 설립됐다”며 거제시에 원상복구를 지시했다. 거제시는 7월 4일 동상을 세운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와 함북6·25전적기념사업회에 김백일 장군의 동상을 자진 철거해 줄 것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김백일 장군의 동상을 세운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와 함경도민회 등은 이에 강력 반발했다. 이들 단체 대표들은 7월 13일 거제시청 담당자와 시의회 의장을 항의방문하고, 결정 철회를 요구했다. 재향군인회원들도 규탄 시위를 벌였고, 국방부는 유감을 표명했다.
김백일 장군 유족과 함경도도민회는 동상에 검은 천을 씌우고 쇠사슬을 감은 거제시민연대 대표단 4명을 사자(死者)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는 8월 5일 동상철거 명령 집행정지 신청을 창원지법에 냈다. 지난 5월부터 불거진 김백일 장군 동상 철거 논란은 법의 심판으로 결론이 나게 됐다.
한나라당 시의원, “내가 동상 철거에 앞장”
신병들을 모아놓고 연설하는 김백일 육군 1군단장. 김백일 소장은 흥남철수작전 때 10만명의 피란민 수송을 지휘했다.
김백일 장군의 동상 철거 촉구를 결의한 거제시의 의원은 모두 15명. 이 가운에 9명이 한나라당 소속이다. 이들 거제시의원은 전원일치로 김백일 장군 동상 철거 촉구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들은 결의안에서 “거제는 왜적을 물리치고 승리의 교두보를 확보했던 옥포대첩의 고장이며 성지”라며 “이런 곳에 친일파 김백일의 동상을 설치한 것은 국가적인 수치이자 거제시민은 물론, 국민의 자존심을 훼손한 행위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한나라당 소속 전기풍 시의원은 “시민단체에서 처음 이 문제를 제기한 후 의회 내에서는 내가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고 말했다.
―왜 결의안을 주도했습니까.
“첫째, 김백일 장군 동상이 설치된 곳은 문화재 영향검토 구역이기 때문에 영향검토를 받아야 하는 곳인데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김백일 장군이 간도특설대에 근무하면서 친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디에다 동상을 세워야 한다는 말인지요.
“흥남철수 당시 피란민은 대부분 부산에 내렸고, 제일 마지막에 출발한 메러디스 빅토리호 1척이 부산에 피란민을 내려놓을 곳이 없으니까 거제도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할 수 없이 도착한 1만명이 거제도의 흥남철수 피란민 전부입니다. 그러니 거제도는 흥남철수와 별 관련도 없고, 상징성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런 곳에 김백일 장군의 동상을 세울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굳이 세우겠다면 대부분의 피란민이 도착한 부산이 적당하다고 봅니다.”
6·25 전쟁 당시 거제의 인구가 10만명이고, 피란민이 15만명, 인민군 포로 17만명 정도였다. 당시 국회속기록은 1·4후퇴 당시에 거제도에 공식적으로 수용된 피란민이 9만8000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자는 2005년 《월간조선》에 흥남철수에 대한 취재기사를 실은 적이 있다. 당시 흥남부두에서 피란을 나왔던 이들 중에 메러디스호 외에 다른 배를 통해 거제도에 온 사람도 다수 만날 수 있었다.
―김백일 장군의 6·25 공적을 알고 있는지요.
“알고 있습니다. 그분의 공적은 인정하지만, 그전에 간도특설대 장교로 근무할 때 항일 무장세력을 탄압하면서 중대장까지 올라갔기 때문에 명백한 친일 행위자입니다. 그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적법한 장소에 세워 그분의 공적을 기리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김백일 장군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습니까. 그가 싸운 대상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왜곡된 역사관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당시에 그곳엔 공산당이 없었어요.”
전 의원은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 몇 가지 자료를 이메일로 보내 왔다. 그는 이메일에서 “김백일 장군의 공적을 논하기 전에 친일행적 또한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라며 “동상을 세워 후세에 길이 알리기 위해서는 친일 행적을 숨겨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전 의원이 보낸 자료는 원래 김백일 장군의 동상을 속초에 세우려고 했는데, 당시에 속초 시민단체가 반대했다는 내용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김백일 장군의 친일행위 기록물 등이었다.
경남의 거제시 고현동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공원 내 흥남철수기념 조형물 옆에 세워진 김백일 장군 동상(왼쪽). 경남의 일부 시민단체 회원들이 철거를 요구하며 검은 천을 두르고 쇠사슬을 묶었다.
예술가를 꿈꾸던 학창시절
1950년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며 제1군단장 김백일 준장이 말뚝에 ‘아아, 감격의 38선 돌파’라는 문구를 써 넣고 있다.
전 의원이 보내준 《친일인명사전》의 김백일 장군 행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김백일은 본명이 김찬규이며, 간도특설대 창설요원으로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복무했다.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패망으로 해산할 때까지 간도지역과 열하 일대에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과 팔로군 토벌작전을 모두 108차례 벌였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 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하며 그 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약탈·고문을 당했다. 1941년 3월에는 보병중위 진급, 1944년에는 만주국군 중대장으로 현지에서 항일무장 세력을 진압하는 활동을 지휘했다.
1944년부터 1945년 1월까지는 밀원현(현 북경시 소속) 석갑진 일대에서 대(對) 팔로군 작전을 전개했다. 중국 측 통계에 의하면 간도특설대가 사집진(하북성 난남현)에서 자행한 토벌사건이 36건으로 살해당한 민간인과 팔로군이 103명, 체포된 사람이 62명이었다. 1945년 1월부터 간도특설대는 만주국 군사부 직할이 되어 하북성 기동지구에 주둔해 치안유지에 종사했다. 이어 만주국군 철석부대 사령부 직할의 독립보병대대로 팔로군과 접전을 벌이던 중 팔로군으로부터 일제가 항복했다는 사실을 전달받고서야 토벌활동을 중지하고 부대 해산을 시작했다.>
이 기록은 1938년 설립된 간도특설대가 주로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과 싸웠다고 쓰고 있다. 김백일 장군은 34세의 젊은 나이에 순직했다. 그는 자신을 변호할 만한 증언이나 기록을 남겨 놓지 않았다. 조국이 망하고 없었던 일본강점기에 산 사람을 ‘반민족 친일파’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람의 행적을 정확하게 살피는 것이 순서다. 그런 선행 작업이 없는 상태에서 친일파로 모는 것은 이미 고인이 되어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인격 살인이 될 수밖에 없다.
기자는 김백일 장군이 어떤 사람인지, 간도특설대는 어떤 부대인지, 그리고 그 간도특설대에서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 추적해 보았다.
김백일의 고향은 함경북도 명천군이다. 조부 김영학(金永學·호는 白下)은 나라가 망하자 북간도로 이주했다. 김백일은 1917년 북간도 연길(延吉)에서 김창근(金昌根)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 김영학은 간도에서 오랫동안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3·1 운동 때는 간도의 용정(龍井)에서 독립선언식을 주도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김백일은 부친이 일찍 타계하여 조부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김백일은 용정 은진(恩眞)중학에서 1년간 수학한 후 서울의 보성(普成)중학으로 옮겼는데, 학창시절 미술에 소질이 있었다. 학교 졸업 후 김백일은 만주로 건너가 봉천군관학교에 입학했고, 1937년 9월 5기생으로 졸업했다. 만주국에는 봉천(奉天)과 신경(新京·만주국 수도·오늘의 장춘) 두 개의 군관학교가 있었다. 봉천군관학교는 2년제였는데, 1939년 4년제인 신경군관학교가 설립되면서 폐지됐다. 광복후 건군(建軍)의 주역들 중에 김백일, 백선엽, 정일권 등이 봉천군관을 졸업했고, 박정희, 이한림 등은 신경군관학교 출신이다.
1938년 12월 일제가 간도 연길에서 간도특설대를 창설하자 김백일은 이 부대에 간부(소위)로 합류한다. 간도특설대는 조선인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조선인특설부대’라고도 불린다.
독립군 집안 출신의 김백일이 왜 일제의 군대라고 할 수 있는 만주국의 군인이 되기로 했을까. 김백일 일대기를 다룬 《영웅들의 행진》(한번웅 저, 1986년)이란 책에서 그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저자인 한번웅씨의 꼼꼼한 자료수집 노력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소설 후기에 저자는 육군 군사연구실에서 자료를 받고, 김백일 장군 가족(아들 김동진)을 직접 취재해서 썼음을 밝혔다.
이 책에는 김백일 장군이 할아버지의 권유로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김백일의 조부는 김백일에게 “일본이 언젠가는 패망하기 때문에 그날을 대비해서 우리의 힘을 길러 두지 않으면 안 된다”며 동경제국대학 입학을 권유했다는 것이다. 김백일의 할아버지는 손자가 화이트칼라형 민족주의자가 되길 원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자 현대식 군사지식을 갖추기 위해 만주국에 입대할 것을 권했다. 김백일이 졸업했을 당시에는 만주의 무장 항일 독립군 지대들이 일본군 토벌대에 의해 거의 소멸한 상태였다.
일제가 간도특설대를 설치한 이유는
낙동강 방어후 반격하는 육군 1군단 소속 병사들. 이들은 제일 먼저 38선을 넘었고, 그날을 기념해 10월 1일이 국군의 날로 지정됐다.
원래 한인(韓人)들은 만주군의 장교가 될 수 없었다. 만주군관학교 입학 자격에 일본계, 몽골계, 만주계(중국인)만 명문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36년 홍사익(洪思翊·일본 육군중장) 이 관동군 소속으로 만주에 왔는데, 그가 규정을 고쳐 한인이 장교가 되는 길을 열어 놓았다. 홍사익은 구한말 국비유학생으로 일본 육사에 입학했지만, 나라가 망하면서 그대로 일본군에 머무르고 있었다.
1937년 통계에 의하면 만주의 한인 총 숫자는 82만명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간도에 46만명이 거주했다. 군관학교의 문이 열리자 졸업 후 취업이 어렵고, 나라 잃고 방황하던 많은 조선 청년들이 대거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일제의 중일전쟁 준비로 만주국의 전력 증강이 절실히 필요했던 시대적 요인도 작용했다.
장창국(張昌國·육군참모총장) 장군은 《육사졸업생》이란 책에서 만주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 1기에서 5기 중에 한 기수(3기)만 제외하고 수석을 모두 한인들이 차지했다고 기록했다. 이런 가운데 한인들로만 간도특설대가 창설되어 1939년부터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 간도특설대 1기생은 300명이다. 1945년 마지막인 7기에 700명을 모집했고, 전체적으로는 약 300명 정도의 병력이 항시 유지되었다.
만주 신경군관학교를 나온 김석범(金錫範·해병대 중장) 장군은 그의 저서 《만주국군지》(滿洲國軍誌)에서 일제의 간도특설대 창설 이유에 대해 “한인 사회에서는 국군(國軍·만주국군)에 참가를 지원하는 공기가 농후하여 국경감시대에 대체할 한인부대의 편성이 요망되었다”며 “그 결과 한인거주지역에 한인부대를 배치하는 정책적 고려하에 간도특설대를 창설하게 되었다”고 기술했다.
《한국전 비사》(사사키 하루타카)에는 “간도특설 경비대는 당시 백두산 주변의 변경에서 김일성 게릴라라고 칭하는 반만주 항일 분자의 준동이 계속되었으므로 한국 출신의 우수한 자를 모아 대(對) 게릴라 부대를 편성해서 치안유지에 임하게 했다”고 밝혔다.
연세대 국학연구원 신주백 교수는 <만주국군 속의 조선인 군인들>이란 논문에서 “간도특설대는 애국적 자각심과 협력심을 결집하고 조선인 거주지구에 조선인 부대를 배치할 정치적 고려하에서 신설한 부대”라고 했다.
신 교수는 “여기서 말하는 정치적 고려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당시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변도(東邊道) 일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소속의 조선인 유격대에 대한 대응책의 일환이었다는 의미도 포함된다”고 해석했다. 그래서 관동군과 만주국군은 백두산 자락 바로 밑에 있던 안도현(安圖縣) 명월구(明月溝)에 간도특설대 본부를 두었다고 해석했다.
신주백 교수는 논문에서 “일제는 조선인부대 외에 백계러시아인부대, 몽골인부대, 회교부대 등을 두었는데, 이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략적 차원에서 이용한 부대였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이들 부대 가운데 간도특설대가 가장 성공한 부대였고, 일제 스스로가 정예의 평판이 높고 토벌 공적이 컸다고 평가했다”고 밝혔다.
《만주국군지》에서도 간도특설대는 군기가 엄정하고, 전군대회에서 항상 우승을 함으로써 명성을 떨친 것으로 기록했다. 실제 전투에서도 용맹을 떨쳤다고 한다.
이런 기록들은 간도특설대의 설치 목적이 일제가 만주에서 활동하는 공산게릴라(동북항일연군)를 추적, 소탕하기 위해 조선인을 뽑아 만든 대 게릴라전 부대라는 것을 의미한다.
김일성이 소속했던 ‘동북항일연군’
반격작전시 작전계획을 토의하는 김백일 장군(오른쪽에서 두번째)과 군수뇌부.
여기서 잠시 간도특설대가 싸웠던 동북항일연군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아 공산혁명을 이루기 위해 결성한 유격대(게릴라) 조직이다. 소련은 세계의 공산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코민테른이라는 국제공산당 조직인 마르크스-레닌주의당 조직체를 만들었는데, 이는 각국 공산당 사이의 연계를 강화하고 그들의 활동을 지도함으로써 자본주의제도를 전복하고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세우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1930년 청산리 전투의 주역 김좌진 장군이 공산분자에 피살되고, 일본이 만주에 괴뢰국인 만주국을 수립하자, 북만주 지역에 활동하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지하조직인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1931년 일본의 만주침략이 본격화하자 한국독립당은 한국독립군을 결성하고 중국 측과 한중(韓中)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공동 군사작전을 펼쳤다. 이들은 1933년 말까지 일본 관동군과 격전을 치르면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후 중국공산당은 한국독립군에게 공산당 편입을 강요했다. 한국독립군은 편입을 거부하고 공산군 영역를 벗어나 중국 땅으로 옮김으로써 만주지역에서 우파 민족주의 세력의 항일 무장투쟁은 사실상 끝나 버렸다.
이에 앞선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는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중국공산당은 만주 지역에 유격대 창설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1932년 만주 전역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유격대 건설이 본격화되었다. 세계의 공산화를 꿈꾸는 코민테른의 원칙에 따라 조선인 공산주의자들도 유격대를 창설하였다. 이들의 대일항쟁 목적은 기존의 민족주의 독립운동 단체와 달리 소련의 지령에 따라 자국과 세계의 공산혁명을 달성하는 데 있었다.
1935년 중국 공산당 중앙은 인민혁명군과 각지의 반일 의용군을 묶어 전 중국의 항일연군으로 조직하는 항일 구국투쟁을 선언한다. 이렇게 해서 1936년 7월 만주지역에서 모든 공산주의 반일무장 단체를 묶은 동북항일연군이 조직된 것이다. 기존의 중국 동북인민혁명군에 소속돼 있던 조선인은 동북항일연군 1로군에 많이 배치되었다. 1로군에는 4, 5, 6사가 있었는데, 조선인으로만 구성된 이 6사를 바로 김일성이 맡고 있었다.
이들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들은 중국의 혁명에 충성을 서약한 중국 공산당원들로, 광복 후 북한정권 창출의 주요 멤버가 된다. 김일성, 서철, 최현, 최용건, 김책, 김일 등이 바로 그들이다.
동북항일연군 연구 논문을 보면 이들에게는 엄격한 군율이 없었고 중앙의 보급품 지급이 없었기 때문에 항일투쟁이 아니라 주민을 약탈하는 ‘마적단’에 가까웠다고 기술한다. 김백일의 중학교 동창인 김광옥 해군제독(해군 중장 예편)은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김백일 장군은 절대로 독립군과 싸우지 않았고, 오히려 46만 조선족을 보호하기 위해 마적 등이 침략해 오면 즉각적으로 맞서 싸웠다”고 증언했다. 여기서 김광옥 장군이 말한 ‘마적단’이 바로 동북항일연군이고, 당시 간도 일대에 거주했던 조선족들은 이들을 마적단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八路軍과 전투에 주력
이 당시 장백현 오지에 밀영(密營)을 두고 활동하던 김일성 부대는 물자부족에 허덕였다. 김일성은 장백현 일대와 갑산군 일대의 한인(韓人) 농촌을 기습하여 부족한 물자를 조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7년 6월 김일성은 일당 70명을 이끌고 중국공산당의 명령에 따라 압록강 너머 혜산진 보천보 지서를 습격했다.
기관총 소리에 놀란 일경 5명이 피신하자, 김일성 부대는 기관총 1자루와 소총 몇 자루를 훔쳐서 달아났다. 이 과정에서 면사무소와 우편소에 불을 질렀는데 민간인 2명이 이때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성은 이 보천보 전투를 항일투쟁 이력으로 내세워 북한에서 권력을 강화했다. 동북항일연군은 1940년이 되면서 조직이 무너져 300명 정도가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로 도피하면서 활동에 막을 내렸다. 소련으로 간 김일성은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극동 적군 88여단의 남야영 대장이 되고, 이를 바탕으로 광복 후 북한의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동북항일연군의 무장투쟁이 한풀 꺾이자 일제는 중국 서부에서 압박해 오는 중국공산당 소속의 팔로군(八路軍·공산혁명을 위한 항일무장단체)에 대항하기 위해 간도특설대를 만주국 서쪽 변경으로 이동시킨다. 《만주국군지》에는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전세가 점차 불리해지자, 강력한 한인부대를 한민족 독립 항쟁지였던 간도에 두는 것이 불안해 공산군이 준동하는 열하(熱河) 및 만리장성 서쪽인 기동지구에 출동하게 되었다”고 기록했다. 간도특설대는 광복이 될 때까지 이 일대에서 중국 팔로군과 전투를 했다.
아! 興南철수
함흥입성식에서 시민으로부터 화환을 받고 있는 김백일 육군 1군단장.
김백일 장군은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간 뒤 김일성의 협력 요청을 뿌리치고 남으로 넘어왔다. 이때 그는 “온 세상이 붉은색으로 물든다 해도 나만은 희게 버티겠다”는 뜻으로 김찬규(金澯圭)라는 이름에서 ‘김백일(金白一)’로 개명했다. 1946년 2월 해방조국에서 중위로 임관한 김백일 장군은 익산에서 육군 제3연대를 창설하여 초대 연대장이 되었으며, 1947년 9월에는 육사 교장, 1948년 7월에는 특설부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1948년 10월 국군 내부에 잠입한 공비들의 음모로 국군 14연대의 여순반란 사건이 발생하자, 제5여단장으로 반란군을 진압했다. 이후 1949년 7월 1일 창설한 보병학교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여 기간장교 양성에 힘썼다. 김백일은 1949년 10월에는 지리산으로 숨어든 여순반란 사건의 잔당을 3개월간 토벌했다. 이는 6·25 당시 게릴라 전술로 후방을 교란하려던 김일성의 계획을 사전에 차단한 효과를 낳았다.
6·25가 발발하자 국군은 7월 제1, 2군단을 창설하여 2개 군단체제로 정비했다. 이때 김백일 장군은 준장으로 승진하면서 2군단장에 임명되었지만, 곧 다시 1군단장에 취임했다. 국군이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렸을 때 김백일 장군은 낙동강 방어선 동측면(기계, 안강, 영덕, 포항 일대) 방어를 담당하여 적의 파죽 공세를 막아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 작전 후 김 장군은 패주하는 북한군을 추격하여 9월 30일까지 동부지역 38도선 이남을 완전 수복했다. 압록강 혜산진까지 진격했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동부전선에서 싸우던 김백일 장군 부대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김백일 장군의 국군 1군단과 알몬드 장군의 미 10군단은 흥남부두에 집결했다. 12월 10일부터 24일까지 계속된 흥남철수 작전에서 한미 양국은 1만5000명의 병력과 1만7000대의 차량, 3만5000t의 화물을 안전하게 철수시켰다. 이 와중에 전쟁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 펼쳐진다. 그것은 바로 부두에 몰려든 10만명의 북한 동포를 함께 피란시켰다는 것이다.
국가보훈처가 2005년 펴낸 《흥남철수작전 연구보고서》(김행복)에는 당시 미군의 입장과 태도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미 10군단 측은 피란민을 수송할 계획이 아예 없었다. 군은 군 작전에만 충실하면 될 것이고, 군 작전과 아무 관계가 없는 현지민 수송엔 개입하지 않으려 했다. 또한 전시에 민간인을 함정에 승선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확고한 입장이었다. 작전상 기밀유지와 오열(간첩) 방지 외에도 어려운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지 거주자를 무엇 때문에 이남 지방으로 수송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국군을 태울 자리 있으면 피란민을 태워 달라”
흥남철수에서 피란민을 가득 실은 채 거제도로 향하는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1만4000명이 승선했다.
미 10군단 통역이자 민사담당 고문관이던 현봉학씨도 피란민을 철수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알몬드 장군에게 여러 차례 건의했다. 하지만 알몬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김백일 장군이 지휘하는 한국군의 입장은 달랐다. 어떻게든 피란민을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당시 육군총참모장이었던 정일권 소장은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남겼다.
<“이봐 도대체 어떻게 돼 가는 판국인가?”(정일권과 김백일은 막역한 사이였다) 김 장군의 첫마디였다.
“이봐 일권이, 우리는 군인이니까 미군 친구들 덕분에 여길 빠져나갈 수 있겠지. 하지만 여기 북한동포들은 어디로 가나? 산으로 가나? 바다로 가겠나? 모두 이젠 꼼짝없이 죽었구나 하고 온통 아우성이야. 북괴 놈들이 똥되놈(중국군)과 함께 쳐내려 오면서 무지막지한 보복을 하고 있다는 거야.(중략)
그런데도 우리 군대만 빠져나가겠다는 건가? 나는 데리고 가겠어. 알몬드는 아마 못하게 하겠지. 군대 수송 때문에 안된다고 하겠지. 하지만 두고 보라고. 나는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동포들을 배에 태우겠어. 그러니 이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시끄럽게 굴면 잘 수습이나 해 주게.”>
정 참모총장은 12월 19일 1군단 사령부 피란민 대책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오갔다고 했다.
<김백일 장군: 민사 관계관은 끝까지 미 제10군단 민사부와 교섭하라. 수십만 명의 목숨이 달린 문제다. 정 못하겠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배를 갈라 보이라!
송요찬 장군: 우리 대신 피란민들을 배에 태워 보내는 방법은 어떠한가. 우리는 걷는다. 원산을 돌파해 나가는 것이다. 수도사단이 앞장서겠다.
백선엽 장군: 좋은 각오다. 정 안되면 나 자신도 그러할 각오로 있다. 묻겠는데 애들(장병)은 어떤 생각인가?
송요찬·최석 장군: 지금 지휘관, 분대장, 병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이다. 동포애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정 참모총장은 결의가 완강하기만 하던 알몬드 장군을 마침내 감동시켜 “이 얼마나 훌륭하고 아름다운 겨레 사랑인가. 좋습니다.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하고 지시를 내렸다고 회고했다.
송요찬 당시 수도사단장은 김백일 장군이 알몬드 소장에게 피란민 철수를 건의하던 장면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장군! 기억하시오? 함흥 점령 후 개최한 시민환영대회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모신 자리에서 장군께서는 함흥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미국 장군이 어찌 거짓을 말할 수 있소. 지금 여기 있는 동포들은 공산분자가 아닌 선량한 애국 동포들이며, 만약 이들을 버리고 떠난다면 이들은 공산군에 의하여 전부 학살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존재가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군은 이 동포들을 남기고 떠날 수 없으니 우리 한국군을 위한 선박에 이 동포들을 태워 주시고, 우리는 육로로 적진을 돌파하고 싸우면서 철수하겠습니다.”
이 말이 결정적으로 알몬드 장군을 움직인 것이다. 알몬드 장군은 한국군 장성들의 비장한 결의에 감동해서 가능한 한 많은 민간인을 미국 선박으로 철수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
흥남철수 때 배에 미처 타지 못한 사람이 더 많았다. 정일권 참모총장은 배에 미처 오르지 못한 사람들이 마지막에 울부짖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말하면서 김백일 장군이 목메어했다고 회고록에 썼다.
김백일 장군의 일대기를 소설로 쓴 한번웅씨는 책 후기에서 흥남철수 작전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의 짧은 생애 중, 가장 빛나는 장면은 흥남철수 작전을 손꼽지 않을 수 없다. 공식기록으로 20만명(유원식 소령도 20만명이라고 증언)의 북한 동포가 그의 민간인 철수작전에 힘입어 자유를 찾았으며, 그의 이러한 공헌은 역사가 존속하는 한 길이 빛나고 남을 것이다. 그가 이끌어낸 피란민 철수작전은 제2차 대전 후 팔레스타인에 찾아들던 이스라엘인들의 엑소더스에 비유되고 남을 것이다. 그것은 민족 이동이라는 물리적 의미보다도 정치적·군사적 승리를 확인시켜 준 것이었으며, 공산주의와의 이데올로기적 승리를 가져다준 역사적인 것이었다.>
김백일 장군은 1951년 3월 28일 중공군의 4월 공세에 대비해 여주에서 작전회의를 마치고 비행기로 돌아가는 길에 강원도 용평스키장 부근 계곡에 추락해 순직했다.
간도특설대와 간도토벌대는 다른 부대
전선에서 장병들을 격려하는 김백일 육군 1군단장.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김백일 장군은 대한민국 역사에서는 이순신이나 권율 장군에 못지않게 기려야 할 대상”이라고 말했다. “전쟁공로 전에는 건군의 공로가 있습니다. 흥남철수에서 민간인 피란은 그의 기개와 배짱, 동포애가 없었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대하드라마입니다.”
남 연구원은 “이런 동포애를 지닌 사람이 민족을 팔아서 일신의 영달을 추구하는 친일파의 길을 걸었겠느냐”며 “공산혁명을 위한 세력과 싸운 사람을 독립군을 토벌했다고 덮어씌워서 흠집을 낼 때 이득을 보는 세력이 누구인지는 자명하다”고 말했다.
최재식 ROTC 구국연합 기획국장은 “김백일 장군이 근무한 간도특설대와 간도토벌대는 엄연히 다른 부대”라며 “그런데도 김백일 장군을 친일파로 몰기 위해 종북(從北) 좌파와 일부 매체들은 이 두 부대를 같은 부대로 오인하도록 표현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 국장의 설명이다.
“독립군을 잔악하게 토벌한 것은 일본의 조선 침략군 19사단인 간도토벌대입니다. 물론 간도특설대도 일본 관동군의 지휘와 지원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전투 대상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또한 간도특설대의 주요 임무는 대부분 정보수집, 국경 내 반만주 항일 활동 저지, 동북항일연군에 대처하는 등 특수임무 집행이었습니다. 간도특설대의 주요 전투 대상은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지령을 받아 조직된 동북항일연군과 중국인민군의 전신인 팔로군이었습니다.”
최 국장은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는 간도토벌대가 조선독립군을 토벌하면서 1933년 초에 마지막으로 잔학한 행위를 한 것으로 나타난다”며 “간도토벌대가 독립군과 전투를 할 때 김백일 장군은 3세 혹은 16세 정도의 어린 나이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김백일 장군이 간도특설대에 있던 1940년대 당시에는 임시정부조차 이미 중경(重慶)에 가 있었고, 광복군도 그곳에서 창설되었습니다. 독립군과 직접 교전이나 토벌은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좌파들은 창설연도가 다르고, 활동한 시기와 종사한 업무가 다른 별개의 부대를 같은 부대처럼 혼동하여 주장함으로써 김백일 장군이 마치 독립군을 토벌한 것처럼 조작하는 전법을 구사합니다.”
최 국장은 “김일성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은 동북항일연군 시절 김일성을 만주에서 소련으로 쫓아내고, 6·25 적화 직전에 김일성을 북쪽 끝까지 몰아냈으니 김백일 장군을 이 세상 누구보다 미워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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