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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설야의 자부심의 근거
등록 :2006-02-16
김윤식/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김윤식 교수의 문학산책
우리 근대문학사의 연속성을 문제삼을진댄 가로 막아서는 두 가지 공간에 마주치게 마련이오. 이중어글쓰기 공간(1942. 10~1945. 8)이 그 하나. 다른 하나는 이른바 해방 공간(1945. 8~1948. 8). 국민국가의 연속성 문제에 비중을 크게 두는 시선에서 보면 앞의 공간이야말로 처치곤란한 대상이 아닐 수 없소. 암흑기라 하여 건너뛰어 버리기엔 이 공간에서의 글쓰기의 규모나 분량, 그 질적인 차이의 다양함이 강력히 저항해 오기 때문. 그 저항은 국민국가에 대한 수압이 낮아짐에 따라 증대되기 마련. 게다가 원리적으로 말해 그것은 글쓰기의 본질에 관련된 사항이니까. 이 공간에서 일본어로 글쓰기에 임한 바 있고, 화북 태항산 조선의용군 진지로 탈출했다가 해방 직후 귀국한 김사량(1914~1950)을 두고 이태준이 크게 비난했을 때, 김사량의 답변은 이러했소. “문화인이란 최저의 저항선에서 이보 퇴각, 일보 전진하면서 싸우는 것이 임무라고 생각합니다”(‘문학자의 자기비판’, <인민예술> 2호)라고. 말을 바꾸면 무엇을 어떻게 썼느냐가 논의될 문제라는 것. 또 말을 바꾸면, 조국 광복을 믿으며 붓을 표면에서는 꺾었으나, 골방 속으로 들어가 계속 글을 쓴 경우야말로 탈모할 대상이라는 것. 만일 그런 문학자가 있다면 손들고 나와 보라는 것. 그 앞에라면 자기는 무릎을 꿇겠다는 것. 이런 가파른 분위기를 알아챈 사회자 이원조는 “김사량 씨와 같이 연안으로 간 분도 있고 상인으로 혹은 광산으로 들어간 분도 있었지요”라고 얼버무림으로써 ‘일동웃음’으로 넘어서고 있습니다.
친일문학을 논의할 적이면 나는 이 장면을 자주 상기하오. 김사량을 공격한 이태준, 그는 어째서 일본어로 소설 <제1호선의 삽화>(1944. 9)를 썼던가. 한편 일본어로 거침없이 소설을 썼던 한설야(1901~1976)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소. “일본어로 쓴 소설의 내용에 있어서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안 될지라도 일본어로 붓을 들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자기반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생각합니다”라고. 대체 이렇게 말하는 한설야의 ‘거침없음’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이 한동안 한설야 연구에서 내가 몰두한 화두였소.
한설야의 일본어 소설은 다음 네 단계로 살펴지오.
(A) <합숙소의 밤>(1927), <검은 세계>(1927) 등 단편. 연도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듯 카프문학 초창기에 이미 그는 일어로 소설을 썼소. 그런데 기묘하게도 이들 작품은 조선어로도 동시에 썼소. ‘나는 조선어로도 일본어로도 쓸 수 있다’라는 자부심의 소산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일이 벌어졌으랴. 당초부터 그는 이중어글쓰기에 나아갔음이 판명되오.
(B) <하얀 개간지>(<문학안내>, 일본문예지, 1937. 2). 북조선 지역 일본인 입식자(入植者)의 횡포 속에 놓인 조선 청년의 대응방식을 다룬 작품.
(C) 장편 <대륙>(<국민신보>, 1939). 일본 청년 오야마(大山)와 동급생이자 진작부터 아비를 따라 간도에 와서 개척민 선봉으로 있는 일본 청년 하야시(林)를 등장시켜 만주 식민지화 과정을 펼쳐 보이고 있는 <대륙>은 그야말로 거침이 없지요. 관동군을 믿고 날뛰는 일본 청년 두 사람의 무협지라고나 할까요.
(D) <혈(血)>(<국민문학>, 1942. 1)과 <영(影)>(<국민문학>, 1942. 12).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조선인 화가와 일본인 동창 여자의 사랑을 다룬 것이 <혈>이며, <영> 역시 젊은 날 유학에서 돌아온 조선 청년이 일본인 처녀를 그리워한 사연을 다룬 것. 그러니까 가해민족과 피해민족 사이의 사랑이란 실상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안타깝게 회고한 작품이지요.
이상과 같은 검토에서 내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중어글쓰기 공간’과는 무관한 자리에 한설야의 글쓰기가 놓였다는 점이 그 하나. ‘나는 일본어로도 쓸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한설야 글쓰기의 특징이자 자존심의 발로인 셈. 다른 하나는, 이 점이 중요한데, 만주 및 중국을 다룬 일본 작가들의 수준을 비판하기. 주지하는바 당시 일본 저널리즘 및 문단이 중국 대륙 경영이라는 국책사업에 크게 들려 있었소. <보리와 병정>(히노 아시헤이(火野葦平), 1938), <황진>(우에다 히로시(上田廣), 1938) 등으로 대표되는 일본작가들이 쓴 대륙문학이란, 한설야의 시선에서 보면 매우 부실하다는 것. 어째서? 그들이 중국 사정에 어둡기 때문이라는 것(한설야, <대륙문학 따위>, <경성일보>, 1940. 8). 뿐만이 아니오. 중국 예단(藝壇)의 고수 5명을 인터뷰까지 한 한설야였소(<연경 예단 방문기>, <매일신보>, 1940. 7). 요컨대 자기만큼 중국을 잘 아는 문인이 없다는 것. 그가 형을 따라 일찍이 중국 땅에서 헤맨 바 있음은 만주 배경의 초기작 <합숙소의 밤>에서도 알 수 있지요. 한설야의 일본어글쓰기엔 이처럼 남다른 자부심이 작동되어 있었소. 이 자부심과 자존심도, 해방 공간에서는 거침없이 청산하겠다는 것. 여기에 또 다른 그의 자부심이 읽혀지오.
북한문학 60년을 문제삼을 때 그 전반부는 한설야가 주도했지요. 주체문학론 이후 그는 숙청되었으나, 훗날 복권되었다 하오. 듣건대 혁명열사 묘역에 그도 수용되었다 하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02868.html#csidxbb5298c2e31d17e9c96cc71823d79a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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