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수 국무총리˝ 정일권(丁一權) - - 영남신문
"최장수 국무총리" 정일권(丁一權)
친일, 사생활 문제 등 영욕의 삶을 살다간 정일권은 역대 대한민국 최장 재임 국무총리였다. 1964년 5월부터 1970년 12월까지 무려 6년 7개월을 국무총리로 재임 했다.
정일권(丁一權)은 1917년 11월 21일 러시아 연해주의 니콜리스크(현재의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났다.(함경북도 경원에서 출생했다는 설도 있음)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1935년 일본이 만주국(滿洲國)에 세운 초급장교 양성기관인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 5기)에 합격해 1937년 졸업한 뒤 성적 우수자로 추천되어 일본육군사관학교로 편입하게 됐는데, 보병에서 기병으로 병과를 바꿈에 따라 1년간 만주군 기병훈련소를 거치느라 동기생들보다 한 기수 늦은 55기로 편입하여 1940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일본군에서는 일본의 식민지 군대인 만주국군(滿洲國軍)의 대위까지 진급하였다. 1942년에는 모교인 광명중학교를 방문해 후배들에게 만주국 군관으로 입대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이후 ‘나카지마 잇켄(中島一権)’으로 창씨개명하고 만주군 헌병 장교로 근무했다. 만주국 헌병 상위(대위)로 진급한 후 간도헌병대 대장으로 근무하다가, 고등군사학교에 입교하여 졸업 직전 일제가 패망하여 만주국은 해체되었다.
소련군이 만주국의 수도였던 신경(현 장춘)을 점령하자, 만주군과 관동군 출신의 조선인 군 400여명을 모아 '신경보안사령부'를 만들어 사령관을 맡았다. 후에 “김석범”에게 사령관 직을 넘겼지만, 소련군 NKVD본부로 연행됐다.
그 후 모스크바로 가서 6개월간 사상 재교육을 받고, 북한으로 가서 북한 인민군 창설에 종사할 것을 요구받았으나, 재교육 중 소련군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기차를 타고 소·만 국경으로 이동하던 중에 탈출하여 하얼빈, 평양, 개성을 거쳐 서울로 들어왔다.
서울에 온 정일권은 1945년에 미군정이 설립한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하여 1946년 1월 졸업과 동시에 한국육군의 전신인 조선국방경비대의 정위(대위에 해당함)로 임관했다.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출신 중에서 기수빨로 따지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높은 편이였다. 이 때문에 만주군 출신 장교들의 대부로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특히 만주국육군군관학교 후배인 박정희를 위기 때 구해 준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 대사의 한국군 동향 보고에 의하면 한국군 내 파벌에서 정일권은 함경도 파벌을 이끌고, 백선엽은 평안도 파벌을 이끌었다고 한다.
정일권은 1946년 12월에 경비대 제4연대의 연대장이 되었으며, 1948년 8월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 경비대가 대한민국 육군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짧은 기간중에 급속히 진급, 1949년 2월에 육군준장이 되었고, 그 해 12월 육군참모차장 겸 행정참모부장이 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한 뒤 채병덕(蔡炳德) 육해공군총사령관이 전사하자, 1950년 7월 육군소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육해공군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51년에 육군중장으로 진급한 후 미국에 파견되어 미국 군참모대학에 입교해 1952년 7월에 졸업했다.
귀국 뒤 1954년 2월 육군대장으로 진급했고, 그 해 6월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1956년 연합참모본부 총장이 되었으며, 1957년 예편되었다. 예편한 뒤에는 외국의 여러 국가에서 외교관을 지냈다.
이후 1963년 12월 정일권은 박정희 정권의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5개월 뒤인 1964년 5월에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한일회담 당시에는 국무총리로서, 외무부장관까지 겸임하며, 그의 재임시절에 “한일기본조약”을 맺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1966년 한국비료공업(당시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국회에서 당시 김두한 의원에게 똥물(국회 오물 투척사건)을 맞았다. 그 후 1970년 12월 ‘정인숙 살해사건’으로 정국이 소란한 가운데 국무총리직을 사임했다.
1971년 7월에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1973년 2월의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강원도 속초-인제-고성-양양 선거구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제9대 국회의 개원과 함께 국회의장(국무총리에 이어 국회의장 까지 역임한다)에 선출되었으며, 1979년 초까지 국회의장직을 계속 맡았다.
1979년 2월에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속초-인제-고성-양양 선거구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1980년 5.17 내란으로 국회와 정당이 강제로 해산되자 정계에서 은퇴했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하 에서는 국정자문위원, 자유수호구국총연합회 회장, 한일협회 회장 등으로 활동했고, 1989년 1월부터 한국반공연맹 이사장을 맡았고, 2월부터는 그 후신인 한국자유총연맹 출범을 주도하는 등 관변단체의 장을 맡았다. 1992년에는 민주자유당 상임고문에 임명되기도 했다.
정일권 하면 가장 논란거리로 세간의 관심인 “정인숙 살해사건”에 정일권이 관련되어 있다고 의심을 받고 있다. 당시 나라를 뒤흔든, 정인숙 아들의 생부가 박정희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정인숙의 정부는 정일권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정인숙 피살사건(鄭仁淑 被殺事件)은 제3공화국 당시의 의문사로 고급 요정 종업원인 정인숙이 교통사고를 가장한 사고에 의해 암살된 사건이다. 1970년 3월 17일 밤 11시경,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근처 도로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를 가장한 총격 살인사건이었다. 피해자 정인숙(본명: 정금지)은 총상으로 사망하였고 그의 차를 운전하던 넷째 오빠 정종욱은 넓적다리를 관통당하였으나 생존해 있었다. 정종욱은 택시 기사에게 도움을 청하여 구조되었다.
정인숙은 당시 출산한 아이 문제로 정부 고위층과 갈등관계에 있었고, 신민당은 이 사건의 배후로 정부 고위층의 개입 의혹을 제기했으나 유야무야 묻혀졌다.
부상당한 사내는 정종욱(당시 34세), 숨진 여인은 정인숙(당시 25세)으로 두 사람은 남매 관계로 밝혀졌다. 당시 26세였던 정인숙에게는 3살 된 아들이 1명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아이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당시 정부의 한 유력인사가 지목되기도 했다.
고위 공무원의 딸로 태어나 대학을 중퇴하였으며 여러 명의 친오빠가 있었다. 그 뒤 정인숙은 당시 한일회담도 이루어진 선운각 등 최고급 요정에서 호스티스로 일하고 있었다.
나중에 정인숙의 집에서 발견된 정인숙의 소지품에선 정관계 고위층의 명함 26장이 포함된 33장의 명함이 쏟아져 나왔는데, 명단에는 박정희, 정일권, 이후락, 김형욱 등 대다수 5.16 주체세력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경찰 수사는 지지부진해졌고 언론 보도가 수사를 대신하게 되었다.
항간에선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나훈아의 노래를 개사한 ‘박의 소생’이라는 번안 가요가 퍼질 만큼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청와대 미스터라고 말하겠어요…나를 죽이지 않았다면 영원히 우리만이 알았을 것을 죽고 보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소”
사실 정일권은 잘 알려진 "정인숙 사건 외"에도 사생활이 매우 문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정일권은 본부인과의 사이에는 아들이 없는 것을 핑계로 많은 여자들과 외도를 했다고 한다. 아무튼, 아내와 사별한 뒤 29세 연하의 여성과 재혼했는데, 그녀도 딸의 친구였다는 말이 있다.
어느 한 재미동포에 의하면 “정일권은 정관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생식능력이 없어서 정인숙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그 재미동포도 그 말을 믿어서 정인숙의 아들을 박정희의 사생아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훗날 정일권이 재혼을 해서 멀쩡히 아들을 낳는 걸 보고 정일권의 뻔뻠함에 황당함을 금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무튼, 정인숙의 아들이 성장한 이 후,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확인소송”을 냈는데 정일권 측에서 소극적으로 나왔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정인숙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 보다는 정일권 총리와 더 연관이 있어 보인다.
정일권은 정인숙 사건이 터지자 청와대로 달려가 “각하, 살려 주십시오”라고 빌었다. 이에 박 대통령은 “일국의 총리가 여자 스캔들 때문에 수사를 받으면 나라가 얼마나 상처를 받겠나. 국격(國格)이 걸린 문제야.”라며 대통령이 도와서 사건을 덮어 깔끔하게 정리 해줬다.
정일권은 박정희 대통령 18년 기간 중 고위직으로 장수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외무부 장관 – 국무총리 – 공화당 의장 서리 – 국회의장 등 가장 오랫동안 권력을 누렸던 인물이다.
정일권은 어떻게 해서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얻은 것일까.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저돌적 공격성을 보여줬다면, 비서실장 이후락은 일을 꾸미는 재기가 뛰어났으며, 공화당 의원 김성곤은 돈과 조직을 모으는 재능이 있었다.
정일권은 이들과 비교해 딱히 이렇다 할 장점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가 관운(官運)이 특별한 건 분명했다. 무슨 일을 시키더라도 무난하게 처리하고 요령도 좋았다. 속을 드러내지 않고 겉으로는 기가 막히게 점잖고 온화한 사람처럼 비춰졌다.
자리에 대한 집념이 강했지만, 당시 대통령 측근들로부터 경계의 대상이 될 만큼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다시 말해 상대방에게 권력욕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다.
정일권은 인생의 위기가 닥칠 만한 지점에서 묘하게 빠져나가 자리까지 얻어 가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마디로 ‘처세의 달인’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과 동갑이자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의 동창인 정일권을 끝까지 챙겨줬다. 정일권은 박정희 대통령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할 처지였다.
1994년 1월 17일 하와이에서 사망했으며, 현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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