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선생이 아니나 다를까 나서서 “연구자의 죽음”을 선고했고, 노혜경씨도 숟가락을 얹어 내가 “학문이 아니라 일본국을 위한 정치 활동을 했다”고 스파이취급을 했다.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알지만 두분 다 너무 나가신 거 같다.
손희정씨와 달리 두 분 다 한때 안면이 있었던 사람들이라 안타까운 마음. 최근 선거 때문에 지친 마음을 나에게 풀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대상에 대한 “정밀고찰”은 연구자의 의무 맞다. 나 역시 그렇게 연구를 해 왔다.
그런데, 일본이든 한국이든 관료 사회에 문제가 있는 건 맞지만 그 모두가 “파렴치”하다는 박선생의 생각이야말로 “정밀고찰”과는 한참 먼 결과를 낳을 게 분명하다. 한 시대 제도의 문제를 본질주의적으로 판단하는 편견이야말로 정밀연구를 방해한다.
(수 없이 한 소리라 다시 하고 싶지도 않지만), 일본에 대한 나의 스탠스는 비판과 이해다. 전자는 연구자로서, 후자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의 입장이다. 방사능 연구자가 아닌 내가 “믿고 싶다”고 말한 건 연구자로서가 아니라 시민으로서 일본과 만나온 40여년의 경험에서다. 물론 그 입장은 겹치거나 교차하기도 한다. 
박 선생은 시민으로서의 생각을 연구자로서의 소회로(나는 내가 직접 말할 자격이 없다고 분명히 썼다) 바꿔치기해 비난했다. 내가 연구하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연구자로써 말할 수 있겠는가. 
내 안에선 신뢰와 비판이 공존하고 대상에 따라 달리 등장한다. 박선생 역시도 내 책을 본 사람인데, 반이 일본비판이란 사실에는 여전히 함구한다. 논문의 경우는 대부분 비판이다. 대상을 본질주의화하고 위치를 바꿔치기 하는 건, 선동에 자주 쓰이는 수법이다. 
물론 법정은 실제전쟁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무력전쟁과 감정 전쟁을 구별해서 썼고, 재판이란, 과정에서도 결과에서도 서로의 감정은 물론 개인적으로는 인생이, 국가적으로는 명예가 크게 손상되는 사태다.
그걸 박선생이 모르는 건 법정에 가보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겠다. 가본 적이 있는 데도 그런 생각을 못 했다면 깊이 고찰하지 않은 것을 터이다. 나는 여러분들 덕분에 고찰할 기회를 가졌다.
일상적으로 싸우다가도 대화가 되지 않으면 가는 곳이 법정이다. 하지만 법에 호소해도 해결되지 않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고, 그건 법정이라는 곳이 자신에게 유리한 온갖 “법”(기존 사고틀)을 동원해 그저 “이기”는 일, 달리 말하면 상대를 지게 하는 일에 안간힘을 쓰는 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의로운 판결이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를 우리는 과거의 역사에서 수없이 봤다. 그런데도 법정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건, 그런 역사를 잊은 결과일 것이다. 
일본정부의 자료를 제공 하면 “대변인”인가? 아무도 참조하지 않는 자료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걸 아는 일본 전문가로서, 이해를 돕기 위해 제공하면 친일파인가? 한일합의때 나는 놀랐고, 그리고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사반세기에 걸친 갈등이 차세대의 우애를 심각하게 해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필요한 절차를 생략했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찬성하신 할머니도 있고(다음날 번복한 건 무슨 이유일까?), 결과적으로 7,80퍼센트 할머니들이 받아들였다. 
페미니스트 노선생은 그런 할머니들을 부정하는 건가? 그들의 주체성을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무시하는 건가? 덕분에 그 분들은 한국 사회에서 지금 있을 공간을 내어 받지 못하고 있다. 할머니들을 무시하는 건 도대체 누구인가. 
자신과 다른 이해를 말하면 곧바로 스파이로 모는 위험한 사람이 페미니스트일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연구자”로서의 인정을 박선생에게 받을 생각은 없으니 박선생은 안심하시라. 죽음의 선고는 내가 신뢰하는 있는 이가 해야 효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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