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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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king of Korean Christianity.
한국 기독교 형성사(옥성득 지음/새물결플러스)
부제:한국 종교와 개신교의 만남 1876-1910
부제를 보면 바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 종교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어떻게 정착하게 되었는가를 연구한 귀한 책이다. 서론에서는 비교적 단도직입적으로 한국 전통 종교에 대한 선교사들의 이해에 어떤 문제점이 있었고 이것이 한국 기독교 정착에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현재 기독교 진보의 입장에서 초기 선교사들의 역할과 기독교 정착과정을 비판하는 내용들이 어느 정도 정당한가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수많은 각주가 빛을 발한다. 존경하는 옥성득 교수님의 평생을 바치다시피 한 깊이 있는 연구 결과들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 읽는 내내 감탄하게 만든다. 1차 자료에 접근하고 분석해낼 수 있는 학자의 역량은, 제한된 유입 경로와 인물에 국한되어 담론의 주류를 형성해 생겨난 국내 한국교회사 연구들의 여러가지 곡해와 편향된 이해들을 뛰어넘어 합리적이고 공정한 시각을 갖도록 이끌어준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수작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서론 부분만 해도 한 권의 두꺼운 책으로 나왔어야 할 내용들이다. 지면 때문일 수도 있고 저자 옥성득 교수께서 더 깊은 논의가 당장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어떤 한계성을 직감하셔서인지는 몰라도 서론의 주제들 안에 수많은 논제들을 집약하신 듯한데 각주 한 개만 놓고도 논의를 해보거나 연구를 해봄직한 내용들이 여럿 있었다. 한국 신학생들 중에 이런 좋은 선생님 밑에 가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있기를 나타나기를 바랄 뿐이다.
신학적 지평이란 무엇일까? 책의 내용은 읽어보면 알 것이기에 내용을 가지고 따로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그 대신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 더 중요하기에 몇 자 더 적어본다.
책을 읽어가면 갈 수록 곳곳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논점들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한국사적 시대 상황과 기독교의 관계, 기독교 안착의 과정에 영향을 끼친 사회, 정치적 연관 관계, 여러가지 국제 관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던 우리 시대의 고통의 역사와 기독교의 변질 등 좀 거대하지만 군침이 도는 주제들을 통합적으로 연구한 논문들이 더 많이 나오면 좋겠다는 목마름이 느껴졌다.
물론 이 책은 제목처럼 1900년대 초까지의 한국 기독교의 형성사를 다루고 있다. 근대사와의 연결은 차후에 또 연구가 되면 좋을 일이겠다. 다만 이 책의 큰 매력은 지금의 한국 교회를 바라보는 일반의 시선에 중요한 변곡점을 제시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근대사와 기독교의 발전 역사를 다룬 책에 대한 목마름을 느끼게 만드는 점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책이 줄곧 견지하고 있는 한국 기독교 역사의 왜곡 교정이라는 중요한 키를 가지고 열어젖힐 필요가 있는 근대사적 한국 기독교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선이라는 목마름이다.
우리 민족의 종교성에 대한 선교사들의 초기의 오해와 다르게 시간과 헌신에 따라 그 이해가 달라지면서 우리가 얻은 것은 더럽고 게으른 민족성과 한민족의 종교성에 대한 재고였다. 오히려 한민족의 영적 깊이에 대한 놀라움과 종교적 가능성에 대한 선교사들의 발견이 무색할 정도로 한국 기독교는 엄청난 발전사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우리 종교에 대한 자신감을 많이 상실한 상태다. 책을 읽으면서 자꾸 느끼게 되는 아픔이다. 본래 얼마나 치열하게 신학적으로 논쟁했었고 투쟁해왔던 역사인지 모른다, 우리 기독교는.
하지만 지금은 그런 역사가 무색할 정도로 기독교의 입지가 추락했고 영성은 혼란 속에 있다. 이 책은 저자 옥성득 교수께서 한국 기독교라는 테이블 위에 무심한 듯 툭! 던지는 묵직한 돌멩이 같은 책이다. 제대로 알고 배웠어야 할 역사가 이런 것이고, 우리가 오래 전에 시작했던 것들은 이런 것인데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 아프게 담긴 것이다.
신학생들은 이 책을 꼭 읽어봐야 한다. 원서도 좋고 논문 섭렵도 좋다. 열심히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의 역사는 이 책을 읽어보면서 더 잘 알게 되겠지만 우리 안에 들어옴으로써 우리만의 것이 되었고 우리의 방식과 우리의 영성으로 받아들인 면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현재 우리 기독교의 얼굴이고 정체성이다. 그래서 이 책은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게 만들고 거기서부터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신학생들은 이 책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
일반인들도 이 책을 읽기에 큰 부담이 없을 것이다. 다만, 중간에 각 챕터별로 용어와 관련된 설명은 좀 복잡하고 어려울 수 있으니 두어 번 숙독해야 할 것 같다.
[난이도 ***** 기준]
-신학생:***
-목회자:**
-일반인:*****
*표지를 벗기면 느낌 좋은 하드커버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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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옥성득, 『한국 기독교 형성사』를 읽고(류대영)
2020년 3월 18일
좋은나무 북리뷰
https://cemk.org/16233/
『한국 기독교 형성사』는 대중을 위한 책이 아닌 학술서다. 따라서 기독교, 한국 개신교 역사, 해당 시기의 한국사 등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는 사람이 읽기에는 좀 버거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한국 개신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 책을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책을 통해 독자들은 북미 선교사들이 가지고 온 개신교가 한국의 정치, 문화, 언어, 종교와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상호 반응했는지 돋보기로 보듯 명확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본문 중)
류대영(한동대 교수, 역사학)
옥성득, 『한국 기독교 형성사』
새물결플러스 | 2020. 2. 27. | 768쪽 | 42,000원
그동안 많은 서평을 쓰고 논찬을 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그런 일들이 사실은 자기 자랑의 또 다른 방식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논문과 책을 내는 일도 다르지 않다. 서평을 쓰거나 논찬을 하고 나면, 늘 후회가 되고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 그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하여, 얼마 전 나는 다른 사람의 글이나 책 평가하는 일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이번에 기윤실로부터 옥성득 교수의 새 책 서평을 부탁받고 고사하다가 결국 글을 쓰게 된 것은 약간의 의무감 때문이다. 옛 친구가 좋은 책을 내었으니 소개하여 많은 사람이 읽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 글은 일종의 추천사이니 좀 더 비평적인 평가는 다른 전문가들의 의견을 참고하기 바란다.
옥성득 교수는 한국 개신교 초기 역사에 관한 최고 권위자 가운데 한 명이다. 그가 영문과 학부생 시절부터 이만열 선생님 문하에 들어가 선교사 자료를 읽기 시작했으니, 벌써 35년 넘게 한국 개신교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셈이다. 원효로 자취방에서 해석은커녕 무슨 글자인지 알기도 어려운 헨리 아펜젤러의 손 편지 복사본을 해득하느라 끙끙대던 그의 모습이 생생하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그는 초기 미국(북미) 선교사 및 영미 성서공회 관련 일차자료를 가장 많이 읽고 정리한 학자가 되어, 그 분야에서는 비견할 수 없는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한국 개신교 역사 연구의 중심지는 한국이다. 그것은 한국문학과 한국역사 공부의 중심지가 한국인 것과 다르지 않다. 그만큼 한국에 연구자가 많고 자료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물론 해외에도 한국의 역사, 문학, 종교를 공부하는 몇몇 훌륭한 연구자들이 있지만, 학문이 개인이 아니라 집단에 의해 발전하는 것임을 생각할 때, 그들의 기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옥성득 교수는 매우 예외적인 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해외에 있으면서도 국내 연구에 전혀 뒤지지 않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많은 선도적인 연구를 해왔다. 무엇이든, 그가 쓴 글과 책은 믿고 읽어도 된다.
『한국 기독교 형성사』는 옥성득 교수의 35년 연구 역량을 집결한 매우 탁월한 연구서다. 그동안 옥 교수의 공부는 크게 세 가지 분야로 진행되었다. 첫째, 호러스 언더우드나 사무엘 모펫, 그리고 영미 성서공회 등에 관한 일차자료 편집·번역서; 둘째, 평양대부흥이나 초기 한국 개신교 역사에 관한 통사류 혹은 대중적 서적; 그리고 셋째, 한국이나 해외에 발표한 여러 학술 논문들이 그것이다. 이번에 출간한 『한국 기독교 형성사』는 박사학위 논문(2002)을 보완하여 출간한 영문 단행본(2013)의 한국어판이다. 굳이 말하자면 이 책은 세 번째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세 분야의 연구 역량이 집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책의 기본 틀은 박사학위 논문에서 완성되었지만, 그 이후 수정 및 보완하여 완성된 것이다. 약 18년 전에 쓴 박사학위 논문에 기초한 책이라 너무 오래전의 연구 결과가 아닌가 싶을 수도 있지만, 그만큼 공을 많이 들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학술서 한 권을 주요 출판사를 통해 내는 일, 특히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하여 단행본으로 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는 사람이라면, 박사학위 논문과 원본 영문 책 사이의 10년 간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이다.
ⓒ새물결플러스.
이 책은 『한국 기독교 형성사』라는 제목이 붙어서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 역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공시적(共時的; synchronic) 성격을 가진 역사 연구다. 물론 각 장은 통시적 접근을 하지만, 7개의 장들은 각각 독립적 주제를 다루며, 서로 통시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이 책은 숲이 아니라 여러 나무들을 자세히 보여줌으로써 숲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도와준다. 책의 주된 관심은 일본 강점 이전의 초기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선교사들이 전한 개신교와 당시 한국의 종교전통이 어떻게 만났는지 살펴보는 데 있다. 구체적으로 책은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다룬다. ‘하나님’이 어떻게 개신교의 신(神) 명칭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가(제1장). 정감록 해석과 십자가 사용이 개신교 수용에 어떻게 기여했는가(제2장). 샤머니즘과 축귀(逐鬼) 의식을 선교사 및 개신교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가(제3장). 유교적 조상제사가 어떻게 여겨졌고 기독교적 추도예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제4장). 초기 예배당들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특징이 있는가(제5장). 한문 및 한글 기독교 문서(전도서, 성경, 찬송)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제6장). 그리고 길선주의 도교적 배경은 대부흥 과정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어떤 역할을 했는가(제7장). 이런 주제들을 다루기 위해 저자는 많은 일차자료(영문, 한글, 한문)를 섭렵했는데, 그 분량과 범위의 방대함이 놀랍다. 거기에 더하여 다양한 해외의 이론 및 국내외 연구 결과를 참고했다. 자료, 특히 일차자료의 충실한 검토야말로 역사 연구의 완성도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임을 생각할 때 이 책은 역사 연구의 좋은 모범을 보여 준다 하겠다.
『한국 기독교 형성사』는 대중을 위한 책이 아닌 학술서다. 따라서 기독교, 한국 개신교 역사, 해당 시기의 한국사 등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는 사람이 읽기에는 좀 버거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한국 개신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 책을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책을 통해 독자들은 북미 선교사들이 가지고 온 개신교가 한국의 정치, 문화, 언어, 종교와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상호 반응했는지 돋보기로 보듯 명확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풍문으로, 교회 모임에서, 혹은 인터넷에서 접할 수 있는 정보로 알 수 있는 것과 엄밀한 학문탐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 사이의 거리는 아득히 멀다. 한국 개신교 역사를 오랫동안 공부한 나는 이 책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다. 책이 다루는 주제들에 관해 문외한이 아니었던 나조차도, 막상 책을 읽으며 그동안 몰랐던 것이 많았음을 새삼 알게 되었다. 아마 대부분의 일반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며 이루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접하게 될 것이다. 공부의 시작은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데 있다. “오늘의 것 가운데 과거에 씨앗이 뿌려지지 않은 것은 없다.” 역사학의 오랜 금언(金言) 가운데 하나다. 과거를 알면 오늘을 이해할 수 있으며, 미래를 짐작할 수 있다.
한국 개신교는 이제 지도자들의 자기반성과 자기개혁을 통해 새로운 모색을 도모하기에는 너무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 평신도들의 대대적인 자각과 깨어있는 행동만이 희망이다. 자각은 정체성의 인식에서 오며, 올바른 정체성은 자신의 역사적 좌표(座標)를 정확히 깨닫는 데로부터 시작한다. 역사적 정체성을 알기 위해서라면, 좋은 역사책 읽는 것보다 더 좋은 길은 없다. 『한국 기독교 형성사』는 한국 개신교의 오늘이 걱정되고 내일이 궁금한 모든 사람이 읽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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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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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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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한국 기독교 제대로 알아가기
성경해석과 설교에서의 가장 기본적인 뼈대는 이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본문이 기록된 당시의 정황(context) 가운데 본문(text)은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으며, 그 메시지를 현재의 정황(context)에서 우리는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본문이 기록된 당대의 정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고대 근동과 이스라엘의 역사와 문화, 정치, 문학 등을 연구한다. 우리 삶의 터전을 이해하고 현재의 정황에서 우리 삶에 적실하게 본문의 메시지를 적용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삶의 맥락을 분석한다.
현재 삶의 정황을 분석할 때에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자신이 속한 나라의 초기 기독교 역사일 것이다. 그 역사를 이해해야 이스라엘의 종교에서 그 나라의 종교로 어떠한 토착화의 과정을 거쳤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공상태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며, 현재에도 우리의 의식과 세계관 한가운데 여전히 우리나라 고유의 정신과 정서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초기 기독교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 아주 귀한 책이 출간되었다. 새물결플러스에서 나온 『한국 기독교 형성사』는 부제에서 드러나듯 1876년부터 1910년까지 한국의 종교와 개신교의 만남 가운데 어떠한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했는지를 말해준다.
머리말에서 저자가 밝히듯 이 책의 1장에서 3장은 삼위일체의 한국적 이해를 다룬다. 1장은 하나님이라는 용어가 어떻게 정착해갔는지, 2장은 한국인이 이해한 십자가의 이미지를 통해 발전해 나간 메시아상과 천년왕국상을 조사한다. 3장은 한국 개신교에서 샤머니즘과의 관계를 분석하고 그것의 갈등과 협상을 토론한다.
4장에서 7장은 더욱 세부적인 사건들을 다룬다. 4장은 제사 문제, 5장은 한국 교회의 예배당의 특징과 발전 과정, 6장은 한문 문서와 한글 번역, 7장은 평양의 부흥 사건을 해석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미국과 중국, 그리고 한국의 종교와 문화 가운데에서 발생한 독특한 한국 기독교의 발생과 형성 과정을 서술한다.
이 책의 특징은 역사적 사건들의 객관적 서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다채로운 정황과 입체적인 해석을 곁들이고 있다는 데 있다. 즉 한 사건의 원인과 그 과정, 그에 따른 영향력 등을 상세하게 기술하며, 그 사건을 신학적이고 교회론적이며 정치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또 다른 특징은 풍부한 원자료들을 배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존에 접하지 못했던 초기 한국 기독교의 풍부한 자료들을 직접 대할 수 있다. 이는 독자들이 함께 공동 해석 작업에 동참하여 당대의 분위기와 맥락 등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초기 한국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책은 특히 초기 한국 기독교의 형성 과정에서 선교사들의 세계관과 신학의 형성과 변화의 과정을 알 수 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그릇된 정보들로 인해 그동안 잘못 이해하고 있었거나 대충 알았던 사실들에 대해 정확하게 교정할 수 있다.
우리는 풍성한 자료와 상세한 설명, 다양한 해석 등을 통해 초기 한국 기독교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 이야기 곳곳에서 느껴지는 감동은 덤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얼마나 큰 수고와 노력을 했는지를 알 수 있고, 앞으로 많은 목회자와 신학생, 성도들이 그 배려 가운데 큰 도움을 받을 것 같다.
한국에는 종교가 없다"는 말은 한국인에게 종교라는 인식이나 개념 자체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오래된 종교들이 쇠퇴해서 사람들을 사로잡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선교사들의 눈에는 종교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이 점을 의도적으로 강조했는데 이는 한국은 무종교 상황이므로 기독교 선교가 정당하다는 주장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 P60
이 논쟁은 한문 용어 대 한글 용어의 대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울의 교회연합 정신을 가진 보다 포용적인 집단과 평양에 중심을 둔 개신교의 정체성을 강조하려는 ‘극단적 개신교‘ 집단 간의 갈등이었다 - P136
스코트 부인은 한국 개신교의 놀라운 성장의 원인을 한국인의 내면에 자리 잡은 유일신론으로 보았다. 한국인이 그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다면 결코 일본의 물질주의나 다신교인 신도(神道)에 만족할 수 없었다. 한국인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한국의 역사와 언어와 영성에 밀착되기를 원했다. 기독교의 하나님 신앙은 일본의 군국주의와 물질주의에 맞선 한국의 민족주의와 영성주의에 연결되었다 - P177
1903-08년 부흥운동이 개신교회를 휩쓸 때, 교회의 십자가와 십자기는 다양한 의미- 구속의 장소, 난민의 피난처,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요새, 선교사의 치외법권으로 보호 받는 정치적인 힘, 메시아 도래를 예견한 전통 예언의 성취, 서구 과학과 기술, 한국의 민족주의-를 지녔으며, 이들은 상호 보완적으로 공존했다 - P274
서양 의학이 콜레라균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은 한국인 회심자들의 마음에 안정을 주었는데, 이는 더 이상 신령에게 벌을 받거나 질병 앞에 무기력하다고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령에 대한 두려움은 사탄 마귀에 대한 두려움으로 대체되었고, 세균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이길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 P295
북미 선교사는 한국인과 한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지만 동시에 한국의 종교문화적 환경, 특히 샤머니즘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선교사들이 일종의 세계관적 회심을 경험했다고 하겠다. 귀신들림 현상에 관한 선교사들의 증언은 종교 개념과 사고방식 사이의 상호작용을 집약적으로 보여주었다 - P334
유교의 제사가 족벌•계급•성을 차별하는 기제로 작동했다면, 기독교의 예배는 한 하나님 앞에서 평등함을 드러내는 계급 철폐의 상징이었다. - P382
한국교회는 유교의 오륜과 수신의 법도를 기독교 윤리로 수용하고 실천했다. 교회 지도자들은 죽은 조상의 영혼 대신 살아 있는 부모에게 효도할 것을 강조했다. 죽은 조상에게 드리는 죽은 제사 대신 살아 계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산 제사‘로 불렀다. 한국교회는 부모 생전에 효도할 것을 강조함으로써 유교도들의 박해와 반대를 다소 경감시키고 한국인의 도덕성에 호소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제사를 십계명의 제1, 제2계명 측면에서만 검토한 것이 아니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의 측면에서 바라보았다. 그것은 성경에 근거한 효도의 의무였다 - P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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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찌모찌 2020-04-18 공감(17)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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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산 기독교의 형성
1.
한국의 무교회주의자이자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겠다며 <성서조선>지를 창간하였던 김교신은 '조선산 기독교'라는 말을 남겼다. 이는 해외의 선교사들로부터 이식된 개신교가 아니라 조선인의 주체성이 담보되며 "김치와 된장 냄새가 나는" 기독교이다(그럼 루터의 신학에서는 독일산 맥주의 냄새가 나나?). 요는 서구의 종교인 개신교를 조선의 문화와 풍토 등에 맞춰 주체적으로 수용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1960년대에 더 강화되어 초기 개신교 선교를 "사상적 식민지적 예속"이라 부르며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거나 해방신학,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에 영향을 받아 윤성범이나 민중신학의 안병무 등으로 이어진다. 최근에도, 이만열과 덴버신학대의 정성욱도 김교신의 "조선산 기독교"가 연상되는 주장을 한다(자세한 내용은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III권 참조). 한국 고유의 토착 신학과 토착 기독교를 주장한다는 것은, 뒤집어 생각해보면, 아직까지 한국의 개신교는 서구에서 들여온 외래 종교이며 더 나아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이식된 종교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여담으로, '이식된 기독교 담론'이 과거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해방 이후 미군정에 의해 이식되었다는 과거의 인식과도 묘하게 닮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서남동/안병무 등의 민중신학과 80년대 이후 고조된 반미주의는 '한국 고유의 기독교의 결여'를 더욱 강화하였고 초기 선교사들을 "보수적(49p)", "근본주의적(49p)", "배타주의적(46p)", "오리엔탈리즘적(51p)"이라고 규정하는 데에 일조했다.
2.
그러나 옥성득은 이만열, 민경배, 이덕주, 류대영, 박용규 등 기존의 한국 기독교사 연구가들이 초기 선교사들을 근본주의자, 보수주의자로 규정하며 초기 한국 기독교를 '선교사들의 의해 이식된 미국 기독교'로 보는 담론을 비판한다. 옥성득의 <한국 기독교 형성사>는 "미국-중국 기독교와 한국 종교 문화 속에 있던 친화적인 요소들 사이의 융합을 통한 토착적 한국 개신교의 창출사"에 관심을 두고, "성취론으로 기독교 토착화의 길을 연 온건 복음주의자"와 "1세대 한국 기독교인의 다층적인 신학과 신앙"의 역동적이며 창조적인 역사를 밝히고 이를 입체적으로 증명하려 노력한다. 특히 그 과정에서 그가 염두에 둔 것은 "미중한의 삼중 요소의 통합"으로, 조선 선교 이전에 쌓인 중국 선교 경험이 어떻게 조선 선교에 영향을 주었는지 보여준다.
3.
그에 따르면, 분명 초기 선교사들에게 오리엔탈리즘적 요소가 발견된다. 알렌은 선교 초창기 보고서에서 "한국인들에게는 종교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기록하였고, 아펜젤러는 "유교를 종교가 아닌 윤리학 체계로 분류"하며 "불교 승려는 문명의 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한국은 무종교의 나라(이는 기존 종교가 사회적으로 거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라는 "성급하고 피상적인 평가가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 방향을 결정했다. 초기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무종교, 혹은 그릇된 종교들의 땅에 진정한 종교를 심는 사람들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생활하는 기간과 한국에 대한 학문적 지식이 늘어나고, 한국인 성도들이 늘면서 선교사들의 평가도 바뀌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국인의 다층적 종교 정체성을 발견했다." Korean Repository의 창간, 동학농민운동, 하나님 용어 논쟁,한국인 지도자들의 성취론적 한국 종교 이해, 미국 ASV 역, 대부흥운동 등 일련의 6가지 사건들을 경험하며 선교사들은 초기에 가졌던 편견들 수정하고 한국인의 종교 전통과 기독교 신학을 조화시키기 시작했다. 이처럼 선교사들의 수정된 시각과 관점을 바탕으로 이 책의 각 장의 내용이 전개된다. 1장은 히브리어로 엘로힘, 헬라어로 데우스가 "하나님"(원래는 '나'는 아래아를 쓰지만, 불가피하게 하나님으로)으로 번역된 과정을 설명한다. 2장은 정감록 예언을 활용하여 한국인에게 십자가의 이미지를 이해시키고 메시아 신앙으로 발전시킨 과정을, 3장은 초기 선교사들이 조선 무당의 축귀 등 샤머니즘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다룬다. 1~3장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떻게 한국적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다룬다. 4~7장은 유교의 제사, 서양과 조선 상황이 예배당 건축 발전에 미친 영향, 성취론적 입장의 한문 전도 소책자와 양반 지식인의 회심, 길선주 등 도교적 신앙을 가졌던 인물들이 새벽기도와 부흥회와 가지는 상관관계를 분석한다.
4.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를 끌었던 주제는 유교 제사문제였다.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 선교사들도 초기에는 제사 문제에 대해 엄격한 자세를 취했다. 그 이유는 1) 죽은 영혼에 대한 제사는 우상숭배라는 점, 2) 근대 문명 개화 시세에 맞지 않다는 점, 3) 천주교 연옥교리 및 미사와의 유사성, 4) 유교 제사가 조선의 후진성의 원흉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두번째와 네번째 이유는 다분히 선교사들의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을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이고, 특히 4번째 이유는 일제의 정체성론과도 유사하다. 이는 "제사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제사 금지 정책이 시행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1890년대, 진보적 선교사들은 성취론의 관점으로 이러한 제사-우상숭배론을 비판하였고, 종국에는 "조상 숭배에는 적절한 공경의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예배의 뜻도 있으므로, 제사 대신 중국인의 관점의 근접하는 추도회로 드리되 제사의 장점을" 살리는 쪽으로 선교 방향이 잡혔다. 이와 거의 동시기에 일부 한국 선교사도 제사 금지 신중론의 태도를 보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지도를 받은 한국교인들이 제사 의례의 기독교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조선인의 다층적 종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시왕이 죽은이의 혼(魂)의 운명을 결정하며 자손의 제사와 무관하다고 믿는 한국인들의 제사는 우상숭배와 거리가 있고 정성들인 제사와 하나님의 복을 연결지어 제사가 선교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한국교회는 제사 금지 정책을 수용하면서도 이와는 다른 논리를 펼쳤다. 즉, "기독교가 유교의 약점을 보완"한다며, 한문소책자에 근거하여 "이 큰 道는 한 나라에 한정되지 않고 동서고금에 통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더 나아가 조선 유교의 天도 "전통적 하나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인격신 요소"가 유지되고 있다며 결과적으로 "만물의 근본인 하나님 예배의 회복은 유교의 완성"이라고까지 주장하기에 이른다. 노병선의 기독론적 조건부 보편 구원론, 길선주의 포괄주의는 위와 같은 성취론적 유교-제사 이해의 대표적 주장들이다. 결국, 선교사들은 제사가 지니는 긍정적 가치를 "기독교적으로 영구화시킬" 방안을 궁리했고, 그 결과로 '세례받은 제사'가 탄생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과 유교의 효 사상을 접목하여 효도 신학이 적극 소개되었고, "인류의 천부인 성부 하나님은 평등한 믿음 공동체, 효자의 모범이신 성자 예수님은 속죄와 화해의 사랑 공동체, 효도의 영인 성령은 거룩한 제의 공동체와 성례 공동체"라는 삼위일체적 차원에서 이해되었다. 효도신학의 배경에서, 오늘날의 기독교식 상례와 거의 유사한 절차의 상례와, 간단한 예배와 교제와 함께 조상에게 묵도하는 기독교적 추도회가 마련되었다.
5.
헬무트 리처드 니버는 기독교와 세속문화와의 관계를 논하면서 가장 이상적인 관계는 죄로 물든 세상의 잘못된 문화를 복음에 맞추어 그리스도교적으로 변혁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한국의 제사 사례는 세상변혁적 신앙의 한 예시라고 생각한다. 선교사들은 초기에는 편견 가득한 눈으로 제사를 정죄하고 금지하여 제사와 대립하였다. 그러나 중국 선교회의 경험과 한국의 현실과 한국인의 영성을 이해하면서 그들은 입장을 온건하게 바꾸었다. 그 덕분에 제사는 효도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의 세례를 받았고, "제사의 문화적, 윤리적 전통은 유지하되 우상숭배 요소는 배제하고 대신 기독교적 요소로 대체"된 한국교회만의 기독교적 제사(추도회)가 등장할 수 있었다. 특히 한국에 맞게 제사의 대안을 고민한 목회적 모습에서는 배타주의나 문화적 제국주의의 면모 보다는 일면 포용적 면모가 돋보인다. 또한, 그 과정에서 길선주 등 한국 개신교회 초기 성도들도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여러가지를 시사한다. 이와 같은 저자의 논리는 1~7장까지 일관적이다. 기존의 연구자들이 인식하는 것과 같은 '문화배타주의적/근본주의적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이식되고 한국인은 배제된 한국 기독교'는 없다. 오히려 앞에서 본 제사의 사례, 뿐만 아니라 "하나님 용어"의 사용, 새벽기도회, 정감록 예언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한국인에게 이해시킨 사례처럼 초기 한국 기독교가 만들어져 가던 역사는 선교사들이 조선의 다층적 종교 위에서 개신교를 결합시킨 혼합주의의 역사였다. 선교사들은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전도하지 않았으며, 한국인도 수동적으로 이를 받아들이지만은 않았다. 김교신이 그토록 이야기했던 "조선산 기독교"는 이미 한국교회의 형성기부터 내재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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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우 2020-07-05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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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산 기독교의 형성
옥성득, <한국 기독교 형성사>, 새물결플러스, 2020
byRedmanDec 07. 2020
https://brunch.co.kr/@63096fb5cc54430/9
1.
한국의 무교회주의자이자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겠다며 <성서조선>지를 창간하였던 김교신은 '조선산 기독교'라는 말을 남겼다. 이는 해외의 선교사들로부터 이식된 개신교가 아니라 조선인의 주체성이 담보되며 "김치와 된장 냄새가 나는" 기독교이다(그럼 루터의 신학에서는 독일산 맥주의 냄새가 나나?). 요는 서구의 종교인 개신교를 조선의 문화와 풍토 등에 맞춰 주체적으로 수용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1960년대에 더 강화되어 초기 개신교 선교를 "사상적 식민지적 예속"이라 부르며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거나 해방신학,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에 영향을 받아 윤성범이나 민중신학의 안병무 등으로 이어진다. 최근에도, 이만열과 덴버신학대의 정성욱도 김교신의 "조선산 기독교"가 연상되는 주장을 한다(자세한 내용은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III권 참조). 한국 고유의 토착 신학과 토착 기독교를 주장한다는 것은, 뒤집어 생각해보면, 아직까지 한국의 개신교는 서구에서 들여온 외래 종교이며 더 나아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이식된 종교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여담으로, '이식된 기독교 담론'이 과거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해방 이후 미군정에 의해 이식되었다는 과거의 인식과도 묘하게 닮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서남동/안병무 등의 민중신학과 80년대 이후 고조된 반미주의는 '한국 고유의 기독교의 결여'를 더욱 강화하였고 초기 선교사들을 "보수적(49p)", "근본주의적(49p)", "배타주의적(46p)", "오리엔탈리즘적(51p)"이라고 규정하는 데에 일조했다.
2.
그러나 옥성득은 이만열, 민경배, 이덕주, 류대영, 박용규 등 기존의 한국 기독교사 연구가들이 초기 선교사들을 근본주의자, 보수주의자로 규정하며 초기 한국 기독교를 '선교사들의 의해 이식된 미국 기독교'로 보는 담론을 비판한다. 옥성득의 <한국 기독교 형성사>는 "미국-중국 기독교와 한국 종교 문화 속에 있던 친화적인 요소들 사이의 융합을 통한 토착적 한국 개신교의 창출사"에 관심을 두고, "성취론으로 기독교 토착화의 길을 연 온건 복음주의자"와 "1세대 한국 기독교인의 다층적인 신학과 신앙"의 역동적이며 창조적인 역사를 밝히고 이를 입체적으로 증명하려 노력한다. 특히 그 과정에서 그가 염두에 둔 것은 "미중한의 삼중 요소의 통합"으로, 조선 선교 이전에 쌓인 중국 선교 경험이 어떻게 조선 선교에 영향을 주었는지 보여준다.
3.
그에 따르면, 분명 초기 선교사들에게 오리엔탈리즘적 요소가 발견된다. 알렌은 선교 초창기 보고서에서 "한국인들에게는 종교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기록하였고, 아펜젤러는 "유교를 종교가 아닌 윤리학 체계로 분류"하며 "불교 승려는 문명의 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한국은 무종교의 나라(이는 기존 종교가 사회적으로 거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라는 "성급하고 피상적인 평가가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 방향을 결정했다. 초기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무종교, 혹은 그릇된 종교들의 땅에 진정한 종교를 심는 사람들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생활하는 기간과 한국에 대한 학문적 지식이 늘어나고, 한국인 성도들이 늘면서 선교사들의 평가도 바뀌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국인의 다층적 종교 정체성을 발견했다." Korean Repository의 창간, 동학농민운동, 하나님 용어 논쟁,한국인 지도자들의 성취론적 한국 종교 이해, 미국 ASV 역, 대부흥운동 등 일련의 6가지 사건들을 경험하며 선교사들은 초기에 가졌던 편견들 수정하고 한국인의 종교 전통과 기독교 신학을 조화시키기 시작했다. 이처럼 선교사들의 수정된 시각과 관점을 바탕으로 이 책의 각 장의 내용이 전개된다. 1장은 히브리어로 엘로힘, 헬라어로 데우스가 "하나님"(원래는 '나'는 아래아를 쓰지만, 불가피하게 하나님으로)으로 번역된 과정을 설명한다. 2장은 정감록 예언을 활용하여 한국인에게 십자가의 이미지를 이해시키고 메시아 신앙으로 발전시킨 과정을, 3장은 초기 선교사들이 조선 무당의 축귀 등 샤머니즘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다룬다. 1~3장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떻게 한국적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다룬다. 4~7장은 유교의 제사, 서양과 조선 상황이 예배당 건축 발전에 미친 영향, 성취론적 입장의 한문 전도 소책자와 양반 지식인의 회심, 길선주 등 도교적 신앙을 가졌던 인물들이 새벽기도와 부흥회와 가지는 상관관계를 분석한다.
4.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를 끌었던 주제는 유교 제사문제였다.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 선교사들도 초기에는 제사 문제에 대해 엄격한 자세를 취했다. 그 이유는 1) 죽은 영혼에 대한 제사는 우상숭배라는 점, 2) 근대 문명 개화 시세에 맞지 않다는 점, 3) 천주교 연옥교리 및 미사와의 유사성, 4) 유교 제사가 조선의 후진성의 원흉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두번째와 네번째 이유는 다분히 선교사들의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을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이고, 특히 4번째 이유는 일제의 정체성론과도 유사하다. 이는 "제사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제사 금지 정책이 시행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1890년대, 진보적 선교사들은 성취론의 관점으로 이러한 제사-우상숭배론을 비판하였고, 종국에는 "조상 숭배에는 적절한 공경의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예배의 뜻도 있으므로, 제사 대신 중국인의 관점의 근접하는 추도회로 드리되 제사의 장점을" 살리는 쪽으로 선교 방향이 잡혔다. 이와 거의 동시기에 일부 한국 선교사도 제사 금지 신중론의 태도를 보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지도를 받은 한국교인들이 제사 의례의 기독교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조선인의 다층적 종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시왕이 죽은이의 혼(魂)의 운명을 결정하며 자손의 제사와 무관하다고 믿는 한국인들의 제사는 우상숭배와 거리가 있고 정성들인 제사와 하나님의 복을 연결지어 제사가 선교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한국교회는 제사 금지 정책을 수용하면서도 이와는 다른 논리를 펼쳤다. 즉, "기독교가 유교의 약점을 보완"한다며, 한문소책자에 근거하여 "이 큰 道는 한 나라에 한정되지 않고 동서고금에 통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더 나아가 조선 유교의 天도 "전통적 하나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인격신 요소"가 유지되고 있다며 결과적으로 "만물의 근본인 하나님 예배의 회복은 유교의 완성"이라고까지 주장하기에 이른다. 노병선의 기독론적 조건부 보편 구원론, 길선주의 포괄주의는 위와 같은 성취론적 유교-제사 이해의 대표적 주장들이다. 결국, 선교사들은 제사가 지니는 긍정적 가치를 "기독교적으로 영구화시킬" 방안을 궁리했고, 그 결과로 '세례받은 제사'가 탄생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과 유교의 효 사상을 접목하여 효도 신학이 적극 소개되었고, "인류의 천부인 성부 하나님은 평등한 믿음 공동체, 효자의 모범이신 성자 예수님은 속죄와 화해의 사랑 공동체, 효도의 영인 성령은 거룩한 제의 공동체와 성례 공동체"라는 삼위일체적 차원에서 이해되었다. 효도신학의 배경에서, 오늘날의 기독교식 상례와 거의 유사한 절차의 상례와, 간단한 예배와 교제와 함께 조상에게 묵도하는 기독교적 추도회가 마련되었다.
5.
헬무트 리처드 니버는 기독교와 세속문화와의 관계를 논하면서 가장 이상적인 관계는 죄로 물든 세상의 잘못된 문화를 복음에 맞추어 그리스도교적으로 변혁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한국의 제사 사례는 세상변혁적 신앙의 한 예시라고 생각한다. 선교사들은 초기에는 편견 가득한 눈으로 제사를 정죄하고 금지하여 제사와 대립하였다. 그러나 중국 선교회의 경험과 한국의 현실과 한국인의 영성을 이해하면서 그들은 입장을 온건하게 바꾸었다. 그 덕분에 제사는 효도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의 세례를 받았고, "제사의 문화적, 윤리적 전통은 유지하되 우상숭배 요소는 배제하고 대신 기독교적 요소로 대체"된 한국교회만의 기독교적 제사(추도회)가 등장할 수 있었다. 특히 한국에 맞게 제사의 대안을 고민한 목회적 모습에서는 배타주의나 문화적 제국주의의 면모 보다는 일면 포용적 면모가 돋보인다. 또한, 그 과정에서 길선주 등 한국 개신교회 초기 성도들도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여러가지를 시사한다. 이와 같은 저자의 논리는 1~7장까지 일관적이다. 기존의 연구자들이 인식하는 것과 같은 '문화배타주의적/근본주의적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이식되고 한국인은 배제된 한국 기독교'는 없다. 오히려 앞에서 본 제사의 사례, 뿐만 아니라 "하나님 용어"의 사용, 새벽기도회, 정감록 예언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한국인에게 이해시킨 사례처럼 초기 한국 기독교가 만들어져 가던 역사는 선교사들이 조선의 다층적 종교 위에서 개신교를 결합시킨 혼합주의의 역사였다. 선교사들은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전도하지 않았으며, 한국인도 수동적으로 이를 받아들이지만은 않았다. 김교신이 그토록 이야기했던 "조선산 기독교"는 이미 한국교회의 형성기부터 내재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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