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17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화류계 여성― 한 게이샤 여성의 생애사를 통해 본 주변부 여성 식민자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화류계 여성― 한 게이샤 여성의 생애사를 통해 본 주변부 여성 식민자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화류계 여성

한 게이샤 여성의 생애사를 통해 본 주변부 여성 식민자*1)

 

권숙인

한글요약

이 글에서는 노무라 다키(野村たき)라는 한 게이샤 여성의 사례를 통해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여성, 보다 구체적으로는 일본 식민자 사회의 주요 구성원이었던화류계’(花柳界) 여성의 존재를 드러내고 이를 기초로 식민자 사회 내부의 차이, 특히 젠더와 계층에 의해 초래된 차이와 다양성을 고찰한다. 다키는 메이지 중기 가난한 농가의 딸로 태어나 열한 살 나이에가족을 위해게이샤 집에 팔려가 화류 계에 입문한다. 이후 어린 딸을 데리고 식민지배 하의 조선으로 건너와 역시 게이 샤로 전전하다가 일본의 패전 후 귀환하 다. 다키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이 식민지 조선을 비롯해 제국의 여러 변경으로 이식시켰던 일군의 불우한 여성 중 한 명이었다.

서구의 제국들과 비교해 일본은 식민지에명예롭지 못한일본 여성이 존재하는

것을 일종의필요 악으로 생각했고 이들의 이주를 오히려 지원하기도 했다. 일본 의 정책담당자들이나 식민자 사회에 팽배한 것은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남성 중심적이고 도구주의적 태도 다. 일본인 여성은 서로 배타적인 두 집단, 즉 여성 적 도덕을 함양하는데 힘써야 하는보통여성들과 공동체의질서유지와 제국의 팽창을 위해 불가결한서비스를 제공하는 여성들로 구분되었다. 식민지 조선에 존재했던 적지 않은 숫자의화류계여성은 민족뿐만 아니라 계급과 젠더 역시

권숙인  서울대학교

* 이 논문은 2010년도 정부재원(교육부 인문사회연구역량강화 사업비)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다(NRF-2010-327-B00451). 여러모로 건설적인 비판과 제언을 해주신 세 분의 심사위원께 감사한다.

사회와 역사 제103(2014) 한국사회사학회 

제국의 구성원의 삶을 가르는 주요 변수 음을 환기시켜준다. 식민공간에서 펼쳐 지는 민족·계층·젠더간의 다양한 접촉지대를 드러내고 이를 통해 식민지배의 복잡한 역학을 좀 더 섬세하게 잡아내는 것은 향후 중요한 연구과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엘리트 중심의 역사서술을 탈중심화하여 식민지배에 대한 보다 균 형 잡힌 재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주요어

일본인 화류계 여성, 일본인 식민자 사회, 주변부 여성 식민자, 여성의 섹슈얼 리티와 제국, 식민과 젠더

1.     들어가기

이 글에서는 노무라 다키(野村たき)라는 한 게이샤 여성의 사례를 통해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여성을 고찰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일본인 식민자 사회의 주요 구성원이었던화류계’(花柳界) 여성[1])의 존재를 드러내고 이를 기초로 식민자 사회 내부의 차이, 특히 젠더와 계층에 의해 초래된 차이와 다양성을 고찰한다. 이러한 분석은 한반도의 일본인 식민자 사회를 보다 다층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하고, 식민과 젠더의 상호관련성에 대한 이론적 논의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살과 뼈가 있는역사 쓰기와 관련해서도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본 연구자로서는 일본인 식민이주자에 대한 연구에서 기록을 남기지 않은/못한 주체들의 역사를 어 떻게 재현할 것인가란 물음에 대한 시론적 탐색이기도 하다.

한일근대사 연구에서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에 대한 연구는 최근 들어 학계의 관심이 커지면서 다양한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다. 한반도로의 일본인 이주사와 한반도 내 식민자 커뮤니티의 형성에 대한 기무라 겐지와 다카사키 소지의 연구가 선구적이고 포괄적 연구로서 의 의미를 가졌다면(木村健二, 1989; 高崎宗司, 2002), 2000년대 이후 본격 화된 연구들은 특정 주제에 초점을 맞춘 보다 다양한 연구들이 시도되었

.2) 본 연구와 관련해 지적하고 싶은 점은 해당 주제에 대한 근년의 많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여성, 혹은 좀 더 포괄적으로 일 본인 사회 내의 젠더문제를 다룬 연구는 아직 별로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연구 자체가 최근에야 본격화된 데에 기인할 것이며, 나아가 식민지배세력을 남성화시켜 접근해 온 일반적인 연 구경향과도 연결되었을 것이다.

식민지배와 제국의 확장은 지극히 젠더화된 과정이었고, 식민자 사회

(colonial settler community)에서의 젠더역학은 본국의 상황과 중첩되면 서도 그 고유의 특수한 모습을 보 다. 서구의 식민지배와 젠더역학에 대한 연구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식민자 사회 내에서 여성에 대한 통제는 통치 권력에게는 절실하고도 힘겨운 과제 다(Dagut, 2000; Devereux, 1999; Stoler, 2002 ). 식민 본국으로부터 여성을 이주시킬 지의 여부, 이주 규모의 문제, 이주해 온 여성에게 부여할 역할과 지위, 섹슈얼리티의 통제 등은 식민지배층에게 쉽지 않은 문제를 제기했다. 특히 식민자 여성의 도덕 성과 미덕은 곧 제국의 명예와 위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에 여성

2)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에 대한 기존의 연구에 대해선 이미 몇 편의 연구에서 정리되어 있기 에 이 글에서는 반복하지 않는다. 국내의 연구 동향에 대해선 권숙인(2006), 이연식(2009), 이형식(2013) 등의 연구를, 어권 및 일본에서 이루어진 연구에 대해선 코헨(Cohen, 2006)과 우치다(Uchida, 2011)의 리뷰를 참조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어권 역사학계 에서 비슷한 시기에 이 주제에 대해 일련의 박사학위 논문 (Cohen, 2006; Henry, 2006; Uchida, 2005 )이 나온 것으로, 이는 사회문화사, 일상사로의 전환이 확연해진 역사학의 패러다임 변화와도 맞물려 있는 것으로 보이며, 경위야 어찌되었건 그동안 무시되어 왔던 주제에 동시 다발적으로 학문적 관심이 맞춰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인 일이다.

과 여성이 주로 관장하는 친밀한 역(the intimate)에 대한 규율은 식민제 국의 통치에 핵심적 요소가 되었다(Fisher-Tiné, 2003; Levine 1994; Stoler, 2002). 일반적으로 볼 때 여성 식민자는 식민지배의주체라기보다 는 통제와 규율의 대상이었고, 그 역할에서도 공적 역에서 분리된 가정 내의 역할로 제한 받았다.

다른 한편 보다 최근의 연구들은 여성 식민자를 그저 수동적인 집단으로

보는 해석에 의문을 제기한다. 여성들은식민지 관리의 아내로서, 선교사 로서, 나아가 여행자와 작가로서 제국경 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으 며(박형지·설혜심, 2004: 25), 자신들이 향력을 행사하고 권위를 세울 수 있는 (가내) 역을 구축해 가기도 했다(Locher-Scholten 2000). 식민 지배 하의 인도에 거주하던 중산층 국 여성들은 주로 가정 내 역할로 제한되었지만 본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까닭에 여러국적 제약으 로부터 일정정도 해방되어있었다(Gowans 2005: 836). 마찬가지로 네덜 란드령 인도네시아의 유럽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식민지에서의 활동 에 엄격한 통제를 받고 있었지만, 강고한 도덕적 제약을 강제하는 식민정부 와공모하여 이 제약을 남편의 성적방종을 통제하는데 활용할 수 있었다 (Stoler 2010: 34). 요컨대 식민자 여성들은 여성적 미덕과 도덕을 지키도 록 종종 본국에서보다 더 강력한 압력을 받았지만, 식민자라는 지위 덕택에 다양한 특권과 기회를 누리기도 했다.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여성에 대한 기존 연구는 양적으로도 많지 않고

그 주제도 한정되어 있다. 애국부인회의 창립자이자 일제의 조선통치에 적 극적인 역할을 한 오쿠무라 이오코(奧村五百子)에 대한 가노 미키요의 연구 (加納実紀代, 1975), 오쿠무라와 함께 식민통치에 적극 가담한 또 다른 여성 들인 후치자와 노에(淵澤能惠)와 츠다 세츠코(津田節子) 3명의 엘리트 여 성에 대한 임전혜의 연구(任展慧, 1978) 1970년대에 이루어진 이래 1990 년대 이후도 이 세 인물에 대한 연구가 간헐적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연구들은 식민통치에서 여성이 행한 적극적인 역할을 드러냈다는 기여 에도 불구하고, 매우 엘리트층에 속하는 여성의 사례분석에 머물고 있어 당시 한반도에 대규모로 거주했던보통의 일본인 여성의 모습을 드러내는 데는 거의 다가가지 못하 다. 1990년대 들어 경성여자사범의 일본인 여교 사의식민의식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으나(咲本和子, 1998) 사례 수도 한 정되어 있고 분석적 깊이가 많이 부족하다. 다바타 가야(다바타 가야, 1996)는 한반도에 거주했던 여성에 대한 설문조사와 심층인터뷰를 통해보통의 일본인 여성의 삶과 의식에 보다 구체적으로 접근하고자 시도했으 나, 인터뷰를 통해발굴해 낸 자료의 중요성에 비해 객관적 자료로 충분히 입증되지 않은 해석과 주장이 아쉽다.

보다 최근에 들어서야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

되면서 일본인 식민자 사회의 젠더역학에 대해 분석적으로 접근하려는 시 도가 엿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바바라 브룩스는 󰡔조선과 만주 朝鮮及滿洲󰡕 기사에 대한 시론적 독해를 통해 식민자 사회에 팽배했던 젠더담론을 분석 하고 그 비교문화적 함의를 성찰한다(Brooks, 2005). 헬렌 리는 아사노 시게코(浅野茂子)라는 한 여성의 일기를 통해제국의 딸로서 그녀의 헌신 과 좌절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1930년대 후반 동원상황 속에서 여성의 주 체화 양상을 질문한다(헬렌 리, 2008). 브룩스의 연구는시론적독해이고 헬렌 리의 경우는 특정한 사례에 초점이 맞춰져 있긴 하지만 양자 모두 일본인 사회의 전반적인 젠더역학을 염두에 두고 이론적 분석을 시도하 다는 점에서 한 단계 진전된 연구가능성을 보여준다. 한편 이연식은 패전 후 한반도로부터 일본으로 귀환한 여성들의 체험을 다루고 있는데(이연식, 2009), 인용하고 있는 자료의 생생함에 비해 그것이 제기하고 있는 젠더적 이슈에 대해선 의미 있는 분석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권숙인의 최근 연구 는(Kweon, 2014) 도시거주 중산층 여성의 사례를 근거로 식민지가 일본 여성에게 제공했던혜택제약을 조망하면서 식민자 사회의 젠더역학을 규명하고자 하 다.

이렇게 볼 때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여성에 대한 연구는 그 규모나 중요 성에 비해 아직 본격적인 연구가 크게 부족한 상황이다. 또한 그동안 수행 된 연구마저도 공식적인 기록이 남아 있는 엘리트 여성이거나 자전적 기록 물을 남길 수 있었던, 상대적으로 고학력에 중류층 이상의 여성들에 치우쳐 있다. 일본인 식민자 여성의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기본적인 연구를 필두로, 이들에 대한 균형 잡힌 재현을 위해 필수적인 다양한 층위 의 여성들의 삶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조선으로 이주하여 화류계에 종사 했던 일본인 여성의 존재를 고찰하고, 그들의 삶을 통해 식민자사회 주변부 를 살았던 일본인들의 모습을 드러내보고자 한다. 기실 일제강점기에 한반 도에 설치·운용되었던 공창제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을3) 통해 성을 파는 것을 업으로 했던 일본여성들의 존재가 인정된 셈이지만, 이 연구들은 주로 공창제도의 성립과 운용에 관심이 있었지 그 안에서 움직이는사람에 주목하지는 않았다. 이런 점에서 송연옥의 연구는(宋連玉, 2002) 조선개항 지에 눈독을 들인 성매매 업자나 이들을 동반한 일본여성들의 움직임을 외무성 여권발급자료를 기초로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분석시 기가 19세기 말에 국한되어 있고, 이 여성들이식민자의 일부로 한반도에 서 위했던 삶이 아니라 도한방법과 경위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다만 식민지 조선 일본인사회의 저변에 살았던, 보이지 않고 망각되어 버린 일본 인 여성의 삶을 가시화시켜야 한다는 저자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이 연구 도 공유한다.

이 글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노무라 다키는 바로 그런 여성 중 한명이었

. 다키는 메이지 중기 가난한 농가의 딸로 태어나 열한 살 나이에가족을 위해게이샤 집에 팔려가 화류계에 입문한다. 이후 어린 딸을 데리고 식민 지배 하의 조선으로 건너와 역시 게이샤로 전전하다가 일본의 패전 후 당시 거주하던 남만주에서 일본으로 귀환하 다. 식민체제의 성립에 의해 일본

3) 손정목은 일찍이, 특유의 방대하고 다양한 자료를 통해 일제에 의한 한반도 내 공창제의 성립과정과 분포, 규모, 운용 양상 등 전반적인 상황을 제시한 바 있다(손정목, 1996). 개항 이후 식민지배기에 걸쳐 공창제도가 도입·정착되어 간 과정에 대한 보다 정리된 연구는 강정숙(1998), 박정애(2009), 야마시타 애(1997)의 연구, 군대위안소와의 관련성에 초점 을 맞춰 공창제 및 접객업의 상황을 다룬 것으론 윤명숙의 연구(尹明淑, 2003), 기타 개항초 기의가라유키상의 도한부터 보다 제도화된 성매매업의 전개에 대해선 송연옥(宋連玉, 1994), 스즈키 유코(鈴木裕子, 1993)의 연구가 있다.

사회의 주변부로부터 식민자 사회 주변으로 이식되었다가 그 체제의 와해 와 함께 다시 일본으로 귀환한 것이다. 그녀의 삶은 식민지배에 대한 거시 적 조망이나 식민관료, 군인, 자 업자, 파견 회사원 등 엘리트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는 가시화되기 힘든 식민자 사회 저변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아래 에서는 노무라 다키(와 그녀의 딸 노무라 스미코)의 삶의 여정을 따라가는 것을 통해 식민자 사회 주변부의 삶, 식민/피식민 민족 간의 만남, 그곳에 서 전개되는 민족과 계층, 그리고 젠더의 상호작용을 조망해 보고자 한다.

2.     조선에 온 일본 게이샤, 노무라 다키

이 글에서 소개하는 노무라 다키의 생애사는 일차적으로 다키의 딸 스미

(澄子)가 어머니와 자신의 삶을 회고한개인사’(自分史) 기록에 기초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스미코가 사망하기 전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녹음한 테이프를 스미코의 아들, 그러니까 다키의 외손자인 노무라 겐이치(野村健一)가 정리하여 자비로 출판한 󰡔어머니, 노무라 스미코의 개인사 노트󰡕(野村健一, 1993)의 내용이다.4)몇 번의 생사기로를 헤맸고여러 가지 극적 인 삶을 살았던 스미코는자신의 인생을 도와주고 지원해 준 사람들이 자신에게 해 준 말들과 자신의 인생의 기록”(1)을 개인사 형태로 정리하고 싶어 했고, 1992년 봄 간암으로 입원한 상태에서 녹음테이프에 어머니 다 키와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를 남겼다. 따라서 이 자료에 정리된 다키의 삶은 딸의 입장에서 회상한 것들로, 다키 본인의 생각이나 이해 등은 아쉽 지만 거의 알 수 없다. 또한 손자 겐이치는 녹음 내용을 문자화하면서할 머니 다키에게 직접 들은 것들이나 따로 알아본 것들을 보충”(2)하여 읽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고자 했다.

4) 이 책자의 전반부는 노무라 스미코가 회고한개인사이고, 후반부는 겐이치가 추가한 여러 자료들(스미코의 남편이 1942~1943년 사이 인도차이나 파견 근무 중 보냈던 편지들, 스미 코가 동창회보 등에 기고한 글들, 스미코 장례식 관련 문서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연구에 서는 주제의 성격상 전반부 개인사의 내용만 참고하 다.

책의 내용은 다키의 출생과 게이샤로서의 훈련, 결혼과 이혼, 조선으로의 이주와 그곳에서의 생활, 일본의 패전과 귀환, 귀환 후의 삶에 대한 것인데 사이사이 대화의 내용을 직접 인용해 놓을 정도로 매우 세세한 부분이 있는 반면 사건이나 상황의 정확한 내용을 알기 힘들거나 시간적 맥락이 모호한 부분도 있다. 무엇보다 개인적 기억, 그것도 수 십 년 전의 삶과 상황에 대한 특정인의 회고가 갖는 자료로서의 여러 문제는 자명할 것이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이 기록은, 젠더와 계층적 배경 때문에 특정의 일본 여성들이 제국의 주변부에서 감내했던 힘겨운 삶을 증언하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필자는 2011 5월 나고야에서 노무라 겐이치와 누나 야마다 미치코 와 인터뷰를 할 수 있었고, 노무라 다키와 스미코의 삶에 대한 보충 정보와 이 모녀의 삶에 대한 겐이치 남매의 해석을 추가할 수 있었다. 굉장히 모호 한 평가이지만, 겐이치는 놀라울 정도의 기억력을 갖고 있었고 할머니와 어머니에 대해 매우 담담하게, 가능한 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고자 하 다.

다키는 메이지 중엽 1888, 나고야 인근 한 산촌 농가의 막내딸로 태 어났다. 그럭저럭 생계를 꾸려가던 가족은 호주인 큰 오빠와 아버지가 연 이어 사망하면서 11세의 다키, 다키의 어머니와 올케, 어린 조카, 14세인 오빠가 남겨졌고 가세가 기울어 갔다.[2]) 그런 와중에미인인다키에게 양자 이야기가 들어 와 가족은 다키를 넘기기로 하고 상당한 금액의 돈을 선불로 받아 그 돈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다키는 소학교 고등과 4년의 대부분을 [양녀로 들어간] 세토(瀬戸)의 이노우에(井上) 집 에서 다니며 기예(芸事)을 배우면서 성인 여자가 되어 갔다. 혼자 낯선 세토에서 살게 된 다키는 어머니가 그리워 이노우에 집에서 도망쳐 산길 을 걸어 집으로 간 적도 있었다. 15세가 되자 이노우에 가에 정식 입적되 었고(1903) 연회자리에 나가기 시작했다. 5년간은 계약에 묶여 일을 해야만 했다. 세토는 도자기 산지로 유명한데 당시에는 일 년에 수차례 큰 가마에 도자기를 구울 때면 게이샤를 불러 잔치를 크게 베풀어 흥을 돋우었다. 다키는 춤을 잘 추어 인기를 끌었고 이노우에는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다. 5년 후 계약기간이 끝나 독립해서 생활할 허가를 받았다.

다키의 오빠 이치타로(一太郎)는 그나마 있던 농토와 집도 팔아버리고 다키를 수시로 찾아와 돈을 요구했다. 그러다가 계약기간이 끝나 독립해 있던 다키를 속여 나고야의 게이샤 집으로 데려가 상당한 돈을 받고 다키 를 넘겨 버렸고, 그 후에도 수시로 나타나 돈을 빼앗아 갔다. “이렇게 자주 오시면 저도 곤란합니다란 다키의 말에 이치타로는가족을 버리는 거냐 고 위압적 태도로 폭력을 휘둘렀다”. 다키는 일하는 시간에도어떻게 하 면 이 난봉꾼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어머니를 지킬 수 있을까”(8)고 여러 생각을 하다. 그 무렵 혼인하여 홋카이도에 개척단으 로 가 있던 언니가 다키를 홋카이도로 불렀다. 다키의 처지를 동정한 언니 는 역시 나고야 출신에 개척단으로 와 있는 하세가와 가네마츠(長谷川金

)를 만나게 하다. 사실 다키의 언니는 3년 전 다키가 17살 때에도 다키와 가네마츠의 맞선을 주선한 적이 있었다. 이혼 경력이 있었지만 다 키 언니가 보기엔 아주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당시 다키 는 가네마츠가한눈에 보기에는 키도 작고 왠지 미덥지 못한 사람인 것 같아완곡히 거절을 했었다. 가네마츠는 나이도 다키보다 열 살 위 고여러 많은 남자를 보아 온 타키는 아무래도 이상이 높아진”(8) 때문이었 을 것이다. 3년 뒤의 두 번째 만남에서 가네마츠는 빚을 갚아주겠다며 청혼했고, 다키는가네마츠가 자기를 구제해주는 신같이 느”(9)껴져 결혼 을 하고 함께 나고야로 돌아왔다(1910).

나고야에서 다키는 친정어머니도 모셔와 새 생활을 시작하다. 여자

세 명을 고용해 작은 요리집(料理屋)[3])을 열었고 딸 스미코도 태어났다 (1913). 그러나 고용하고 있던 여자 중 한 명이 우물에 빠져 자살을 하면서 가게도 문을 닫았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이치타로 못지않게 나쁜 사람으로, 일을 하지 않으며 딸이 버는 돈을 빼앗아 가고 있”(9)었다. 자살 당시 19세다. 다키 부부는 잡화점을 새로 시작했다. 다음 해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근처 군수공장에서 구인광고가 났고 가네마츠는 쉽게 취 직을 할 수 있었다. 오빠 이치타로는 수시로 가게에 나타나 돈을 요구했고 결국은 매상액은 물론 매입용 돈까지 가져갔다[4]. 다키도 가게를 접고 스미 코를 언니에게 맡기고 군수공장에 취직하다. 가네마츠는 성실하고 검소 했고 둘이 일을 하면서 조금씩 저축도 늘어났다. 그러나 이치타로는 계속 왔고, 공장에서도살갗이 흰 미인인 다키는 배속 장교 등으로부터 주목을 받”(10)는 곤란한 상황이 이어졌다. 결국 다키는 공장을 그만 두었고 독립 할 방법을 찾아 고민하다. 1915, 결혼 5년 만에 가네마츠와 합의이혼 하다.7)

혼자가 되어 홀가분해진”(10) 다키는 게이샤들의 머리 손질 일을 배우 는 한편[5]) 연회자리에도 나갔다. 이치타로는 이곳으로도 돈을 요구하러 왔다. 그러던 중 다키는 기후(岐阜)의 노무라 도미자부로(野村富三郎)란 남성과 혼인신고를 하고, 2 주일 후에는 합의 이혼했다(1916). 이혼한 다키는 친정의 호적으로 들어가지 않고 노무라라는 성으로 한 이에()를 창설해 호주가 되어 친정과 법적인 연을 끊었다.[6])난봉꾼인 오빠의 속박 으로부터 도망치기를 바란 다키의 계획”(10)에 의한 서류상의 혼인과 이 혼이었다. 연회자리의 손님으로 알게 된 노무라는 다키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서류절차에 응해 주었고, 역시 연회에서 알게 된 변호사의 도움도 받았다. 어느 날 다키는 한 친구의 오빠가 경성에 있다는 이야기를 생각해 내고는 그녀를 찾아가 처지를 하소연했다. 그 친구는차라리 조선으로 가봐, 그쪽엔 일자리도 많고”(11)라며 오빠에게 부탁을 해 주었다. 1918 2, 다키는 조선행을 단행했다. 만 다섯 살 된 딸 스미코를 데리고 시모노세키를 통해 부산으로, 거기에서 다시 기차로 경성으로 향했다. 경 성에 가까워지자 “[스미코는] 역시 최대 도시답게 큰 건물들이 보이고 역 에 도착했을 때는 아아, 훌륭한 역이구나 하는 생각”(13)이 들었다.

< 1> 노무라 다키 생애사 연표

1888

우메무라(梅村) 집안의 넷째 딸로 태어남

1899

부친 사망. 게이샤가 되기 위해 이노우에(井上) 집안으로 팔려 감

1903

이노우에 가에 입적

1905

큰 언니가 하세가와 가네마츠(長谷川金松)를 결혼상대로 소개했으나 거절

1908

5년 계약기간 끝내고 이노우에 가에서 독립

오빠 이치타로(一太郎)에 의해 나고야의 또 다른 게이샤 집으로 넘겨짐

1910

언니의 두 번째 권유로 가네마츠와 혼인 가네마츠와 나고야에서 요리집 시작

1913

스미코(澄子) 출산. 요리집을 접고 잡화상 염

1914

모친 사망 가네마츠, 인근 군수공장에 취직

다키도 같은 공장에 취직했으나 배속장교 등의관심으로 그만 둠

1915

가네마츠와 합의이혼 머리 손질 일 배우기 시작

1916

노무라 도미자부로(野村富三郎)와 서류상 혼인과 이혼

친정 호적에서 이적(離籍), 노무라를 성으로 하는 새로운 이에()의 호주가 됨

1918

스미코를 데리고 경성으로 이주, 작은 미장원을 염 이치타로의 추적을 피해 평양으로 이주, 게이샤로 일하기 시작

1919

횡령한 남성과 2달 간 일본여행빚에 몰려 평양 내 급이 떨어지는 지역으로 옮겨 감

연도미상

빚 때문에 평양 인근 정주(定州)로 옮겨 감 오타(小田)라는 건축 청부업자의 첩이 됨

1925

오타, 스미코에게나쁜 짓을 시도, 다키에게는 화상을 입힘

연도미상

스미코, 경성의 친부 가네마츠의 도움으로 경성제일고등여학교 입학, 기숙사 생활

연도미상

스미코, 평양고등여학교로 전교하여 기숙사 생활, 늑막염과 결핵으로 하숙집 으로 옮김

스미코, 여학교 졸업 후 평양의 한 백화점에 취직 다키, 오타와 헤어진 뒤 남만주 금주(錦州)로 이주, 다케이시(武石)란 남성의 첩이 됨

스미코, 스즈키 도메조(鈴木留蔵)로부터 청혼 받음

1931

가네마츠, 스즈키와 결혼 반대. 스미코, 자살 기도 다키, 스미코를 만주로 데려 옴

1932

스미코, 스즈키와 혼인 후 조선으로 돌아감

1946

다키, 다케이시 및 스미코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귀환, 다케이시 고향인 고치 에 정착

1958

고치서 사망

친구의 오빠는 경성에서 생선가게를 하고 있었다. 친구 오빠의 도움으

로 다키는 작은 집을 빌려 방 한 칸에 머리 손질용 도구를 놓고미장원을 시작했다. 여덟 집이 연결되어 있는 공동주택(長屋) 중 하나다. 주로 화류계 여성들이 올림머리를 하러 왔다. “붙임성 있고 솜씨도 좋다고 소문 이 나면서”(15) 미장원 일은 생각보다 잘 되었고 두 사람이 먹고 살만했

. 반년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어느 날 역시 경성에 와 살고 있던 전 남편이 달려와 이치타로가 신문에 다키와 스미코를 찾는 광고를 냈다 고 알려 주었다.[7]) 몸을 숨길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다키는 다시 친구 오빠의 도움으로 평양으로 옮겨 갔다. 평양에서는 사쿠라초(桜町)에 있는 지성관(知性官)이라는격식 있는요리집으로 갔는데 그곳은 오키야(置屋)[8])를 겸하고 있었다. 아이가 딸린 몸이지만 주인은 흔쾌히 받아 주었

. 그곳에서 게이샤로 평판이 좋아 가게 매상도 많이 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근처 과자가게에 빈둥거리며 놀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세상 물정에도 밝고 여자 농락하는 솜씨가 상당한 이 남자는 열심히 일하는 다키에게 여러 구실로 용돈을 뜯어내고 빚을 지게 만들었다. “한 재난이 지나갔다고 생각했더니 또 다른 재난이 온 것”(16)이었다. 나중에 들을 바로는, 이 남자는 요리집에 딸린 여자를 때리거나 달래곤 해서 말을 듣게 만들고 그 여자에게 손님을 상대하게 해 돈을 벌고 있었다. 어느 날은 손님 중 하나가와카야마나 코야산으로 세 명이 가족처럼 여행가자”(17) 고 다키에게 제안하고 요리집 주인에게도 여행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출 발 당일 스미코는 폐렴으로 동행할 수 없었고, 다키는 미리 지불한 여행대 금 등의 문제도 있어 스미코를 동료에게 맡기고 동반여행에 나섰다. 한 달이 지나도 다키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무렵 근처에 극장이 새로 생겼고 요리집에선 그곳의 첫 번째 흥행물을 준비하면서 어린애들을 무대에 세우 기로 하다. 스미코는 태어나 처음으로 춤을 배우고 연기를 연습했다. 어른들이 야단을 치며 때리기도 하면서 몸에 익히도록 가르쳐 주었다. 싫 었지만어머니가 없어 울며 매달릴 수도 없고 안하면 밥도 안 줄 수 있다 생각해서”(17) 나름 열심히 배웠고 무사히 공연도 잘 마쳤다. 어머니 동료 가 잘 돌봐주고 있었지만 돌아오지 않는 다키가  가버린 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결국 두 달이나 지나 돌아온 다키는, 사실은 그 남자가 회사 돈을 갖고 도망친 사람이어서 일본에서 체포되었고 여행 경비 등을 다키가 다 지불해야 했다고 전했다. 빚을 진 다키는 평양에서 좀 급이 떨어지는 지역의 게이샤로 옮겨가면서 돈을 마련했고, 그곳에서도 쉬는 날 없이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또다시 빚이 쌓고 다키는 소학교 1년생이 된 스미코를 데리고

평양 인근의 정주(定州)로 옮겨가 오타후쿠(おたふく)라는 요리집에 기 거하면서 일을 했다.[9]) 그때까지 살았던 요리집에서는 모두 아이의 식비 를 따로 받았는데, 이곳에서는 아이가 먹는 양이 얼마나 되겠냐며 받지 않았다. 2년쯤 뒤에 다키는 오타 모리타로(小田守太郎)라는 한 건설 청부 업자의후처가 되었고[10]), 스미코와 함께 오타 집에 들어가 살았다. 어느 날 밤 다키가 집에 없을 때 오타는 스미코의 방에 들어가칼을 들이 대었지만 스미코가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아무 것도 안하고”(24) 방을 나갔

. 스미코가 12살 때이다. 이 일을 추궁하는 다키에게 오타는 뜨거운 물을 끼얹어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혔다. 그 후 약 반년 정도 다키 얼굴은화상 자국으로 마치 귀신처럼 되었”(25). 그 후 오타는 조금 조심했지 만 스미코는 다키가 돈을 받으러 평양에 갈 때면 반드시 함께 갔고 다키에 게 오타와 헤어지라고 부탁했다. 스미코는 경성의 친부 가네마츠에게 편 지를 써 종로소학교로 전학한 뒤 경성제일고등여학교에 합격하고, 1년 간 다니다 평양고녀로 전학하다. 스미코가 계속 친부와 기거하게 되면 결국 다키도 가네마츠에게 가게 될 것이라 우려한 오타의 제안 때문이었

. 스미코는 중간에 늑막염, 결핵 등에 걸리기도 했으나 기숙사와 하숙에 살면서 여학교를 마치고 평양의 한 백화점에 취직을 했다.

스미코가 여학교를 졸업할 무렵 다키는 오타와 헤어지려고 마음을 먹고 살충제 회사인후마키라의 외판원으로 만주로 갔다. 평양에 혼자 남은 스미코는 하숙을 하면서 백화점 일을 계속했다. 결국 다키는 오타와는 헤 어졌고 만주에서 다케이시(武石)란 남자의후처로 들어갔다. 다케이시 는 1872년 생으로 열두 살 위인 부인이 있었지만 그녀는 아들과 무순에서 살고 있었기에 다키는 첩이라 해도 비교적 자유로운 처지다. 다키와 다 케이시는 남만주 금주(錦州)에서 여관 겸 요리집 입성관(入城館)을 운 했다. 이후 일본군이 후루다오(葫芦島)에 항구를 만들고 만철노선을 연장 했을 때쯤 후루다오로 이주해 배달 도시락업과 요리집으로, 낚싯배와 뱃 사공을 부릴 정도로 번창했다. 군 관계자를위문(慰問)”하는 데도 애를 썼다. 만주에서 패전을 맞이한 다키 가족은 1946 5월 일본으로 귀환하 다. 호적에 입적은 안했지만 다키는 1952년 다케이시가 일본 고치시에 서 사망할 때까지 20년간 같이 살았다.[11]) 다키는 1958년 사망했다.

<그림 1> 노무라 스미코의 회고록과 이 책에 실린 노무라 다키 및 하세가와 가네마츠 사진

살펴본 것처럼 다키는 어린아이가 딸린 이혼녀로, 별다른 자산도 없이 낯선 땅으로 이주를 감행했다. 게이샤 일 외엔 특별한 직업경력도 없었던 그녀는 식민지 조선에서도 게이샤로 일하면서 생계를 꾸려갔다. 이주 초기 머리 만지는 일을 시도했었으나 결국 화류계 일이 평생 직업이 되었다. 남만주에서 여관 겸 요리집을 할 때는 보다 젊었던 시절 다키 자신과 비슷 한 처지의 여자들을 고용했을 것이다. 다키가 비록 온갖 우여곡절을 이겨내 고 식민지에서의 체류 후반부에는 비교적안정적인삶을 살 수 있었지만, 그녀의 삶은 오빠 이치타로를 필두로 여러 남자들에 의해 굴곡진 것이었다. 이치타로나 평양 과자가게 남자, 사기꾼 회사원, 건축청부업자 오타 등은 매우 적극적으로 다키를 착취 기만하거나 심한 폭력을 서슴지 않았으며, 나고야 군수공장의 배속장교 역시 다키의 삶의 계획을 틀어지게 하는데 일조했다. 혼인을 하거나 함께 가정을 꾸렸던 가네마츠나 다케이시 모두 이혼하거나 본처가 있는 경우로, 이 역시 다키의 취약한 위치를 보여준다. 다키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과정에서 제국의 여러 변경으로 이식된 수 많은 불우한 여성 중 한명이었다. 아래에서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여성 섹슈얼리티의 동원을 연결시켜 고찰함으로써 다키의 한반도 이주와 식민지에서의 삶을 맥락화시켜 보고자 한다.

3.     가라유키상과 예창기작부, 식민자 사회의 주변부 여성들

송연옥이 지적하듯근대란 이름도 없는 서민이 세계사에 끌려들어가, 오랫동안 살던 익숙한 고향을 떠나 대규모 이동을 시작했던 시대”(宋連玉, 2002: 61). 특히 현재처럼 교통과 운송 수단이 발전하기 전에는 전쟁 과 식민지배야말로 사람들을 대규모로 이주시키는 주요 계기가 되었다. 일 본 제국의 한 변경으로서 식민지 조선은 여성을 포함해 많은 일본인 서민들 이 새로운 삶의 기회를 찾아 이주한 곳이었다.

일본은 한반도 식민화 과정의 초기 단계부터 일본인들의 한반도 이주를

장려했지만 초기식민’(植民) 사업은 남성, 특히혈기왕성한 청년의 사명으로 개념화되었다(권숙인, 2006). 실제로 이주 초기 단계 (대략 러일전쟁 이전)에는 남성 단독 이주가 많았고, 이들은 대개 모험과 일확천금의 기회 를 찾아 도한한 사람들로 그 출신도 빈농, 소상인과 소자본가, 부랑자나 뜨내기들이 많았다(Duus, 1998).

여성이주자들 역시 이주시기에 따라 그 구성에서 큰 차이를 보 다. 이 주의 아주 초기에는 남성 수가 절대적으로 많았으며, 여성들 중 적지 않은 수가매춘여성를 비롯해 단신으로 이주하는 남성을 위한 서비스업에 종사 하는 사람들이 다. 사실 여러 연구가 지적하듯 성을 파는 일본 여성들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에 앞서 해외의 여러 지역으로진출했다(加納実紀

, 1993; 鈴木裕子, 1993; 森崎和江, 1976). 그 결과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일본인들이 거류하는 적지 않은 지역에서 여성의 수가 남성의 수를 초과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블라디보스톡의 경우 1884년 일본인 여 성과 남성의 수는 각각 276명과 119명이었다(加納実紀代, 1993). 이 도시에 거주하는 다른 외국인 집단의 성비와 비교해 볼 때 일본여성의 비율은 아주 예외적으로 높은 것이었다 (< 2>). 블라디보스톡에 와 있던 일본인 여성 들 중 다수는가라유키상’(唐行きさん)[12])이라 불리던 여성들이었다. 이들 은 대개 가난한 농가의 딸로 부모에 의해 성매매업자들에게 팔려 외국 군대 가 많이 주둔하고 있는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의 각지를 비롯해, 멀리는 북미와 남아프리카까지 보내졌다.

< 2> 블라디보스톡 거주자의 국적과 성별 (1884)

성인

아동

합계

 

 

 

 

 

남성

여성

남아

여아

 

러시아인

4,191

818

636

577

6,222

구미인

46

14

18

9

87

일본인

119

276

7

10

412

중국인

3,016

3

 

 

3,019

조선인

347

7

 

 

354

합계

7,719

1,118

661

596

10,094

출처: 加納実紀代, 1993: 203.

1876년 이후 한반도 각지에 생겨난 개항장도 일본의 성매매업자에게 새 로운 시장을 제공했고, 이들은 개항지에 첫발을 내디딘 최초의 일본인 집단 중 하나 다. 부산의 경우 개항 5년 뒤인 1881, 일본인 거류민 중 남성 997명에 성매매업소(貸座敷) 9, 이곳 소속 창기가 94명이었다 (야마시 타 애, 1997: 146). 서울의 경우도 개항 3년 뒤인 1885, 일본인 거류민 89명 중 여성이 18명인데그 절반은 남편을 따라온 아내이고 나머지는 첩이거나 작부”(宋連玉, 2002: 65) . 원산이나 인천 등 다른 개항장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며 일본은 한반도 주둔 병력을 늘렸고 이들을 상대하는 군납업자들도 가세하면서 성매매업을 포함 한 유흥업은 더욱 성황을 맞이했다. 1896년 서울에 거류하는 일본인의 직 업통계를 보면 전체 1,749명 중 여성이 730명이고, 이 중 140명이 작부 혹은 창기, 10명이 게이샤로(高崎宗司, 1993: 16) 여성 다섯 명 중 한명은화류계여성이었던 셈이다.

이 여성들은 대개 제겐(女衒)이라 불리는 인신매매업자를 통해 한반도로 건너갔다. 가난에 몰린 부모들은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어린 딸들을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업자들에게 넘겼고, 상당한 규모의 전차금에 묶인 여성들은 실질적인 인신구속 상태에서 일을 하며 그 빚을 갚아야 했다. 사실 메이지 이후가라유키상이 등장하기 전에도 가난한 집에서 먹는 입을 줄이기 위 해, 혹은 나머지 가족을 위해 딸들을 파는 것은 드문 일은 아니었으며 (Stanley, 2012), 이런 관행은 에도시대에 성립된 공창인 유곽의 존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이렇게 볼 때 비록 유곽은 아니었으나 11살 난 다키가 게이샤 집에 팔려간 것은 아주 예외적은 운명은 아닌 셈이다.

< 3>은 일본이 한국을 강제 병합한 1910년의 한반도 내 일본인 직업 구성으로, 여성 전체 유업자 중예창기작부’(藝娼妓酌婦)의 비율이 무려 50.18%에 달한다. 물론 이 수치는 공식적으로 등록된 경우만 포함하는 것 이다. 덧붙여 이 통계는 여성의 직업 중 예창기작부 외에도 잡업이나 육체 노동 등의 비율이 매우 높다는 점, 그 외에도 극소수의 교사와 공무원을 제외하고는 여성 유업자 대부분이 1차 산업과 상업 종사자 음을 보여준

.

< 3> 조선 거주 일본인의 주요 직업 (1910)

여 성

 

남 성

 

순위

직종

종사자 수

총 여성 유직자

대비 비율(%)

순위

직종

종사자 수

총 남성 유직자

대비 비율(%)

1

예창기작부

4,093

50.18

1

상업

15,877

28.10

2

잡업

1,517

18.60

2

잡업

12,336

21.84

3

상업

1,048

12.85

3

공무원

9,341

16.53

4

육체노동

578

7.09

4

공업

6,520

11.54

5

농업

261

3.20

5

육체노동

6,251

11.07

6

어업

213

2.61

6

농업

2,518

4.46

7

조산원

171

2.10

7

어업

2,125

3.76

8

공업

137

1.68

8

교사

676

1.20

9

교사

93

1.14

9

의사

397

0.70

10

공무원

5

 

10

신문잡지

기자

186

0.33

전종사자 수

8,157

99.45

전종사자 수

56,493

99.53

출처: 朝鮮總督府, 1912.

* 직업은 주업(主業) 기준이며, 약간 수의 기타 유업자(有業者)는 제외하 음.

일본 여성의 직업과 관련해 또 하나 흥미로운 자료는 1930년 국세조사의

직업통계이다.[13]) < 4>는 이 통계 중 여성과 관련이 높은 직업의 민족 별·성별 구성인데 이 중 교사, 간호사, 부기·회계, 속기·타이피스트, 전 화교환수 등은 근대화와 도시화에 의해 1920년대 이후 여성들에게 새롭게 열린 대표적인 직종으로, 근대가 여성들에게 부여한 새로운 공적 역할을 상징했다. 이 근대적 직종 중 교사를 제외하고는 일본여성이 조선여성에 비해 훨씬 많은 수가 고용되어 이들이 식민자로서 누린 혜택을 잘 보여 준다.17) 식민지배의 효과는 반대로 하층 직업에서도 나타나가사사용인의 경우 조선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예기·창기의 경우 일본인 예기와 창기가 각각 2,341명과 1,505명인데 비해 조선인 기생과 창기는 3,621명과 1,664명으로, 위의 다른 직업과 달리 민족별 차이가 두 드러지지 않는다.18) 여성 총 수에서 차지하는 비율로 환산할 경우 일본인 여성의 경우가 훨씬 높아진다. 달리 말해 유흥업은 식민자 커뮤니티가 안정 기로 접어든 이후에도 일본 여성들의 중요한일터.

다키가 조선행을 단행한 것은 1918년의 일이다. 살펴본 것처럼 다키는 카네마츠와 이혼한 뒤 머리 만지는 일을 배웠고, 조선에 와서도 미장원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갔다. 그러나 오빠의 추적을 피해 평양으로 옮겨가면서 오키야를 겸하고 있는 요리집으로 가서 게이샤로 일하기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자세한 정황을 알 길은 없지만 급히 피신해 간 낯선 도시에서 (어린 아이가 있는) 여성이쉽게시작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숙식을 제공하는 오키야는 이미 게이샤 경력이 있는 다키에게는 꽤나 현실적인 선택이 되었을 것이다.

17)  종사자의 절대 수 외에 인구대비 비율은 물론 더욱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1930년 당시 조선거주 일본인 여성은 241,476명인데 비해 조선인 여성은 9,682,544명이었다.

18)  일본폐창회(廢娼會) 회원인 오쿠무라 류조는 1926년 경성과 인천의 공창 실태를 돌아보고 쓴 보고에서조선인 창기 수와 비교해 일본인 창기의 수가 오히려 많은 것”(奥村龍三, 1926: 21)에 놀라움을 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예컨대 경성의 한 유곽에는 조선인 창기 가 227명에 비해 일본인 창기 333, 인천의 유곽 경우 조선인 창기 73명에 일본인 103명 이라고 되어 있다.

< 4> 주요 여성 직종의 민족/성별 구성(1930)

 

총수

남성

여성

일본인

조선인

남성

여성

남성

여성

학교장/교사

15,858

13,587

2,271

5,462

1,146

8,058

1,059

간호사

2,870

142

2,728

21

1,967

121

747

부기/회계

6,653

6,426

227

2,702

189

3,656

37

속기사/타이피스트

132

31

101

6

96

22

3

전화교환원

1,663

170

1,493

52

1,269

118

224

가사사용인

120,877

28,966

91,911

145

3,391

28,298

88,453

예기(기생)

5,962

--

5,962

--

2,341

--

3,621

창기

3,170

--

3,170

--

1,505

--

1,664

여관·하숙·요리 점·음식점의 하 녀(女中)와 급사

(給仕人)

16,259

1,393

14,866

186

4,256

941

10,602

출처: 朝鮮總督府, 1934-1935.

한편 화류계 일본인 여성의 존재를 종단으로 살펴보면 식민지배의 전

기간을 통해 그 숫자가 크게 줄어들지 않았음이 확인된다. < 5>에서 보 듯이 1910년에서 1940년 사이 화류계에 종사한 일본인 여성의 수는 4천여 명 대의 규모를 유지했고, 전통적인 유흥업종에 더해 카페가 새로 등장하면 서 이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추가되었다. 식민지 조선의 유흥산업은 1920 년대 말 경제공황으로 인한 부진과 만주사변 직후의 일시적 특수 등을 겪으 면서도 크게 흔들림 없이 유지되었으나,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가 확산되 면서사치와 유흥에 대한 총독부의 통제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19) 그러나 다른 한편 일본의 중국침략은 유흥업 종사자에게는 새로운 시장을 열어 주었고 한반도의 세한 업자들은 활로를 찾아 중국으로 향하 다(야마시

, 1997; 尹明淑, 2003). “군인을 상대로 하는 접객업과 각종 상업,

19)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이후 확산되는 전시상황에서 식민지 조선 내 유흥접객업에 대한 총독부의 통제정책과 경찰의 규제와 단속, 그로 인한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유흥업자들이 모색한 경 전략 등 1930년대 조선의 유흥업 전반의 상황을 고찰한 것으로는 윤명숙(尹明淑, 2003)을 참조할 수 있다.

군대위안소 경 은 접객업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단기간에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업종”(尹明淑, 2003: 377)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다키와 다케이시가 남만주로 이주하게 된 것, 금주와 후루다오에서 여관과 요리집 으로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경우로, 이들은 일본의 대륙침략이 열어 준 새로운 기회를 기민하게 잡은 셈이다.

< 5> 화류계에 종사한 일본인 여성의 규모(1910-1940)

년도

예기

창기

작부

카페 여급

합계

1910

977

851

2,263

 

4,091

1920

1,336

2,289

705

 

4,330

1930

2,156

1,833

442

 

4,431

1940

2,280

1,777

216

2,226

6,499

출처: 朝鮮總督府, 1911-1942.20)

4.     일본인 식민자 사회의 섹슈얼리티와 젠더

일본은 식민통치나 제국경 에서 다른 서양 제국들과 여러 차이를 보인

것으로 연구되어 왔는데, 식민지에서의 섹슈얼리티 통제와 관련해서도 차 이를 드러낸다. 서구 식민지에서 가장 민감한 사안 중 하나는식민지배자 와 피지배자 간의 성적 결합”(박형지·설혜심 2004: 53)이었다. 유럽의 식 민지에서는, 특히 성비불균형이 극심했던 식민지배 초기에는, 식민당국은 어쩔 수 없이 백인 남성이 현지여성을 첩으로 삼는 것을 허용하고 현지여성 과 혼인을 장려하기도 하 다. 그러나 식민지가 안전해진 다음에는 백인

20) 총독부 통계연보경찰항목 중경찰의 규제와 감독을 받는 업종에서 추린 자료이다. 여기에는 무기, 의약품, 운송 및 숙박, 인력거꾼 등을 포함해 100여 개 이상의 항목이 열거되어 있다. 카페 여급에 대한 통계는 1935년부터 포함되었다.

여성들이 대거 유입되었고, 이는 백인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의도덕과 관련해서도 커다란 향을 가져왔다. 예컨대 델리(수마트라)의 경우 1920 년대 유럽여성의 유입은 식민당국이 식민과 피식민간의 인종화된 경계를 강화시키는 구실이 되고, 유럽 남성들을 통제하는데 기여하 다. 백인여성 들 또한 자신들의 이유 때문에 남성들의 성적 방종을 통제하고 인종적 분리 를 철저히 하는데 앞장서기도 하 다. 이런 과정에서 백인 여성은 백인의 독특한 문화와 도덕의 수호자가 되었고, 백인 여성의 명예에 대한 어떤 침 해도 백인의 우월성과 유럽의 지배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었다(Fisher-

Tiné, 2003; Stoler, 2002).

서구의 식민지에도 유럽 혹은 미 대륙으로부터 건너 온 백인매춘여성

이 존재했고, 이들을 이동시키고 거래하는 네트워크도 작동했다. 그러나 서구 제국은서양의매춘여성의 불건전한 [식민지]이주는 백인의 위신과 도덕적 권위를 깎아내리는 것”(Scully, 1998: 855)으로 간주해 성산업에 종사하는 백인 여성을 통제하고 그 규모를 제한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식민지배가 인종적, 도덕적 우월성으로 정당화되는 상황에서 성적 문란함 과 도덕적 타락은 쉽게 지배인종의 위신문제로 연결되었고, 그런 맥락에서 통치의 안정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서구의 제국들과 비교해 일본은 식민지에명예롭지 못한일본 여성이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우선 지적해야 할 것은 일본의 정책담 당자들은 일본인의 해외거류지나 식민지에 자국 여성들이 건너가 성과유 흥을 파는 것을 일종의필요 악으로 생각했고, 그런 이유로 오히려 지원하 기도 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메이지 관리들은 에도시대부터 운 되어 온 공창에 대해공공의 도덕을 지키고, 경제발전을 꾀하며, 국력을 증진시키

기 위한 정책적 수단의 한 구성부분”(Garon, 1997: 89)으로 간주하 다.21) 위생적이고 관리된 성을 제공하는 것은 단순히 남성의 성욕을 해결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국익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후쿠자와

21) 잘 알려진 것처럼 메이지 정부는 서구의 시선을 고려하여 유신 직후인 1872예창기해방 령을 선포하 지만 바로 다음 해에본인이 진심으로 원할 때는 허가한다는 명목으로 유곽을 부활시켰다.

유키치(福沢諭吉)를 비롯한 적지 않은 메이지 정책결정자들은매춘여성의 해외도항을 지지하 다.22)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러한 도구주의적 사고는 빈한한 집안에서 생존을 위하여 딸들을 파는전래의 관행과 더해져 19세기 후반 이후 전개된 일본의 대외 팽창 과정에 많은 주변부 여성을 가담시켰고, 한반도에서도 일치감치 성매매를 포함한 유흥업이 제도화되어 식민지 경 의 한 구성부분으로 운 되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총독부는 일련의 법령을 발포·시행하면서 성매매업을 포함한 유흥업 전반을 관리하기 위한 제도를 정비하 다. 우선 그때까지 각 지역별로 상이했던 유흥업에 대한 법규를 통일하여 1916, ‘대좌부(貸座敷)창기취체규칙’ ‘숙박 업취체규칙’ ‘요리점음식점 업취체규 칙’ ‘예기작부예기치옥(置屋) 업취체규칙을 발포하 다. 이른바 공창제의 전면적 시행이었다.23) 이로 인해 공창을 구성하는 창기와 대좌부업자 외에 예기와 작부 및 그들을 고용하여 업을 하는 업주들도 경찰서장의 허가를 받았고 규정된 조건과 규칙을 준수하도록 되었다. 총독부가 공창제를 시행 하면서 내세운 명분은위생”(성병확산 금지)질서”(사창 규제) 지만, 그 이면에는 이전의 거류민단과 마찬가지로 재정적 효과에 대한 기대도 있었다.

물론 이렇게 특정 여성들의 섹슈얼리티를공익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으로 간주하거나 편리한 관리의 대상으로 여긴 것은 관리들에게만 국 한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인 식민자사회 전반에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남성 중심적이고 이중적인 태도가 만연했고, 이는 성매매의 제도화와 화류계의 번창을 저변에서 뒷받침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인 커뮤니티에서 <조 선과 만주, 朝鮮及満州>와 함께 대표적인 월간지 던 <조선공론, 朝鮮公論> 의 지면은 화류계에 대한 일본인 사회의 전반적인 사고와 분위기를 엿볼

22)  후쿠자와 유키치는 자신이 만들고 운 했던 시사신보(時事新報) 지면을 통해창부(娼婦)” 의 해외이주가나라의 체면을 해할 것이란 우려를 일축한다. 해외이주자 중에는 단신 이주 남성이 많은 까닭에창부의 필요성은 명백하며 따라서국민의 해외이주를 장려하 기 위해서”, 그리고 어차피 국내에서도 같은 일을 할 여성 본인들의 이익을 위해서도 이들 의 해외 직업이주를 자유롭게 해야 한다는 논리에서 다(福沢諭吉, 1896).

23)  한반도에 공창이 설치되어 간 과정에 대한 선행연구는 주석 3)을 참조.

수 있는 창구 중 하나이다.24) <조선공론>은 월간종합지로서 식민정책에 대한 고관들의 견해, 정치경제적 현안과 관련된 사설과 평론, 주요 정치가 들에 대한 인물평, 사회기사, 화류계 주변의 가십, 문예란, 독자 편지 등을 싣고 있었다. 특히 <조선공론>의 상당한 지면은 화류계 관련 기사들로 채 워졌고, 온갖 자극적인 제목만 보면중산층 지식인들을 위한 잡지라는 주장이 무색할 정도이다. 이런 상황은 출간부터 전시상황이 심화되는 1930 년대 중반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

화류계 여성에 대한 남성 저자들의 글 속에서 이 여성들은 스캔들의 대 상이 되고 비인간화되며, 때로는악마화되거나 혹은 찬양받기도 한다. 이 들은 아주 자주 적나라한 평가의 대상이 되어 등급화된다. 예컨대 매 호마 다 실리는월간 게이샤 랭킹에는 경성의 150여 명에 달하는 게이샤들의 순위를 열거한 도표가 실리며, 요정·여관·카페 등의 서비스 시설과 그곳 에서 일하는 여성들에 대한 현장 평판기도 고정적인 메뉴이다. 이런 기사들 은 기본적으로 비슷한 형식으로 해당 시설, 이용 요금, 음식, 서비스 등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무엇보다 그 시설에서 일하는 여성 - 게이 샤, 작부, 여급, 여주인 등 - 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남성)독자들에게 이 화류계 여성들은 하나의상품처럼 묘사 되어 나이, 실명, 고향, 일하는 곳, 개인사, 인생여정, 강점과 장기 등 사적인 정보가 소상히 제공되고, 때 로는 사진과이용요금까지 제시되고 있다.

예컨대 화류계 여성들은 종종조선에 오는 옷감은 국산이 가장 많고

경성에 오는 여자 중엔 요코하마산이 가장 많다”(1913 11월 호) “게이샤 들에게 건강검진을 강요하면 상등품은 도망갈 것” (1916 7월호) 식으로상품화되거나, “돈 앞이라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개구리 같이 행동한 다”(1915 8월호) “카페 여급은 길들인 뱀과 같아서 어떨 때는 달라붙고 어떨 땐 새침하게 웅크린다식으로 비인간화되기도 한다. 혹은 화류계 여

24) <조선공론> 1913년부터 1944년까지 출간되었다. “조선통치에 대한 일본 지식인 집단의 비평을 지향하고 총독부 식민정책을 보좌한다는 명목을 내세우며 출간한 이 잡지는 “<조 선과 만주>중하층 재조일본인을 대변하는 논조가 많았던 점과 비교할 때일본 중상층 지식층을 대변하는 성격”(한일비교문화연구센터, 2007: xvii)을 띠고 있었다.

성들에 대해선의로 쓴 글 속에서도 칭찬이나 충고를 가장한 모욕적인 언급, 사생활 침해 등이 쉽게 발견된다.

화류계 여성에 대한 <조선공론>의 이러한 지면은 여성과도덕에 대한

일본인 사회의 지배적 시각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첫째로, 남성 과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강한 이중규범이다. 실제 <조선공론> 지면에 는, 특히 초창기에는보통여성들의 성적타락 가능성에 대한 강한 우려와 공동체의 성적규범을 위반하는 여성에 대한 적나라한 비난이 표출되곤 하

. 그러나식민지의 여성이 쉽게 빠질 수 있는 위험성에 비해 남성들은 성적 행동과 관련해 공동체의 경계나 비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오히려 남성의 화류계 경험과지식신사로서의 소양이거나, 적어도 숨겨야할 치부는 아닌 듯하다. <조선공론> 창간호에는사랑의 통감부와 총독부라 는 기획으로 총독부 고관들의 게이샤 관련 스캔들이 실명으로 실리고, 게이 샤 관련 특집 (예를 들어 1916 7월호의게이샤 검징이나 같은 해 8월호 의게이샤에게도진짜 사랑이 있을까”)에는 고관(高官)과 재계 명사들이 역시 실명으로 적극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둘째, 일본인 식민자 여성을 두 집단, 즉 여성적 도덕을 함양하는데 힘써

야 하는보통여성들과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고 제국의 팽창에 불가결한서비스를 제공하는 여성들을 서로 배타적인 범주로 구분하는 사고가 팽배 해 있었다. <조선공론> 지면에는 화류계 여성들에 대한모욕적인글들이 종종 여성의 사명, 즉 아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존경할만 한여성들에 대한 글들과 나란히 병치되곤 하 다. 예를 들어 1913 7월 부터 약 2년간 실린명사의 사모님들이라는 연속 기사는 유명인사의 아내 를 기자가 방문·취재하고 그들의 모범적인 가정생활과 훌륭한 살림 솜씨 를 찬양하는 형식을 띄고 있다. 이 연속 기사가 끝난 뒤에는(令孃) 감상기라는 연속물이 시작되어 정재계 유명인사의 딸들을 프로필 사진을 포함해 소상한 정보와 함께 소개하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미래의 주부가 되기 위해오로지 가사 일에 힘쓰고있다. 그러나 같은 호의 바로 뒤 페이 지에는신사의 유흥거리와 놀이”(1915 6) “인기투표 순위: 경성의 게 이샤와 기루(妓樓) 순위”(1915 6) “게이샤에게도진짜 사랑이 있을 까”(16 8월호)와 같은 기사가 실리고 있다. ‘보통여성들의 도덕성 함양 에 대한 강조와 성적타락 가능성에 대한 깊은 우려는 또 다른 여성들을 간단히 성적대상으로 취급해 버리는 태도와 너무나 큰 대조를 보이고 있어 서 이 양 집단의 여성들을 연결시켜 사고하기는 매우 힘들게 다가온다.

다키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다키가 조선으로 옮겨 올 무렵(1918)이면

경성의 일본인사회에서 유흥산업은 확고히 자리한 상태 다. 각 거류지에 서 1800년대 후반 혹은 1900년대 초반부터 운 되던 유곽(공창) 1916년 총독부에 의한 공창제 시행으로 전국적으로 제도화되었고, 이와 함께 요리 점 취체규칙 등에 의해 화류계 전반에 대한 제도적 정비가 진행되었다. 애시당초 다키는 미용업을 통해 생계를 꾸리며 유흥산업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25) 그러나 머지않아 다시 게이샤로 일하기 시작해 만 주로 가기까지 10년 이상을 평양 인근에서 게이샤 생활을 한다. 이에 대해 노무라 겐이치는할머니는 미용사를 하고 있었지만 생활은 어렵고, 또 여 러 남자의 구애를 받아서 결국 다시 게이샤를 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하

. 겐이치가 다키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추정인지 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설득력 있는 이야기이다. 특히 경성에서 급히 평양 으로 피신해야 했던 다키가 어린 딸을 데리고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방법 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게이샤로서 경력이 쌓인 다키에게 화류계는 적어도 가장 손쉽게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곳이었을 것이다.

5.     식민자 사회 주변부의 삶

언급했듯이 󰡔어머니, 노무라 스미코의 개인사 노트󰡕는 다키의 삶을 회상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딸 스미코의 관점에서 다키의 일생을 연대기적으로

25) 이 부분과 관련해 노무라 겐이치는, “그 당시 조선에는 일본인이 많이 진출해 있었기 때문 에 장사를 하는 상인들이 많았고, 그 사람들이 놀 때는 게이샤가 필요했다. 일본이 식민을 하고 번 하면 반드시 게이샤는 늘어나고 그러면 미용사도 필요하게 된다고 말했다.

재구성한 것이다. 따라서 특정 장면과 상황에 대해선 놀라울 정도로 상세한 묘사가 돋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다키 자신의 입장과 생각은 알 길이 없다. 또한 특정의 결정이나 행동, 사건의 상세한 배경이나 동기 등에 대해서도 매우 제한된 정보만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왜 반복적으로 빚을 졌는지, 그리고 대부분 좋지 않게 끝난 남성들과의 관계가 단순히 남성들의유혹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다키가주도한 면이 있었는지 답을 찾을 수 없으며, 게이샤로서의 삶, 조선으로의 이주, 그리고 만주에서의 삶에 대한 그녀 자 신의 평가도 궁금하기만 할뿐이다. 다만 제시된 내러티브를 통해 확인되는 것은 그녀가 유흥업 주변을 계속 떠돌았다는 것, 그녀의 삶이 오빠로부터 시작해 군수공장 배속장교, 주변의 부랑아, 사기꾼, 오타 등 가부장적이거 나 폭력적, 혹은 사기성 높은 남성들의 개입에 의해 반복적으로 굴절되었다 는 점, 그럼에도 40대 이후 만주에서는 비교적 안정된 삶을 위했다는 것 등이다.

대신 스미코는 사이사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남겨 놓았고, 단편적이나

마 아이와 어린 여성으로서 바라 본 주변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관찰을 싣고 있다. 그녀가 본 세상은 식민자사회 주변부를 살아가는 일본인들의 모습이다. 우선 스미코 본인의 삶을 따라가 보자. 스미코는 다키가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두어 살 때부터 큰 이모의 손에서 자랐다. 다섯 살이 되었을 때 다키를 동반해 조선으로 왔고, 다키가 경성에서 미장원을 할 때 를 제외하고는 오키야/요리집을 옮겨 다니며 살거나의부의 집, 학교 기숙 사 혹은 하숙집에서 자랐다. 매우 고단하고 불안한 삶이었을 것이다. 오키 야에서는 다른 게이샤나 종업원들과 함께 기거했으며, 여섯 살 무렵 다키가손님을 동반해 일본여행을 갔을 때는 다키의 동료 게이샤에게 맡겨진 채 두어 달간 불안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정주로 옮긴 뒤 살게 된 요리집에 서는 주인의 양자인 어린 남자아이와 그 아이의 할머니와 같은 방을 썼 다.26) 그 요리집에서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석유램프의 갓을 모두 닦는 것

26) 스미코는 이 상황이 싫었던 모양이지만그것도 어쩔 수 없다고, 그때까지 그랬던 것처럼 체념했다”(21)고 하고 있다.

이 스미코의 일로 정해져 있었다. 조금 세게 닦으면 유리가 깨지기 때문에 조심해서 닦아야 했다. 의부의 집에 들어가 살 때 의부로부터 성폭행을 당할 뻔한 위기도 겪고 이로 인해 다키도 심하게 화상을 입는다. 그래도 줄곧 다키와 스미코를지켜 주고있던 가네마츠가 있어 그에게 도움을 청해 일본인 사회에서 가장 명문여학교 던 경성제일고등여학교에도 입학

할 수 있었다. 1년 뒤 평양고녀로 전학해야 했고, 2, 3학년을 늑막염과 결핵 등을 앓으며 보내야 했지만 여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의 한 백화점에 취직했

. 같은 집에 하숙하던 스즈키 도메조가 청혼을 했지만 친부가 심하게 결혼을 반대했고 스미코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결국 다키의 도움도 받고 해서 결혼할 수 있었다. 항공정비사 던 도메조는 전쟁이 끝나기 전 병으로 사망했고, 스미코는 네 아이들을 데리고 만주의 다키에게 갔다가 그곳에서 패전을 맞고 1946 5월 일본으로 귀환하 다.

스미코가 본 주변의 어른들, 특히 남자들 중엔 별로좋지 않은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평양에서 소학교에 입학한 직후 학교 선생님이 휴일에 요리집에 놀러 온 것을 목도하고는어른에 대한 불신감이 생기기도 했고, 2학년을 맡은 교사가 여자애에게나쁜 짓을 해서 수감되어 있던 중 자살 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어린 마음에도 인간 불신, 남자 불신이랄 까, 그런 마음이 싹트고세상은 안 좋은 곳이군”(19) 하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가 오타의 첩이 되었을 때는아직 어렸지만 왠지 어머니가 나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계속 들”(22)었으며, 그 오타로부터 받은 위협은 큰 상처가 되었다. 4학년 때 선생님에게 한번 야단을 맞았는데 그 이유는 스미코가 오타를 아저씨라고만 부르고 절대 아버지라고 하지 않아 힘들다는 이야기를 다키가 전했기 때문이었다. 평양고녀 기숙사에 살 때 어머니가 보러 올 때면 다들예쁘시다고 했는데, 정작 스미코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고 다키가 조금 차분한 옷을 입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도메조가 스미코에게 처음 사랑을 고백했을 때 스미코의 대답은, “세 상을 잘 몰라서 남자는 거북합니다. 아니 남자가 무섭습니다,… 남자는 무 섭고 그래서 남자와는 가능한 한 친해지지 않도록 하고 있어요”(41) . 스미코(와 다키)의 주변엔 다양한 서민 군상들이 있었다. 정주에서 같은 집에 살던 게이샤는 버선을 수선해 신을 정도로 돈 쓰는데 엄격해 다들 뒤에서 흉을 봤고, 또다른 게이샤는 좋아하는 남자가 운전기사 는데 그가 자살해서 한동안 비관하 다. 4학년 때 담임은 다키와 같은 집에서 일하는 한 게이샤를 좋아했는데 그 일로 여러 문제가 생겨 결국 다른 학교로 옮겨 가야 했다. 스미코가 백화점에서 일할 때 하숙집의 같은 방을 쓰던 한 명은 밤에 카페로 출근했는데, 조선 사람과 연애를 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이미 조혼한 아내가 있었기 때문에집을 구할 때까지만이라는 약속을 하고 일본 인 여자 친구를 하숙집에 부탁했었다. 그는양반의 아들답게 옷차림도 좋 았다”(38). 뒤에 스미코와 결혼하는 스즈키 도메조는 야마가타 농촌의 여섯 째 아들로, 고향에 가고 싶어도 사정이 있어 못 가는 형편이었다. 아이가 없는 큰 형이 장차 동생인 도메조를 양자로 삼아 호주 승계를 시킬 계획으 로 이미 결혼시킬 여자까지 찾아 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27) 이 밖에도 생선가게 주인, 하숙집 할머니, 게이샤에 빌붙어 사는 사내들, 어린 아이들 을 내세워 흥행을 꾀하는 극장주 등도일본인 식민자사회의 주변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 주변부에서는 식민과 피식민의 경계나 그 접촉 양상도 다른 계층에서 와는 달랐을 것이다. 하시야 히로시는, 식민자로서 일본인 구역과 피식민자 로서 조선인 구역의 전반적인 이중구조에도 불구하고, 나아가 식민지배의 심화에 따라 그 이중구조의 격차가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이 조 선인에 비해 문화나 생활양식에서 압도적인 우위에 서 있지는 않았다고 지적한다. 일반적으로 구미의 식민지 거주자는 관료, 군인, 특허회사 고용 원 등으로 서구문명을 대표하는 상류계급의 생활양식을 과시하고 있었음 에 비해, 일본의 식민지에는 중류 이하의 일본인도 대량 진출했던 까닭에 일본인들이 구미인 식민자처럼 피지배 민족으로부터 일종의외경

27) 이 부분에 대해 노무라 겐이치는, “아버지[스즈키 도메조]는 막내 습니다. 일본 사회도 가난했구요. 우리 할머니[노무라 다키]도 막내 어요. 그래서 모두 집을 위해서 소모품처 럼 사용되든가, 독립하려고 하면 신천지에 가는 편이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 니다라고 평을 하 다.

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태는 아니었다는 것이다(하시야 히로시,

2005: 78-81).

도시의 중산층 일본인들이 현지사회와 별 접촉 없이 일본식 생활양식을

구가했던 반면, 어쩔 수 없이 조선인과 섞여 살고 일상을 나눠야 했던 일본 인들은 농촌의 농민들이나 도시의 하층이었다(梶村秀樹, 1974: 90). 마찬가 지로 일본인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허용된 엘리트 조선인들과 일본인 들의 만남에서도 식민과 피식민의 위계적 경계는 그리 일관적이지 않다. 중간층 일본인들의 회고에서 반복적으로 고백되는 조선인 양반에 대한경 외감압도당함”(권숙인, 2008: 120-121)은 이들이 식민지배자에 속하 기는 했으나 그것이 곧 경제력이나 문화자본에서도 헤게모니를 주도한 것 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달리 말해 다양한 위치의 접촉지대에서 이루어지 는 식민과 피식민의 만남은 일상 역에서의 식민지배의 양상을 한층 다면 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스미코의 회고에서 조선인이나 조선인과의 접촉이 많이 등장하지는 않는 다. 다키와 스미코가 주로 거주한 곳이 일반 주거지가 아니라 오키야/요리 집라는 특수 공간인 점도 있고, 스미코의 연령상 생활공간이 거주지와 학교 등에 많이 국한된 이유도 있을 것이다. 스미코가 처음 경험한조선은 조선 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대중탕에 갔을 때이다. 밖에서 많은 조선인들이 만세, 만세라고 외치고 있어 일하는 아줌마가 잠시 밖에 나가지 말라고 이 야기를 했다. 그때는 조선 사람들 사이에 반일감정이 강해서 작은 아이들까 지일본 사람, 일본 도깨비”(35) 하면서 일본 아이들에게 장난을 쳤다. 조혼으로 이미 본처가 있는 조선인 남성을기둥서방으로 사귀고 있는 카페 여급인 하숙생 동기는 식민지배로 인한 민족적 경계가 계층과 젠더에 의해 재편되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그 남자는 일본어도 유창했고, 양반답게 옷차림도 훌륭했다. 또 한명 등장하는 조선인은 스미코가 만주로 가기 전 잠시 머물던 친아버지 친구 집에서 가사노동을 하고 있던 할머니이 다. 아버지의 결혼 반대로 실의에 빠진 스미코는 그 할머니가 따로 불러서 맛보이는 젓갈, 고추장, 김치 등 조선음식을 맛있게 먹으며 잠시나마 위로 를 받는다.

6.     나가며

살펴 본 것처럼 다키의 생애사 기록에는 식민본국의 주변부로부터 식민

지로 밀려 나 식민자 사회 주변부를 살아갔던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다키와 주거를 같이 하며 일했던 동료 게이샤들, 조선인 유부남과 연애 중 인 카페 여급, 게이샤에 빌붙어 사는 사내, 게이샤를 첩으로 들인 뒤 폭력을 휘두르거나 의붓딸에게나쁜 짓을 하려했던 남자, 야마가타 농촌의 전통 적 이에제도로부터 도피해 온 젊은이, 회사 돈을 횡령하고 게이샤와 야반도 주를 꾀하는 남자, 극장 흥행을 위해 아이들을 혹독하게 훈련시켜 무대에 올리는 어른들. 이들의 모습은 비록 파편적으로만 그려져 있지만일본인 식민자사회를 구성했던 다양한 주체의 존재를 환기시킨다.

일본의 식민지는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자연조건이나 문화적 관행에 유사성이 컸기에 많은 일본인이 이주하 다. 이들 중에는 관리나 군인 등 식민통치에 직접 가담하고 있던 엘리트 층 뿐만 아니라 상공업자나 무직자 도 많았고 여성의 비율도 높았다. 군인, 경찰관, 관료 등 엘리트층을 중심으 로 형성되었던 서구의 식민자 사회와 달리 하층계급이 적지 않게 이주하여일본의 도시와 마찬가지의 일본인 사회가 형성”(하시야 히로시, 2005: 75) 되었던 점은 일본의 식민지 도시의 큰 특징이기도 하 다. 즉 다키의 조선 이주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아주 예외적인 것은 아닌 셈이다. 화류계 여성 을 포함하여 빈한한 농민, 세 자 업자 등식민자에 속하면서도 사회의 하층에 속했던 일본인들이 어떤 경위와 배경으로 식민지로 이주하 고, 여 전히 주변부를 살고 있지만 식민지배자의 일원으로 어떤 기회와 혜택을 누릴 수 있었는지, 이들이 경험하는 식민지 조선과 일본의 식민지배는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재현할 수 있다면 식민지 조선에 대한 연구는 훨씬 풍부해 질 것이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보고 싶은 문제는 다키와 같은 주변부 여성들의주체

에 관한 것이다. 다키는 반복적으로 남성들에게 유혹 받고, 기만당하고, 착취당했으며 그로 인해 한 곳에 정착해 사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특히 다키의미모는 그녀의 계급적 위치와 결합해 다키가 공장 일이나 머리 손질 일 같은보통의 일을 지속할 수 없게 만들었고, 그녀는 한반도로 이 주한 이후에도 끝까지 화류·접객업계를 벗어나지 못하 다. 그러나 남성 들에게유흥을 제공하면서 다키는 친정 식구들을 먹여 살렸고, 자신의 삶 을 꾸려가고, 결국에는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녀는 가난한 집안의 딸로 태어났고, 당시 일본에서 그런 처지의 여성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별로 많지 않았다. 화류계 여성으로서 타키의 삶을 어떻게 문제시하고평가해야 할까? 혹시나 일방적으로희생양화시켜버리는 위험성은 없을까? 이런 질문들은 일본에서 호스티스로 일하는 필리핀 이주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최근의 연 구에서 파레나스가 제기한 질문과도 연결될 것이다(Parreñas, 2011). 파레 나스는 필리핀 여성들이 여러 차원에서 겪는 취약성을 인정하면서도 여성 의 인신매매에 대한 서구의단일한시선에 비판을 제기한다. 그런 시각은 여성들의 다층적인 경험을 무시하고 그들의역능화’(empowerment) 가능 성을 제한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의 정책담당자들의 가정과는 달리 필 리핀 이주여성들은 자신들이 인신매매 당했다고 보지 않으며, 현재의 일을 계속하고자 하고, 때로는 자신들의 일과 그 덕분에 할 수 있는 역할에 자긍 심을 갖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어려운 쟁점에 대해 확정적인 답을 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주 여성노동자에 대한 연구가 좀 더 섬세하게 그녀들의 경험을 살리며 진행될 필요가 있다는 지적에는 일단 공감하고 싶다. 다키 자신이 자신의 취약함과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리고 당시 화류계 여성들의 주관적인 경험과 생각을 전해줄 자료도 거의 없다.28)

28) 다키의주체성과 관련해 고려해야 할 요소 중 하나는 일본에서전통적으로성산업 혹은 유흥업이 하나의로 어떻게 이해되어 왔는지 그리고 그 일의 속성이 어떤 것들인지에 대한문화적고찰일 것이다. 여기서는 일단 하나의 문제제기로만 남겨두고자 한다.

다른 한편, 화류계 여성들의 경험과 동기에 존재하는 폭넓은 편차를 인 정하더라도 다키의해피엔딩을 그저 찬양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곡 절 많은 다키의 인생여정을 따라 다키보다 더 취약했었을 여성들이 등장하 기 때문이다. 나고야에서 다키 부부가 운 하던 요리집에서 일하던 세 명의 여성 중 하나는 아버지에게 시달리다 열아홉 나이로 자살을 한다. 자세한 정황은 회고록에 나타나지 않지만, 남만주에서 다키가 성공적으로 운 하 던 여관 겸 요리집에는 또다른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을 고용하고 있었다. 다키의 삶을 가장 가까이서 관찰했던 딸 스미코는젊은 시절 원망과 증오 로 심신을 모두 앓았고”(3), “어린 마음에도 인간불신, 남성불신 같은 것이 싹텄다”(19)고 말한다. 장차 결혼하게 될 도메조가 사랑을 고백하자남자 가 무섭다”(41)고 대답한다. 스미코의 트라우마와 이름 없는 다른 여성들의 고난과 희생은화류계일이 여성에게 요구했던 끔직한 고통을 상상해 볼 수 있게 한다. 노무라 다키와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화류계 여성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식민과 피식민의 경계마저도 가로지르며 작동했던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무자비한 도구화이고, 여성의 신체를 통해 중재되었던 착취의 연쇄고리라 할 수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 사람들을 가르는 주요 경계와 위계는 물론 민족이었다. 그러나 화류계에 존재했던 상당수의 일본여성은 계급과 젠더 역시 제국의 구성원의 삶을 가르는 주요 변수 음을 환기시켜준다. 물론 계급 격차가 여성에게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지만 여성에게 계급적 위치는 종종 경제적 문제만은 아니었다. 이 연구에서 보듯이 계급상의 위치는 여성의 섹슈얼리 티에 대한 도구주의적 사고와 맞물려 그것을 공적 동원과 통제의 대상으로 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 식민지에서 펼쳐지는 민족·계층·젠더간의 다양 한 접촉지대를 드러내고 이를 통해 식민지배의 복잡한 역학을 좀 더 섬세하 게 잡아내는 것은 향후 중요한 연구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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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ese Female Entertainers in Colonial Korea:

Focusing on the Life Story of a Marginalized Geisha

Kweon, Sug-In

(Seoul National University)

This paper contextualizes the dramatic life of Nomura Taki, a unfortunate Japanese woman who survived through the turbulent period of Japanese imperialistic expansion. Born in the middle of the Meiji era (1888), Taki migrated to colonial Korea as a young single mother in order to escape from her brother’s incessant exploitation and demand. Even though Taki could survive all the hardships and carve out her independent life in the end, her life was full of ups and downs repeatedly exploited, deceived, and humiliated by men. Taki belonged to the group of underprivileged Japanese women who Japanese imperial/colonial expansion transplanted to various frontiers of empire including Korea and whose lives overseas were intricately entwined with the empire’s ambitions.

In contextualizing Taki’s life, this paper explores Japanese women in the gay quarters of colonial Korea and analyzes the prevailing attitudes of the colonial policy makers and the Japanese settler community toward women’s sexuality. It also questions whether the Japanese empire did not consider the existence of Japanese entertainers in the colony as a blow to national honor. Existing data show that, contrary to many Western empires, Japanese colonial policy makers were not concerned with demarcating their women of empire from the local colonized women. They instead clearly classified Japanese settler women into two groups and applied different sets of regulations and morality. Entertainment women and their commodified sexuality were considered indispensable to ‘the order of community’ and the expansionist project of empire. The substantial number of Japanese women in the pleasure quarters in colonial Korea informs that gender and class were as critical as ethnicity in dividing and determining ways of life among members of empire. It also highlights the importance of representing underclass women’s lives in the historiography of Japanese colonialism. This paper is a preliminary endeavor to that goal.

Key Words

Japanese entertainers in colonial Korea, Japanese settler community of colonial Korea, marginalized female colonizer, women’s sexuality and empire building, gender and colonialism

    : 2014.  2. 26.     : 2014.  4. 21. 게재확정일: 2014.  4. 22.



[1] ) 여기서화류계 여성이란 표현은 유흥업 혹은 성산업에 종사하던 여성들에 대해 당시 일본 인 사회에서 쓰던 통칭으로, 예기(게이샤), 창기, 작부 등을 포함한다. 이들은 개념적으로 구분되고 공창제 하에서는 허가증도 따로 발급되었으나 현실에서는 그 구분이 애매했다. 게이샤의 경우’()를 파는 사람으로 매우 높은 수준의 기예를 갖춘 고급게이샤도 있었 으나 다른 한쪽에서는 창기업을 병행하는 경우까지 스펙트럼이 넓었고, 실제로 양쪽 허가증 을 모두 가진 경우도 적지 않았다(日本遊覽社, 1935). 적어도게이샤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사람들은 일정정도 예술적 성취를 갖추고 있었지만 이들이 성매매와 연결된 정도는 매우 다양했고 결코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었다(Stanley, 2013).

[2] ) 다키 위로 이미 결혼한 두 명의 오빠와 세 명의 언니가 있었으나 이들이 가족의 생계에는 별 도움이 안 되었던 듯하다.

[3] ) 세 명의 여자를 고용했고 그들이 함께 기거했던 것으로 보아 오키야(置屋: 예기 포주집)를 겸한 요리집으로 보인다.

[4] ) 다키의 손자 노무라 겐이치는 이 이혼에 대해, 애초 다키가 가네마츠와의 결혼이 크게 내키 지 않았지만 게이샤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혼을 했고, 5년 정도 결혼생활을 했으니 전차 금을 갚아 준 것에 대한 최소한의 갚음은 된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는 해석을 하 다.

[5] ) 다키가 미용 일을 배우기로 한 것에 대해 노무라 겐이치는, “게이샤는 안 된다, 어떻게든 자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라고 평했다.

[6] ) 노무라 겐이치가 전해 준 호적 사본의 기록을 보면, 다키는 재혼 과정에서 호주의 허락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두 번째 이혼 후 원 (친정)호적으로의 복귀가 거부되었고, 일가를 새로 창설하는 신청서를 제출하여 이 신청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되어 있다. 다키의 딸 스미 코는 오랫동안 친아버지 하세가와 가네마츠의 호적에 있다가 결혼 직전 다키의 호적으로 편입되면서 노무라로 성이 바뀌었다. 스미코의 남편 스즈키 도메조(鈴木留蔵)는 서양자(婿養子)로 혼인을 하여 역시 노무라로 성이 바뀌었고 이 부부의 아들이자 다키의 외손자인 겐이 치 역시 노무라 겐이치가 되었다. , 이 노무라 집안의 구성원에게 노무라라는 성은 혈연적 연결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7] ) 다키의 첫 남편 가네마츠는 다키 모녀가 경성으로 온 조금 뒤에 이들을 따라 역시 경성으 로 건너와 아사히신문사의 경비 일을 하면서 필요할 때마다 모녀를 돌봐 주곤 하 다.

[8] ) 요리집에서 연회를 위해 의뢰를 하면 게이샤를 송출·파견하는 집으로 요즘의 연예인 소 속사 같은 역할을 하던 곳이다. 소속 게이샤들은 대개 오키야에서 숙식을 했다. 원래는 게이샤 파견 일만 하는 것이었으나 오키야와 요리집을 겸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9] ) 정주로 옮긴 부분부터, 달리 말하면 스미코가 소학교 1학년에 다닐 무렵부터 어머니 다키 의 얘기는 상대적으로 개략적으로 진행되고 스미코 자신의 관찰과 생각이 많이 등장한다.

[10] ) “물론 입적은 하지 않았”(22)다고 되어 있어 정식 혼인인지 첩이 된 것인지 불분명하다. 앞의 부인은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나이 많은 여자라고 되어 있다.

[11] ) 스미코는 평양의 하숙집에서 만난 스즈키 도메조와 결혼했고, 비행기 정비사인 도메조가 전쟁이 끝나기 전 병사한 뒤 네 명의 아이들과 만주의 다키 집에 머물다가 패전을 맞이했 다. 도메조 역시 야마가타현 농가의 막내아들로, 더 나은 기회를 찾아 조선으로 단신 이주 한 경우 다. 호주인 맏형이 아들이 없어 도메조를 양자로 삼을 계획이었고 인근의 여성을 이미 며느릿감으로 맞아놓은 상태 다. 도메조는 귀향하지 않고 스미코와 혼인하여 다키 호적에 서양자 노무라 도메조로 입적하 다.

[12] ) ‘가라유키상은 문자 그대로 하면당나라로 가는 자,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돈을 벌기 위해 외국으로 갔던 일본인 매춘여성을 지칭한다. 1980년대 이후 일본의 유흥산업 으로 유입된 외국인 여성들을자파유키상이라 칭하는 것은 여기에 빗댄 말이다.

[13] ) 식민통치 기간 중 조선총독부는 다양한 통계조사를 실시하 다. 직업통계와 관련해서는 직업 분류 범주도 계속 바뀌었고 조사의 실시 기간도 서로 달라 특정 직업에 대한 통계를 전시기에 걸쳐 일관되게 추출하기가 쉽지 않다. 그중 1930년 국세조사는 직업 범주를 세밀하게 분류하고 종사자의 지역별·민족별·성별 구성도 조사하는 등 가장 상세한 직업 관련 통계로 간주되고 있다. ‘예창기작부와 관련해서는 총독부 통계연보의경찰항목 중경찰의 규제와 감독을 받는 업종’(警察取締営業其) 통계가 1910년에서 1942까지 일관되게 예기·창기·작부를 민족별로 집계하고 있어 통시적인 추이를 알 수 있다. 다만 이 통계치는 국세조사와는 일정한 차이를 보이는데, 1930년의 경우 일본인 예기와 창기가 각각 2,156 명과 1,833, 조선인 예기(기생)과 창기가 2,274명과 1,370명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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