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신교의 사대주의와 반공주의
수구 기득권 체제와 공고하게 연합한 한국 기독교의 역사
기자명 박철수
승인 2016.04.08 08:46
본문에서 출처 표시가 안 된 인용문들은
'김동춘, <대한민국은 왜?>, 사계절, 60~102쪽,
강인철, <한국 개신교와 반공주의>, 중심, 57~140쪽'에서 요약 인용한 것입니다. - 편집자 주
구한말 무렵 개화 바람이 불자 황해도 신천에는 기독교라는 손님이 찾아왔다. 일제강점기에는 다른 기업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라는 또 다른 손님을 맞았다.
황석영의 소설 제목 <손님>(창작과비평사)도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는 기독교 사상과 자본주의 계급 차별을 타파하는 길을 제시했던 공산주의는 식민지 질서에 환멸을 느낀 이들에게는 복음이었다.
한경직 목사와 반공주의
"신천은 구한말 이후 반봉건과 문명개화라는 두 개의 노선, 즉 기독교와 공산주의를 축약했다. 1945년 말부터 우익 보수주의자들은 '반동분자'로 몰려 엄청난 박해를 받자 9월 말에 월남했고, 다른 기독교인·친일지주·부자들도 1945년 말부터 대거 월남했다. 이들에게 남한은 천국이였다. 그러나 이 천국에도 '공산주의'가 준동하는 것을 본 그들은 극도의 공포를 느꼈다.
1950년 10월 중순 이후 인민군은 후퇴했으나 유엔군이나 국군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던 치안 공백 상태에서 우익 기독교 청년들이 1940년 이후 그들을 탄압했던 지역에 좌익 인사들과 그 가족들을 보복 학살했다. 작가 황석영은 소설 <손님>을 통해서 신천 학살은 미국이 아닌 현지의 우익 치안대와 기독교 목회자 등이 저질렀으며, 그 원인은 1940년 이후 사회주의 정권이 우익 인사들에게 가한 탄압과 학살이라고 말한다."
결국 1940년 이후 북한에서 진행된 토지개혁과 사회주의 정권하에서 탄압을 받고 전쟁 중 인민군에 학살당한 우익 월남자들이 가진 수난의 기억은 이후에 남한에서 극우 반공주의와 정치 테러를 정당화하는 배경이 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학살의 피해자인 동시에 북한 지역에서, 그리고 남한으로 내려와 월북자나 좌익 가족을 학살한 가해자이기도 하지만 이런 사실은 남한에서 금기에 속한다.
1945년 말에 월남한 사람들은 주로 기독교인이거나 계층적으로 중상류층으로 속했던 사람들로 미군정 산하기관에 쉽게 취직할 수 있었다. 이들 중 월남한 다수 청년들이 한경직 목사의 영락교회로 몰렸는데, 한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 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윤정란, <한국 전쟁과 기독교>, 한울, 2015, 55~56쪽/김병리, <한경직 목사> 재인용)
반공주의는 월남한 교인들이 한경직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영락교회 청년회는 서북청년회(서청) 같은 반공 단체로 발전했다. 이들은 군과 경찰에 들어가서 남로당 평정에 신명을 바쳤다. 당시 미군정 경찰은 서청의 극우 테러를 공공연하게 지원하거나 묵인했고, 당시 재벌들이었던 친일 기업가들도 이들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했다.
이승만과 반공주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국민의 신망을 잃은 이승만 대통령과 당시 집권 세력은 반공주의를 이용해서야 권력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북한의 남침은 이승만과의 일관되고 비타협적인 반공주의를 입증해 주는 가장 중요한 증거이자 미국을 다시 한반도에 끌여 들일 수 있는 기회였다.
이승만과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한반도가 처한 최악의 비극과 수난의 현실을 오히려 세계반공 선교 최전선의 투쟁할 사명과 임무를 부여받은 특권으로 해석했다. 미국의 보수파들은 한국전쟁을 전 세계의 반공 전선을 강화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또한 자국의 군수산업을 활성화하여 경제를 살렸고, 매카시즘으로 좌익을 제거하는 이득을 얻었다.
스스로 북한을 물리칠 능력이 없었던 남한은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국제 질서에 '장기판의 돌'이 됐다. 이후 이승만과 대한민국 정부는 임진왜란 후 온갖 수모를 겪으며 명나라에 끌려다닌 조선왕조의 신세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이승만은 세계 반공 전선의 선도자임을 과시했고 김일성은 세계 최강 미국을 물리쳤다고 자랑했으니, 이보다 더 지독한 욕설, 비웃음거리가 있을까?"
이 지독한 역설은 남한에서 학자들이 실제 일어난 일을 함부로 말하거나 주류와의 다른 시각에서 말했다가는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되는 사건들로 반복됐다. 6·25 한국전쟁 기간 동안 한반도에서 좌우 양 주민들 서로 간에 상상을 초월할 만큼 잔혹한 보복 학살이 반복됐다. 좌파가 우파를 잔인하게 죽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를 중심으로 한 우파도 똑같이 공산주의자들을 무차별적으로 보복 살인했다.
"이렇게 반공 투사를 자처한 월남자들은 휴전 이후 오늘까지 대한민국 사회를 극단적인 진영 논리로 갈라놓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즉 월남자들은 한국 정치사회에서 반공의 이름을 내건 공권력의 폭력, 기독교 보수주의, 수사 정보기관의 범법과 월권, 반공 이데올로기가 정착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950년대 이후 남한은 세계에서 유례없는 기독교 국가가 되었고, 북한은 전투적이고 호전적인 반미 국가가 되었다. 이처럼 신천 학살은 식민지 시대와 분단의 갈등을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했다."
반공주의와 개신교의 확장
한국전쟁 전후 기독교와 공산주의에 극단적인 충돌은 사실상 구한말 이후 조선의 근대화 과정, 일제 강점기의 개화와 독립을 둘러싼 대립, 일본이 물러간 이후 나라를 건설해야 할 세력들 간의 이념과 정체성을 둘러싼 대립의 연장선에 있었다.
한국 선교사(史)에서 한국처럼 단기간에 교세가 확장된 기적이 일어난 나라는 없다. 특히 양적인 면에서 한국은 가장 성공적인 사례였다.
"8·15 당시만 하더라도 전 인구의 1%에도 미치지 못하던 개신교가 2014년에 이르러 국민의 21%가 믿는 최대의 종교가 됐다. 1993년 미국 월간지 <크리스찬 월드>가 선정한 세계 50대 교회 중 23개가 한국 개신교회였다.
권력층의 신자 비율은 더욱 늘어나서 19대 국회의원은 40%가 개신교 신자다. 또한, 개신교 재단들은 주요 사립대학과 대형 언론사를 소유하고 있다. 전쟁과 분단을 빼고는 한국에서 일어난 선교 기적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전쟁을 겪으면서 절망에 빠진 한국인들에게 교회는 정신적 구원의 손길을 보낸 가장 중요한 기관이 되었다.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정신적인 힘을 기독교가 주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0년대 후반부터 기독교 인구는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기독교 정치·사회적 영향력은 기독교 교인의 양적인 성장보다 훨씬 가팔라서 더 이상 불교 등 다른 종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한국 기독교 팽창의 주역은 바로 월남한 기독교인들이다. "공산주의와 기독교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다"고 본 기독교인과 교회는 반공주의에 가장 중요한 보루였다. 한국교회에서 극우 반공주의가 거의 신앙처럼 자리 잡자, 교회에 나가거나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은 반공주의의 징표, 신원을 보증해 주는 신분증 역할을 해 주었다.
"한국 기독교의 특징으로 천박한 물량주의, 이기적 기복주의, 전투적 반공주의 세 가지를 들었고 김흥수도 물질주의와 기복주의의 특징을 지적했는데, 모두 6·25 한국전쟁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교회마다 물질적 풍요와 여유를 찾기에 급급하여 기독교의 부흥과 영향력을 교인 수와 헌금으로 비추어 모든 것을 물량적으로 측정하며, 교회 신자들의 가정마다 물질적 복을 비는 신앙으로 발전됐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거론되는 대형화, 물질주의, 세속주의는 바로 한국전쟁 이후 한국교회의 물량주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교회 기복주의는 한국인들에게 정서나 문화적인 습성에서 유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전쟁이 남긴 큰 상처와도 깊게 관련되어 있다. 6·25 이후 전쟁의 상처 치유, 정권의 지원, 미국의 막대한 후원과 원조, 배분 기관으로서의 위상 등이 중요했다.
한국교회는 다른 종교와 달리 정부와 마찰을 일으키기보다는 전면적으로 결합하면서 반공국가의 한국은 사실상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6·25 한국전쟁 전후 극우 반공주의의 광기와 남한의 선교 기적은 사실상 동일한 현상이며, 주로 앞에서 말한 월남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현상이다.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혁명 공약 제1조에서 반공을 국시의 제1로 삼겠다고 말했다. 국가의 이념이 '자유'와 '민주', '평등'이 아니라 '반공'이란 말이다."
반공주의와 개신교 근본주의
극단적인 반공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는 서로 통하는 점이 많다. 이승만의 반공주의나 자유를 맹목적으로 옹호했던 가장 중요한 반공 세력은 앞서 말한 월남자들, 특히 월남 개신교 신자들이었다. 기독교인들은 공산주의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괴물', '악마', '붉은 용' 등으로 묘사했다.
전쟁을 겪으면서 공산주의는 사탄이라는 생각이 일반화되었으며, 기독교 구원 사상과 선민의식은 한국이 세계 반공 전선 최전방에 서서 사탄을 물리칠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허황된 원리와 결합됐다.
"한국 기독교 주류인 복음주의 신앙과 근본주의는 1987년 민주화 운동으로 전두환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거의 그대로 지속되었고, 그 사이에 형성된 대형 교회는 현재까지 한국의 집권 여당과 보수주의를 떠받치는 가장 든든한 표밭이자 기둥으로 남아 있다."
국시라는 전체주의 용어를 1980년대까지 사용한 것도 어이없지만 2012년 대선에 국정원이 개입한 사건도 대북 심리전으로 정당화되었다. 반공이 국시인 이상 생각의 차이, 관용, 헌법상의 자유화, 민주, 인권 등을 보장하는 자유나 조치는 언제든지 휴지 조각으로 변할 수 있다.
요즘, 선거철을 맞이하여 박근혜 정부와 한국교회 대부분이 세련되게 반공을 내세우는 것도 웬만한 사람이면 거기에 넘어갈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반공을 이용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한반도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려 때는 친원파와 친명파로 나뉘어서, 조선시대는 명나라와 청나라 각각에 대한 사대(事大) 문제로 국내 정치 세력 간에 대립이 있었다. 구한말에는 친청, 친러, 친일, 친미로 사분오열됐다가 해방 후에는 친미와 친러로 나뉘어 분단으로 이어졌다.
한국전쟁 이후 남한 사회는 친미와 반미를 놓고 갈등해 왔다. 즉 근대 이후에 한국 사회는 미국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갈라졌다고 말할 수 있다. 언제까지 우리나라는 강대국들의 종노릇을 할 것인가? 언제까지 미국을 친한 벗으로 생각할 것인가?
몇 년 전 조용기, 김홍도 목사 등이 시청 앞 광장에 동원된 수만 명의 교인들을 향하여 "I Love U.S.A."를 외치지 않았던가. 또한 그들은 '빨갱이', '좌파', '종북'이란 단어를 확대해 유포시킨다. 부끄러운 줄 모르는가.
다시 공산주의 생각한다
세계적인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오늘 왜 공산주의인가>에서 이렇게 밝혔다.
"만약 역사적 경험에 의해 완벽하게 기각되어야 할 점이 있다면 바로 공산주의일 것이다. 확실히 공산주의는 20세기 전체를 특징짓는다. 하지만 1990년 후 완벽한 패배 속에서 공산주의는 불명예스럽게 종말을 고했다.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공산주의 가설>에서 '공산주의 가설은 여전히 훌륭한 가설이며 나는 더 나은 것을 찾을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이 가설을 포기한다면, 집단적 행동의 장에서 어떠한 가치 있는 행동도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공산주의라는 지평이 없다면, 이 이념이 없다면, 철학자의 관심을 끌 만한 역사적, 정치적 미래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공산주의, 그 가설을 고수하는 게 재산과 국가의 초점을 맞추었던 최초의 형태를 우리가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우리에게 과제로, 심지어 철학적 의무로 부과된 것은 공산주의의 가설이 전개될 새로운 존재의 양식이 탄생하게끔 돕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오늘 왜 공산주의인가?', <말과 활 1>, 일곱번째숲, 2013, 30~45쪽)
2008년 미국의 세계적 투자 회사인 리먼브러더스(Lehman Brothers)사의 파산은 세계적 금융 위기를 초래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칼 마르크스의 <자본>은 성경보다 더 많이 팔리는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자본>을 비롯한 칼 마르크스의 저서들이 세계적으로 많이 읽히는 것은 그만큼 마르크스의 이론이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다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심각성이 세계적으로 퍼져 나가자 이런 생각을 다시 한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 물정 모르는 한국교회 80~90퍼센트 보수주의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동안 이승만, 박정희의 세뇌 공작을 통해 수구 기득권에 편입되고, 거대한 정치집단이 되었다. 한완상은 <한반도는 아프다>에서 "'적대적 공생에 비극'을 말하고 있다. 이 말은 북한이나 남한이 자신의 정권을 강고하게 하기 위하여 반대편을 공격 비난함으로써 서로 살아가야하는 민족의 비극을 두고 한 말이다. 이 관계는 한반도와 한민족의 고통 총량을 고약하게 증가 시키고 있다." (한완상, <한반도는 아프다>, 한울, 2013, 8~9쪽)
1945년 말부터 요즘 같은 시대에 반공 이야기를 듣는 것이 경이롭기도 하다. 실제로 이 세상에 공산주의 나라는 없다. 북한도 공산주의 나라가 아님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북한은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나라가 아니라 우리 역사상 희귀한 절대왕정 국가다. 세계사를 봐도, 공격할 대상 자체가 거의 사라졌다는 점에서 분명히 죽어가고 있는 반공주의를 한국 개신교는 왜 버리지 못해 안달인가.
개신교는 오랜 세월에 걸쳐 방대한 '반공 인프라', 다시 말해 반공주의의 활력과 생명력을 유지시키는 반공주의 재생산 기제들을 자체적으로 구축하고 잘 운영해 왔기 때문이다. 개신교의 맹렬한 반공 투쟁 덕분에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십자가는 반공의 탁월한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같은 시기, 한국 개신교의 압도적 보수주의인 반공 투쟁 주역은 이북 출신 월남자들이 자리를 잡았다.
손가락질받는 한국교회
보수 개신교 지도자들은 반공주의와 반공 투쟁을 성화하고 거기에 종교적 성격을 불어넣는 데 매진해 왔다. 다시 생각할 것은 우리 사회 기득권층에 반공 담론이 종종 그러하듯이 개신교 반공주의도 이해관계나 동기 즉 기득권 체제 유지를 위한 수단, 정치적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배재하는 수단, 수치스런 자기합리화를 감추기 위한 편리한 명분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개신교의 맹렬한 반공주의는 개신교가 우리 사회의 기득권 구조의 일부로 공고히 편입되었음을 입증하는 증거이다. 보수성이란 꼭 정치적 입장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반공과 함께 한국교회의 보수성을 상징하는 게 사회 문화적 보수성이다. 사실 보수라기보다는 수구란 용어가 맞을 것 같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근대성의 기수로 공인됐던 개신교가 요즘에는 안타깝게도 전근대적 근대를 상징하는 문제 덩어리로 비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서 한국교회의, '사회적 영향력'과 '사회적 공신력'의 상관관계에서 살펴보자. 오늘날 보수적 전형적인 이미지는 '사회적 영향력은 강하지만, 공신력은 매우 낮은 개신교인 게 현실이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특정 종교가 영향력에 부흥하는 공신력 수준을 유지할 경우, 그 종교는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요소로 인정되면서 사회 전반으로부터 환영받을 것이다.
특정 종교의 공신력이 낮더라도 영향력도 같이 하락할 경우, 혹은 공신력과 영향력이 낮은 수준에 머물 경우 그 종교의 부정적 측면들이 사회 전반에 가하는 충격은 약할 것이고 따라서 대중의 관심도 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특정 종교의 영향력이 증가하는 데 공신력이 감소하는 경우, 강한 영향력 때문이라도 그 종교의 부정적 측면들이 사회 전반에 두루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고, 그 종교가 대중에 의해 문제 집단으로 낙인찍힐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바로 보수 기독교가 주도하는 한국교회가 요즘 바로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 자본주의가 마치 성경적이라 생각하는 무지한 자들도 있다." (강인철, '한국 종교의 보수성을 어떻게 볼까', <창작과비평 봄호, 통권 171호>, 창작과비평, 2016년, 398~424쪽)
이데올로기화된 한국교회
요즘은 이데올로기라는 말을 흔히 하지만 너무 아무렇게나 남용되고 있으며, 그 정의도 천차만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다소 특이한 이데올로기 확장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미 그렇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데올로기는 내게 '터무니없는 착각을 하도록' 해 준다.
이데올로기는 거짓 문제들을 극적으로 묘사해 나를 감동시켜 자신이 이 문제들을 중요하다고 믿도록 해 준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의 현존과 신앙 확장의 주된 관건은 시대에 뒤처진 잘못된 문제들을 이데올로기의 고발을 통해 공식적으로 알리고 이 시대의 진정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일이다.
"빈곤한 자들은 사회의 온갖 양상이나 여러 면에서 버림받고, 학대당하고, 가난 속에 내동댕이쳐진다. 기독교는 이런 자들을 변호하고 더 나아가 그들을 품어야 했다. 하지만, 흘러간 역사 속에서 교회는 대부분 권력자에게 동조하며 착취자나 국가 편을 들었다. 교회는 '권력'의 일부가 되었고 빈곤한 자들의 상황을 용인했다.
교회는 정치체제를 신학적으로 정당화시켰고, 빈곤한 자들로 하여금 억압받는 상황을 받아들이도록, 착취를 정당화하는데 힘썼다. 교회는 진정 민중의 아편이었다. 그렇게 하면서, 교회는 인간에게 행해진 악에 관여했을 뿐 아니라 특히 예수의 가르침과 인격 자체를 저버렸다.
그러나 이에 비해 공산주의는 빈곤한 자들의 편에 선다. 그리고는 과감히 투쟁에 돌입한다. 심지어 투쟁만 일삼는다. 공산주의자들은 어떤 빈곤이든 그들 편에 선다. 공산주의자들만이 유일하게 그렇게 한다. 결국,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가 말은 하지만 행하지 않는 것을 성취한다." (자끄 엘륄,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 2011년, 대장간, 25쪽)
평화를 만드는 자들
우리는 행위와 박애가 살아 숨 쉬는 공동체를 형성하도록 부름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대체 무엇을 보는가? 나약하고 게으르고 무력감에 빠진 교회의 개인주의적인 교인들이다. 주일마다 서로 모른 체하며 나란히 앉아 있다. 어떤 희생도 감수하려 들지 않고 새로운 일을 벌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전투적인 태도, 적극적인 참여, 전투와 희생정신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고 기독교인들이 어찌 당황하지 않겠는가. 대체 교회가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누가 할 것인가. 그런데 그 자리에 바로 공산주의가 있다.
한국교회는 잘못된 희생양과 허위의식을 폭로함으로써 평화를 일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평화를 만드는 자(peacemaker)는 복이 있다"(마5:7)고 말씀하셨다.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 땅에서 증오와 폭력을 제거하는 데 앞장서고 화해와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교회가 공동선을 추구하고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야 될 것이 아닌가. 가만히 앉아 노래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감수하며 평화를 만드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이중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이 땅이 공평과 정의가 가득 찬 나라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야말로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아니겠는가.
역사란 최초로 누구에게 배웠는가에 따라 평생 동안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다음 세대에게 반공 유전자가 전해지지 않도록, 우리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어린이 반공 교육까지 재검토해야 될 것이다. (선안나, <아동문학과 반공 이데올로기>, 청동거울, 2009년, 13~29쪽)
▲ 박철수 목사.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박철수 / 분당두레교회 전 담임목사, <하나님나라>(대장간) 저자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구한말 무렵 개화 바람이 불자 황해도 신천에는 기독교라는 손님이 찾아왔다. 일제강점기에는 다른 기업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라는 또 다른 손님을 맞았다.
황석영의 소설 제목 <손님>(창작과비평사)도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는 기독교 사상과 자본주의 계급 차별을 타파하는 길을 제시했던 공산주의는 식민지 질서에 환멸을 느낀 이들에게는 복음이었다.
한경직 목사와 반공주의
"신천은 구한말 이후 반봉건과 문명개화라는 두 개의 노선, 즉 기독교와 공산주의를 축약했다. 1945년 말부터 우익 보수주의자들은 '반동분자'로 몰려 엄청난 박해를 받자 9월 말에 월남했고, 다른 기독교인·친일지주·부자들도 1945년 말부터 대거 월남했다. 이들에게 남한은 천국이였다. 그러나 이 천국에도 '공산주의'가 준동하는 것을 본 그들은 극도의 공포를 느꼈다.
1950년 10월 중순 이후 인민군은 후퇴했으나 유엔군이나 국군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던 치안 공백 상태에서 우익 기독교 청년들이 1940년 이후 그들을 탄압했던 지역에 좌익 인사들과 그 가족들을 보복 학살했다. 작가 황석영은 소설 <손님>을 통해서 신천 학살은 미국이 아닌 현지의 우익 치안대와 기독교 목회자 등이 저질렀으며, 그 원인은 1940년 이후 사회주의 정권이 우익 인사들에게 가한 탄압과 학살이라고 말한다."
결국 1940년 이후 북한에서 진행된 토지개혁과 사회주의 정권하에서 탄압을 받고 전쟁 중 인민군에 학살당한 우익 월남자들이 가진 수난의 기억은 이후에 남한에서 극우 반공주의와 정치 테러를 정당화하는 배경이 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학살의 피해자인 동시에 북한 지역에서, 그리고 남한으로 내려와 월북자나 좌익 가족을 학살한 가해자이기도 하지만 이런 사실은 남한에서 금기에 속한다.
1945년 말에 월남한 사람들은 주로 기독교인이거나 계층적으로 중상류층으로 속했던 사람들로 미군정 산하기관에 쉽게 취직할 수 있었다. 이들 중 월남한 다수 청년들이 한경직 목사의 영락교회로 몰렸는데, 한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 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윤정란, <한국 전쟁과 기독교>, 한울, 2015, 55~56쪽/김병리, <한경직 목사> 재인용)
반공주의는 월남한 교인들이 한경직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영락교회 청년회는 서북청년회(서청) 같은 반공 단체로 발전했다. 이들은 군과 경찰에 들어가서 남로당 평정에 신명을 바쳤다. 당시 미군정 경찰은 서청의 극우 테러를 공공연하게 지원하거나 묵인했고, 당시 재벌들이었던 친일 기업가들도 이들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했다.
이승만과 반공주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국민의 신망을 잃은 이승만 대통령과 당시 집권 세력은 반공주의를 이용해서야 권력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북한의 남침은 이승만과의 일관되고 비타협적인 반공주의를 입증해 주는 가장 중요한 증거이자 미국을 다시 한반도에 끌여 들일 수 있는 기회였다.
이승만과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한반도가 처한 최악의 비극과 수난의 현실을 오히려 세계반공 선교 최전선의 투쟁할 사명과 임무를 부여받은 특권으로 해석했다. 미국의 보수파들은 한국전쟁을 전 세계의 반공 전선을 강화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또한 자국의 군수산업을 활성화하여 경제를 살렸고, 매카시즘으로 좌익을 제거하는 이득을 얻었다.
스스로 북한을 물리칠 능력이 없었던 남한은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국제 질서에 '장기판의 돌'이 됐다. 이후 이승만과 대한민국 정부는 임진왜란 후 온갖 수모를 겪으며 명나라에 끌려다닌 조선왕조의 신세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이승만은 세계 반공 전선의 선도자임을 과시했고 김일성은 세계 최강 미국을 물리쳤다고 자랑했으니, 이보다 더 지독한 욕설, 비웃음거리가 있을까?"
이 지독한 역설은 남한에서 학자들이 실제 일어난 일을 함부로 말하거나 주류와의 다른 시각에서 말했다가는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되는 사건들로 반복됐다. 6·25 한국전쟁 기간 동안 한반도에서 좌우 양 주민들 서로 간에 상상을 초월할 만큼 잔혹한 보복 학살이 반복됐다. 좌파가 우파를 잔인하게 죽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를 중심으로 한 우파도 똑같이 공산주의자들을 무차별적으로 보복 살인했다.
"이렇게 반공 투사를 자처한 월남자들은 휴전 이후 오늘까지 대한민국 사회를 극단적인 진영 논리로 갈라놓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즉 월남자들은 한국 정치사회에서 반공의 이름을 내건 공권력의 폭력, 기독교 보수주의, 수사 정보기관의 범법과 월권, 반공 이데올로기가 정착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950년대 이후 남한은 세계에서 유례없는 기독교 국가가 되었고, 북한은 전투적이고 호전적인 반미 국가가 되었다. 이처럼 신천 학살은 식민지 시대와 분단의 갈등을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했다."
반공주의와 개신교의 확장
한국전쟁 전후 기독교와 공산주의에 극단적인 충돌은 사실상 구한말 이후 조선의 근대화 과정, 일제 강점기의 개화와 독립을 둘러싼 대립, 일본이 물러간 이후 나라를 건설해야 할 세력들 간의 이념과 정체성을 둘러싼 대립의 연장선에 있었다.
한국 선교사(史)에서 한국처럼 단기간에 교세가 확장된 기적이 일어난 나라는 없다. 특히 양적인 면에서 한국은 가장 성공적인 사례였다.
"8·15 당시만 하더라도 전 인구의 1%에도 미치지 못하던 개신교가 2014년에 이르러 국민의 21%가 믿는 최대의 종교가 됐다. 1993년 미국 월간지 <크리스찬 월드>가 선정한 세계 50대 교회 중 23개가 한국 개신교회였다.
권력층의 신자 비율은 더욱 늘어나서 19대 국회의원은 40%가 개신교 신자다. 또한, 개신교 재단들은 주요 사립대학과 대형 언론사를 소유하고 있다. 전쟁과 분단을 빼고는 한국에서 일어난 선교 기적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전쟁을 겪으면서 절망에 빠진 한국인들에게 교회는 정신적 구원의 손길을 보낸 가장 중요한 기관이 되었다.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정신적인 힘을 기독교가 주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0년대 후반부터 기독교 인구는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기독교 정치·사회적 영향력은 기독교 교인의 양적인 성장보다 훨씬 가팔라서 더 이상 불교 등 다른 종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한국 기독교 팽창의 주역은 바로 월남한 기독교인들이다. "공산주의와 기독교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다"고 본 기독교인과 교회는 반공주의에 가장 중요한 보루였다. 한국교회에서 극우 반공주의가 거의 신앙처럼 자리 잡자, 교회에 나가거나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은 반공주의의 징표, 신원을 보증해 주는 신분증 역할을 해 주었다.
"한국 기독교의 특징으로 천박한 물량주의, 이기적 기복주의, 전투적 반공주의 세 가지를 들었고 김흥수도 물질주의와 기복주의의 특징을 지적했는데, 모두 6·25 한국전쟁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교회마다 물질적 풍요와 여유를 찾기에 급급하여 기독교의 부흥과 영향력을 교인 수와 헌금으로 비추어 모든 것을 물량적으로 측정하며, 교회 신자들의 가정마다 물질적 복을 비는 신앙으로 발전됐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거론되는 대형화, 물질주의, 세속주의는 바로 한국전쟁 이후 한국교회의 물량주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교회 기복주의는 한국인들에게 정서나 문화적인 습성에서 유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전쟁이 남긴 큰 상처와도 깊게 관련되어 있다. 6·25 이후 전쟁의 상처 치유, 정권의 지원, 미국의 막대한 후원과 원조, 배분 기관으로서의 위상 등이 중요했다.
한국교회는 다른 종교와 달리 정부와 마찰을 일으키기보다는 전면적으로 결합하면서 반공국가의 한국은 사실상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6·25 한국전쟁 전후 극우 반공주의의 광기와 남한의 선교 기적은 사실상 동일한 현상이며, 주로 앞에서 말한 월남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현상이다.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혁명 공약 제1조에서 반공을 국시의 제1로 삼겠다고 말했다. 국가의 이념이 '자유'와 '민주', '평등'이 아니라 '반공'이란 말이다."
반공주의와 개신교 근본주의
극단적인 반공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는 서로 통하는 점이 많다. 이승만의 반공주의나 자유를 맹목적으로 옹호했던 가장 중요한 반공 세력은 앞서 말한 월남자들, 특히 월남 개신교 신자들이었다. 기독교인들은 공산주의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괴물', '악마', '붉은 용' 등으로 묘사했다.
전쟁을 겪으면서 공산주의는 사탄이라는 생각이 일반화되었으며, 기독교 구원 사상과 선민의식은 한국이 세계 반공 전선 최전방에 서서 사탄을 물리칠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허황된 원리와 결합됐다.
"한국 기독교 주류인 복음주의 신앙과 근본주의는 1987년 민주화 운동으로 전두환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거의 그대로 지속되었고, 그 사이에 형성된 대형 교회는 현재까지 한국의 집권 여당과 보수주의를 떠받치는 가장 든든한 표밭이자 기둥으로 남아 있다."
국시라는 전체주의 용어를 1980년대까지 사용한 것도 어이없지만 2012년 대선에 국정원이 개입한 사건도 대북 심리전으로 정당화되었다. 반공이 국시인 이상 생각의 차이, 관용, 헌법상의 자유화, 민주, 인권 등을 보장하는 자유나 조치는 언제든지 휴지 조각으로 변할 수 있다.
요즘, 선거철을 맞이하여 박근혜 정부와 한국교회 대부분이 세련되게 반공을 내세우는 것도 웬만한 사람이면 거기에 넘어갈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반공을 이용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한반도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려 때는 친원파와 친명파로 나뉘어서, 조선시대는 명나라와 청나라 각각에 대한 사대(事大) 문제로 국내 정치 세력 간에 대립이 있었다. 구한말에는 친청, 친러, 친일, 친미로 사분오열됐다가 해방 후에는 친미와 친러로 나뉘어 분단으로 이어졌다.
한국전쟁 이후 남한 사회는 친미와 반미를 놓고 갈등해 왔다. 즉 근대 이후에 한국 사회는 미국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갈라졌다고 말할 수 있다. 언제까지 우리나라는 강대국들의 종노릇을 할 것인가? 언제까지 미국을 친한 벗으로 생각할 것인가?
몇 년 전 조용기, 김홍도 목사 등이 시청 앞 광장에 동원된 수만 명의 교인들을 향하여 "I Love U.S.A."를 외치지 않았던가. 또한 그들은 '빨갱이', '좌파', '종북'이란 단어를 확대해 유포시킨다. 부끄러운 줄 모르는가.
다시 공산주의 생각한다
세계적인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오늘 왜 공산주의인가>에서 이렇게 밝혔다.
"만약 역사적 경험에 의해 완벽하게 기각되어야 할 점이 있다면 바로 공산주의일 것이다. 확실히 공산주의는 20세기 전체를 특징짓는다. 하지만 1990년 후 완벽한 패배 속에서 공산주의는 불명예스럽게 종말을 고했다.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공산주의 가설>에서 '공산주의 가설은 여전히 훌륭한 가설이며 나는 더 나은 것을 찾을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이 가설을 포기한다면, 집단적 행동의 장에서 어떠한 가치 있는 행동도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공산주의라는 지평이 없다면, 이 이념이 없다면, 철학자의 관심을 끌 만한 역사적, 정치적 미래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공산주의, 그 가설을 고수하는 게 재산과 국가의 초점을 맞추었던 최초의 형태를 우리가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우리에게 과제로, 심지어 철학적 의무로 부과된 것은 공산주의의 가설이 전개될 새로운 존재의 양식이 탄생하게끔 돕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오늘 왜 공산주의인가?', <말과 활 1>, 일곱번째숲, 2013, 30~45쪽)
2008년 미국의 세계적 투자 회사인 리먼브러더스(Lehman Brothers)사의 파산은 세계적 금융 위기를 초래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칼 마르크스의 <자본>은 성경보다 더 많이 팔리는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자본>을 비롯한 칼 마르크스의 저서들이 세계적으로 많이 읽히는 것은 그만큼 마르크스의 이론이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다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심각성이 세계적으로 퍼져 나가자 이런 생각을 다시 한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 물정 모르는 한국교회 80~90퍼센트 보수주의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동안 이승만, 박정희의 세뇌 공작을 통해 수구 기득권에 편입되고, 거대한 정치집단이 되었다. 한완상은 <한반도는 아프다>에서 "'적대적 공생에 비극'을 말하고 있다. 이 말은 북한이나 남한이 자신의 정권을 강고하게 하기 위하여 반대편을 공격 비난함으로써 서로 살아가야하는 민족의 비극을 두고 한 말이다. 이 관계는 한반도와 한민족의 고통 총량을 고약하게 증가 시키고 있다." (한완상, <한반도는 아프다>, 한울, 2013, 8~9쪽)
1945년 말부터 요즘 같은 시대에 반공 이야기를 듣는 것이 경이롭기도 하다. 실제로 이 세상에 공산주의 나라는 없다. 북한도 공산주의 나라가 아님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북한은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나라가 아니라 우리 역사상 희귀한 절대왕정 국가다. 세계사를 봐도, 공격할 대상 자체가 거의 사라졌다는 점에서 분명히 죽어가고 있는 반공주의를 한국 개신교는 왜 버리지 못해 안달인가.
개신교는 오랜 세월에 걸쳐 방대한 '반공 인프라', 다시 말해 반공주의의 활력과 생명력을 유지시키는 반공주의 재생산 기제들을 자체적으로 구축하고 잘 운영해 왔기 때문이다. 개신교의 맹렬한 반공 투쟁 덕분에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십자가는 반공의 탁월한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같은 시기, 한국 개신교의 압도적 보수주의인 반공 투쟁 주역은 이북 출신 월남자들이 자리를 잡았다.
손가락질받는 한국교회
보수 개신교 지도자들은 반공주의와 반공 투쟁을 성화하고 거기에 종교적 성격을 불어넣는 데 매진해 왔다. 다시 생각할 것은 우리 사회 기득권층에 반공 담론이 종종 그러하듯이 개신교 반공주의도 이해관계나 동기 즉 기득권 체제 유지를 위한 수단, 정치적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배재하는 수단, 수치스런 자기합리화를 감추기 위한 편리한 명분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개신교의 맹렬한 반공주의는 개신교가 우리 사회의 기득권 구조의 일부로 공고히 편입되었음을 입증하는 증거이다. 보수성이란 꼭 정치적 입장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반공과 함께 한국교회의 보수성을 상징하는 게 사회 문화적 보수성이다. 사실 보수라기보다는 수구란 용어가 맞을 것 같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근대성의 기수로 공인됐던 개신교가 요즘에는 안타깝게도 전근대적 근대를 상징하는 문제 덩어리로 비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서 한국교회의, '사회적 영향력'과 '사회적 공신력'의 상관관계에서 살펴보자. 오늘날 보수적 전형적인 이미지는 '사회적 영향력은 강하지만, 공신력은 매우 낮은 개신교인 게 현실이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특정 종교가 영향력에 부흥하는 공신력 수준을 유지할 경우, 그 종교는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요소로 인정되면서 사회 전반으로부터 환영받을 것이다.
특정 종교의 공신력이 낮더라도 영향력도 같이 하락할 경우, 혹은 공신력과 영향력이 낮은 수준에 머물 경우 그 종교의 부정적 측면들이 사회 전반에 가하는 충격은 약할 것이고 따라서 대중의 관심도 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특정 종교의 영향력이 증가하는 데 공신력이 감소하는 경우, 강한 영향력 때문이라도 그 종교의 부정적 측면들이 사회 전반에 두루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고, 그 종교가 대중에 의해 문제 집단으로 낙인찍힐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바로 보수 기독교가 주도하는 한국교회가 요즘 바로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 자본주의가 마치 성경적이라 생각하는 무지한 자들도 있다." (강인철, '한국 종교의 보수성을 어떻게 볼까', <창작과비평 봄호, 통권 171호>, 창작과비평, 2016년, 398~424쪽)
이데올로기화된 한국교회
요즘은 이데올로기라는 말을 흔히 하지만 너무 아무렇게나 남용되고 있으며, 그 정의도 천차만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다소 특이한 이데올로기 확장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미 그렇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데올로기는 내게 '터무니없는 착각을 하도록' 해 준다.
이데올로기는 거짓 문제들을 극적으로 묘사해 나를 감동시켜 자신이 이 문제들을 중요하다고 믿도록 해 준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의 현존과 신앙 확장의 주된 관건은 시대에 뒤처진 잘못된 문제들을 이데올로기의 고발을 통해 공식적으로 알리고 이 시대의 진정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일이다.
"빈곤한 자들은 사회의 온갖 양상이나 여러 면에서 버림받고, 학대당하고, 가난 속에 내동댕이쳐진다. 기독교는 이런 자들을 변호하고 더 나아가 그들을 품어야 했다. 하지만, 흘러간 역사 속에서 교회는 대부분 권력자에게 동조하며 착취자나 국가 편을 들었다. 교회는 '권력'의 일부가 되었고 빈곤한 자들의 상황을 용인했다.
교회는 정치체제를 신학적으로 정당화시켰고, 빈곤한 자들로 하여금 억압받는 상황을 받아들이도록, 착취를 정당화하는데 힘썼다. 교회는 진정 민중의 아편이었다. 그렇게 하면서, 교회는 인간에게 행해진 악에 관여했을 뿐 아니라 특히 예수의 가르침과 인격 자체를 저버렸다.
그러나 이에 비해 공산주의는 빈곤한 자들의 편에 선다. 그리고는 과감히 투쟁에 돌입한다. 심지어 투쟁만 일삼는다. 공산주의자들은 어떤 빈곤이든 그들 편에 선다. 공산주의자들만이 유일하게 그렇게 한다. 결국,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가 말은 하지만 행하지 않는 것을 성취한다." (자끄 엘륄,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 2011년, 대장간, 25쪽)
평화를 만드는 자들
우리는 행위와 박애가 살아 숨 쉬는 공동체를 형성하도록 부름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대체 무엇을 보는가? 나약하고 게으르고 무력감에 빠진 교회의 개인주의적인 교인들이다. 주일마다 서로 모른 체하며 나란히 앉아 있다. 어떤 희생도 감수하려 들지 않고 새로운 일을 벌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전투적인 태도, 적극적인 참여, 전투와 희생정신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고 기독교인들이 어찌 당황하지 않겠는가. 대체 교회가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누가 할 것인가. 그런데 그 자리에 바로 공산주의가 있다.
한국교회는 잘못된 희생양과 허위의식을 폭로함으로써 평화를 일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평화를 만드는 자(peacemaker)는 복이 있다"(마5:7)고 말씀하셨다.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 땅에서 증오와 폭력을 제거하는 데 앞장서고 화해와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교회가 공동선을 추구하고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야 될 것이 아닌가. 가만히 앉아 노래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감수하며 평화를 만드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이중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이 땅이 공평과 정의가 가득 찬 나라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야말로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아니겠는가.
역사란 최초로 누구에게 배웠는가에 따라 평생 동안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다음 세대에게 반공 유전자가 전해지지 않도록, 우리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어린이 반공 교육까지 재검토해야 될 것이다. (선안나, <아동문학과 반공 이데올로기>, 청동거울, 2009년, 13~29쪽)
▲ 박철수 목사.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박철수 / 분당두레교회 전 담임목사, <하나님나라>(대장간) 저자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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