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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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대한민국 제32대 국무총리 박태준 朴泰俊 | Park Tae-joon | |
출생 | |
사망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사회유공자묘역 17묘역 |
본관 | |
호 | 청암(靑巖) |
재임기간 | 제32대 국무총리 |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2.1. 유년~군인 시절[편집]
1927년 경상남도 동래군 장안면 임랑리 임랑마을(現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 임랑마을)에서 아버지 박봉관(朴鳳官)과 어머니 김소순(金小順) 슬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5년 일본 와세다대학 예비과정에 입학하였으나 곧바로 조선이 해방되어 귀국하였고 1947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現 육군사관학교) 6기로 입교하여 1948년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사관학교 생도 시절 당시 제1중대장이자 탄도학 교관이었던 박정희 대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4] 이후 소위로 임관하여 한국전쟁을 거치는 등 육군 초창기 일선에서 뛰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5사단 작전참모, 육사 교무처장, 국방부 인사과장, 25사단 참모장 및 일선 연대장 등을 거쳤다. 5.16 군사정변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설치되자 박태준은 의장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장 비서실장에 임명되며 경제분야 최고위원으로도 일하게 된다. 경제인으로서 소양을 이때부터 다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후 소장 진급과 동시에 전역함으로써 군인의 길을 마치게 된다.
1961년 단국대학교에 편입, 1963년 8월 정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육사 6기이던 그를 비롯해 당시 국군 장교로 근무하던 사람들이 정부의 조치로 4년제 정규대학의 학사 학위과정을 이수했다고 한다. 이것은 해방 이후 국군에 근무하던 사람들이 정규 학위과정을 이수하지 못한 채 현역으로 복무했고, 또 정규 학사과정 육군사관학교(설립 당시 남조선경비사관학교)가 (11기 이후) 뒤늦게 신설되어 정부차원의 학사 학위과정 위탁교육이 필요해서 취해진 조치인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군생활을 하면서 육군대학교, 국방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63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고 기업인으로 전향했다. 당시 만성적자에 시달리던 국영기업 대한중석 사장으로 취임해서 1년만에 흑자로 돌려놓았다.
1965년 한일수교 당시 체결된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일본 정부에게서 얻어낸 배상금의 상당 부분을 투입하여 포항제철소를 건립하는 사업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추진하였다. 이후 포항제철을 10년 만에 세계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후술하겠지만 국방부에서 일하는 동안 정치판의 더러운 꼴을 다 봤던 터라 정치권에는 일절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러나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후 육사 후배이자 당시 최고권력자였던 전두환과 신군부의 권유에 따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입법회의의 경제분과위원장으로 참여하게 됐고 결국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고 나선 제13대 국회의원과 민주정의당 대표최고위원을 지내며 노태우 대통령을 대리하여 당 운영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3당 합당으로 창당된 민주자유당 내에서 김영삼과의 불화로 인해 결국 문민정부 출범 직전에 포항제철 회장직과 제14대 국회의원직을 사임했다.[5]
1997년 문민정부 말기 15대 총선 때 포항시 북구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정계 복귀에 성공했다. 이후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해 총재가 되었고, DJT연합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 당선에 기여하여 국민의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내기도 했다.
태백산맥의 저술자 조정래 작가의 철강왕 박태준 전기에 따르면 그 당시 군수물자 빼돌리기가 심했던 때인데 박태준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부사관 이상급이면 집에 군용 모포가 하나씩은 꼭 있던 시절이었다. 박태준이 군의 물자를 빼서 쓴 것은 단 한번이었다. 그마저도 농사 일을 하느라 갈라진 어머니의 손에 군대에서 쓰는 반창고를 가져와 감아드린 일이다. 박태준의 어머니가 지나가는 말로 '군대에서 쓰는 반창고를 감으면 잘 낫는다던데...' 라고 했는데 박태준이 다음날 군대 반창고를 가져와 감아드린것. 다른 일화로 당시 세들어 살던 집 주인이 박태준의 아내더러 "군 장교면서 뭐 이리 초라하게 사냐. 저 아래 다른 집은 없는게 없더라 청렴결백 지켜봐야 헛일이니 새댁이 남편 설득 좀 해라." 라고 했다고 한다.
군수품 납품비리 업자를 내쫓고 정직한 납품업자와 재계약 한 일화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톱밥 고춧가루 사건'. 박태준이 일선 사단의 연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사병식당을 순시하던 도중 병사들이 김치를 일절 먹지 않자 보급장교를 불렀다. 박태준은 양동이에 물을 붓고 그 물에 창고에 있는 고춧가루를 풀어보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고춧가루에 든 빨간색 색소가 빠지고 하얀 톱밥의 모습이 드러났다. 화가 난 박태준은 톱밥 고춧가루와 물이 든 양동이를 보급장교의 머리에 뒤집어 씌웠다. 그러면서 한 말은 "너는 민족의 반역자다!". 그리고 군수품의 납품비리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지만 이미 썩을대로 썩은 군대라 쉬쉬하면서 납품업자를 바꾸는 선에서 적당히 마무리 지으라며 어영부영 넘겼고 문제의 톱밥 고춧가루 납품업자마저도 돈으로 이를 무마하려 했다. 이에 박태준은 분노가 폭발해 쏴죽이기 전에 당장 사라지라며 화를 토한다. 이후 박태준은 믿을 만한 군수업자를 새로 찾아 "3일 내로 김치를 담가 먹을 수 있도록 고춧가루를 가져오라"고 지시했고 그 부대의 김치는 제 모습을 찾게 됐다. 이 이야기는 이대환 작가가 쓴 박태준 평전에도 등장한다.
조정래 작가의 박태준 전기에 의하면, 철저한 원리원칙주의자여서 결혼 후 당번병을 쓰지 않았고[6] 당시 존재한 통금을 지키느라 첫 아이를 병(病)으로 저세상 보내야 했었다고 한다. 사사로운 일에 부대 차를 부를 수 없고 통금 시간이라 조금만 기다리자 했는데 결국 아이는 통금이 풀리고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 버티지 못했다고. 이후 둘째 아이에게도 같은 일이 생겼을때 위의 톱밥 고춧가루 사건 이후 재계약한 정직한 납품업자가 찾아와 사람의 도리를 하기 위함이라며 태준의 아내와 아이를 태워 병원으로 간다
1945년 일본 와세다대학 예비과정에 입학하였으나 곧바로 조선이 해방되어 귀국하였고 1947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現 육군사관학교) 6기로 입교하여 1948년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사관학교 생도 시절 당시 제1중대장이자 탄도학 교관이었던 박정희 대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4] 이후 소위로 임관하여 한국전쟁을 거치는 등 육군 초창기 일선에서 뛰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5사단 작전참모, 육사 교무처장, 국방부 인사과장, 25사단 참모장 및 일선 연대장 등을 거쳤다. 5.16 군사정변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설치되자 박태준은 의장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장 비서실장에 임명되며 경제분야 최고위원으로도 일하게 된다. 경제인으로서 소양을 이때부터 다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후 소장 진급과 동시에 전역함으로써 군인의 길을 마치게 된다.
1961년 단국대학교에 편입, 1963년 8월 정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육사 6기이던 그를 비롯해 당시 국군 장교로 근무하던 사람들이 정부의 조치로 4년제 정규대학의 학사 학위과정을 이수했다고 한다. 이것은 해방 이후 국군에 근무하던 사람들이 정규 학위과정을 이수하지 못한 채 현역으로 복무했고, 또 정규 학사과정 육군사관학교(설립 당시 남조선경비사관학교)가 (11기 이후) 뒤늦게 신설되어 정부차원의 학사 학위과정 위탁교육이 필요해서 취해진 조치인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군생활을 하면서 육군대학교, 국방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63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고 기업인으로 전향했다. 당시 만성적자에 시달리던 국영기업 대한중석 사장으로 취임해서 1년만에 흑자로 돌려놓았다.
1965년 한일수교 당시 체결된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일본 정부에게서 얻어낸 배상금의 상당 부분을 투입하여 포항제철소를 건립하는 사업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추진하였다. 이후 포항제철을 10년 만에 세계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후술하겠지만 국방부에서 일하는 동안 정치판의 더러운 꼴을 다 봤던 터라 정치권에는 일절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러나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후 육사 후배이자 당시 최고권력자였던 전두환과 신군부의 권유에 따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입법회의의 경제분과위원장으로 참여하게 됐고 결국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고 나선 제13대 국회의원과 민주정의당 대표최고위원을 지내며 노태우 대통령을 대리하여 당 운영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3당 합당으로 창당된 민주자유당 내에서 김영삼과의 불화로 인해 결국 문민정부 출범 직전에 포항제철 회장직과 제14대 국회의원직을 사임했다.[5]
1997년 문민정부 말기 15대 총선 때 포항시 북구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정계 복귀에 성공했다. 이후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해 총재가 되었고, DJT연합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 당선에 기여하여 국민의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내기도 했다.
태백산맥의 저술자 조정래 작가의 철강왕 박태준 전기에 따르면 그 당시 군수물자 빼돌리기가 심했던 때인데 박태준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부사관 이상급이면 집에 군용 모포가 하나씩은 꼭 있던 시절이었다. 박태준이 군의 물자를 빼서 쓴 것은 단 한번이었다. 그마저도 농사 일을 하느라 갈라진 어머니의 손에 군대에서 쓰는 반창고를 가져와 감아드린 일이다. 박태준의 어머니가 지나가는 말로 '군대에서 쓰는 반창고를 감으면 잘 낫는다던데...' 라고 했는데 박태준이 다음날 군대 반창고를 가져와 감아드린것. 다른 일화로 당시 세들어 살던 집 주인이 박태준의 아내더러 "군 장교면서 뭐 이리 초라하게 사냐. 저 아래 다른 집은 없는게 없더라 청렴결백 지켜봐야 헛일이니 새댁이 남편 설득 좀 해라." 라고 했다고 한다.
군수품 납품비리 업자를 내쫓고 정직한 납품업자와 재계약 한 일화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톱밥 고춧가루 사건'. 박태준이 일선 사단의 연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사병식당을 순시하던 도중 병사들이 김치를 일절 먹지 않자 보급장교를 불렀다. 박태준은 양동이에 물을 붓고 그 물에 창고에 있는 고춧가루를 풀어보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고춧가루에 든 빨간색 색소가 빠지고 하얀 톱밥의 모습이 드러났다. 화가 난 박태준은 톱밥 고춧가루와 물이 든 양동이를 보급장교의 머리에 뒤집어 씌웠다. 그러면서 한 말은 "너는 민족의 반역자다!". 그리고 군수품의 납품비리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지만 이미 썩을대로 썩은 군대라 쉬쉬하면서 납품업자를 바꾸는 선에서 적당히 마무리 지으라며 어영부영 넘겼고 문제의 톱밥 고춧가루 납품업자마저도 돈으로 이를 무마하려 했다. 이에 박태준은 분노가 폭발해 쏴죽이기 전에 당장 사라지라며 화를 토한다. 이후 박태준은 믿을 만한 군수업자를 새로 찾아 "3일 내로 김치를 담가 먹을 수 있도록 고춧가루를 가져오라"고 지시했고 그 부대의 김치는 제 모습을 찾게 됐다. 이 이야기는 이대환 작가가 쓴 박태준 평전에도 등장한다.
조정래 작가의 박태준 전기에 의하면, 철저한 원리원칙주의자여서 결혼 후 당번병을 쓰지 않았고[6] 당시 존재한 통금을 지키느라 첫 아이를 병(病)으로 저세상 보내야 했었다고 한다. 사사로운 일에 부대 차를 부를 수 없고 통금 시간이라 조금만 기다리자 했는데 결국 아이는 통금이 풀리고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 버티지 못했다고. 이후 둘째 아이에게도 같은 일이 생겼을때 위의 톱밥 고춧가루 사건 이후 재계약한 정직한 납품업자가 찾아와 사람의 도리를 하기 위함이라며 태준의 아내와 아이를 태워 병원으로 간다
2.2. 기업인 박태준[편집]
일본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박정희의 신임을 받고 있던 박태준은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특사로 파견되었다. 임무를 마치자마자 박태준은 대한중석[7][8] 사장에 임명하고, 여기서 경영의 실제를 배우며 만성적자와 부패의 온상이었던 기업을 흑자기업으로 돌려놓게 되면서 기업인으로 첫 발을 내딛게 된다.[9]
제철소 건설에 대한 제반 준비에 착수한 박태준은, 자금 원조를 해 줄 모든 외국 기관들로부터 '불가'판정을 받고 어려움에 처해있었다. 1967년 제철소 건설의 첫 삽을 떴지만 정작 외국에서 차관 불가 입장을 내려 미국 등 서방의 지원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러한 와중에 한일국교정상화 때 받아낸 대일청구권 자금을 유용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내서 상황은 급변하고[10], 한일각료회담을 앞둔 시점 일본을 찾아가 당시 야와타제철의 이나야마 사장과 후지제철의 나가노 시게오 사장,[11] 일본강관의 아카사카 다케시 사장 등 일본 철강산업의 주역들을 만나 일일이 설득한 결과로 결국 일본은 우리나라에 기술을 제공하기로 했고, 포항제철로 신일본제철의 기술과 자금을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12]
그러나 제철기술을 전수받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신일본제철 기술자들은 어떻게든 적은 내용만을 보여주려고 했다. 이에 박태준은 제철소 기술자 몇명을 데리고 공장 안을 산책하듯이 천천히 걸으며 사진을 찍거나 메모도 하지 않는 행동으로 일본 관료들의 의심을 피하며 자신들이 보는 모든 것들을 외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이후에 포항제철이 제철소를 예상보다 빨리 짓자 일본 철강업계, 정계에서는 너무 많은 것들을 알려줬다는 불만이 나왔다. 이때 야하타 제철의 이나야마 회장은 “많이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워낙 잘한 것”이라며 불만을 일축했다고 한다. 일본으로부터 제공 받은 차관과 기술로 마침내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1호기 공사가 시작됐다. 박태준은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식민지 배상금은 조상의 피의 대가이므로 제철소가 실패하면 오른쪽으로 돌아 나아가 영일만에 빠져 죽자는 말을 포스코 직원들에게 자주 말했다.
예정보다 일정을 1개월 앞당긴 1973년 6월 9일 마침내 용광로에서 첫 쇳물이 흘러나았고 조업 첫해인 1973년 포항제철은 매출액 1억달러, 순이익 1200만달러(약 46억원)를 달성했다. 이로써 박태준의 리더십으로 포항제철은 세계 철강 역사에서 제철소를 가동한 첫해부터 이익을 낸 유일한 기업이 됐다.[13]
이후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를 건설해 왔으며, 1992년 결국 양 제철소 8개 고로 건설을 완성함과 동시에 포스코 창업자로서 역사를 마감하였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는 포스코의 명예회장으로 타계하기 전까지 경제계의 원로로 자리했다. 한국 기업인의 전형적인 문제점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 직후 어떠한 기술과 자본도 없었던 철강불모지에서 1968년 16억원의 차관으로 포스코를 이끌어 40년 뒤인 2008년에 자산 37조335억원, 매출액 30조6424억원, 조강생산량 3313만6000t의 기업을 이루고 국가 철강산업의 기틀을 다진 한국 기업가 중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업적을 쌓은 거물 중 하나가 분명하다.[14]
제철소 건설에 대한 제반 준비에 착수한 박태준은, 자금 원조를 해 줄 모든 외국 기관들로부터 '불가'판정을 받고 어려움에 처해있었다. 1967년 제철소 건설의 첫 삽을 떴지만 정작 외국에서 차관 불가 입장을 내려 미국 등 서방의 지원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러한 와중에 한일국교정상화 때 받아낸 대일청구권 자금을 유용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내서 상황은 급변하고[10], 한일각료회담을 앞둔 시점 일본을 찾아가 당시 야와타제철의 이나야마 사장과 후지제철의 나가노 시게오 사장,[11] 일본강관의 아카사카 다케시 사장 등 일본 철강산업의 주역들을 만나 일일이 설득한 결과로 결국 일본은 우리나라에 기술을 제공하기로 했고, 포항제철로 신일본제철의 기술과 자금을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12]
그러나 제철기술을 전수받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신일본제철 기술자들은 어떻게든 적은 내용만을 보여주려고 했다. 이에 박태준은 제철소 기술자 몇명을 데리고 공장 안을 산책하듯이 천천히 걸으며 사진을 찍거나 메모도 하지 않는 행동으로 일본 관료들의 의심을 피하며 자신들이 보는 모든 것들을 외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이후에 포항제철이 제철소를 예상보다 빨리 짓자 일본 철강업계, 정계에서는 너무 많은 것들을 알려줬다는 불만이 나왔다. 이때 야하타 제철의 이나야마 회장은 “많이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워낙 잘한 것”이라며 불만을 일축했다고 한다. 일본으로부터 제공 받은 차관과 기술로 마침내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1호기 공사가 시작됐다. 박태준은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식민지 배상금은 조상의 피의 대가이므로 제철소가 실패하면 오른쪽으로 돌아 나아가 영일만에 빠져 죽자는 말을 포스코 직원들에게 자주 말했다.
예정보다 일정을 1개월 앞당긴 1973년 6월 9일 마침내 용광로에서 첫 쇳물이 흘러나았고 조업 첫해인 1973년 포항제철은 매출액 1억달러, 순이익 1200만달러(약 46억원)를 달성했다. 이로써 박태준의 리더십으로 포항제철은 세계 철강 역사에서 제철소를 가동한 첫해부터 이익을 낸 유일한 기업이 됐다.[13]
이후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를 건설해 왔으며, 1992년 결국 양 제철소 8개 고로 건설을 완성함과 동시에 포스코 창업자로서 역사를 마감하였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는 포스코의 명예회장으로 타계하기 전까지 경제계의 원로로 자리했다. 한국 기업인의 전형적인 문제점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 직후 어떠한 기술과 자본도 없었던 철강불모지에서 1968년 16억원의 차관으로 포스코를 이끌어 40년 뒤인 2008년에 자산 37조335억원, 매출액 30조6424억원, 조강생산량 3313만6000t의 기업을 이루고 국가 철강산업의 기틀을 다진 한국 기업가 중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업적을 쌓은 거물 중 하나가 분명하다.[14]
2.3. 정치인 박태준[편집]
정치인 박태준의 간단한 이력만 소개하면..
박정희 정권 시절 박태준은 포항제철을 경영하면서 최대한 정치와는 거리를 두려고 했다. 이 시기에 박태준은 군사정권하에서 기업인이면 당연히 내야하는 정치자금(사실상 불법뇌물) 단 한푼도 안내면서도 무사했는데, 어디까지나 최고권력자 박정희가 박태준을 무제한 신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하고,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자 박태준은 "최소한 포철의 울타리는 될 수 있을 것"이라면서 그렇게 내켜하지 않던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민주정의당 창당멤버로 11대 국회에 입성했지만, 이때도 포철경영에 집중하면서 정치활동에는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고, 1985년 12대 총선에선 아예 빠지게 된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13대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돌아왔고, 민정당 대표최고위원으로 노태우 대통령을 대리해서 당운영을 맡게 된다. 그리고 1990년 삼당합당 이후에는 민정계를 대표하는 최고위원으로 자연스레 당운영을 놓고 김영삼과 대립하는 구도가 형성된다. 군부 출신들을 중심으로 상당수 민정계 인사들이 박태준 주변에 모여들었고, 박태준도 나름 대권 꿈을 꾸었던 것 같으나 석연찮은 이유로 중도포기하였다. 하여튼 이때 김영삼과의 파워게임에서 밀리면서 결국 문민정부 출범이후 정계와 포스코에서 완전 손을 떼고 해외를 떠도는 신세가 된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자 국세청은 세무조사를 통해서 박태준의 소유재산이 360억이 넘는다고 발표했고, 검찰은 포철 계열사와 협력업체에서 약 30억을 받은 혐의로 기소하였다. 한편 이에 대해 박태준은 1993년 12월 한겨례신문과 "한국에는 친구가 한명도 남아있지 않고 포철의 친구들이 개혁세력과 짝짜꿍이 되어 창설자의 이력을 난도질하려고 덤벼들고 있는것이 내게는 가장 큰 인간적이 수모요 충격이다"라고 인터뷰하면서 정치보복이라고 반발했다. 이후 재판도중인 1995년 특별사면으로 풀려났고, 일본으로 출국해서 해외를 떠돌았다.
그러다 1997년 4월에 정계 복귀를 선언하여 같은 해 7월 24일에 실시된 포항시 북구 국회의원 재선거에 출마,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11월에는 JP의 자유민주연합에 입당 후 당 총재로 추대되어 김대중과의 김종필간의 연합(DJP연합)을 통해 정권교체를 이끌어낸다.[16] 이 후 김영삼과 박태준은 IMF체제 돌입을 위해 대선 후보를 초청한 자리에 함께 참석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자민련 총재로 국민의 정부 성공을 위해서 일조했고, 2000년 총선 이후에 국무총리로 임명되었지만, 부동산 명의 신탁의혹으로 불과 4개월만에 사임했다.[17]
2.3.1. 선거이력[편집]
연도 | 선거 종류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81 |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17번) | - | 당선 | 초선 | |
1988 |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6번) | - | 당선 | 재선 | |
1992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2번) | - | 당선 | 1992.12월 의원직 사퇴 3선 | |
1997 | 1997년 7.24 재보궐선거 (15대 국회 경북 포항 북구)[18] | 47,884표 (47.49%) | 당선 (1위) | 4선 |
2.4. 말년[편집]
3. 소속 정당[편집]
4. 몇 가지 이야기[편집]
4.1. 스포츠 매니아[편집]
박태준은 열혈 축구 마니아로 유명했다. 축구 마니아로서의 성향과 기업인으로서의 위치가 시너지 효과로 작용하여 대한중석(現 대구텍) 사장 시절에 축구단을 운영했다.[21] 1973년에 포항제철 실업축구단(포항 스틸러스 전신)을 창단하기도 했고, 그것도 모자라 축구전용구장을 본인의 손으로 두 개나 건립하였다.
한국의 첫번째 축구전용구장 포항 스틸야드를 건설한 사연도 재밌다. 한국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과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에 연속 진출하면서 통산 3회 월드컵 진출한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등 해외 언론에서 '축구전용구장 하나 없는 축구 후진국이 무슨 본선 진출이냐?'고 한국 축구를 대놓고 조롱했고 이에 열받은 박태준이 사재를 털어 전용구장을 건설한다.(...) 건설업체는 당시 아무런 노하우도 없었던 포스코 건설이었고, 마땅한 부지가 없어서 포스코 뒷동산을 밀어버리고(...) 지었다. 이후 지속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현대적이고 미려한 전용구장이다. 다만 전술한 사연 탓에 포스코 부지 내에 건설된 경기장이다 보니 접근성이 약간 떨어지는 것이 흠이다. 하지만 포항 스틸야드 앞은 포항시 시내버스의 빗자루 배차 중에서도 최고의 배차를 자랑하는(...) 101번, 102번[22]이 오가므로 사실 접근성이 그다지 나쁘지도 않다. 다만 서술했듯이 시 외곽지역에 경기장만 덩그러니 있다보니 상업시설이 뒷받침 되지 못한 다는 것이 흠.
이런 이유로 포항 서포터즈들의 걸개에도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데, 타 팀 팬들이 "저 영감 누구임?" 하고 갸웃거리는 걸개의 그림이 바로 이 사람.절대 체 게바라가 아니다![23] 사실 서포터를 떠나 포항시에서 그의 평가 및 위치는 꽤나 우호적이다. 울산에서 고 정주영 현대 회장이 받는 평가와 비슷.
포항 구단측에서는 창단 40주년이 되는 2013년에 스틸야드 E석 스탠드를 청암존이라고 명명하며 박태준 회장을 기렸다. 청암(青岩)은 박태준 회장의 호.
두번째 전용구장은 광양에 건설했는데, 놀랍게도 애초부터 구장 확장을 염두에 두고 설계, 건설했다. '언젠가 광양시가 커지면 구장도 확장해야지'라는 비전을 갖고 지은 것. 다만 광양축구전용구장을 건설하게 된 계기는 프로축구단 전용이 아니라 광양제철소 직원 복지차원에서 건설한 것이다. 포항 스틸야드처럼 광양제철소 공단 안에 위치해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 그러다 보니 접근성은 스틸야드 보다 더 안 좋아졌다.(...)
축구 매니아이기도 했지만 야구선수 장효조를 굉장히 좋아했다. 이 정도면 스포츠덕후 매니아. 그 예로 실업야구팀인 포항제철 야구단에 장효조를 영입하려고 했을 때, 장효조 曰: "강남에 아파트 한 채를 달라"고 하자, 박태준은 강남 아파트도 모자라서 보너스까지 얹어줬다고 한다. 재테크 성공
한국의 첫번째 축구전용구장 포항 스틸야드를 건설한 사연도 재밌다. 한국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과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에 연속 진출하면서 통산 3회 월드컵 진출한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등 해외 언론에서 '축구전용구장 하나 없는 축구 후진국이 무슨 본선 진출이냐?'고 한국 축구를 대놓고 조롱했고 이에 열받은 박태준이 사재를 털어 전용구장을 건설한다.(...) 건설업체는 당시 아무런 노하우도 없었던 포스코 건설이었고, 마땅한 부지가 없어서 포스코 뒷동산을 밀어버리고(...) 지었다. 이후 지속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현대적이고 미려한 전용구장이다. 다만 전술한 사연 탓에 포스코 부지 내에 건설된 경기장이다 보니 접근성이 약간 떨어지는 것이 흠이다. 하지만 포항 스틸야드 앞은 포항시 시내버스의 빗자루 배차 중에서도 최고의 배차를 자랑하는(...) 101번, 102번[22]이 오가므로 사실 접근성이 그다지 나쁘지도 않다. 다만 서술했듯이 시 외곽지역에 경기장만 덩그러니 있다보니 상업시설이 뒷받침 되지 못한 다는 것이 흠.
이런 이유로 포항 서포터즈들의 걸개에도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데, 타 팀 팬들이 "저 영감 누구임?" 하고 갸웃거리는 걸개의 그림이 바로 이 사람.
포항 구단측에서는 창단 40주년이 되는 2013년에 스틸야드 E석 스탠드를 청암존이라고 명명하며 박태준 회장을 기렸다. 청암(青岩)은 박태준 회장의 호.
두번째 전용구장은 광양에 건설했는데, 놀랍게도 애초부터 구장 확장을 염두에 두고 설계, 건설했다. '언젠가 광양시가 커지면 구장도 확장해야지'라는 비전을 갖고 지은 것. 다만 광양축구전용구장을 건설하게 된 계기는 프로축구단 전용이 아니라 광양제철소 직원 복지차원에서 건설한 것이다. 포항 스틸야드처럼 광양제철소 공단 안에 위치해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 그러다 보니 접근성은 스틸야드 보다 더 안 좋아졌다.(...)
축구 매니아이기도 했지만 야구선수 장효조를 굉장히 좋아했다. 이 정도면 스포츠
4.2. 긍정적인 일면[편집]
- 퇴임 당시 포스코 주식이 한 주도 없었다.
- 포항제철 공사 시 "이 돈은 우리 조상님들의 핏값이다.[24] 제철소 공사를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 모두 다 우향우해서 저 포항 앞바다에 빠져 죽자"라고 설파했다. 실제로 공장 착공부터 완공 시기까지 박태준 사장 이하 전 직원이 집에 거의 들어가지 않고 포항에 상주하며[25] 일을 진행할 만큼 열의를 보였다. 열정페이나 혹사 논란에서도 어느 정도 자유로운 것이 박태준 사장 스스로 공사판에서 같이 굴렀기 때문. 공사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민가를 비롯한 많은 건물을 철거할때 반발이 심하자 직접 뛰어다니며 설득하고 가장 난관인 한 수녀원도 직접 찾아가 결국 철거 협조를 받아낸다. 그때 수녀원 관계자 한사람이 이 흙강아지 같은 분이 사장이냐며 놀랐을정도로 열정적으로 뛰어다녔다.
- 열정페이를 강요하는 일부 기업의 안티테제적인 면모를 보였는데 기업이 살기 위해서는 인재를 유치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이 윤택해야 한다는 신념 아래 욕을 먹으면서도 직원들이 거주할 아파트와 학교, 병원 등 직원들의 복지를 공장 착공 전 우선적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심지어 집은 임대형식도 아닌 직원 소유로 넘겼다. 포항 및 광양 사업장의 직원 주거시설이 건립 시기를 감안해도 상당히 혁신적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 당시 언론이고, 주변인이고, "그렇게 회사 운영하면 망한다."는 등의 사방에서 쏟아지는 질타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사원 복지 잘 해서 망한 회사는 없다."며 일축했다.
안철수 피꺼솟[26] 심지어는 소련의 대학총장급 지식인이 "우리가 꿈꾸는 모습을 포항제철에서 실현하고 있다."며 극찬을 한 적도 있을 만큼, 박태준 사장의 직원 복지는 호평을 받았다.
-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당시, "그런 신문도 (우리나라에) 있어야 한다."는 취지로 포항제철 기업 광고를 꾸준히 실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 문재인 변호사, 리영희 교수 등과 더불어 한겨레신문의 원년 주역 중 한 사람이다. 한겨레신문과 정반대 쪽 이념의 정당에서 정치 인생을 살았고 젊은 시절에는 5.16 쿠데타 세력과 가까웠던 박정희의 측근 출신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상당한 파격. 2011년 12월 한겨레에서는 박태준 회장의 부음기사를 실으면서 이례적으로 "별세" 소식 및 고인의 생전 업적을 상세히 소개하기도 하였다. 물론 5.16 쿠데타 세력과 가까웠다는 점은 깠으나, 한겨레가 기업인을 이 정도로 다룬 것만 해도 한겨레의 평소 논조와는 매우 다른, 융숭한 대접이다. 생전에도 한겨레는 박태준 회장의 동정을 자주 소개했을 정도로 군사정권 군인출신답지 않을 정도로 한겨레와 원만한 관계를 보였다. 심지어 박태준 5주기 평전 소개 기사까지 쓸 정도로 박태준 사후에도 한겨레가 박태준을 챙기고 있다.
- 1977년에 크레인 기사가 야간근무 도중 졸음 때문에 쇳물을 잘못 부어서 제강공장의 각종 배선이 완전히 망가지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그런데 박태준은 해당 기사에겐 징계를 내리지 않고, 오히려 중간 간부들에게 호통을 쳤다. '당신들은 잠도 안자나? 야간 근무라면 출근하기 전에 충분히 수면을 취했을 텐데, 그럼에도 사고가 났다면 집에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 아닌가? 당신들은 부하 직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가?'라고 혼냈다고 한다.[27]
- 부실공사 현장을 발견하곤 짓던 공장을 손수 다이너마이트를 가져와 폭파시킨 뒤 다시 짓게 했다.사실 계획안과 30cm 정도 차이였는데 대충 넘길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고. 조정래 작가의 전기에서는 콘크리트가 울퉁불퉁한 모양새였고 그부분만 땜질하면 된다고 하자 땜질이 대형 사고를 부른다며 폭발 시켰다고 한다. 포항제철소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일본 기업 도멘(東棉)의 지점 소장인 모모세 타다시(百瀬 格)가 "폭발 충격 때문에 기초 부분이 잘못될 수도 있다"라고 항의하자[28], '그 부분은 군(해병대) 공병대에게 의뢰해서 해결했으니 걱정마시오.'라고 해명했다. 그래서 70%나 진척된 공사가 죄다 폭발해 사라졌다. 또한 잘못 조여진 볼트 하나하나 하얀 분필로 표시해가며 "다시 꼼꼼하게 볼트를 조이도록"이라고 불호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때 표시된 볼트는 모두 400개(...)
- 비슷하게 포항공과대학교를 지을 때도 내진 설계 기준도 없을 당시 "강진에도 끄떡 없는 1000년 갈 학교를 만들어라."고 지시하여서 원리 원칙에 충실하게 공사를 진행하였다. 덕분에 2017년 포항 지진 때도 포항공대는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 이 때가 2017년으로부터 무려 30여년도 더 전인 1986년. 관련 법도 미비한 데다, 한국에 큰 지진도 별로 없어서 규제 같은 것도 없었기에 아무도 신경 안 쓰던 내진 설계도 철저히 완비하고 포스텍을 지으라고 말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실은 포항시내 건물 상당수가 피해를 입었을때 지진에 대해서 조명되면서 뒤늦게 화제가 되었다. 포스텍은 지진 피해가 심각한 포항 북구가 아닌 남구에 위치해 있기에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그 당시에 철저하게 안전 기준에 따라 공사를 진행했다는 점은 칭찬 받아 마땅하다. 기본도 지키지 않아 삼풍백화점을 무너지게 해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준과는 완벽하게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라고 보면 된다.
- 포스코의 초대회장인 만큼, 포항제철소 건설 당시 수많은 청탁과 압력을 받았으나 대부분 거절했다. 고향집에 내려갔을 때 아버지가 문중 사람들을 써주면 안되겠냐고 했고 이 말을 들은 박태준 회장은 그대로 방을 나와 포항제철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게 지나쳐서 당시 박정희 주변에서 떡고물을 받아먹던 측근들에게 밉보인 덕에 중앙정보부에선 허구한날 박태준의 집을 수색하고 꼬투리를 잡으려 하자 박태준은 이렇게는 못 해먹겠다고 박정희를 찾아가서 포항제철 건설에서 손을 떼겠다고 말했다. 이에 박정희는 비서에게 종이 한 장을 가져오라고 해서 그를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종이에 써주는 걸로 화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또한 군 시절 국방부 인사과에 있을 때 정치판의 더러움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정치에는 관심 조차 주지 않았다. 박정희의 3선을 위한 개헌을 찬성한다는 사인을 하라고 했을 때도 "난 정치에는 개입 않는다.' 라고 딱 잘라 버렸고 보고를 들은 박정희 가라사대 "그 친구 원래 그래. 제철소 일이나 잘 하게 냅둬." 참고로 그 서명은 무려 중앙정보부장이 진행한 일이였다. 당시 박태준을 지켜보았던 김재규는 그 뒤로 박태준을 굉장히 좋게 보았다고 한다.
- 포철 창립 당시 세계은행의 보고서에서 '한국은 철강 생산을 하면 투자금을 다 날린다'고 나오는 바람에 원조를 받지 못했다. 결국 박태준은 대일청구권 자금을 활용해서 포항에 제철소를 짓고 포스코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었다. 1986년 박태준은 런던에서 당시 보고서를 작성했던 존 자페와 만나 그 때 똑같이 보고서를 쓰겠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때 자페가 한 말이 걸작. "나는 그 때로 돌아가면 똑같이 쓸 거다. 철강 수요가 없는 나라가 백만톤짜리 제철소를 짓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내 실수는 박태준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다. 당신이 상식을 초월하는(beyond common sense) 일을 하는 바람에 내 보고서가 엉망이 된 것."
- 중국의 개방/개혁 초기인 1978년 8월, 덩샤오핑이 일본에 가서 포항제철소 같은 제철소를 하나 지어달라고 하자, 이나야마 요시히로 당시 신일본제철 회장은 "공장이야 지을 수 있지만 중국에는 박태준 같은 인물이 없어서 그런 제철소는 못 짓는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덩샤오핑은 껄껄 웃었지만 내심 속이 쓰렸을 것이다. 그해 말 일본 도쿄에서 박태준을 만난 이나야마 회장은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다. "박 사장, 중국에 납치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나중에 중국측의 초청으로 방중한 후 포항제철 임원들에게 "광산을 최대한 확보해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중국이 경제개발 착수 전이라, 직원들이 충고를 소극적으로 이행했는데, 2000년대 들어 중국이 아프리카, 호주, 동남아시아 등지의 자원을 선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다들 후회했다는 후문.
- 1992년 회장직 사퇴 발표 후 양 제철소 직원들이 회장 사퇴를 반대하며 시위를 하는 국내 기업 역사상 전무한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29] 단순히 작은 시위가 아니라 포항, 광양시 주민, 포스코 임직원들과 주부, 지역 의사들, 학교 선생님들까지 뛰쳐나갔다는 증언들도 있다. 당시 광양, 포항에는 박태준 회장을 밀어내고 포스코를 먹으려는 반대세력이 정치권을 동원한[30] 압력을 넣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광양, 포항 주민들에게는 혼자서 회사를 일으키고 주민복지에 철저했던 회장님이 정치권과 결탁한 반대세력에 의해 밀려난다는 것은 곧 피땀흘려 세운 포스코가 부정부패 세력에게 멸망당하고 임직원들의 생활이 위협받는다는 신호로 보였고 이에 따른 격렬한 반대시위가 일어난 것. [31] 하지만 박태준은 이젠 국회에서 포철을 지키겠다는 말로 다독였고 시위는 해산됐다고.
4.3. 부정적인 일면[편집]
- 비자금으로 90년대 초반에 이미 380억이 넘는 재산을 형성했고, 이 재산 분배 과정에서 탈세를 위해 온갖 친인척을 통해 분배하다가 증여세 탈세로 68억원을 징계 받았고 그중에 납부한 것은 55억원이다. 다만 박 회장을 옹호하는 측에선 사이가 영 좋지 않던 김영삼 전 대통령 측의 정치 보복으로 혐의가 지나치게 과장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32] 누구 말이 맞는지는 각자 알아서 판단할 문제. 물론 비리 자체가 잘 했다는 건 절대 아니다. 뭐 어쨌건 이후엔 본인 재산이 적었는 지 기부를 했는 지는 모르겠지만, 타계 직전 본인 명의로 된 재산은 거의 없었고 병원비는 자녀들이 대신 내주었다고 한다. 마지막 남은 재산인 북아현동 자택도 팔아서, 당시 박원순 변호사가 운영하던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하기도 했다. 여러 탈세를 저질렀긴 했어도, 좌우 안 가리고 평가가 좋은 점은 이 때문이다.
- 37억에 달하는 뇌물을 수수하고, 약 7천만원이 넘는 회사 자산을 유용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뒤 지병 치료를 구실로 일본에 장기체류했었다.
주식 한 주 없다던 양반이하지만, 1967년 포항제철 건설 당시 들어간 자금만 최소 1억 달러가 넘었는데, 겨우(?) 37억원을 받고 여생을 저당잡히는 우를 범했을지는 한 번 생각해볼 일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용처(用處)는 차치하더라도 30여억 원을 포항제철 회장시절 32개사의 계열사 및 협력사로부터 제공받은 것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다만,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와세다 대학 후배인 박태준을 5년간 연 300억원 씩 지원하는 댓가로 삼성 계열사 사장으로 데려오려는 걸[33] 거절했던 일화도 있는만큼. 개인적으로 착복한 부분이 있는지 여부는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5. 어록[편집]
박태준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 묘소에 올린 25년만의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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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한국전쟁 휴전 될쯤에 새긴 좌우명
사심없이 헌신하라, 무한 경쟁시대일수록 필요하다
자원은 유한하지만, 창의는 무한하다[34]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다 실패하면 우향우 해서 영일만에 빠져 죽자 제철보국을 우리 인생의 신조로 삼자
신뢰를 얻으면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다
항상 애국심을 갖고 일해달라
창업이래 지금까지 제철보국(製鐵保國)이라는 생각을 잠시도 잊은적이 없습니다. 철은 산업의 쌀입니다. 쌀이 생명과 성장의 근원이듯 철은 모든 산업의 기초소재입니다. 따라서 양질의 철을 값싸게 대량으로 생산하여 국부를 증대시키고 국민 생활을 윤택하게 하며 복지사회 건설에 이바지하자는 것이 곧 제철보국 입니다. 우리는 국민과 인류에게 복락(福樂)을 줄 수 있는 제철산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국가의 부름을 받고 영일만에 모였을때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빈손이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핵심 기간산업인 철강산업을 일으켜 보자는 비장한 각오로 모든 조소와 부정적 논리를 뒤로하고 건설에 박차를 가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 손으로 국가경제를 일으켜 보려는 철저한 공인의식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고용인이 아닙니다. 포스코인이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국민에게 봉사해야 하는 공인이 된 것입니다.
국가로부터 일관제철 사업의 소임을 부여받은 우리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국민의 여망에 보답해야 합니다. 개발도상국이 일관제철소를 성공적으로 건설 운영하는 것은 결코 어디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개인의 희생에 바탕을 둔 헌신적인 노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 회사는 대일청구권자금을 전용하여 건설한 민족기업입니다. 우리의 모든 정열을 바쳐 신명을 다하겠다는 굳은 각오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 자체가 큰 인연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속해있는 국가와 민족에게 의무감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 입니다. 제철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국민적 염원과 절박한 시대적 요청 앞에서 일관제철소 건설이라는 국가적 과업을 맡게 됐을 때, 나는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큰 인연이요 회피할 수 없는 일생의 사명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온갖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직원들에게 민족의 진운(進運)을 바꿀 대역사에 동참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자고 강조했습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자고 독려했습니다.
6. 여담[편집]
- 생전 정리정돈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공사 현장에서 자재를 어질러둔 것을 보고 저게 공사자재냐고 소장에게 물어봤고, 소장은 버리는 자재라며 멀쩡한 자재를 모두 버리고(...) 새 자재를 깔끔하게 정돈해뒀다고 한다.
- '포항제철'과 '광양제철'이 붙는 학교의 주인인 포스코교육재단 창립이사장이다. 전신은 1976년에 설립된 학교법인 제철학원으로, 포항공과대학교도 이 법인 산하 학교였으나 1995년 별도의 법인으로 분리되었다. 평소 제철소에서 고된 일을 하는 직원의 자녀 중에 나라구할 큰 인물이 나올지 어떻게 아냐며 직원들의 자녀교육을 매우 중시했다. 포항제철고, 광양제철고 등에도 자주 찾아왔는데 학생들과 찍은 단체사진들은 초중고교 뿐 아니라 유치원들에도 아직도 많이 벽에 걸려있다. 학교선생님들에 의하면 부실공사로 잘못 설계되어 한여름에도 제대로 열지 못하는 창문을 보고 당장 뜯어 고치게 하고 책임자를 찾아내 처벌했다는 등의 여러 전설들이 두서 없이 전해져온다. 그리고 광양의 경우 학교를 방문한 날 저녁에는 주택단지 공원에서 산책하는 박태준 부부와 인사하는 직원 가족들도 많았다고 한다.
- 박정희의 심복으로 5.16 군사정변 당시에 박정희가 '거사 명단'에서 박태준을 배제했었다. 박정희 왈 '일이 꼬여서 잘못되면 내 식구들을 돌봐달라고 할 생각이었다'고... 하지만 박태준은 지시를 어기고 당일 지휘부에 참석하였다.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비서실장으로 근무하였는데, 정작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뒤에는 경제인으로 활약했을 뿐 정치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남인 박지만의 후견인을 자처하였는데, 만일 박태준이 없었다면 박지만은 지금도 마약에 찌들어있었을지도 모른다(...). 박지만이 현재 회장으로 있는 "EG"의 전신인 삼양산업을 박지만이 인수하는데 주선한 장본인도 박태준이었다. 그리고 EG는 현재 알짜 기업으로 소리소문없이 성장했다.
- 포항공과대학교 설립 당시 초대 총장인 김호길 박사가 '지금은 포항제철 부설 포항공대지만 나중에는 포항공대 부설 포항제철이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하며 '학교조직, 개설학과, 교수 수준, 교수 대 학생의 비율은 자기가 모두 다 하겠다'라는 요구를 했다. 원래 이러한 요구는 사학법에 규정된 재단이사장의 권한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는데, 박 회장은 오히려 '초대 총장은 창업자와 같기 때문에 그 사람이 잡아야 한다'며 기분 좋게 웃었다고 한다.
- 1남 4녀를 두었다. 박태준의 장남은 정도원 삼표그룹[38] 회장의 사위이며, 4명의 사위들 역시 그 면모가 화려하다. 맏사위는 국내 3대 대형 회계법인 중 하나인 삼정KPMG의 윤영각 회장이고, 둘째딸은 고승덕 전 국회의원과 결혼하였으나 결별하였다. 막내딸은 원래 전두환의 차남 전재용과 결혼하였으나 결별한 뒤 현 MBK파트너스(홈플러스를 인수한 그 사모 펀드 맞다)의 김병주 회장과 재혼하였다. 좋게 말하면 화려한거고 나쁘게 말하면 끼리끼리. 이외에도 셋째딸은 부산 지역 향토기업인 동일고무벨트 창업자 김도근[39]의 차남이자 김진재 의원인 동생인 김형수[40]와 결혼하였다.
- 포항시 남구의 청암로, 포항공대의 박태준학술정보관 등 포항에는 그를 기리는 지명들이 은근히 많다.
- 포항공과대학교 부설 박태준미래전략연구소가 있다.
- 임랑해수욕장 입구에 생가가 있으며 현재 기념관으로 리모델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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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2] 국회의장이자 학생 독립운동가 운경 이재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장학재단.[3] 현재의 육군사관학교로 당시 명칭은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정확히 말하면 박태준이 입교한 1947년의 명칭이었고 2학년때인 1948년 명칭이 육군사관학교로 바뀐 것이다.굳이 바꿔 서술하는 이유는 11기 때부터 1~10기 졸업생들이 육사 졸업생으로 인정되었는데 11기 생도들은 이 전 생도들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고 졸업생 인정에 대해 불만을 가졌기 때문이다.[4]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경비사관학교 생도 시절에 처음 만났다. 당시 박정희는 사관학교 중대장을 맡았던 대위이자 탄도학 교관이었는데 탄도학 강의 중 문제를 술술 풀어내던 생도 박태준을 눈여겨봤다고 한다. 그후 박태준과 인연을 맺고, 둘은 서로를 믿으며 의지했다. 5.16 거사일 당시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만약 잘못되면, 내 처자들 좀 돌봐줘"라고 말했을 정도라고. 결국 그 인연이 훗날 박태준이 박정희의 심복이 되는 계기가 됐다.[5] 김영삼은 집권한 후에도 자신을 돕지 않았던 박태준에 대해 복수를 지속했는데 당시 포항제철을 이 잡듯이 뒤진 끝에 박태준에 대해 뇌물수수와 탈세 등의 혐의를 적용해 검찰에 고발하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박태준은 일본 등 해외를 떠도는 사실상의 망명 생활을 했다.[6] 다른 장교들은 자기 과시를 하려고 오히려 당번병을 더 늘렸다.[7] 텅스텐을 캐내는 국영기업으로 임명되었다, 1960년대 초에는 국가 총수출액의 1/6을 차지하는 매우 중요한 기업이었다. 이후 포항제철 창립 당시 정부와 공동으로 출자하였으며, 90년대에 민영화되었으며, 지금은 워렌 버핏 계열의 대구텍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버핏이 한국에 투자한 유일한 업체(포스코 지분은 2015년에 완전 정리하였다)[8] 2011년만 해도 버핏이 "포스코는 세계최고의 철강회사"라 극찬했지만, 정준양 회장 취임 후 실적이 점점 악화되었으며, 이명박 정부 말기에 포스코측에서 (잠수함을 생산하는)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하려 하자, "한국의 조선산업은 앞으로 점점 중국에 밀려날 것이며, 대우조선 인수시 지분을 정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9] 이 때 함께한 사람들이 이후 포항제철 창립 시기에 대거 이동하면서 창업요원으로 함께 하게 된다.[10] 하지만 대일청구권 보상금을 포항제철 공사로 대부분 쓰는 바람에 일제의 피해자들은 보상금을 제대로 수령하지 못했고, 이 때 어설프게 한일협정을 맺어놓은 탓에 20세기 후반 ~ 21세기에 들어 강제징용,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가 "우린 1965년에 이미 배상을 마무리 지었다." 라고 두고두고 반론을 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 말았다. 당시 제철 건설 자금 중 1억 달러를 해외 차관으로 조달하고자 했는데, 우리나라에 돈을 대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대일 청구자금에 손을 댔던 것. 피해입은 자들에게 오늘 주어진 보상금을 내일을 위한 종잣돈으로 썼고, 그게 대박을 터뜨렸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일제 피해자들이 붕 뜬건 맞지만.[11] 야와타제철과 후지제철은 1970년 합병하여 현재 일본제철의 전신인 신일본제철이 된다. 원래 2차대전 전의 구 일본제철을 분리시킨 것으로 재통합한 것. 이후 신일본제철과 후신인 신닛테쓰스미킨, 일본제철은 포스코와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2006년부터는 상호 지분 보유를 하고 있으나, 반대로 2012년부터는 기술유출 문제로 분쟁중이기도 하다.[12] 당시 제철소도 짓기 전에 사원복지를 위하여 사원주택단지 건설을 시작하는 당시 관점으로는 말도 안되는 일을 벌였다. 당연히 사방에서 질타가 쏟아졌지만 박태준은 사원 복지 잘해 망한 회사는 없다며 일축했다. 지금도 지곡동에 가면 사원 주택단지가 잘 돼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 때 유일하게 한일은행만이 박태준의 의견을 존중하여 담보는 중요하나 사장님의 열정은 담보보다 더욱 중요하다며 자금을 대출해주었는데, 이는 지금까지 포스코의 주거래은행이 우리은행인 이유라고 볼 수 있겠다.[13] 포항제철이 맨 손에서 빠른 속도로 철강산업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로 박태준의 완벽주의를 꼽는다. 포항 제철소를 지으면서 부실공사 불허라는 확실한 원칙을 제시했다. 1977년 3기를 건설하는 현장에서 발전송풍설비를 폭파한 일화가 있다. 당시 박태준은 발전송풍설비 공사 현장을 감독하던 중 10cm가량 콘크리트가 덜쳐진 곳을 발견하고 다음날 건설현장 책임자와 간부, 외국인 기술 감독자, 포철의 임직원을 모두 부른 가운데 공사가 이미 80%까지 완성된 콘크리트 구조물 폭파식을 거행했다. 이 폭파식은 모범적인 경영관리의 사례로 하버드대, 스탠포드대, MIT 경영학 교재에 소개되기도 했다.[14]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는 "단군 이래의 최대 기적이라 부르는 한국의 경제발전 중심엔 박태준 명예회장이 있었다며 수조원의 순이익을 내는 회사를 키우고 조용히 물러난 진정한 철강왕이었다."고 평가했다.[15] 그러나 김영삼과의 불화가 심해지면서 결국 당선 7개월만에 사퇴하였다.[16] 그래서 DJT연합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사실상 박태준과 TK쪽 세가 너무 약해서(...) DJP연합으로만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박태준 회장이 활동한 영일-포항 등지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10% 이상 득표로 선전해, 사람들이 TJ의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17] 일각에선 박태준은 단 한푼의 재산도 남기지 않았다고 하지만 실상 차명부동산이나 친인척 명의를 이용한 재산은닉 혐의가 농후한 인물이다. 정말로 북아현동 자택을 제외한 재산이 없다면 그 딸들의 해외부동산 같은 것들은 설명하기 어렵다.[18] 전임자 허화평 군사반란 혐의로 피선거권 상실[19] 1997년 11월, 자민련에 입당[20]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21] 이때 멤버들은 포항제철 축구단으로 그대로 흡수된다.[22] 101번은 공식적으론 11~12분 간격인데 지방 소도시의 시내버스 주제에 어째 5분에 1대꼴로 오는 경우가 더러 있다.(...) 거기다 이와 맞먹는 배차율을 가진 102번까지 포함하면 사실 포항시에서 스틸야드까지 대중교통 이용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23] 모 팀 서포터들이 체 게바라 깃발을 많이 쓰다 보니 엉뚱하게 포항 서포터들도 오해를 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자본가 vs 혁명가[24] 포항제철소 조성 비용에 일본의 청구권 자금이 들어갔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25] 현장에 '롬멜하우스'라는 별칭이 붙은 막사를 지었고 박태준도 이 막사에서 숙식을 해결했다.[26] 참고로, 안철수는 복지를 살릴 바에야, 회사 문을 닫겠다고 얘기해서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27] 그리고 이 사고로 인한 복구 공사는 원래대로라면 6개월, 아무리 서둘러도 3~4개월이 걸린다고 예측했는데, 박태준이 독촉해서 28일만에 끝냈단다. 그렇게 서두르는 와중에 부실공사가 벌어지지 않은건 신기한 일.[28] 모모세 타다시가 항의한 이유에는 사실 개인적인 감정 문제(?)도 아주 살짝 있었다. 본문에서 말한 땜질 처리는 도멘 측에서 맡았고, 일이 끝난 뒤 마침 연말연시라서 모모세 타다시는 오랜만에 신년 휴가로 일본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시무식 때문에 도쿄의 도멘 본사로 왔더니 박태준이 현장을 폭파시켰다는 보고를 받고 포항으로 돌아와야 했다.[29] 포스코 역사에서 본사 정직원들이 일으킨 유일한 시위다.[30] 박태준과 김영삼은 특히 사이가 안좋았고 노태우와도 긴밀한 사이는 아니었다.[31] 실제로 박태준 회장이 밀려나고 아래사람들이 박태준을 공격하고 밀고하자 박태준은 매우 섭섭함을 드러내기도 했다.[32] 이 말을 증명하는 것 중 하나는 김대중 정부에서 김종필 후임으로 국무총리를 역임했다는 것이다.[33] 이 시기가 80년대 초반의 일이다. 즉 사실상 87년에 있을 제13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권유한 것과 다름없다.[34] 포스코 포항제철소 정문 간판에 이 격언이 새겨져 있다.[35] 자금 37억원도 설은 요란했으나, 요즘 시대의 공직 청문회 대상자들처럼 정작 박 총리도 퇴진한 후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구설이 수그러들었다.[36]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정치보복을 당한 때까지의 이야기만 다룬다.[37] 이런 관계 때문에 조정래가 태백산맥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당했을 때도 도움을 주고, 2008년 11월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의 개관 행사에도 참석하였다. 반대로 박태준 영결식의 추도사는 조정래가 써 주었다.[38] '삼표(三)레미콘으로 유명한 중견기업으로 레미콘을 비롯한 건설자재사업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부인이 정도원 회장의 장녀다. 고로 박태준의 장남과 정의선 회장은 동서 관계.[39] 김세연 자유한국당 의원의 할아버지이다.[40] 맥도날드의 국내 법인 중 한 곳인 맥킴을 운영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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