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12

백승 도산 안창호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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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의 최후
1938년 3월 10일 안창호는 경성제대 부속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병상을 마지막으로 장식한 것은 아름다운 한 그루 화분이었다. 미와 와사부로 (三輪和三郞) 부부가 선물로 가져온 것이었다.
미와는 악명 높은 고등경찰이었다. 이상재를 비롯하여 나석주, 한용운, 박헌영 등 많은 항일애국지사를 악랄하게 취조하여, ‘염라대왕’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자였다.
안창호와 미와의 인연은 193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윤봉길(尹鳳吉) 의사가 홍커우 ( 虹 口) 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한 직후, 그 사건의 여파로 안창호가 체포되었다. 상하이에서 체포된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미와 경부의 취조를 받았다.
미와는 날마다 악랄한 심문을 거듭했으나 그럴수록 안창호의 고결한 인품이 더욱 빛났다. 안창호는 대한독립에 관한 자신의 신념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정직하다 못해 성실했다. 우격다짐에 침묵으로 항의할지언정 거짓된 말은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아무리 모질게 추궁해도 한번 입을 다물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생사의 기로에 몰린 피의자 안창호가 도리어 단정하고 당당했다. 소박하고 겸손한 조선의 위대한 인격이라는 말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염라대왕’ 미와는 그 인격 앞에 고개를 숙였다.
안창호는 마지막까지도 그랬다. 1936년 여름, 일제는 중일전쟁을 앞두고 공안몰이를 시작했다. 이른바 수양동우회 사건을 일으켜 안창호를 비롯한 다수의 지도자를 체포했다. 종로경찰서에서 처참한 고문이 날마다 계속되었다. 안창호가 이를 보다 못해 형사를 불렀다.
“우리 젊은 동지들에게 그대들이 고문하는 것을 보고 나는 심히 분노합니다. 내게는 아직 고문을 하지 아니했는데, 대답할 수 있는 말을 나는 이미 다 했소. 만일 내게 고문을 한다면 더 이상은 일언반구 (一言半句) 도 대답하지 않을 테니 그리 아시오.”
이후 석 달 동안 모진 취조를 받은 안창호는 몸이 완전히 망가졌다. 그럼에도 그의 시퍼런 기상은 시들지 않았다. 고초를 함께 겪은 장리욱은 1936년 11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될 때의 살풍경을 독백처럼 말했다.
“차디찬 소독물을 펌프로 막 뿜어대는 통에 유치장에서 파리할 대로 파리해진, 피골상접한 동지들의 나체에는 소름이 끼쳐 덜덜 떨고 있었다. 그러나 도산 선생은 그야말로 털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단정한 태도로 그 차디찬 소독물 대포 시련을 받았다. 도리어 시원한 기분을 느끼시는 듯 태연자약하셨다. 도산 선생도 역시 다른 동지와 같이 쇠약한 몸에 그것이 견딜 수 없이 춥고 쓰라렸겠으나, (……) 그런 시련을 단정한 태도로 극복하셨다. 그때 선생의 인상이 너무도 엄숙하고 비장해서나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쓰러지는 것이 너무 당연할 때조차 안창호는 태산같이 고요하고 엄숙했다. 미와는 안창호의 이러한 풍모를 일찌감치 알았다. 그랬기에 그는 1932년 안창호의 조서를 작성할 때 최대한 호의적으로 꾸몄다.
“만약 내가 진술한 그대로 조서를 만들었더라면, 나는 훨씬 더 무거운 형벌을 받았을 것이다.”
안창호는 미와의 행적을 후세에 전했다. 안창호가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미와는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면회를 갔다. 보다 못한 교도소장 미야자키 (宮崎) 가 미와 경부의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불평할 정도였다.
미와 부인 눈물 흘리며 헌혈을 자청
그 안창호가 1938년 3월 병석에 누워 사경을 헤맸다. 소식을 들은 미와는 아내와 함께 병상의 도산을 찾아갔다. 별세하기 이틀 전이었다.
안창호는 함경도경찰국 미와 경부의 문병 소식을 그다음 날 병원으로 몰래 찾아온 옛 동지 선우혁에게 일렀다.
“아무리 우리가 서로 원수관계에 있다 할지라도 말이오. 미와의 아내는 딱한 내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더군요. 뿐더러 그는 혈액형이 나와 같으므로 수혈을 하겠다며 의사까지 데리고 오지 않았겠소. 그런 것을 내가 가까스로 만류했소.”
안창호로 말하자면 조국의 독립을 위해 가시밭길을 달려온 한국인이오, 미와는 일제의 하수인이었다. 미와가 줄곧 호의를 보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와의 관계는 어쩔 수 없는 ‘원수’ 사이였다.
그래도 병세가 위중한 자신을 위해 눈물을 쏟은 미와 부인을 보며 안창호는 고마움을 느꼈다. 핏기를 잃은 안창호에게 않았더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들의 친절을 헤아릴수록 안창호의 심경은 더욱 불편해졌을 것이다. 식민 지배라는 비극만 아니라면 그들은 얼마든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한일 양국의 불행한 처지 때문에 우리는 피치 못할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안창호는 이런 결론을 내리며 부인의 헌혈을 사양했다고 본다. 개인의 친분보다 민족의 이해관계가 더욱 절실한 문제라고 그는 확신했을 것이다. 안창호의 시대에는 민족주의로 가장한 제국주의가 세상을 휩쓸었다. 그 물살이 대한해협 양쪽의 수많은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훗날 미와는 어떻게 되었을까. 해방 직후 김두한이 그를 처단했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 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출처: 백승종, <선비와 함께 춤을>(사우, 2018)
사족: 도산 안창호야말로 선비가 아니었든가 생각합니다. 그가 만든 단체의 이름도 "흥사단", 즉 선비를 부흥하는 모임이라는 뜻이었고요. 선비라면 "*선비"라며 욕하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처럼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 또 있을까 생각합니다. 저의 보수성을 보여주는 일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안창호는 철저하게 평민적인 분이었지요. 그러나 그처럼 고상하고 꼿꼿하며 인자한 어른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선비였던 거죠. 신사라고 하면 재산도 유족하고 신식과 구식 학문도 많이 아는 사람이어야겠는데요. 도산이 제대로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옛 유교 경전이요, 우리말 성서가 아마 전부였을 것입니다. 신식 공부는 별로 깊이 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마음가짐으로, 지난한 독립운동가의 길을 평생 걸으셨지요.
미와 경부라는 존재도 정말 묘합니다. 도산 선생과 친교를 나눌 처지는 아니었으나, '염라대왕'조차도 선생의 훌륭한 인품에 고개를 숙였다는 말인데요. 그는 자기 나름으로 애국(즉 일본에 대한 애국이지요)을 한 모양이지만, 그러면서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가 봅니다.
하지만 인격이 훌륭한 도산 선생도 미와와 허심탄회하게 만나서 진정한 의미의 우정을 쌓을 수는 없었습니다. 세상 형편이 그들 두 사람에게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던 거지요. 인격적 고매함으로도 넘어갈 수 없는 장벽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할 것입니다.
인도의 간디가 영국의 정치가들과 친구가 될 수 없었던 것도 마찬가지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대표하는 이익 집단의 차이 때문에 어찌할 수가 없는 사이였던 것입니다. 미안하고 불편한 일이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저는 이땅의 보잘 것 없는 정치가들, 학자들을 떠올립니다. 그들은 무슨 일만 있으면 자기들과 연고가 있는 강대국의 대사관을 찾아가서 시시콜콜 이쪽 이야기를 전해주기에 바쁘다고 하죠. 심지어 미국까지 찾아가서 이 나라 사정을 알리고 하소연하기에 바쁜 인사들도 있습니다. 제 이익을 위해서 나라를 배신하는 짓도 서슴지 않을 인간들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런 모리배들이 옛날부터 우리나라에 적지 않았습니다. 지금 여기서 일일이 다 말씀드리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런 점을 돌이켜볼 때 도산 선생이 미와 경부와 끝내 거리를 두고 운명하신 사실이 실은 매우 귀중한 문화 유산입니다. 사람은 제 아무리 쇠락하였을 때라도 이처럼 품위를 잃지 않고 눈을 감을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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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호정호
    도산 안창호선생님의 고결한 인품. 오늘 다시 가슴에 새깁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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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승종
      이런 분들이 계셔서 우리에게 늘 희망의 등불이 써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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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정무
    선생의 고결한 인품에 머리 숙입니다..
    오늘도 또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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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혜덕
    잘 읽었습니다.
    도산 선생님이 돌아가시지 않으셨다면 해방 후의 우리나라를 맡게 되셨을 것이고, 그러면 제대로 나라가 섰을 것이라고 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일제가 이런 분을 살려놓을리가 절대로 없었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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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승종
      몸이 너무 망가져서 도저히 사실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도산과 같은 "거물급" 인사들도 함부로 고문하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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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혜덕
      백승종 네 고문으로 돌아가신 것은 틀림없습니다. 감옥 안이 아니었다 뿐이지요.
      하도 아쉽고 억울해서 만약에, 하고 드린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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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승종
      원혜덕 이것은 물론 추측이지만요. 사셨다 해도 해방 후 한국을 이끌지는 못하셨을 것입니다. 이승만과 갈등이 심하였는데, 미국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이승만을 이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정치는 무엇보다도 "현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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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승종
      그때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이 차라리 잘 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만약에... 사셨더라면 1940년대에 휘몰아친 "친일 바람"을 맞서 싸우시느라 다시 탈진할 수 밖에 없었을 거고요. 우리가 기억하는 친일파의 대부분이 1940년대에, 즉 마지막 통치기간에 대량으로 발생하였습니다. 그분들이 나약했던 것도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저들이 얼마나 잔악하게 압박했는지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쉽게 비판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그때 그 위기를 맨몸으로 맞았더라면 과연 몇 명이나 지조를 지켰을까요. 후세로서 욕하기는 쉽지만...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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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eong Jong Bae
    망우리에 묻힌 유상규군 옆에 가겠다는 도산의 뜻을 조카 사위 김봉성이 아버지 모실 자리에 모시었다는 오기영 기자의 증언이 있었네
    1973년 강남개발이라는 미명아래 도산공원으로 모셨는데 도산의 바람대로 망우리로 재이장하였으면......
    현재도 망우리 도산 이장지 주변에 묘지가 남이 있는 흥사단 단우
    허연 이영학 유상규 김기만 나우 등
    이장한 단우
    조종완 김봉성 문명훤
    May be an image of monument and outdo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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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eong Hwan Oh
    선생님의 글을 보며 긍금증이 생겼습니다.
    일제가 공안사건을 조작해서 애국지사들의 소탕작전을 펼친것이 자유당과 공화당 민정당의 정권까지 답습되었는데
    일본 본토에서는 제국주의 시대 공안 조작사건이 얼마나 있었으며
    패망후 자민당하에서도 조작 공안사건이 있었는지요.
    급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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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승종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는 방식과 일본 내부의 사정은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우리를 대하는 방식은 훨씬 거칠고 야만적이었다는 뜻입니다. 자기네들끼리는 사상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신사적이었습니다. "국적" 즉 국가의 적이라고 낙인찍힌 인사들도 고문을 당하거나 억울하게 붙잡혀 죽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이 일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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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eong Hwan Oh
      백승종 그러니
      우리나라를 핍박하던 찌꺼기 정치가 일본으로 부터 해방된 대한민국에서 버젓하게 행해졌다는 사실이 분개스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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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승종
      오청환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역사란 한번에 잘 되는 법이 없지요. 세상의 일은 화학적 변화라기보다는 물리적 변화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대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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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h
  • 배종철
    구한말~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진짜 존경하는 분들중 한분입니다.
    좋을 글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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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승종
      예, 도산 선생은 참으로 흠결이 없는 분이셨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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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영우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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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oung Back
    배움을 통한 깨우침과
    앎이 삶으로 이어지신 참 선비요 애국자요 또한 신앙인이십니다. 귀한 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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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승종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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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黄仁七
    도산 안창호
    안중근의사
    안씨 성을 가진 훌륭한 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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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동영
    좋은 글...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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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헌
    五山학교 남강 이슴훈 선생께서 학교를 세우실 때 그저 자신 동향인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세우셨답니다
    그런데 안창호선생을 만나 뵌 후 학교에 대한 생각이 달라 지셨다 합니다
    그래서인지 강남에 도산공원이 열릴 때 학교간부들을 데리고 가서 그 기념식에 참가했었습니다
    그때 생각엔 왜 숭실도 안오는데 우리가 이 고생을 해야하나 했었는데
    나중에야 그런 관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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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승종
      도산 선생과 남강 선생의 관계는 특별하기도 하였고요. 또 널리 알려진 일이기도 하지요. 제가 쓴 책 <<그 나라의 역사와 말>>에도 관련된 이야기가 조금 자세히 나옵니다. 참고가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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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헌
      백승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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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3 m
  • Jae Joon Chung
    미와 경부 아내분이 도산 안창호 선생님에게 헌혈을 자원했다는 증언의 1차 사료의 출처는 어디 인지 매우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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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승종
      선우혁 선생의 증언을 토대로 한 것인데요. 이용하실 수 있는 자료로는 <<안도산전서>>(주요한 선생 편집, 흥사단 출판부, 1999년 증보판)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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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8 m
  • 안지숙
    강대국의 대사관을 찾아가 국내사정을 꼬나바치는 현대판 벼슬아치들이 바로 X선비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아침에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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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승종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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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 m
  • Byungkyu Kwon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도산선생님에 대한 남다른 면모를 보게 되네요. 진정한 선비셨구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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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승종
      공감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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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영남
    감동적인 내용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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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4 m
    • 백승종
      참으로 따라하기 어려운 삶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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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7 m
  • Yong Jun Choi
    미와 와사부로는 월남 이상재 같은 독립운동가들도 도산과 비슷한 방식으로 접근했다고 합니다. 특히 조선어 실력이 우수했던 미와는 "거물급" 독립운동가에게는 인간적 모습을 맘껏 드러내며 독립운동 진영을 교란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신 이름없는 민족주의 운동가나, 공산당원들을 다룰 때는 무자비했지요. 종로서 시절 부하 요시노(吉野) 경부보와 함께 잔인하게 고문했던 공산당원들에게 역으로 고소당한 사건을 보면 미와의 위선적 면모를 느낄 수 있습니다.
    미와 경부(左)와 요시노 경부보(右)의 사진을 첨부합니다.
    May be an image of 2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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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 m
    • 백승종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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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 m
  • 전진규
    도산 선생은 수배 중이라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한 아이와의 약속을 어길 수 없다고 나갔다가 체포당하셔습니다. 단군이래 최고의 인격자입니다.
    출옥후 몹씨 가혹한 고문으로 치명적인 건강악화로 별세 직전의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이작 회갑도 안 되신 연세인데^^^
    May be a close-up of 1 person and text that says "1937年 1937 島山 最後의面影 (59才) 島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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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 m
    • 백승종
      예, 그렇습니다. 유명한 일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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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m
  • 주세페김
    무실역행하셨던 안창호 선생을 바라보면 저의 존재와 요즘 사람들의 세태가 그저 부끄러울뿐입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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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 m
  • 황재구
    안창호선생의 인간됨을 우린 잘 알았으니 이젠 우리 삶에서 실천해야지요.. 그래야 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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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 m
  • 전창관
    이순신 장군부터 안중근 중장 그리고 안창호 까지 뮤두 일본인들이 갖는 존경심이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깊이 선열의 영전에 고개 숙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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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 m
  • 서창원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늘 새롭게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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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 m
  • Kim Minho
    선비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는 책을 우연한 기회에 접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름 흥미롭게 보았던 것 같은데 떠오르는 구체적인 내용은 없네요 아쉽게도
    도산 안창호선생님 이야기 유익하게 잘 읽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실천할 수 없음을 자각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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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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