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의 최후
1938년 3월 10일 안창호는 경성제대 부속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병상을 마지막으로 장식한 것은 아름다운 한 그루 화분이었다. 미와 와사부로 (三輪和三郞) 부부가 선물로 가져온 것이었다.
미와는 악명 높은 고등경찰이었다. 이상재를 비롯하여 나석주, 한용운, 박헌영 등 많은 항일애국지사를 악랄하게 취조하여, ‘염라대왕’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자였다.
안창호와 미와의 인연은 193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윤봉길(尹鳳吉) 의사가 홍커우 ( 虹 口) 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한 직후, 그 사건의 여파로 안창호가 체포되었다. 상하이에서 체포된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미와 경부의 취조를 받았다.
미와는 날마다 악랄한 심문을 거듭했으나 그럴수록 안창호의 고결한 인품이 더욱 빛났다. 안창호는 대한독립에 관한 자신의 신념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정직하다 못해 성실했다. 우격다짐에 침묵으로 항의할지언정 거짓된 말은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아무리 모질게 추궁해도 한번 입을 다물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생사의 기로에 몰린 피의자 안창호가 도리어 단정하고 당당했다. 소박하고 겸손한 조선의 위대한 인격이라는 말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염라대왕’ 미와는 그 인격 앞에 고개를 숙였다.
안창호는 마지막까지도 그랬다. 1936년 여름, 일제는 중일전쟁을 앞두고 공안몰이를 시작했다. 이른바 수양동우회 사건을 일으켜 안창호를 비롯한 다수의 지도자를 체포했다. 종로경찰서에서 처참한 고문이 날마다 계속되었다. 안창호가 이를 보다 못해 형사를 불렀다.
“우리 젊은 동지들에게 그대들이 고문하는 것을 보고 나는 심히 분노합니다. 내게는 아직 고문을 하지 아니했는데, 대답할 수 있는 말을 나는 이미 다 했소. 만일 내게 고문을 한다면 더 이상은 일언반구 (一言半句) 도 대답하지 않을 테니 그리 아시오.”
이후 석 달 동안 모진 취조를 받은 안창호는 몸이 완전히 망가졌다. 그럼에도 그의 시퍼런 기상은 시들지 않았다. 고초를 함께 겪은 장리욱은 1936년 11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될 때의 살풍경을 독백처럼 말했다.
“차디찬 소독물을 펌프로 막 뿜어대는 통에 유치장에서 파리할 대로 파리해진, 피골상접한 동지들의 나체에는 소름이 끼쳐 덜덜 떨고 있었다. 그러나 도산 선생은 그야말로 털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단정한 태도로 그 차디찬 소독물 대포 시련을 받았다. 도리어 시원한 기분을 느끼시는 듯 태연자약하셨다. 도산 선생도 역시 다른 동지와 같이 쇠약한 몸에 그것이 견딜 수 없이 춥고 쓰라렸겠으나, (……) 그런 시련을 단정한 태도로 극복하셨다. 그때 선생의 인상이 너무도 엄숙하고 비장해서나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쓰러지는 것이 너무 당연할 때조차 안창호는 태산같이 고요하고 엄숙했다. 미와는 안창호의 이러한 풍모를 일찌감치 알았다. 그랬기에 그는 1932년 안창호의 조서를 작성할 때 최대한 호의적으로 꾸몄다.
“만약 내가 진술한 그대로 조서를 만들었더라면, 나는 훨씬 더 무거운 형벌을 받았을 것이다.”
안창호는 미와의 행적을 후세에 전했다. 안창호가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미와는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면회를 갔다. 보다 못한 교도소장 미야자키 (宮崎) 가 미와 경부의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불평할 정도였다.
미와 부인 눈물 흘리며 헌혈을 자청
그 안창호가 1938년 3월 병석에 누워 사경을 헤맸다. 소식을 들은 미와는 아내와 함께 병상의 도산을 찾아갔다. 별세하기 이틀 전이었다.
안창호는 함경도경찰국 미와 경부의 문병 소식을 그다음 날 병원으로 몰래 찾아온 옛 동지 선우혁에게 일렀다.
“아무리 우리가 서로 원수관계에 있다 할지라도 말이오. 미와의 아내는 딱한 내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더군요. 뿐더러 그는 혈액형이 나와 같으므로 수혈을 하겠다며 의사까지 데리고 오지 않았겠소. 그런 것을 내가 가까스로 만류했소.”
안창호로 말하자면 조국의 독립을 위해 가시밭길을 달려온 한국인이오, 미와는 일제의 하수인이었다. 미와가 줄곧 호의를 보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와의 관계는 어쩔 수 없는 ‘원수’ 사이였다.
그래도 병세가 위중한 자신을 위해 눈물을 쏟은 미와 부인을 보며 안창호는 고마움을 느꼈다. 핏기를 잃은 안창호에게 않았더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들의 친절을 헤아릴수록 안창호의 심경은 더욱 불편해졌을 것이다. 식민 지배라는 비극만 아니라면 그들은 얼마든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한일 양국의 불행한 처지 때문에 우리는 피치 못할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안창호는 이런 결론을 내리며 부인의 헌혈을 사양했다고 본다. 개인의 친분보다 민족의 이해관계가 더욱 절실한 문제라고 그는 확신했을 것이다. 안창호의 시대에는 민족주의로 가장한 제국주의가 세상을 휩쓸었다. 그 물살이 대한해협 양쪽의 수많은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훗날 미와는 어떻게 되었을까. 해방 직후 김두한이 그를 처단했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 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출처: 백승종, <선비와 함께 춤을>(사우, 2018)
사족: 도산 안창호야말로 선비가 아니었든가 생각합니다. 그가 만든 단체의 이름도 "흥사단", 즉 선비를 부흥하는 모임이라는 뜻이었고요. 선비라면 "*선비"라며 욕하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처럼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 또 있을까 생각합니다. 저의 보수성을 보여주는 일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안창호는 철저하게 평민적인 분이었지요. 그러나 그처럼 고상하고 꼿꼿하며 인자한 어른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선비였던 거죠. 신사라고 하면 재산도 유족하고 신식과 구식 학문도 많이 아는 사람이어야겠는데요. 도산이 제대로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옛 유교 경전이요, 우리말 성서가 아마 전부였을 것입니다. 신식 공부는 별로 깊이 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마음가짐으로, 지난한 독립운동가의 길을 평생 걸으셨지요.
미와 경부라는 존재도 정말 묘합니다. 도산 선생과 친교를 나눌 처지는 아니었으나, '염라대왕'조차도 선생의 훌륭한 인품에 고개를 숙였다는 말인데요. 그는 자기 나름으로 애국(즉 일본에 대한 애국이지요)을 한 모양이지만, 그러면서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가 봅니다.
하지만 인격이 훌륭한 도산 선생도 미와와 허심탄회하게 만나서 진정한 의미의 우정을 쌓을 수는 없었습니다. 세상 형편이 그들 두 사람에게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던 거지요. 인격적 고매함으로도 넘어갈 수 없는 장벽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할 것입니다.
인도의 간디가 영국의 정치가들과 친구가 될 수 없었던 것도 마찬가지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대표하는 이익 집단의 차이 때문에 어찌할 수가 없는 사이였던 것입니다. 미안하고 불편한 일이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저는 이땅의 보잘 것 없는 정치가들, 학자들을 떠올립니다. 그들은 무슨 일만 있으면 자기들과 연고가 있는 강대국의 대사관을 찾아가서 시시콜콜 이쪽 이야기를 전해주기에 바쁘다고 하죠. 심지어 미국까지 찾아가서 이 나라 사정을 알리고 하소연하기에 바쁜 인사들도 있습니다. 제 이익을 위해서 나라를 배신하는 짓도 서슴지 않을 인간들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런 모리배들이 옛날부터 우리나라에 적지 않았습니다. 지금 여기서 일일이 다 말씀드리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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