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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발견된 목판본’은 동경대전 ‘경진판’인가?
“최초의 동경대전, ‘경진판’은 발견된 것인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우선, 윤석산 교수는 2009~2010년간에 ‘새로 발견된 목판본’이 ‘경진판’일 것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윤 교수는 여전히 ‘새로 발견된 목판본’이 ‘경진판’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하다.
‘새로 발견된 목판본’이 가진 미비점 때문이다.
그러나 도올은 윤 교수에게 배움을 얻었다며
‘새로 발견된 목판본’이 동경대전 경진초판이며 이는 국보의 가치가 있다고 단정한다.
아래 글3개는 신인간 5월호에 실린 것으로
동경대전에 대한 이해를 깊이할 수 있는 글들이다.
1. 윤석산 교수가 2010년 겨울 동학학보에 발표한 것.
https://m.blog.naver.com/1926nh/222367550277
2. 도올김용옥 《동경대전1·2 》출간에 대해
https://m.blog.naver.com/1926nh/222367553478
3. 도올의《동경대전1·2》를 읽고/라명재
https://m.blog.naver.com/1926nh/222367598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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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162.5] 새로 발견된 목판본 동경대전에 관하여
신인간
6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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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10년, 새로 발견된 목판본. 논학문을 ‘동학론’으로 표기하고 있다.
‘새로 발견된 목판본’은 동경대전 ‘경진판’인가?
도올 김용옥은 《동경대전1·2》에서 그의 표현대로 ‘학구적인’ 비판에 해당하겠으나 ‘천도교경전’이나 ‘천도교’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이는 십수년 전에 발간된 ‘도올심득 동경대전1’ 등에서 이미 제기되었던 것들이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재사심정(再思心定)의 마음가짐으로 차근차근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이어지는 윤석산·라명재 두 분의 글이 좋은 참고 자료이다.
그리고 “최초의 동경대전, ‘경진판’은 발견된 것인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우선, 윤석산 교수는 2009~2010년간에 ‘새로 발견된 목판본’이 ‘경진판’일 것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윤 교수는 여전히 ‘새로 발견된 목판본’이 ‘경진판’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하다.
‘새로 발견된 목판본’이 가진 미비점 때문이다.
그러나 도올은 윤 교수에게 배움을 얻었다며 ‘새로 발견된 목판본’이 동경대전 경진초판이며 이는 국보의 가치가 있다고 단정한다.
도올의 《동경대전1·2》 출간을 계기로 ‘새로 발견된 목판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최초의 동경대전 ‘경진판’을 비롯한 천도교경전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하고자 한다. / 편집실
새로 발견된 목판본 동경대전에 관하여
윤석산_서울교구, 한양대명예교수
이글은 동학학보 제20호(2010.12)에 게재된 논문 ‘새로 발견된 목판본 동경대전에 관하여’를 간추린 것이다./편집실
‘새로 발견된 목판본’은 2009년 독립기념관에서 전개한 자료기증운동 때에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신장1리 179에 사는 이상훈씨가 기증의사를 밝힘에 따라, 7월 16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의 홍선표, 조성진 두 연구원이 이상훈씨 집을 방문하여 수집한 자료이다. 이후 7월 24일 대전에서 기증식을 갖고 독립기념관에 기증 보관되었다.
이상훈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상훈씨의 큰아버지인 이철용이라는 분은 한일합방에 분노를 느끼고 그 부당함을 주장하다가, 왜경을 죽이는 사건을 일으킨다. 이로 인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하고, 평생을 피신해 살면서, 동생의 집인 이상훈씨 아버지 집에 와 숨어 지내게 되었다. 이철용씨는 광복이 되던 해인 1945년에 한 많은 생을 마친다. 이 목판본 동경대전은 이철용씨가 동생 집에 남겨놓은 짐 속에 있던 것이다.
본 글은 ‘새로 발견된 목판본’의 정체를 찾기 위하여 경진판(1880년) 판각 당시 같이 기획 간행된 도원기서**를 중요한 자료로 참고하였다. 또 ‘새로 발견된 목판본’과 계미중춘판(1883년 봄), 계미중하판(1883년 여름), 무자계춘판(1888년 봄) 등을 서로 비교 고찰하였다.
** 도원기서의 처음 이름은 최선생문집 도원기서(崔先生文集 道源記書). 1978년 처음 발견될 당시 그 표제가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수운 선생의 문집에 해당되는 부분(崔先生文集)’은 없고, 다만 도의 연원과 역사만이 기록되어 있다. 도원기서의 출간 연대에 관하여 동학․천도교단의 여러 기록들은 1879년으로 되어있다.(천도교회사 초고,侍天敎宗歷史) 그러나 도원기서를 검토해 보면, 그 내용이 1880년 경진판 동경대전을 간행하는 시점까지 되어 있다. 따라서 이의 간행연대는 1880년으로 보아야 한다.
1.
‘새로 발견된 목판본’ 그 체제가 ‘문집(文集)’의 형태를 띠고 있다.
첫째가 그 편찬 체제이다. 계미중춘판이나, 계미중하판과는 다르게 그 체제가 ‘卷之一: 布德文·東學論. 卷之二: 修德文·不然其然·歎道儒心急, 卷之三: 祝文·呪文·降詩, 卷之四: 座箴·八節·筆法, 卷之五: 和訣·降訣·題書, 卷之六: 附詩賦, 卷之七: 通文’ 등으로 되어 있다.
계미중춘판의 경우 다음과 같은 순서로 되어 있다.
布德文, 論學文, 修德文, 不然其然, 祝文, 立春詩, 絶句, 降詩, 座箴, 和訣詩, 歎道儒心急, 訣, 偶吟, 八節, 通文, 儀式
즉 ‘새로 발견된 목판본’의 경우 그 목차나 체제가 문집으로서의 체제를 지니고자 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권지육(卷之六)에 ‘부(附)’라는 말을 붙여, ‘시부(詩賦)’가 부록과 같은 것임을 명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체제는 도원기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해월 등이 ‘수운 선생의 문집’을 편찬하고 또 판각한다는 의식 속에서 기획 간행된 것이라고 판단된다.
‘새로 발견된 목판본’에는 동학의식***에 관한 부분이 실려 있지 않다. 그러나 계미중춘판이나 계미중하판에는 이 부분 모두가 실려 있다. ‘동학의 경전’이 아닌, ‘수운 선생의 개인문집’으로서 기획 편찬 되었다면, 동학의식을 실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을 것이다. 즉 계미판에는 있는 동학의식 부분이 실리지 않았다는 것도 역시 ‘새로 발견된 목판본’이 ‘문집’으로서의 의식 속에서 꾸며졌다는 증거의 하나가 된다.
특히 이 의식 부분에는 수운 선생이 해월에게 “제를 지낼 때에는 양이나 돼지 등 고기 종류를 쓰지 말라는 가르침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해월이 이 의식 부분에 관하여 몰랐을 리가 없다. 즉 수운 선생이라는 한 개인의 문집을 제자들이 편찬한다는 생각이 이에 다소나마 있었기 때문에, 동학의식에 관한 부분은 싣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布德式 人有願入者 則先入者 傳道之時 正衣冠 禮以授之事
入道式 入道之時 或向東或向北 設位 致誠行祀 焚香四拜 後以初入 呪文 敬以受之事
致祭式 入道後 致祭節次 設位四拜 後讀祝而卽誦降靈呪及本呪文事
祭需式 設其醴酒餠麵魚物果種脯醯菜蔬 香燭 用之 而以肉種論之 雉則例用猪則或用 祭需之多小 隨其力行之也 先生布德之初 以牛羊猪肉 通用矣 至於癸亥八月 先生顧予 傳道之日 此道兼儒佛仙三道之敎 故不用肉種事
2.
‘새로 발견된 목판본’에는 많은 문장들이 빠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경진판을 간행한지 불과 3년이 되지 못해 다시 계미중춘판을 간행하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이 ‘문다누궐지탄(文多漏闕之歎)’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여러 동지들과 논의를 하고 약조를 꾀하여 목판을 새기는 공을 이루었으나, 글에 빠진 것이 많아, 목천(木川) 접중에서 다시 간행을 하게 되었다.(謹與同志 發論詢約 以成剞劂之功矣 文多漏闕之歎 故自木川接中 燦然復刊)’는 것이다.
특히 ‘문다누궐(文多漏闕)’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글자가 빠진 것이 아니라, 중요한 ‘문(文)’, 곧 ‘문장(文章)’들이 누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판각으로 새기는 과정에서 실수로 몇 자 정도가 누락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보다 완전한 원본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몇 문장들이 누락된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만약 판각하는 과정에서 몇 자 정도가 실수로 빠졌다면, ‘궐자(闕字), 탈자(脫字)’ 정도로 표기를 했을 것이다. ‘새로 발견된 목판본’ 동경대전과 계미중춘판 동경대전을 서로 비교해 보면, 아래와 같은 부분들이 ‘새로 발견된 목판본’에는 없음을 알 수 있다.
纔得一條路 步步涉險難 山外更見山 水外又逢水 幸渡水外水 僅越山外山 且到野廣處 始覺有大道 苦待春消息 春光終不來 非無春光好 不來卽非時 玆到當來節 不待自然來 春風吹去夜 萬木一時知 一日一花開 二日二花開 三百六十日 三百六十開 一身皆是花 一家都是春
甁中有仙酒 可活百萬人 釀出千年前 藏之備用處 無然一開封 臭散味亦薄 今我爲道者 守口如此甁 「탄도유심급(歎道儒心急)」 중에서
다음으로는 「화결시(和訣詩)」 중에서, 계미중춘판에는 있지만, ‘새로 발견된 목판본’에는 없는 부분들이다.
萬里白雪紛紛兮 千山歸鳥飛飛絶 東山欲登明明兮 西峰何事遮遮路
또 「영소(詠宵)」 중에도 다음과 같은 부분들이 ‘새로 발견된 목판본’에서는 빠져 있다.
蓮花倒水魚爲蝶 月色入海雲亦地 杜鵑花笑杜鵑啼 鳳凰臺役鳳凰遊
白鷺渡江乘影去 晧月欲逝鞭雲飛 魚變成龍潭有魚 風導林虎故從風
風來有迹去無跡 月前顧後每是前 煙遮去路踏無跡 雲加峯上尺不高
山在人多不曰仙 十爲皆丁未謂軍 月夜溪石去雲數 風庭花枝舞蝴尺
人入旁(房)中風出外 舟行岸頭山來水 花扉自開春風來 竹籬輝踈秋月去
影沉綠水衣無濕 鏡對佳人語不知 勿水脫乘美利龍 問門犯虎那無樹
또한 무자계춘판에는 ‘새로 발견된 목판본’에는 물론 없고, 계미중춘판에도 없는 문장들이 더 실려 있다.
高峰屹立 群山統率之像 流水不息 百川都會之意 明月虧滿 如節符之分合
黑雲騰空 似軍伍之嚴威 地納糞土 五穀之有餘 人修道德 百用之不紆
「流高吟」
風過雨過枝 風雨霜雪來 風雨霜雪過去後 一樹花發萬世春
「偶吟」
3.
‘새로 발견된 목판본’에 실린 글들의 제목이 계미중춘판이나 계미중하판, 무자계춘판 등과 다른 것들이 보인다. 특히 논학문을 동학론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동학론이라는 제목은 초기동학의 문서에서나 나오는 이름이며, 더구나 ‘새로 발견된 목판본’ 이외의 어느 판본에도 나오지 않는다.
또한 표기된 글자에 있어서도, ‘새로 발견된 목판본’은 다른 판본들에 비하여 잘못된 표기가 많았고, 고자(古字)로 표기된 부분 역시 많았다. 이와 같은 점이 ‘새로 발견된 목판본’이 가장 오래된 초기동학의 판본임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
편명
계미중춘판
새로 발견된 목판본
비고
포덕문
余亦無功故 生汝世間
余亦無功故 生汝世閒
間 → 閒
논학문
又有怪違之說 崩騰于世間
又有怪違之說 崩騰于世閒
間 → 閒
似然非然之間
似然非然之閒
間 → 閒
수덕문
擺脫世間之紛繞
擺脫世閒之紛繞
間 → 閒
불연기연
世間孰能無父母之人
世閒孰能無父母之人
間 → 閒
化而言之 理遠於茫茫之間
化而言之 理遠於茫茫之閒
間 → 閒
강시
圖來三七字 降盡世間魔
圖來三七字 降盡世閒魔
間 → 閒
우음
人生世間有何得
人生世閒有何得
間 → 閒
大小事間疑不在
大小事閒疑不在
間 → 閒
吾心極思杳然間
吾心極思杳然閒
間 → 閒
통유
江山之明月 山間之淸風
江山之明月 山閒之淸風
間 → 閒
수덕문
一以詠覺非是之句
一以咏覺非是之句
詠 → 咏
龍湫之淸潭寶溪
龍湫之淸潭寶谿
溪 → 谿
自歎後學之忘却
自歎後學之忘卻
却 → 卻
童子拜拱倚然 有六七之詠
童子拜拱倚然 有六七之咏
詠 → 咏
탄도유심급
不然而其然 似遠而非遠
不然而其然 似遠而不遠
非遠 → 不遠
우음
凡作吾君一會中
兀作吾君一會中
凡 → 兀
절구
平生受命千年運
平生命受千年運
受命→ 命受
통유
少年以禮而强挽
少年以禮而彊挽
强 → 彊
揚風洒雨
揚風灑雨
洒 → 灑
草長衣添
草長衣霑
添 → 霑
수덕문
極念致誠之端 然而彌留
極念致誠之端 然而彌㙧
彌留 → 彌㙧
衣冠正齊 君子之行
衣冠整齊 君子之行
整 → 正
논학문
尙今彌留
尙今彌㙧
彌留 → 彌㙧
위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두 판본의 비교에서 가장 많이 나타는, 서로 다르게 표기된 글자는 ‘간(間)’을 ‘한(閒)’으로 표기한 예이다. 그러나 ‘한(閒)’은 ‘한가하다’라는 의미를 띄고 있기도 하지만, ‘간’으로 읽히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이러한 경우에는 ‘사이 간(間)’의 의미와 동일하게도 쓰인다. 본래 ‘間’이라는 글자의 고자(古字)는 ‘달(月)이 문(門) 사이로 들어온다.’는 의미의 회의(會意) 글자인 ‘閒’이다. 이 ‘閒’이 변하여 오늘의 ‘間’이 된 것이다.
따라서 ‘새로 발견된 목판본’에 ‘사이’라는 의미로 ‘閒’이라는 글자를 표기한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고자로 표기한 것이다. 그렇지만 화결시 중의 ‘진시한담고금(盡是閒談古今)’과 우음 중의 ‘동좌한담원상재(同坐閒談願上才)’ 등에서 나오는 ‘閒’은 그 내용상으로 보아 ‘한가하다’는 의미의 ‘한’으로 읽히고 또 쓰였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도 ‘새로 발견된 목판본’은 모두 ‘閒’이라는 글자로 표기를 하고 있다. 따라서 ‘間’과 같은 의미로 쓴 ‘閒’의 표기와 혼동을 줄 가능성이 너무 높다.
그 이외에 나오고 있는 ‘詠 → 咏’, ‘溪 → 谿’, ‘詠 → 咏’, 却 → 卻, ‘灑→ 洒’, ‘彌留 → 彌㙧’ 등으로 표기한 것은 같은 의미의 글자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고자(古字)를 썼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새로 발견된 목판본’이 주로 고자로 표기를 했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탄도유심급의 마지막 부분을 계미중춘판에는 ‘不然而其然 似遠而非遠’라고 표기한데 비하여 ‘새로 발견된 목판본’에는 ‘不然而其然 似遠而不遠’으로 표기하고 있다. 즉 ‘非遠’을 ‘不遠’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둘의 의미는 큰 차이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이후 발간된 계미중하판이나 무자계춘판 등 모든판본에는 ‘非遠’으로 표기가 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새로 발견된 목판본’의 ‘不遠’이 잘못된 표기라고 생각이 된다.
이외에 수덕문 중의 ‘衣冠正齊’를 ‘새로 발견된 목판본’에서는 ‘衣冠整齊’로 표기하고 있다. 또한 계미중하판에는 ‘衣冠定齊’로 표기를 하고 있다. 즉 ‘正’, ‘整’, ‘定’ 등으로 모두 다르게 표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무자계춘판에서는 다시 ‘正’으로 바꾸어 표기한고 있다. 또한 절구 중의 ‘平生受命千年運’을 ‘새로 발견된 목판본’에서는 ‘平生命受千年運’으로 ‘受命’을 ‘命受’로 글자를 바꾸어 표기를 하고 있다. 문장 구조로 보아 ‘命受’는 잘못된 표기이다. 계미중하판, 무자계춘판을 비롯한 모든 판본에도 역시 ‘受命’으로 표기가 되어 있다. 또한 통유 중에 ‘草長衣添’이 ‘새로 발견된 목판본’에서는 ‘草長衣霑’으로 표기되어 있다. 즉 ‘비가 내리는 계절이 되어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풀이 길어 옷에 달라붙는다.’로 번역이 되지만, ‘새로 발견된 목판본’의 구절로 번역을 하면, ‘~ 풀이 길고 옷이 젖는다.’로 번역이 된다. 문맥상으로 보아 계미중춘판의 ‘草長衣添’이 타당하다. 또한 계미중하판이나 무자계춘판에도 역시 ‘草長衣添’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렇듯 여러 판본을 비교해 볼 때에 ‘새로 발견된 목판본’에 비하여 계미중춘판은 새롭게 교열된 모습이 완연하다. 잘못된 표기를 고쳤다거나, 고자로 표기한 것은 당시 통용되는 글자로 바꿔 표기를 하는 등, 계미중춘판에서는 표기의 면에서 보다 한 걸음 더 발전한 모습이 확인된다. 이로 보아 계미중춘판보다 ‘새로 발견된 목판본’이 먼저 간행된 판본임을 알 수가 있다.
4.
또한 표기의 방법, 예를 들어 한울님을 의미하는 ‘천주’나 ‘상제’, 수운 선생을 뜻하는 ‘선생’의 앞은 한 자씩 띄어 쓰므로 존경을 나타내는 문제에 있어서도, ‘새로 발견된 목판본’은 ‘영(靈)’, ‘교(敎)’, ‘천령(天靈)’, ‘천도(天道)’, ‘강령(降靈)’, ‘왕(王)’, ‘선고(先考)’, ‘시(侍)’ 등의 앞에서도 띄어쓰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계미중춘판 이후의 판본들에서는 한울님을 의미하는 ‘천주’나 ‘상제’, 수운 선생을 뜻하는 ‘선생’의 앞 이외에서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동학이 한 종교의 가르침으로서 신봉하고 또 존중해야 할 대상에 대한 신념을 확고하게 확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새로 발견된 목판본’을 발간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계미중춘판 이후의 판본에서는 신봉하고 존중해야 할 대상을 분명하게 한계를 지어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이 바로 ‘새로 발견된 목판본’이 계미중춘판에 앞선 판본임을 말해 주는 근거이다. 이 판본이 계미중춘판보다 3년 일찍 간행된 ‘경진판’임이 분명하다.
‘새로 발견된 목판본’에 발문이나 발간 연대, 나아가 발간 당시의 상황이 명기되지 않은 것은 어떤 연유일까. 이에 대한 의문이 없을 수 없다. 경진판의 발문을 경진판 판각 당시 같이 기획된 도원기서의 내용 중에 기재된 별공록으로 대신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별공록에는 경진판의 기획 및 간행 과정이 담겨져 있을뿐더러, 경진판 판각 당시 성금을 낸 명단, 유사(有司)의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즉 같이 기획 간행된 도원기서에 경진판 간행 당시의 자세한 상황이 별공록에 명기되어 있으므로 본 책에는 생략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5.
‘새로 발견된 목판본’이 처음 발간된 경진판이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다시 추론해 낼 수가 있다.
첫째 지금까지 학계나 동학교단에서 논의해온 구송설(口誦說)과 원본설(原本說)에 대한 보다 분명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동학교단 측의 기록과 같이 해월이 구송을 통해 스승인 수운 선생 가르침의 글을 복원하였다고 해도, 해월이 모든 글을 구송하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해월이 경진판을 판각할 당시 모든 원본을 지니고 있지 못했음을 알수가 있다. 즉 이와 같은 사실은 해월이 구송했던 글들과 수합할 수 있는 원본들을 종합하여 경진판을 간행한 것임을 말해준다. 따라서 필자가 오래 전에 제기한 ‘구송과 원본이 모두 활용된 절충설(折衷說)’***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이때의 ‘절충설’이란 구송을 통한 경전 간행과 원본을 바탕으로 한 경전 발간 모두를 포함한다. 즉 구송설과 원본설 모두를 받아들인다는 입장을 뜻한다.
***졸고, 용담유사 연구, (한양대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86.12)
둘째 동경대전이 한 권의 동학의 경전으로 정착하는 과정에 있어 해월이 매우 폭 넓게 자료를 수합하고, 또 새로운 자료가 나오면 새로 보완을 하여 거듭 간행을 했음을 알 수가 있다.
즉 1880년에서 1888년까지 간행된 동경대전은 수운 선생의 다양한 여러 제자들이 지니고 있던 자료들과 해월을 필두로 한 동학의 다양한 인사들의 논의를 거쳐 판각된 경전임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해월이 주관하여 1880년에서 1888년 사이에 간행한 동경대전이 동학의 가장 확실한 정본으로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이요, 동학 제 종파의 가장 중요한 저본으로 자리할 수 있었던 그 근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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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
<신인간>은 천도교의 기관지. 1926년 4월 창간된 월간잡지로 천도교의 교리와 역사 뿐만 아니라 당대의 사회적 담론들이 수록됨. 최신호부터 창간호까지 차근차근 소개하여, 동학과 천도교 공부에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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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5] 《동경대전1·2》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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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대전1·2》 출간
- 1권: ‘나는 코리안이다’, 2권: ‘우리가 하느님이다’
편집실
도올 김용옥은 4월 8일, 그의 신간 《동경대전1·2》를 전달하기 위해 교령사를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도올은 자신이 싸인 한 저서를 송범두 교령에게 전달하며, 책이 출간되기까지 많은 도움을 준 송범두 교령과 천도교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도올은 4월 11일 대신사와 신사 그리고 삼암 표영삼 종법사에게 출간을 고하는 축문을 낭독했다.
“바로 102년 전 오늘 4월11일,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이 공포되었습니다. 제1조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요, 제3조가 ‘대한민국 인민은 남녀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무(無)하고 일체 평등’이었습니다. 우리의 헌법에 담겨져 있는 모든 추상적, 보편적 정신은 외래문명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그 모두가 동학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21세기는 동학의 시대입니다.…수운 큰 선생님이시여!…이 경전의 출간으로 인하여 부질없는 대립이 사라지고 화해와 용서와 유무상자(有無相資)의 포용이 이 사회의 새로운 덕목이 되게 하소서. 동학의 정신에 따라 이 조선 땅의 정수인 청수(淸水) 한 그릇과 향기 드높은 향불을 피워 공신존원(恭愼尊願)하오니 상향(尙饗)하시옵소서.”
《동경대전1·2》는 ‘대선생주문집’과 동경대전 ‘경진판’에 대한 해설이다.
“수운의 ‘동경대전’은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와는 차원이 다르다. 수운의 원고 1장이 다산 정약용의 원고 1만 장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도올은 동경대전을 극찬하지만, 기본적으로 《동경대전1·2》는 ‘대선생주문집’과 동경대전 ‘경진초판본’에 대한 해설이며, 도올이 삼암장 표영삼 ‘선생님’께 올리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도올은 ‘대선생주문집’을 펴낸 동학초기 접주 박하선(?-1869)의 존재를 새롭게 부각시키고, 이필제(1825-1871)가 문장군(蚊將軍, 모기)이 아니라 ‘최초의 동학혁명’의 리더라는 사실도 밝히고 있다. 올해가 때마침 영해동학혁명 내지 영해교조신원운동 150주년 되는 해다. 영해지역의 구향(舊鄕)에 대항하여 새롭게 성장하던 신향(新鄕) 세력이 왜 동학을 받아들였는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박하선은 영해 신향 세력의 리더였다.
해월신사는 대신사의 상(喪)을 보지 못하고 떠나면서 당시 가장 믿을 만한 친구였던 박하선에게 뒤처리를 부탁하면서 대신사의 행장 집필을 맡겼다고 도올은 추론한다. 이미 박하선에게는 동경대전 사본이 전달되었고, 그는 최세조(1827-1882, 대신사보다 3살 어린조카이며 근암공이 들인 양자)를 찾아 수운의 일대기를 구성한다. 동경대전 사본이 전달되었다는 것은, 곧 해월신사가 동경대전을 암송했다는 즉 구송설이 잘못된 것이며, 해월신사는 대신사의 수고(手稿)를 정확히 보존했다고 도올은 단정한다.
박하선이 펴낸 대신사의 일대기가 ‘대선생주문집’으로 이것이 ‘최선생문집도원기서’(‘도원기서’)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밝히고, 도올은 《동경대전1》에서는 ‘대선생주문집’을 풀이한다. 이 풀이를 통해 도올은 ‘수운행록’은 ‘대선생주문집’의 왜곡된 판본이며, 강수(?~1894. 강시원, 영덕출신)는 ‘수운행록’이 아닌 ‘대선생주문집’을 계승하여 ‘도원기서’를 완성했음도 밝힌다.
‘대선생주문집’ 편찬과정은 추론이지만, 표영삼 ‘선생님’이 “이미 말씀하신 것을 뒤늦게 알고 놀랐다.”며, 도올은 “표영삼 선생의 설은 함부로 나온 추론일 수 없으며, 그에게는 우리가 모르는 구전의 사실도 전승되어 있으므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히고 있다.
삼암장이 역사의 현장에서, 또 역사기록을 통해 동학공부를 세밀히 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지켜보았다. 삼암장은 13년 전(2008년) 환원하셨지만 도올은 삼암장을 통해 동학 공부를 했음을 《동경대전1,2》에서 수차례 밝히고 있다. 도올은 표영삼 뒤에는 ‘선생님’, ‘선생’을 빠뜨리지 않고 있다.
“동경대전 경진초판은 국보의 가치가 있다.”
《동경대전1》에서 주목할 것은 ‘동경대전’ 판본 가운데 가장 먼저 간행된 ‘경진판’에 대해 도올은 “경진초판은 수운의 숨결이 담겨진 가장 아름다운 선본(善本)이며, 국보의 가치가 있다.”고 밝힌 것이다. 도올은 전하는 경진초판 확인과정은 다음과 같다.
“1880년 강원도 인제에서 펴낸 경진판은 2009~2010년에 확인되었다. 2009년 충남 서산 음암면 신장1리 179번지 이상훈, 동경대전 한 부를 독립기념관에 기증한다. 백부 이철용의 유품이다. 이철용은 대대로 영월에 살았고 동생인 이상훈의 부친 집에 남겨놓은 짐 속에 있던 것이었다. 독립기념관의 성주현은 복사본을 윤석산, 박맹수에 전달한다. 윤석산 교수는 새로 발견된 동경대전이 경진년 초판본임 확신하고 ‘동학학보(제20호,2010.12)’에 ‘새로 발견된 목판본 동경대전 에 관하여’를 작성했다.”
이어 도올은 “천안독립기념관에 기증된 목활자판이 최초의 경진판 간행물이라는 것을 밝힌 공로는 윤석산 교수에 있음을 밝혀둔다. 윤 교수는 동학연구의 여러 분야를 개척한 석학이다. 나는 그에게 많은 배움을 얻었다.”고 밝히고 있다.
도올은 천도교인들에 감사를 표하고 있다.
《동경대전1·2》에는 임운길·이창번·윤석산·김경규·성주현·강선녀·박노진·김영진 등 많은 천도교인이 등장하며 도올은 이분들에게 받은 고마움을 나타내고, 송범두 교령이 보여준 편의에도 감사를 표하고 있다.
“현금의 천도교리더 송범두 교령도 견식이 넓고 뜻이 깊은 지사이다. 연초에 나에게 메시지르 보내왔는데 “해현경장解絃更張”이라는 매우 잘 쓴 본인의 서도 글씨가 들어 있었다. 풀어진 천도교를 다시 조여야겠다는 개혁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금위교령今爲敎領, 간기성공懇祈成功”이라고 써서 보냈다. ‘요즘 종교의 리더로부터는 듣기 어려운 말씀이외다. 간절히 비옵건대 반드시 공을 이루소서’라는 뜻이다.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송 교령님은 나에게 많은 편의를 돌보아 주셨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뜻을 전한다.”
천도교에 대한 아래의 언급도 새겨둘 만하다.
“천도교는 동학의 정맥을 이은 중요한 조직이다. 의암 손병희의 결단에 의하여 수운.해월의 적통을 지킨 중요한 조직이며, 우리나라 20세기 역사에서 천도교만큼우리 민족의 본질적 각성을 위해 헌신한 종교운동도 찾아보기 힘들다. 3.1독립만세운동은 천도교가 주축이 되어 일으킨 혁명이다.
우리 민족은 어느 누구도 천도교에 적대적 감정을 지니고 있질 않다. 천도교가 변화의 동력을 어디선가 얻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천도교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고상한 품위가 있다. 그리고 배타적이질 않다. 나는 아직도 천도교가 매우 훌륭한 동학운동공동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독자들의 긍정적인 시선과 지원을 요청한다. 나의 비판은 학구적인 문제에 한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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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5] 도올 김용옥의 《동경대전1·2》를 읽고
신인간
6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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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의 《동경대전1·2》를 읽고
중암 라명재_송탄교구장
천도교경전은 동학창도 후 대신사께서 직접 저술하신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신사께서 수차례 목활자본(목판본과 목활자본의 차이 또한 이번 도올의 연구로 밝혀진 성과다)으로 간행한 것에서 시작된다. 포덕21년(1880,경진) 5월 인제에서 동경대전을 간행하였는데 최근 발견되어 연구되었다(윤석산, ‘새로 발견된 목판본 동경대전에 관하여’,동학학보20호,2010.12/김용옥, 동경대전1·2, 통나무, 2021). 포덕22년(1881,신사) 6월에 단양에서 용담유사를, 포덕 24년(1883,계미) 2월에 목천에서 동경대전을 간행하였다. 포덕24년(1883,계미) 여름에 다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경주판을 간행하였다. 포덕29년(1888년,무자) 3월에 인제 접에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중간하였다. 포덕31년(1890,경인)에 동경대전을, 포덕34년(1893,계사)에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간행하였다.
현행 천도교경전은 무자판을 기준으로 편성되어 있다. 경진초판본이 발견되어 이를 주석한 김용옥 교수의 동경대전1·2 권은 동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반갑고 뜻깊은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그동안 사용해 오던 현 경전과 글자 뿐 아니라 의미도 달라지는 부분이 있어서 몇군데 비교해서 논해보았다. 초판본의 오리지날리티를 주장하는 의견(김용옥 교수)도 있고, 목천판의 해월신사 발문에 “선생께서 포덕하실 당시부터, 그 성덕이 잘못 전해짐을 두려워하여 계해년에 친히 시형에게 주시었다.…그러나 경진판의 문장에는 덜 싣거나 빠진 곳이 있어 안타까웠다. 그러한 문제를 보완하고자 목천에서 찬연히 복간해내니…”를 들어 초판본에서의 누락이나 잘못된 글자를 뒷 출판에서 보완한 것으로 보는 의견(윤석산 교수)도 있다. 구절에 따라 초판본이, 어떤 곳에선 후대의 판본이 의미가 맞는 것으로 보여 보다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 같다.
포덕문
■愚夫愚民 未知雨露之澤 知其無爲而化矣
어리석은 사람들은 비와 이슬의 혜택을 알지 못하고 무위이화로 알더니.
‘무위이화’는 글자 그대로 사람들의 노력 없이 저절로 된다는 뜻으로 번역되어 왔다.
그러나 실제로 논학문 9절의 ‘무위이화’와는 다른 용례로 사용된 것일까?
또한 무위이화는 동학의 핵심 요의 중 하나인데 경전에서 각기 다른 뜻으로 쓰였을까?
무위이화에 대한 바른 이해는 천도교 공부의 핵심 과제 중 하나다.
논학문에서 수운 선생이 정의한 무위이화는 ‘인위가 아닌 자연스러운, 순리대로’의 의미이다.(논학문 9절) 이러한 뜻으로 쓰였다면 포덕문에서 ‘무위이화’의 뜻은 “사람들이 비와 이슬이 한울님의 은혜인 것은 몰랐어도 무위이화는 알고 있었다”, 즉 순리대로 살고 자연을 거스르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 경우 ‘우부우민은 미지우로지택이나 지기무위이화이러니’로 읽어야 한다[라명재, 천도교경전공부하기, 모시는사람들, 2010].
백세명 선생도 ‘비와 이슬의 혜택은 알지 못하되, 함이 없이 되는 이치를 알았더라.’라고 해석하였다[백세명, 천도교경전해의, 포덕104년(1963)].
김용옥 교수도 “단지 그러한 것이 저절로 그렇게 되어가는 것이라고만 생각하였던 것이다”로 번역하고, 오제 이전 선사시대의 인간들이 다 어리석은 것이라고 해석해선 안 된다고 해설하고 있다.
■又此挽近以來 一世之人 各自爲心 不順天理 不顧天命 心常悚然 莫知所向矣
그러나 이 근래에 오면서 온 세상 사람이 자기만 위하느라 천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천명을 돌아보지 아니하므로 마음이 항상 두려워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김용옥 교수는 ‘심상송연’과 ‘막지소향’의 대상이 방향을 상실한 민중으로 해석하여 “천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하늘의 명령은 내팽겨쳐 버리니, 그들의 마음은 항상 무언가에 캥겨 두려움으로 가득할 뿐이로다. 그들은 어디로 향해야 할지 그 삶의 방향감각을 잃고 만 것이다”고 풀이하였다.
그러나 불순천리하고 불고천명하는 사람들이 두려워했을까? 두려움은 잘못을 아는 깨인 사람들의 몫이다. 그러므로 이 두려움은 수운선생의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봐야 한다. 또한 수운선생은 자신의 마음은 솔직히 표현했지만, 남의 마음을 쉽게 판단하진 않았다.
논학문
김 교수는 저술당시 동학론으로 제한 것이 왜 논학문 바뀌었는지 설득력 있는 가설을 제시하였다. 즉 포덕21년(1880) 경진판과 도원기서 등에는 동학론으로, 포덕24년 계미판 이후 논학문으로 제목이 변경되었다. 아마도 동학이 탄압받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동학을 논한 글’의 줄임말로 논학문이 된 듯하다.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시」라는 것은 안에 신령이 있고 밖에 기화가 있어 온 세상 사람이 각각 알아서 옮기지 않는 것이요,
김용옥 교수는 각지불이를 내유신령과 외유기화로 연결되어 있는 생명의 그물망에서 ‘소외되어 있지 않음을 각자 깨닫는다’고 해석. 그러나 한울과 연결되어 있음을 잊고 마음이 각자위심하게 되면(옮기면) 결과적으로 한울과 단절되어 소외되니 의미상으로 통한다.
내유신령은 내 안의 생명, 외유기화는 나와 소통하는 나 밖의 모든 생명 내지는 나를 둘러싼 빈듯하나 가득찬 신령한 영기. 사람은 내 안의 생명이 없어도, 나 밖의 생명(공기, 음식, 물과 동식물, 미생물, 그리고 나와 소통하며 교류하는 생명과의 교감)이 없어도 살 수 없다.
그러므로 내유신령과 외유기화는 서로 떨어지거나 옮길 수 없는 하나의 지기. 이것을 알고 한울생명으로의 삶을 실천하는 것(각지불이)이 모심의 뜻이다. 그로써 모든 생명은 한울로 동귀일체하게 되므로 모심은 각지불이의 실천이 있어야 완성된다. 의암성사는 온전한 생명의 조건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마음(내유신령)과 나를 비롯한 우주를 관통하는 원리(성품, 외유기화) 그리고 그것을 행하는 몸(각지불이)의 세 가지로 설명하였다(성심신삼단) .
왼쪽에서 두번째 줄을 보면, 合其德 正其心. 천도교경전에는 合其德 定其心으로 되어있다.
■定者 合其德定其心也
「정」이라는 것은 한울의 덕에 합하고 한울에 마음을 정한다는 것이요,
경진판에는 定의 풀이가 合其德 正其心 한울의 덕에 합하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한다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其는 한울을 지칭한 것으로 본다면, 한울마음을 바르게 한다기보다 한울마음에 내 마음을 정한다가 의미가 자연스럽다. 정할 定자를 설명한 구절이니 더욱 그렇다.
다음 구절에도 ‘君子의 德은 氣有正而 心有定 故로 與天地合其德’으로 나온다.
그러므로 정할 定으로 보는 게 맞을 듯.(다른 판본은 定) 김용옥 교수의 주장대로 초판본이 정본일 가능성이 크지만, 윤석산 교수의 주장대로 초판의 잘못된 부분과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것이 후속 출판일 경우도 있다. 이 경우 경진판보다 현행 천도교경전 판본이 맞을 듯.
■曰反道而歸者何也 …曰敬而遠之
묻기를 “도를 배반하고 돌아가는 자는 어째서입니까?”
대답하기를 “공경하되 멀리 할 것이니라.”
맨왼쪽. 敬以遠之. 천도교경전은 敬而遠之
경진판은 敬以遠之 공경함으로써 멀리한다.
그러나 공경하고 존중하면 서로 이해하고 친해진다. 멀리하는 방법은 아니다. 그러므로 공경하되 멀리한다가 자연스럽다.
서경 太甲 下편.‘唯天無親 克敬唯親’ 이윤이 왕에게 ‘하늘은 특정한 사람을 친하시지 않고 경건한 사람을 친하시며’ 하였다. 원래 경이원지는 논어(6:22)에 나오는 구절로 “敬鬼神而遠之”, 즉 귀신은 공경하되 멀리 하라는 말. 사람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거늘 어떻게 귀신을 돌볼 수 있겠느냐는 공자의 태도를 잘 나타낸 글이다.
수덕문
■淺見薄識 皆由於吾師之盛德
얕은 견문, 적은 지식이라도 다 우리 스승님들의 성덕으로 된 것이요
경진판에는 오사지성덕 吾師之聖德. 우리 스승의 성스러운 덕, 현 경전의 盛德은 크고 훌륭한 덕. 스승의 덕을 찬양하는 의미는 마찬가지. 환서지일 還捿之日 집으로 돌아온 날. 경진판에는 환栖지일, 깃들일 서. 捿와 같은 자. 이렇게 의미가 같은 속자를 사용한 것은 판본 제작 당시의 사정이 아닐까?
■修心正氣 惟我之更定
수심정기는 내가 다시 정한 것이니라.
도올은 修心을 한울님 자체가 노이무공하는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인간과 더불어 완전하게 되어가는 생성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한울님 마음을 지닌 사람은 끊임없이 마음을 닦아야 하는 운명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노이무공은 한울님 성품과 기운은 허령이므로 물건에 자취를 남길 수 없는 존재(탄도유심급)이기 때문에 몸을 가진 사람에 의해 그 실현을 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의미지, 한울님 성령 자체가 불완전한 존재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할 뿐이지만, 사람의 몸과 마음에 와서 선악이 분별되고 말썽이 생긴다. 그러므로 불완전한 사람의 마음을 한울 마음과 하나 되도록 닦아 몸으로 그 진리를 실천하는 게 도학의 목적이 된다.
즉 한울님이 노이무공하신 것은 형상이 없는 성령이므로 그 이치를 실천할 사람들의 지각이 깨어질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고, 그 깨우침이 대신사에 와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성심신 삼단의 이치를 분별하면 이런 오해는 불식될 수 있으리라 본다.
“한울은 사람에 의지하고 사람은 먹는데 의지하나니...사람은 밥에 의지하여 그 생성을 돕고 한울은 사람에 의지하여 그 조화를 나타내는 것이니라”/해월신사법설 천지부모
한울님을 비유로서 표현한 삼성과의 말씀을 보자.
“나에게 한 물건이 있으니 이 물건이 나의 본래 나니라. 이 물건은 보려 해도 볼 수 없고,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고, 물으려 해도 물을 곳이 없고, 잡으려 해도 잡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항상 머무는 곳이 없어, 능히 움직이거나 고요함을 볼 수 없으며, 법으로써 능히 법하지 아니하나 만법이 스스로 몸에 갖추어지며, 정으로써 능히 기르지 아니하나 만물이 자연히 나는 것이니라. 변함이 없으나 스스로 화해 나며, 움직임이 없으나 스스로 나타나서 천지를 이루어내고 도로 천지의 본체에서 살며, 만물을 생성하고 편안히 만물 자체에서 사니, 다만 천체를 인과로 하여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나니 이것이 이른바 본래의 나니라.”/의암성사법설 삼성과
상무주처하니 어느 곳에나 계시고, 만법(모든 이치)이 갖추어 있고, 천지를 이루고, 만물을 생성하고, 불생불멸하는 우주의 본체가 한울님이다. 그러므로 내게 본래 모셔졌으나 오관의 감각으로 형성된 자의식(제이천심)으로 잊혀진 한울마음을 되찾기 위해 修心 할 순 있어도 한울 마음을 찾은 뒤에는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한 守心으로 넘어가야지, 한울님 마음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끝없이 修心해야 한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다. 한울님 마음이 불완전하다면 사람이 그 마음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할 이유가 무엇인가? 어차피 같은 불완전한 마음이라면. 신사님도 사람 마음이 불완전하므로 육관으로 생각하면 잘못이 많고, 한울 성령으로 생각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다.
“(이치를)생각해야 한울 이치를 얻을 것이요 생각하지 않으면 많은 이치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심령으로 생각할 것이요, 몸의 감각과 자의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모신)심령으로 한울 심령을 밝히면 현묘한 이치와 무궁한 조화를 가히 얻어 쓸 수 있으니, 쓰면 우주 사이에 차고 폐하면 한 쌀알 가운데도 감추어질 정도로 자유자재합니다.”/해월신사법설 守心正氣
포덕77년(1936) 판 이후 천도교경전은 수덕문의 이 구절도 守로 되어 있다. 경진판, 계미중하판, 무자판에는 修로 표기되어 있어 이후 수정되었다. 인의예지 같은 좋은 가르침도, 잊지 않고 지키며 삶 속에 실천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래서 수심정기가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세상이 가르침이 부족해서 어지러운가? 성인이 없어서 혼란스러운가? 문제는 실천해서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내는가 이다.
다만 신사는 이 구절을 인용하시며 守로 표기하셨다(해월신사법설, 수심정기). 해월신사 이후 교리가 정립이 되며 자연스럽게 守로 정리가 된 듯하다. 마치 최근에 초학주문이 거의 사용되지 않는 것처럼, 수행의 단계에서 입문과 시천주의 단계에서는 修를, 한울님 모심을 깨닫고 체험했으면 이후에는 그를 잊지 않고 실천해나가는 守가 사용된 듯하다.
동경대전에 사용된 수심정기는 두 가지다.
하나는 수심정기守心正氣요 하나는 수심정기修心正氣다.
공부의 단계로 修와 守를 구분해서 사용한 예가 무체법경 삼성과5절에 나온다. 즉 비각성의 인과를 공부하는 단계에선 선악의 분별이 있는 단계로 修心을 사용하고 있고, 그런 모든 분별을 뛰어넘은 원각성의 단계에선 守心을 사용하고 있다.
圓覺性以爲萬法因果無爲而爲故
守心煉性者不得法體因果難得善果
比覺性以爲萬相因果有現無量
修心見性者若非正觀思量不得眞境
/의암성사법설 삼성과
즉 논학문5절에선 한울님과 처음 접하는 강령의 단계이므로 修心을 쓰고, 9절에선 도를 완전히 깨달으신 뒤 한울님 성심(性心)과 하나가 된 단계이므로 守心을 쓴 것이다.
“이렇듯 어긋나는 말을 일일이 다 말할 수 없으므로 내 또한 두렵게 여겨 다만 늦게 태어난 것을 한탄할 즈음에, 몸이 몹시 떨리면서 밖으로 영이 접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 말씀이 내려 가르치되, 보였는데 보이지 아니하고 들렸는데 들리지 아니하므로 마음이 오히려 이상해져서 修心正氣하며 묻기를 “어찌하여 이렇습니까?””(논학문5절)
“대답하기를 “우리 도는 함이 없이 되는 것이라. 守其心正其氣 그 마음을 지키고 그 기운을 바르게 하고 한울님 성품을 거느리고 한울님의 가르침을 받으면, 자연한 가운데 화해나는 것이니라.”(논학문9절)
의암성사는 무체법경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다.
“성품을 보고 마음을 깨달으면 내 마음이 극락이요, 내 마음이 천지요, 내 마음이 바람과 구름의 조화와 하나이니라.”/무체법경 신통고
한울님이 불완전한 존재라면 극락이, 조화가 되겠는가? 허령창창하여 무사불섭 무사불명하시는(논학문 氣자 풀이) 한울님 , 무위이화하시는 한울님이 불완전한 존재라면 누가 신앙을 할 수 있겠는가.
수심정기는 ‘인의예지는 선성이 정한 바요, 수심정기는 내가 다시 정한 것이다.’고 하실 만큼 중요한 교의이다.
다만 닦을 수와 지킬 수가 함께 사용되었고, 그 의미상 미묘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닦을 수는 아직 나의 개체의식, 습관심이 남아 있는 단계로 꾸준히 수행하며 육관을 비우는 단계다.(해월신사법설, 허와실, 수심정기 참조)
지킬 수는 한울님 모심을 깨닫고 강령을 체험하여 확인한 뒤에는 그 천심을 잊지 않고 지키는 공부가 된다. 그 구체적 방법은 매사에 혈맥정신을 떠나지 않는 것으로 의암성사가 설명해 주셨다(위생보호장) .
수심정기가 정확하게 표현된 곳은 논학문9절이다.
즉 ‘오도무위이화의吾道無爲而化矣 수기심정기기守其心正其氣 솔기성수기교率其性受其敎 화출어자연지중야化出於自然之中也.’
대신사 자신의 도를 정의한 구절로 ‘우리 도는 무위이화이니 그(한울) 마음을 지키고 그(한울) 기운을 바르게 하여 그(한울) 성품을 거느리고 그(한울) 가르침을 받으면 자연한 가운데 화해 나는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반복되는 그(其)는 무엇인가?
무엇을 지키는가? 바로 각자 생명에 모시고 있는 한울님, 본래 마음, 본래 성품인 것이다.
다른 종교에서 마음을 닦는 것은 수없이 가르쳐 왔다.
그러나 이미 내 몸 안에 본래 한울님 마음이 있으므로 그것을 깨달아 잊지 않고 지키면 된다는 것이 대신사가 깨달은 무극대도인 것이다. 다만, 아직 마음이 육신의 감각에 의해 형성된 습관된 마음(육관; 수심정기 장 참조, 제이 천심; 진심불염 장 참조)이 남아 있으면 修心이 맞을 것이고, 강령을 모시고 시천주를 증험 했으면 그 진리를 잊지 않는 守心이 맞을 것이다.
■人亦疑王羲之迹
사람들이 왕희지의 필적인가 의심하고,
경진판에는 ‘王羲之之迹’, 이후 판본에는 이름 마지막 之가 누락. 이 부분은 현 경전에서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再思心定 定之後言 不信曰信
거듭 생각하여 마음을 정하라. 한번 작정한 뒤에는 다른 말을 믿지 않는 것이 믿음이니
再思心定 定之後言 不信曰信을
‘거듭 생각하여 정한 뒤 다른 말을 믿지 않는 것이 믿음이다’고 번역하면 물론 이해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것을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내 말만 믿으라는 독단처럼 해석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재사심정의 과정을 받아들이면 이후 모든 말은 함부로 믿지 않고 재사심정해야 바른 믿음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해석하는 김용옥 교수의 번역이 옳을 듯.
“무릇 때와 일에 임하여 우묵눌 세자를 용으로 삼으라. 만약 경솔하게 남의 말을 듣고 말하면 반드시 나쁜 사람의 속임에 빠지느니라”/해월신사법설 대인접물
천황씨
우음 마지막 시문(‘吾心極思杳然間 疑隨太陽流照影’)은 대신사 생신 전날(1863.10.27.) 지으신 것으로 전한다.
이때 상황이 ‘대선생주문집’에 기록되어 있다.
冬十月二十八日 卽先生之誕日 若爲通文 則四方從者 數其夥多 故 先生本意 設宴之事 先有未安之動靜 主人密寄盈德各備禮 設爲大宴 其數其如 不可勝 先生方爲下箸時 顧謂左右曰 “世上謂我 天皇氏云云” 前日作一句詩 ‘吾心極思杳然間 疑隨太陽流照影’
계해년 겨울 10월28일은 즉 선생의 탄신일이다. 만약 통문을 돌리면 사방에서 오는 사람이 너무 많을 듯하여, 선생의 본의는 잔치를 하면 먼저 불안한 기미가 있는지 살펴야 하니 조촐히 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주인(해월선생)은 비밀리 영덕 사람들에게 예를 준비하게 하였다. 차려보니 큰 잔치가 되어 수가 그럴듯하여 헤아릴 수 없었다. 선생이 음식에 젓가락을 대려할 때 좌우를 둘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세상사람들이 나를 천황씨라 부를 것이다.” 그 전날 선생께서는 시 한구를 지으셨다. ‘내 마음 지극히 묘연한 사이를 생각하니, 의심컨대 태양이 그림자를 비추며 따르는 것인가.’
김용옥 교수는 ‘천황씨天皇氏’ 호칭은 대신사가 과한 생일 잔치상을 받고 ‘세상 사람들이 천황씨 밥상을 받았다고 놀려 대겠네’ 하는 유머로 해석한다. 아마도 이 해석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수운선생의 이 언사에는 중의적 함의가 담겨 있을 수 있다.
또한 다시개벽을 말씀하신 대신사의 제자들은 이 말씀을 새로운 세상을 여는 의미로 받아들였고, 이후 대신사는 다시 개벽을 여신 후천 천황씨로 여겨지게 되었다.
“천황씨는 원래 한울과 사람이 합일한 명사라,…오늘 대신사께서 천황씨로서 자처하심은 대신사 역시 신이신 사람이시니 후천 오만 년에 이 이치를 전케 함이라.”/해월신사법설, 기타
“대신사께서 자신을 천황씨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한울 위에 계시다는 것이 아니요, 다만 성품을 보고 마음을 깨달아 삼계천의 맨 윗 한울에 계시다는 것이 명백하니라.…그러므로 성품 깨달은 사람을 천황씨라 이르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범인이라 이르느니라.”/의암성사법설, 신통고
“그러므로 (우리 도는)운인즉 천황씨가 새로 (문명을)시작하는 운이요, 도인즉 천지가 개벽하여 해와 달이 처음으로 밝는 (모든 이치를 밝히는)도요, 일인즉 지금 들어보지 못하고 옛적에도 들어보지 못한 (한울과 사람이 하나되는)일이요, 법인즉 지금 비교할 수 없고 옛적에도 비교할 수 없는 (수행)법입니다.”/해월신사법설, 개벽운수
필법
■象吾國之木局 數不失於三絶
우리나라는 나무의 판국을 상징하니 삼절의 수를 잃지 말아라.
김용옥 교수는 삼절三絶을 왕희지 서법의 뿌리가 되는 ‘종요의 삼절비’의 필법에서 벗어나지 않음이라 해석하고 있다.
“그 품격의 수數가 수선삼절受禪三絶 비문의 원초적이고도 엄정한 해서楷書 풍도에서 벗어남이 없다.”고 해석하며, “삼절이란 바로 ‘수선삼절’의 줄임말로 쓰인다. ‘수선受禪’이란 조조의 아들 조비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는 것을 기록한 역사적 비다. ‘수선삼절비’는 지금도 중국 하남성에 있고, 왕희지(303-361) 서법의 뿌리를 이루는 종요(151-230)의 작품이다. 삼절三絶이란, 세 번의 끊어짐이 아니라, ‘송도삼절松都三絶’(박연폭포는 사람은 아니지만)과도 같이 ‘탁월한 세 사람’ 혹은 세 사람이 모여 만든 작품을 의미한다. 수운이 ‘수불실어삼절’이라고 말한 것은 자신과 조선의 서법이 결코 삼절비의 오리지날리티에서 어긋남이 없다는 것을 천명하는 호쾌한 발언이다. 수운의 전문적인 서예사의 감각을 파악하지 못한 채 ‘국운이 세 번 끊겨도…’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상한 말이다.”/김용옥, 동경대전2, 310-314쪽.
그러나 필법에서 앞 구절은 우리나라의 국면을 이야기하고,
다음 구절 동방부터 먼저 한다는 구절 (生於斯得於斯故 以爲先東方)등을 보면
필법을 비유해 마음공부와 도의 운수 등을 중의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봐야할 듯하다.
단순히 글씨 쓰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나라의 운수를 얘기할 것 까진 없을 것이다.
해월신사도 개벽운수에서 삼절을 단순히 글씨 쓰는 법으로만 해석하지 않고 나라와 백성이 겪어야 할 ‘삼절운’으로 보고 있다.
吾道創立於三絶之運故 國與民 皆未免此三絶之運也 吾道生於吾國而 將吾國之運善矣乎
“우리 도는 삼절운에 창립하였으므로 나라와 백성이 다 이 삼절운을 면치 못하리라. 우리 도는 우리 나라에서 나서 장차 우리 나라 운수를 좋게 할 것이라.”/해월신사법설 개벽운수
어쨌든 경진판 이후 판본들이 모두 발견되고 연구되어 보다 대신사의 원뜻에 다가설 수 있다는 점에서 최근의 연구들이 매우 반갑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동경대전1권에서 ‘대선생주문집’ 같은 귀한 자료를 주석해주어 대신사의 인간적 삶에 보다 가까이 접할 수 있게되어 매우 좋았고, 조선사상사대관을 통해 동학이 어느 날 갑자기 연원 없이 등장한 게 아니라 꾸준한 인간의 노력과 한울님의 노이무공 속에서 성숙해온 결과물임을 철학사적으로 정리하여 제시한 것은 도올선생의 공이다. 또한 동경대전의 여러 판본을 비교하고, 목활자본임을 증명한 것 등 이번 발간은 여러모로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도올 선생이 주장한 을묘천서의 ‘천주실의’설, 한울님과 ‘하느님’의 명칭 문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한 듯하여(이미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다시금 정리 해 볼 필요가 있을 듯) 우선 현행 경전과 상이한 점 위주로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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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한울님이 노이무공하신 것은 형상이 없는 성령이므로 그 이치를 실천할 사람들의 지각이 깨어질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고, 그 깨우침이 대신사에 와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성심신 삼단의 이치를 분별하면 이런 오해는 불식될 수 있으리라 본다.
“한울은 사람에 의지하고 사람은 먹는데 의지하나니...사람은 밥에 의지하여 그 생성을 돕고 한울은 사람에 의지하여 그 조화를 나타내는 것이니라”/해월신사법설 천지부모
한울님을 비유로서 표현한 삼성과의 말씀을 보자.
“나에게 한 물건이 있으니 이 물건이 나의 본래 나니라. 이 물건은 보려 해도 볼 수 없고,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고, 물으려 해도 물을 곳이 없고, 잡으려 해도 잡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항상 머무는 곳이 없어, 능히 움직이거나 고요함을 볼 수 없으며, 법으로써 능히 법하지 아니하나 만법이 스스로 몸에 갖추어지며, 정으로써 능히 기르지 아니하나 만물이 자연히 나는 것이니라. 변함이 없으나 스스로 화해 나며, 움직임이 없으나 스스로 나타나서 천지를 이루어내고 도로 천지의 본체에서 살며, 만물을 생성하고 편안히 만물 자체에서 사니, 다만 천체를 인과로 하여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나니 이것이 이른바 본래의 나니라.”/의암성사법설 삼성과
상무주처하니 어느 곳에나 계시고, 만법(모든 이치)이 갖추어 있고, 천지를 이루고, 만물을 생성하고, 불생불멸하는 우주의 본체가 한울님이다. 그러므로 내게 본래 모셔졌으나 오관의 감각으로 형성된 자의식(제이천심)으로 잊혀진 한울마음을 되찾기 위해 修心 할 순 있어도 한울 마음을 찾은 뒤에는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한 守心으로 넘어가야지, 한울님 마음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끝없이 修心해야 한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다. 한울님 마음이 불완전하다면 사람이 그 마음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할 이유가 무엇인가? 어차피 같은 불완전한 마음이라면. 신사님도 사람 마음이 불완전하므로 육관으로 생각하면 잘못이 많고, 한울 성령으로 생각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다.
“(이치를)생각해야 한울 이치를 얻을 것이요 생각하지 않으면 많은 이치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심령으로 생각할 것이요, 몸의 감각과 자의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모신)심령으로 한울 심령을 밝히면 현묘한 이치와 무궁한 조화를 가히 얻어 쓸 수 있으니, 쓰면 우주 사이에 차고 폐하면 한 쌀알 가운데도 감추어질 정도로 자유자재합니다.”/해월신사법설 守心正氣
포덕77년(1936) 판 이후 천도교경전은 수덕문의 이 구절도 守로 되어 있다. 경진판, 계미중하판, 무자판에는 修로 표기되어 있어 이후 수정되었다. 인의예지 같은 좋은 가르침도, 잊지 않고 지키며 삶 속에 실천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래서 수심정기가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세상이 가르침이 부족해서 어지러운가? 성인이 없어서 혼란스러운가? 문제는 실천해서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내는가 이다.
다만 신사는 이 구절을 인용하시며 守로 표기하셨다(해월신사법설, 수심정기). 해월신사 이후 교리가 정립이 되며 자연스럽게 守로 정리가 된 듯하다. 마치 최근에 초학주문이 거의 사용되지 않는 것처럼, 수행의 단계에서 입문과 시천주의 단계에서는 修를, 한울님 모심을 깨닫고 체험했으면 이후에는 그를 잊지 않고 실천해나가는 守가 사용된 듯하다.
동경대전에 사용된 수심정기는 두 가지다.
하나는 수심정기守心正氣요 하나는 수심정기修心正氣다.
공부의 단계로 修와 守를 구분해서 사용한 예가 무체법경 삼성과5절에 나온다. 즉 비각성의 인과를 공부하는 단계에선 선악의 분별이 있는 단계로 修心을 사용하고 있고, 그런 모든 분별을 뛰어넘은 원각성의 단계에선 守心을 사용하고 있다.
圓覺性以爲萬法因果無爲而爲故
守心煉性者不得法體因果難得善果
比覺性以爲萬相因果有現無量
修心見性者若非正觀思量不得眞境
/의암성사법설 삼성과
즉 논학문5절에선 한울님과 처음 접하는 강령의 단계이므로 修心을 쓰고, 9절에선 도를 완전히 깨달으신 뒤 한울님 성심(性心)과 하나가 된 단계이므로 守心을 쓴 것이다.
“이렇듯 어긋나는 말을 일일이 다 말할 수 없으므로 내 또한 두렵게 여겨 다만 늦게 태어난 것을 한탄할 즈음에, 몸이 몹시 떨리면서 밖으로 영이 접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 말씀이 내려 가르치되, 보였는데 보이지 아니하고 들렸는데 들리지 아니하므로 마음이 오히려 이상해져서 修心正氣하며 묻기를 “어찌하여 이렇습니까?””(논학문5절)
“대답하기를 “우리 도는 함이 없이 되는 것이라. 守其心正其氣 그 마음을 지키고 그 기운을 바르게 하고 한울님 성품을 거느리고 한울님의 가르침을 받으면, 자연한 가운데 화해나는 것이니라.”(논학문9절)
의암성사는 무체법경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다.
“성품을 보고 마음을 깨달으면 내 마음이 극락이요, 내 마음이 천지요, 내 마음이 바람과 구름의 조화와 하나이니라.”/무체법경 신통고
한울님이 불완전한 존재라면 극락이, 조화가 되겠는가? 허령창창하여 무사불섭 무사불명하시는(논학문 氣자 풀이) 한울님 , 무위이화하시는 한울님이 불완전한 존재라면 누가 신앙을 할 수 있겠는가.
수심정기는 ‘인의예지는 선성이 정한 바요, 수심정기는 내가 다시 정한 것이다.’고 하실 만큼 중요한 교의이다.
다만 닦을 수와 지킬 수가 함께 사용되었고, 그 의미상 미묘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닦을 수는 아직 나의 개체의식, 습관심이 남아 있는 단계로 꾸준히 수행하며 육관을 비우는 단계다.(해월신사법설, 허와실, 수심정기 참조)
지킬 수는 한울님 모심을 깨닫고 강령을 체험하여 확인한 뒤에는 그 천심을 잊지 않고 지키는 공부가 된다. 그 구체적 방법은 매사에 혈맥정신을 떠나지 않는 것으로 의암성사가 설명해 주셨다(위생보호장) .
수심정기가 정확하게 표현된 곳은 논학문9절이다.
즉 ‘오도무위이화의吾道無爲而化矣 수기심정기기守其心正其氣 솔기성수기교率其性受其敎 화출어자연지중야化出於自然之中也.’
대신사 자신의 도를 정의한 구절로 ‘우리 도는 무위이화이니 그(한울) 마음을 지키고 그(한울) 기운을 바르게 하여 그(한울) 성품을 거느리고 그(한울) 가르침을 받으면 자연한 가운데 화해 나는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반복되는 그(其)는 무엇인가?
무엇을 지키는가? 바로 각자 생명에 모시고 있는 한울님, 본래 마음, 본래 성품인 것이다.
다른 종교에서 마음을 닦는 것은 수없이 가르쳐 왔다.
그러나 이미 내 몸 안에 본래 한울님 마음이 있으므로 그것을 깨달아 잊지 않고 지키면 된다는 것이 대신사가 깨달은 무극대도인 것이다. 다만, 아직 마음이 육신의 감각에 의해 형성된 습관된 마음(육관; 수심정기 장 참조, 제이 천심; 진심불염 장 참조)이 남아 있으면 修心이 맞을 것이고, 강령을 모시고 시천주를 증험 했으면 그 진리를 잊지 않는 守心이 맞을 것이다.
■人亦疑王羲之迹
사람들이 왕희지의 필적인가 의심하고,
경진판에는 ‘王羲之之迹’, 이후 판본에는 이름 마지막 之가 누락. 이 부분은 현 경전에서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再思心定 定之後言 不信曰信
거듭 생각하여 마음을 정하라. 한번 작정한 뒤에는 다른 말을 믿지 않는 것이 믿음이니
再思心定 定之後言 不信曰信을
‘거듭 생각하여 정한 뒤 다른 말을 믿지 않는 것이 믿음이다’고 번역하면 물론 이해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것을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내 말만 믿으라는 독단처럼 해석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재사심정의 과정을 받아들이면 이후 모든 말은 함부로 믿지 않고 재사심정해야 바른 믿음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해석하는 김용옥 교수의 번역이 옳을 듯.
“무릇 때와 일에 임하여 우묵눌 세자를 용으로 삼으라. 만약 경솔하게 남의 말을 듣고 말하면 반드시 나쁜 사람의 속임에 빠지느니라”/해월신사법설 대인접물
천황씨
우음 마지막 시문(‘吾心極思杳然間 疑隨太陽流照影’)은 대신사 생신 전날(1863.10.27.) 지으신 것으로 전한다.
이때 상황이 ‘대선생주문집’에 기록되어 있다.
冬十月二十八日 卽先生之誕日 若爲通文 則四方從者 數其夥多 故 先生本意 設宴之事 先有未安之動靜 主人密寄盈德各備禮 設爲大宴 其數其如 不可勝 先生方爲下箸時 顧謂左右曰 “世上謂我 天皇氏云云” 前日作一句詩 ‘吾心極思杳然間 疑隨太陽流照影’
계해년 겨울 10월28일은 즉 선생의 탄신일이다. 만약 통문을 돌리면 사방에서 오는 사람이 너무 많을 듯하여, 선생의 본의는 잔치를 하면 먼저 불안한 기미가 있는지 살펴야 하니 조촐히 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주인(해월선생)은 비밀리 영덕 사람들에게 예를 준비하게 하였다. 차려보니 큰 잔치가 되어 수가 그럴듯하여 헤아릴 수 없었다. 선생이 음식에 젓가락을 대려할 때 좌우를 둘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세상사람들이 나를 천황씨라 부를 것이다.” 그 전날 선생께서는 시 한구를 지으셨다. ‘내 마음 지극히 묘연한 사이를 생각하니, 의심컨대 태양이 그림자를 비추며 따르는 것인가.’
김용옥 교수는 ‘천황씨天皇氏’ 호칭은 대신사가 과한 생일 잔치상을 받고 ‘세상 사람들이 천황씨 밥상을 받았다고 놀려 대겠네’ 하는 유머로 해석한다. 아마도 이 해석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수운선생의 이 언사에는 중의적 함의가 담겨 있을 수 있다.
또한 다시개벽을 말씀하신 대신사의 제자들은 이 말씀을 새로운 세상을 여는 의미로 받아들였고, 이후 대신사는 다시 개벽을 여신 후천 천황씨로 여겨지게 되었다.
“천황씨는 원래 한울과 사람이 합일한 명사라,…오늘 대신사께서 천황씨로서 자처하심은 대신사 역시 신이신 사람이시니 후천 오만 년에 이 이치를 전케 함이라.”/해월신사법설, 기타
“대신사께서 자신을 천황씨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한울 위에 계시다는 것이 아니요, 다만 성품을 보고 마음을 깨달아 삼계천의 맨 윗 한울에 계시다는 것이 명백하니라.…그러므로 성품 깨달은 사람을 천황씨라 이르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범인이라 이르느니라.”/의암성사법설, 신통고
“그러므로 (우리 도는)운인즉 천황씨가 새로 (문명을)시작하는 운이요, 도인즉 천지가 개벽하여 해와 달이 처음으로 밝는 (모든 이치를 밝히는)도요, 일인즉 지금 들어보지 못하고 옛적에도 들어보지 못한 (한울과 사람이 하나되는)일이요, 법인즉 지금 비교할 수 없고 옛적에도 비교할 수 없는 (수행)법입니다.”/해월신사법설, 개벽운수
필법
■象吾國之木局 數不失於三絶
우리나라는 나무의 판국을 상징하니 삼절의 수를 잃지 말아라.
김용옥 교수는 삼절三絶을 왕희지 서법의 뿌리가 되는 ‘종요의 삼절비’의 필법에서 벗어나지 않음이라 해석하고 있다.
“그 품격의 수數가 수선삼절受禪三絶 비문의 원초적이고도 엄정한 해서楷書 풍도에서 벗어남이 없다.”고 해석하며, “삼절이란 바로 ‘수선삼절’의 줄임말로 쓰인다. ‘수선受禪’이란 조조의 아들 조비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는 것을 기록한 역사적 비다. ‘수선삼절비’는 지금도 중국 하남성에 있고, 왕희지(303-361) 서법의 뿌리를 이루는 종요(151-230)의 작품이다. 삼절三絶이란, 세 번의 끊어짐이 아니라, ‘송도삼절松都三絶’(박연폭포는 사람은 아니지만)과도 같이 ‘탁월한 세 사람’ 혹은 세 사람이 모여 만든 작품을 의미한다. 수운이 ‘수불실어삼절’이라고 말한 것은 자신과 조선의 서법이 결코 삼절비의 오리지날리티에서 어긋남이 없다는 것을 천명하는 호쾌한 발언이다. 수운의 전문적인 서예사의 감각을 파악하지 못한 채 ‘국운이 세 번 끊겨도…’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상한 말이다.”/김용옥, 동경대전2, 310-314쪽.
그러나 필법에서 앞 구절은 우리나라의 국면을 이야기하고,
다음 구절 동방부터 먼저 한다는 구절 (生於斯得於斯故 以爲先東方)등을 보면
필법을 비유해 마음공부와 도의 운수 등을 중의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봐야할 듯하다.
단순히 글씨 쓰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나라의 운수를 얘기할 것 까진 없을 것이다.
해월신사도 개벽운수에서 삼절을 단순히 글씨 쓰는 법으로만 해석하지 않고 나라와 백성이 겪어야 할 ‘삼절운’으로 보고 있다.
吾道創立於三絶之運故 國與民 皆未免此三絶之運也 吾道生於吾國而 將吾國之運善矣乎
“우리 도는 삼절운에 창립하였으므로 나라와 백성이 다 이 삼절운을 면치 못하리라. 우리 도는 우리 나라에서 나서 장차 우리 나라 운수를 좋게 할 것이라.”/해월신사법설 개벽운수
어쨌든 경진판 이후 판본들이 모두 발견되고 연구되어 보다 대신사의 원뜻에 다가설 수 있다는 점에서 최근의 연구들이 매우 반갑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동경대전1권에서 ‘대선생주문집’ 같은 귀한 자료를 주석해주어 대신사의 인간적 삶에 보다 가까이 접할 수 있게되어 매우 좋았고, 조선사상사대관을 통해 동학이 어느 날 갑자기 연원 없이 등장한 게 아니라 꾸준한 인간의 노력과 한울님의 노이무공 속에서 성숙해온 결과물임을 철학사적으로 정리하여 제시한 것은 도올선생의 공이다. 또한 동경대전의 여러 판본을 비교하고, 목활자본임을 증명한 것 등 이번 발간은 여러모로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도올 선생이 주장한 을묘천서의 ‘천주실의’설, 한울님과 ‘하느님’의 명칭 문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한 듯하여(이미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다시금 정리 해 볼 필요가 있을 듯) 우선 현행 경전과 상이한 점 위주로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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