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e-Kwan Kim
tSpondrsore2hmd ·
[민주와 애국: 전후 일본의 내셔널리즘과 공공성]
인간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존재이며, 사상가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일본 전후 사상가들에게 결정적인 경험은 태평양 전쟁이었으며, 그들의 사상적 궤적은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붕괴, 전사자 (戦死者)에 대한 상흔, 그리고 회한으로부터 멀지 않았다. 마루야마 마사오 (丸山真男)가 전후 일본 지식인들을 ‘회환 공동체’라고 부른 것은 유명하다.
가령 세대적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패전 당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었던 세대의 경우 유년기부터 황국 교육에 길들여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시 동원의 중심적 대상이 되었던 세대이다. 그들은 중고등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언론통제로 인해 자유주의나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접할 기회도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소위 ‘전중 세대’는 황국사상을 상대화할 수 있는 경험이나 지식도 없었고, 그들은 그 어느 세대보다도 황국신민으로 충실하게 태평양전쟁의 화염 속으로 뛰어들었고, 산화했다. 패전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마루야마 마사오같은 이들이 패전을 해방을 받아들인 반면, 그 아래 세대에게 패전은 세계관의 총체적 붕괴 그 자체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시마 유키오 (三島由紀夫)는 이런 맥락에서 “(전후는) 정상이 아닌 듯한 기분을 억누를 수 없다”라며 전쟁과 유리된 전후 삶에 대한 이질감을 토로했고, 에토 준 (江藤淳)은 일본인의 ‘진정한 경험’은 “전사한 300만의 귀곡 (鬼哭)이 마지막”이었다고 단언했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시취 (死臭)를 찾았고, 죽음에 대한 동경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으로 평생 자리잡았다.
오구마 에이지 (小熊英二)는 <민주와 애국: 전후 일본 네셔널리즘과 공공성>에서 전후 ‘민주’와 ‘공공성’의 의미를 일본 지식인들이 어떤 식으로 해체하고 재구성해 갔는지를 관찰하면서, 역사사회학적 관점에서 전후 개별 사상가들 – 특히 세대의 변화에 주목하며 – 의 사상을 그린다. 무려 1,2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임에도 (나는 이 책의 한국 출판사가 ‘돌베게’인 것이 하나의 cosmic coincidence라고 생각한다 – 책이라기보단 ‘돌’베게에 가깝다) 불구하고, 개별 사상가들의 (사상적 토대로서의) 전기와 역사적 배경이 저자의 필력에 버무려져 빠른 속도로 읽히는 책이다.
그렇다면 과연 일본의 사상가들이 전후의 폐허 속에서 ‘민주’와 ‘애국’이라는 단어를 재해석하면서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은 세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개인’과 ‘생활’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을 해본다. 가령 오구마가 ‘전후 1세대’라고 부르는 세대의 대표격인 마루야마 마사오는 징병되기 전 유서처럼 작성한, 그리고 패전 직후 발표된, 유명한 논문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에서 전시총동원체제하의 일본 파시즘에서는 자유로운 주체의식을 지닌 개인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책임을 지지않는 ‘무책임의 체계’가 지배했으며, 그와 동시에 상위자가 가한 억압을 하위자에게 이전되는 ‘억압 이양’의 구조가 발생했다고 지적을 한다. 즉, 마루야마에 따르면 전전 일본 사회에서는 근대적인 ‘私’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公’의 명확한 경계도 없었으며, 일본인들은 개인의 사생활 영역에 끊임없이 공의 이름을 빌린 국가가 침범해오는 것을 허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마루야마는 전후 제일의 과제를 ‘근대적 개인’의 발견에서 찾았다.
이러한 ‘개인’과 ‘생활’의 발견이라는 맥락에서 나는 특히 다케우치 요시미 (竹内好)와 쓰루미 슌스케 (鶴見俊輔)의 지적 여정이 가장 흥미로웠는데, 중국문학가 다케우치의 경우 중국, 특히 루쉰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일본 사회를 비판하며 (다케우치에게 일본사회 비판은 언제나 자기비판과 동일했다), 중국에서는 “전통을 가장 강력히 부정하는 자가 동시에 전통을 가장 충실히 보지하는 자”인 반면, 일본은 자유주의가 길이 막히면 전체주의, 전체주의가 패배하면 민주주의로 향하는 실패의 무한 반복을 거듭하는 등 끊임없이 ‘외부의 권위’에 의존하는 습성이 있다고 지적을 한다. 따라서 다케우치가 “일목일초(一木一草)에 천황제가 있다”고 했을 때 그것은 외부 권위로부터의 자립을 통한 인간 주체성 회복의 또 다른 표현이었으며, 그가 루쉰을 통해 발견한 것은 권위(=내 안의 천황)에 기대는 것은 노예가 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라는 끊임없는 자기부정과 혁신의 철학이었다.
쓰루미 슌스케는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다 귀환선에 탑승한 후 일본에 귀환하여 전쟁에 징병되고, 자바위안소에서 해군군속으로 근무하다 건강이 나빠져 전쟁말기 본국송환이 되면서 전쟁에서 살아남는다. 그는 전후 미국 실용주의 철학에 입각하여 ‘생활 속의 철학’을 강조하고 관념론을 배척하면서, 동시에 지배 권력과 독립된 생활의 근거지를 사상의 준거틀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을 했다. 쓰루미는 생활을 근거지 바깥에 자리한 신념은 ‘린치의 사상’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정치사상사임에도 불구하고 읽는 내내 가슴 한 구석이 아렸다. 파시즘, 총동원 체제, 전쟁, 그리고 가치의 전면적인 붕괴를 짧은 시간 동안 경험한 일본의 젊은 지식인들이 찾아나선 새로운 가치관 구축을 향한 여로에는 전시의 광기, 그리고 전몰자들의 기억이 길목 하나하나 모퉁이 구석구석마다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긴 책을 읽어가는 줄곧 오늘날 한국사회를 상기했다. 친일과 반일이라는 천박한 마니교적 이분법을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부적처럼 사용하고, 코로나를 빌미로 한 시민사회의의 국가에 대한 종속이 가속화되어가고 있으며, 생활과 분리된 선의 망상 (善意妄想) 혹은 ‘린치의 사상’을 가진 자들에 의한 타인에 대한 폭력이 일상화된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야말로 시민들이 앞장서서 ‘생활 속의 철학’과 국가에 저항하는 ‘생활 공간’을 구축하는 것이 더욱더 절박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은 아닐까.
*쓰루미 슌스케는 다케우치가 죽은 후 20년이 지나 다케우치의 전기 (“다케우치 요시미 – 어느 방법의 전기”)를 출간하는데, 다케우치에 대한 쓰루미의 애정과 경외심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다케우치와 쓰루미가 사상적으로 만나는 지점이 동서 후기에 있어서, 여기 옮겨 적자면:
“만년의 평론집에 ‘예견과 착오’라는 제목을 단 것은 자신의 예측이 대동아 전쟁에 대해서도, 중국혁명 이후에 대해서도 불충분했다는 자기 인정을 포함한다. 그러나 빗나가더라도 이제부터 새롭게 예측하여 반대 방향을 향하거나 하지 않는다. 자신의 예측이 얼마나 빗나갔는지를, 매번 현재 위치에서 측정하고 인식하기를 거듭한다. 나아가 착오의 인식을 포함해 자신의 예측 속에서 얼마간의 진실이 함유된 부분을 골라내 그것을 지킨다. 이를 일러 나는 ‘실수의 힘’ 혹은 ‘실패의 힘’이라 부르고자 한다. 그 판단을 떠받치는 냉정과 용기의 조합에 나는 감동한다.”
50崔明淑, 李昇燁 and 48 others
8 comments
Like
Comment
Share
8 comments
Chee-Kwan Kim
번역을 메이지가쿠인 대학의 조성은이란 분께서 해주셨는데, 아주 깔끔하고 정성스러워서 읽기 편했다는 - 도대체 이런 두꺼운 책을 어떻게 (어느 세월에) 번역을 하는지...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