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전후 한국정치와 미국의 개입: 박정희 암살, 전두환 쿠데타, 광주 학살, 김대중 구명과 미국의 역할 | 평화 세상
이재봉 2020. 11. 10. 20:43http://blog.daum.net/pbpm21/535
이재봉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평화학 명예교수)
현대 한국정치의 중대한 고비엔 미국이 꼭 있었다. 1945년 해방과 분단, 1950-53년 전쟁과 휴전, 1960년 4월혁명, 1961년 5.16쿠데타, 1964-65년 한일협정, 1964-73년 베트남파병, 1980년 5.18민주화운동, 1987년 6월민주항쟁 등에 미국은 주도적으로 역할하거나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이 글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 전후 1979년 박정희 암살부터 1981년 김대중 구명까지 미국이 어떻게 개입하고 무슨 역할을 했는지 다룬다.
1. 자료에 관해
나는 지금까지 주로 미국 국무부가 비밀 해제한 외교문서들을 바탕으로 한미관계를 공부해왔다. 국무부는 비밀 외교문서를 20년쯤 지나면 공개하기 시작하고 30여년 후엔 행정부별로 묶고 상대 국가별로 분류해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미국의 대외관계)라는 이름의 문서집으로 출판한다. 카터 행정부 (Jimmy Carter Administration, 1977-80)와 레이건 행정부 (Ronald Reagan Administration, 1981-88) 시기 한국 관련 외교문서들은 2020년 9월 현재까지 비밀해제 검토 중에 있다 (under declassification review). 1979년 12월 전두환 쿠데타 및 1980년 5월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개입과 역할이 담겨 있을 국무부의 외교문서집은 40년이 지나도록 출판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1989년 미국 정부가 이 두 사건에 관한 공식성명을 발표했다. 1988년 한국 국회에 설치된 ‘5.18광주민주화운동 특별조사위원회’가 사건 당시 미국 측 핵심 당사자들이었던 주한미국대사와 주한미군사령관의 증언을 요청하자, 국무부가 이를 거부하는 대신 서면 질문에는 회답한 것이다. 1989년 6월, “1980년 5월 대한민국 광주사건들에 대한 미국정부 성명 (United States Government Statement on the Events in Kwangju, Republic of Korea, in May 1980)”과 “부록 (Appendix to the United States Government Statement on the Events in Kwangju, Republic of Korea, in May 1980)”이란 제목으로 약 50쪽의 문서를 통해 미국의 개입과 역할을 어느 정도 밝혔다.
이 성명에 의문을 품은 팀 셔록 (Tim Shorrock) ≪저널 오브 커머스 (Journal of Commerce)≫ 탐사전문 기자가 정보공개법 (Freedom of Information Act, FOIA)에 따라 1990년대 초부터 국무부에 비밀 외교문서를 공개하도록 끊임없이 요구했다. 이에 국무부는 5.18민주화운동 전후 주한미국대사관과 주고받은 외교전문 (diplomatic telegram, embassy cable)들을 1993년부터 부분적으로 비밀 해제하기 시작했다. 셔록은 이렇게 기밀 해제된 약 2,000건의 외교문서를 바탕으로 1979년 12월 전두환 쿠데타와 1980년 5월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역할을 1990년대 중반부터 미국과 한국 언론에 보도했다. 1996년 3월 주간지 ≪시사저널≫에 연재한 기사가 대표적이다. 그는 2017년 간직해온 3,500쪽 이상의 비밀 해제된 외교문서들을 전부 광주시에 기증했고, 나는 그와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의 도움으로 이 문서들 사본을 모두 갖게 되었다.
돈 오버도퍼 (Don Oberdorfer) 존스 홉킨스대학 대외정책연구소 (The Foreign Policy Institute of Johns Hopkins University) 연구교수는 1970-80년대 ≪워싱턴 포스트≫ 외교전문 기자로 일하면서 한국과 미국의 주요 정치인들과 인터뷰한 내용 및 비밀 해제된 외교문서들을 바탕으로 1997년 The Two Koreas: A Contemporary History라는 역저 (力著)를 펴냈다. 제5장에서 “암살과 여파 (Assassination and Aftermath)”라는 제목으로 박정희 암살, 전두환 쿠데타, 광주항쟁, 김대중 구명운동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1998년 北한국과 南조선: 두 개의 코리아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곧 이어 전두환 쿠데타와 광주 학살에 대한 미국의 개입 당사자들이 1999년 거의 동시에 회고록을 출판했다. 1978년부터 1981년까지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글라이스틴 (William Gleysteen)은 Massive Entanglement, Marginal Influence: Carter and Korea in Crisis를 펴냈고, 1979년부터 1982년까지 주한미군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을 지낸 위컴 (John Wickham)은 From the 12/12 Incident to the Kwangju Uprising: Korea on the Brink, 1979-1980를 펴냈다. 이들 회고록은 즉시 한국에서 각각 알려지지 않은 역사 및 12.12와 미국의 딜레마라는 책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1997년 12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1980-81년 사형수였던 그의 구명에 힘썼던 미국 관리들이 전두환 측과의 협상 과정과 내용 등을 소개하는 글을 신문에 발표했다. 카터 행정부에서 국무부 차관보 (Assistant Secretary of State)를 지낸 홀브루크 (Richard Holbrooke)와 동아시아담당 선임부차관보 (Senior Deputy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East Asian Affairs)를 지낸 아마코스트 (Michael Armacost)가 공동으로 ≪뉴욕 타임즈≫ 1997년 12월 24일자에 “A Future Leader’s Moment Of Truth”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김대중 구명을 위한 협상과정을 밝혔다. 그러자 레이건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National Security Adviser)을 지낸 앨런 (Richard Allen)이 같은 신문 1998년 1월 21일자에 “On the Korea Tightrope”라는 제목으로 레이건이 취임 직후 전두환을 백악관으로 초청하게 된 과정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김대중은 1998-2003년 대통령을 지낸 뒤 2010년 김대중 자서전 1-2권을 펴냈다. 제1권 5부에서 5.18민주화운동, 자신에 대한 사형선고와 구명운동, 그리고 미국으로의 망명 등을 다루고 있다.
나는 미국의 비밀 해제된 외교문서들을 기본 자료로, 그리고 미국 정부의 공식 성명, 탐사전문 미국인 기자들의 기사와 저서, 1979-81년 한국 관련 미국 외교.국방 당국자들의 회고록과 기고문 등을 보조 자료로 삼아 이 글을 쓴다. 이 자료들엔 다음과 같은 한계와 문제점이 있다.
첫째, 미국 국무부가 정보공개법에 따라 외교문서들을 20년쯤 지나 기밀 해제하기 시작하고, 30여년 후에 문서집으로 출판하더라도 모든 기록을 공개하지는 않는다. 국익을 해칠 수 있거나 사건 관련 생존자의 신변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문서들은 부분적으로 삭제하기도 하고 통째로 빠뜨리기도 한다. 특히 중앙정보국 (CIA)은 매우 민감하거나 보안을 지켜야 할 기록들을 거의 공개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1996년 출판된 5.16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개입과 역할이 담긴 외교문서집엔 1961년 4월 12일부터 5월 15일까지 한 달이 넘는 기간의 기록이 통째로 빠져 있다. 당시 덜레스 (Allen Dulles) 중앙정보국장이 나중에 회고록을 통해 5.16쿠데타를 자신의 재임 중 CIA의 해외활동에서 가장 성공한 작전이라고 밝혔지만, 외교문서로는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대통령과 장관 등 정부를 대표하는 고위관리들의 성명이나 기자회견 또는 회고록 등에는 왜곡과 거짓이 적지 않다. 어떠한 일의 책임을 회피하거나 잘못된 사건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다. 특히 회고록에서는 긍정적 평가를 얻을 수 있는 부분은 과장하고, 부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부분은 축소하거나 감추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예를 들면, 1960년 4월 27일 이승만의 대통령직 사임으로 워싱턴에서 한국에 대한 미국의 내정간섭이 논란거리로 떠오르자 아이젠하워 (Dwight Eisenhower) 대통령이 “미국은 어떠한 종류의 간섭도 절대 한 적이 없다 (no interference of any kind was ever undertaken by the United States)”고 단호하게 부인했다. 그러나 1994년 출판된 4월혁명에 대한 미국의 개입과 역할을 다룬 외교문서집엔 매카노기 (Walter McConaughy) 주한미국대사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즉각 하야하도록 노골적으로 끈질기게 압박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국무부가 1989년 발표한 ‘광주백서’ (1980년 5월 대한민국 광주 사건들에 대한 미국정부 성명)도 나중에 공개된 외교문서들과 비교하면 감추거나 왜곡한 대목이 적지 않다.
2. 박정희 암살과 미국의 역할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암살됐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해 18년간 철권통치를 펼쳐온 독재자가 심복에게 총 맞고 죽은 것이다.
27-28일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는 국무부에 하루 몇 번씩 전문을 보냈다.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충격적인 사건이 잘 계획된 군사쿠데타인지, 일부 기득권 세력이 두려워하던 지도자를 제거해버린 사건인지, 또는 단순히 기상천외한 사건인지 아직 알 수 없다..... 한국 체제가 큰 혼란까지 가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미국은 새로운 정권이 현저한 실수를 저지르기 전까지는 징벌적 조치에 대한 공개적 언급을 피해야 한다..... 1960년대부터 한국에 대해 미국이 행사해온 압력 때문에 우리가 너무 강경하거나 너무 어리석게 한국의 체제개편을 압박해 나가면 극도로 부정적인 반미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군사쿠데타로 박 대통령이 죽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 주변의 일부 인물들, 아마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이끄는 세력이 정부구조를 유지한 채 괜찮은 후계자를 내세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대통령을 제거했을 수 있다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다..... 김재규가 박 대통령의 강경책이 한국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한명이었을 수 있다.”
이와 동시에 글라이스틴은 박정희의 후임이 누가 될지 촉각을 곤두세우며, 정치인, 군인, 재야인사, 목사, 교수, 언론인, 학생 등 “거의 모든 분야 모든 계층의 사람들”과 접촉하며 다양한 정보를 얻고 있었다. 김종필, 정일권, 김영삼, 김대중 등에 대한 인물평을 국무부에 보고하기도 하면서 11월 1일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우리는 영향력을 조용히 활용하여 지금이 보다 민주적인 헌법으로 나아갈 때라는 판단을 엘리트 지도층 내부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시켜야 한다. 국무부 인권국은 우리가 영향력을 ‘조용히’가 아니라 ‘완전히’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분노를 살 수 있는 ‘지도’나 ‘가르침’을 준다는 인상을 피해야 한다. 특정세력에게 반대하거나 편들면 안 되고, 상당수 한국인들이 생각하듯, 배후에서 킹 메이커 역할을 한다는 인상을 주어서도 안 된다.”
11월 초 미국하원에서 박정희 암살에 관한 청문회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글라이스틴은 이를 막아야 한다며 11월 8일 국무부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나는 청문회가 미국이 박정희 죽음을 공모했다는 의혹을 건드릴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를 공모한 적이 없으며 박 대통령을 비판했을 때도 그의 정부와 안보, 경제 등의 문제에 대한 협력을 지속하겠다는 신호를 함께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청문회에서 얘기하게 되면 우리가 박 대통령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더 증폭시키지 않을까 우려된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공개적 이슈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대통령을 죽인 중앙정보부장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소문이 국내외에서 확산되자, 주한미국대사는 11월 19일 다음과 같은 내용 전문을 보냈다.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에 미국이 관련되어 있다는 의혹이 한국에서 퍼지고 있다. 반체제인사들과 기독교단체들은 미국이 김재규 음모의 일부였으며 최소한 신호를 보냈으리라 믿고 있다. 학생들도 이러한 시각을 공유한다는 보고가 있었고, 박 대통령의 일부 측근도 미국이 어떤 형태로든 암살에 관여했지 않았을까 우려하고 있다. 공산주의 날조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의혹 외에도 일본은 물론 미국언론마저 미국이 박정희 정권을 비판한 것은 쿠데타 기도자들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였다는 취지로 얘기하면서 음모론을 부채질하고 있다. 김재규가 나의 격려를 받고 박정희를 공격했다고 말하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나는 박정희 정권이 1년 이상 가기 힘들 것이라는 말을 개인 또는 단체에 하고 다녔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나는 그러한 국가전복 행위에 관련된 적이 없지만, 박 대통령의 몇몇 조치에 대한 공개적 비판으로 일부 한국인들이 우리의 언행을 오해해 박정희 통치가 종반으로 치닫고 있으며 미국은 그가 사라지더라도 아무런 불만이 없으리라 생각했을 수 있다..... 나는 박 대통령의 임기 전망과 같이 민감한 주제를 제기할 만큼 무모하지 않았다. 내가 그런 언급과 가장 비슷한 얘기를 한 것이 9월 26일 우리의 마지막 대화 도중 김재규가 한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다. 김재규가 나에게 한국경제에 대한 분석과 향후 국내정치 전망에 대한 의견을 물었는데, 나는 경제 분석과 관련하여 향후 6-12개월 간 한국경제의 발전 속도가 느려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6월 20일 글라이스틴은 김재규를 만나 한국의 인권문제에 관한 미국의 관심을 거듭 전했다. 청와대에서 열릴 한미 정상회담 10일 전이었다. 카터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와 인권문제를 1976년 대선공약으로 내걸고 1977년 취임하자마자 한국의 인권문제를 비판해 박정희 정부와 극심한 갈등을 불러오고 있던 터였다. 글라이스틴은 “미국인들이 한국의 인권문제를 얼마나 중시하고 있는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상당히 솔직한 대화를 나눴다..... 김재규는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분명히 알아들었다”고 국무부에 보고했다.
6월 29일 카터가 몹시 굳은 표정으로 서울에 도착했다. ‘인권 대통령’으로서 ‘한국의 가장 저명한 인권 희생자’인 김대중과 오래 전부터 면담하고 싶어 했지만 그럴 수 없게 된 터였다. 카터가 김대중을 만나면 “정상회담 분위기가 냉각되고, 한국방문 성과가 사라지며, 박정희가 개인적 모욕으로 받아들여 인권문제에 관한 미국의 노력이 무산될 수 있다”는 글라이스틴의 만류 때문이었다. “한국대통령과의 일정을 취소하게 되더라도 김대중을 만나야겠다”는 미국 대통령의 고집을 주한미국대사의 강력한 반대가 꺾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6월 30일 정상회담이 역사상 가장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가운데 신랄하고 험악한 말이 오갔다. 카터는 인권이 미국의 대한정책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라면서 긴급조치 9호를 철회하고 재소자들을 될수록 많이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7월 5일 박정희는 카터의 요구에 따라 180명 정치범을 연말까지 석방하겠다고 약속했다. 8월 9-11일 YH무역회사 여성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시위를 벌이다 경찰의 강제해산으로 1명이 건물에서 떨어져죽는 ‘YH사건’이 일어났다. 글라이스틴은 경찰력을 동원한 박정희의 강압조치에 외무부장관에게 유감을 표명하고, 9월엔 중앙정보부장에게 정치억압을 완화하라고 촉구했다. 9월 중순 김영삼 신민당총재는 ≪뉴욕타임즈≫와 인터뷰를 통해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박정희는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하도록 공화당에 지시했고, 여당은 10월 4일 야당총재를 제명했다. 미국 국무부장관은 한국 외무부장관에게 유감을 표명하고, 박정희의 조치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주한미국대사를 소환했다. 10월 16일부터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학생과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인 ‘부마항쟁’이 전개되었다. 18일 박정희는 부산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투입해 시위를 진압했다. 이에 글라이스틴은 서울을 방문한 미국 국방부장관과 박정희를 방문해 정치억압에 대해 경고했다. 20일엔 박정희가 마산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시위를 진압했다. 그리고 26일 김재규의 총을 맞고 죽었다.
이와 같이 인권을 앞세운 카터 정부의 골칫거리였던 한국 대통령을 한국 중앙정보부장이 암살하는데 미국의 역할이 무엇이었을까.
1988년 한국 국회에 설치된 ‘5.18광주민주화운동 특별조사위원회’의 질문에 1989년 6월 미국이 공식 발표한 ‘1980년 5월 대한민국 광주사건들에 대한 미국정부 성명’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미국의 견해와 행동을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부터 1980년 5월 광주사건 이후까지 사건들과의 관련 속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성명은 박 대통령 암살부터 시작한다..... 미국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 미국은 이 사건에 충격을 받았으며 북한이 이를 남한을 공격할 기회로 이용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여기서 미국을 몇 개로 나누어볼 필요가 있다. 행정부와 의회가 다른 의견을 표출하고, 행정부 안에서는 국무부와 국방부가 다른 주장을 펼치며, CIA는 은밀하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보았듯, 국무부 소속으로 미국정부를 대표하는 주한미국대사는 인권문제와 관련해 한국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경고하기도 하며 한국 중앙정보부장을 수시로 만나 노골적으로 압박했다. 외국 지도자가 미국정책에 아무리 역행해도 미국정부 대표가 암살을 공모하거나 부추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CIA는 충분히 그럴 수 있고 수없이 그렇게 해왔다. CIA는 1960-70년대 해외에서 외국지도자들을 직접 암살하거나 테러분자를 고용해 암살하기도 했다. 쿠데타를 지원하기도 하고 시위를 부추기기도 했다. 공식 외교문서로 밝힐 수 없을 뿐이다.
한국 현대사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첫째, 이승만은 1945-48년 미군정 기간에 ‘미국의 사람’으로 선택되어 ‘미군과 달러와 경찰’로 한국을 통치했다. 독재정치와 휴전반대 때문에 1952-53년 사이 적어도 두 번 미국에 의해 극비리에 제거될 뻔했다. 1960년 4월 학생시위 격화에 따른 주한미국대사의 거센 하야 압박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둘째, 1960년 4월혁명으로 들어선 장면 총리는 미국의 충고와 간섭을 잘 받아들이며 미국의 모든 정책에 우호적이었다. 주한미국대사는 그를 호의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반미감정 확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그에게 회의적 입장을 취하기 시작하며 미국이 장면에게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국무부에 건의하기도 했다. 국무부는 장면 집권 3개월 만에 군부에 의한 정권교체를 원했다. 이런 상황에서 1961년 박정희의 5.16쿠데타가 일어났다. 쿠데타를 진압할 수 있는 제1사단장과 제2군사령관 등이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연락해 한국정부에 충성하겠다며 병력동원을 원했지만, 그와 주한미국대사는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해 미군을 동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장은 3년 후 자신의 재임 중 ‘가장 성공적인 해외 비밀공작’으로 5.16 쿠데타를 꼽았다.
김재규 한국 중앙정보부장의 상대는 주한미국대사보다 미국 CIA 한국지부장이었다. 주한미국대사는 김재규를 통해 한국 권력층을 접촉했다고 밝혔고, CIA 한국지부장은 김재규와 종종 골프를 즐기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밝혔다. 게다가, 2020년 김재규 장군 평전을 김삼웅에 따르면, 김재규는 10.26에 앞서 두 번이나 박정희 제거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우발적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치밀하게 박정희 암살을 준비하는 과정에 미국이 무슨 역할을 했겠는가.
3. 전두환 쿠데타와 미국의 역할
1979년 12월 12일 저녁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 일당이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정승화 대장을 체포했다. 계엄령 아래서 계엄사령관이 체포된 것이다.
그 무렵 용산 미8군 지휘소는 상부에 ‘이상한 부대이동’을 보고했다.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유병현 대장이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에게 미8군 지하벙커로 급히 와달라고 전화했다. 위컴은 출발 전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에게 전화해 벙커로 와달라고 요청했다. 위컴과 글라이스틴은 벙커에서 비정상적 군대이동과 발포를 보고 받고 쿠데타를 직감했다. 그들은 11월 말부터 전두환 보안사령관 일당이 수상한 행동을 모의하고 있다는 정보를 받아온 터였다. 전두환의 정규 연락창구인 브루스터 (Robert Brewster) CIA 한국지부장을 통해 전두환과의 접촉을 시도했지만 거절당했다. 최규하 대통령과의 통화도 되지 않았다.
두어 시간 뒤 노재현 국방부장관과 김종환 합참의장이 벙커에 합류했다. 그들은 벙커 전화로 관할 군병력 동원 가능성과 충성심을 점검했다. 노재현은 주요시설을 보호하고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2개 사단에 서울시내 진입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위컴은 노재현에게 다음날 새벽까지 군부대를 이동시키지 말라고 부탁했다. 어둠 속에서 진압병력이 이동하면 불필요한 마찰이 빚어질 수 있다는 이유였다. 한국군끼리 전투를 벌일 수 있고 내전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며 모든 상황을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행동을 자제하라는 위컴의 거듭된 요청을 노재현이 받아들여 2개 사단에 직전중지 명령을 내렸다.
위컴은 한미연합사령부의 지휘체계 아래 있는 전방 사단병력이 서울로 들어왔다는 보고에 분노하면서 원위치로 돌아가라고 명령할 수 있었지만, 명령이 무시당할 게 뻔하다면서 상황을 받아들였다. 12일 밤 태평양사령부와 합동참모본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 “중하급 장교들이 권력구조를 재편하기 위해 쿠데타를 감행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주모자인 것 같다. 노재현 국방부장관이 일부 부대를 통제할 수 있으나 유혈사태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글라이스틴 역시 12일 밤 국무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현재 서울에서 초기 쿠데타가 진행 중이나 다양한 협상채널이 가동 중이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일단의 장교들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체포했다..... 용산 유엔사령부 벙커에서 노재현 국방부장관과 김종환 합참의장 등 고위 지휘관들은 두어 시간 핵심부대 및 지휘관들의 충성심을 파악하며 충성서약을 받았다. 이들은 차례로 각 지휘관들에게 오직 합당한 권위에만 복종하고 현 위치를 고수할 것을 촉구했다..... 위컴은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 아래 있는 부대들이 연합사 몰래 이동한 것에 대해 쿠데타 세력에게 항의했다. 한국 국방부엔 부대 간 교전을 피하기 위해 다음날 새벽까지 쿠데타 진압을 위한 부대이동을 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위컴은 전두환 일당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해 보안사 지하 감옥에 가둔 뒤 체포동의서에 대한 최규하 대통령의 서명을 받아내는 등 13일 새벽까지 쿠데타가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평가하고 태평양사령부와 합동참모본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쿠데타 세력은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으며 오래 전부터 이를 모의한 게 분명해졌다..... 따라서 우리는 곧 등장할 새로운 통치세력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최근 이루어진 정치발전이 어느 정도 복구될 수 있을지, 그리고 북한의 침략 가능성이 수그러질 정도로 안정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글라이스틴은 13일 아침 최규하 대통령을 만나 “최근 진행되어온 정치자유화 조치를 계속해나가고 대통령직을 계속 수행하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국무부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우리는 사실상 완전한 쿠데타를 경험했다. 무기력하고 허울뿐인 민간 헌법정부가 유지되고 있지만 일단의 말썽꾸러기 젊은 장교들이 주도면밀하게 군부의 권력 요직을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반공주의자, 친미주의자가 될 것이며 젊고 능력 있는 사람들을 고위직에 앉히고 질서정연한 정치자유화 일정을 추진할 것이라고 한다..... 이들은 박정희 대통령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며 일반적으로 보안 관련 분야에 종사하였다..... 쿠데타 세력은 최소 10일 동안 행동을 준비해왔으며 군 전반에 걸쳐 젊은 장교들로부터 지원을 이끌어냈다. 그들은 군의 새로운 보직 명단을 이미 작성해 놓았다..... 나는 신군부에게 너무 강경하게 대응해 이들을 심각하게 소외시키면 안 되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무뚝뚝한 대화와 더불어 공동의 이익을 재확인하는 경고를 보내면서도 상호 조정을 통해 협력을 계속해나가기 바란다는 메시지를 전할 것이다.”
쿠데타 세력은 전두환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온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을 통해 위컴 사령관과 글라이스틴 대사 등 미국 대표들에게 12.12 사태는 절대 쿠데타가 아니라고 설득했다. 대통령이 물러나지 않고 헌정질서가 유지되고 있는데 무슨 쿠데타냐는 강변이었다.
위컴과 글라이스틴도 쿠데타가 아니라는데 동의했다. 글라이스틴이 더 적극적이었다. 그는 13일 국무부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피곤해서 12월 12일 사건을 규정하는데 부주의하게 서술했다..... 나는 조심스럽지 못하게 ‘사실상 쿠데타 (coup in all but name)’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정확한 상황이 무엇이든 간에, 기존 정부조직이 실제 남아있기 때문에 전형적 쿠데타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 사건이 계획된 것이 아니었으며 쿠데타 시도가 아니라는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이를 믿지는 않지만, 보다 확실한 상황이 파악될 때까지 단정하지 않는 게 우리 이익에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글라이스틴은 14일 전두환과 직접 만났다. 정치 안정을 위해 민간정부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하자, 전두환은 자신의 행동이 쿠데타나 혁명으로 평가되는 것을 거부했다. 글라이스틴은 다음날 국무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내가 전두환과 접촉한 것은 앞으로 그와 일당이 자행한 권력찬탈의 정당성을 우리가 인정했다는 신호로 이용될 위험이 있다. 다양한 수단을 통해 이러한 위험을 상쇄하고자 한다.”
위컴 역시 태평양사령부와 합동참모본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전두환을 멀리해야 하지만 그와 같이 일할 수밖에 없다. 전두환이 정치권을 장악하려면 합법적으로 하도록 힘써야 한다. 전두환과 열린 관계를 유지하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편, 전두환 쿠데타를 진압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며칠 후 위컴에게 한 육군중장이 찾아왔다. 군부 내 인맥이 든든하고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로 영어를 잘하는 장군이었다. 전두환 일당을 몰아내고 합법적 권력에 실권을 돌려주고 싶다며 미국이 쿠데타 진압을 지지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위컴은 미국이 쿠데타를 지지하지도 않고 어떤 파벌이 주도하는 반대행위도 절대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글라이스틴은 19일 한 지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전보를 받았다. “전두환 장군이 한 일을 무효로 하고 그를 축출하기 바란다. 이번 사건은 미국이 아무나 지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국 국민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다. 이 전보를 밴스 (Cyrus Vance) 국무부장관에게도 전해 달라.” 그는 국무부에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내도록 부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겠지만, 식민지 총독처럼 행동할 수는 없다.”
한 달 반이 지난 1980년 1월 말엔 장성급 장교 30여명이 전두환을 제거하려는 모의를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며칠 후 고위 장성이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국무부도 ‘미국 주도에 의한 전두환 제거’를 모색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글라이스틴은 반대했다. 쿠데타를 사전에 억제하는 데는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쿠데타가 일어나면 수용하는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이와 관련해 그는 20년이 흐른 1999년 회고록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가 쿠데타 진압 계획을 그토록 냉철하게 처리한 것은 온당한 처사였다고 지금도 확신하고 있지만 그만큼 개인적 고뇌를 안겨준 것도 없다. 12.12사태를 올바로 잡으려는 노력에 찬물을 끼얹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지극히 유감스런 일이었지만 한국군 내부의 갈등을 부추기는 행위는 미치광이 짓이었다.”
이러한 1979년 12월 12일의 쿠데타와 관련해, 1989년 6월 미국이 공식 발표한 ‘1980년 5월 대한민국 광주사건들에 대한 미국정부 성명’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미국은 전두환 소장이 이끄는 일단의 육군장교들이 무력으로 한국군 지휘부를 제거해버린 12.12사건에 대해 사전에 알지 못했다. 1979년 11월 말 위컴 장군은 한국 육군사관학교 11기 및 12기 출신 장교들 사이에 약간의 ‘불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위컴 장군이 유병현 연합사 부사령관과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을 때 그들은 이를 소문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전두환 쿠데타가 성공한 데는 위에서 보듯 한국 내 미국 대표들의 도움이 컸다. 브루스터 CIA 지부장은 전두환의 대변자 역할을 했다.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은 12일 밤 국방부장관의 쿠데타 진압 시도를 막았다. 이후 장성들의 쿠데타 진압 시도도 거부했다. 한국군 사이에 무력충돌이 빚어지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쿠데다 세력이 반란행위를 저지르고, 불법적으로 군대를 이용했으며, 한미연합사의 승인 없이 군대를 이동해 연합사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고 겉으로는 항의하고 비판하면서도, 제재를 가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북한의 남침 가능성 때문에 쿠데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는 쿠데타라는 말을 쓰는 것조차 거부했다. “일단의 장교들이 허약한 민간정부의 배후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기 위해 계획한 권력찬탈 행위라고 확신한다”면서도, 최규하 대통령이 쫓겨나지 않고 정부가 유지되고 있다는 전두환의 억지를 받아들여 쿠데타가 아니라고 했다. 한국인들을 직접 상대하는 자신이 한국 사정을 더 잘 안다며 국무부의 전두환 제거 준비도 반대했다.
4. 광주 학살과 미국의 역할
1979년 12월 쿠데타로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1980년 3월 소장에서 중장으로 오르고, 4월엔 중앙정보부장 서리 자리까지 차지했다. 5월 1일부터 전국 각지에서 대학생들이 민주화와 전두환 퇴진을 외치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전두환 군부는 1979년 10월 박정희 암살 직후 선포된 계엄령을 5월 17일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국회를 폐쇄하고, 대학문을 닫았으며,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들을 체포했다. 5월 18일 광주에서 대학생들이 계엄포고에 맞서 김대중 체포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계엄군과 특전사 군인들이 총칼로 잔인하게 진압함으로써 ‘광주 학살’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대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자 군부는 즉각 특전사에 의한 진압을 준비하며 주한미군에 구체적으로 알렸고, 위컴 사령관은 승인할 계획을 세웠다. 5월 7일 글라이스틴 대사가 국무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한국군은 비상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병력을 이동시킨다고 미군 지휘부에 통보하였다. 제13공수여단을 서울로 이동하고, 제11공수여단을 김포로 이동해 제1공수여단과 함께 배치한다. 2개 여단 총 병력은 약 2,500명으로 학생 시위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서울로 이동 중이다. 주한미군 지휘부는 포항의 해병대 제1사단이 대전, 부산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해병대 제1사단은 연합사 작전통제 병력으로 이동을 위해서는 미국의 승인이 필요한데, 유엔군사령관은 요청이 있을 경우 승인할 계획이다.”
글라이스틴은 8일 “모든 특전사 소속 부대들이 광범위한 폭동진압 훈련을 받고 있다”며, “특히 최루가스 사용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학생 시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내며 ‘법과 질서’ 유지를 강조했다. “학생들이 거침없이 법과 질서에 도전하고 있다..... 정부는 필요하다면 군까지 동원해 질서를 유지하겠다고 다짐하는 듯하다..... 미국 정부는 필요한 경우 군병력이 경찰을 지원한다는 한국 정부의 법과 질서 유지를 위한 비상계획에 반대한다는 점을 어느 방식으로든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9일엔 전두환을 만나 군대의 학생시위 진압에 대한 설명을 듣고 국무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전두환은 법과 질서 유지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분명히 취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주동자 체포, 학교 폐쇄, 군의 개입 등 단계적 조치를 설명했다”며, “강력하고 활기 넘치며 극도로 야심만만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덧붙였다.
12일엔 김대중을 만나고 13일엔 김영삼을 만나 학생들이 자제하도록 최대한 노력해달라고 부탁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5월 10-16일 중동 방문 중이었는데, 최광수 대통령 비서실장이 14일 글라이스틴을 청와대로 초청해 그날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예상된다며 “전투경찰을 보강하기 위해 2개 여단의 특수부대 군병력을 동원해야겠다”고 알렸다. 글라이스틴은 “군병력 동원 여부는 전적으로 한국정부의 판단”이라며 “병력 동원에 아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한편, 위컴은 13일 전두환을 만나고 14일 미국에 회의차 들어갔는데, 주영복 국방부장관은 주한미군사령관 대리에게 전화로 군병력 동원 계획을 통보했다.
주한미군사령관 대리는 16일 김대중 체포에 관한 정보를 미리 듣고 국방부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김대중이 학생운동을 선동하는데 직접 관계되어 있어서 곧 체포될 것이라고 한다. 군부가 김대중 체포에 대한 도덕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중대 사건이 발생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김대중 개입설은 상당 부분 과장된 것이다. 김대중이 체포된다면 학생들의 심각한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만약 군 지휘부가 학생들을 자극하고 싶다면 김대중을 체포하는 것은 좋은 전술이 될 것이다.”
글라이스틴은 17일 밤 계엄령이 확대 선포되고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각 전화와 전보로 “군부에 의한 사실상 정권 인수가 진행 중인 것 같다”고 국무부에 보고했다. 18일엔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최규하 대통령을 차례로 만나 계엄 확대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며 사전에 통보해주지 않은 것에 항의했다.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에게 전두환을 만나 우려를 표명하라고 일렀는데, 전두환은 브루스터에게 해명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광주의 미국문화원, 외신기자, 선교사 등을 통해 광주학살에 관한 소식을 듣기 시작했다.
글라이스틴의 보고에 국무부는 즉각 한국정부에 대한 제재 가능성을 경고하라고 지시했다. 미국인들에게 한국 여행을 자제토록 하는 여행경보를 발령한 데 이어, 곧 있을 수출입은행 이사장, 해외민간투자기업 회장, 펜실베이니아주 부지사가 이끄는 석탄대표단, 그리고 뉴올리언스주 무역대표부 등의 한국 방문을 재고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위컴은 19일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브라운 국방장관에게 전두환 권력을 인정해야 한다며 한국에 대한 제재를 반대한다는 전문을 보냈다. “전두환의 강력한 통제를 받는 군부는 자신들이야말로 보수적 가치의 수호자이며 나라의 안녕을 지키고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올바르다고 믿는 일을 계속 행할 것이며 필요하다면 미국의 우려 따위는 무시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전두환과 그의 동조자들에게 권력의 통제권이 넘어간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들의 마지막 목표는 모든 권력을 자신들에게 집중시키는 일이다..... 그들은 민간정부로 위장한 통제된 선거를 치르거나 전두환을 의장으로 하는 군 자문위원회를 설치하는 식으로 그 일들을 진행시켜 나갈 것이다. 우리는 전두환에 의해 정부가 움직이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들과 협조해야만 한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중대한 안보이익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행동은 취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그들에 대하여 경제제재 조치 등을 취하는 것은 반드시 신중을 기해야 한다. 오히려 한국의 경제를 악화시키고 국방비 축소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늘날 정부를 통제하고 있고 내일은 최고 권력을 완전히 장악할지 모르는 전두환과의 효율적이고 열린 대회 기회를 박탈당하게 될 것이다.”
주한미국대사관과 주한미군사령부는 18일부터 광주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다양한 경로를 통해 들었다. 서울과 광주엔 특전사가, 부산엔 해병대가 예비 병력으로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위진압 특별훈련을 받은 20사단과 30사단이 연합사 지휘 아래서 빠져 광주에 투입되었다는 사실도 알았다. 부대를 연합사 통제에서 해제해 달라는 한국의 16일 공식요청을 ‘승인’한 터였다. 병력 동원에 대해 국무부와 국방부에 보고해 ‘동의’도 얻었다. 북한을 감시하기 위해 공중조기경보통제기 (AWACS)를 이동 배치해달라는 전두환 군부의 요구도 들어주었다. 주요 미국 해군함정들도 한반도 근해로 파견했다.
글라이스틴은 21일 “한국 군부는 공식적인 정부 인수를 거의 완료했다..... 이들을 현실적으로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고 국무부에 보고했다. 22일엔 한국 당국이 광주에서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며, 질서 회복 뒤 군부를 압박해 정치 자유화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위컴은 24일 국방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전두환이 광주와 다른 지역에서의 불안을 최소한의 피해로 해결하여 사회적 화합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이상 그에게 섣불리 반대하고 나서는 일은 어려울 것이다. 결국 조만간 전두환의 지위와 군의 결속이 굳건히 다져질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은 한 발 물러난 곳에서 여전히 권력을 휘두르고 있으며 청와대로 향한 행진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글라이스틴 대사와 나는 전두환과의 관계를 신중하게 지속시켜 나가되 그를 추켜세우거나 끌어내리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군의 심각한 내분과 북한의 침투 위험을 가져올 뿐이며 또 다른 전두환을 낳게 되는 불상사를 불러올지 모른다. 한국 내정에 간섭했다는 불명예도 안게 될 것이다.”
위컴은 26일 광주 계엄사령관 소준열 중장으로부터 다음날 실시될 광주진압 작전계획을 구체적으로 보고받았다. “20사단 소속 보병부대가 공격 핵심역할을 맡을 것이며, 군인 3,000명씩 4개 부대가 이동할 예정이고, 사태 초기 광주에 진입하여 무자비한 공격을 단행했던 특전사 대원은 지원병 역할만 맡게 될 것이다..... 그들 모두 무기를 장전하고 자기 방어를 위해 총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글라이스틴 역시 26일 6,000명의 20사단과 민간인 복장의 특전사 병력이 광주에 들어가 시위를 진압할 것이라는 합참의장의 공식통보를 받고, “오늘 26일 밤 또는 내일 27일 아침 일찍 폭도들을 체포하고 무장 해제시키기 위해 병력이 광주시내에 대규모로 진입할 계획”이라고 국무부에 보고했다. 그리고 “광주 무법상태의 장기간 지속에 따른 위험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정부에 군사 행동을 자제하라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글라이스틴은 27일 “계엄사령부로부터 03:30 한국군이 광주를 탈환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05:20 탈환을 선언했다는 비밀 연락을 받았다. 특수부대가 공격을 주도하였고 20사단 소속 전차 8대가 이에 가담하였다”고 국무부에 보고했다. 이와 관련해 그는 1999년 회고록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5월 27일 새벽 3시 30분 광주에 진입한 계엄군은 약 2시간 후 시를 장악했다. 진입작전 중 희생자는 극히 미미했다. 그러나 전남도청을 사수하려던 약 30명의 중무장 시민군은 특전사 병력에 의해 사살됐다. 그것으로 광주항쟁은 막을 내렸고..... 우리는 20사단과 특전사 부대가 작전을 능숙하게 수행했다는 점에 최소한 안도했다.”
이렇게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광주 학살’로 끝났다. 위컴은 8월 8일 오전 전두환을 만나고 오후에 서울의 미국 기자들과 인터뷰를 가졌다. 다음날부터 국내외 언론은 “미국은 전두환이 합법적 방법으로 정권을 잡으면 그를 지지할 것이다”는 내용의 톱뉴스가 보도되었다. 글라이스틴은 8월 14일 “전두환이 합법적으로 선출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최소한 일반적인 예우를 해줘야 할 것”이라고 국무부에 보고했다. 그리고 최규하는 8월 16일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전두환은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광주 학살과 관련해, 1989년 6월 미국이 공식 발표한 ‘1980년 5월 대한민국 광주사건들에 대한 미국정부 성명’은 다음과 같이 명시했다. “계엄사령부가 광주에 투입한 특전사나 20사단은 그들이 투입될 당시 또는 광주에서 작전하는 도중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 아래 있지 않았다. 당시 광주에 투입되었던 어떠한 한국군 부대도 미국의 통제 아래 있지 않았다. 미국은 특전사가 광주에 동원된 것을 사전에 알지 못했으며 그들이 광주에서 취한 행동에 대한 책임도 없다.”
그러나 주한미국대사와 주한미군사령관 그리고 CIA 한국지부장 등 한국의 미국 대표들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도’들이 ‘법과 질서에 도전’하며 ‘무법상태’를 만드는 행위로 인식했다. 학생 시위를 공수부대로 진압하겠다는 비상계획을 사전에 구체적으로 통보 받았다. ‘광주 학살’을 전두환 군부가 ‘질서를 회복하고 사회적 화합을 이루려는 노력’으로 평가했다. 전두환의 쿠데타는 대통령을 바꾸지 않았으니 쿠데타가 아니라고 미화한 데 이어, 권력 찬탈은 미국이 내정간섭하며 막을 수 없으니 인정하고 협조해야 한다고 정당화했다. 이렇게 전두환의 광주 학살 및 권력 찬탈에 대한 미국의 역할이 명확한 터에, 특전사가 한미연합사 지휘 아래 없었고 주한미군사령관이 부대 이동을 승인한 적 없다는 미국정부의 해명이나 변명에 관한 논란은 부질없지 않은가.
5. 김대중 구명과 미국의 역할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군부는 비상계엄령을 확대 선포하고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들을 체포했다. 18일 광주에서 학생들이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22일 계엄 당국은 김대중을 광주항쟁 배후 주동자로 기소했다. 8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군사재판이 시작되었다. 내란 음모, 내란 선동, 계엄령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외환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를 쓴 김대중은 9월 사형을 선고받았다. 11월 항소심에서 사형선고가 유지되고, 1981년 1월 대법원에서 사형판결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다음날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1982년 3.1절 특별사면에 따라 20년형으로 줄었다. 김대중은 1982년 12월 형집행정지를 받고 ‘신병치료’ 명목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 과정에 미국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1979년 10월 박정희 암살 이후 야당 지도자 김대중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수집했다. 1961년부터 그가 행한 연설과 성명, 신문기사, 대사관 기록 등을 통해 정치, 경제, 외교, 국방, 통일문제 등에 대한 그의 성향을 분석해 1980년 2월 국무부에 보고했다. 그가 공산주의자는 아니지만 “군부의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평가를 덧붙였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김대중이 1980년 3월 가진 언론 인터뷰 내용도 국무부에 보고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에게 지고, 1972년 박정희의 ‘10월 유신’에 반대하며 일본에서 망명생활하다, 1973년 한국으로 납치되어 가택연금 당하고, 1976년부터 투옥과 가택연금 생활을 반복하다, 1980년 3월 사면 복권되었다. 일본에서 그를 납치했던 중앙정보부 사람들이 그를 살해하지 못한 것은 미국의 압력 때문이었고, 박정희를 비판했다고 5년형에 처해졌다가 3년으로 감형된 것도 미국 영향 때문이라며, “미국에 깊은 감사와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김대중이 5월 17일 체포되자 미국은 즉각 반응했다. 국무부는 주미한국대사에게, 주한미국대사관은 계엄사령관과 최규하 대통령에게 강력 항의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거의 매달 한두 번 전두환뿐만 아니라 노태우 보안사령관이나 노신영 외무부장관 등을 만나 김대중 기소에 대해 우려와 불만을 전하고 국무부와 의견을 교환했다. 위컴 주한미군사령관과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 등의 도움을 받아 다양한 분야 지도자들의 의견을 듣기도 했다.
CIA 국가해외평가센터 (National Foreign Assesment Center)가 1980년 6월 17일 작성한 ‘동아시아 정세 (East Asian Review)’를 통해 김대중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보고한 터였다. “저명한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전혀 신뢰한 적 없는 군 지도부는 올해 초 그의 대통령 당선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 그에 대한 사건을 꾸미기 시작했다. (비공개) 계엄사령부는 5월 18일 김대중을 체포하고 그의 반란 선동 및 친공 연계에 대한 세부혐의를 공표하였다. (비공개)”
미국에서는 의회와 인권단체들이 앞장섰다. 6월 초 케네디 (Edward Kennedy) 상원의원이 국무부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당국의 적극적 대응을 요구했다. “계엄포고령 해제 및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정치지도자들을 포함해 임의로 구금되어 있는 사람들 석방을 촉구하며, 이들 정치지도자들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한미관계가 급격히 악화될 것이라는 점을 미리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6월 말엔 솔라즈 (Stephen Solarz) 하원 외교위원회 아시아.태평양소위원회 위원장이 의원 30여명의 서명을 받아 최규하 대통령에게 항의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김대중씨를 포함한 저명한 정치지도자들을 감금하고 외부와 접촉을 차단한 것에 특히 우려한다. 김대중씨는 우리에게 오랫동안 반공 지도자로 잘 알려져 있는데, 우리는 그가 치안방해죄로 체포된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믿을만한 증거를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솔라즈 위원장은 7월 서울을 방문해 최규하 대통령과 면담하면서 앞으로 있을 김대중 재판이 공개되어야 하고, 적법한 절차를 준수해야 한다며 김대중의 운명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7월엔 울프 (Lester Wolff) 하원 외교위원회 아시아.태평양소위원회 위원장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공정한 재판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고, 주한미국대사에게도 다음과 같이 우려를 표명하는 편지를 보냈다. “한국 대통령으로 선출될 뻔했고 미국이 지속적으로 인권 측면에서 관심을 표명해온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할 게 분명한 재판은 의회의 우려를 증폭시키는 일이다..... 김대중의 생명을 빼앗기 위한 의도가 분명해 보이는 재판이 부정적 결과를 가져올 경우 이에 우려를 표명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친구로서 내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울프 위원장은 8월 아태소위원회 청문회를 열었는데, 봉커 (Donald Bonker) 의원과 솔라즈 의원 등이 김대중 재판에 관해 강력한 우려를 표명했다.
한편, 국무부는 6-7월 한국의 계엄령에 우려를 표명하는 편지를 거의 매주 70-80통씩 받았다. 그 중 절반이 김대중 체포를 구체적으로 지목한 것이었다. 워싱턴의 인권단체들은 전두환에게 최대한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김대중의 부인’도 5월 주한미국대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글라이스틴은 깜빡 잊고 7월에야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귀하의 부군이 심각한 혐의로 재판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미국 정부는 그 재판을 공개할 것, 가족 및 변호인들 접견권을 보장할 것, 공정한 변호를 보장할 것, 국제 참관인들에게 재판을 개방할 것 등을 모든 힘 다해 촉구해왔습니다..... 미국 정부는 부군의 사건을 계속 긴밀히 추적할 것이며, 어려움에 처한 귀하를 돕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는 점을 믿으셔도 좋습니다.”
8월 김대중 재판을 앞두고 국무부는 서울 대사관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미국대사관이 재판에 2명의 참관인을 보내고, 일본과 유럽 외교관들도 비슷한 대우를 받으며, 국제 언론이 재판 과정을 지켜보도록 하는 등의 조치를 재확인하고, 김대중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질 경우 전 세계적으로 강력한 항의가 있으리라는 인식을 주기 바람.”
8월 16일, 최규하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김대중 재판이 시작되었다. 국무부는 고위급 회의를 열어 김대중 구명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특별 노력을 기울이기로 합의했다. 방법론에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머스키 (Edmund Muskie) 장관 등은 한국 정부에 공개적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글라이스틴 대사는 자제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끝까지 맞섰다. 공개적으로 압박하거나 비난하면 전두환 군부가 분개해 반발할 수도 있고 그들에게 이용당할 수도 있는 등 파멸적 역효과를 가져오리라 확신한다며 전두환을 조용히 설득하는 게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서울로 돌아와 9월 3일 전두환을 만나고 국무부에 보고하면서, 김대중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져도 미국 정부는 공식 논평을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고 거듭 촉구했다. 사형선고 후 전두환이 감형해줄 것 같다는 예측을 덧붙였다. 그러나 장관은 사형선고 전망에 몹시 우려하며 전두환 군부에 대한 제재 위협과 특사파견 등 다양한 방안을 검토했다.
8월 27일, 전두환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자 카터 (Jimmy Carter) 대통령이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김대중 재판 관련 대목만 소개한다. “김대중씨에 대한 재판은 국제적으로 널리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내가 귀국의 국내 사법절차에 관여하기 위해 이렇게 민감한 사안을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대통령께서 이 사안이 불공정하게 처리됨으로써 한국과 미국 그리고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저해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주실 것을 촉구합니다. 김대중씨를 처형하거나 단순히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만으로도 심각한 역풍을 맞을 수 있습니다.”
9월 16일, 글라이스틴은 국무부 훈령을 받고 전두환을 만나 김대중이 처형되거나 사형선고를 받는 것조차 중대한 문제로 생각할 것이라는 카터의 경고를 거듭 전하고, 국무부엔 전두환에게 더 이상 압력을 행사하면 미국의 입지가 약화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했다. 바로 다음날 9월 17일, 김대중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국무부는 글라이스틴의 초안에 따라 “극형이 내려진 데 대해 크게 실망하지만, 사법적 판단과 관련된 사항이기에 더 이상 논평할 게 없다”는 싱거운 성명만 발표했다. 그리고 국무부 변호사를 통해 김대중에게 항소나 감형 또는 사면 등이 적용될 수 있는지 한국의 법률을 검토하기도 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사형선고와 관련해 한국의 각계각층 인사들을 만나 의견을 듣고 국무부에 보고했다. “교육수준이 높고 경제적으로 풍족한 사람들은 사형선고가 궁극적으로 대통령의 감형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교육수준이 낮고 가난한 사람들은 김대중의 혐의가 사실이고 사형이 집행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군인들은 김대중이 북한 간첩이거나 공산주의자로 정부를 전복하려 했는데, 일부 장교들은 김대중이 처형될 것이며 처형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강하게 표출했다.”
10월엔 하원 외교위원회 아태소위원회가 전두환에게 편지를 보냈다. “..... 이전부터 소위원회 위원들이 각자 의견을 미국 및 한국 정부 최고위층에 개별적으로 전달해 왔습니다..... 이제 우리 소위원회는 ..... 특히 김대중에 대한 사형 선고가 집행된다면, 전통적으로 공고했던 미국과 한국의 관계가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확신을 밝히고자 합니다..... 일본 정부는 만약 김대중이 처형된다면 향후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강력한 성명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였습니다.” 그리고 하원 외교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가 10월 개최한 아시아 공산주의 국가들의 인권상황과 관련한 청문회는 거의 김대중 관련 청문회가 될 뻔하기도 했다.
11월 3일, 김대중은 항소심에서도 사형을 선고받았다. 세계 각국에서 김대중 사형선고에 대한 비판과 항의가 쏟아졌다. 글라이스틴에 따르면, “박정희 암살과 전두환 권력 장악엔 침묵하던 서유럽, 북유럽,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의회와 정부가 갑자기 김대중 재판과 사형선고에 지나칠 정도로 강력하게 비판적 자세를 취해 한국 측을 분노시켰다. 주한일본대사는 사형선고 후 전두환과 다각도로 신중한 접촉을 벌이며 감형을 요청했다.” 국무부 역시 국제사회 동향을 서울 대사관에 알렸다. “김대중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가 부족하지 않다. 캐나다에서는 한국 대법원이 김대중 사형을 확정할 경우에 대비해 트뤼도 (Pierre Trudeau) 총리 앞으로 강력한 탄원서를 미리 준비해 놓았다. 독일 연방의회는 11월 이와 관련하여 강경한 어조의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며, EC 위원회는 서울 주재 대사에게 한국 외무장관을 만나 강경한 의사를 표명하라는 지침을 내려놓았다.
11월 4일,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레이건 (Ronald Reagan) 공화당후보가 카터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감옥에서 소식을 들은 김대중은 당시 심정을 2010년 자서전을 통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항소심 선고공판은 11월 3일 육군 대법정에서 열렸다. 재판부는 1심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이틀 후인 5일, 사형선고보다 더 낙담할 일이 일어났다.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지미 카터 대통령이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 후보에게 패했다..... 하늘이 무너졌다. 도덕성과 인권을 강조했던 카터 대통령이 재선했더라면 내 신변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희망이 고여 있던 마지막 둑이 터져버렸다. 나는 너무 슬펐다. 발을 뻗고 소리 내어 울었다. 레이건은 보수파로 더 이상 기대를 걸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정녕 사형이란 말인가. 하느님이 나를 버리셨다는 말인가’.”
카터의 재선 실패는 글라이스틴도 힘들게 만들었다. 전두환 정부가 선거 이전부터 공화당과 접촉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11월 중순 노신영 외무부장관을 만나 레이건 대통령당선자도 김대중 운명에 무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노신영은 12월 회담 참석 차 도쿄를 방문할 브라운 (Harold Brown) 국방부장관이 서울도 방문해주도록 요청했다. 글라이스틴은 12월 6일 전두환에게 브라운의 13일 서울 방문을 알려주고 김대중 사면을 요청하는 카터 친서를 전달했다. 브라운은 13일 전두환과 만나 김대중을 처형하면 한미 간 안보와 경제관계에 심각한 결과를 불러올 것이라는 카터의 ‘엄중한 메시지’를 전했다. 카터 행정부의 김대중 구명을 위한 마지막 노력이었다.
한편, 레이건 대통령당선자 대외정책 자문팀장 앨런 (Richard Allen)은 11월 말 머스키 국무부장관과 고위관리들로부터 김대중 구명 노력에 협조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레이건과 논의한 후 김대중의 곤경에 깊이 우려하지만 카터 행정부와 공동성명을 발표하지는 않기로 했다. 앨런은 며칠 후 주한미군사령관을 지낸 베시 (John Vessey) 합참 부의장의 주선으로 전두환이 보낸 유병현 합참의장을 만났다. 유병현은 김대중 사형에 관해 레이건 행정부와 백지상태에서 논의하고 싶다고 했다. 앨런은 대응할 시간을 벌기 위해 유병현이 한국 대통령의 공식 특사인지 믿을 수 없다며, 2주 후에 확인서를 갖고 다시 오거나 다른 공인을 보내라고 했다.
레이건은 김대중 사형이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재앙이 될 것이라며 앨런에게 협상 전권을 주었다. 앨런은 만약 김대중이 처형된다면 한국은 레이건 행정부와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12월 중순 앨런은 김용식 주미한국대사 주선으로 전두환의 특사 정호용 특전사령관을 만났다. 정호용은 미국이 한국 내정에 간섭하지 말라며, 김대중의 범죄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다. 거칠고 퉁명스런 성격에 무례하고 직설적이었다. 앨런은 한국 입장에 유연성이 없어 보여 “김대중을 죽이면 ‘불벼락이 당신들을 치는 듯한 (like a lightning bolt from heaven striking you)’ 미국의 반응을 부를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하고, 레이건에게 한국 측이 김대중 사형을 집행할 것 같다고 보고하자, 레이건은 김대중에 대한 선고를 주시하고 있으며 감형이나 사면 이외의 결과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점을 주지시키라고 지시했다.
다음날 정호용은 레이건 취임식에 전두환이 공식 초청 받으면 다른 조치를 고려해볼 수 있으리라고 제안했다. 협상의 대가를 원하는 전략을 노출시킨 것은 한국의 큰 실수였고 미국의 기회였다. 정호용은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외국 정상 초청을 금지하는 의례도 몰랐다. 앨런은 정호용의 제안을 거부하고 취임 직후의 회담을 제안했다. 김대중이 크게 감형되어야 하고, 전두환의 ‘공식방문 (state visit)’은 아니며, 이 합의는 비밀로 지켜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정호용이 동의했다.
1981년 1월 20일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앨런은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이 되었다. 21일 백악관은 전두환을 초청한다고 발표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한국 언론은 ‘레이건의 첫손님 한국대통령’이란 제목으로 크게 널리 보도했다. 23일 대법원은 김대중 사형판결을 확정했다. 24일 전두환은 김대중에게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계엄령을 해제했다. 2월 3일, 전두환은 백악관에 들어섰다. 레이건의 두 번째 외국손님이었다. 한국의 쿠데타 지도자를 첫 번째 외국정상으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해 세아가 (Edward Seaga) 자마이카 총리를 전두환에 앞서 초청한 터였다. 김대중은 1982년 특별사면과 형집행정지를 거쳐 미국으로 떠났다.
이렇듯 미국은 전두환에게 백악관 방문이란 선물을 주며 김대중의 생명을 구했다. 여기서 ‘백악관 방문’과 ‘김대중 구명’에 관해 조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 독재자들은 정권의 정통성이나 합법성을 확보하기 위해 선거를 통한 국민의 지지보다 미국의 승인과 지원에 더 매달리기 마련이다. 미국은 그것을 이용해 독재정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국익을 챙길 수 있다.
전두환은 1980년 가을부터 미국 방문을 원했다. 정호용이 12월 중순 앨런에게 처음으로 불쑥 제안한 게 아니다. 김경원 청와대 비서실장이 10월부터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넌지시 제안하기 시작했다. 백악관 초청은 쿠데타를 통한 집권에 대한 미국의 승인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두환이 존경한 쿠데타 선배 박정희도 그랬다. 1961년 5.16 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한 박정희는 1963년 12월 대통령 자리에 올라 1964년 11월부터 미국 방문을 추진했다. 미국은 당시 가장 절실한 정책목표 중 하나였던 한일협정 체결이 이루어져야 초청할 수 있다고 압박했다. 박정희는 1965년 6월 도쿄에서 한일협정이 체결될 수 있도록 조치해놓고 5월 워싱턴을 방문할 수 있었다. 미국은 1951년부터 추진해온 해묵은 외교과제를 풀었고, 박정희는 대외적으로 정통성에 대한 승인을 얻었다. 한일협정이 독도나 위안부 등 ‘민감한 문제’들의 해결 없이 졸속적이고 굴욕적으로 이루어진 배경이다.
김대중 이전에도 야당 지도자가 사형을 선고받자 미국이 구명운동에 나선 적이 있다. 조봉암은 이승만 정부에서 농림부장관을 지내다 1952년과 1956년 대통령선거에 나섰지만 이승만에 졌다. 진보당 당수로 ‘평화통일’을 주장하다 1958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959년 사형선고를 확정 받고 처형당했다.
국무부는 조봉암이 1958년 사형을 구형받은 직후부터 주한미국대사관에 전문을 보내 그를 구하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지시했다. 다울링 (Walter Dowling) 대사가 당시 실권자 이기붕 국회의장을 두세 번 찾아가 그로부터 사형선고를 막아보겠다는 다짐을 받기도 했다. 미국이 결과적으로 조봉암의 처형을 막지는 못했지만 한국 정부에 경고까지 하면서 조봉암을 구하려 했던 이유를 국무부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첫째, 한국 정부가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을 반역죄로 규정할 경우 미국이 유엔에 상정한 한반도 통일방안에 대한 지지조차 범죄시 될 수 있다. 둘째, 유엔 총회에서 한국 문제에 관한 미국의 영향력을 손상시킬 가능성도 있다. 셋째, 1950년대 후반 미국과 소련을 축으로 냉전이 심화하면서 미국은 아시아에서 한국을 ‘자유세계의 진열장’으로 삼아 비동맹 국가들에게 이념적 공세를 취하고자 하는데, 조봉암 사형은 한국의 민주화와 정치안정에 기여하기는커녕 공산주의자들에게 좋은 선전거리가 될 수 있다.
카터 정부는 출범 초부터 인권과 도덕성을 강조했다. 박정희 독재정권을 가장 곤혹스럽게 했던 문제이기도 하다. 게다가 1989년 6월 미국이 공식 발표한 ‘1980년 5월 대한민국 광주사건들에 대한 미국정부 성명’이 밝혔듯, “카터 대통령은 1년 전 김대중씨를 만난 일이 있어 그의 사정에 대해 개인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김대중을 처형하려는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을 압박했던 배경이다.
카터와는 크게 달랐던 레이건 극우반공정부가 김대중을 구했던 이유도 인권 때문이었을까. 레이건은 1981년 1월 백악관에서 국무부가 마련해준 절제된 말 대신 뜨거운 포옹으로 전두환을 맞았다. 국무부가 세심하게 준비한 축배 제의 연설도 제쳐놓고 한국전쟁의 매카써 (Douglas MacArthur) 장군 연설을 인용하며 반공 공조를 강조했다. 회담 중엔 카터가 반대했던 미국의 최신예 전폭기 한국 판매를 공식 제안하고 전두환이 즉각 받아들였다는 사실도 떠올리기 바란다.
* 이 글은 2020년 11월 10일 김대중도서관에서 김대중 평화센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김대중 광주전남추모사업회, 5.18민주화운동 서울기념사업회가 공동주최한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 40주년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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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b2020.11.11 20:57 신고 수정/삭제 답글
이재봉교수님.
자료를 바탕으로한 역사의 사실들을 통해 미제의 실체를 다시 밝히 보여주신 노고에 감사를 드려요.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와 남북분단과 분단고착화의 원흉이며 독재세력과 재벌공화국의 후원국으로 이 땅을 식민지화하고 온갖 명분으로 분단을 악용해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며 남쪽의 사대주의 세력을 이용해 지배력을 유지 확장시켜 나가는 미제의 본성을 꿰뚤고 깨부셔야 진정 한반도에 해방이 오겠지요.
미제의 공화당은 대놓고 윽박지르는 세력이고 민주당은 등긁으며 배치는 세력으로 본성은 변함없는 제국양아치 집단일 뿐.
분단문제로 속썩는 우리에게는 등긁어 주며 배칠 바이든보다 돈키호테같은 트럼프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네요.
늘 건강하세요.
남원에서 백승환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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