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한민족독립운동사연구의 회고와 전망
12권 한민족독립운동사연구의 회고와 전망
3. 일제 식민통치 연구의 현단계와 ...
3) 일제 시기에 대한 인식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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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독립운동사 12 12권 한민족독립운동사연구의 회고와 전망
12권 한민족독립운동사연구의 회고와 전망
3. 일제 식민통치 연구의 현단계와 ...
3) 일제 시기에 대한 인식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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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독립운동사 12 12권 한민족독립운동사연구의 회고와 전망
> 3. 일제 식민통치 연구의 현단계와 과제
> 3) 일제 시기에 대한 인식의 변화
3) 일제 시기에 대한 인식의 변화
(1) 해방을 전후한 시기
일제 식민지 통치에 대한 연구는 일본인 관변학자들에 의해 식민시기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이들은 개항 이전 한국 사회가 부패·정체된 사회였음을 강조하고, 개항 이후 일본의 호의로 비로소 근대화·자본주의화 되고 있다고 하는, “총독정치의 은혜(恩惠)의 이론”을註 012 펴고 있었다. 이들에 의하면 일제 식민지기는 한국사의 급속한 자본주의화·근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시기였다. 이러한 일인 학자들의 입장은 경성제대 법문학부에서 출간한 『조선경제의 연구』(1929), 『조선사회 경제사연구』(1933), 『조선사회법제사연구』(1937), 『조선경제의 연구』(1938)라는 일련의 간행물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일본인 학자들의 입장은 당시 경성제대 교수로 있었던 영목무웅(鈴木武雄)의 『조선의 경제(朝鮮の經濟)』에 잘 정리되어 있다.
반도경제가 그 장시간의 중세적 정체(停滯), 반봉쇄적(半封鎻的) 자급자족 경제로부터 근대 자본주의 경제로 이행할 수 있었던 최초의 계기는 1876년의 소위 강화도 조약에 의해……근대 경제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된 데 있다.
……반도를 무대로 하는 일청·일로의 항쟁 격화는 반도경제에 대한 일본의 전면적 지도를 막았고, 그리하여 반도 경제는 무역을 따라서 개항 도시를 매개로 하여 점차 구래적 경제의 해체를 보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전체로서는 아직도 의연히 정체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전환을 가져온 것은 일로전쟁후의 반도에 있어 (일본)제국의 절대적 우위이며, 일본의 반도에 대한 보호정치이다. 이것은 곧 일한병합의 대업(大業)으로 되었고, 총독부의 시정(施政)으로 되었고, 이에 반도의 산업경제의 획기적 발전을 보게 되었는데……註 013
(산미증식계획(産米增植計劃)에 대해서:필자) 처음부터 일부간에 이론(異論)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대국적으로는 반도경제의 발전에 있어 매우 다행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반도경제를 급속히 구래(舊來)의 유제(遺制)로부터 해방하여 근대 경제로 변화시키는데 기여하는 것이고, 다시 산미증식계획의 내용인 토지개량사업 및 농사개량사업 실시를 위한 거액의 자금 유입은, 증식된 미곡의 왕성한 내지(內地)(일본:필자) 이출(移出)에 따른 거액의 대금 획득과 함께, 다만 당면의 산미산업 뿐만 아니라 반도 경제 전체를 자극하여 이를 활황으로 이끌어 갔던 것이다.註 014
이러한 영목무웅(鈴木武雄)의 견해에서는 일제 시기 조선 경제에 있어 자본의 민족적 성격같은 것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다만 외형적인 근대화만이 극단적으로 미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부분의 일일 학자들에 있어 공통된 입장이었다. 소조천구랑(小早川九郞)의 『조선농업발달사(朝鮮農業發達史)』(정책편)의 내용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1장:서론
제2장:농업발달의 제1기
제1절:농업발달에의 태동기(통감부~총독정치초기)
제2절:농업발달에의 전개기(1912년~1919년)
제3장:농업발달의 제2기
제1절:농업발달에의 약진기(1920년~1931년)
제2절:농업발달에의 전진기(轉進期)(1932년~1936년)
저자는 일제시기의 농업정책만을 다루고 있지만, 일제의 농업정책이 식민지 정책의 근간임을 생각하면 바로 일제 통치 전반에 대한 그의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 분명하다. 이 책은 그 자매편인 『조선농업발달사』(발달편)와 함께 합 1400면에 이르는 거질(巨帙)로서, 광범한 자료를 동원하여 이 시기 한국 경제의 근간인 농업이 급속히 발전하였음을 논증하려 하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그 성장의 몫이 어디로 귀속되었는지는 언급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속에서도 일부 양식있는 일인 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시혜적 시각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일제에 의해 이식된 한국 근대화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일제의 소작관으로서 한국의 농업에 관해 많은 논문을 발표한 구간건일(久間健一)은 ‘일한병합’을 획기로 조선 농업이 경이적으로 약진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농업에 있어 자본주의적 경제조직의 이식과정”이었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외부적 강제에 의해 매우 성급하게, 또 강권적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내부적으로는 균형을 잃어 파행적이어서, 농업기구 전반이 극히 취약하다고 하여 식민지 농정하에 근대화되어 가는 한국 농촌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註 015 그러나 그는 식민지 정책 전반에 관한 연구를 한 것은 아니었다.
식민지 전반에 관한 정리는 좀더 기다려야 했는데, 당시 일인들의 일제시기 전반에 대한 시각(視角)을 당시로서는 그래도 양심적이었다는 세천가육(細川嘉六)의 『식민사(植民史)』(1941, 저작집 제2권)를 통해 살펴보자. 그도 한국의 자본주의화가 일본의 개항에 의해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자본주의화는 기형적인 것이었다. 즉,
……봉쇄적 자연경제인 조선사회경제는 이조말기에 이르러 강화조약에 의한 부산 외 2항의 개항을 단서로, 선진 자본주의 경제, 특히 일본 경제의 진출에 의해 급속히 해체하기 시작하여 외부로부터의 자본주의 이식에 의해 기형적인 자본주의화의 과정을 밟게 되었다. 개항전 어떠한 자본주의 경제의 맹아도 갖지 못했던 조선 경제는 선진 경제와 접촉하고서야 비로소 조선 자신의 문제로서 자기 발전적 근대화의 길이 폐쇄당하고 일본 자본주의 경제의 일환(一還)으로서, 그 제약 속에서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註 016
그의 이러한 말은 다른 일본인 학자들의 입장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이후 한국사가 “일본자본주의 경제의 일환으로서, ……그 제약속에서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는 것, 즉 일본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불구적 근대화에 불과했다는 것을 암시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사상 통제가 심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저자는 이같이 우회적인 말로서 일제 시기 한국 경제의 근대화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으로 추측된다. 어쨋든 그는 강화도 조약이 “일본 자본주의하에 행해진 조선의 특이한 근대화에의 일대 전환점”이라 하고, 그 근대화는 자기 자신의 발달로서 행하여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특이한 형태를 띠지 않을 수 없었다고 지적하였다.註 017 그는 병합 이후 집필 당시까지 조선에 있어 일제의 통치를 다음과 같이 4기로 나누었다.
제1기:병합~1919년 3월 만세사건(무단통치)
제2기:만세사건~1931년 만주사변
제3기:만주사변 후~1937년 지나사변 발발
제4기:1937년~
이러한 단계구분은 1, 2년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이후의 일제 통치의 시기 구분의 원형을 이루는 것으로서 지금까지도 거의 그대로 답습되고 있는 형편이다.註 018 이러한 4단계 중 1기에 해당하는 시기에는 토지조사사업, 근대적 교통·운수기구의 건설, 금융화폐제도의 정비가 이루어진, 일본 자본의 본격적 진출을 위한 전제적 기초적 제 공작이 행해진 시기로 파악하고, 이러한 작업은 이미 보호 정치기 및 그 이전에도 행해졌다고 언급하고 있다.
다음 3·4기에는 특히 “조선 자신의 필요보다도 일본으로부터의 요청이 근저에 두어져, 따라서 조선에 있어 제 정책도 직접 일본의 근본 국책과 관련하여, 후자가 조선이 가진 조건을 통하여 실천되어, 이러한 의미에서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관계가 두드러지게 강해지고 있다”고註 019 하여 일본에 의한 한국 경제의 왜곡을 암시하였다. 앞서 살펴보았던, 일본 위주의 곡학아세적인 발언이 판치던 당시에 있어 세곡의 발언은 그나마 양식있는 것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수 의견이었고, 대부분 일인들은 시혜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같은 시각은 일제의 패망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패전 이후, 자신의 식민지 지배의 야만성·약탈성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는 속에서 이러한 시혜론을 국가 차원(國家次元)에서 다시 정립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이러한 노력이 집대성되어 나타난 것이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관한 역사적조사(日本人の海外活動に關する歷史的調査)』이다.註 020 전35권 중에서 조선에는 10책이 배정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조선총독부시정연보』식의, 일제의 업적을 늘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조선편 끝에 붙어 있는 영목무웅(鈴木武雄)의 「조선통치의 성격과 실적-반성과 반비판-(朝鮮統治の性格と實績-反省と反批判)-』이란 글이다. 이 글은 패전 후 일제의 통치에 대한 비판에 대해 그 지나친 점이나 실수에 대해서는 일면 반성하면서도, 그러한 비난을 다시 뒤집어 반격하는 내용으로 결국에는 일제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저자의 해방 전의 저술의 성향에서도 그의 입장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보다 조직적으로, 또 일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비난을 일일이 언급하면서 자신의 그러한 입장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영목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일인들의 조선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을 잘 보여준다.
일본의 조선통치의 근본 정책은 일시동인(一視同仁)이고 혹은 내선일체(內鮮一體)였다. 이는 식민정책상의 술어로서는 소위 동화정책(同化政策)이고,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였다.……말하자면 그것은 소위 「식민정책」을 부정하려고 하는 사고방식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일본은 조선을 영유하지만, 이를 소위 「식민지」로서 마치 문명인이 야만인을 지배하는 것처럼 지배하기를 원하지 않고, 아니, 문화적으로도 인종적으로도 일선인(曰鮮人)은 비상하게 가깝기 때문에 그와 같은 공식적 식민지 지배 관계를 여기에 수립하는 것과 같은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황민화운동의……실패는 소위 「선의(善意)의 악적(惡政)」을 이루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그 근저에 「조선인을 노예시한다」라고 하는 것은, 그 것과는 정반대로 말하자면 진정한 가족적 일원으로서 이것을 일본인 사회에 영입하고자 하는 동포적 애정이 흐르고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그 「선의」가 아직 민족적 의식을 보지하고 있는 조선인에게는 반드시 「선의」로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또 그 「선의」가 독선적으로 강요되었다는 점에 식민지 경영국으로서의 일본의 유치함과 미숙함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만 그 이른바 「바보스런 정직성」은 만약 일시 일본 및 일본인을 오류에 빠뜨린 바의 봉건적 군국주의에 기초한 대화민족의 독선감과 신화적 신비주의의 외피를 그로부터 벗기어 버린다면 실로 세계식민사상에 유례를 볼 수 없는, 인류로서 하등 부끄러워 할 바 아니라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즉 일본의 일시동인적 동화정책은 결코 세련된 식민정책은 아니었지만, 그 근본에 있어서는 일본의 조선통치라고 하는 틀 안에서 소위 식민지체제를 지양하고자 하는 혁신적·민주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고, 그 의미에서 세계 식민사상 하나의 특이한 형을 대표한다고 말해 좋을 것이다.註 021
그에 의하면 우리에게는 민족말살정책으로 인식되는 동화정책(황민화정책, 창씨제도)은 한국인을 같은 가족으로 일본의 품안에 받아들이고자 한 애정에 넘친, 진보적 조치였다. 우리에게 가장 극악한 민족말살정책이 그에겐 가장 진보적인 식민정책이 된다. 그들이 저지른 실수는 다만 식민지 경영상의 ‘유치함과 미숙함’이며, 따라서 동화정책은 ‘선의의 악정’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시동인정책은 경제면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산업정책은 근본에 있어 일본을 위한 정책이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은 미곡단종경작형 산업구조의 확립과 그 폐기 및 전쟁에의 강력한 동원에서 보이는 것이지만, 그렇지만 반드시 일본 자본의 착취적 식민정책에 시종하여, 조선 자체를 위한 산업발전 정책이 완전히 살펴지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전체를 통해 조선의 산업정책이 일본의 통치 아래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 발전을 이루어, 산업적으로는 눈에 띄게 후진성을 특징으로 하는 아시아에 있어 어쨌든 일본 내지에 이어 선진성을 자랑할 수 있는 경제권에까지 약진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겨우 30수년에 있어 이 정도의 산업적 발전을 이루어, 그 산업구조에 있어 내지의 그것을 소형으로 만든 것과 같은, 어느 정도의 종합적 체계를 확립하기에 이른 것은 무어라 말해도 제국주의적 식민정책의 공식으로서는 간단히 처리해 버리기 어려운 사례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 억지로 그것에 유사한 사례를 찾는다면, 정도의 차이는 물론 크지만 영국의 자치령의 경제에도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 민족의 지배, 혹은 지도에 의한 경제라고 말하기 보다는 이민 경제(移民經濟)이고 차라리 말하자면 앵글로 색슨의 경제의 연장이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에는 본국 인구의 3분의 1에도 넘는 이민족의 지배, 지도에 의한 경제이다. 여기에 동화정책이라는 술어로는 반드시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는 특이한 일시동인(一視同仁) 정책의 경제면이 보이는 것이 아닐까?註 022
즉 일제의 정책이 일본을 위한 것이지만, 조선의 경제가 아시아 지역에서는 가장 앞선 것이고, 영국의 자치령 식민지와는 달리, 조선인 인구의 1/3이 넘는 일본인에 의해 지도되는 경제라는 것이다. 그의 생각 속에는 한국인의 의사가 들어갈 틈바구니는 전혀 없으며, 오직 일본인의 의사와 시혜가 있을 뿐이다. 조선인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들이 시혜라면 시혜인 것이다. 패전 이후에도 그들 마음 속에는 뉘우침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억울함을 항의하고, 그들이 해외에 남기고 온 재산을 아까워 하면서 이를 되찾을 길이 없을까 궁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이것이 일본정부의, 또는 관변 지식인들의 생각이었던 듯하다.
(2) 해방 직후 및 50년대
한편 일제의 패퇴로 해방을 맞은 국내 학자들은 일제가 뿌려 놓은 이 같은 식민지 통치의 미화론을 극복해야만 했다. 해방으로 국가 건설의 임무에 직면하여 많은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일제 식민지 36년간의 정리는 반드시 거쳐 가야 할 과정이었다. 이때 이들이 의존할 수 있는 것은 일제시기 조선인들의 연구와 그리고 자신들의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조선인 연구중 들 수 있는 것이 이여성(李如星)·김세용(金世鎔)의 『숫자조선연구(數字朝鮮硏究)』(5책)이다. 이 책은 1931년~1935년간 간행되었는데, 원래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것을 정리한 것이라 한다. 제3책의 서두에서 필자들이 이 책을 저술한 목적이 무엇인지 잘 나타나 있다. 즉 그들은 책의 내용이 정비되지 못한 것에 대해 변명하면
수집(蒐集)한 조사자료(調査資料)와 숫자재료(數字材料)를 그대로 초사(抄寫)하여 보기 좋게 나열만 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뜻이 아니오 될 수 있는 한도까지는 그 숫자들의 뭇 음영들로서 어둠컴컴하게 된 그 뒷골목길을 한 걸음이라도 더 들여놓아 보고자 한 고충이 있었기 때문에 허다한 경우의 교통차단과 기타 사고를 봉착하게 되어……註 023
라고 하여 일제의 자료 독점과 비공개, 또 방해 속에서, 일제가 내세운 자신의 치적을 강조하는 통계 숫자의 허구 속에서, 그 뒤안길에서 몰락해 가고 있었던 조선인의 고통, 경제적 몰락, 일제 식민지 정책의 민족 차별성, 이에 저항하는 노동자·농민의 항쟁 등을 밝히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선학의 연구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해방 직후의 격동기에 차분한, 충실한 실증으로 뒷받침된 연구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고 따라서 이 시기의 연구 시작은 개설서를 통해서 밖에 살필 길이 없다. 이러한 사정은 상당히 뒷시기까지 지속되었음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1946년에 출간된 김성칠의 『고쳐 쓴 조선역사』(1948개정판, 조선금융 조합연합회판)에 보이는 일제시기 근대화 현상에 대한 인식은 매우 시사적이다. 여기에서는 일제 식민지 지배에 대해
조선의 쌀의 생산고(生産高)는 해마다 늘어가도 조선사람의 쌀의 소비량은 해마다 줄어들었으며, 근대문명의 혜택으로 조선의 부(富)는 늘어가도 조선 사람의 생활은 갈수록 어려워 졌다註 024
는, 지금 보아서도 일제 시기의 상황을 정확히 전한다고 할 수 있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한국사에 관한 개설서였고, 그 중점도 전근대사에 주어져 있었기 때문에, 일제 시기를 다룬 것은 전체 67항목 중 단지 66항 하나였다. 해방 1년후인 당시의 상황에서는 무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해방 후 일제 시기만을 다룬 책으로 처음 나온 것이 전석담(全錫淡)·이기수(李基洙)·김한주(金漢周)의 『일제하(日帝下)의 조선사회경제사(朝鮮社會經濟史)』(1947년, 조선금융연합회 간행)로서, 전석담이 1부 일반사, 이기수가 2부 경제사(經濟史), 김한주가 3부 농정사(農政史)를 집필하였다. 전석담의 일반사는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제3장 「식민지 조선의 제 양상」이란 제목 아래 일제 식민지 통치의 전반을 다루고 있다. 전석담이 집필한 부분은 거칠기는 하지만 대개 이 시기 일제 정책을 1910년대의 토지조사사업, 20년대 산미증식계획, 30년대 일제 독점자본의 진출로 파악하여 서술하고 있다. 경제사 부분을 서술한 이기수(李基洙)는 서론에서 일제 식민지기가 조선이 자본주의 화·근대화 된 시기라고 지적한 뒤,
조선이 식민지로 된 이후 조선경제는 일본 경제의 일부분으로만 존속하였고 독자적 입장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런 까닭에 조선경제의 어떠한 중대한 변화나 전환이 생겼을 때에는 반드시 일본제국주의의 내적 요구에 기인하는 식민지 경제정책의 변화나 전환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식민지 조선 경제의 사적(史的) 연구는 이 일본 식민지 정책을 단계적으로 밝히는 것이 그 중심이 되지 않을 수 없으며, 또 각 시기에 있어서의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밝히기 위하여서는 그때 그때의 일본제국주의의 경제적(經濟的) 및 정치적(政治的) 모순을 밝혀야 할 것이다註 025
라고 하여 조선 경제의 종속성 때문에, 그 연구에 있어서는 일제의 식민정책, 또 그것을 배태한 경제적·정치적 모순을 밝혀야 한다는 것을, 즉 일제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언명하였다. 그의 시기 구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1장 제1기=식민지 지배의 경제적 기초공작과 원시적 자본축적의 강행(1910~1918년)
제2장 제2기=상품시장 급 원료자원으로서의 역할의 강화(1919~1929년)
산미증식계획, 원료증산정책의 수행과 농민계급분화의 진전
제3장 제3기=공황과 전쟁하의 식민지 수탈(1930~1945)
이같은 시기 구분은 제3기를 제외하고는 앞의 세천가육(細川嘉六)의 그것과 동일하다. 이같은 검토 뒤 이기수(李基洙)는 일제 시기 조선사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과거 40년간의 조선경제의 변천은 일본의 힘에 의한 조선사회의 자본주의화 과정이었다. 봉건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되는 날부터 봉건적 정치체제가 제거되고 자본주의적 정치기구(그것은 식민지 통치기구였기는 하지만은)의 수립을 맞이하게 되었으며 이 자본주의적 정치기구하에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급속한 발전이 진행되었다.註 026
결국 해방 직후 일제에 대한 일반의 증오가 컸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또 차분한 연구업적을 내지는 못했지만 당시의 학자들은 일제시기에 있었던 변화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방 직후의 이러한 연구전통은 이후 일단 단절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1950년대 내내 국사 개설서에서도 일제시기는 적극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했고, 심한 경우는 독립된 장으로서 설정되지 못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1952년에 간행된 서울대학교 국사연구회 편찬의 『국사개설』은 부록을 포함해 750면에 달하는 비교적 큰 책이었지만 그 서술의 하한은 1910년 8월 29일의 ‘일한합병조약’에 끝나고 있다. 이병도는 1955년 『신수(新修) 국사대관』을 집필하고 이는 후에 『한국사 대관(韓國史大觀)』으로 개정되어 당시 대표적인 한국사 개설서였는데, 식민통치에 할당된 서술은 극히 미미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손진태의 『국사대요』(1949초판), 이인영의 『국사요론』(1956)에서도 비슷하였다.註 027
추측컨대 남북이 분단되고, 한국전쟁이후 극우 반공논리가 지배하게 되고, 여기에 더하여 친일파가 집권하게 되면서 일제시기에 대한 객관적 파악은 더욱 더 힘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더구나 일제시기 사회 성격 변화를 파악하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사회 경제사학자의 다수가 월북하게 되면서 이러한 전통의 계승은 더욱 힘들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학자들은 역사연구의 대상시기를 올려 잡고, 일제 시기는 민족 모순만이 존재하는 시기로 묘사되는 경향을 가지게 되었으리라 추측된다.
한편 이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일본인 기전위(旗田魏) 의 『조선사(朝鮮史)』(1951, 암파전서)는 한국사 전반을 다룬 입문서임에도 불구하고 일제 식민지기 전반을 비교적 차분히, 전 면모에 걸쳐 서술하고 있다. 특히 한국인에게 부족한 일본사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일제 정책의 바탕에 놓여 있었던 일본인 정책 입안자들의 고려를 아울러 언급함으로써 식민 통치에 대한 이해를 깊이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기전위(旗田魏)는 7장에서 「일본통치하의 조선」이라는 표제로 식민지기를 다루고 있다.註 028
서술 내용을 보면 먼저 무단정치(武斷政治)에 대해 “일본 내부에도 남아 있었던 무단정치가 조선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노골적으로 횡행했다. ……1919년의 3·1사건으로 조선인의 전국적 반격을 받을 때까지 노골적으로 횡행했다”고 해서 우리로 하여금 일제의 10년대 무단통치가 일본 사회가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던 군국주의적 분위기가 식민지에서는 오히려 더욱 강화되어 횡포를 부리고 있었던 사정을 전하고 있다. 또 “일한병합 이후 조선사회는 급속히 해체되고 있었다. 일본이 조선에서 행한 토지조사사업 기타 개혁 및 일본상품의 유입은 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게 하고, 또 일부를 제외하고는 구양반층을 몰락시켰다”고 하여 근대화의 진전=조선인의 몰락이라는 등식·현상을 정확히 지적하였다.
산미증식계획이 실행되는 배경에 대해서도 “무단 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전환한 시기는 한편 조선에 대한 일본의 경제적 요구가 커진 시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기간에 있어 일본 자본주의의 급격한 발전은 국내에 식량문제를 크게 일으켰다. ……여태까지와 같이 일본에 필요한 쌀을 일본으로 옮길 뿐만 아니라 일본에 필요한 쌀을 조선에서 만든다고 하는 적극적·계획적인 산미증식 계획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 결과에 대해서도 “종래 조선 경제의 자족성은 완전히 해체되고 완전히 일본 경제에 종속된 식민지 경제가 성립했다”고 하여 앞의 영목무웅(鈴木武雄)과는 전혀 반대되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3절에서는 “원래 조선은 일본의 대륙 정책의 기지로서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종래에 있어 대륙에의 루트는 경성(京城)-안동(安東)-봉천(奉天)을 통하는 안봉선(安奉線) 루트가 최대였다. 그러나 만주사변에 이어 만주국이 성립하고 일본의 대륙정책 특히 대소정책이 적극화하자……일본해·북선·만주를 묶어 북방 대륙에 진출하는 노선의 개척이 긴요해졌다. 동부 만주에 있어 철도망의 발달과 더불어 함경도에 있어 철도·항만의 건설이 급속히 진전되었다. 이른바 「북선(北鮮) 루트론(論)」이 전략적 의미를 가지고 논의되었다”고 하여 이 시기 공업화의 방향을 전해주고 있다.
기전(旗田)의 연구는 일부 용어 구사에서는 일본인 일반이 갖는 입장을 보이기도 하지만 식민지 지배는 식민모국의 국내사정에 의해 규정되며 그 사회 자체의 성격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3) 1960~1970년대
남한의 개설서에 있어 일제 시기에 관한 서술 분량이 최소한 기전위(旗田魏)의 수준을 쫓아 가는 것은 60년대에 들어와서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기백의 『국사신론』(1961, 태성출판사)이다. 여기서는 제7편 현대편에 전체의 약 10%에 해당하는 지면을 배당하고, 이중 다시 일제 식민지기에 27면을 할당하였다. 여기에서 사내정의(寺內正毅)의 통치방법을 일인 자신들이 무단정치(武斷政治)로 표현했다는 것, 문화정치가 다만 표방뿐으로, 식민정책의 근본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는 것, 산미증식계획·한국 농민의 영락·상품시장으로서의 역할·중공업의 발전이 일본의 대륙진출을 위한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는 등, 비교적 당시의 학계가 가지고 있었던 일제시기의 역사상 또는 학계의 연구 업적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60년대 한국사학계의 큰 업적 중의 하나는 진단학회에서 간행한 『한국사』(7책)일 것이다. 이 중 한책이 「현대편」인데 집필 담당자는 이선근이었다. 이 편의 서술은 동학란에서 시작하고 있는데, 편명과는 어울리지 않게 서술이 2편 3장 「일로전쟁과 왕조의 붕괴」에서 끝나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개인사정을 들어 변명하고 있으나, 학계의 인적 자원의 부족과 함께 투철한 역사의식의 부족, 또는 일제시기의 연구가 기피되고 있었던 시대적 분위기의 반영으로 보아 틀림 없을 것이다.
이같은 당시 학계의 형편에서 문정창(文定昌)의《군국일본조선강점 36년사》(상·중·하, 1965~1967)는 우리의 주목을 끌기에 족하다. 이 책은 국판으로 1,600면에 달하는 거질로서 우선 양적인 면에서 독자를 압도한다. 저자는 풍부한 자료·통계숫자를 구사하여 일제 식민지기의 각 분야를 서술하고 있다. 저자가 상권을 발행한 1965년은 바로 한·일협약이 조인되어 일본의 재침략이 우려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저자는 한·일회담이 진행되고, 이에 대한 국민의 반대여론이 뒤끓던 당시의 상황에서 민족적 사명감을 가지고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던 것 같다.註 029 시기적 분위기를 반영하여 이 책에서 제시된 일제 식민지 역사상은 철저히 ‘수탈하는 일본, 저항하는 한국인’ 그것이다. 즉 저자는 서문에서,
그러므로 국치(國恥) 36년간의 이 나라 사기(史記)는 침략자 일본이 여하히……이 나라의 자연과 인민을 삭벌(削伐)·억압(抑壓)·수탈(收奪)·유린(蹂躪)하였던 것인가를 밝히고 기록함을 그 요강으로 하여야 한다註 030
하였으며, 실제 서술에 있어서도 일제의 침탈과 이에 저항하는 조선인이라는 도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필자의 주장은 똑 같은 필자가 아직 일제 치하였던 20여년 전의 다른 책에서 일제가 1930년대에 추진한 농촌진흥운동에 대해
그 중점을 춘궁 농민의 구제에 두고, 이를 위한 방책은 혹은 고리채 자금의 융통, 혹은 가마니 기타 부업 생산의 장려, 혹은 또 사방공사(砂防工事) 토목공사의 기공 등, 각 방면에 대한 화폐의 산포에 관한 시설사업으로 나타나, 이로써 차등(此等) 세농(細農) 계급은 점차 소생(蘇生)의 단서를 얻고, 또 화폐(貨幣) 경제민화(經濟民化)하려는 정세에 있었던 것이다註 031
라고 하여, 이를 칭송하는 총독부 관리와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을 볼 때 어딘지 어색하고 과장된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므로 문정창의 이러한 서술태도는 ‘해방 후 친일파의 집권’→‘일제의 수탈과 이에 대한 전민족적 저항의 강조’라는 필자의 이해를 뒷받침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註 032
또 이 책은 (1) 비교적 많은 사료를 구사하고 있으나, 전거(典據)가 제시되지 않는 경우가 많고, (2) 서술에 있어 균형이 맞지 않으며, (3) 객관적·과학적 서술이라기 보다는 사실 나열적인 성격이 강하여 학문적 업적으로 보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
그러나 일제시기에 관한 개설서가 하나도 없는 시기에 재야에서 이만한 저작을 남긴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임은 분명하다.註 033 필자는 또 여지껏 관례로 되어 온 10년대 무단통치, 20년대 문화통치, 30년대 병참기지화 등의 단계구분을 부정하고 1910년~1936년을 한 단계로 하고, 만주사변 이후를 또 하나의 단계로 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데, 저자의 말대로 역사학자도 아니면서 상당히 일리있는 주장을 하고 있는 셈이다.
60년대 말부터는 일제 시기를 다룬 업적들이 꾸준히 나오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것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가) 한국현대사편찬위원회편:『한국현대사』 9책(1969~1972, 신구문화사)
(제4책) 암흑의 시대
(제5책) 광복을 찾아서
(제6책) 신문화 100년
(제7책) 신생활 100년
(나) 아세아문제 연구소편:『일제하의 한국연구총서』5책(1970~1971, 민중서관)
(제1책) 일제의 문화침탈사
(제2책) 일제의 경제침탈사
(제3책) 일제하의 문화운동사
(제4책) 일제하의 민족운동사
(제5책) 일제하의 민족생활사
(가)(나)의 저서는 단독 저서가 아닌, 여러 필자가 동원된 것이어서 당시의 학계의 연구수준을 반영하고 있다. 일제시기를 보는 시각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다루고 있는 주제가 다양해져, 점차 이 시기 이해의 폭이 넓어져 갔던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1970년~1978년간 국사편찬위원회에 의해 발간된 13책에 이르는 『일제 침략하 한국 36년사』는 비록 편년체의 사료집이긴 하나 이 시기의 연구를 자극하는 것이었다.
한편 70년대 일본에서는 산변건태랑(山邊健太郞)의 『일본통치하의 조선(日本統治下の朝鮮)』(암파서점, 1971)과 박경식(朴慶植)의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지배(日本帝國主義の朝鮮支配)』(2책)(1974·1975, 청목서점)이 간행되었다. 두 저서는 일본에서 간행되었음으로 해서 그 저술 동기에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즉 전자는 대다수 일본인들이 식민지 지배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 즉 그것이 ‘선의의 악정’이었다는 생각의 허구성을 공격하기 위해, 후자는 ‘일제 식민지 지배의 실상을 일본 국민에게 보다 많이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전자는
사료(史料)라 해도 공표(公表)된 것은 분식이 많이 되었기 때문에……이것을 그다지 사용하지 않고, 통치하는 측 사람이 통치자의 내부에서 보고하거나 논의한 것으로, 지금까지 비밀로 되어 있는 자료를 이용註 034
하여, 일제통치의 약탈성과 기만성을 지배자 내부의 문서를 가지고 폭로하여, 거기에 ‘선의(善意)’는 조금도 없었다는 것을 밝혔다. 식민지 정책의 전반을 다룬 것은 아니지만 한국인으로서는 알기 어려운 일인 통치자들 내부의 생각을 알려 준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박경식(朴慶植)의 저서는 일제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최초의 정리된 개괄적 서술로서, 그 전모를 파악하는데 가장 적절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구성의 대강을 보면 다음과 같이 식민지 통치정책의 전국면을 다루고 있다.
제1부 1910년대 무력지배 정책
제1장 헌병경찰에 의한 무단정치
제2장 토지약탈과 식민지적 농업
제3장 민족산업의 억압
제4장 민족문화의 말살
제2부 1920년대의 민족분열화 정책
제1장 기만적인 문화정치
제2장 산미증식계획에 의한 농민수탈
제3장 식민지적 산업수탈
제4장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탄압과 학살
제3부 1930년~1945년의 병참기지화 정책
제1장 파쇼적 침략전쟁에의 동원
제2장 민족말살의 황민화운동
제3장 전쟁경제에 따른 수탈의 강화
제4장 전시체제하의 노동자·농민
제5장 민족해방운동 탄압
저자는 이와같은 저술을 출판하는 이유는 일본은 아직도 자신의 과거에 대해 반성하지 않으며, 특히 조선의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영목무웅(鈴木武雄)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40여년에 걸친 일본에서의 생활체험을 통하여 재차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침략을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실천적 과제”을 수행하기 위하여註 035 광범한 자료를 동원하여 일제 식민지 정책이 한국역사 내지 한국민에 끼친 고통을 서술하여, 식민지 지배 미화론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이 기간동안의 근대화현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충분한 고려가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여태까지의 다른 저서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국면 국면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인정하듯이 “사료의 나열적 부분”이 상당히 많고, 또한 “지배정책의 역사적 연관성”註 036에 대한 고구가 부족하여, 통일되고 정비된 일제시기의 상을 얻기는 힘들다. 그러나 풍부한 사료의 구사, 폭넓은 고찰, 그리고 일제 시기 전반을 종합적으로 다룬 유일한 저서로서 앞으로의 이 시기 연구자의 충실한 안내자가 될 것이다.註 037
80년대는 뒤의〈표〉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일제 시기에 관한 연구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시기인데, 일제시기의 전 국면을 다루는 저서는 아직 나오고 있지 않다. 이러한 와중에서 들 수 있는 것이 김운태(金雲泰)의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의 한국통치(韓國統治)』(1986)이다. 필자는 서문에서
우리나라 역사상 이 식민지 통치기간에는 각 분야에서 실로 많은 변혁들이 발생하였는데 이들 변혁들은 그 시간적 성격으로 보아 외관상 전통질서에서 근대질서로의 이행이라는 의의를 지니고 있었고 또 비록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근대 국가적 체험 또는 근대질서의 제도화라는 사회변동의 다른 하나의 내용도 포함하는 것이다註 038
라고, 이 시기의 변화의 의의를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에 곧이어
그러나 이들 변혁들은 한국의 주체적 입장에서가 아니라 일본의 이익만을 위하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우리의 근대화 변혁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한국의 근대화의 기본 방향을 왜곡한 사이비 근대화의 후유증에 불과한 것이었다註 039
고 하여 너무나 쉽고 명쾌하게 그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근대화’의 결과가 우리에게 남겨져, 지금까지 청산 안 된 ‘유산’으로서 남겨져 있다는 사실이고, 또 구체적으로 그것이 어떻게 한국의 근대화의 방향을 왜곡했는지가 궁금한 것인데, 필자의 서술에서도 이 문제는 다루어지고 있지 않다.
이상이 한·일인들의 일제 식민지 시기에 대한 중요 업적들인데, 이제 비교적 제3자적 입장에서 이 문제를 볼 수 있는 구미인의 업적을 살펴 보기로 하자. 이때 맨 처음 들 수 있는 것이 A.J. Grajdanzev의 Modern Korea(1944)이다. 이 책은 1955년 이기백교수에 의해 소개되었고,註 040 다시 동 교수에 의해 번역되어 『한국현대사론』(1972년)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역자는 그 역서(譯序)에서, 이 책이 일제시기 연구의 한 ‘고전(古典)’이 될 것이라고 극찬하였는데,註 041 이 책은 그에 걸맞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 원서(原序)를 보면,
외관상으로 나타난 한국에 있어서의 ‘물질문명의 진보’에 쉽게 감동해버리는 사람들은, 일본의 업적에 대하여 내가 너무 비동정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한편 전시기분(戰時氣分)의 영향을 받아서 일본인을 인간 이하의 동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본의 지배 밑에서 사실상 한국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발전이 있으리라고는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註 042
라고 하여, 물질적 진보만 보고 판단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객관적으로 있었던 발전을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정당하게 지적하였다. 또 일제의 공과를 따질 때 일제가 흔히 내세우는 공업의 발전에 대해서는,
이상에서 우리는 한국의 공업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보아 왔다.……이제 남겨진 문제는 그러한 발전이 한국인의 것이냐 일본인의 것이냐 하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만일 한국에서 생산되는 비료(肥料)가 일본으로 수출되지 않고 한국내에서 한국 농민에게 매각되고, 그것이 한국 농산물의 수확량을 증가시키는데 공헌한다 하더라도, 한국에서의 일본인에 의한 화학공업의 발달이 한국인에게 유익(有益)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 벼가 한 줄기 밖에 나오지 않던 곳에서 두 줄기를 나게 할 수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수확의 증가는 일본에의 수출증가, 그리고 한국에서의 쌀 소비량의 감소를 가져올 뿐이다. ……식민지에서 통치자가 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다. 가령 천연두의 전염을 방지하는 종두(種痘) 제조의 증가는 부인할 수 없는 한국인에 대한 이익이다. 그러나 이것은 공장이 하나 신설되는 것이 곧 원주민의 복리(福利)를 그만큼 증대시키는 증거라고 생각하는 일부 식민문제 저술가들의 무비판적이고 광신적인 태도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식민지에 있어서의 공업회사 소유주의 민족적 소속에 대한 문제는 커다란 사회적 정치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註 043
고 하여 식민지기에 있어 수량적으로 나타나는 성장을 식민지 주민의 복리의 향상으로 보는 것은 무리라고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즉 그는 일제가 자랑하는 사업들을 평가함에 있어서는 그 ‘목적과 결과’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 학교·병원 등의 수적 증가에 대해서는 한국내의 그것과 일본 본국의 그것을 비교함으로써 그들의 선전이 허구임을 지적해 냈다. 요컨대 양적으로 확인되는 식민지 시기의 경제적 성장, 복리의 증진에 ‘민족적 귀속’이라는 메스를 가해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조선인들의 고통, 민족적 차별이라는 실상을 밝혀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유감스럽게도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고, 오히려 이에서 퇴보한 보수적인 시각이 서구 학계의 일각을 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저술의 하나가 The Japanese Colonial Empire, 1895~1945 이다.註 044 이 책의 편자중의 한 사람인 Mark R. Peattie는 이 책의 서문에서
경제적 가치와 혜택은 물론 일본 피식민지민의 시각에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결과는 매우 혼합되어 있다. 실로 제국 판도 안에서의 일본의 경제정책의 결과는 일제(日帝) 식민사(植民史)의 어떤 측면보다도 복잡하고 이론(異論)의 여지가 많다. 논쟁은 두 집단의 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한쪽은 전체적으로 볼 때 수탈이라는 말에 합당한 일제의 제국 판도 안에서의 경제 활동-식민지역에 대한 중심부의 가혹한 요구, 일본인과 피식민지인 사이의 경제적 불평들, 일본의 정책이 조작해 낸 식민지 경제구조의 왜곡과 불균형에 집중한다. 다른 한편은 식민지에 있어 근대적 경제적 하부구조의 창설, 농업과 산업 생산의 극적 성장의 촉진, 그에 따른 식민지 원주민의 경제 상황의 개선(위생, 교육기회와 구매력의 증가)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종합적으로 볼 때 발전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註 045
결국 식민지 지배를 평가함에 있어 수탈-발전이라는 양극적인 평가가 있다는 것인데, 저자는 비교적 중립적 입장을 지키려고 노력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러한 지적이 여태까지의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연구가 그 포학성·야만성만을 강조해 왔다는 점을 비판하고, 일본의 그러한 행위의 죄질이 다른 제국주의 국가에 비교해 특히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 또 일제의 정책이 다른 제국주의 국가의 그것과는 달리 식민지에 사회간접자본을 투자했고, 보통교육을 실시했으며, 공업화를 가져 왔다는 점을 비판한 뒤에 나온 것이라서 결국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 시켜주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논의들을 촉발시킨 것은 1960년대 이후의 한국의 급속한 경제발전이다. 많은 일본인 학자들과 이들에 동조하는 서구의 학자들은 그 기초가 일제 시기에 놓여진 것이라 하여 결국 일제 식민지 지배 미화론을 거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일제 시기에 대한 평가가 현재와 직결되어 있음은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은자왕국(隱者王國)이라고 불리웠던 한국(韓國)의 쇄국주의(鎻國主義)와 전통주의(傳統主義)를 뒤 흔들어 놓고 한국민(韓國民)을 극심하게 착취했으나 반면 한국인(韓國人)들에게 근대적(近代的) 경영방식(經營方式)과 기술(技術)을 처음으로 경험케 했다. 이와같이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經濟成長)은 1963년에 와서야 시작됐지만 이같은 한국의 기적(奇蹟)은 역사적(歷史的)으로 전례(前例)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註 046
일본 통치하의 35년간은 한국 역사의 장구한 시간에 비추어 보면 짤막한 막간에 불과했으나 그런데도 이 기간중에 일어난 여러 변화는 매우 컸었다. 민족주의적인 한국인들(대다수의 한국인에 해당하는 말임)은 일본 식민 통치하에서의 경험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일본 통치하에서 많은 약탈과 착취를 당하였음은 의심할 바 없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연히 한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이라도 일본식 관료주의적 경제통제방법의 영향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보게 될 것이며, 이밖에도 눈에는 덜 뜨이지만 일본 통치하의 경험 중의 일부에는 1945년 이후의 30년간에 걸쳐 한국에서 볼 수 있었던 여러가지 진정상에 크게 영향을 준 것도 많다.註 047
본 연구의 목적은 근년에 한국이 이룩한 급속적인 경제성장의 원인을 규명하는데 있으며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일본의 식민통치는 전적으로 재난만을 안겨다 준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하겠다. ……일본의 식민통치는 한국인에게 고난을 가져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후일에 근대적 경제성장으로 진입할 수 있는 주요기반의 일부를 닦아 놓았던 것이다註 048
라고 하여 결국 일제의 식민지 통치가 한국의 경제 성장에 기여했다고 하여 일인들의 입장을 어느 정도 합리화시켜 주고 있다.
3) 일제 시기에 대한 인식의 변화
(1) 해방을 전후한 시기
일제 식민지 통치에 대한 연구는 일본인 관변학자들에 의해 식민시기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이들은 개항 이전 한국 사회가 부패·정체된 사회였음을 강조하고, 개항 이후 일본의 호의로 비로소 근대화·자본주의화 되고 있다고 하는, “총독정치의 은혜(恩惠)의 이론”을註 012 펴고 있었다. 이들에 의하면 일제 식민지기는 한국사의 급속한 자본주의화·근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시기였다. 이러한 일인 학자들의 입장은 경성제대 법문학부에서 출간한 『조선경제의 연구』(1929), 『조선사회 경제사연구』(1933), 『조선사회법제사연구』(1937), 『조선경제의 연구』(1938)라는 일련의 간행물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일본인 학자들의 입장은 당시 경성제대 교수로 있었던 영목무웅(鈴木武雄)의 『조선의 경제(朝鮮の經濟)』에 잘 정리되어 있다.
반도경제가 그 장시간의 중세적 정체(停滯), 반봉쇄적(半封鎻的) 자급자족 경제로부터 근대 자본주의 경제로 이행할 수 있었던 최초의 계기는 1876년의 소위 강화도 조약에 의해……근대 경제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된 데 있다.
……반도를 무대로 하는 일청·일로의 항쟁 격화는 반도경제에 대한 일본의 전면적 지도를 막았고, 그리하여 반도 경제는 무역을 따라서 개항 도시를 매개로 하여 점차 구래적 경제의 해체를 보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전체로서는 아직도 의연히 정체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전환을 가져온 것은 일로전쟁후의 반도에 있어 (일본)제국의 절대적 우위이며, 일본의 반도에 대한 보호정치이다. 이것은 곧 일한병합의 대업(大業)으로 되었고, 총독부의 시정(施政)으로 되었고, 이에 반도의 산업경제의 획기적 발전을 보게 되었는데……註 013
(산미증식계획(産米增植計劃)에 대해서:필자) 처음부터 일부간에 이론(異論)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대국적으로는 반도경제의 발전에 있어 매우 다행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반도경제를 급속히 구래(舊來)의 유제(遺制)로부터 해방하여 근대 경제로 변화시키는데 기여하는 것이고, 다시 산미증식계획의 내용인 토지개량사업 및 농사개량사업 실시를 위한 거액의 자금 유입은, 증식된 미곡의 왕성한 내지(內地)(일본:필자) 이출(移出)에 따른 거액의 대금 획득과 함께, 다만 당면의 산미산업 뿐만 아니라 반도 경제 전체를 자극하여 이를 활황으로 이끌어 갔던 것이다.註 014
이러한 영목무웅(鈴木武雄)의 견해에서는 일제 시기 조선 경제에 있어 자본의 민족적 성격같은 것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다만 외형적인 근대화만이 극단적으로 미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부분의 일일 학자들에 있어 공통된 입장이었다. 소조천구랑(小早川九郞)의 『조선농업발달사(朝鮮農業發達史)』(정책편)의 내용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1장:서론
제2장:농업발달의 제1기
제1절:농업발달에의 태동기(통감부~총독정치초기)
제2절:농업발달에의 전개기(1912년~1919년)
제3장:농업발달의 제2기
제1절:농업발달에의 약진기(1920년~1931년)
제2절:농업발달에의 전진기(轉進期)(1932년~1936년)
저자는 일제시기의 농업정책만을 다루고 있지만, 일제의 농업정책이 식민지 정책의 근간임을 생각하면 바로 일제 통치 전반에 대한 그의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 분명하다. 이 책은 그 자매편인 『조선농업발달사』(발달편)와 함께 합 1400면에 이르는 거질(巨帙)로서, 광범한 자료를 동원하여 이 시기 한국 경제의 근간인 농업이 급속히 발전하였음을 논증하려 하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그 성장의 몫이 어디로 귀속되었는지는 언급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속에서도 일부 양식있는 일인 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시혜적 시각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일제에 의해 이식된 한국 근대화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일제의 소작관으로서 한국의 농업에 관해 많은 논문을 발표한 구간건일(久間健一)은 ‘일한병합’을 획기로 조선 농업이 경이적으로 약진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농업에 있어 자본주의적 경제조직의 이식과정”이었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외부적 강제에 의해 매우 성급하게, 또 강권적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내부적으로는 균형을 잃어 파행적이어서, 농업기구 전반이 극히 취약하다고 하여 식민지 농정하에 근대화되어 가는 한국 농촌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註 015 그러나 그는 식민지 정책 전반에 관한 연구를 한 것은 아니었다.
식민지 전반에 관한 정리는 좀더 기다려야 했는데, 당시 일인들의 일제시기 전반에 대한 시각(視角)을 당시로서는 그래도 양심적이었다는 세천가육(細川嘉六)의 『식민사(植民史)』(1941, 저작집 제2권)를 통해 살펴보자. 그도 한국의 자본주의화가 일본의 개항에 의해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자본주의화는 기형적인 것이었다. 즉,
……봉쇄적 자연경제인 조선사회경제는 이조말기에 이르러 강화조약에 의한 부산 외 2항의 개항을 단서로, 선진 자본주의 경제, 특히 일본 경제의 진출에 의해 급속히 해체하기 시작하여 외부로부터의 자본주의 이식에 의해 기형적인 자본주의화의 과정을 밟게 되었다. 개항전 어떠한 자본주의 경제의 맹아도 갖지 못했던 조선 경제는 선진 경제와 접촉하고서야 비로소 조선 자신의 문제로서 자기 발전적 근대화의 길이 폐쇄당하고 일본 자본주의 경제의 일환(一還)으로서, 그 제약 속에서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註 016
그의 이러한 말은 다른 일본인 학자들의 입장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이후 한국사가 “일본자본주의 경제의 일환으로서, ……그 제약속에서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는 것, 즉 일본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불구적 근대화에 불과했다는 것을 암시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사상 통제가 심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저자는 이같이 우회적인 말로서 일제 시기 한국 경제의 근대화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으로 추측된다. 어쨋든 그는 강화도 조약이 “일본 자본주의하에 행해진 조선의 특이한 근대화에의 일대 전환점”이라 하고, 그 근대화는 자기 자신의 발달로서 행하여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특이한 형태를 띠지 않을 수 없었다고 지적하였다.註 017 그는 병합 이후 집필 당시까지 조선에 있어 일제의 통치를 다음과 같이 4기로 나누었다.
제1기:병합~1919년 3월 만세사건(무단통치)
제2기:만세사건~1931년 만주사변
제3기:만주사변 후~1937년 지나사변 발발
제4기:1937년~
이러한 단계구분은 1, 2년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이후의 일제 통치의 시기 구분의 원형을 이루는 것으로서 지금까지도 거의 그대로 답습되고 있는 형편이다.註 018 이러한 4단계 중 1기에 해당하는 시기에는 토지조사사업, 근대적 교통·운수기구의 건설, 금융화폐제도의 정비가 이루어진, 일본 자본의 본격적 진출을 위한 전제적 기초적 제 공작이 행해진 시기로 파악하고, 이러한 작업은 이미 보호 정치기 및 그 이전에도 행해졌다고 언급하고 있다.
다음 3·4기에는 특히 “조선 자신의 필요보다도 일본으로부터의 요청이 근저에 두어져, 따라서 조선에 있어 제 정책도 직접 일본의 근본 국책과 관련하여, 후자가 조선이 가진 조건을 통하여 실천되어, 이러한 의미에서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관계가 두드러지게 강해지고 있다”고註 019 하여 일본에 의한 한국 경제의 왜곡을 암시하였다. 앞서 살펴보았던, 일본 위주의 곡학아세적인 발언이 판치던 당시에 있어 세곡의 발언은 그나마 양식있는 것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수 의견이었고, 대부분 일인들은 시혜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같은 시각은 일제의 패망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패전 이후, 자신의 식민지 지배의 야만성·약탈성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는 속에서 이러한 시혜론을 국가 차원(國家次元)에서 다시 정립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이러한 노력이 집대성되어 나타난 것이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관한 역사적조사(日本人の海外活動に關する歷史的調査)』이다.註 020 전35권 중에서 조선에는 10책이 배정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조선총독부시정연보』식의, 일제의 업적을 늘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조선편 끝에 붙어 있는 영목무웅(鈴木武雄)의 「조선통치의 성격과 실적-반성과 반비판-(朝鮮統治の性格と實績-反省と反批判)-』이란 글이다. 이 글은 패전 후 일제의 통치에 대한 비판에 대해 그 지나친 점이나 실수에 대해서는 일면 반성하면서도, 그러한 비난을 다시 뒤집어 반격하는 내용으로 결국에는 일제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저자의 해방 전의 저술의 성향에서도 그의 입장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보다 조직적으로, 또 일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비난을 일일이 언급하면서 자신의 그러한 입장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영목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일인들의 조선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을 잘 보여준다.
일본의 조선통치의 근본 정책은 일시동인(一視同仁)이고 혹은 내선일체(內鮮一體)였다. 이는 식민정책상의 술어로서는 소위 동화정책(同化政策)이고,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였다.……말하자면 그것은 소위 「식민정책」을 부정하려고 하는 사고방식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일본은 조선을 영유하지만, 이를 소위 「식민지」로서 마치 문명인이 야만인을 지배하는 것처럼 지배하기를 원하지 않고, 아니, 문화적으로도 인종적으로도 일선인(曰鮮人)은 비상하게 가깝기 때문에 그와 같은 공식적 식민지 지배 관계를 여기에 수립하는 것과 같은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황민화운동의……실패는 소위 「선의(善意)의 악적(惡政)」을 이루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그 근저에 「조선인을 노예시한다」라고 하는 것은, 그 것과는 정반대로 말하자면 진정한 가족적 일원으로서 이것을 일본인 사회에 영입하고자 하는 동포적 애정이 흐르고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그 「선의」가 아직 민족적 의식을 보지하고 있는 조선인에게는 반드시 「선의」로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또 그 「선의」가 독선적으로 강요되었다는 점에 식민지 경영국으로서의 일본의 유치함과 미숙함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만 그 이른바 「바보스런 정직성」은 만약 일시 일본 및 일본인을 오류에 빠뜨린 바의 봉건적 군국주의에 기초한 대화민족의 독선감과 신화적 신비주의의 외피를 그로부터 벗기어 버린다면 실로 세계식민사상에 유례를 볼 수 없는, 인류로서 하등 부끄러워 할 바 아니라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즉 일본의 일시동인적 동화정책은 결코 세련된 식민정책은 아니었지만, 그 근본에 있어서는 일본의 조선통치라고 하는 틀 안에서 소위 식민지체제를 지양하고자 하는 혁신적·민주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고, 그 의미에서 세계 식민사상 하나의 특이한 형을 대표한다고 말해 좋을 것이다.註 021
그에 의하면 우리에게는 민족말살정책으로 인식되는 동화정책(황민화정책, 창씨제도)은 한국인을 같은 가족으로 일본의 품안에 받아들이고자 한 애정에 넘친, 진보적 조치였다. 우리에게 가장 극악한 민족말살정책이 그에겐 가장 진보적인 식민정책이 된다. 그들이 저지른 실수는 다만 식민지 경영상의 ‘유치함과 미숙함’이며, 따라서 동화정책은 ‘선의의 악정’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시동인정책은 경제면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산업정책은 근본에 있어 일본을 위한 정책이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은 미곡단종경작형 산업구조의 확립과 그 폐기 및 전쟁에의 강력한 동원에서 보이는 것이지만, 그렇지만 반드시 일본 자본의 착취적 식민정책에 시종하여, 조선 자체를 위한 산업발전 정책이 완전히 살펴지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전체를 통해 조선의 산업정책이 일본의 통치 아래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 발전을 이루어, 산업적으로는 눈에 띄게 후진성을 특징으로 하는 아시아에 있어 어쨌든 일본 내지에 이어 선진성을 자랑할 수 있는 경제권에까지 약진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겨우 30수년에 있어 이 정도의 산업적 발전을 이루어, 그 산업구조에 있어 내지의 그것을 소형으로 만든 것과 같은, 어느 정도의 종합적 체계를 확립하기에 이른 것은 무어라 말해도 제국주의적 식민정책의 공식으로서는 간단히 처리해 버리기 어려운 사례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 억지로 그것에 유사한 사례를 찾는다면, 정도의 차이는 물론 크지만 영국의 자치령의 경제에도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 민족의 지배, 혹은 지도에 의한 경제라고 말하기 보다는 이민 경제(移民經濟)이고 차라리 말하자면 앵글로 색슨의 경제의 연장이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에는 본국 인구의 3분의 1에도 넘는 이민족의 지배, 지도에 의한 경제이다. 여기에 동화정책이라는 술어로는 반드시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는 특이한 일시동인(一視同仁) 정책의 경제면이 보이는 것이 아닐까?註 022
즉 일제의 정책이 일본을 위한 것이지만, 조선의 경제가 아시아 지역에서는 가장 앞선 것이고, 영국의 자치령 식민지와는 달리, 조선인 인구의 1/3이 넘는 일본인에 의해 지도되는 경제라는 것이다. 그의 생각 속에는 한국인의 의사가 들어갈 틈바구니는 전혀 없으며, 오직 일본인의 의사와 시혜가 있을 뿐이다. 조선인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들이 시혜라면 시혜인 것이다. 패전 이후에도 그들 마음 속에는 뉘우침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억울함을 항의하고, 그들이 해외에 남기고 온 재산을 아까워 하면서 이를 되찾을 길이 없을까 궁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이것이 일본정부의, 또는 관변 지식인들의 생각이었던 듯하다.
(2) 해방 직후 및 50년대
한편 일제의 패퇴로 해방을 맞은 국내 학자들은 일제가 뿌려 놓은 이 같은 식민지 통치의 미화론을 극복해야만 했다. 해방으로 국가 건설의 임무에 직면하여 많은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일제 식민지 36년간의 정리는 반드시 거쳐 가야 할 과정이었다. 이때 이들이 의존할 수 있는 것은 일제시기 조선인들의 연구와 그리고 자신들의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조선인 연구중 들 수 있는 것이 이여성(李如星)·김세용(金世鎔)의 『숫자조선연구(數字朝鮮硏究)』(5책)이다. 이 책은 1931년~1935년간 간행되었는데, 원래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것을 정리한 것이라 한다. 제3책의 서두에서 필자들이 이 책을 저술한 목적이 무엇인지 잘 나타나 있다. 즉 그들은 책의 내용이 정비되지 못한 것에 대해 변명하면
수집(蒐集)한 조사자료(調査資料)와 숫자재료(數字材料)를 그대로 초사(抄寫)하여 보기 좋게 나열만 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뜻이 아니오 될 수 있는 한도까지는 그 숫자들의 뭇 음영들로서 어둠컴컴하게 된 그 뒷골목길을 한 걸음이라도 더 들여놓아 보고자 한 고충이 있었기 때문에 허다한 경우의 교통차단과 기타 사고를 봉착하게 되어……註 023
라고 하여 일제의 자료 독점과 비공개, 또 방해 속에서, 일제가 내세운 자신의 치적을 강조하는 통계 숫자의 허구 속에서, 그 뒤안길에서 몰락해 가고 있었던 조선인의 고통, 경제적 몰락, 일제 식민지 정책의 민족 차별성, 이에 저항하는 노동자·농민의 항쟁 등을 밝히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선학의 연구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해방 직후의 격동기에 차분한, 충실한 실증으로 뒷받침된 연구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고 따라서 이 시기의 연구 시작은 개설서를 통해서 밖에 살필 길이 없다. 이러한 사정은 상당히 뒷시기까지 지속되었음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1946년에 출간된 김성칠의 『고쳐 쓴 조선역사』(1948개정판, 조선금융 조합연합회판)에 보이는 일제시기 근대화 현상에 대한 인식은 매우 시사적이다. 여기에서는 일제 식민지 지배에 대해
조선의 쌀의 생산고(生産高)는 해마다 늘어가도 조선사람의 쌀의 소비량은 해마다 줄어들었으며, 근대문명의 혜택으로 조선의 부(富)는 늘어가도 조선 사람의 생활은 갈수록 어려워 졌다註 024
는, 지금 보아서도 일제 시기의 상황을 정확히 전한다고 할 수 있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한국사에 관한 개설서였고, 그 중점도 전근대사에 주어져 있었기 때문에, 일제 시기를 다룬 것은 전체 67항목 중 단지 66항 하나였다. 해방 1년후인 당시의 상황에서는 무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해방 후 일제 시기만을 다룬 책으로 처음 나온 것이 전석담(全錫淡)·이기수(李基洙)·김한주(金漢周)의 『일제하(日帝下)의 조선사회경제사(朝鮮社會經濟史)』(1947년, 조선금융연합회 간행)로서, 전석담이 1부 일반사, 이기수가 2부 경제사(經濟史), 김한주가 3부 농정사(農政史)를 집필하였다. 전석담의 일반사는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제3장 「식민지 조선의 제 양상」이란 제목 아래 일제 식민지 통치의 전반을 다루고 있다. 전석담이 집필한 부분은 거칠기는 하지만 대개 이 시기 일제 정책을 1910년대의 토지조사사업, 20년대 산미증식계획, 30년대 일제 독점자본의 진출로 파악하여 서술하고 있다. 경제사 부분을 서술한 이기수(李基洙)는 서론에서 일제 식민지기가 조선이 자본주의 화·근대화 된 시기라고 지적한 뒤,
조선이 식민지로 된 이후 조선경제는 일본 경제의 일부분으로만 존속하였고 독자적 입장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런 까닭에 조선경제의 어떠한 중대한 변화나 전환이 생겼을 때에는 반드시 일본제국주의의 내적 요구에 기인하는 식민지 경제정책의 변화나 전환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식민지 조선 경제의 사적(史的) 연구는 이 일본 식민지 정책을 단계적으로 밝히는 것이 그 중심이 되지 않을 수 없으며, 또 각 시기에 있어서의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밝히기 위하여서는 그때 그때의 일본제국주의의 경제적(經濟的) 및 정치적(政治的) 모순을 밝혀야 할 것이다註 025
라고 하여 조선 경제의 종속성 때문에, 그 연구에 있어서는 일제의 식민정책, 또 그것을 배태한 경제적·정치적 모순을 밝혀야 한다는 것을, 즉 일제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언명하였다. 그의 시기 구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1장 제1기=식민지 지배의 경제적 기초공작과 원시적 자본축적의 강행(1910~1918년)
제2장 제2기=상품시장 급 원료자원으로서의 역할의 강화(1919~1929년)
산미증식계획, 원료증산정책의 수행과 농민계급분화의 진전
제3장 제3기=공황과 전쟁하의 식민지 수탈(1930~1945)
이같은 시기 구분은 제3기를 제외하고는 앞의 세천가육(細川嘉六)의 그것과 동일하다. 이같은 검토 뒤 이기수(李基洙)는 일제 시기 조선사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과거 40년간의 조선경제의 변천은 일본의 힘에 의한 조선사회의 자본주의화 과정이었다. 봉건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되는 날부터 봉건적 정치체제가 제거되고 자본주의적 정치기구(그것은 식민지 통치기구였기는 하지만은)의 수립을 맞이하게 되었으며 이 자본주의적 정치기구하에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급속한 발전이 진행되었다.註 026
결국 해방 직후 일제에 대한 일반의 증오가 컸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또 차분한 연구업적을 내지는 못했지만 당시의 학자들은 일제시기에 있었던 변화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방 직후의 이러한 연구전통은 이후 일단 단절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1950년대 내내 국사 개설서에서도 일제시기는 적극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했고, 심한 경우는 독립된 장으로서 설정되지 못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1952년에 간행된 서울대학교 국사연구회 편찬의 『국사개설』은 부록을 포함해 750면에 달하는 비교적 큰 책이었지만 그 서술의 하한은 1910년 8월 29일의 ‘일한합병조약’에 끝나고 있다. 이병도는 1955년 『신수(新修) 국사대관』을 집필하고 이는 후에 『한국사 대관(韓國史大觀)』으로 개정되어 당시 대표적인 한국사 개설서였는데, 식민통치에 할당된 서술은 극히 미미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손진태의 『국사대요』(1949초판), 이인영의 『국사요론』(1956)에서도 비슷하였다.註 027
추측컨대 남북이 분단되고, 한국전쟁이후 극우 반공논리가 지배하게 되고, 여기에 더하여 친일파가 집권하게 되면서 일제시기에 대한 객관적 파악은 더욱 더 힘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더구나 일제시기 사회 성격 변화를 파악하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사회 경제사학자의 다수가 월북하게 되면서 이러한 전통의 계승은 더욱 힘들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학자들은 역사연구의 대상시기를 올려 잡고, 일제 시기는 민족 모순만이 존재하는 시기로 묘사되는 경향을 가지게 되었으리라 추측된다.
한편 이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일본인 기전위(旗田魏) 의 『조선사(朝鮮史)』(1951, 암파전서)는 한국사 전반을 다룬 입문서임에도 불구하고 일제 식민지기 전반을 비교적 차분히, 전 면모에 걸쳐 서술하고 있다. 특히 한국인에게 부족한 일본사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일제 정책의 바탕에 놓여 있었던 일본인 정책 입안자들의 고려를 아울러 언급함으로써 식민 통치에 대한 이해를 깊이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기전위(旗田魏)는 7장에서 「일본통치하의 조선」이라는 표제로 식민지기를 다루고 있다.註 028
서술 내용을 보면 먼저 무단정치(武斷政治)에 대해 “일본 내부에도 남아 있었던 무단정치가 조선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노골적으로 횡행했다. ……1919년의 3·1사건으로 조선인의 전국적 반격을 받을 때까지 노골적으로 횡행했다”고 해서 우리로 하여금 일제의 10년대 무단통치가 일본 사회가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던 군국주의적 분위기가 식민지에서는 오히려 더욱 강화되어 횡포를 부리고 있었던 사정을 전하고 있다. 또 “일한병합 이후 조선사회는 급속히 해체되고 있었다. 일본이 조선에서 행한 토지조사사업 기타 개혁 및 일본상품의 유입은 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게 하고, 또 일부를 제외하고는 구양반층을 몰락시켰다”고 하여 근대화의 진전=조선인의 몰락이라는 등식·현상을 정확히 지적하였다.
산미증식계획이 실행되는 배경에 대해서도 “무단 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전환한 시기는 한편 조선에 대한 일본의 경제적 요구가 커진 시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기간에 있어 일본 자본주의의 급격한 발전은 국내에 식량문제를 크게 일으켰다. ……여태까지와 같이 일본에 필요한 쌀을 일본으로 옮길 뿐만 아니라 일본에 필요한 쌀을 조선에서 만든다고 하는 적극적·계획적인 산미증식 계획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 결과에 대해서도 “종래 조선 경제의 자족성은 완전히 해체되고 완전히 일본 경제에 종속된 식민지 경제가 성립했다”고 하여 앞의 영목무웅(鈴木武雄)과는 전혀 반대되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3절에서는 “원래 조선은 일본의 대륙 정책의 기지로서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종래에 있어 대륙에의 루트는 경성(京城)-안동(安東)-봉천(奉天)을 통하는 안봉선(安奉線) 루트가 최대였다. 그러나 만주사변에 이어 만주국이 성립하고 일본의 대륙정책 특히 대소정책이 적극화하자……일본해·북선·만주를 묶어 북방 대륙에 진출하는 노선의 개척이 긴요해졌다. 동부 만주에 있어 철도망의 발달과 더불어 함경도에 있어 철도·항만의 건설이 급속히 진전되었다. 이른바 「북선(北鮮) 루트론(論)」이 전략적 의미를 가지고 논의되었다”고 하여 이 시기 공업화의 방향을 전해주고 있다.
기전(旗田)의 연구는 일부 용어 구사에서는 일본인 일반이 갖는 입장을 보이기도 하지만 식민지 지배는 식민모국의 국내사정에 의해 규정되며 그 사회 자체의 성격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3) 1960~1970년대
남한의 개설서에 있어 일제 시기에 관한 서술 분량이 최소한 기전위(旗田魏)의 수준을 쫓아 가는 것은 60년대에 들어와서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기백의 『국사신론』(1961, 태성출판사)이다. 여기서는 제7편 현대편에 전체의 약 10%에 해당하는 지면을 배당하고, 이중 다시 일제 식민지기에 27면을 할당하였다. 여기에서 사내정의(寺內正毅)의 통치방법을 일인 자신들이 무단정치(武斷政治)로 표현했다는 것, 문화정치가 다만 표방뿐으로, 식민정책의 근본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는 것, 산미증식계획·한국 농민의 영락·상품시장으로서의 역할·중공업의 발전이 일본의 대륙진출을 위한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는 등, 비교적 당시의 학계가 가지고 있었던 일제시기의 역사상 또는 학계의 연구 업적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60년대 한국사학계의 큰 업적 중의 하나는 진단학회에서 간행한 『한국사』(7책)일 것이다. 이 중 한책이 「현대편」인데 집필 담당자는 이선근이었다. 이 편의 서술은 동학란에서 시작하고 있는데, 편명과는 어울리지 않게 서술이 2편 3장 「일로전쟁과 왕조의 붕괴」에서 끝나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개인사정을 들어 변명하고 있으나, 학계의 인적 자원의 부족과 함께 투철한 역사의식의 부족, 또는 일제시기의 연구가 기피되고 있었던 시대적 분위기의 반영으로 보아 틀림 없을 것이다.
이같은 당시 학계의 형편에서 문정창(文定昌)의《군국일본조선강점 36년사》(상·중·하, 1965~1967)는 우리의 주목을 끌기에 족하다. 이 책은 국판으로 1,600면에 달하는 거질로서 우선 양적인 면에서 독자를 압도한다. 저자는 풍부한 자료·통계숫자를 구사하여 일제 식민지기의 각 분야를 서술하고 있다. 저자가 상권을 발행한 1965년은 바로 한·일협약이 조인되어 일본의 재침략이 우려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저자는 한·일회담이 진행되고, 이에 대한 국민의 반대여론이 뒤끓던 당시의 상황에서 민족적 사명감을 가지고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던 것 같다.註 029 시기적 분위기를 반영하여 이 책에서 제시된 일제 식민지 역사상은 철저히 ‘수탈하는 일본, 저항하는 한국인’ 그것이다. 즉 저자는 서문에서,
그러므로 국치(國恥) 36년간의 이 나라 사기(史記)는 침략자 일본이 여하히……이 나라의 자연과 인민을 삭벌(削伐)·억압(抑壓)·수탈(收奪)·유린(蹂躪)하였던 것인가를 밝히고 기록함을 그 요강으로 하여야 한다註 030
하였으며, 실제 서술에 있어서도 일제의 침탈과 이에 저항하는 조선인이라는 도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필자의 주장은 똑 같은 필자가 아직 일제 치하였던 20여년 전의 다른 책에서 일제가 1930년대에 추진한 농촌진흥운동에 대해
그 중점을 춘궁 농민의 구제에 두고, 이를 위한 방책은 혹은 고리채 자금의 융통, 혹은 가마니 기타 부업 생산의 장려, 혹은 또 사방공사(砂防工事) 토목공사의 기공 등, 각 방면에 대한 화폐의 산포에 관한 시설사업으로 나타나, 이로써 차등(此等) 세농(細農) 계급은 점차 소생(蘇生)의 단서를 얻고, 또 화폐(貨幣) 경제민화(經濟民化)하려는 정세에 있었던 것이다註 031
라고 하여, 이를 칭송하는 총독부 관리와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을 볼 때 어딘지 어색하고 과장된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므로 문정창의 이러한 서술태도는 ‘해방 후 친일파의 집권’→‘일제의 수탈과 이에 대한 전민족적 저항의 강조’라는 필자의 이해를 뒷받침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註 032
또 이 책은 (1) 비교적 많은 사료를 구사하고 있으나, 전거(典據)가 제시되지 않는 경우가 많고, (2) 서술에 있어 균형이 맞지 않으며, (3) 객관적·과학적 서술이라기 보다는 사실 나열적인 성격이 강하여 학문적 업적으로 보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
그러나 일제시기에 관한 개설서가 하나도 없는 시기에 재야에서 이만한 저작을 남긴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임은 분명하다.註 033 필자는 또 여지껏 관례로 되어 온 10년대 무단통치, 20년대 문화통치, 30년대 병참기지화 등의 단계구분을 부정하고 1910년~1936년을 한 단계로 하고, 만주사변 이후를 또 하나의 단계로 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데, 저자의 말대로 역사학자도 아니면서 상당히 일리있는 주장을 하고 있는 셈이다.
60년대 말부터는 일제 시기를 다룬 업적들이 꾸준히 나오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것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가) 한국현대사편찬위원회편:『한국현대사』 9책(1969~1972, 신구문화사)
(제4책) 암흑의 시대
(제5책) 광복을 찾아서
(제6책) 신문화 100년
(제7책) 신생활 100년
(나) 아세아문제 연구소편:『일제하의 한국연구총서』5책(1970~1971, 민중서관)
(제1책) 일제의 문화침탈사
(제2책) 일제의 경제침탈사
(제3책) 일제하의 문화운동사
(제4책) 일제하의 민족운동사
(제5책) 일제하의 민족생활사
(가)(나)의 저서는 단독 저서가 아닌, 여러 필자가 동원된 것이어서 당시의 학계의 연구수준을 반영하고 있다. 일제시기를 보는 시각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다루고 있는 주제가 다양해져, 점차 이 시기 이해의 폭이 넓어져 갔던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1970년~1978년간 국사편찬위원회에 의해 발간된 13책에 이르는 『일제 침략하 한국 36년사』는 비록 편년체의 사료집이긴 하나 이 시기의 연구를 자극하는 것이었다.
한편 70년대 일본에서는 산변건태랑(山邊健太郞)의 『일본통치하의 조선(日本統治下の朝鮮)』(암파서점, 1971)과 박경식(朴慶植)의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지배(日本帝國主義の朝鮮支配)』(2책)(1974·1975, 청목서점)이 간행되었다. 두 저서는 일본에서 간행되었음으로 해서 그 저술 동기에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즉 전자는 대다수 일본인들이 식민지 지배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 즉 그것이 ‘선의의 악정’이었다는 생각의 허구성을 공격하기 위해, 후자는 ‘일제 식민지 지배의 실상을 일본 국민에게 보다 많이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전자는
사료(史料)라 해도 공표(公表)된 것은 분식이 많이 되었기 때문에……이것을 그다지 사용하지 않고, 통치하는 측 사람이 통치자의 내부에서 보고하거나 논의한 것으로, 지금까지 비밀로 되어 있는 자료를 이용註 034
하여, 일제통치의 약탈성과 기만성을 지배자 내부의 문서를 가지고 폭로하여, 거기에 ‘선의(善意)’는 조금도 없었다는 것을 밝혔다. 식민지 정책의 전반을 다룬 것은 아니지만 한국인으로서는 알기 어려운 일인 통치자들 내부의 생각을 알려 준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박경식(朴慶植)의 저서는 일제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최초의 정리된 개괄적 서술로서, 그 전모를 파악하는데 가장 적절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구성의 대강을 보면 다음과 같이 식민지 통치정책의 전국면을 다루고 있다.
제1부 1910년대 무력지배 정책
제1장 헌병경찰에 의한 무단정치
제2장 토지약탈과 식민지적 농업
제3장 민족산업의 억압
제4장 민족문화의 말살
제2부 1920년대의 민족분열화 정책
제1장 기만적인 문화정치
제2장 산미증식계획에 의한 농민수탈
제3장 식민지적 산업수탈
제4장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탄압과 학살
제3부 1930년~1945년의 병참기지화 정책
제1장 파쇼적 침략전쟁에의 동원
제2장 민족말살의 황민화운동
제3장 전쟁경제에 따른 수탈의 강화
제4장 전시체제하의 노동자·농민
제5장 민족해방운동 탄압
저자는 이와같은 저술을 출판하는 이유는 일본은 아직도 자신의 과거에 대해 반성하지 않으며, 특히 조선의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영목무웅(鈴木武雄)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40여년에 걸친 일본에서의 생활체험을 통하여 재차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침략을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실천적 과제”을 수행하기 위하여註 035 광범한 자료를 동원하여 일제 식민지 정책이 한국역사 내지 한국민에 끼친 고통을 서술하여, 식민지 지배 미화론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이 기간동안의 근대화현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충분한 고려가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여태까지의 다른 저서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국면 국면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인정하듯이 “사료의 나열적 부분”이 상당히 많고, 또한 “지배정책의 역사적 연관성”註 036에 대한 고구가 부족하여, 통일되고 정비된 일제시기의 상을 얻기는 힘들다. 그러나 풍부한 사료의 구사, 폭넓은 고찰, 그리고 일제 시기 전반을 종합적으로 다룬 유일한 저서로서 앞으로의 이 시기 연구자의 충실한 안내자가 될 것이다.註 037
80년대는 뒤의〈표〉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일제 시기에 관한 연구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시기인데, 일제시기의 전 국면을 다루는 저서는 아직 나오고 있지 않다. 이러한 와중에서 들 수 있는 것이 김운태(金雲泰)의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의 한국통치(韓國統治)』(1986)이다. 필자는 서문에서
우리나라 역사상 이 식민지 통치기간에는 각 분야에서 실로 많은 변혁들이 발생하였는데 이들 변혁들은 그 시간적 성격으로 보아 외관상 전통질서에서 근대질서로의 이행이라는 의의를 지니고 있었고 또 비록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근대 국가적 체험 또는 근대질서의 제도화라는 사회변동의 다른 하나의 내용도 포함하는 것이다註 038
라고, 이 시기의 변화의 의의를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에 곧이어
그러나 이들 변혁들은 한국의 주체적 입장에서가 아니라 일본의 이익만을 위하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우리의 근대화 변혁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한국의 근대화의 기본 방향을 왜곡한 사이비 근대화의 후유증에 불과한 것이었다註 039
고 하여 너무나 쉽고 명쾌하게 그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근대화’의 결과가 우리에게 남겨져, 지금까지 청산 안 된 ‘유산’으로서 남겨져 있다는 사실이고, 또 구체적으로 그것이 어떻게 한국의 근대화의 방향을 왜곡했는지가 궁금한 것인데, 필자의 서술에서도 이 문제는 다루어지고 있지 않다.
이상이 한·일인들의 일제 식민지 시기에 대한 중요 업적들인데, 이제 비교적 제3자적 입장에서 이 문제를 볼 수 있는 구미인의 업적을 살펴 보기로 하자. 이때 맨 처음 들 수 있는 것이 A.J. Grajdanzev의 Modern Korea(1944)이다. 이 책은 1955년 이기백교수에 의해 소개되었고,註 040 다시 동 교수에 의해 번역되어 『한국현대사론』(1972년)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역자는 그 역서(譯序)에서, 이 책이 일제시기 연구의 한 ‘고전(古典)’이 될 것이라고 극찬하였는데,註 041 이 책은 그에 걸맞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 원서(原序)를 보면,
외관상으로 나타난 한국에 있어서의 ‘물질문명의 진보’에 쉽게 감동해버리는 사람들은, 일본의 업적에 대하여 내가 너무 비동정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한편 전시기분(戰時氣分)의 영향을 받아서 일본인을 인간 이하의 동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본의 지배 밑에서 사실상 한국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발전이 있으리라고는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註 042
라고 하여, 물질적 진보만 보고 판단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객관적으로 있었던 발전을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정당하게 지적하였다. 또 일제의 공과를 따질 때 일제가 흔히 내세우는 공업의 발전에 대해서는,
이상에서 우리는 한국의 공업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보아 왔다.……이제 남겨진 문제는 그러한 발전이 한국인의 것이냐 일본인의 것이냐 하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만일 한국에서 생산되는 비료(肥料)가 일본으로 수출되지 않고 한국내에서 한국 농민에게 매각되고, 그것이 한국 농산물의 수확량을 증가시키는데 공헌한다 하더라도, 한국에서의 일본인에 의한 화학공업의 발달이 한국인에게 유익(有益)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 벼가 한 줄기 밖에 나오지 않던 곳에서 두 줄기를 나게 할 수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수확의 증가는 일본에의 수출증가, 그리고 한국에서의 쌀 소비량의 감소를 가져올 뿐이다. ……식민지에서 통치자가 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다. 가령 천연두의 전염을 방지하는 종두(種痘) 제조의 증가는 부인할 수 없는 한국인에 대한 이익이다. 그러나 이것은 공장이 하나 신설되는 것이 곧 원주민의 복리(福利)를 그만큼 증대시키는 증거라고 생각하는 일부 식민문제 저술가들의 무비판적이고 광신적인 태도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식민지에 있어서의 공업회사 소유주의 민족적 소속에 대한 문제는 커다란 사회적 정치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註 043
고 하여 식민지기에 있어 수량적으로 나타나는 성장을 식민지 주민의 복리의 향상으로 보는 것은 무리라고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즉 그는 일제가 자랑하는 사업들을 평가함에 있어서는 그 ‘목적과 결과’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 학교·병원 등의 수적 증가에 대해서는 한국내의 그것과 일본 본국의 그것을 비교함으로써 그들의 선전이 허구임을 지적해 냈다. 요컨대 양적으로 확인되는 식민지 시기의 경제적 성장, 복리의 증진에 ‘민족적 귀속’이라는 메스를 가해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조선인들의 고통, 민족적 차별이라는 실상을 밝혀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유감스럽게도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고, 오히려 이에서 퇴보한 보수적인 시각이 서구 학계의 일각을 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저술의 하나가 The Japanese Colonial Empire, 1895~1945 이다.註 044 이 책의 편자중의 한 사람인 Mark R. Peattie는 이 책의 서문에서
경제적 가치와 혜택은 물론 일본 피식민지민의 시각에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결과는 매우 혼합되어 있다. 실로 제국 판도 안에서의 일본의 경제정책의 결과는 일제(日帝) 식민사(植民史)의 어떤 측면보다도 복잡하고 이론(異論)의 여지가 많다. 논쟁은 두 집단의 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한쪽은 전체적으로 볼 때 수탈이라는 말에 합당한 일제의 제국 판도 안에서의 경제 활동-식민지역에 대한 중심부의 가혹한 요구, 일본인과 피식민지인 사이의 경제적 불평들, 일본의 정책이 조작해 낸 식민지 경제구조의 왜곡과 불균형에 집중한다. 다른 한편은 식민지에 있어 근대적 경제적 하부구조의 창설, 농업과 산업 생산의 극적 성장의 촉진, 그에 따른 식민지 원주민의 경제 상황의 개선(위생, 교육기회와 구매력의 증가)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종합적으로 볼 때 발전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註 045
결국 식민지 지배를 평가함에 있어 수탈-발전이라는 양극적인 평가가 있다는 것인데, 저자는 비교적 중립적 입장을 지키려고 노력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러한 지적이 여태까지의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연구가 그 포학성·야만성만을 강조해 왔다는 점을 비판하고, 일본의 그러한 행위의 죄질이 다른 제국주의 국가에 비교해 특히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 또 일제의 정책이 다른 제국주의 국가의 그것과는 달리 식민지에 사회간접자본을 투자했고, 보통교육을 실시했으며, 공업화를 가져 왔다는 점을 비판한 뒤에 나온 것이라서 결국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 시켜주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논의들을 촉발시킨 것은 1960년대 이후의 한국의 급속한 경제발전이다. 많은 일본인 학자들과 이들에 동조하는 서구의 학자들은 그 기초가 일제 시기에 놓여진 것이라 하여 결국 일제 식민지 지배 미화론을 거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일제 시기에 대한 평가가 현재와 직결되어 있음은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은자왕국(隱者王國)이라고 불리웠던 한국(韓國)의 쇄국주의(鎻國主義)와 전통주의(傳統主義)를 뒤 흔들어 놓고 한국민(韓國民)을 극심하게 착취했으나 반면 한국인(韓國人)들에게 근대적(近代的) 경영방식(經營方式)과 기술(技術)을 처음으로 경험케 했다. 이와같이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經濟成長)은 1963년에 와서야 시작됐지만 이같은 한국의 기적(奇蹟)은 역사적(歷史的)으로 전례(前例)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註 046
일본 통치하의 35년간은 한국 역사의 장구한 시간에 비추어 보면 짤막한 막간에 불과했으나 그런데도 이 기간중에 일어난 여러 변화는 매우 컸었다. 민족주의적인 한국인들(대다수의 한국인에 해당하는 말임)은 일본 식민 통치하에서의 경험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일본 통치하에서 많은 약탈과 착취를 당하였음은 의심할 바 없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연히 한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이라도 일본식 관료주의적 경제통제방법의 영향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보게 될 것이며, 이밖에도 눈에는 덜 뜨이지만 일본 통치하의 경험 중의 일부에는 1945년 이후의 30년간에 걸쳐 한국에서 볼 수 있었던 여러가지 진정상에 크게 영향을 준 것도 많다.註 047
본 연구의 목적은 근년에 한국이 이룩한 급속적인 경제성장의 원인을 규명하는데 있으며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일본의 식민통치는 전적으로 재난만을 안겨다 준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하겠다. ……일본의 식민통치는 한국인에게 고난을 가져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후일에 근대적 경제성장으로 진입할 수 있는 주요기반의 일부를 닦아 놓았던 것이다註 048
라고 하여 결국 일제의 식민지 통치가 한국의 경제 성장에 기여했다고 하여 일인들의 입장을 어느 정도 합리화시켜 주고 있다.
註 012: 김용섭, 「일본·한국에 있어서의 한국사 서술 『역사학보』31, 1966, p.136.註 013: 鈴木武雄, 「朝鮮の經濟」, 『일본평론사 경제전서』13, 1941, pp.78~79.註 014: 鈴木武雄, 앞 책, p.88.註 015: 久間健一, 『朝鮮農業の近代的樣相』, 1935, 自序 참조.註 016: 細川嘉六, 『植民史』, 1941(『細川嘉六著作集』, 1982, 제2권), p.202.註 017: 細州嘉六, 앞 책, p.22.註 018: 다만 논자에 따라서는 1931년 만주사변에서 1945년 일제 패망까지를 하나로 묶기도 한다.註 019: 細川嘉六, 앞 책, pp.323~324.註 020: 이 책은 전 35책에 달하는 거질로써, 식민지였던 조선·대만은 물론 만주·사할린·관동주, 또 점령지였던 동남아시아 지역에 있어서의 일본의 정책·업적을 정리한 것이다. 1권에 실린 例言에 따르면 처음에는 대장성 관리국이 계획하였다가 조직상의 변경으로 결국 理財局에서 완성했다 한다. 이 작업은 원래 연합국에 대한 배상관계, 국가의 개인에 대한 보상문제와 관련하여 해외에 있는 일본인 財産, 즉 “일본 및 일본인의 해외 사업의 최종상태, 그 평가에 관한 기초적 조사”로서 시작되었다 한다. 작업 진행중 보다 넓은 시각에서 작업할 필요성을 느끼고, 그러한 재산을 결과한 제 정책·활동에 대한 연구에 착수하게 되었다 한다. 그 바탕에는 “적어도 이러한 것들은 侵略이라든가, 掠奪이라는 한마디 말로 치부해버릴 수 있는 거래의 결과가 아니고, 일본 및 일본인의 在外財産은 원칙적으로 多年의 정상적인 경제활동의 성과”라는 항변이 깔려 있었다. 『日本人の海外活動に關する歷史的調査』제1권 序 및 例言 참조.註 021: 鈴木武雄, 앞 책, pp.2~12.註 022: 鈴木武雄, 앞 책, pp.55~56.註 023: 李如星·金世鎔, 『數字朝鮮硏究』제3책 〈제3집을 내면서〉, 1932, p.2.註 024: 김성칠, 『고쳐 쓴 조선역사』(1948개정판, 조선금융조합연합회판), 1946, p.250.註 025: 전석담 등, 앞 책, p.63.註 026: 전석담 등, 앞 책, p.126.註 027: 1951년에 간행된 필자불명의 『한국역사개략』은 일본과 관련하여 흥미있는 서술을 하고 있다. 즉 노일전쟁 중 짐을 운반해 준 한인에게 놀랠만큼 많은 품값을 지불하여 한국인들의 태도가 차츰차츰 변했다든가, “(구)한국정치가 부패하였고 구한국 정부가 백성들을 압박하였다는 사실이 일본 통치하에 있게 되는 것이 한국 사람들에게 좋게 되리라고 많은 사람들을 믿게 하기에 쉬웠다”(54면), “그러나 일본인은 좋은 길을 닦고 현대 전기와 수도를 신설하고 질병을 막으며 학교를 세웠다”(55면)와 같은 서술이 그것이다.註 028: 旗田魏의 이 책은 일단 이전의 식민사관에 입각한 일본인 저술 한국사와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일제 시기의 서술 순서는 다음과 같다. 제1절 : 무단정치/제2절 : 3·1운동과 통치방침의 전환/제3절 : 만주사변과 조선공업의 약진/제4절 : 日華事變·태평양 전쟁과 조선의 兵站基地化/제5절 : 3·1사건 이후의 민족운동. 이에서 細川嘉六과 동일한 시기구분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註 029: 문정창, 『군국일본조선강점 36년사』상, 1965, 서문 참조.
註 030: 문정창, 『군국일본조선강점 36년사』하, 1966, p.2. 서문.註 031: 문정창, 『조선농촌단체사』, 일본평론사, 1942, p.226.註 032: 저자는 자신의 저작 상권의 서문에서 “……36년사에 관한 집필은 깨끗하고 허물없는 人士들이 할 일이요 筆者 그 사람 아님을 自認 自肅하였던 것인바”라 하여, 자신이 친일했던 것을 밝히고 있으므로, 자신의 과거를 숨기기 위해 이러한 식의 책을 저술했으리라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자신의 과거 때문에도 더욱 일제의 통치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파악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본다.註 033: 그의 저서에 인용된 자료는 요즘도 자주 재인용되고 있다.
註 034: 山邊健太郞, 『日本統治下の朝鮮』, 암파서점, 1971, 서언
.註 035: 한민족독립운동사 12 12권 한민족독립운동사연구의 회고와 전망
> 3. 일제 식민통치 연구의 현단계와 과제
> 3) 일제 시기에 대한 인식의 변화』, 1974·1975, 저자 후기.註 036: 註 35)와 같음.註 037: 박경식의 저서는 1986년 한글로 번역되어, 청아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필자도 이 번역본을 이용하였음을 밝힌다.註 038: 김운태, 『일본제국주의의 한국통치』, 박영사, 1986, 서문.註 039: 註 38)과 같음.註 040: 이기백, 서평 「현대한국」, 『역사학보』8집, 1955.註 041: “한국에 대한 일제의 식민정책을 이렇게 광범하고 요령있게, 그리고 또 이렇게 철저하고 정확하게 批判해 준 책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은 일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한국현대사 연구의 古典으로서 그 생명을 길이 유지해 나갈 것을 의심치 않는다.” 이기백역, 『한국현대사론』, 일조각, 1972.註 042: 앞 책,註 043: A.J. Grajdanzev저(이기백 역), 『한국현대사론』(1944, 1972년 역간), p.172.
註 044: Ramon H. Myers, Mark R. Peattie ed, The Japanese Colonial Empire, 1985~1945. 1984, Princeton University Press. 이 책은 학술 발표회의 성과를 묶은 것인데, 특기할 것은 일본인 식민정책학자 矢內原忠雄에게 헌정되어 있다는 것, 또 일제 식민지를 다루면서 한국인 학자는 한사람도 필자로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註 045: Mark R. Peattie, Introduction, The Japanese Colonial Empire, 1895~1945, 1984, pp.35~36.註 046: E.S. 메이슨, 김만제 외, 『한국경제·사회의 근대화한국개발연구원, 1981, 序言. 서언에 따르면 이 책은 “한국개발연구원과 『하바드』대학 부설 국제개발연구소(Harvard Institute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가 공동으로 추진해온 한국경제의 근대화과정에 관한 연구결과 중의 일부”이다.註 047: 앞 책, 제3장 「근대적 경제성장의 역사적 기반」, p.85.註 048: 앞 책, 같은 章, p.102.
※ 본서의 내용은 각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로,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
※ 본서의 내용은 각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로,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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