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식 칼럼] 우리 안의 기득권
등록 :2021-03-31 04:59수정 :2021-03-31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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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가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변화를 주도하고 지속하려면 보수에 비해 더 성찰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진보는 적어도 정치사회적으로 주류가 되기도 하고, 주류가 되는 순간 기득권화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주류가 된 진보가 스스로의 기득권을 자각하지 못하면 진보의 향기를 잃는다.
김기식
더미래연구소장
진보와 보수를 쉽게 한마디로 정의하면 ‘바꾸자’와 ‘지키자’로 요약할 수 있다. 그 기준은 기득권에 대한 태도다. 기득권을 깨고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진보이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것이 보수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각기 다른 것이지만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관성은 보수와 진보가 크게 다르지 않다. 양상은 다르다. 보수는 자신이 기득권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바꿀 생각과 의지, 능력이 없을 뿐이다. 문제는 진보다. 태도와 행동은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개별적인 자각과는 별개로 진보는 오랜 저항의 역사와 기억 때문에 자신 안에 생긴 기득권을 집단적으로 인지하지 못한다. 국민이 진보 역시 기득권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더구나 기존의 보수와 진보 프레임 밖에 존재하는 기득권에 대해 보수 못지않게 무감각하다.
우리 사회에서 기득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재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영원한 기득권이다. 기존의 법질서에 따라 사회를 규율하는 법원과 검찰은 태생적으로 기득권적 속성을 갖고 있다. 정치권력과 기성의 언론은 논할 필요 없이 우리 사회 대표적 기득권이다. 사회의 진보와 개혁에 대한 저항은 본질적으로 돈과 권력을 가진 자의 기득권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런 기득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모든 영역에 기득권은 존재하고, 모든 사람이 기득권자다.
언필칭 진보주의자도, 세상에서 가장 힘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도 집에 가면 가부장적 기득권을 누린다. 구조적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가부장적 문화, 성인지 감수성의 결여에서 비롯된 남성적 기득권은 우리 사회 모든 곳에, 모든 계층에 존재한다.
모든 어른은 아이들에게 기득권이고, 나이와 세대는 우리 사회 가장 큰 기득권 중 하나다. 대한민국 어느 골목길에서 싸움이 나도 빠지지 않는 한마디가 ‘너 몇살이야’다. 잘못한 어른에게 항의하고 지적하는 어린 사람은 싸가지 없는 놈이다. 정치 영역은 물론 사회 전반에 걸쳐 기성세대의 기득권은 공고하다. 능력이나 숙련도, 업무량과 무관하게 똑같은 노동에도 나이와 입사연도에 따라 급여를 더 받는 임금구조는 청년세대에겐 기성세대의 기득권이다. 심각한 청년실업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정년 연장을 요구하고, 낮은 보험료로 높은 국민연금 수급을 보장받으며 이후 재정 부담을 미래세대에 전가하는 기성세대는 기득권자다.
재벌 대기업에게 1차 하청업체는 을이지만, 그들도 2차 하청업체에겐 원청 못지않게 횡포를 부리는 갑이고 기득권이다.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는 자본에겐 을이다. 그러나 똑같은 일을 해도 정규직의 절반도 안 되는 임금을 받는 비정규직이나 그보다도 못한 하청업체 정규직 노동자에게 그들은 자신들의 저임금으로 고용과 임금이 보장되는 기득권자다. 국책연구소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했더니 프로젝트 참여와 실험에 목맨 학교 후배들을 또 다른 비정규직으로 삼아 자신들이 하던 일을 시킨다며 울분을 토하던 누군가의 하소연은 기득권과 갑을 관계가 그리 단순하고 간단치 않음을 확인시켜준다. 먹이사슬처럼 누군가의 갑은 누군가에게 을이고, 누군가의 을이 누군가에겐 갑이다.
산업 부문도 마찬가지다. 4차 산업혁명, 자율주행 시대에 택시산업은 위기다. 연착륙을 위해 정책적 보호가 필요함은 분명하다. 그러나 모빌리티 혁신기업에게 기존의 택시산업은 강력한 기득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득권을 보호해서 지속가능했던 기업이나 산업은 없다. 산업정책에서 보호해야 할 영역과 혁파해야 할 기득권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 그게 그거고, 모두가 마찬가지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도 진보가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변화를 주도하고 지속하려면 보수에 비해 더 성찰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득권에서 스스로도 자유롭지 않다는 자각, 내가 누군가에게 갑이고 기득권일 수 있다는 자기 경계와 성찰,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고 버리고 바꾸려는 자기 혁신의 노력, 이런 것들이 진보를 진보답게 한다. 그것이 국민에게 보여지고 믿음을 얻어야 국민의 지지를 받는다.
과거 기득권에 저항했던 기억, 더 큰 기득권의 존재가 이런 자각과 성찰, 자기 혁신을 가로막아 누군가에게 갑이고 기득권이 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면 진보의 희망이 없다. 역사적으로 보면 보수는 주류 기득권이고, 진보는 저항하는 비주류였다. 그러나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진보는 적어도 정치사회적으로 주류가 되기도 하고, 주류가 되는 순간 기득권화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주류가 된 진보가 스스로의 기득권을 자각하지 못하면 진보의 향기를 잃는다. 지금이 그렇다.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988908.html#csidx20637d93766d8378facd3ec212cad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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