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종교: 제한된 종교의 자유와 대우받는 민족종교 | 카테고리 없음
이재봉 2021. 4. 26. 08:52http://blog.daum.net/pbpm21/552
1998년 처음으로 북녘을 방문했을 때 평양 도착 다음날이 마침 일요일이어서 평양에서 예배를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만경대 근처 칠골교회에서였다. 김일성 주석의 어머니 강반석의 고향인 칠골에 1992년 세워진 교회로, 그가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다녔다는 하리교회 터에 지어진 예배당이다. 게다가 그의 외할아버지가 장로로 봉사하고 어머니가 집사로 일했다는 교회나 마찬가지여서, 만경대처럼 일종의 사적지로 간주되는 장소일줄 짐작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만경대 근처였는데도 운전기사가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동네 주민들도 정확한 위치를 잘 모르는 걸 보니 특별한 명소는 아닌 모양이었다.
예배 시작을 조금 앞두고 교회에 이르자 담임목사가 반갑게 맞았다. 접대실로 들어서니 예수의 초상화는 보이지 않고 북녘의 여느 건물에서처럼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초상화가 벽에 걸려 있었다. 박춘근 목사는 1988년 봉수교회가 세워졌을 때부터 부목사로 지내다가 1995년 칠골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해왔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날은 오경우 부목사가 설교할 예정이라기에 나와 함께 간 한상렬 목사에게 축도라도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하자, 이미 모든 계획이 짜여져 있어서 곤란하다며 예배 후 우리가 인사할 시간을 주겠다고 했다.
등록된 신자가 80여명이라는데 그 날 예배에 참석한 사람은 40명쯤 되었다. 대부분 중년여성에 아이라고는 네 살배기 하나 뿐. 성경과 찬송가책은 부족하지 않았지만 주보는 없었다. 성가대의 찬양 솜씨는 빼어낫고 한 여집사의 특별찬송은 인민가수의 노래를 무색하게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교회를 찾기 전부터 가장 큰 호기심을 가진 대목은 목사의 설교 내용이었다. 북녘에서 하나님과 수령은 어떤 관계일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교회에 도착하자마자 접대실에 걸린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사진을 보고 미리 짐작했지만, 목사의 설교에서도 하나님과 예수의 가르침에 덧붙여 "위대하신 수령님과 위대하신 장군님"의 교시가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수령의 교시'를 높이 받드는 것 같았고, 예수의 가르침보다는 '장군님의 교시'를 중시하는 듯 했다.
이와 관련하여, 남쪽에서는 이러한 북녘의 교회가 남쪽 사람들을 포함한 외국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용'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방문객들이 있을 때만 '가짜' 신도들을 소집하여 형식적으로 예배를 본다는 것이다. 북녘에 "종교단체는 있어도 종교는 없으며, 종교의 외양은 있어도 내실은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이와 달리, 로동당이나 정부당국이 종교를 장려하지 않고 신자가 많지는 않지만, 주일마다 정기적으로 예배를 보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가짜' 신도들이 '전시용' 교회에 소집된다는 것은 악의적 왜곡이나 터무니없는 비방이라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칠골교회에서 예배를 본 것 말고도 이보다 4년 앞서 세워진 봉수교회를 방문하여 목사들을 만나보았고, 장충성당을 찾아 신도 대표들과 환담을 갖기도 했으며, 조선종교인협의회장과 식사를 하며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묘향산 보현사, 정방산 성불사, 구월산 월정사 등을 방문하여 스님들과 얘기를 나누어 보았으며, 천도교와 대종교 관련 시설들을 둘러볼 기회도 가졌다. 그러나 북녘 사람들이 종교의 자유를 어느 정도 누릴 수 있는지, 예배나 미사 또는 법회 등이 자발적이고 정기적인 모임인지 아니면 전시용 가짜집회인지 등을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밝히며, 북녘의 발표와 남쪽이나 미국의 비판 등을 바탕으로 북녘의 종교정책과 현황 등을 소개하고자 한다.
1. 김일성의 종교에 대한 인식
북녘에서는 헌법보다 주체사상이 더 중시되고 주체사상보다 수령의 교시가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북녘의 종교정책이나 현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일성 주석의 종교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그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느 정도 '모태신앙'을 지녔다는 점은 이 책 제 2부 3장에서 충분히 소개했다. 그의 아버지 김형직은 기독교 계통의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된 항일 민족운동 조직인 [조선국민회]를 만들어 활동했으며, 외할아버지 강돈욱과 외삼촌 강진석은 평양근교 교회의 장로를 지낸데다, 어머니 강반석은 집사로 일하며 어린 김일성을 교회에 데리고 다녔다는 사실 말이다.
이런 배경을 지닌 김일성은 아버지의 주변 사람들 가운데 독립운동에 헌신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기독교와 기독교 계통의 숭실학교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그는 회고록 제 1권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가 체포된 다음날부터 "봉화리의 기독교인들은 아버지의 석방을 위해 명신학교에 모여 새벽기도를 드리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숭실학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갑오개혁 후 을사조약이 체결되기까지의 10년 남짓한 기간은 우리나라에서 내정개혁의 파도를 타고 때늦게나마 근대적인 교육제도를 세우기 위한 노력이 기울여지고 있던 때였다. 신교육의 봉화를 들고 서울에서 배재학당이요, 리화학당이요, 육영공원이요 하는 학교들이 설립되여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배워주고 있을 때 서선지방에서 미국선교사들이 전도사업의 일환으로 세운 학교가 바로 숭실중학교이다....
선교사들이 내세운 교육목적과는 관계없이 숭실중학교에서는 후날 독립운동 선상에서 큰 활약을 한 이름있는 애국인사들이 많이 배출되였다. 상해림시정부 의정원의 초대부의장을 거쳐 의장직을 력임한 바있는 손정도도 이 학교 출신이였고, 림정 말기에 국무의원으로 활동한 차리석도 이 학교 졸업생이였으며, 재능있는 애국시인 윤동주도 이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중퇴한 사람이였다. 강량욱 선생도 숭실학교의 전문반을 다닌 분이였다. 당시는 이 전문반을 숭실전문학교라고 불렀다. 숭실중학교란 숭실학교 안에 있는 중학반을 말한다. 숭실학교에서 반일독립운동자들이 많이 배출되였기 때문에 일본사람들은 이 학교를 배일사상의 책원지라고 하였다.
김일성은 아버지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직접 기독교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음으로써 기독교를 더욱 긍정적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그 자신이 감옥에 갇혔을 때는 아버지와 친분이 깊었던 손정도 목사가 7개월 동안 옥바라지를 하며 석방에 큰 힘을 쏟았고, 그 뒤에도 꾸준히 그를 친자식처럼 보살펴 주었다고 여러 차례 소개했다. 그가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했던 손정도 목사와 기독교도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하기도 했다.
손정도 목사가 길림에 와서는 례배당을 하나 꾸려놓고 독립운동을 하였다. 우리가 대중교양 장소로 널리 리용하고 있던 례배당이 바로 그 례배당이였다. 원래 손목사는 신앙심이 깊은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다. 그는 길림의 기독교신자들과 독립운동자들 속에서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신자들 속에는 손정도처럼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훌륭한 애국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기도를 드려도 조선을 위한 기도를 드리였고 '하느님'에게 하소연을 하여도 망국의 불행을 덜어달라는 하소연을 하였다. 그들의 순결한 신앙심은 항상 애국심과 련결되여 있었으며 평화롭고 화목하고 자유로운 락원을 건설하려는 그들의 념원은 시종일관 나라의 광복을 위한 애국투쟁에서 자기의 보금자리를 찾았다.
김일성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하였다. 많은 종교인들이 독립운동에 헌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천도교와 불교계 신자들의 절대 다수도 애국자들이였다"며, "천도교, 기독교, 불교를 비롯한 종교계 인사들과 애국적인 교원, 학생들의 주도하에" 3.1만세운동이 면밀하게 계획되고 추진되었다고 인정하였다. 그리고 일제치하에서 천도교와 기독교청년회가 농민들 속에 침투하여 농촌진흥사업을 추진하는 등 계몽운동을 펼쳤다고 평가했다.
뒤에서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그는 천도교와도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김일성은1926년 사망한 아버지의 유언과 아버지 친구들의 권유에 따라 만주 화전현에 있는 화성의숙에 입학했다. 그런데 화성의숙은 "민족주의자들이 독립군 간부들을 키워낼 목적으로 세운 2년제 정치군사학교"로, 아버지의 친구이자 천도교도인 최동오가 이 학교의 숙장 (교장)으로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아버지를 잃고도 별 어려움 없이 길림에서 3년 동안이나 공부할 수 있었던 이유가 손정도 목사를 비롯한 "아버지 친구들의 도움" 때문이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아버지의 주위에는 교인들이 많았고 따라서 나도 교인들과의 접촉을 많이 하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에 "기독교신자들에게서 인간적으로 도움은 많이 받았다"고 하면서도, "종교적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고 고백했다.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에 호감은 가졌지만 그렇다고 신앙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가 중학교 다닐 때부터 공산주의를 통한 항일독립운동에 몸담으면서 종교적 신앙심이 공산주의 혁명의식을 고취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친구인 최동오가 교장으로 있던 화성의숙을 반년 만에 중퇴하고 길림 육문중학으로 옮긴 것도 더 넓은 지역으로 나아가 "공산주의운동을 더 높은 단계에서 본격적으로" 전개해보기 위해서였는데, 그 무렵 "찬송가를 부르는 신도들보다도 결사전가를 부르는 투사들이 더 필요하였다"는 그의 말을 길지만 그대로 옮긴다. 기독교 모태신앙을 가지고 목사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며 기독교도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은 그가 왜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소년회에 망라된 학생들 가운데는 기독교신자들의 자녀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부모들의 종교적 영향을 어떻게나 많이 받았는지 세상에 정말 '하느님'이 있다고까지 생각하였다. 이런 학생들에게는 아무리 '하느님'이 없고 종교를 믿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해주어도 소용이 없었다.
어느 날 나는 우리의 영향을 받고 있던 조선인 소학교의 한 녀선생에게 부탁하여 종교를 믿는 학생들을 데리고 례배를 보러 가게 하였다. 그 녀선생은 나의 말대로 학생들을 데리고 례배당에 가서 온종일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시여, 배가 고픈데 우리에게 떡을 주시고 빵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드리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떡이나 빵이 차례질리는 만무하고 배만 여전히 쪼록쪼록 고팠다. 이번에는 녀선생이 학생들을 데리고 가을을 하고난 밀밭에 가서 이삭을 줏도록 하였다. 선생은 밭에 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굉장히 많은 이삭을 주어왔다. 그 이삭을 털어서 빵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학생들은 그 빵을 먹으면서 '하느님'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보다는 실지 로동을 통해서 먹을 것을 얻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단순한 사실 같지만 청소년들의 사상의식을 개조하고 낡은 인습을 청산하는 데서는 이것도 하나의 방법이였다.
우리가 청소년들이 례배보러 다니는 것을 경계하고 그들이 미신의 포로가 되지 않도록 부단히 교양한 것은 결코 종교 그 자체를 타도하자는데 있지 않았다. 청소년들이 미신에 빠지고 예수의 교리를 절대화하게 되면 혁명에 아무 쓸모도 없는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자는데 목적이 있었다. 신자라고 하여 혁명을 못한다는 법은 없지만 세계에 대한 과학적인 리해가 부족한 청소년들의 경우에는 종교가 내포하고 있는 무저항주의적인 요소들로부터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길림에 가보니 어떤 소년회원들은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도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만큼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종교적 영향력이 강하였다. 그런데 찬송가나 불러가지고서는 적의 화구 앞으로 돌진할 수 없었다. 우리에게는 찬송가를 부르는 신도들보다도 결사전가를 부르는 투사들이 더 필요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청소년들에게 혁명적인 노래들을 대대적으로 보급하였다. 찬송가를 부르면서 거리를 오가던 소년회원들이 얼마 후부터는 '소년애국가'와 '조선인 길림소년회가'를 부르며 버젓이 시가행진을 하였다.
이와 같은 생각을 품었던 김일성이 해방 이후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로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첫째, 1946년 3월부터 토지개혁을 실시하면서 일제와 지주들이 갖고 있던 땅을 공짜로 빼앗아 농민들에게 공짜로 나누어주었는데, 이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의 조직적인 저항이 있었다. 이에 김일성은 "반동적인 장로, 목사로서 땅을 안 가졌던 자가 거의 없고 놀고먹지 않은 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도 우리에게 불평을 품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둘째, 1946년 11월 북녘 전역에서 실시된 인민위원회 선거를 앞두고 선거일을 일요일로 잡은데 대해 기독교인들이 '주일선거 반대운동'을 벌였다. 그 무렵 북녘에는 약 2,000개의 교회에 30만명 안팎의 기독교신자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들의 대대적인 반대에 김일성은 기독교인들을 사대주의자나 매국노로 몰아붙이며 기독교를 거세게 비판하였다.
셋째, 한국전쟁 이후 미국에 대한 적대감이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높였을 것이다. 북녘에서 1980년대까지 야구를 '미제국주의 운동'이라며 배척했던 것처럼, 기독교를 '미제국주의 종교'로 치부했기 때문이다. 1982년 [김일성종합대학 출판사]에서 펴낸 조선력사는 "1894년 갑오농민전쟁과 부르죠아 개혁"이란 항목에서, "미국은 오래전부터 종교의 간판을 든 선교사들을 우리나라에 파견하여 각지에 례배당을 짓고 기독교와 숭미사상을 퍼뜨렸다"는 김일성의 교시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교활한 미국침략자들은 일제의 조선침략 책동을 적극 부추겨주는 한편 우리나라에 종교의 간판을 들고 기여들어 장차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준비를 음흉하게 진행하였다. 미국의 종교침략의 목적은 기독교와 숭미사상을 퍼뜨려 조선인민의 민족자주의식을 마비시키며 조선 사람들을 동정하는 듯이 가장하면서 제 놈들의 세력을 부식함으로써 장차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침략적 지반을 닦으려는데 있었다.
2. 종교정책과 현황: 제한된 종교의 자유
북녘 헌법 제 5장 '공민의 기본권리와 의무'편 제 68조는 종교의 자유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 권리는 종교건물을 짓거나 종교의식 같은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장된다.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사회 질서를 해치는데 리용할 수 없다." 물론 정부를 수립할 때부터 헌법에 신앙의 자유를 부인하는 규정은 없었다. 1948년의 헌법 제 14조에도 "모든 인민은 신앙 및 종교적인 활동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남쪽에서 폭압적인 군사독재정치를 실시할 때도 헌법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며 국민의 기본적인 자유를 보장한다고 규정해 놓았듯이, 북녘에서도 언제나 헌법에는 언론, 출판, 집회, 시위, 결사의 자유와 함께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명시해왔다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앞에 소개한 김일성의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1940년대부터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고 숙청했으며 특히 한국전쟁 이후에는 모든 교회를 완전히 폐쇄해버렸다고 한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해방 이전에는 남쪽보다 북녘에 종교 신자가 더 많았다는 보고가 있는데, 1950년 발행된 조선 중앙년감에 따르면, 1945년 해방 당시 북녘에는 천도교도 150만명, 불교도 38만명, 개신교도 20만명, 천주교도 6만명 등으로 전체 인구의 약 22%가 종교를 믿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천도교당 100개, 사찰 500개, 교회 2,000개 안팎의 종교시설이 운영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약 60년이 흐른 2000년대에는 천도교도 15,000명, 불교도 10,000명, 개신교도 13,000만명, 천주교도 3,000명 안팎으로 전체 인구의 약 0.2%가 종교를 가진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종교 신자가 전체 인구의 약 20%에서 0.2%로 크게 줄어든 셈이다. 겉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면서도 안으로는 종교를 탄압해왔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일성은 1949년 "종교는 반동적이며 비과학적인 세계관입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믿으면 계급의식이 마비되고 혁명하려는 의욕이 없어지게 됩니다. 결국 종교는 아편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고 말했다. "종교는 제국주의 문화침투와 식민지침략의 앞잡이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예수를 믿든 부처를 믿든 "종교는 일종의 미신"이라며, 투쟁과 척결의 대상으로 삼았다. 따라서 1950년대에는 각종 종교단체와 종교의식이 사라지거나 지하화하였으며, 1960년대에는 종교 자체가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이 때문에 북녘 당국은 "지구상에서 미신과 종교가 없어진 유일한 나라"라고 자랑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다 1972년 평양신학원을 세우고 성직자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또한 1972년엔 [조선 불교도연맹], 1974년엔 [조선 기독교도연맹]과 [조선 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등 종교단체들도 다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72년 남북대화가 이루어지면서 북녘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남쪽에서는 이러한 종교단체를 순수한 종교모임보다 정치적 도구에 가깝다고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
1983-84년 성경과 찬송가 책이 발행되었고, 1988년엔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이 건립되었으며 [조선 천주교인협의회]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1989년에는 김일성종합대학에 종교학과가 개설되고 [조선 종교인협의회]가 창설되었다. 198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종교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1980년대 들어 재미동포를 비롯한 해외동포 종교인들의 잦은 북녘방문이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1990년대부터는 미국을 비롯한 해외 선교단체들을 평양에 초청하는 등 서방국가 종교단체들과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시도해왔다. 그리고 식량난에 따른 구호물자 지원 등을 계기로 남쪽의 종교단체들과 빈번한 접촉을 가지면서, 그들을 평양에 초청하여 공동으로 예배나 미사 그리고 법회 등 종교의식을 갖기도 했다.
이와 아울러 종교에 대한 인식이나 정의도 변하게 되었다. 먼저 김일성 주석의 종교관이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종교에 대한 올바른 리해를 가지고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의 사업을 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종교를 믿는 사람을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나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생활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도록 만드는 반인민적인 정치이며 인민들의 자주의식을 마비시키고 저들의 지배에 순종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종교를 악용하는 반동통치배들입니다. 진보적인 종교인들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화목하게 살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나아가 국어사전에서의 정의도 크게 바뀌었다. 예를 들어, 1980년대까지 발간된 사전에서는 종교를 ".... 력사적으로는 지배계급이 인민을 속이고 억압, 착취하는 도구로 리용되었으며 근대에 와서는 제국주의자들이 뒤떨어진 나라들을 침략하는 사상적 도구로 리용되고 있다. 종교는 인민대중의 혁명의식을 마비시키고 착취와 억압에 무조건 굴종하는 무저항주의를 고취하는 아편이다"고 정의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에 출판된 사전에는 "사회적 인간의 지향과 념원을 환상적으로 반영하여 신성시하며 받들어 모시는 초자연적이고 초인간적인 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 또는 그 믿음을 설교하는 교리에 기초하고 있는 세계관"이라고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에 대해서는 "낡은 사회의 사회적 불평등과 착취를 가리우고 합리화하여 허황한 천당을 미끼로 하여 지배계급에게 순종할 것을 설교"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가, "그리스도의 교훈을 잘 지키면 천당에 간다고 설교"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교회에 대한 정의는 "종교의 탈을 쓰고 인민들을 착취하도록 반동적 사상 독소를 퍼뜨리는 거점의 하나"에서 "기독교에서 여러 가지 종교적 의식을 하고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믿도록 선전하기 위하여 지은 건물"로 바뀌었다. 불교에 대해서는 "죽어서 극락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현실세계에서의 모든 고충을 참고 견디어야 한다는 노예적인 굴종사상과 무저항주의를 설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인간을 고뇌에서 해방하며 자비심을 베푸는 것을 리념으로 하고 속세를 떠나 도를 잘 닦으면 극락세계에 이른다고 설교"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한편, 일종의 미신이라고 간주했던 종교가 부활하면서 1990년대부터 무속 또는 민간신앙도 널리 퍼지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결혼을 앞두고 궁합을 보거나 묘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는 일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1990년대 전반에는 1개의 시 또는 군에 무당이나 점쟁이가 30명 안팎이었지만 1990년대 후반에는 100여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종교의 자유가 조금씩 확대되는 터에 심각한 경제난에 따른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빚어내는 현상일 것이다. 이에 따라 북녘 당국은 무속이나 민간신앙을 미신으로 규정하며, 궁합을 보고 혼례를 치르거나 점쟁이에게 점을 보는 행위 등을 단속한다고 했다. 이사나 집수리뿐만 아니라 심지어 여행이나 출장도 '손 없는 날'에 맞춰 실시하는 '얼빠진 현상' 등도 단속대상이라고 한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러시아에서 큰 세력을 지닌 기독교 유파의 하나인 정교를 위한 조직과 사원이 만들어졌다. 2002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러시아 극동지역을 순방하면서 러시아 정교회를 방문하여 북녘에 정교사원을 건립하기로 합의한데 따라, [조선 정교위원회]가 발족되고 2003년 러시아정교회 소속 대주교의 주관 아래 정교신자를 위한 정백사원을 짓기 시작하여 2006년 완공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북녘에서의 종교활동은 점차적으로 확산되고 활발해지고 있는 듯하다. 첫째, 천도교는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내세우는 북녘에서 민족종교로 받들어지면서 신자가 약 15,000명으로 가장 많다. 남쪽에서는 약 100만명의 신도를 갖고도 이른바 '소수종교'에 속하지만, 북녘에서는 '최대종교'인 셈이다. 또한 1946년 천도교도들이 조직한 [천도교청우당]이라는 정당까지 두고 있어서, 천도교도들 가운데 2004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남쪽의 국회의원)으로 뽑힌 사람이 20여명이고 지방주권기관 대의원 (남쪽의 지방의원)으로 선출된 사람이 300여명이다. 다른 종교에 비해 활동이 다양하고 활발한 배경이다. 평양에 중앙교당이 있고 전국적으로 약 800개의 전교실이 있으며, 매주 일요일 '시일례식'을 진행한다고 한다.
둘째, 개신교에서는 1972년 세워진 평양신학원에서 지속적으로 양성되는 성직자들 가운데 40여명의 목사와 150여명의 전도사가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평양에 있는 두 개의 교회와 전국 각 지역에 있는 500-600개의 "허가받은 가정교회"를 통해 약 13,000명의 신도들이 예배를 보고 있다고 한다. '가정교회' 또는 '지하교회'에 대해 남쪽이나 미국에서는 종교탄압의 사례로 꼽지만, 나는 반대로 해석하고 싶다. 북녘처럼 폐쇄적이고 통제가 심한 사회에서 '가정교회'나 '지하교회'가 500-600개나 된다는 것은 종교의 자유가 제한적으로나마 보장되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지난날처럼 종교가 탄압을 받으며 종교활동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1-2곳도 아니고 그렇게 많은 곳에서 가정예배를 볼 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셋째, 불교와 관련해서는 전국 60여개의 절에서 300여명의 승려가 활동하는데 신도는 약 10,000명이라고 한다. 과거엔 살림을 차리고 아내와 자식을 두며 머리를 기른 대처승이 대부분이었는데 요즘은 삭발하는 승려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승려들이 출퇴근하지만, 주요사찰에서는 4-5명의 승려들이 거주하며 성직자의 역할과 사찰관리자의 역할을 겸한다고 한다.
넷째, 천주교 시설로는 평양의 장충성당이 유일하며, 개신교에서처럼 전국에 걸쳐 500개 안팎의 가정 예배처소가 있으며 신도는 약 3,000명으로 알려져 있다. 장충성당에서는 매주 일요일 100-150명의 신도들이 참석하여 신도대표 2명이 미사를 인도한다는데, 신부와 수녀가 없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이는 로마교황청과 북녘 사이에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3. 대우받는 민족종교: 천도교
앞에서 천도교가 북녘 제 1의 종교라고 소개했다. 개신교나 불교보다 더 많은 신자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는 특별한 배경이 있다. 무엇보다 김일성과 천도교의 개인적 인연일 것이다. 그의 아버지 김형직은 독립운동을 하다 1926년 죽음을 앞두고 친구들에게 아들을 잘 돌봐달라는 부탁의 편지를 보냈고, 가족에게도 그를 중학교까지 보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따라 김형직의 장례식에 모인 동지들은 아들 성주 (김일성)에게 화성의숙으로 진학하라고 권고하였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화성의숙은 1925년 1월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에서 독립군간부들을 키워낼 목적으로 세운 2년제 군사정치학교였는데, 교장이 김형직의 친구인 천도교도 최동오였다.
김일성은 화성의숙에서 무료로 공부할 수 있고, 정치교육과 함께 군사교육을 동시에 받을 수 있으며, 그곳에 끌끌한 청년들이 많다는 등의 이유로 화성의숙에 가기로 결심하였다. "학비를 댈 힘이 없으면서도 상급학교에 갈 희망과 아버지의 뜻을 이어 조국광복의 길에 나서려는 포부를 동시에 품고 있는 나로서는 그보다 더 리상적인 교육환경과 조건을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회고록 제 1권에서 화성의숙에 입학한 첫날 최동오와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키가 자그마하고 이마가 훌렁 벗어진 중년의 인상 좋은 숙장이 자기 방에서 나를 맞아주었다. 그가 의산 최동오 선생이였다. 의산 선생은 33인으로 불리우는 3.1인민봉기 주도자의 한사람인 천도교 3세교주 손병희의 제자였다. 손병희가 설립한 강습소를 나온 후 고향 의주에 내려와 서당을 세우고 천도교인 자녀들을 공부시키는 것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한 사람이였다. 3.1운동에도 참가하였고 그 후에는 중국에 망명하여 천도교종리원을 세우고 망명동포들 속에서 애국적인 포교활동을 벌리였다. 숙장은 우리 아버지의 장례식에 가보지 못한 것이 일생의 한이 될 것 같다고 하면서 못내 가슴아파하였다. 숙장은 총관과 한참동안 우리 아버지에 대한 회고담을 벌려놓았다. 그날 최동오 선생이 나에게 한 훈계가 아주 인상적인 것이였다.
"성주는 아주 맞춤한 때에 우리 의숙에 왔소. 독립운동은 수재들을 요구하는 새로운 시기를 맞이했거든. 홍범도나 류린석식의 주먹구구시대는 이미 지나갔단 말이요. 왜놈의 신식전법이나 신식무장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식전법과 신식무장이 필요한데 이것을 누가 해결하겠는가? 바로 성주네와 같은 새 세대가 맡아 해결해야 한단 말이요...."
숙장 선생은 그밖에도 교훈으로 삼을만한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 그는 숙식 조건이 불편하다는 것을 재삼 강조하면서 이런 곤난, 저런 곤난이 있더라도 조선독립의 장래를 내다보면서 참고 견디라고 격려해주었다. 첫 인상에도 성미가 온화하고 놀라우리만큼 언변이 류창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동오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떠돌이 생활을 하느라 자신의 아들을 고아원에 맡겨놓은 상태였지만, 친구의 아들인 김일성을 따뜻하게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최동오를 비롯한 화성의숙의 천도교인 교사들은 수업을 통해 '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천도교의 보국안민 (輔國安民) 사상을 주입시켰을 테고, 김일성은 이들을 통해 천도교를 경험하고 이해하면서 감화받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겨우 한 학기를 마친 뒤 화성의숙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의 친구들과 연고자들이 세우고 운영하는 학교였지만, 거기서 "전 세대가 남긴 사상과 방법에서의 낡은 잔재"를 발견하면서 공산주의를 통한 독립운동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선진사상에 심취되면 될수록 화성의숙의 교육으로부터 멀어져갔는데, 그는 화성의숙을 떠나면 자신을 거기에 보내준 아버지 친구들의 믿음을 저버리게 되고 아버지의 뜻도 어기게 되는 것 같아 헤어나기 힘든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아버지의 장례에 참가하려고 수백리를 달려와 자신을 위로해주고 노자를 찔러주며 화성의숙으로 보낸 아버지 친구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죄송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최동오와의 작별이 가장 괴로웠다며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최동오 숙장과의 작별은 참기 어려운 괴로움을 동반하였다. 처음에는 선생이 노여움을 타면서 한참동안 나에게 섭섭한 말을 하였다. 사내가 한번 뜻을 품었으면 그만이지 중퇴를 하다니 될 말인가, 의숙의 교육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중퇴하겠다는데 이 어수선한 세월에 만 사람의 구미를 다 맞출 수 있는 그런 학교가 어디 있는가고 하면서 막 야단을 하였다. 그러다가 나를 등지고 창가를 향해 돌아섰다. 선생은 그 창가에서 눈내리는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성주와 같은 수재들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학교라면 나도 이 의숙에서 물러가겠네."
선생이 폭탄처럼 내던지는 말에 나는 몸둘바를 모르고 함구무언으로 서있었다. 학교의 교육이 어떻다고 정면에서 운운한 내 자신의 처사가 숙장 선생을 위해서 너무 가혹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최동오 선생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 옆에 가까이 다가와 어깨 우에 조용히 손을 얹었다.
"조선을 독립시키는 주의라면 나는 민족주의건, 공산주의건 상관하지 않겠네. 아무튼 꼭 성공하게."
선생은 운동장에 나와서도 퍼그나 오랜 시간 나의 생활에 교훈으로 될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었다. 선생의 머리와 어깨 우에는 눈이 내려와 자꾸 쌓이였다. 나는 그 후 폭설 속에서 나를 바래주던 숙장선생의 모습을 회상할 때마다 그날 선생의 어깨 우에 쌓인 눈을 털어드리지 못한 실수를 두고두고 후회하였다.
그 때로부터 30년이 지나 나와 최동오 선생은 평양에서 감격적인 해후를 하였다. 나는 수상이고 선생은 [재북 평화통일 촉진협의회]의 간부였지만 그 상봉은 역시 어쩔 수 없는 스승과 제자의 상봉이였다....
"결국 그때 성주 수상이 정당했습니다!"
선생이 웃으면서 나의 아명을 부르는 바람에 나의 추억은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눈내리던 화성의숙의 운동장으로 날아갔다. 곡절 많은 정치생활의 파동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로스승은 아무런 설명도 주해도 붙어있지 않는 이 짤막한 말로 30년 전에 있었던 나와의 대화를 결속지었다.
김일성이 나중에 공산주의자가 되어 종교가 혁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종교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되면서도, "천도교야 하늘을 믿어도 조선의 하늘을 믿지 않느냐"며 천도교에 호감을 표시한 것은, 앞의 인용문에서 "조선을 독립시키는 주의라면 나는 민족주의건, 공산주의건 상관하지 않겠네"라고 격려했던 최동오의 영향 때문이 아니었을까.
앞의 인용문에서 김일성이 30년 뒤 최동오와 평양에서 감격적으로 다시 만났다고 했는데, 정확하게 따지면 30년이 아닌 22년 뒤에 두 사람은 재회하였다.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회의에서다. 최동오는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2년간 감옥살이를 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화성의숙 숙장으로 지내기도 하다가, 해방 후 좌우합작운동을 벌이면서 남북협상회의에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참석하여 김일성을 만났던 것이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50년 한국전쟁 중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들은 김규식, 안재홍, 조소앙 등과 함께 최동오를 북녘으로 모셔갔다. 남쪽에서 보자면 납북되었다는 말이다. 최동오는 북녘에서 납북인사들로 구성된 [재북 평화통일 촉진협의회]의 간부로 일하다 1963년 사망하여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1986년 그의 아들 최덕신이 북녘으로 망명하였다. 2008년 현재까지 남쪽으로 망명한 북녘 최고위 당국자 출신이 황장엽이라면, 북쪽으로 망명한 남쪽 최고위 당국자 출신은 최덕신이었다. 그는 1936년 만주에서 중국육군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장교로 복무하며 항일전에 참가했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장을 지냈다. 한국전쟁 중에는 남쪽 사단장으로 북녘 인민군과 싸웠고, 휴전회담 때는 한국군대표를 맡았으며, 군단장을 지내다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1956년부터 베트남대사, 외무부장관, 서독주재 대사로 일하다 1967년 천도교 교령 자리에 올라 한국종교협의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1976년 미국으로 건너가 살다가 몇 차례 북녘을 방문한 뒤 1986년부터 평양에 정착해버렸다. 이후 평양에서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종교인협의회 회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지내다가 1989년 사망하여 아버지 최동오가 안치되어 있는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최덕신의 아내 류미영은 상해임시정부 간부였던 천도교도 독립운동가 류동렬의 딸로서,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회 고문을 맡았다. 그리고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단군민족통일협의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 공동의장 등을 맡아오면서, 2000년 8월에는 남북 이산가족 방문단 북측 단장을 맡아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렇듯 김형직과 최동오의 동지애, 그리고 김일성과 최덕신의 만남으로 이어지는 두 집안의 특별한 인연은 북녘에서 천도교가 가장 세력이 큰 종교로 성장하게 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두 집안의 특별한 인연 말고도 최덕신이 말한 대로, 천도교가 "우리 배달민족 안에서 나온 종교" 즉 민족종교라는 점도 북녘에서 대우받는 배경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북녘에서는 천도교의 뿌리인 동학에 대해 "19세기 중엽 최제우가 만들어낸 우리나라 고유의 종교철학 사상"이라며, 여기엔 "가혹한 착취와 압박, 외래 침략자들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농민, 수공업자를 비롯한 인민들의 자주적 요구가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다"고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천도교청우당에 대해서는 "1946년 2월 8일에 '보국안민'의 애국사상과 '척양척왜'의 자주정신으로 제국주의의 침략과 예속을 반대하고 민족적 자주와 부강한 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사업에 참가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천도교를 믿는 농민들을 주로 하여 조직된 민주주의적 정당이다"고 소개하고 있다.
천도교가 북녘에서 이렇게 민족종교로 대우받고 있는 탓인지, 1990년대에도 남쪽의 천도교 최고지도자가 월북했다. 1986년 최덕신 교령에 이어 1997년 오익제 교령이 북녘행을 택한 것이다. 오익제는 남쪽에서 국방부문관과 통일광복 민족회의 의장 등을 지내다 천도교 선도사, 종무원장, 종학원장 등을 거쳐 1989년부터 천도교 교령을 맡고 있었는데, 북녘으로 넘어가서는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회 고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등의 직책을 맡고 있다. 한편으로는 종교가 남북의 화해와 교류 협력에 선구자역 역할을 해온 측면이 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분단의 상처를 드러내며 심화한 측면도 있는 셈이랄까.
이재봉, <두 눈으로 보는 북한> (평화세상, 2008), 369-3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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