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인공 식물〉이다…한국적인 것은 없다
대학지성 In & Out 기자 승인 2021.05.17 00:43 댓글 0페이스북
■ 한국적인 것은 없다: 국뽕 시대를 넘어서 | 탁석산 지음 | 열린책들 | 208쪽
저자는 이 책에서 도발적인 제안을 내놓는다. 우리 문화에 대한 국수주의적 뿌리 논쟁을 그치고 이 시대의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는 무기로서의 문화를 적극 수입·발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시대를 초월해 고정불변하게 이어져 온 〈한국적인 것〉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한국인의 가치관이나 미의식 등은 사회 변화에 따라 바뀌어 왔거나, 시대의 요청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강조한다. 오히려 한국 문화의 독자성을 찾으려는 강박이 우리 문화를 정체시키고, 썩게 만든다는 주장이다.
저자에 따르면 문화는 〈인공 식물〉이다. 의도적으로 이식하고 물을 주고, 힘을 합쳐 돌봐야 한다. 문제는 〈국적〉이 아니라 〈수준〉이다. 그는 높은 수준의 문화를 받아들여 새로운 물길을 댈 때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한 인구 감소와 과학 기술의 도전에도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한편 이 책은 한국 사회 전반에 널리 퍼진 국뽕(과도한 애국주의나 국수주의) 현상도 겨냥한다. BTS, 손흥민 등 세계 무대에서 성공한 한국인에 대해 〈한국의 우수함을 증명〉한다는 식의 과도한 의미 부여는 개인의 성취를 국가의 성취로 여기던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우리 문화의 고유성에 집착하던 〈왜소한 시대〉와 작별하고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할 때라고 강조한다.
저자의 입장은 한국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당대의 사회 속에서 그때그때 존재할 뿐, 시대를 초월해서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조선 시대와 현대 한국을 비교해 보자. 물질 조건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정신세계도 완전히 다르다. 왕조 국가 조선의 지배적 가치가 충효와 군자, 종묘사직이라면,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토대로 한 현대 한국의 가치는 개인의 행복과 자아실현이다.
실제로 이 책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한국적인 것〉이라고 여기던 것들이 대체로 인류 보편적인 것이거나,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굿으로 대표되는 샤머니즘은 〈인류가 무질서를 처리해 온 방법 중 하나일 뿐〉이며, 동북아시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다. 또한 〈무기교의 기교〉로 대표되는 한국의 자연미 역시 이미 중국 당나라에 등장한 개념이며, 이후 일본인 학자(야나기 무네요시의 공예)를 거쳐 우리의 독자성을 강조하기 위해 요청된 개념이라고 지적한다. 심지어 인생관도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오늘날 한국인의 인생관이 〈욕망 충족 이론〉(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선이다)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는 20세기 중반 자본주의 경제가 확산하면서 나타난 세계적인 현상으로 한국인도 그 대세에 합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한국만의 독자성을 확인하기 위해 〈전통 문화 속에서 한 가닥 실을 찾으려는〉 궁색한 시도는 〈왜소한 시대〉의 산물이라고 비판한다. 우리 문화에 대해 결벽성을 띠는 태도가 한국 문화의 발전에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왜소한 시대가 만들어 온 편견은 아파트에 대한 시각에도 드러난다. 이미 우리는 한옥의 구조를 재구성한 형태로 한국화된 아파트를 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한옥의 마당 역할을 하는 발코니와 다용도실, 바닥을 데우는 온돌) 여전히 아파트는 서양적인 것으로, 한옥이야말로 우리 고유의 건축으로 분리하려 생각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생각의 바탕에는 열등감(〈왜 서양의 것이 더 우월한 것으로 평가되는가? 우리의 것도 그에 못지않게 좋다〉)이 있다고 진단하다. 〈서구의 것을 훌륭히 소화해서 한국화된 아파트를 만들었다는 점을 알았다면 굳이 한옥을 내세워 반발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리의 고유성을 강박적으로 찾으려는 기원 논쟁을 이제 그치자고 강조한다. 한국 문화를 관통하는 몇 개의 공통된 〈한국적 DNA〉를 찾으려고 애쓰지 말고,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의 〈가족 유사성〉을 적용해 우리 문화를 들여다보자고 제안한다. 한 가족이 겉보기에는 모두 닮은 것 같지만 모두에게 공통된 부분이 없는 것처럼, 우리 삼국 시대, 고려, 조선 전기와 후기도 개개의 문화가 부분적으로만 겹칠 뿐 모두에게 공통된 고유한 특징은 없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가족 유사성의 관점으로 한국 문화를 들여다볼 때 오히려 한국 문화의 지평이 한층 넓어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또한 〈문화에는 국적이 없다는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수입한 물소를 교배해 지금의 한우가 되었듯, 〈어떤 문화든 들어와 백 년 정도 지나면 그 나라 문화라고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저자는 자신의 논의가 〈내가 살아왔고 살고 있는 이곳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힌다. 이 땅이 더 풍요롭고 편안해지길 원하기 때문에 하는 건설적인 조언이다. 그는 문화는 그 기원이 어디에 있든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라고 강조한다. 곧 우리 사회가 앞으로 경쟁력을 갖추려면 무기로서의 문화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문화를 〈위기에 대처하는 기술이자 무기〉로 바라본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듯 〈뮤지컬 감상이나 시 낭송의 밤〉 같은 예술 감상이 문화가 아니라, 시대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이나 학문, 가치 등이 문화다. 실제로 일본은 난학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도모했고, 조선은 건국 초기에 유교를 수입해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조선은 후기에 이르러 무기가 될 만한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망국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문화에서 중요한 것은 〈수출보다 수입〉이라고 강조한다. K팝의 세계적인 인기에서 보듯 어떤 문화가 매력이 있다면 수출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노력도, 신경 쓸 필요도 없다. 그러나 높은 수준의 문화를 수입하려면 〈피로써 피를 씻는〉 악전고투를 벌여야 한다. 과거 조선이 중국에서, 근대 한국이 미국, 유럽, 일본 등에 새로운 문물을 배우기 위해 개인적·국가적으로 온갖 노력을 기울였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다만 여기서 핵심은 〈수준〉이지 〈우리 것〉이 아니다. 물은 자연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지만, 높은 수준의 문화(미학적, 학술적, 사상적, 기술적, 가치 면에서 뛰어난 것들)는 일부러 물길을 내지 않으면 흐르지 않는다. 〈우리 것〉에 대한 고집 때문에 높은 수준의 문화를 받아들길 거부하면 한국은 〈고인 물〉 신세를 벗어날 수 없다. 문화는 애써 가꾸지 않으면 죽는 〈인공 식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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