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나눔의 집 ‘위안부’ 할머니들과 사는 한 일본인의 꿈
야지마 츠카사 나눔의 집 국제실장 “내 첫번째 꿈은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
양아라 기자 yar@vop.co.kr
발행 2019-09-01 15:12:15
29일 오후 야지마 츠카사(48) 나눔의 집 국제실장을 경기도 광주 퇴촌면 나눔의 집에서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2019.08.29ⓒ양아라 기자
"신기하죠? 일본놈이 이렇게 와서"
야지마 츠카사 씨는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웃으며 이렇게 말을 건넸다. 막힘없이 입에서 술술 나오는 한국어에 흠칫 놀랐다. 그러자 야지마 씨는 "못 알아 먹는 것도 많아요"라며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29일 오후 경기도 광주 퇴촌면 '나눔의 집'을 찾아갔다. 나눔의 집 앞에는 세상을 떠난 일본군'위안부'피해자 할머니 11명의 흉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눔의 집은 1992년에 개관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쉼터로, 현재 6명의 할머니가 생활하고 있다. 그곳에서 일본인 야지마 츠카사(48) 씨를 만났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6명과 함께 사는 일본인
"배춘희 할머니가 많이 도와주셨어요."
그의 말에 그리움이 묻어났다. 야지마 씨의 '한국어 선생님'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다. 그는 '나눔의 집'에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6명과 함께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배웠다.
그 중에서도 2014년에 별세한 배춘희 할머니는 일본어에 능통해, 그에게 각별한 선생님이었다. 야지마 씨는 "할머니들과 대화를 하다 보니 경상도, 전라도 사투리, 심지어 연변 사투리까지 섞어 쓰게 됐다"고 웃으며 말했다.
야지마 씨가 건넨 명함에는 '나눔의 집 국제실장'이라는 직함이 적혀 있었다. 그는 나눔의 집 제안으로 올해 2월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야지마 씨는 나눔의 집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을 안내하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기록하는 '사진작가'다. 할머니들의 '초상 사진'과,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담은 '일상 사진' 등을 찍고 있다.
과거 야지마 씨는 일본에서 대학교 졸업 후 자국 내 언론사에서 2~3년 간 사진기자로 일했다. 회사를 그만 둔 후엔,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활동했다.
식민 지배 역사를 배운 적 없는 평범한 일본 학생
야지마 츠카사 씨가 촬영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배춘희 할머니 사진. 고 배춘희 할머니는 지난 2014년 별세했다.ⓒ나눔의 집 제공
그에게 '위안부' 문제를 언제 처음 알게 됐냐고 물었다.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일제 시대'라는 단어도 몰랐어요."
야지마 씨는 기본적으로 일본에서는 학교, 사회, 가정에 어디에서도 과거 역사에서 일본이 어떤 잘못을 해왔는지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고 밝혔다.
그는 대학교에 들어가 한국, 대만 등 다른 아시아 유학생들을 만났다. 그들과 친구가 되면서, '일제 시대'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역사를 전공한 것이 일본의 전쟁 범죄와 식민지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한몫했다.
야지마 씨는 혼자서 방학 때마다 각 나라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일제 시대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찾아다녔다. 한국에서는 '서대문 형무소', '독립기념관'을 비롯해 일본군이 주민들을 학살했던 장소인 '제암리교회' 등에 찾아갔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으로 나오신 거예요."
한국의 광복절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야지마 씨는 일본 언론을 통해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최초로 알린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를 알게 됐다. 그는 그날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에 위치한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의 모습. 2019.08.29ⓒ양아라 기자
나눔의 집을 찾아 '위안부' 피해자와 만난 일본 남성
그는 1900년대 말까지 한국에서 일제 시대와 관련된 곳이라면 대부분 다 가봤다. 그러나 '나눔의 집'은 가보지 못했다. 그는 "일본 사람이고, 남자이기 때문에 가면 안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던 중 '나눔의 집' 방문의 기회가 찾아왔다. 야지마 씨는 2000년 8월 한일 민간교류 프로그램인 동아시아공동워크숍에참석했다. 그 워크숍 프로그램 중 하나가 나눔의 집 방문이었다.
"거리감이라고 해야 할까요? 서로가 그랬어요. 지금처럼 할머니들하고 개인적인 관계가 없었던 상태였으니까요."
그는 나눔의 집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처음으로 만나게 됐다. 그는 할머니들과의 첫 만남 때부터 할머니들의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2002년 봄과 가을 나눔의 집을 찾아, 며칠간 머물며 할머니들의 사진을 찍었다. 2003년 초~2006년까지 3년간은 나눔의 집 일본군'위안부'역사관 연구원으로 일했다.
그러다 2006년에 독일 여성과 결혼해 13년간 독일에서 거주했다. 일본, 한국, 독일을 거친 생활은 그에게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전쟁 범죄 가해국인 '일본'과 '독일'의 차이
"(전쟁범죄) 가해국(일본)에서 태어났다가, 피해국(한국)에 와서 생활하다가, 똑같은 가해국의 입장이라도 계속 역사를 청산해 온 그리고 지금도 하려는 나라(독일)에서도 살아봤어요. 그런 나라 세 곳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사실 생각할 게 많아요."
그는 독일에서 1968년도에 대학교 다니면서 학생운동을 해왔던 세대인 '68세대'를 중심으로, 나치의 역사를 청산하자는 운동이 서독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 세대가 열심히 해왔기 때문에, 독일 정부에서도 역사를 청산하려고 하고 있고, 독일 시민사회에서도 '역사를 계속 기억해야 한다',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독일 나이로 13살인 그의 딸은 학교에서 나치의 역사를 배운다. 독일에 있는 나치 수용소는 대부분 기념관으로 바뀌었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도록 국가와 지방 정부가 다 지원해준다고 한다.
"사실 나치 정권 시절에 독일 군인들도 어마어마하게 죽었어요. 그 사람들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그런 작업은 아직까지 하기 어려워요. 그건 개인적으로 각자 가정에서 하거나, 아니면 작은 지방 정부에서 하는 일이죠. 그러나 국가 사업으로서는 지금도 안 합니다."
야지마 씨는 일본 정부가 전쟁의 '가해자'로서의 역사가 아닌, '피해자'로서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원폭 피해를 입거나, 국가동원으로 군에 강제 징집된 사람들의 경험 등을 가르치며, 전쟁 때문에 자기들이 당했고 안 좋은 경험을 겪었다는 식으로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이야기라면 국가에서도 지원해준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자기들을 전쟁 '가해자' 입장으로 보는 기념관, 박물관 같은 것은 민간시설밖에 없어요. 공공시설은 없다고 보시면 돼요. 공공시설이라면 '피해자' 입장의 것밖에 없어요. 그것이 독일과 일본의 차이인 것 같아요."
"화이트리스트 배제, 일본 정부 100%의 잘못"
"정부 간 관계 나빠져도 시민사회 교류는 계속해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5일(현지 시간) 프랑스에서 열리고 있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참석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기다리고 있다. (자료 사진)ⓒ뉴시스/AP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의 생활에 대해서는 웃으며 이야기 하던 그는, 일본 아베 총리의 이야기를 묻자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국가 레벨(수준)로 볼 때, 일본 정부가 100% 잘못이 있다고 봐요. 화이트리스트 문제도 역사 문제와 관계가 있는 거 아닌가요? 일본이 과거 청산을 제대로 안 해놨어요. 그 결과가 지금 이런 문제를 만든 거예요."
야지마 씨는 지난 70년 동안 일본 정부가 '식민지 지배는 잘못됐다'는 생각을 가지고 '위안부' 피해자와 강제징용 피해자를 만나 대화해왔으면 오늘날과 같은 경제·외교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스스로 역사를 청산해왔다면 일본에서 소녀상을 전시할 수 있었어요. 소녀상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이번 사건으로) 소녀상을 받아줄 수 없는 일본 사회의 문제가 확실하게 보였어요."
그는 일본에서 평화의 소녀상 전시가 중단된 것은 표현의 자유 침해와 권력의 검열 문제도 있지만, 일본이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안 해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민주노총, 한국진보연대, 한국 YMCA, 흥사단 등 전국 680여 개 시민사회단가 모인 ‘아베규탄시민행동’이 3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소녀상 앞에서 ‘역사 왜곡, 경제 침략, 평화 위협 아베 규탄 3차 촛불 문화제’를 열고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결정을 내린 일본 아베 정권의 경제 도발을 규탄하고 있다. 2019.08.03ⓒ정의철 기자
한국 시민들은 군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일본 정부를 향해, 촛불을 들고 'NO 아베'를 외치고 있다. 일본 사람인 그에게 아베 정권 교체 가능성을 물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어려운 문제"라며 선뜻 답을 내놓지 못했다.
"(일본에서) 선거 전체 투표율이 50% 이하에요. 자민당한테 표를 주는 사람들은 전체 유권자 가운데 20~25%'밖에' 안 돼요. 나머지 유권자들은 다른 당에 투표하거나 투표 자체를 포기해버리는 거에요. 결국 유권자 20%의 의지로 자민당이 정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야지마 씨는 아베 총리의 자민당에 대해 설명했다. "자민당에 있었던 사람들 중에 2차세계 대전 끝나고도 청산된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 거예요. 예를 들자면, 아베 할아버지."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는 2차 세계대전의 책임이 있는 A급 전범이다.
야지마 씨는 집권당인 자민당에 대해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집단", "어떻게 하면 자기들의 잘못을 정당화시킬 수 있을까, 그것만 생각하면서 정치활동을 해왔던 사람들"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그는 나눔의 집에서 활동한다는 이유로 종종 인터넷우익(넷또우요쿠·ネット右翼)들의 조롱과 공격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상대하지 않고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침묵하면, 편하지 않겠냐'는 기자의 말에 야지마 씨는 "그런 거 싫어해요. 솔직한 걸 좋아합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전쟁범죄를 청산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일본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면서도, 조국에 대한 진심어린 충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야지마 씨는 "(한일 양국의) 정부 관계가 나빠져도, 시민사회에서 교류는 계속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시민사회가 서로가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교류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며 '역사를 통한 민간교류'를 강조했다.
그는 '가해자 자손'과 '피해자 자손'의 입장에서 마주하겠지만, 한일 청소년들이 역사의 현장에서 만나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미래를 함께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일본도 민주주의가 거의 다 죽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만, 일단 민주주의 사회에요. 한국도 고생하면서 민주화 시켰잖아요. 분명히 민주적인 시민사회라면 국가관계가 악화되더라도 서로 교류하는 게 가능하다고 봐요."
"세상 사람들이 할머니들과 만날 수 있는 '다리' 역할 하고 싶다"
일본군 성노예제 증언자의 또 다른 가족이 된 사진작가
29일 오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와 야지마 츠카사 나눔의 집 국제실장. 2019.08.29ⓒ양아라 기자
"사진을 보는 사람들에게 할머니를 직접 연결시켜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싶었어요."
야지마 씨는 자신이 찍은 사진 가운데 할머니의 초상이 담긴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할머니들의 각기 다른 고유한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에게 사진은 미디어(연결 매체)다. 야지마 씨는 할머니들과 할머니의 초상 사진을 보는 사람 사이의 1대 1 관계성에 주목했다.
"저에게는 할머니가 여섯 분이 있어요. 외할머니인지, 내(친) 할머니인지 모르겠지만(웃음)"
그는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자신의 또 다른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다.
야지마 씨는 "일반 사회에서 이 분들을 '피해자 할머니'라는 카테고리에 넣고 바라보는데, 저같이 할머니랑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할머니들은 각자 '개인'"이라고 말했다. 그는 할머니가 태어난 곳도, 가족구조도, 성격도, 위안소로 끌려가는 방식도, 위안소 생활도, 해방 이후의 삶도 모두 다르다고 말했다.
"'역사의 증인'인 할머니들을 어떤 식으로 우리가 기억하면 될지 제안하고 싶어요. 그것이 제가 사진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일이에요."
야지마 씨에게 꿈을 물었다.
"첫번째 제 꿈은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에요. 아베 총리는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 안 해요. 할머니들은 일본 정부가 위안부의 강제성을 제대로 인정하고, 공식 사죄하라고 요구하고 있어요."
야지마 씨의 꿈은 본인 만의 꿈이 아니었다. 생존하는 증언자이자 하늘의 계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소원이었다.
그는 "일본군 성노예 문제가 인류가 배울 수 있는 교훈(레슨·lesson)을 준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문제를 전 세계적으로 전 인류와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는 두 번째 꿈을 밝혔다.
인터뷰를 마치며, 아지마 씨는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는 '속리산' 이옥선(93) 할머니 방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그는 "이옥선 할머니가 두 분 계셔서 '속리산' 이옥선 할머니라고 불러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열린 방문으로 TV 뉴스를 보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사랑해요"라고 적힌 분홍색 티셔츠를 입은 이 할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15살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던 '어린 소녀'는 '백발의 할머니'가 됐다. 이 할머니는 당시를 떠올리며 "살아만 나와도 다행이었지"라고 말했다.
이 할머니는 "일본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좋은 사람들도 많다"며 "한일이 한마음이 되어서 관계가 좋아졌으면 좋겠다"고 거듭 말했다.
야지마 씨는 이 할머니가 매일 새벽 2~3시마다 밖으로 나가 기도를 드린다고 말했다. 할머니에게 어떤 내용의 기도를 드리시냐고 물었다.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말라고. 나처럼 고통받는 사람 없게 해달라고. 나랑 같이 사는 사람들이 건강하고 부자되게 해달라고."
양아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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