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한데 소설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 참 애매하다. 책 말미에 무려
316개에 달하는 각주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내용을 보면 모두 위안부가 이런저런 자리에서 내놓은 증언이다.
이 소설은 분량의 절반 정도를 그 각주에 의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 증언을 재구성해 당시
그들의 삶을 복원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 내용은 당연히 매우 비참하고 잔혹하
다. 인간의 바닥을 보여준다고 보면 된다.
자연히 한창 논란이 된 ‘그 책’을 떠오르게 한다. 그 책에서는 일본인과 위안부가 일정 부분 동지적 관계였음을, 그리고 위안부를 동원하는 데 있어 실제로는 조선인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고 어느 정도의 (강요된) 자발성도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비판의 초점을 제국주의와 가부장제에 둔다.
반면 ‘이 책’에서는 그런 시선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10대 소녀들이 어떻게 납치되어 어
떻게 유린당하고 어떻게 죽었는지, 그리고 해방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주목한다. ‘그 책’과 맞닿는 부분은 아주 간헐적으로만 보인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단락.
“전투를 앞두고 울던 군인도 있었다. 아버지의 군복을 훔쳐 입은 듯 몸집이 왜소하던 군인은
그녀가 누이 같았는지 그녀를 붙들고 울었다. 일본 군복만 봐도 넌더리가 났지만 그녀는 군인
을 달랬다. 울지 말라고, 꼭 살아서 돌아오라고. 전투를 나간 일본 군인들이 한 명도 살아서 돌
아오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겁에 질려 아이처럼 우는 군인이 안쓰러웠다. 그 군인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그녀는 모른다. 그 뒤로 그녀는 그 군인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8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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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했듯이 위 단락은 내가 구태여 의미를 두고 찾아서 발췌한 대목이다. 소설 전반의 논조는
다르다. 그들이 당한 온갖 (성)폭력에 집중한다. 속거나 납치당해서 위안소에 온 10대 소녀들이 매일 수십 명씩 강제로 받고, 자연히 성병에 시달리고, 임신하면 자궁을 적출당하고, 도망 치면 발목을 잘리고, 건강을 상해 죽는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걸 차마 말하지 못한 채 차별 속에서 산다.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된 이후에도 자신이 위안부였다고 쉽사리 털어놓지 못한다. 소설 <한 명>의 주
인공 또한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걸 말하지 않고 여태껏 살아온 사람으로 그려진다. ‘여기 한 명이 더 살아 있다’라고 홀로 되뇔 뿐이다. 제목은 바로 그 구절에서 가져온 것.
‘이 책’과 ‘그 책’은 같은 사건을 두고도 주목하는 지점이 다르다. 물론 두 저자가 상대의 시선
을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각자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무언가를 위해 그에 부합하는 사례를 최대한 발췌한 쪽으로 보는 게 합당하다고 본다.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나로서는 둘 다 진실을 일정 부분, 어쩌면 상당 부분 담고 있기에 각자의 가중평균 포인트가 관건이라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나의 포인트는? 굳이 밝힐 생각이 없다.
왜인지는 알아서들 상상하시라. 다만 10:0 또는 0:10은 영 별로라는 소견만 밝힌다.
P.S. 솔직히 이런 식으로 쓴 소설은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차라리 논문이나 증언록을 읽자는 입장이다. 소재가 위안부가 아니었다면 그냥 제쳤을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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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생각
위안부의 삶을 다룬 소설 같지 않은 소설 '한 명'
홍두령
2016. 9. 2.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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