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19

03셀리그 해리슨 "한반도 비핵ㆍ중립지대화가 정답이다"

"한반도 비핵ㆍ중립지대화가 정답이다"
<책 소개> 셀리그 해리슨의 '코리안 엔드게임'
셀리그 해리슨 미 언론인
2003.04.12

"한반도 비핵ㆍ중립지대화가 정답이다"

미국의 한반도문제 전문가이자 언론인 셀리그 해리슨의 노작 <코리안 엔드게임(Korean Endgame)>이 한국어로 번역, 출판됐다(도서출판 삼인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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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76세의 해리슨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코리안 엔드게임>은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워싱턴포스트 동북아 지국장으로서, 또 그 이후 워싱턴에서 연구자로서 남북한과 맺은 35년간의 인연을 총결산한 것"이라면서 "1945년 한반도 분단에 대한 미국의 역할에 대해 깊은 유감을 갖고 있는 미국인으로서" "한국전쟁을 어떻게 공식적으로 종결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나의 주장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엔드게임'이란 말은 서양장기 등에서 말들이 거의 죽어 단 몇 수만에 승부를 가릴 수 있는 최후의 단계를 지칭하는 말로서 한국전쟁 이후 50여년이 지난 지금 한반도가 새로운 위기로 치달을 것인가, 아니면 평화와 안정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가의 결정적 고비에 와 있음을 뜻한다.

'미국의 탈개입과 한반도 통일을 위한 전략'이라는 이 책의 부제에 드러나듯, 필자의 주장의 핵심은 궁극적으로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고, 한반도를 비핵ㆍ중립지대화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리슨은 비핵화ㆍ중립화한 한반도가 미국의 이해에 절대적으로 부합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로 주한미군이 존재하는 한 안보 위협을 느끼는 북한이 핵개발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으며 북한의 핵무장은 남한 및 일본의 핵개발로 확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주한미군이 철수할 경우 한반도에 힘의 공백이 생겨 중국ㆍ일본ㆍ러시아간에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지고, 최악의 경우 통일 한반도가 독자적으로 핵무장에 나서거나 중국과 군사동맹을 맺을 수 있다는 이유로 주한미군 철수에 반대하고 있는 미국내 보수세력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첫째 현재의 한국은 경제ㆍ군사적 능력과 함께 강력한 민족주의로 무장돼 있으므로 19세기말-20세기초의 조선처럼 외세에 일방적으로 휘둘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둘째, 통일 한국은 그 자체로 강국이 될 것이고 주변국들의 반응에 기초해 통일 국가의 성격과 군사력의 규모를 독자적으로 결정할 것이므로 예컨대 일본이 핵무장을 하거나 미국, 중국, 러시아가 한반도에서의 핵사용을 배제할 역내 합의를 이뤄 내지 않을 경우 독자적인 핵 억지력 개발에 착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통일 이후에도 미군이 한반도에 계속 주둔할 것으로 예상된다면 중국은 일본이 가장 우려하는 바로 그 방향, 즉 한국과 군사 동맹을 추구할 것이라는 것이다.

해리슨은 "한반도 주변 강국들은 미국과 역외 강국들이 한반도의 군사적 중립화를 존중한다면 그들 역시 이를 존중할 것"이라며, 미국이 동북아 지역의 평화화 안정을 바란다면 중ㆍ일ㆍ러 등과 함께 한반도의 비핵ㆍ중립지대화를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권고하고 있다.

해리슨은 1967년 취재차 남한을 방문함으로써 한반도와 인연을 맺었으며, 1972년에는 뉴욕타임스의 해리슨 솔즈베리와 함께 미국 언론인으로는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해리슨은 2001년 6월까지 모두 7차례 북한을 방문했으며 특히 제1차 북핵 위기가 고비에 이르렀던 지난 1994년 방북 때는 김일성 주석과의 3시간에 걸친 면담을 통해 북한의 핵동결과 미국의 외교ㆍ경제적 제재 해제를 맞바꾼다는 아이디어를 제공해 위기 돌파에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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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이홍동ㆍ강태호ㆍ류재훈ㆍ이제훈 등 한겨레신문 남북관계부 기자들이 약 1년간의 세미나 끝에 완성했다. 이 책의 내용 중 저자의 전망과 주장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는 마지막 장 <과거와 현재 - 한반도 중립화를 위한 제언>의 주요 내용을 출판사 측의 양해를 얻어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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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장 과거와 현재*****한반도 중립화를 위한 제언**

미군이 한반도에 계속 주둔해야 한다는 주장은 의심스런 가정에 근거를 두고 있다.

  • 첫째는 미국의 불개입이 힘의 공백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 둘째는 중국과 일본, 러시아가 이 힘의 공백을 치고 들어와 1895~1905년에 그랬던 것처럼 주도권 다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미국의 보호를 받지 않는 통일된 한반도는 주변국, 아마도 중국과의 군사 동맹을 추구하거나 독자적인 핵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정들은 통일된 한반도가 독자적으로 비핵화의 완충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한다. 한반도의 군사적인 중립화와 동북아시아의 비핵화를 위한 제안들은 통일 한반도의 이같은 역할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한 세기 전과 근본적으로 다른 지역적 환경이 나타나면서 많은 다양한 요소들이 이런 가능성들을 현실적인 목표로 만들고 있다.

그때와 지금의 결정적 차이는 한 세기 전 한반도는 정치적으로 민감하지도 역동성을 갖추지도 못했다는 점이다. 당시 한반도는 교육 기반이 취약한 봉건적 농촌 사회였으나 지금 남한과 북한은 보통교육 체계를 갖추고 있다. 당시 그들은 폭넓게 뿌리내린 민족주의적 의식을 발전시키지 못했고 민족국가 공동체로서 자기 정체성을 주장하지도 못했다. 1장에서 강조했던 것처럼 40년간의 야만적인 일본 식민 통치와 반세기 분단은 한국의 강력한 민족정신이 솟구치게 했고, 이는 현재의 상황에서 새롭고 잠재적인 결정 요인이 되고 있다.

민족주의는 이제 남한이나 북한 모두를 이끌어 가는 중요한 동력이 되고 있다. 정치적으로 작동 불능 상태였고 경제적으로 저개발 상태였던 한 세기 전 조선과 비교해 보면 통일된 한반도에 들어설 정권은 어떤 형태가 되든 외세의 개입에 더 이상 취약하지 않을 것이다. 분단이 끝난다면 단기적으로도 외부 세력이 메워야 할 공백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통일 한국은 그 자체로 강국이 될 것이고 주변국들의 반응에 기초해 통일 국가의 성격과 군사력의 규모를 독자적으로 결정할 것이다. 예컨대 일본이 핵무장을 하거나 미국, 중국, 러시아가 한반도에서의 핵사용을 배제할 역내 합의를 이뤄 내지 않는다면 통일 한국은 독자적인 핵 억지력 개발에 착수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자체만으로 이런 결과가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한국의 민족주의는 몇년 안에 미국의 탈개입을 이끌어 내고 이어 연방제와 완전한 통일을 이끌어 낼 만큼 강력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식민 지배가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자극제로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앞의 장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1945년 한반도 분단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감안하면 미국 또한 한국의 민족주의적 감정 표출의 대상이다. 식민 통치 기간 한민족은 일본인들이 떠난 뒤 독립 국가로서 세계 무대에 나서는 것을 꿈꿔 왔다. 그러나 그 순간이 왔을 때 미국과 러시아가 만든 정권에 발목이 잡혀 있음을 발견했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와 같이 동아시아에 이미 존재하는 힘들의 균형을 추구한다는 냉전 시기 미국의 사고방식은 초강대국의 관점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러나 이런 균형이란 분단된 한반도를 전제로 한 것이고 한국인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중략>

앞서 세 개의 장(章)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반도 주변 강국들은 미국과 역외 강국들이 한반도의 군사적 중립화를 존중한다면 그들 역시 이를 존중할 것이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일본은 한민족을 멸시한다. 그들은 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한반도에서 축출된 것에 대해 씁쓸해하는 감정을 아직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또 다시 한반도에서 패권을 장악하려 들기보다는 냉전과 그 이후 시기에 한반도에 대한 경제적ㆍ군사적 부담을 회피하려고만 했다. 일본의 생각은 한반도에서 일본을 축출했고, 냉전 시기 남한을 전초 기지로 활용해 온 미국이 당연히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에게 한국은 돈을 써야 할 곳이라기보다는 돈을 벌어야 할 곳이었다. 한국전쟁은 이문이 많이 남는 계약들을 선사한 시기적절한 기회였고, 전후 경제 복구를 가속화하였다. 나중에 미국이 남한을 몰아붙여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도록 했을 때 일본은 1965년 한일 관계 정상화 조약이 서울-도쿄 축을 구축하는 전조이길 원했던 미국의 바람을 훼방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일본은 한반도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의사가 전혀 없었고, 그저 한국과의 경제 관계를 수립하는 데 미국의 도움을 받은 것을 반겼을 뿐이다. 그 경제 관계는 비정상적으로 높은 이윤을 남기는 착취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판명되었다.

냉전 시기를 통틀어 미국은 일본한테 남한 방어에 의미 있는 역할을 맡기려고 노력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미국의 압력은 일본의 비둘기파들이 가끔 북한과 관계를 정상화하려고 하는 것을 막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반도에서 새로운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을 때 일본이 군사적 책임을 분담하겠다는 명시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데는 그저 입에 발린 양보를 얻어냈을 뿐이다.

일본은 냉전이 끝난 뒤에도 남한과 관련한 군사적 책임을 분담하라는 미국의 압력에 지속적으로 저항해 왔다. 클린턴 대통령과 하시모토 총리는 1996년 도쿄 정상회담에서 미일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을 채택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두 정상은 이 서약을 무역과 안보 쟁점에 존재하는 중대한 차이점을 봉합하는 데 활용했을 뿐이다. 일본은 이 지침과 관련한 지루한 협상 과정에서 남한과 관련해 어떠한 의미 있는 새로운 언급도 하지 않았다. 사실 방위협력지침엔 남한, 타이완을 비롯해 군사적 충돌이 있을 만한 구체적 지역과 관련한 어떤 언급도 없었다. 최대한 모호하게 계산된 수사로 그들은 "일본 주변 사태에 대응할 때 상황을 더 이상 악화시키지 않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포함한 적절한 대응"을 다짐했다. 그러면서 "'주변 사태'란 개념은 지리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적인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본은 미국이 제시한 문안 중에 미국의 협상가들에게는 특별히 중요한 두 가지 쟁점을 물타기 했다.
1] 미국은 북한 또는 중국과 전쟁이 벌어졌을 때 미 해군이 공해 상에서 벌이는 해상봉쇄에 일본이 참여한다는 것을 명시하기를 원했다. 방위협력지침의 예비 초안은 "선박 검색 및 관련 활동"을 포함한 "경제 봉쇄의 효과를 확실하게 하기 위한" 협력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집요한 주장으로 최종 초안은 "유엔 안보리의 결의에 기초를 둔" 선박 검색 협조를 요청하며, 그런 협조는 또 "해당국의 자체 판단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고 변경되었다.
2] 또 다른 모호한 문안 수정은 어뢰 제거 때 일본의 협력에 관련된 것인데, 이 또한 그런 협력이 어느 곳에서 제공되는지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교묘하게 회피했다. 그러나 1997년 6월 12일 이케다 유키히코 외상은 일본은 이 조항을 유엔이 공해 상의 군사 행동을 요청하는 결의를 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일본 영해에서의 어뢰 제거 시에만 적용하겠다고 의회에 보고했다.

미 국방부는 이 지침을 공세적으로 해석해 이 조항들은 군사적 위기 상황에서 일본 내 미군 기지와 일본군 기지 사용을 일본이 용인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재확인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조항들은 과거의 유사한 합의에 비해 좀더 구체적이고 명확해지기는 했지만, 그것은 '후방' 병참을 언급했을 뿐이고, 이에 대한 실행은 해당국 민간 정부가 승인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조건이 붙어 있었다.

서울-도쿄 군사 축의 구축이라는 목표는 냉전 기간 내내 환상이었음이 입증되었다.

<중략>

미국은 1945년의 경험에 기초를 두고 일본이 한반도와 관련해 의미 있는 군사적 협력을 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중략>

대부분의 일본 지도자들은 북한의 위협이라는 미국의 묵시록적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는 1998년 북한의 인공위성 로켓 발사에 대한 미국과 일본의 서로 다른 반응에서도 알 수 있다. 미국에게 북한의 위성 발사는 심각하고도 즉각적인 군사적 도전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많은 지도자들은 북한이 미국 및 일본과 정치적ㆍ경제적 관계 정상화 협상에서 좀더 강한 지렛대를 확보하려는 욕망에서 그렇게 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일본의 반응이 격렬했던 것은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라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한민족이 문화적으로 열등하다는 감정에 의해 좀더 복잡한 심리적 화학반응이 촉발된 탓이다. 일본이 보기에 경제적으로 파탄 상태인 북한 정권이 그런 뻔뻔한 압력 전술을 구사하는 것은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확실히 일본 국민들 사이엔 북한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김정일은 무엇을 할지 모르는 불안스러운 독재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 지도자들은 상대적으로 자신만만하다. 그들은 북한이 1998년 궤도에 올리는 데 실패한 위성보다 자신들이 훨씬 더 정교한 위성을 수없이 쏘아 올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런 위성 능력을 사정 거리 및 명중률에서 세계 최고인 미국과 비슷한 수준의 미사일 능력으로 단번에 전환시킬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들은 또한 미국이 태평양 함대의 잠수함에 압도적인 핵무기를 배치하고 있어, 주일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미일방위조약에 따라 북한의 도전에 효과적으로 응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미국의 미사일방어(MD) 체계 지지자들이 자신의 주장을 강화할 목적으로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과장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일본의 매파들은 오랫동안 꿈꿔 온 군사력 증강 프로그램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 낼 목적으로 북한에 대한 대중의 불안을 교묘하게 부채질해 왔다. 그 군사력 증강 프로그램이란 북한보다는 중국과 관련한 것이고 무엇보다 미국으로부터 군사적으로 독립하려는 것이다. 1999년 서둘러 추진된 이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이 통제하는 정찰위성의 개발인데, 그렇게 되면 일본은 중국 전역에 대해 정보 수집 활동을 펼칠 수 있게 된다.

<중략>

통일 이후에도 미군이 계속 주둔할 것으로 예상된다면 중국은 일본이 가장 우려하는 바로 그 방향, 즉 한국과 군사 동맹을 추구할 것이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한국의 독립성을 존중해 왔고 미군이 없는 통일된 한반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의 핵무장 위험에 대해 말하자면, 한국의 어떤 정권도 일본이 비핵 국가로 남아 있지 않는 한 핵 선택권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은 남한과 달리 군사 목적으로 쉽게 전용될 수 있는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을 이미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다.

<중략>

한일간 핵 군비 경쟁을 회피하는 게 가능하다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선언적인 역내 비핵화 합의를 위한 협상을 하는 것이다. 이 협상은 좀더 광범위하고 장기적이면서도 검증 장치를 갖춘 역내 비핵지대화에 대한 합의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런 선언적 합의의 하나는 3장에서 밝힌 것처럼 중국과 러시아, 미국, 일본이 한반도에 핵무기를 배치하지도 사용하지도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본이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대가로 한국과 미국, 중국, 러시아가 일본에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일본은 의심의 여지없이 비핵화를 선언하는 대신 핵확산금지조약 6항과 관련한 조처를 촉구할 것이다. 이 조약 6항에는 핵확산금지조약 가입국 가운데 핵 비보유국들이 계속 핵을 보유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대신 기존 핵 보유국들도 핵무기들을 단계적으로 철거하겠다고 약속하게 되어 있다. 일본은 1995년 핵확산금지조약 검토 회의 때 이 조항의 실행을 강하게 주장했고 역내 비핵화 합의에 합류하기 이전에 다시 이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이 높다.

일본이 이런 합의에 참여할 의지가 있고 한반도가 비핵화한다면 협상은 검증 기제를 갖춘 비핵지대 설치문제와 같은 좀더 의미 있고 복잡한 문제를 다루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런 의제들은 전 지구적인 핵 군비 통제와 타이완 문제 해결에 진전이 없다면 풀어 나가기 어려울 수 있다. 예컨대 중국은 한국과 일본에 도달할 수 있는 미사일 배치를 철거하는 대신, 역내에 배치된 미국과 러시아의 핵무기를 통제 대상에 포함시키고 타이완과 인근 중국 해안선은 비핵지대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런 주장은 미국과 러시아의 강한 저항에 부닥칠 것이다. 그러나 한-일간 핵 군비 경쟁을 회피하기 위해선 고려해 볼 가치가 있다.

역내 비핵화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하고 촉진하기 위해선 러시아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사망 직전에 한반도의 분단과 그에 따른 냉전 시기 한반도에서의 미소 대립을 피하기 위해 미소간 협력을 추구했다.

냉전이 끝난 뒤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려는 미국의 욕망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러시아도 통일 이후 미군의 한반도 주둔을 반대할 것이라는 인식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 러시아의 서로 다른 목표는 통일에 이르는 과도기 동안 주한 미군을 점진적으로 감축하도록 함으로써 접점을 찾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미국의 과제는 한반도에서 미군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어떤 다른 외부 세력도 군대를 주둔시키지 못하게 하는 게 될 것이다.

러시아는 한반도에 군대를 주둔시킬 생각이 없다. 그리고 미래에 미국, 중국, 특히 일본군의 한반도 주둔을 방지할 다자간 중립화 합의를 전제로 미군이 철수하기를 원한다. 한반도 통일에 대한 중국과 일본의 모호한 태도와 달리 러시아는 한반도 통일이 자국의 이익에 도움이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러시아 학자 겐나디 추프린(Gennady Chufrin)은 "역사적 경험을 고려하면 통일된 한반도는 우리와 가까울 것이고 이는 일본에 대한 우리의 협상력을 높여 줄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앨빈 루빈스타인(Alvin Rubinstein)은 "중국과 일본, 미국, 러시아 가운데 러시아는 한반도 통일로 입게 될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손실이 가장 적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역사적으로 한국의 일본에 대한 적대 의식과 중국에 대한 의심은 러시아와 좀더 밀도 높은 관계를 추구하도록 추동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은 주요 공업 생산국으로서 러시아의 시장과 에너지, 천연자원에서 자연스런 상호 보완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이런 계산의 합당함은 김대중 대통령이 러시아의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고무한 데서도 입증됐다. 러시아의 움직임 가운데 특히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한반도 종단철도의 연결 및 시베리아와 사할린으로부터 한반도까지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잇는 사업은 남북 모두에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고 경제적 통합에도 기여할 것이다.

러시아의 1994년 10자 회담 제안은 남과 북 어느 쪽한테서도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남북 모두 남북문제에 외세가 공모해 개입하는 듯한 조짐이 있으면 그 어떤 것도 근본적으로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과 북 모두 안보 문제를 다루는 데 외세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점은 잘 인식하고 있다. 중국은 1953년 정전협정의 서명 당사자로서 평화협정과 관련한 토론에 참여할 자격이 있으며 정전체제의 대체를 위한 제네바 4자 회담에 포함된 것도 적절했다. 러시아는 4자 회담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나 평화협정 이후까지 내다본다면, 러시아와 중국은 핵무기를 보유한 인접 국가로서 그리고 한반도에 군사적으로 개입한 역사를 지닌 나라로서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중립화하고 비핵화 하는 문제에 대해 미국과 협상할 자격이 있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한 6자 회담에 일본을 포함시키자는 제임스 베이커 전 미국 국무장관의 제안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러나 안보 문제에만 초점을 맞춰 협상이 진행된다면 이 제안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 남한과 북한 모두 재무장한 일본을 최대의 잠재적 안보 위협 세력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몇년 안에 남북 관계의 안정화를 위해 자신의 역할을 전환해 가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지금껏 내전의 한쪽 당사자만을 지지해 오던 데서 점진적이면서도 질서정연하게 좀더 균형 잡힌 역할을 하는 쪽으로 전환하기 위한 협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3장에서 자세하게 언급한 이 전환 과정의 마지막 단계는 모든 미군 전투 병력을 철수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비전투 병참 병력과 기지는 계속 유지할 수 있고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필요시 미군 전투 병력을 다시 주둔시키는 길은 열려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중국이 북한과 맺고 있는 방위조약을 폐기하고 러시아가 예전의 방위 공약을 현실화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서만 폐기될 수 있다. 미국은 이 전환기에도 한반도에 개입하지 않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남북한 사이에 성실한 중재자로서 새 역할을 모색해야 할 뿐만 아니라 중국, 러시아, 일본과 함께 좀더 폭넓은 한반도 안보 대화를 주도해야 한다.

이 대화의 핵심 목표는 재래식 병력으로 한반도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4자간의 합의와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생산 사용 배치하지 않겠다는 남북한을 포함한 6자간의 합의에 두어져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오랜 기간 주변 강국들이 진행해 온 각축을 배제해야 한반도가 통일을 향해 안정된 진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며 영속적인 평화도 실현 가능성을 갖게 될 것이다.

셀리그 해리슨 미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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