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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도와 한국 개신교의 교회 세습 잔혹사
[일본 기독교 현장에서] 세습 종교의 민낯, 우상숭배와 권력화
홍이표 (newsnjoy@newsnjoy.or.kr)
승인 2018.09.2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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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한국과 일본에서 벌어진 일
독일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교회 정문에 95개 논제를 붙였고, 이는 유럽 종교개혁 신호탄이 되었다. 따라서 세계의 모든 개신교회는 지난 2017년을 종교개혁 500주년으로 기념했다. 하지만 그 시간 한국교회의 시계는 거꾸로 가고 있었다. 세계 최대의 장로교회라 불리는 '메가 처치' 명성교회가 부자 세습이 단행했기 때문이다. 아들 목사에 대한 청빙 안건이 노회에서 통과된 날은, 얄궂게도 루터의 비텐베르크 사건을 기념한 '종교개혁 주일'을 며칠 앞둔 10월 24일이었다. 극렬한 교계의 반대에도 11월 12일 담임목사 취임은 강행되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2월 7일, 일본에서는 한 종교 단체의 세습 과정을 둘러싼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다. 도쿄 시내의 토미오카하치만궁富岡八幡宮이라는 신사에서 일어난 남매간의 비극적 살인 사건이 그것이다. 이 신사의 궁사宮司(수석신관)인 토미오카 나가코富岡長子(58)가 남동생 토미오카 시게나가富岡茂永(56)에게 80cm와 45cm의 두 일본도日本刀, 그리고 서바이벌나이프 두 개로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다. 시게나가는 범행을 도운 아내마저 죽인 뒤 곧바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시게나가 부부를 태웠던 운전사는 목숨을 건졌지만 왼쪽 손이 잘려 나갔다. 한국 교계에서 '세습'이 핫이슈가 된 바로 직후에 일본에서 접한 종교계 '세습' 관련 참극은 좀처럼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신사 세습을 둘러싼 남매의 참극 당일 속보 뉴스 장면.
도쿄 경시청은, 시게나가가 신관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1990년대부터 궁사宮司(수석신관)를 맡았지만 매일 밤 긴자의 유흥업소를 휘젓고 다니거나 카지노 등에서 사치스럽게 놀았으며, 여자관계가 복잡하다는 소문도 끊이지 않았다고 전했다. 심지어는 신사 본청에 내야 하는 '상납금'上納金(부담금)까지 횡령한 게 드러나 결국 2001년에 해임되었다. 그 후 아버지가 딸이자 시게나가의 누나인 나가코(58)에게 궁사직을 맡겼으며 2010년에 은퇴하면서는 누나를 공식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후 남매는 원수 사이가 되었고, 이러한 비극을 맞았다. 시게나가는 그동안 누나에게 "올해 안에 꼭 결판낸다. 각오해라"必ず今年中に決着をつけてやる。覚悟しておけ, "원한의 지난 세월, 지옥으로 보낸다"積年の恨み。地獄へ送る는 등의 협박 엽서와 편지를 보내 구속 기소된 적도 있었다. 며칠 전(2018.9.13.) 문제의 대형 교회 원로목사는 세습을 반대하는 교인들과 외부인들을 향해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리려 한다. 마귀가 (중략) 우리 교회를 완전히 죽이고 멸하려 한다"며 극도의 혐오감을 드러냈는데, 그 적대감의 본질은 종교 단체 사유화의 욕망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서 일본의 그것과 본질상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시게나가는 아들 히데유키富岡秀之를 국학원대학国学院大学(1920년에 일본이 신관 양성을 위해 세운 대학) 신도학과 야간부에 등록시켜 신사 세습의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아들을 신사에 직원으로 집어넣어, 아들을 통해 신사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온갖 궁리를 했다. 하지만 결국 누나는 조카(시게나가의 아들)를 해고했고, 아들만의 세습 관행도 공식적으로 폐지한다고 선언했다. 시게나가는 교권敎權에서 완전히 배제된 데 분노하여 결국 참극을 일으킨 것이다.
도쿄 시내의 대형 신사 가운데 하나인 토미오카하치만궁의 신전. 사진 제공 홍이표
이 사건이 알려진 후, 신도神道를 삶의 중요한 일부로 생각하던 일본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 하드고어적 풍경을 한국으로 가져오면 어디와 비슷할까. 이미 우리는 서울의 대표적 사찰에서 벌어진 승려들의 활극을 목도한 바 있다. 동시에 이권을 둘러싼 대형 교회 교인들 간의 몸싸움 풍경도 이젠 놀랍지 않다. 그런데 이제 저 도쿄의 끔찍한 사건을 부른 '세습' 정치가 한국교회에서도 여기저기 똬리를 튼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현재까지 부자간 혹은 변칙 등을 포함해, 세습을 단행한 한국교회는 모두 364개 달한다(<뉴스앤조이> 집계).
종교개혁 500년이 되던 해에는, 세계가 주목하던 교회와 교단이 보란 듯이 '세습'을 강행했다. 그렇다면 신사의 재산과 지배권의 '세습'을 둘러싼 갈등이 남매간의 끔찍한 살육으로 이어진 일본의 초상은, 계속 남의 이야기이기만 할까. '세습'이 일반화할수록 저러한 '형제의 난'은 한국교회 안에서도 독버섯처럼 번져 나갈지 모른다. 그럴 리 없다고 그 누가 쉬이 장담할 수 있을까.
일본 신도의 대형 신사는 한국 개신교의 대형 교회
최근(2018.8.7.)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 총회 재판국이 명성교회 아들 청빙을 허락한 서울동남노회 제73회 정기노회 결의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놓아 다시 충격을 주었다. 필자에게 흥미로웠던 현상은, 판결 직후 1938년 9월 9일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일제의 신사참배 참여를 공식 가결한 역사가 널리 회자되던 모습이다.
교회사학자인 옥성득 목사는 "세습 인정 판결로 장로교회는 80년 전 신사참배 결의보다 더 큰 죄를 범했다. 당시에는 일제의 강제로 결의했으나 오늘 재판국은 자의로 결정했기에 통합 교단 최대의 수치의 날"이라고 비판했다. 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 실행위원장 방인성 목사는, 칼럼에서 "신사참배는 일제의 힘에, 세습은 '돈의 힘'에 굴복한 것"이라며, 천황제 우상과 물신주의 우상이라는 같은 우상에 무릎 꿇은 한국교회의 자화상이라고 개탄했다. 그의 말대로 재판국의 판결 보고서가 2018년 가을 총회에서도 결의, 통과된다면 이는 80년 전 '신사참배 가결'과 같은 치욕으로 남게 됐을지 모른다. 하지만 최근 열린 예장통합 103회 총회(2018.9.12.)는 재판국에 대한 불신임을 의결하였고, 결국 세습을 향해 순항하던 명성호는 암초를 만났다.
1938년 9월 12일 자 <조선일보> 보도 사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임원들과 노회장 23명이 총회를 잠시 정회하고 평양신궁에서 참배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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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이 인구의 1% 미만에 불과한 일본에서, 한국과 같은 중대형 기독교회는 찾아볼 수 없다. 당연히 교회를 맡는 일은 가장 앞에서 곱지 않은 사회적 시선을 헤쳐 나가야 할 고난의 길이자, 극심한 가난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세습' 현상을 비판하면 대다수의 일본인 크리스천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를 못 해 고개를 갸우뚱한다.
일본에서 한국의 대형 교회와 외형적으로 유사한 종교는 다름 아닌 '신도'神道이다. 과거 국가신도에 포함되었던 '비종교'로서의 신사들은 물론, 천리교·금광교 등 종교로서 분류된 교파신도 모두가, 그 규모와 적극적인 전도 및 교인 관리 방식 등 한국 대형 교회와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신불습합'神佛習合이란 종교 전통하에서 대중 불교로서 널리 퍼져 있는 정토진종의 대형 사찰들이 지닌 유사점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들 일본 전통 종교의 '대형화' 뒤에는, 국가권력과의 은밀한 유착 관계, 지역 커뮤니티를 장악·지배하는 관계망 형성 등이 그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해방 이후 국가권력과의 밀월 관계 속에서 급성장을 거듭해 온 한국의 대형 교회들과 종교사회학적으로 비교할 만한 측면이다. 이들은 일본 사회를 지탱하는 기층 종교로서, 여전히 일본의 보수 정권들과 상호작용해 가며 일본 사회에서 한국의 '대형 교회'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일본의 교토 시내에는 기독교회로서는 가장 큰 '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 교토마루타마치교회'京都丸太町教会(1904년 창립)가 있다(빨간 원). 그 왼쪽에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는 거대한 건물이 '천리교가와라마치대교회'天理教河原町大教会다. 일본 국수주의와 천황제 권력에 영합했다면, 일본의 기독교회도 저런 대형 교회를 가질 수 있었을지 모른다. 사진 제공 홍이표
일본의 기독교계도 그러한 '대형 교회'로의 성장에 대한 유혹이 결코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삼교 회동'(1912년, 정부가 불교·기독교·교파신도를 종교계 대표로 하여 주재한 회의) 등 과거에 국가로부터 어떻게든 인정받고자 애쓴 시기가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고 국가신도와 천황 숭배 사상을 적극 수용했으며, 전쟁에 협력하였다. 그 노선을 계속 고수해 왔다면, 지금도 일본 기독교는 동네마다 '대형 교회'를 세워 놓은 120만 교세의 천리교처럼 성장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천리교는 '교회'라는 명칭을 쓴다).
과거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조선전도론'을 통해 일본의 이른바 황국적皇國的 기독교를 이식하고자 애썼던 목사, 신학자인 에비나단조海老名弾正란 인물이 있다. 전후 제2·제3의 에비나가 계속 출현하였다면 일본 기독교도 한국처럼 고속 성장과 대형화를 달성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선 그는 기독교인이 일본 신도를 존중하며 그들과 함께 협력해야 함을 적극 강조했다.
"기독교를 믿고, 신도神道를 존중해야 한다. 우리는 기독교를 믿는 일에 더욱 열심히 하듯이 신도神道를 존경하는 일 또한 열심을 다해야 한다. (중략) 기독교에 대한 신앙이나, 신도에 대한 존경이나, 모두가 요우메이 덴노用明天皇가 <니혼쇼키日本書紀>에서 말한 '천황신불법 존신도'天皇信佛法、尊神道라는 태도와 동일하다." (海老名弾正、「基督教は如何に神道を見るや(一)」 『日本基督教新聞』 、第2263号、1935年6月30日。)
에비나는 이러한 관점에 기초해, "일본 건국의 선조, 특히 천황을 제사 지내는 제묘諸廟인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를 모신 이세내궁伊勢内宮이나 (중략) 우리나라의 발전에 공이 큰 위인들을 모신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 같은 곳들은 (중략) 우리 국민이 숭경崇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신사이다"(海老名弾正、「基督教は如何に神道を見るや(四)」)라면서, 기독교인의 '신사참배' 참여를 마땅히 해야 할 국민적 의무라고 강조했다. 일본에서도 1930년대 중반부터 학교나 회사 등에서 신사참배, 마츠리 참가 등의 강요가 더욱 심하게 횡행하였다. 당시 신앙을 이유로 거부한 학생이나 여공 등이 퇴학이나 퇴사를 강요받는 등, 여러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 현상에 대해 에비나는 다음과 같이 혀를 차며 말한다.
에비나단조(왼쪽)와 그가 만년(1935)에 쓴 신도 관련 논설 '기독교는 어떻게 신도를 봐야 하나'. 사진 제공 홍이표
"이러한 유서 깊은 신사에 대해 우리 기독교 신자가 시간 날 때마다 참배하고, 경례해야 함은 당연의 일이다. 1~2년 전, 가톨릭 학교의 학생이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거절해서 문제가 됐다고 들은 바 있는데, 이것은 신사의 성질을 복잡하게 만들고, 여기에 참배의 의미를 종교상의 의미로 지극히 제한한 결과로 오해한 것이다. 최근 가톨릭 주교가 교서를 발표하여 신사참배를 장려하기로 한 것은,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海老名弾正、「基督教は如何に神道を見るや(二)」 第2264号、1935年7月7日。)
"종교가 아니라 단지 국가 의례일 뿐"이라는, 정부가 주장한 이른바 '신사비종교론'을 에비나는 적극 수용하고 내면화했으며, 당시 한국교회에도 바로 이런 사상이 그대로 주입되었다. 에비나는 당시 조합교회와 함께 한국에 나와 가장 적극적으로 포교 활동을 펼쳤던 '천리교'를 경쟁 상대이자 한국인의 '동화'同化를 위한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인식했다.
심지어 일본의 기독교는 이들 교파신도(천리교·금광교 등)에 주목하여 그들과 교류하고 배우며, 그들의 부족한 점은 기독교가 채워 주는 등, 그 접합 가능성을 모색해야 함을 강조했다.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와 황민화 정책이 강화되던 1938년경에는 천리교 신자가 500만 명에 육박(『改訂 天理教事典』, 天理教道友社, p.276.)하였으니, 에비나는 그처럼 급속한 성장으로 대형 교회를 곳곳에 세우는 천리교 등의 활동에 큰 자극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새 땅의 백성인 대만과 조선에서 신도神道는, 많은 성취를 보여 주었는데, 기자(에비나)가 누누이 말해온 것처럼, 순수한 종교로서는, 쿠로즈미교, 천리교, 금광교 같은, 교조(교파)신도가 가장 많이 촉망되는데, 그 세계적 요소의 결핍된 부분은 어쩔 수 없다." (海老名弾正、「基督教は如何に神道を見るや(二)」)
"나는 평생 동안 일본인의 독특한 종교로서 또한 종교적 신도로서 이들(교파신도)을 주목해 온지 오래다." (海老名弾正、「基督教は如何に神道を見るや(二)」)
"일본인이, 일본 땅에서 일본풍으로, 일본인을 위해서 일으킨 가장 주목해야 할 종교가 바로 교조(교파)신도이다." (海老名弾正、「基督教は如何に神道を見るや(五)」『日本基督教新聞』 第2266号、1935年8月4日。)
물론 현재의 일본 기독교계는 과거의 침략주의 및 국수주의에 대한 영합을 철저히 반성하고 회개하면서 에비나 류의 입장을 일축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일본의 기독교계는 신도·불교 등이 지배하는 일본 사회에서 험난한 가시밭길을 걷고 있는지 모른다.
에비나가 주목하였던 천리교 등은 현재도 100만 명 넘는 많은 교인을 확보하고 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신도들은, 지역 마츠리(축제) 및 유지들과의 깊은 결탁 관계를 통해 부와 권력의 언저리를 늘 배회하고 있다. 일본의 신사들, 특히 도심 안에 위치한 오래된 신사들이 호화롭게 대규모 공간을 유지하고 회원을 관리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사회적 배경 때문이다. 이런 점들이 한국 대형 교회와 일본 신도(신사)의 외견상 유사하게 보이는 공통 요인일 것이다.
매년 8월 열리는 후카가와하치만마츠리深川八幡祭り, 신사 이름을 따서 토미오카하치만구레이사이富岡八幡宮例祭라고도 부른다. 매년 30만 명 정도가 참가하는 도쿄 시내의 대표적 전통 축제이다. 이런 축제를 주관하던 대형 신사가 지난해 세습 갈등으로 유혈 참극을 일으켰다. 사진 제공 홍이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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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해방 후 한국에서 형성된 대형 교회의 존재 양태는, 일본 신도의 종교 단체들과 그 뿌리마저 같을지 모른다. 신사참배에 영합한 한국 기독교가 숭배했던 것은 '신도'라는 낯선 이방 종교라기보다는 인간이 신이 되고자 하였던 '욕망'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아라히토가미現人神으로서의 천황과 더불어, 일본 제국을 위해 싸우다 죽으면 누구나 야스쿠니신사의 신이 될 수 있다는 그릇된 망상이 그 껍데기만 바꾼 채 여전히 한국교회 안을 맴돌고 있다.
수많은 교회 지도자의 모습에서, 신과 같은 절대적 존재가 되고자 하는 그릇된 욕망의 흔적을 발견한다. 특히 한국 대형 교회는 그러한 자기 절대화라는 유혹의 덫에 심각하게 발이 걸린 것처럼 보인다. 일본 기독교는 70년 전 패전과 함께 인간이 절대적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과 철저히 관계를 끊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절대다수가 신사참배라는 우상숭배에 영합했는데도 지금껏 제대로 반성하고 회개한 적이 없다. '인간 숭배'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그 상태 그대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 고름이 최근 우후죽순처럼 터지고 있다.
신도와 신사참배 비판한 일본 기독교인들
일본의 기독교인이 모두 에비나 같지는 않았다. 우리 교회사에도 주기철 목사와 최인규 권사가 존재하듯, 일본에도 신사 숭배의 강요에 맞선 신앙인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에비나가 직접 세례를 준 그의 제자 가시와기 기엔柏木義円 목사가 있다.
가시와기 기엔 목사(왼쪽)와 그가 스승 에비나를 비판하며 발행하던 월간지 <上毛敎界月報>의 신도 관련 기사. 사진 제공 홍이표
그는 "이세伊勢의 가미가제神風를 자랑하고, 제왕신권帝王神権의 고설古説을 드높이는 (중략) 충군애국주의는 결코 해외에 웅대한 사회적 기우氣宇(기개와 도량)을 양성해 낼 수 없다"(柏木義円, 「大和民族の膨脹」, 『上毛敎界月報』, 1903年12月15日, 3.)면서 에비나와 달리, 일본 제국이 신도神道를 앞세워 식민지를 확장해 가는 모습의 부당성을 지적한다. 그는 한국강제병합 직전인 1909년, '미신횡류'迷信横流라는 글에서 은사 에비나와 달리 "천리교, 연문교蓮門教 등의 미신이나 불교, 신도 등의 미신을 이용하여 우민愚民의 금품金品을 갈취하는 자들이 결코 적지 않으며, (중략) 신불음사神佛淫祠의 대고객들 중에는 미신에 심취한 자들 적지 않다"라면서 당시의 신도 등이 보인 혹세무민적 행각들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柏木義円, 「迷信横流」, 『上毛敎界月報』, 1909年 9月 15日, 5.)
가시와기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근거로 기독교는 '진리'를 추구하지만, 일본 정부와 신도 신관들은 과연 그러한가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경신사상敬神思想 운운하며, 신직神職을 양성하고 신사神社를 흥기고취興起鼓吹하고 있지만, (중략) 그 안에는 미신을 섞어 음사淫祠 사사邪祀에 이른 것은, 국가 인민에 오히려 해가 될 터이다. (중략) 루터 등의 종교개혁은 실로 종교를 진리의 문제로 이끌기 위한 지성至誠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나라(일본)에서는 정부로부터 경세가輕世家라 불리는 자들에 이르기까지 종교를 진리의 문제로 보지 않고, 단지 치술治術의 방편으로 보고 이를 이용하려는 데만 부심腐心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천리교나 연문교 같은 정부의 뜻에 영합한 어용화된 단체들이 있는데, 이를 '좋은 종교'良宗敎라 할 수 있으랴." (柏木義円, 「無神と迷信」, 『上毛敎界月報』, 1911年5月15日, 2-3.)
가시와기는 진리로부터 멀어진 종교는 언제든 '나쁜 종교'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국가권력, 물신주의(금권) 등 인간적 욕망에 빠진 종교가 바로 그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소학교 등에서 강요되는 신사참배도 "국가가 교육이라는 백년누적百年累積을 이용해 실시하는 일종의 최면술催眠術이며, 대미신, 대오류의 암시를 주입하는 것"(柏木義円、「国家が養成する一大迷信」、『上毛敎界月報』、1921年7月15日.)이라 일갈한다.
1920년대에 한국에 건설되던 조선신궁과 경성신사 등 전국의 신사에 대해서도 "일본의 우상, 신사"日本の偶像,神社라는 표현을 반복해 쓰면서 "편협한 국가주의 교육 등은 전혀 쓸데없는 짓"이라며, "조선과의 장래에 큰 문제가 될 것"이며 "실로 시대착오적"이라 예언했다. (柏木義円, 「朝鮮帰途」(雑録), 『上毛敎界月報』, 1925年6月20日, 23. ; 柏木義円, 「日本の朝鮮統治に就ての疑義」(雑録), 『上毛敎界月報』, 1926年1月20日.)
가시와기는 숭배의 가부 대상을 국가가 멋대로 정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의 존엄을 모독하는 것이며, 인격의 모욕"이라 말했다. (柏木義円, 「宗敎と敎育及び神社」, 『上毛敎界月報』, 1932年11月20日, 2-3.) 스승 에비나가 신사참배를 장려하던 바로 그때인 1935년에 학교와 회사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쫓겨난 학생, 여공들을 다음과 같이 상찬하며 응원하고 있다.
"최근 많은 크리스천들이 세속과 손잡고 타협적 기분으로 신앙을 더럽히는 가운데 있지만, 어린 순교자들의 노력은 심각한 감동을 환기시키고 있다." [柏木義円, 「神社問題」(雑録), 『上毛敎界月報』, 1933年10月20日, 7-8.]
많은 일본인은 지난해에 발생한 신관 남매의 살육 사건에 크게 실망한 모양이지만, 사실 신도神道라는 종교에 깊은 수준의 윤리 도덕을 요구하거나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견해가 일찍이 있었다. 메이지 시대의 초대 기독교인이자 최초의 비교종교학자로서 기독교를 변증하였던 다카하시 고로高橋吾良는 <제교편람諸教便覧>(1881)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신도를 비판하고 있다.
일본 초대 기독교인 중 한 명인 비교종교학자 다카하시 고로. 사진 제공 홍이표
"신도神道의 신神은 그 수가 야오요로즈八百万千万라는 헤아릴 수 없는 무량無量한 신들神々이며, 그 신들을 모시는 일은 신도神道의 몸이 된다. (중략) 그것은 개인의 정욕情欲만을 가득 채우는 유쾌愉快(쾌락)를 가리키는 것이지, 고상원대高尚遠大한 청희정락清喜淨樂을 말함이 아니다." [高橋吾良, 『諸教便覧』(第一神道), 十字屋, 1881, 15-16.]
"천리인의天理仁義를 행하는 등의 일은, (신도의) 그 도道가 명命하는 것이 아니다. 신도의 이른바 '수많은 신들'은 상당수가 기욕嗜慾(즐기고 좋아하는 욕심)을 추구하는 정욕情慾이라 할 수 있다. 도덕에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도, 역시 기욕嗜慾을 만족시키라는 것이니 도덕을 권할 여지가 없어진다." [高橋吾良, 『諸教便覧』(第一神道), 18.]
한국전쟁 이후 한국 기독교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마 6:33)는 예수의 가르침을 망각한 채, 기복신앙과 권력화의 유혹에 빠지고 말았다. "예수 잘 믿으면 ①영혼 구원뿐 아니라 ②물질(돈·권력·명예), 그리고 ③육체적 건강까지 얻는다"는 이른바 '삼박자 축복'이 널리 확산되었다. 본말이 전도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복음은 개인적 정욕情欲과 기욕嗜慾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대형 교회라는 공간에서 바로 그러한 욕망이 집단화했다. 다카하시가 140년 전 신도를 향해 "도덕을 권할 여지가 없어진 종교"를 힐난하였지만, 어쩌면 그가 오늘날 한국 대형 교회를 보면, 그 말을 다시 내뱉을지 모른다.
다카하시는 신관 제직과 국학자(신도학자)들의 오류와 문제점에 대해서도 <신도신론神道新論>(1880)이라는 책 등에서 아래와 같이 비판하고 있다.
"신도神道의 의의일변意義一変한 모습들은 확실히 신직神職 등의 오류誤謬 또는 망조妄造에 유래한다." [高橋吾良, 『諸教便覧』(第一神道), 10.]
"종래의 국학자 다수가 문자학자로서 종국에는 오류의 설들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高橋吾良, 『神道新論』(第一章), 50.]
"바라옵기는, 국학자들이여, 속히 정도正道로 돌아와 다시는 망설妄說을 전하여 사람들을 미혹시키지 말지어다. 오류로 알게 된 것들을 전하고, 다시 그 오류를 숨긴 채 이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천품天稟의 덕성徳性에 수치스러운 것이며, 실로 부끄러울 따름이다." [高橋吾良, 『神道新論』(第十章), 73.]
신직神職은 목사요, 국학자는 신학자나 신학교 교수라 보면 된다. 이들은 메이지유신 이후 천황제에 빌붙어 급속히 권력화해 갔고, 정부로부터의 지원과 재정적 풍요 속에 도취돼 있었다. 급기야 "신사는 종교가 아니다"는 궤변을 발명하여 곡학아세하고 혹세무민했다. 그들이 고안한 바로 그 '신사비종교론'이 1930~1940년대에 식민지 조선에서도 거세진 신사참배 강요 당시에도 명분으로 활용되었다. "신사참배는 단지 국가 의례일 뿐 각자의 신앙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터무니없는 논리 모순에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알면서도 무릎을 꿇었다.
다카하시 고로가 쓴 비교종교학서 및 기독교변증서 <제교편람諸教便覧>(위)와 <신도신론神道新論>. 사진 제공 홍이표
"너희의 하나님이 더 높으냐? 천황이 더 높으냐?"
일제 말,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불경죄 법정에서 자주 나온 판사의 질문이다. 에비나가 지도하던 일본조합교회의 신자이자 헌법학자로 명성을 떨쳤던 오타니 요시타카大谷美隆는, 이런 질문의 모범 답안으로서, <국체와 기독교 : 일본적 기독교의 제창国体と基督教 : 日本的基督教の提唱>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해괴한 논리를 펼친다.
"천황은 신의 대리자神の代理者로서 일본에서 신의 사업을 담임하고는 분이시며, 여기서 신이란, 기독교의 신과 신도의 제1의 신과 동일한 존재이다. (중략) 따라서 일본의 기독교인이라면 정치적으로 천황의 명령에 충실히 복종하고 그와 함께 신앙적으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라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천황은 신의 대리자로서 명령을 내리시고, 그리스도는 신의 대표자神の代表者로서 가르침을 주는 존재이다." (大谷美隆, 『国体と基督教: 日本的基督教の提唱』, 基督教出版社, 1934, 152-154, 172.)
천황은 '이 땅에서 신의 대리자요, 예수는 단지 신의 대표자일 뿐'이라는 오타니의 말은, 천황을 아라히토가미現人神로서 절대화하고 숭배할 때에 가장 방해되는 존재들인 기독교인들을 계도(?)하기 위해 만든 궤변이다. 다카하시는 이러한 근대 국가신도의 천황제가 "고전古傳에 대한 오해로부터 참된 하늘의 해天日와 천일天日이라는 이름의 사람을 혼동시켜 버렸다"[高橋吾良, 『神道新論』(第一章), 49.]고 말한다. 인간을 신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일을 당시 일본의 종교인들이 획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궤변 뒤의 그릇된 욕망을 보았던 것이다.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였던 박득훈 목사는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담임목사의 신격화, 그 신격화된 담임목사를 숭배하고, '그게 우상숭배 아니다, 기독교 신앙과 잘 어울린다'고 얘기한 것은 신사참배와 마찬가지다"고 비판하였다. 대형 교회 세습이 '인간을 신격화'하고자 하는 욕망과 연결돼 있다는 이 지점에서, 최근의 사태는 1938년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공식 결의와 분명 닮아 있어 보인다.
가스총도 들었는데 칼을 못 들까?
2012년 한국에서 가장 큰 교단인 예장합동 총회에서는, 살인 청부 협박에 이어 용역 깡패가 총회장에 동원되었고, 심지어 교단 총무였던 목사는 강단 위에서 가스총을 꺼내기까지 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세상에 빚과 부담만 안기는 존재가 돼 버린 한국교회의 자화상이다. 산견되는 교회 내의 폭력 사태에 '세습'마저 결합하면 종교개혁 500년의 끝자락에 일본에서 목격된 끔찍한 사건이 한국에서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쉬이 장담할 수 있을까.
토미오카신사의 참극을 보며, 오래전 다카하시가 쓴 종교 비판을 신도에만 국한해 읽으려는 이가 많을지 모른다. 하지만 일본의 신도神道는 그의 비판처럼 '윤리 도덕'에 대한 고민과 실천이 현저히 결여된 저급 종교이기만 할까. 출퇴근 시간 때마다 적잖은 돈을 던져 넣고 가족을 위해 진지하게 기도하는 수많은 일본인의 종교심이 그저 저급한 개인의 정욕과 쾌락만을 쫓는 행위일까. 신도가 줄 수 있는 윤리적 교훈이 딱히 없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서 다수의 일본인이 비윤리적이라 단정할 수 있을까.
아니 오히려 개인윤리에 있어서, 그들은 기독교에 기초해 형성된 서구의 윤리 도덕을 근대화 이후 우리보다 더 철저히 습득하고 내면화하여, 지금도 실천에 옮기고 있다. 기독교는 사양하지만 기독교적 윤리는 배우고 실천하는 '화혼양재和魂洋才의 윤리' 말이다. 신사에 다니지만 한국의 기독교인보다 오히려 더 기독교적인 윤리를 살아 내고 있는 이들과 마주해야 하는 민망함. 그것이 일본 생활이 길어질수록 더욱 깊어지는 수심愁心의 한 원인일지 모른다.
남산 조선신궁의 신전(위) 자리에 1956년 이승만 대통령 동상이 세워졌다(아래).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거대한 동상이었다. 절대적 존재로 군림하던 이승만 동상에 많은 기독교인이 참배했다. 4·19 직후에 철거됐다. 우상숭배의 자리에 똬리를 튼 새로운 우상들은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서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사진 제공 홍이표
필자는 140년 전 다카하시가 신도를 향해 던졌던 일성을 오늘날 한국교회에 적용해 다시 읽어 본다. '신도'를 '기독교'로 읽고, 신관 신직을 '목사'로, 국학자를 '신학자, 신학교수'로 읽는다. 고개를 떨구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예수께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라고 하였으나 한국교회는 야훼 하나님보다는 물신 바알을 더 섬기고 있다. 유일신교란 말이 무색할 지경이며, 이미 저마다의 온갖 욕망을 채워 줄 신들神々을 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절대자를 탄생시킨 대형 교회와 세습은, 이러한 다신교적 상황의 기형적 현상은 아닐까.
한국 대형 교회 '세습'으로 양산되는 갈등과 대립은, 2017년 도쿄 시내의 유혈 활극과 본질상 다르지 않다. 20년 전인 1997년 대형 교회 제1호 세습의 장본인 김창인 목사(충현교회)는, 세습을 위해 뒤늦게 아들에게 신학 공부를 시켰다. 아들을 뒤늦게 국학원대학(신관양성학교) 야간부로 넣은 토미오카 시게나가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결국 김창인 목사는 아들과 불화를 겪은 뒤, "무리하게 교회를 아들에게 물려준 것을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생각한다"며 후회했다. 예장합동 교회지만 교단 규칙을 어기고, 토미오카신사처럼 아들을 내쫓은 뒤, 딸에게 다시 당회장직을 물려줬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그런 한국교회는 2017년의 토미오카신사가 아닐 수 있을까.
수년 전 한국 사회를 대혼란에 빠트린 국정 농단 사건도, 대를 이은 정치권력 세습의 국민적 용인이라는 시대정신의 왜곡, 삼성이란 거대 재벌의 불법 세습의 추태가 연루된 '세습 스캔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박정희와 박근혜, 최태민과 최순실, 이건희와 이재용 등, 세습에 대한 그릇된 욕망으로 얼룩진 한국 사회의 민낯이다. 그에 질세라 한국 최대의 장로교회도 '세습'을 강행해 온 교계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이제 현대, 롯데, 효성에서나 보던 '형제의 난'은 한국교회의 새로운 현상이 될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토미오카하치만신궁의 극단적 사례가 나오면 어찌 감당해야 하나.
다카하시는 '좋은 종교'와 '나쁜 종교'를 나누어, 좌충우돌하던 근대 일본인에게 양자택일을 요구하였다. 참된 신을 경외할 것인가, 거짓 우상을 숭배할 것인가. 그의 간절했던 호소는 돌고 돌아, 오늘의 한국교회를 향해서도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양교良敎가 될 텐가, 망교妄敎가 될 텐가. 한국 기독교회는 기로에 서 있다.
"세상 사람들은 어찌 된 일인지 진실된 양교眞實の良教(좋은 종교)를 알지 못하고, 모두가 어떤 종교의 감언甘言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그 종교가 인류에 최대 행복을 안겨줄 것이라고 오인하여 망교妄敎(거짓 종교)를 따르게 된다. 그러면 바라던 행복을 얻기는커녕 그 반대가 될 것이다." [高橋吾良, 『諸教便覧』(緒言), 十字屋, 1881, 3.]
홍이표 목사가 '일본 기독교 현장에서'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연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인터뷰 기사(바로 가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 신도와 한국 개신교의 교회 세습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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