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신 없는 사회 -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들이 만드는 현실 속 유토피아
신 없는 사회 -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들이 만드는 현실 속 유토피아
필 주커먼 (지은이), 김승욱 (옮긴이) | 마음산책 | 2012-04-15 |
원제 Society Without God: What The Least Religious Nations Can Tell Us About Contentment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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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16,000원
판매가 14,400원 (10%, 1,600원 할인) | 무이자 할부
반양장본 | 367쪽 | 152*223mm (A5신) | 514g | ISBN : 978896090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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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사회학자 필 주커먼은 비종교적인 사회를 연구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는다. 자료 조사 결과 그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이 비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문제없이’ 사회 공동체를 꾸려간다는 잠정적 결론을 얻고 이를 실증적으로 알아보고자 덴마크로 떠난다. 그는 북유럽 사회가 종교성 없이도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경제적으로 문제없이, 오히려 종교성이 충만한 미국 사회보다 풍요롭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목도한다.
<종교, 심층을 보다>와 <예수는 없다>의 저자 오강남 교수는 <신 없는 사회>가 평소 맹목적인 표층 종교를 비판해온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한다며 출간을 환영했다. 맹목적인 신앙을 비판하고 종교의 본래적 의미를 되물으며, 한국 현대사회의 한 단면을 조명해줄 책이라는 것이다. 필 주커먼은 이 책 <신 없는 사회>로 [포워드 매거진] 선정 ‘올해의 책’ 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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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신 없는 사회에 대하여
신 없는 사회
지극히 인간적인 사회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 옌스·안네·크리스티안과 나눈 대화
삶과 죽음을 대하는 자세
신과 멀어진다는 것 레네·소니·기테와 나눈 대화
종교는 문화
세속주의자가 사는 법
세속주의자로 사는 이유
신을 믿는다는 것 도르테·라우라·요하네와 나눈 대화
문화적 종교
나오는 말 종교를 다시 생각하다
표본의 특징과 방법론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P.15 : 많은 덴마크인, 스웨덴인과 나눈 심층 대화를 통해 나는 상대적으로 비종교적인 사람들의 삶을 깊이 파악할 수 있었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미미하고 주변적인 사회에서 삶의 본질이 어떤 모습인지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보고 분석할 기회를 얻었다. 따라서 이 책은 개인적인 성찰의 결과물이자, 내가 지상에서 가장 덜 종교적인 지역에 살면서 발견하고 경험하고 새로이 배운 것들에 관한 사회학적 분석이다.
P.23 : 내가 이 책에 『종교 없는 사회Society without Religion』 대신 『신 없는 사회Society without God』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 중 하나는, 루터교의 많은 요소들이 지금도 덴마크와 스웨덴 문화에 깊게 배어 있다는 점이다. (...) 하지만 이처럼 분명하게 남아 있는 루터교의 흔적들조차 믿음이나 영적인 확신 때문에 지켜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보다는 문화적 전통이라는 의미에서 기독교 의식을 지키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P.32 : 내가 이 책에 『종교 없는 사회Society without Religion』 대신 『신 없는 사회Society without God』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 중 하나는, 루터교의 많은 요소들이 지금도 덴마크와 스웨덴 문화에 깊게 배어 있다는 점이다. (...) 하지만 이처럼 분명하게 남아 있는 루터교의 흔적들조차 믿음이나 영적인 확신 때문에 지켜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보다는 문화적 전통이라는 의미에서 기독교 의식을 지키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오강남 (종교학자,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명예교수)
: 어느 사회나 건실한 사회로 자라나려면 맹목적인 근본주의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나의 평소 지론이었는데, 이를 실증적으로 증명해주는 책이 나오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다. 미국의 종교사회학자 필 주커먼 교수가 1년여 덴마크와 스웨덴에 거주하면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 조사한 결과 미국처럼 기독교 근본주의적 열정 같은 것이 거의 없는 북 유럽 나라 사람들이 복지, 교육, 건강, 인권, 평등, 범죄율, 부패지수, 자살률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미국인들보다 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산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이야기이다. 현재 표층적인 근본주의적 신앙이 창궐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도 이런 사례가 타산지석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샘 해리스 (『종교의 종말』,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의 저자이자 ‘이성 프로젝트’ 창설자)
: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신에 대한 믿음이 문명사회의 기반이라고 확신한다. 『신 없는 사회』는 이것이 이상할 정도로 미국적인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 우리와는 다른 세속주의적인 사회를 이렇게 살짝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를 겸허하게 만드는 동시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경험이다. 지금이라도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중앙일보
- 중앙일보(조인스닷컴) 2012년 04월 21일 '책꽂이'
동아일보
- 동아일보 2012년 04월 21일 '인문사회'
조선일보
- 조선일보 Books 북Zine 2012년 04월 21일자
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12년 04월 20일
지은이 : 필 주커먼 (Phil Zucker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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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
캘리포니아 주 클레어몬트 피처 칼리지 사회학과 교수. 오리건 주립대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종교와 사회의 관계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무종교 문화와 종교 없는 사람들을 활발히 연구하고 있다. 2011년에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무종교성을 연구하는 학제간 학과를 개설했다. 저서로 『신 없는 사회(Society Without God)』, 『더 이상 신앙은 필요 없다(Faith No More)』 등이 있다.
저자는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무종교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옮긴이 : 김승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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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 총 203종 (모두보기)
소개 :
균관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시립대학교에서 여성학을 공부했다.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로 근무했으며,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19호실로 가다》, 《사형집행인의 딸(시리즈)》,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이 얼마나 천국 같은가》, 《50억 년 동안의 고독》, 《스토너》, 《듄》, 《뇌의 문화지도》, 《소크라테스의 재판》, 《톨킨》, 《퓰리처》, 《다이아몬드 잔혹사》, 《살인자들의 섬》, 《파리의 연인들》, 《포스트모던 신화 마돈나》, 《영원한 어린아이, 인간》, 《진화하는 결혼》, 《킨제이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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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적 기독교에 싫증난 미국인 사회학자
신 없이도 행복한 사회 스칸디나비아를 들여다보다
미국인 사회학자 필 주커먼은 비종교적인 사회를 연구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는다. 자료 조사 결과 그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이 비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문제없이’ 사회 공동체를 꾸려간다는 잠정적 결론을 얻고 이를 실증적으로 알아보고자 덴마크로 떠난다. 14개월 동안 생활하며 150여 명을 심층적으로 인터뷰한 주커먼은 북유럽 사회가 종교성 없이도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경제적으로 문제없이, 오히려 종교성이 충만한 미국 사회보다 풍요롭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목도한다. 주커먼은 자신의 경험담과 인터뷰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종교성에 관한 사회학적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검증하며, 초월적 세계에 의지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일련의 이론들을 반박하려 한다. 저자가 계속해서 강조하듯이, 이 책의 목적은 종교성이 없는 사회가 더 행복하게 잘 산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종교성이 약해도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만큼 위험한 사회가 도래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 도덕적이고 풍요로운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음을 사례를 들어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자신이 스칸디나비아에서 1년여 동안 생활한 것은 “세속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 것”과 같았다고.
『종교, 심층을 보다』와 『예수는 없다』의 저자 오강남 교수는 『신 없는 사회』가 평소 맹목적인 표층 종교를 비판해온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한다며 출간을 환영했다. 맹목적인 신앙을 비판하고 종교의 본래적 의미를 되물으며, 한국 현대사회의 한 단면을 조명해줄 책이라는 것이다.
실존, 그 자체에 충실한 사람들
『신 없는 사회』는 주커먼이 실시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종교의 힘이 그리 강하지 않은 사회에서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현재를 살아가고 죽음을 마주하며 초월적 존재를 현실적 존재로 만드는지 기록한다. 실증적 자료에만 의존하는 사회학자답게 주커먼은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가령 신이 없는 사회만이 행복하다든지, 신을 맹목적으로 믿는 사회는 불행하다든지 하는 인과적인 결론은 이 책의 관심 밖이다. 또한 개별 인터뷰를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신 없는 사회』를 통해 이들의 생활을 일반화할 수 있는 이론은 없다. 하지만 인터뷰 대상자들이 삶과 죽음 등 인간의 인생을 이야기하며 공통적으로 보인 태도를 세 가지로 정리해볼 수는 있다. 이들은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것만 믿는 ‘합리적인 회의주의자’이며, 이상향을 따로 설정하지 않고 현실에 충실한 ‘이상적인 세속주의자’이고, 이러한 이상적 현실을 만들기 위해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들고자 애쓰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개인주의자’들이다.
- 합리적인 회의주의자
이들은 초월적인 존재가 우주를 창조했다는 식의 창조론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다윈 이후의 진화론이 인간의 생명과 우주의 탄생을 더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믿으려면 직접 경험해봐야죠”라거나 “믿고 싶어요. 하지만 이성은 그런 존재가 없다고 말하죠”라는 식의 대답은 스칸디나비아 사람들로부터 쉽게 들을 수 있는 대답이다. 이런 합리주의적 태도는 죽음관에도 큰 영향을 미쳐서, 현세는 죄악으로 가득 찬 지옥이고 내세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뿌리 내리지 못한다. 이들은 죽음을 자연현상으로 차분하게 받아들이며 그 이후의 일은 상상하지 않는다. 감지하지 못하는 세계를 상상하고 믿으며 위안을 찾는 행위는 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리고 또 뭐? 그 다음에는 뭐가 있지?’ 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나는 (…) 행복하게 사는 것, 아니 불행한 삶이라 해도 삶은 삶이오. (…) 사는 이유를 말한다면 죽는 거라고 말하는 거지. 천국에 가는 건 나한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에요.”(옌스)
“절대로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사라지는 거예요.”(티나)
“우리의 존재가 끝나는 거죠. 그것뿐이에요.”(이사크)
“내 몸이 분해돼서 자연의 자연스러운 순환의 일부가 될 겁니다.”(마스)
흥미로운 점은 오히려 종교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죽음이 다가올수록 두려워하며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하는 안네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천국에 가지 못할까 걱정하며 자신의 인생에 죄책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죽음 이후에 대한 상상이 이들을 두렵게 만드는 것이다. 주커먼이 만난 대다수의 스칸디나비아인들은 다른 모든 생명체처럼 인간의 삶도 죽음과 함께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겼고 그에 따라 현재의 삶에 충실했다.
- 이상적인 세속주의자
합리적인 회의주의자의 태도는 사람들이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며 이들이 지금, 여기를 마음껏 누리도록 한다. 주커먼은 “삶이 끝나면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인간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사람들에게 질문한다.
“내 경우에는 삶이 끝나면 모든 게 끝나는 게 확실해요. 인생의 의미? 나는 지상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을 누렸어요. 그 시간을 최대한 잘 보내는 것이 나의 의무죠. (…) 정말이지 훌륭한 세월을 보냈어요.”(라르스)
“삶의 의미라는 건 그냥 나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같은데.”(요나스)
“의미야 사방에 있죠. (…) 자신의 의미는 자기가 만들어내는 거죠……. 그걸 할 수 없다면 먼저 자기 인생을 정비해야 할 거예요.”(티나)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뭐가 됐든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고 (…).”(셰르스틴)
“내게 묻는다면 생이 즐거웠다고 말하겠어요. (…) 원칙적으로 삶은 모두가 받은 기분 좋은 선물.”(이사크)
이들은 삶의 궁극적인 의미 같은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다만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 뿐이다. 이들과 대화하며 주커먼은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아는 것’이 과연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삶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한 사색이 인간의 본성이며 이것이 종교를 지탱하는 원동력이라는 몇몇 주장에 의문을 품게 된 것이다.
- 공동체를 지향하는 개인주의자
죽음 이후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의미 부여하기를 꺼려하는 회의주의적이고 세속주의적인 사람들이지만, 이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냉담하거나 무심하지 않다. 세계 최고 수준의 사회복지 시설이 말해주듯이 덴마크와 스웨덴 사람들의 사회 참여율은 아주 높은 편이다. 초월적인 존재가 두려워서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공동체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 도덕과 윤리를 따르는 것이다. 결국 이들에게 삶의 궁극적인 의미라는 것은 한 개인의 존재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는 사회적 차원의 문제다. 죽음 앞에 무력한 인간의 삶을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투영하며 모두가 연약한 존재라는 공동체 의식 속에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는 생활방식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종교는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에게 생활 윤리로 다가온다.
“기독교나 다른 종교에 보면, 다른 사람들을 대접하는 법 같은 것에 대해서 정말 좋은 말들이 있잖아요. (…) 살아가는 데 유용한 훌륭한 규칙들이 그 안에 있기는 해요.”(레네)
“내가 종교를 믿지 않아도 내 가치관이 전부 종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게 중요해요.”(소니)
“난 하느님을 믿지 않아요. 하지만 난 교회를 계속 지키고 싶어요. (…) 난 그게 덴마크 문화의 일부라고 생각해요.”(기테)
“편안한 백지상태”
세속주의자들의 종교관
주커먼은 이런 스칸디나비아인들의 태도에 ‘세속주의’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이 ‘세속적’이라는 말에 사회학적인 이론을 적용해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려 한다. 그는 종교와 종교성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반면, 세속주의와 세속성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지 못한 추세를 지적하며 이 때문에라도 사회학적인 시선으로 스칸디나비아 지역을 연구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리처드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 샘 해리스 같은 이들처럼 세속성이 종교성보다 낫다고 논쟁적으로 옹호하는 경우는 많지만 이들이 세속주의적인 삶과 세속주의적인 사람들 자체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종교와 상관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연구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주커먼의 사례 연구는 세속주의적인 문화 속에서 세속주의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생하게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세속주의적인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지닐까? 주커먼은 이들의 태도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꺼림/삼감’의 태도인데 대체로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주저한다는 것이다. 이는 종교가 내밀한 주제라 말하기를 꺼린다기보다, 주커먼이 일컫듯 이들이 “편안한 백지상태”여서 종교에 대해 할 말이 없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종교에 대해 숙고할 때가 드물고 주변 사람들과 종교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더욱 드물기 때문에 누군가와 이와 관련한 대화를 나눌 “이야기적 구조Narrative Structure”가 없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온화한 무관심’의 태도로, 종교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교회를 자신들의 문화유산으로 생각하면서도 종교를 믿지는 않는 이들을 가리킨다. 인터뷰 대상들 가운데 많은 경우가 이런 태도를 보였다. 세 번째는 ‘철저한 무관심’의 태도로, 지금까지 살면서 종교, 혹은 신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이들을 말한다. 주커먼이 인터뷰를 시도한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하느님을 믿느냐”는 질문에 한참을 대답하지 못한 채 생각에 잠겼다. 한참 후 내놓은 대답은 “생각해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다”는 식이었다. 그러고 나서 이들은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 같다는 결론을 인터뷰 자리에서 내렸다.
공동체의 기념물
종교는 문화
그렇다면 이들은 왜 세속주의자가 되었을까? 덴마크인들은 키에르케고르의 후예들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살았던 19세기를 짐작해보면 루터교의 영향이 강했으며, 그 역시 그러한 세계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적 갈등은 당대의 강력한 종교적 힘 없이는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주커먼이 주목하듯이 인터뷰 대상들의 내력을 살펴보아도 지금 덴마크와 스웨덴 사람들의 조부모 세대 이상에서는 국교회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모 세대, 자신들의 세대, 자식들의 세대로 올수록 그 힘은 서서히 약해졌다. 이는 비단 북유럽뿐 아니라 종교개혁이 처음 일어났던 독일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네덜란드와 프랑스 등 전통적으로 기독교의 힘이 강했던 유럽 국가에서는 대체로 맥을 같이하며 나타나는 현상이다. 주커먼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이 역시 최선을 다한 설명일 뿐 확실한 인과관계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전제한다.
첫째, 덴마크와 스웨덴에서 루터교는 국교회다. 이렇게 종교 조직이 하나뿐일 경우 “게으른 독점”의 모습이 나타난다고 추측할 수 있다. 자신들의 종교를 홍보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종교에 흥미를 잃게 되고 자연스럽게 종교성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다양한 종교들이 경쟁하는 사회의 대표격인 미국과 비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둘째,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가 안전하다고 느낄수록 종교와 멀어지는 경향이 있다. 덴마크와 스웨덴을 예로 보아도, 이들 나라가 극심하게 빈곤했던 시기인 19세기에는 종교의 세력이 막강했다. 하지만 지금 덴마크와 스웨덴을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지역 국가들 대부분은 부유하고 사회복지가 잘 마련된 나라에 속한다. 셋째,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활발해질수록, 그럼으로써 종교 생활에서 멀어질수록 그 여성들의 남편과 자녀 역시 종교에서 멀어진다고 설명할 수 있다. 사회에서 임금노동을 하는 여성들이 전업주부로 일하는 여성들보다 덜 종교적이며 이런 사실이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오늘날 덴마크와 스웨덴 여성 대다수, 특히 덴마크의 경우 여성들의 80퍼센트 가까이 가정 밖에서 임금노동을 한다는 통계는 이런 상관관계를 뒷받침한다. 그 밖에도 미국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사회 구성원들의 문화적 정체성이 동질적인 스칸디나비아 사회에서는 굳이 종교를 통해 공동체를 구성하고 소속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해석도 주목할 만하다. 또한 높은 교육 수준, 사회민주당의 강세 등의 사실도 종교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것도 그 이유를 온전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이렇게 세속적인 사회에서 신실한 신앙심을 지닌 사람들은 자신들의 종교성을 쉽게 내보이지 못한다. 이들은 자신이 초월적 존재를 믿는다는 사실을 커밍아웃하듯이 친한 사람들에게 고백한다. 덴마크와 스웨덴 사람들이 대체로 종교 자체에 대해선 관용적이지만, 실제로 현실 너머를 믿고 추구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만날 경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 미국인의 눈에는 더욱 신기하게 비치는 사회를 두고 주커먼은 ‘문화적 종교’라는 이름을 붙인다. 종교 사회학자 N. J. 디머래스가 2000년에야 정리한 개념인 ‘문화적 종교’는 종교적 전통에 소속감을 느끼면서도 그 종교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들의 비율이 극히 낮은 경우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면서도 성경의 말을 문자 그대로, 즉 신이 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믿을 수는 없는 사람들의 태도를 가리킨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인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는 경우 이들은 종교를 현실화된 문화로 대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예수가 신의 인간화임을 믿지 못하며 성모 마리아의 동정녀 출산을 믿지 않는다. 다만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따르고 교회 건축물이 보여주는 인간 문화의 경이로움에 감탄하며 이를 자신들의 생활로 받아들여 종교의 가치관이 자연스레 삶이 되었을 뿐이다. 이들에게 신의 존재 유무와 천국과 지옥의 실재 여부는 관심사가 아니다. 종교는 이들에게 “공동체의 기념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종교를 다시 생각하다
덴마크에서 인터뷰 대상이었던 모르텐은 6개월 정도 미국 사회를 경험한 다음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했던 덴마크에서의 인터뷰 내용을 철회한다. 미국 사회의 종교성과 신앙심을 기준으로, 그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라면 자신은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르텐의 말은, 주커먼에게 자신은 신을 믿는다고 말한 많지 않은 인터뷰 대상들의 경우 미국 사회의 기준으로는 엄밀히 말해 신앙인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모르텐은 말한다, “우리 덴마크인들은 미국이 우리한테 전쟁에 같이 나가자고 권유(…)할 때 아주, 아주 조심해야 한다고 말할 거야. 미국에서는 광신도들이 굉장히 커다란 영향을 갖고 있으니까. 내가 보기에 덴마크인들은 이 점을 모르는 것 같아.” 덴마크에서는 신앙인이었던 그가 미국 사회를 경험한 다음엔 자신을 “불가지론자, 어쩌면 무신론자”로 규정하게 된 것이다. 이런 모르텐의 태도는 종교 지향적 정체성과 세속주의적 정체성이 사회적 여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초월적인 존재에 의지하려는 종교적 성향이 인간의 본성에 내재해 있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다.
1년여 동안 스칸디나비아의 세속적 공기를 들이마신 주커먼은 자신이 살아온 미국 사회를 떠올리며 되묻는다. 한 “사회의 도덕성과 종교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구성원들이 성경을 많이 사랑하는 사회가 도덕적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빈곤을 사실상 퇴치한 사회가 도덕적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많은 구성원이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사회가 윤리적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어린이와 노인, 고아의 복지를 위해 (…) 전문적인 보살핌을 제공해주는 사회가 윤리적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신 없는 사회』는 어느 쪽(대표적으로 미국 사회와 스칸디나비아 사회)이 결과적으로 종교적 교리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미국 사회를 비롯해 몇몇 나라에 만연한 표층적 종교 근본주의를 비판할 근거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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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 12편
신이 필요없는 그들만의 낙원 bosch777 ㅣ 2013-03-18 ㅣ 공감(2) ㅣ 댓글 (0)
우선 저자의 의도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하느님이 없는 사회는 지상의 지옥이 될 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입에 담는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라니... 『신 없는 사회』는 약 1년간 덴마크에 살면서 스웨덴과 덴마크의 비종교성에 대한 연구를 한 결과를 담고 있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내용도 명확하다. 덴마크와 스웨덴 같은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은 빈부의 격차가 크지 않고 막중한 세금을 내지만 그에 합하는 강력한 복지정책을 통해 안정된 국민생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국민 대다수가 기독교인이라 생각하고 있는 이 나라 국민들은 신을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 없고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신을 믿지 않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율배반적 표현이 어째서 가능한지를 저자는 다양한 계층과 연령의 사람들과 많은 인터뷰와 사회학적 연구를 통해서 도덕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종교가 반드시 필수적이지는 않음을 역설한다.
사실 이 책은 기독교의 힘이 거의 미비한 스웨덴과 덴마크의 모습을 소개하는 것과 동시에 저자가 주로 살고 있는 미국의 왜곡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고도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근본주의적인 기독교가 맹신하고 있는 초자연주의적 유신론이 낳는 패단에 대한 경계와 우려를 곳곳에 표출하고 있다. 세상의 분쟁이 일어나는 주요 원인 중 하나인 종교간 갈등은 왜곡된 종교상이 낳은 결과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지 않은가?
이 책을 통해 재고할 수 있었던 편견 하나는 (어떤 형태라도) 종교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면 도덕적으로도 타락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내 속의 욕망과 탐욕을 절제하고 이웃과 뭇 피조물들을 사랑하라는 종교의 가르침이 없는 곳이 과연 살기 좋은 곳이 될 수 있을까? 내세에 대한 기대도 구원에 대한 희망도 없이 우리를 악의 세력에서부터 스스로를 지키면서 현실을 잘살 수 있을까? 헌데 저자가 인터뷰한 덴마크와 스웨덴 국민들에게 이러한 불안과 걱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책의 전개가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고 느껴졌던 것은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과의 인터뷰내용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수많은 사람들의 인터뷰 내용은 대체로 대동소이하다. 삶의 의미란 없으며, 신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고, 기독교인이긴 하지만 교회는 거의 나가지 않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며 종교는 개인적인 문제이기에 당연히 정치와는 분리되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국민들의 자연스러운 세속화가 이뤄진 이유에 대해 저자는 크게 3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이들 국가에서 가장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루터파 교회는 국민들에게 자연스레 스며든 것이 아닌 통치자들의 정략적 이점을 얻고자 기독교를 들여온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수세기 동안 국가의 지원까지 받으며 사실상 국교나 다름없는 종교적 독점은 사람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노력을 게을리 하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두 번째로 (가장 설득력 있게 생각되는 부분인데) 사람들이 점점 안전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면서 종교에서 멀어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 삶을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들이 충족되면서 가난과 질병에서 멀어짐에 따라 안정적인 생활을 영유할 수 있게 되고 굳이 초월적 절대자에게 의지하지 않게 된 것이다. 엄청난 재벌도 없지만 비참하게 가난한 사람들도 없는 스웨덴과 덴마크 국민들은 전반적으로 현재의 삶의 수준에 만족하고 있다. 세 번째는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증가하면서 점점 종교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밖에 여러 의견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분명 이 모든 것들이 크거나 작게 복합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이른바 “문화적 종교”라는 개념에 대한 설명은 무척 중요하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이 책에서는 문화적 종교에 대해 “오랜 역사를 지닌 종교적 전통에 일체감을 지닌 사람들이 종교 안의 초자연적인 요소를 진심으로 믿지 않으면서도 확연히 종교적인 행사에 참여하는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이 나라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내가 속한 교회에서도 기독교에 대해 일종의 문화적 종교로 대하는 젊은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교리적 지식이나 신앙적 깊이는 알 수 없지만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사회적 기여나 봉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신을 믿지 않고 교회는 그저 자신들 삶에 매우 친숙한 환경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들이 구원을 받지 않고 지옥에 간다고 말하는 것은 무척 무식한 생각일 것이다.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것이 이 세상에 종교적인 갈등이 없어지는 길이 되지는 아닐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사회학자의 관점에서 충분히 유의미한 결과물로 인정되는 이 책에서 물론 동의하지 않는 것들은 있다. 한국이 종교적이지 않다는 것에는 나는 좀 다른 생각이다. 그저 기독교인의 비율이 낮을 뿐이다. 어느 통계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종교에 등록된 교인이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1.5배 ~ 2배라고 하니 한국은 (다양한) 종교적 영향력이 강하게 존재하는 나라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아마 저자가 한국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또한 저자가 바라보는 기독교라는 것은 여전히 미국국민 대다수가 생각하고 있는 초자연주의적 유신론을 근간으로 하는 근본주의(복음주의) 기독교라는 점이다. 저자가 미국사람들에게 강하게 어필하기 위한 목적에 충실한 책의 구성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이 책을 읽은 내가 생각하는 종교의 정의와는 차이가 있다. 덴마크와 스웨덴의 이 현상들과 정확히 다른 대척점에 알맞은 근본주의적 종교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저자가 언급하는 종교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신을 믿지 않고도 이렇게 행복하게 잘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말로 (저자가 정의하는)종교가, (일반적 신자들이 생각하고 있는)신이 우리에게 필요한 건가?”라고 저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비록 종교는 다르지만 아직도 개발도상국이나 문명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신을 잘 믿고 살면서도 행복도나 삶의 만족이 높은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마지막으로 과연 덴마크와 스웨덴에 기독교의 힘이 미비한 것처럼 보여도 정말로 그런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비록 저자가 정의하는 종교나 현상적으로 종교기관의 힘이 약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허나 약자를 돌보고 더불어 잘사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면서 현재를 충실히 살고자 노력하는 그들의 모습은 종교가 지향해야 하는 “현실에서의 새 하늘과 새 땅 혹은 땅에서도 이뤄진 하늘나라”에 근접한 모습이란 생각이 든다. 책 뒷면에도 적혀 있듯이 사람들의 가치관이 종교에 바탕을 두고서 살아가는 것... 그것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범위를 국가에까지 확장시키면서 낙원을 건설하려는 성숙한 국민의식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런지... 분명 현재 그들이 만들어가는 “신이 필요 없는 사회“는 왜곡된 신앙이 낳은 초자연주의적 유일신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증거이자 참된 신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가야 하는 사회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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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는 사회' 살만한가? junghoi92 ㅣ 2012-06-16 ㅣ 공감(2) ㅣ 댓글 (0)
신 없는 사회 by 필 주커만
오래간만에 만나 보는 내 입맛에 딱 맞는 책이었다. 우선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무거운 주제 ? 신 또는 종교는 난해하면서 민감한 소재임에 틀림 없다 ? 를 단순 명료하게 쉽게 풀어가는 작가의 능력이다. 사회학자인 작가는 거대 담론이나 형이상학적 철학의 유혹을 뿌리치고 오직 자신의 관심사인 “종교 (=신)없이도 행복한 사회 ? 민주적이고, 관용적이고, 평등하고, 경제적으로 풍요한 사회 ? 가 가능한가?” 라는 질문에 답을 찾고자 하며 그의 대답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비종교적이면서도 사회적/정치적/경제적/문화적으로 행복한 사회가 충분히 가능 하다는 것을 덴마크와 스웨덴을 통해서 확신한다. 그리고 이 책의 주제를 넘어서는 문제일 수도 있지만, 작가는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종교가 인간에게 반드시 선험적이거나, 자연적이거나, 내재적인 것은 아님을 덴마트, 스웨덴에서 1년 동안의 여러 인터뷰를 통해서 깨닫게 된다.
그럼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인터뷰 본론으로 들어가 덴마크와 스웨덴인 들이 얼마나 비종교적인지를 알아 보기로 하자. 저자가 생각하는 종교의 최소한의 구성 요소는 초자연적 것, 다른 세상의 것, 그리고 영적인 것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런 점에서 죽음 뒤의 세상을 믿지 않고 삶의 의미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덴마크, 스웨덴인들을 종교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연한 결과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하느님, 예수님, 죄악, 악마, 천당, 지옥, 부활, 성경과 같은 기독교의 절대적 가치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덴마크, 스웨덴 ? 물론 스웨덴에서 루터교는 더 이상 국교가 아니라고 한다. - 사람들은 국교회에 소속되어 있어 교회에 세금을 납부하며, 아이들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남녀 커플이 교회에서 결혼하는 것을 당연시 생각 한다. 저자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초자연적인 존재는 믿지 않으나 종교적인 행사에는 참여하는 모습이 이 나라에서는 보편적이며, 또한 어찌 보면 이율 배반적일 수도 있는 상황에 대해 별 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흥미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미국 종교 사회학자 N.J. 디머래스의 ‘문화적 종교’ 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데, 이 개념은 “문화적 종교는 오랜 역사를 지닌 종교적 전통에 일체감을 지닌 사람들이 종교한의 초자연적인 요소를 진심으로 믿지 않으면서도 확연히 종교적인 행사에 참여하는 현상이다 (p261)” 라고 요약 될 수 있다. 이 북유럽 사람들은 종교를 영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한 집단이 오래 동안 공유한 문화적 전통 ? 경험, 개념, 가치관가 여러 가지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 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결론은 단순하지만 시사적이다. 종교 없이도 사회 ? ‘인간’ 이란 단어도 동일하게 적용 가능하다 ? 는 충분히 건강하고, 건전하고, 풍요하고,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덴마크와 스웨덴이 과연 정답일까? 라는 질문에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여러 국제 기구들이 제시하는 사회적 지표를 볼 때 최소한 이 국가들이 소위 말해 ‘살만한 국가 상위 리스트’의 윗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본래 의도가 이토록 순하고 약한 수준에 불과 했을까? 내가 보기에는 저자가 종교의 천국, 아니 종교 과잉국이라고 할 수 있는 모국 미국 ? 우리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뭐 나라 (아니 서울이었던가, 하여튼) 를 하나님한테 바친다는 분이 대통령을 하고 계시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지… ? 사회에서 본인의 연구 결과가 가져 올 수 있는 파장을 고려하며 미리부터 연구 범위를 안전한 수준으로 조율한 게 아닌가 싶다. 저자의 말하지 못한 부분을 내가 감히 대신한다면 - 물론 나도 수위를 조절했음을 미리 밝혀 둔다 - 다음과 같다.
종교는 누구나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남에게 강요하지는 말자. 혹자는 이를 전도, 포교, 선교라고도 하나 본데, 나 만이 정말로 유일하게 옳다고 할 수 있는 지, 그래서 내가 남을 가르칠 위치에 있는 지에 대한 고민은 해보고 그 짓을 하는 지 궁금할 따름이다. 자신들의 종교 만이 옳다는 일방적인 사고 방식에서 타 종교를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는 배타적인 종교는 ‘우리’를 행복하게 할 지는 몰라도 ‘저들’을 불행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을 반드시 명심하자. 종국에는 ‘저들’의 불행이 우리’의 불행으로 돌아오리라는 것을 인류의 역사는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음을 잊지 말자.
...신(神)없는 나라 신(興)나는 나라... 한사람 ㅣ 2012-06-13 ㅣ 공감(15) ㅣ 댓글 (4)
반가운 소식
나는 종교를 기회의 문제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친구들은 뱃속에서부터 부모님과 함께 교회를 다녔다. 일요일이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교회에 나갔다. 그들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종교를 가진 것이 아니라 환경 속에서 종교를 수용할 기회를 가지고 태어난 쪽에 속했다. 친구들을 보면서 나 역시 부모님이 무신론자가 아니었다면 교회를 다니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중고등학교는 불교학교를 대학교는 기독교 학교를 졸업했다. 그래서인지 성인이 되고나서 부터 종교는 내게 학문에 가까웠다. 하지만 무교일지라도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선 긍정적인 편이었다. 아무래도 신이란 일단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 부재한다고 믿는 쪽보다 손해를 덜 본다는 지극히 계산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듯하다. 물론 가끔 신에 의지해 남몰래 기도를 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은 없다. 그러니까 내 인생에 있어 종교는 일상으로 체화될만한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단지 신이 존재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만으로 학문과 철학, 그리고 문화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종교와 신, 그리고 죽음, 삶의 의미 등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가치를 하나 배울 수 있었다. 바로 종교를 가지지 않아도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돌이켜보면 종교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을 전공이 무엇이냐는 질문만큼 많이 받아 온 것 같다. 그때마다 나는 종교가 없다고 당당히 답해왔지만 우리 사회는 어쩐지 확실한 종교가 있는 사람을 더 신뢰 하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무신론자라는 어감도 불신이나 부정적 인 의미로 전달되는 듯 했다. 특히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모종의 우월감을 가지고 비종교인을 대할 때 교화나 전도의 대상으로 보곤 한다.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생의 어느 시기에 위기가 닥쳤을 때 종교의 필요성을 운운하며 위로나 의지의 방편으로 대안을 제시하곤 한다. 또 보편적으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말년에 더 행복하게 살아가며 죽음을 맞이할 때 더 편안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할 때, 죽음이 두려워 질 때, 상실감에서 헤어나고자 할 때 종교는 일반적인 해법처럼 여겨져 왔다. 그런데 저자는 그렇다고 해서 종교가 없으면 무슨 큰 일이라도 벌어지는 것은 아니라 말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종교가 없으면 개인은 타락하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며 국가는 재앙이 닥친다고 주장하는 미국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을 똑바로 지칭한다. 종교는 인생을 충분하게 할 순 있지만 인생을 충분하게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종교를 믿지 않아도 아무 일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그들을 반박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고백한다. 체험, 삶의 현장과도 같은 이 책은 저자만의 소중한 증거물이다. 저자는 그런 나라에서 직접 살아보고 사람들과 부딪히며 대화를 나누고 돌아왔다. 이 책이 지루하지 않고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던 것은 저자의 체취와 발자취가 묻어나는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나라 미국은 종교가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대표적인 나라이다. 미국 보수주의자들은 툭하면 애국심을 앞세우며 태연하게 전쟁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이때 단결 전략으로 사람들을 집중시키는 것이 종교적 메시지이다. 지난 시절 미국은 전쟁에 참여할 때 마다 자신들은 세계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 말해왔다. 그런 자신들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신의 계시라며 정당성과 초월성을 부여해온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정작 세계에서 가장 신을 믿지도 않고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는 나라가 가장 평화롭고 안전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을 향한 짜릿한 일침. 하느님을 믿는 것과 세계평화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이야기. 교회를 다니는 것과 행복하게 잘 사는 것 역시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 그것은 미국사회의 주류가치를 은연중에 받아들이게 되는 우리 생활 정서에 간만에 날아든 고마운 소식이었다.
놀라운 만남
많은 영역에서 미국사회를 복제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저자도 언급했듯이 아직 미국만큼 종교적인 나라는 아니다. 종교적 다원성이 지켜지는 나라이고 비종교인, 무신론자를 사회에서 배타하는 분위기는 미약하다. 하지만 상하, 수직적 체계에 익숙한 조직과 학교, 가정에서 원하지 않는 종교를 억지로 수용해야 하는 일은 의외로 빈번하다. 대학 친구의 부모님은 배우자도 당연히 같은 종교인이길 바라셨다. 친구는 처음부터 같은 종교를 가진 남자와 만나야 했기 때문에 연애와 결혼에 있어 아픔이 많았다. 종교가 없었던 또 다른 친구는 결혼 후 시어머니와의 종교적 갈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친구의 남편은 공부중이고 마침 친구가 아이를 가졌을 때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한동안 생활비를 주지 않으셨다. 나 역시 결혼 후 시어머니를 따라간 어느 지방의 절에서 백배의 절을 올린 적이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초창기엔 영문도 모르고 그렇게 계절마다 절기마다 절에 따라다닌 기억이 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절에 가는 날이 일주일에 한번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며느리에게 종교의 권유 차원을 넘어서 강요를 하는 시집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집 사람이니 같은 종교를 믿어야 한다는 생각은 전근대적인 발상이지만 우리네 시집문화라는 것이 생각만큼 현대화되지 않아 종교 갈등은 고부갈등에서 자주 등장하는 원인 중 하나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등장하는 덴마크와 스웨덴은 어쩌면 모든 인간, 특히 여성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이상향의 나라가 아닐까 싶다. 여성평등지수가 가장 높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혼전성교, 낙태, 동성애 결혼이 합법적으로 허용된 나라이다. 빈곤과 질병, 범죄와 전쟁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나라이다. 교육수준이 높고 투표율이 가장 높으며 최빈국에 가장 많은 기부를 하는 나라이다. 친구나 애인, 가족, 동료들 사이에서 종교 때문에 인간관계의 갈등이 생길 이유가 없는 나라이다. 할아버지와 섹스에 대해선 자유롭게 대화하지만 종교는 개인적인 일로 여기며 서로 물어보지도 궁금해 하지도 않는 나라이다. 저자는 일 년 동안 덴마크와 스웨덴에 살면서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꺼려하고 부담스러워 하는 질문을 일삼았다. 그 결과 대부분 종교가 무엇이냐 묻는 것은 그들에게 살면서 중요한 질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남의 종교가 무엇인지 남들은 왜 교회를 가는지 혹은 가지 않는지 전혀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하느님을 믿는다거나 교회를 다니는 것은 조직이나 사회에서 소외당할 조건으로 기능한다. 미국과 정반대이다. 예수의 부활이나 동정녀의 출산, 내세와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다윈의 진화론을 배웠기에 그것은 허위사실이고 아이들에게 믿으라 가르치는 것은 그릇된 행동이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도 원하면 목사가 될 수 있고 목사라는 직업에 특별한 권위의식은 서로가 느끼지 않는 듯 했다. 이건 내 추측인데 그래서 종교인에 대한 존경심 같은 것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국민들은 아주 옛날부터 교회세를 내왔고 늘 그래왔듯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한다. 별 고민 없이 자기 자식에게 세례를 받게 한다. 믿음을 행하는 종교는 철저한 개인의 선택일 뿐이고 생활 속에서 전통이나 풍습처럼 편하게 받아들인다. 가장 놀라고 신기했던 건 사람들이 종교를 믿지 않아도 오로지 추억을 만들기 위해 낭만적인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장례식도 마찬가지다. 우리 문화에서 결혼식 장소로 교회를 택하는 사람들은 특정 종교인에만 해당하는 관행이 아닌가. 특정 종교에 해당하는 구속력이 없으므로 특정 종교가 행하는 배타성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을 보면서 오랜 세월 제사를 지내온 우리 풍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명절을 맞아 가족들이 모여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고 부모님의 기일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종교적 행사가 아니라 장례문화로 보아야 하듯 그들의 교회결혼식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미국에선 종교가 공동체적 연대감을 조성하고 개인의 상실감을 치유하며 사회의 봉사를 유도한다. 그런데 왜 가장 종교적인 나라 미국은 가장 비종교적인 나라 덴마크와 스웨덴보다 부유하지도 평등하지도 민주주의적이지도 않은 것일까. 종교가 부재하는 세속적인 사회에선 개인의 이기심과 그에 따른 범죄와 타락, 혼란에 빠져들기 쉽다고 하는데 가장 세속적인 덴마크와 스웨덴은 왜 그 반대인 것일까. 덴마크나 스웨덴은 자신들이 비 종교적이라서 나라가 행복하다 말한 적이 없는데 왜 미국은 종교 없는 나라는 불행 할 것이라 주장하는 것일까. 저자는 종교의 부재가 사회의 혼란이 아니라 외려 사회적 건강과 안녕, 도덕과 질서, 행복과 풍요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비교적 비종교적이라는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일부 보수파 종교단체는 조폭과 연대하여 이권을 챙기는 것으로 유명하고 최근엔 스님들도 도박과 룸살롱 출입을 일삼는 것으로 알려졌다. MB가 다닌 소망교회는 이 정권에서 주요 핵심인력들을 배출하는데 기여해 왔다. 부패지수가 가장 낮은 나라들이 덴마크, 스웨덴 같은 비종교적 국가라는 것이 아이러니한 기록이다. 종교적 가르침을 가장 잘 수행하고 있는 나라들은 하나같이 세계에서 가장 비종교적인 나라들이니 이제 우리는 종교와 도덕을 원인관계로 연결 짓지는 말아도 되지 않을까?
무심한 대답
종교에 대한 질문이 재미가 없듯 이들은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도 시큰둥했다. 나는 그들이 답한 재미없는 답변들을 떠올리며 삶을 의미 있게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이 책을 덮고 비로소 삶을 의미 있다고 여기고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꼭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인터뷰 대상자들 중 거의 충격에 가까웠던 대답은 삶의 의미가 꼭 있어야 하느냐는 무심한 답이었다. 그들에게 삶이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며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 그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삶의 의미이고 살아가면서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가 중요하지 그런 질문 자체는 크게 의미 없다는 것이었다.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죽은 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생명은 자연의 모든 것처럼 똑같이 끝나는 것이라 믿는다. 그러니 현재를 소중히 여기며 지금의 삶 자체에 만족하는 것이 중요하지 죽음이나 그 이후를 생각하는 시간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죽음이 그다지 두렵지 않으며 그것이 언제인지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말했다. 그렇다고 그들 누구도 무의미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었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 중에는 외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신자들이 죄책감에 시달리며 두려움에 떤다는 호스피스의 인터뷰는 종교에 대한 반전에 가까웠다. 천국에 가지 못하고 혹시 지옥에 갈까봐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삶을 믿지 못한다니 소름이 끼쳤다. 다음 세상이 있다고 믿는 것이 마지막 까지 욕심이 될 수 있다니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종교상식과 정반대되는 실례라 이도 충격이 적지 않았다.
통계상으로 보면 전 세계 무신론자는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다음으로 많은 수치라 한다. 믿는 사람만큼 믿지 않는 사람도 많으며 종교는 인간에게 선천적인 것도 필수적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저자는 새삼 종교의 필요성을 폄하하거나 근본적으로 반론하려 이 책을 쓴 것 같진 않다. 단지 종교가 없어도 신을 믿지 않아도 인간은 타락하지 않고 사회는 안전할 수 있으며 국가 또한 건강해질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삶의 의미를 종교에서 찾지 않고 죽음에의 두려움을 신에 의존하지 않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 만족하고 주변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곧 삶의 의미요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생이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저자는 아마도 미국사회가 많은 기득권을 내려놓고 덴마크나 스웨덴 같이 종교 없이도 최상의 사회를 유지하는 국가가 되기를 바랬던 것은 아닐까.
이 책을 덮기 전 나는 공교롭게도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을 읽은 바 있다. 도킨스는 늘 종교를 반대하는데 앞장서온 과학자였다. 그는 진짜 마법이란 허구가 아닌 진실이며 진짜 기적은 종교가 아닌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이라 강조했다. 신화적 상상력도 의미 있지만 더 중요한 건 바로 과학적 증거들로 가득한 우리 사는 현실이라며 그 현실을 과학이 가진 고유의 마법이라 칭하고 있다. 종교나 신화보다 더 경이로운 세계인 현실이 얼마나 가슴 뛰는 마법인가 하고 말이다. 종교의 절대성을 냉철하게 해체시켜 서구세계에서의 교회가 가지는 물리적, 심리적 폭력을 고발하고자 했던 영국 철학자 러셀은 ‘신념’이란 아무런 증거가 없는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러셀은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입증할 증거가 전혀 없을 때 신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신이 있다는 증거가 없으니 믿게 된다는 논리가 인간의 나약한 본성을 꿰뚫은 일침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혹시 신이 보이지 않고 증명할 수 없기에 초자연적인 것이라 믿는 것은 아닐까.
새로운 발견
과학자들은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 하여 ‘초자연적인 사건’이라고 결론내리는 것을 싫어한다. ‘초자연적’이라 치부해버리면 자연적인 설명은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 되 버리고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것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자의 주장을 접하고 나면 나는 늘 차동엽 신부같은 종교인의 주장을 반사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종교인들은 당연히 신의 존재와 사후 세계에 대해 과학자와는 반대되는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진화론은 인간이 어떤 과정을 통해 생성되었는지는 설명할 수 있어도 태초에 창조주가 있었는가 없었는가에 대해서는 답을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화론이 반드시 창조론에 배치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p 246, <잊혀진 질문>
차동엽 신부는 신앙에 바탕을 준 종교와 합리성에 바탕을 둔 과학이 서로 보완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에 언젠가부터 우주 대폭발, 빅뱅이론이 끼어들기 시작했는데 이는 우주가 먼 과거의 어느 시점에 갑자기 존재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차동엽 신부는 창조주의 치밀한 설계 없이 단지 우연히 빅뱅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있었기에 이처럼 질서정연한 우주가 되었다고 본 것이다. 그러니까 우주 밖에 있는, 아마도 자연계를 초월하는 어떤 존재가 우주를 존재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그 분이 신이라는 설명이다. ‘저절로’ 생겨났다는 우주에 대한 해답을 필연적으로 생기게 했다는 창조주 하느님으로 바꾼 것이다. 덴마크와 스웨덴 사람들은 신을 믿더라도 전지전능한 존재로서의 초월적인 대상이라기 보다는 필요 할 때 내가 일상에서 기도하면서 떠올릴 수 있는 친근한 존재로 여기는 듯 하다. 또 국가의 사회적 유산으로 전수되어온 기독교의 가치관들은 소중히 받아들이면서 내 삶에서 종교를 최우선시 하지는 않는 주체적이고도 이성적인 태도를 발전시켜 온 듯하다. 진화론과 창조론의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이상향이 아닌 현실에도 존재했던 것이다.
이 책은 과학자와 종교인의 상반되는 시각, 그리고 철학자의 논리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바로 종교를 가족적, 전통적 문화로 이해하는 관점이다. 절대가치로서의 신념이 아닌 상대가치로서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나약한 인간이니 만큼 때론 초자연적인 존재에 삶의 한 순간을 기댈 지라도 그 무엇도 내 삶은 초월하지 않는 태도의 가치관이 매우 현실적인 대안으로 여겨진다. 어떤 교리든 이웃을 도우고 가진 것을 나누는 공동체적 가치는 얼마든지 실천하고 현재의 내 삶에선 이성과 합리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 것. 평생가도 겪어 보지 못할 기적에 기대고 현실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환상에 의지하지 않고 과학이 해석하는 실재의 현실을 더 믿고 그 안에서 진실을 찾는 삶. 그러한 삶이라면 비록 신이 없더라도 얼마나 이상적이면서 현실적인가. 내 삶은 초월적인 신을 향한 믿음이 아니라 내가 사는 현실 속에서 발견하는 진실로만 이루어진다. 내가 사는 곳 너머, 내 인생 너머의 초자연적인 현상과 존재는 지금의 나를 알지도 못하고 안다고 해서 나를 나답게 말해주지도 않는다. 지금 여기, 이곳에서 가장 진짜인 내 삶이 존재한다. 행복은 저 언덕 너머 파랑새가 살고 있는 나라가 아닌 바로 여기 두근두근 가슴 뛰는 내 삶 속에 살고 있다. 신(神)없는 나라가 신(興)나는 나라가 아닐까. 신을 버리니 새삼 내 삶이 더 커 보인다. 당연히 그 삶의 주인공도 근사해 보인다. 내 안에 삶이라는 새로운(新) 신(神)이 있다. 이제 나는 가장 오래 그리고 분명하게 믿을 수 있는 내 삶만을 믿어(信)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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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보단 든든한 논리를 기대했었는데... 이네사 ㅣ 2012-06-13 ㅣ 공감(22) ㅣ 댓글 (0)
신없는 사회라는 제목에서 내가 무엇을 기대한 것인지 모르겠다. 신 없이도 인간의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 내진 신은 인간이 만든 것이기에 그다지 믿을 필요가 없다는 논증을 나는 기대한 것일까? 몇년전 논쟁의 중심이 되었던 책인 리처드 도킨스의 < 만들어 진 신>과 같은 맥락에서, 신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이며, 신을 믿지 않은 인간은 인생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멍청한 인간이라는 명제에 맞서 통쾌하게 종교인들을 까발리는 그런 책이길 바라는 것이었을까? 솔직히 <만들어진 신>의 기본 골자에 대해선 나는 동의한다. 하지만 리처드 도킨스의 어조가 꽤나 거만하다고 느껴진 관계로 나는 너보다 똑똑하다는 전제에서 말하는 사람 아닌, 차분한 어조로 거부감없이 무신론을 설파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길 기대한 듯하다. 적어도 난 그걸 기대했었다. 그런데 내용을 알고 보니...
그저 광신없이 살아가는 사회도 멀쩡하다는, 오히려 열렬히 종교를 지향하는 사회보다 건전하더라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 김이 팍 새는 기분이었다. 그래, 이 교수가 1년간 살았던 덴마크와 스웨덴이 행복한 나라고, 종교를 그다지 신봉하지 않음에도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시민 의식을 기반으로 해서 살아가는 사회라는건 알겠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단지" 종교 때문이라고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거 좀 비약 아니야? 전체를 설명하면서 조그만 일부분으로 전체를 다 조망한 것인양 부풀린 것 아닐까 라는 의문이 모략모략 머리에서 피어 올랐다.
일단 스웨덴과 덴마크가 다른 나라들보다 행복하고 살기 좋은 나라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그게 단지 무신론의 영향때문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본다. 일단 그들은 다른 나라들보다 잘 산다. 교육 수준이 높을 수도 있고, 비이성적인 논리를 배격하는 감각이 다른 나라보다 발달한 나라일 수도 있다. 인구밀도가 다른 나라들보다 낮기 때문에 개개인에 대한 자아존중감이 특별하게 높은 나라일 수도 있고, 각자가 중요하다는 관념을 어린 시절부터 뼈에 새기면서 성장시키는 그런 나라여서 그럴 수도 있다. 불행이 들불처럼 번지는 곳에 종교가 성하다는걸 감안해보면, 어쩌면 원인과 결과가 바뀐 것일지도 모른다. 즉, 그들은 행복하기 때문에 종교가 필요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종교가 없어서 행복한게 아니고 말이다.
인간에게 신이 왜 필요한지 그걸 알아낸다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아니, 그보단 복잡하다고 하는게 맞는 말이겠지. 인간의 심리나 역사, 근본, 문화에 위치한 것이라서, 단지 필요하다 아니다란 논리론 설명이 불충분할 거란 뜻이다. 나야 물론 종교를 필요악이나 귀찮은 것 정도로 여겨, 때론 그것의 성가심에서 벗어나면 좋겠다 싶을때가 많지만서도, 적어도 난 종교를 근절시킬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안다. 만약 내가 종교가 전혀 필요없는 것이라는 이유로 모든 이들에게 종교를 믿지 못하게 말리고 다닌다면, 그건 말도 안 되는 독재이자 강압일 것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마치 종교를 믿지 않으면 착한 사람이 아니고 ,그렇기에 어떻게 해서든 종교를 믿어야 한다고 길거리에서 나를 붙잡고 설교를 늘어놓는 기독교 인들처럼 말이다. 다를게 뭐가 있겠는가. 남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는 바보같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는 다를바가 없다. 그래서 내가 종교인들을 붙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일랑은 믿지 말라고 충고하지 않는 것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생각과 감정이란게 있고, 그게 옳다 그르다 할 권리는 내게 없다. 남들이 내게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예전에 어떤 심리학 책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길거리에서 선교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은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일면 수긍이 되더라. 자신이 너무우울하고 불행하기 때문에, 어쩌면 그들에겐 동지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자신보다 더 우울하고 불행하며 행복할 기미가 없는 그런 사람들을 붙잡아, 그래, 나보다 더 정신이 나간 사람이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왜 그들이 내 소매를 붙들고, 왜 하나님을 믿지 않냐고 따지는 것에 대해 조금 아량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적어도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그들이 말하는 대로 종교를 믿으라는게 아니라, 왜 너만 행복하냐는 것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붙잡아서 그들에게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하는게 어쩌면 그들의 숨은 의도일지도... 그렇게, 종교는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많은 다른 양상들을 지녔다. 종교가 생겨난 것도, 그리고 그렇게 많은 비리와 위선의 온상이 되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것도, 실은 종교 자체의 문제라기 보단 종교가 인간 사회의 다른 반영이라는 점에 있는게 아닐까 한다. 그러니까 ,종교는 인간이 없어지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은 어떤 거울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모습을 비스듬하게 투영하고 있는...
모르겠다. 사회가 지금보다 보다 진일보하고 이성적이 되며,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일반화 된다면 우리에겐 신이 필요없게 될지도. 그러나, 인간이 그렇지 못하다는걸 아는 지금, 단지 신이 없는 사회가 신이 있는 사회보다 더 낫다는 말은 단순한 비약이라고 밖엔 생각되지 않는다. 깊이 있는 분석이나 통찰력에서 내린 결론이 아닌. 해서 역시 심도 있는 분석이었어, 내진 그래, 바로 그거야를 외치면서 동조하고 팠던 이 책은, 뭐야 시시하게...를 외치면서 덮을 수밖엔 없었다. 그래, 우리 나라도 이렇게 건전하고 올바르며 윤리적이고 행복한 사회가 되었음 하는 바람이다. 하지만 그게 신이 없음을 전제로 해서 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신을 열심이 믿는다고 해서 그렇게 될 거라고도 생각되지 않고. 우리가 열렬히 바란다면, 그런 사회를 말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열심히 쓴다면 언젠가는 미래에 어느날에 우리 후손에게 그런 사회를 물려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데, 그건 신이 있다 없다와는 관련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신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일지도. 우리가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는,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는데는 종교가 전부는 아니니 말이다. 어쩌면 신에게 매달리는 사회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회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우리나라가 그런 나라가 되기는 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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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가장 미약한 덴마크,스웨덴이 가장 도덕적으로 깨끗하다. 안티고네 ㅣ 2012-06-04 ㅣ 공감(2) ㅣ 댓글 (0)
#특히 오르후스(덴마크 제2의 도시)에서 호스피스 간호사로 일하는 43살의 안네가 무척 흥미로웠다. 오랫동안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일을 하면서, 무신론자들이 대개 임박한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안네가 말하는 것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안네는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걱정과 불안으로 마음이 망가져서 죽음을 가장 힘들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지니계수를 바탕으로 경제적 평등을 살펴보면 덴마크는 세계 2위, 스웨덴은 4위다. 소득 평등이 가장 잘 이루어진 상위 20개국 중 대다수도 역시 종교의 세력이 미약한 곳이다. ...세계 경제포럼에 따르면, 스웨덴의 경쟁력은 세계 3위고, 덴마크는 4위로 그 뒤를 잇고 있다. 20위권 국가 중 종교의 세력이 강한 곳은 미국(6위)뿐 다른 나라들은 국제적 기준에 비추어볼 때 모두 종교성이 약한 곳이다.
#정치가와 공무원의 청렴도 면에서 덴마크는 세계 4위, 스웨덴은 6위며, 역시 상위 20개국 중 대다수가 비교적 종교성이 약한 곳이다. 가난한 나라를 위한 자선 행위를 살펴보면 덴마크는 2위, 스웨덴은 3위고, 세계 최빈국들에 가장 많은 원조를 하는 20개국 중 많은 나라가 확연히 비종교적이다.
#내가 지금까지 확고하게 밝히려고 한 것은, 지구 상에서 가장 비종교적인 나라들이 가장 건강하고 성공적인 나라들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물론 상관관계가 곧 인과관계는 아니다. 덴마크나 스웨덴 같은 나라들이 지금처럼 성공적이고 건강한 사회가 되는데 비종교성이라는 '원인'이 반드시 존재했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종교의 '부재'가 사회에 방해가 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독일의 싱크탱크인 한스뵈클러슈티프퉁은 최근, 사회적 정의의 확립에 얼마나 성공했는지를 근거로 각국의 순위를 매겼다.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비종교적인 나라인 덴마크와 스웨덴이 공동 1위를 차지했다.
#만약 이 세상에 가장 '안전하고 견실한' 사회가 있다면 비교적 세속적인 덴마크가 바로 그런 곳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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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16,000원
판매가 14,400원 (10%, 1,600원 할인) | 무이자 할부
반양장본 | 367쪽 | 152*223mm (A5신) | 514g | ISBN : 978896090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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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사회학자 필 주커먼은 비종교적인 사회를 연구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는다. 자료 조사 결과 그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이 비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문제없이’ 사회 공동체를 꾸려간다는 잠정적 결론을 얻고 이를 실증적으로 알아보고자 덴마크로 떠난다. 그는 북유럽 사회가 종교성 없이도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경제적으로 문제없이, 오히려 종교성이 충만한 미국 사회보다 풍요롭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목도한다.
<종교, 심층을 보다>와 <예수는 없다>의 저자 오강남 교수는 <신 없는 사회>가 평소 맹목적인 표층 종교를 비판해온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한다며 출간을 환영했다. 맹목적인 신앙을 비판하고 종교의 본래적 의미를 되물으며, 한국 현대사회의 한 단면을 조명해줄 책이라는 것이다. 필 주커먼은 이 책 <신 없는 사회>로 [포워드 매거진] 선정 ‘올해의 책’ 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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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신 없는 사회에 대하여
신 없는 사회
지극히 인간적인 사회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 옌스·안네·크리스티안과 나눈 대화
삶과 죽음을 대하는 자세
신과 멀어진다는 것 레네·소니·기테와 나눈 대화
종교는 문화
세속주의자가 사는 법
세속주의자로 사는 이유
신을 믿는다는 것 도르테·라우라·요하네와 나눈 대화
문화적 종교
나오는 말 종교를 다시 생각하다
표본의 특징과 방법론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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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 : 많은 덴마크인, 스웨덴인과 나눈 심층 대화를 통해 나는 상대적으로 비종교적인 사람들의 삶을 깊이 파악할 수 있었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미미하고 주변적인 사회에서 삶의 본질이 어떤 모습인지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보고 분석할 기회를 얻었다. 따라서 이 책은 개인적인 성찰의 결과물이자, 내가 지상에서 가장 덜 종교적인 지역에 살면서 발견하고 경험하고 새로이 배운 것들에 관한 사회학적 분석이다.
P.23 : 내가 이 책에 『종교 없는 사회Society without Religion』 대신 『신 없는 사회Society without God』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 중 하나는, 루터교의 많은 요소들이 지금도 덴마크와 스웨덴 문화에 깊게 배어 있다는 점이다. (...) 하지만 이처럼 분명하게 남아 있는 루터교의 흔적들조차 믿음이나 영적인 확신 때문에 지켜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보다는 문화적 전통이라는 의미에서 기독교 의식을 지키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P.32 : 내가 이 책에 『종교 없는 사회Society without Religion』 대신 『신 없는 사회Society without God』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 중 하나는, 루터교의 많은 요소들이 지금도 덴마크와 스웨덴 문화에 깊게 배어 있다는 점이다. (...) 하지만 이처럼 분명하게 남아 있는 루터교의 흔적들조차 믿음이나 영적인 확신 때문에 지켜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보다는 문화적 전통이라는 의미에서 기독교 의식을 지키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오강남 (종교학자,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명예교수)
: 어느 사회나 건실한 사회로 자라나려면 맹목적인 근본주의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나의 평소 지론이었는데, 이를 실증적으로 증명해주는 책이 나오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다. 미국의 종교사회학자 필 주커먼 교수가 1년여 덴마크와 스웨덴에 거주하면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 조사한 결과 미국처럼 기독교 근본주의적 열정 같은 것이 거의 없는 북 유럽 나라 사람들이 복지, 교육, 건강, 인권, 평등, 범죄율, 부패지수, 자살률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미국인들보다 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산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이야기이다. 현재 표층적인 근본주의적 신앙이 창궐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도 이런 사례가 타산지석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샘 해리스 (『종교의 종말』,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의 저자이자 ‘이성 프로젝트’ 창설자)
: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신에 대한 믿음이 문명사회의 기반이라고 확신한다. 『신 없는 사회』는 이것이 이상할 정도로 미국적인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 우리와는 다른 세속주의적인 사회를 이렇게 살짝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를 겸허하게 만드는 동시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경험이다. 지금이라도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중앙일보
- 중앙일보(조인스닷컴) 2012년 04월 21일 '책꽂이'
동아일보
- 동아일보 2012년 04월 21일 '인문사회'
조선일보
- 조선일보 Books 북Zine 2012년 04월 21일자
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12년 04월 20일
지은이 : 필 주커먼 (Phil Zucker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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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주 클레어몬트 피처 칼리지 사회학과 교수. 오리건 주립대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종교와 사회의 관계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무종교 문화와 종교 없는 사람들을 활발히 연구하고 있다. 2011년에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무종교성을 연구하는 학제간 학과를 개설했다. 저서로 『신 없는 사회(Society Without God)』, 『더 이상 신앙은 필요 없다(Faith No More)』 등이 있다.
저자는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무종교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옮긴이 : 김승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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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
균관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시립대학교에서 여성학을 공부했다.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로 근무했으며,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19호실로 가다》, 《사형집행인의 딸(시리즈)》,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이 얼마나 천국 같은가》, 《50억 년 동안의 고독》, 《스토너》, 《듄》, 《뇌의 문화지도》, 《소크라테스의 재판》, 《톨킨》, 《퓰리처》, 《다이아몬드 잔혹사》, 《살인자들의 섬》, 《파리의 연인들》, 《포스트모던 신화 마돈나》, 《영원한 어린아이, 인간》, 《진화하는 결혼》, 《킨제이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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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적 기독교에 싫증난 미국인 사회학자
신 없이도 행복한 사회 스칸디나비아를 들여다보다
미국인 사회학자 필 주커먼은 비종교적인 사회를 연구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는다. 자료 조사 결과 그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이 비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문제없이’ 사회 공동체를 꾸려간다는 잠정적 결론을 얻고 이를 실증적으로 알아보고자 덴마크로 떠난다. 14개월 동안 생활하며 150여 명을 심층적으로 인터뷰한 주커먼은 북유럽 사회가 종교성 없이도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경제적으로 문제없이, 오히려 종교성이 충만한 미국 사회보다 풍요롭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목도한다. 주커먼은 자신의 경험담과 인터뷰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종교성에 관한 사회학적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검증하며, 초월적 세계에 의지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일련의 이론들을 반박하려 한다. 저자가 계속해서 강조하듯이, 이 책의 목적은 종교성이 없는 사회가 더 행복하게 잘 산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종교성이 약해도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만큼 위험한 사회가 도래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 도덕적이고 풍요로운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음을 사례를 들어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자신이 스칸디나비아에서 1년여 동안 생활한 것은 “세속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 것”과 같았다고.
『종교, 심층을 보다』와 『예수는 없다』의 저자 오강남 교수는 『신 없는 사회』가 평소 맹목적인 표층 종교를 비판해온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한다며 출간을 환영했다. 맹목적인 신앙을 비판하고 종교의 본래적 의미를 되물으며, 한국 현대사회의 한 단면을 조명해줄 책이라는 것이다.
실존, 그 자체에 충실한 사람들
『신 없는 사회』는 주커먼이 실시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종교의 힘이 그리 강하지 않은 사회에서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현재를 살아가고 죽음을 마주하며 초월적 존재를 현실적 존재로 만드는지 기록한다. 실증적 자료에만 의존하는 사회학자답게 주커먼은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가령 신이 없는 사회만이 행복하다든지, 신을 맹목적으로 믿는 사회는 불행하다든지 하는 인과적인 결론은 이 책의 관심 밖이다. 또한 개별 인터뷰를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신 없는 사회』를 통해 이들의 생활을 일반화할 수 있는 이론은 없다. 하지만 인터뷰 대상자들이 삶과 죽음 등 인간의 인생을 이야기하며 공통적으로 보인 태도를 세 가지로 정리해볼 수는 있다. 이들은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것만 믿는 ‘합리적인 회의주의자’이며, 이상향을 따로 설정하지 않고 현실에 충실한 ‘이상적인 세속주의자’이고, 이러한 이상적 현실을 만들기 위해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들고자 애쓰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개인주의자’들이다.
- 합리적인 회의주의자
이들은 초월적인 존재가 우주를 창조했다는 식의 창조론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다윈 이후의 진화론이 인간의 생명과 우주의 탄생을 더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믿으려면 직접 경험해봐야죠”라거나 “믿고 싶어요. 하지만 이성은 그런 존재가 없다고 말하죠”라는 식의 대답은 스칸디나비아 사람들로부터 쉽게 들을 수 있는 대답이다. 이런 합리주의적 태도는 죽음관에도 큰 영향을 미쳐서, 현세는 죄악으로 가득 찬 지옥이고 내세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뿌리 내리지 못한다. 이들은 죽음을 자연현상으로 차분하게 받아들이며 그 이후의 일은 상상하지 않는다. 감지하지 못하는 세계를 상상하고 믿으며 위안을 찾는 행위는 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리고 또 뭐? 그 다음에는 뭐가 있지?’ 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나는 (…) 행복하게 사는 것, 아니 불행한 삶이라 해도 삶은 삶이오. (…) 사는 이유를 말한다면 죽는 거라고 말하는 거지. 천국에 가는 건 나한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에요.”(옌스)
“절대로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사라지는 거예요.”(티나)
“우리의 존재가 끝나는 거죠. 그것뿐이에요.”(이사크)
“내 몸이 분해돼서 자연의 자연스러운 순환의 일부가 될 겁니다.”(마스)
흥미로운 점은 오히려 종교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죽음이 다가올수록 두려워하며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하는 안네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천국에 가지 못할까 걱정하며 자신의 인생에 죄책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죽음 이후에 대한 상상이 이들을 두렵게 만드는 것이다. 주커먼이 만난 대다수의 스칸디나비아인들은 다른 모든 생명체처럼 인간의 삶도 죽음과 함께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겼고 그에 따라 현재의 삶에 충실했다.
- 이상적인 세속주의자
합리적인 회의주의자의 태도는 사람들이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며 이들이 지금, 여기를 마음껏 누리도록 한다. 주커먼은 “삶이 끝나면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인간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사람들에게 질문한다.
“내 경우에는 삶이 끝나면 모든 게 끝나는 게 확실해요. 인생의 의미? 나는 지상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을 누렸어요. 그 시간을 최대한 잘 보내는 것이 나의 의무죠. (…) 정말이지 훌륭한 세월을 보냈어요.”(라르스)
“삶의 의미라는 건 그냥 나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같은데.”(요나스)
“의미야 사방에 있죠. (…) 자신의 의미는 자기가 만들어내는 거죠……. 그걸 할 수 없다면 먼저 자기 인생을 정비해야 할 거예요.”(티나)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뭐가 됐든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고 (…).”(셰르스틴)
“내게 묻는다면 생이 즐거웠다고 말하겠어요. (…) 원칙적으로 삶은 모두가 받은 기분 좋은 선물.”(이사크)
이들은 삶의 궁극적인 의미 같은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다만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 뿐이다. 이들과 대화하며 주커먼은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아는 것’이 과연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삶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한 사색이 인간의 본성이며 이것이 종교를 지탱하는 원동력이라는 몇몇 주장에 의문을 품게 된 것이다.
- 공동체를 지향하는 개인주의자
죽음 이후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의미 부여하기를 꺼려하는 회의주의적이고 세속주의적인 사람들이지만, 이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냉담하거나 무심하지 않다. 세계 최고 수준의 사회복지 시설이 말해주듯이 덴마크와 스웨덴 사람들의 사회 참여율은 아주 높은 편이다. 초월적인 존재가 두려워서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공동체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 도덕과 윤리를 따르는 것이다. 결국 이들에게 삶의 궁극적인 의미라는 것은 한 개인의 존재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는 사회적 차원의 문제다. 죽음 앞에 무력한 인간의 삶을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투영하며 모두가 연약한 존재라는 공동체 의식 속에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는 생활방식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종교는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에게 생활 윤리로 다가온다.
“기독교나 다른 종교에 보면, 다른 사람들을 대접하는 법 같은 것에 대해서 정말 좋은 말들이 있잖아요. (…) 살아가는 데 유용한 훌륭한 규칙들이 그 안에 있기는 해요.”(레네)
“내가 종교를 믿지 않아도 내 가치관이 전부 종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게 중요해요.”(소니)
“난 하느님을 믿지 않아요. 하지만 난 교회를 계속 지키고 싶어요. (…) 난 그게 덴마크 문화의 일부라고 생각해요.”(기테)
“편안한 백지상태”
세속주의자들의 종교관
주커먼은 이런 스칸디나비아인들의 태도에 ‘세속주의’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이 ‘세속적’이라는 말에 사회학적인 이론을 적용해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려 한다. 그는 종교와 종교성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반면, 세속주의와 세속성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지 못한 추세를 지적하며 이 때문에라도 사회학적인 시선으로 스칸디나비아 지역을 연구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리처드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 샘 해리스 같은 이들처럼 세속성이 종교성보다 낫다고 논쟁적으로 옹호하는 경우는 많지만 이들이 세속주의적인 삶과 세속주의적인 사람들 자체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종교와 상관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연구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주커먼의 사례 연구는 세속주의적인 문화 속에서 세속주의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생하게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세속주의적인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지닐까? 주커먼은 이들의 태도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꺼림/삼감’의 태도인데 대체로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주저한다는 것이다. 이는 종교가 내밀한 주제라 말하기를 꺼린다기보다, 주커먼이 일컫듯 이들이 “편안한 백지상태”여서 종교에 대해 할 말이 없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종교에 대해 숙고할 때가 드물고 주변 사람들과 종교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더욱 드물기 때문에 누군가와 이와 관련한 대화를 나눌 “이야기적 구조Narrative Structure”가 없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온화한 무관심’의 태도로, 종교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교회를 자신들의 문화유산으로 생각하면서도 종교를 믿지는 않는 이들을 가리킨다. 인터뷰 대상들 가운데 많은 경우가 이런 태도를 보였다. 세 번째는 ‘철저한 무관심’의 태도로, 지금까지 살면서 종교, 혹은 신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이들을 말한다. 주커먼이 인터뷰를 시도한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하느님을 믿느냐”는 질문에 한참을 대답하지 못한 채 생각에 잠겼다. 한참 후 내놓은 대답은 “생각해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다”는 식이었다. 그러고 나서 이들은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 같다는 결론을 인터뷰 자리에서 내렸다.
공동체의 기념물
종교는 문화
그렇다면 이들은 왜 세속주의자가 되었을까? 덴마크인들은 키에르케고르의 후예들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살았던 19세기를 짐작해보면 루터교의 영향이 강했으며, 그 역시 그러한 세계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적 갈등은 당대의 강력한 종교적 힘 없이는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주커먼이 주목하듯이 인터뷰 대상들의 내력을 살펴보아도 지금 덴마크와 스웨덴 사람들의 조부모 세대 이상에서는 국교회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모 세대, 자신들의 세대, 자식들의 세대로 올수록 그 힘은 서서히 약해졌다. 이는 비단 북유럽뿐 아니라 종교개혁이 처음 일어났던 독일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네덜란드와 프랑스 등 전통적으로 기독교의 힘이 강했던 유럽 국가에서는 대체로 맥을 같이하며 나타나는 현상이다. 주커먼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이 역시 최선을 다한 설명일 뿐 확실한 인과관계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전제한다.
첫째, 덴마크와 스웨덴에서 루터교는 국교회다. 이렇게 종교 조직이 하나뿐일 경우 “게으른 독점”의 모습이 나타난다고 추측할 수 있다. 자신들의 종교를 홍보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종교에 흥미를 잃게 되고 자연스럽게 종교성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다양한 종교들이 경쟁하는 사회의 대표격인 미국과 비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둘째,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가 안전하다고 느낄수록 종교와 멀어지는 경향이 있다. 덴마크와 스웨덴을 예로 보아도, 이들 나라가 극심하게 빈곤했던 시기인 19세기에는 종교의 세력이 막강했다. 하지만 지금 덴마크와 스웨덴을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지역 국가들 대부분은 부유하고 사회복지가 잘 마련된 나라에 속한다. 셋째,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활발해질수록, 그럼으로써 종교 생활에서 멀어질수록 그 여성들의 남편과 자녀 역시 종교에서 멀어진다고 설명할 수 있다. 사회에서 임금노동을 하는 여성들이 전업주부로 일하는 여성들보다 덜 종교적이며 이런 사실이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오늘날 덴마크와 스웨덴 여성 대다수, 특히 덴마크의 경우 여성들의 80퍼센트 가까이 가정 밖에서 임금노동을 한다는 통계는 이런 상관관계를 뒷받침한다. 그 밖에도 미국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사회 구성원들의 문화적 정체성이 동질적인 스칸디나비아 사회에서는 굳이 종교를 통해 공동체를 구성하고 소속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해석도 주목할 만하다. 또한 높은 교육 수준, 사회민주당의 강세 등의 사실도 종교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것도 그 이유를 온전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이렇게 세속적인 사회에서 신실한 신앙심을 지닌 사람들은 자신들의 종교성을 쉽게 내보이지 못한다. 이들은 자신이 초월적 존재를 믿는다는 사실을 커밍아웃하듯이 친한 사람들에게 고백한다. 덴마크와 스웨덴 사람들이 대체로 종교 자체에 대해선 관용적이지만, 실제로 현실 너머를 믿고 추구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만날 경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 미국인의 눈에는 더욱 신기하게 비치는 사회를 두고 주커먼은 ‘문화적 종교’라는 이름을 붙인다. 종교 사회학자 N. J. 디머래스가 2000년에야 정리한 개념인 ‘문화적 종교’는 종교적 전통에 소속감을 느끼면서도 그 종교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들의 비율이 극히 낮은 경우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면서도 성경의 말을 문자 그대로, 즉 신이 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믿을 수는 없는 사람들의 태도를 가리킨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인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는 경우 이들은 종교를 현실화된 문화로 대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예수가 신의 인간화임을 믿지 못하며 성모 마리아의 동정녀 출산을 믿지 않는다. 다만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따르고 교회 건축물이 보여주는 인간 문화의 경이로움에 감탄하며 이를 자신들의 생활로 받아들여 종교의 가치관이 자연스레 삶이 되었을 뿐이다. 이들에게 신의 존재 유무와 천국과 지옥의 실재 여부는 관심사가 아니다. 종교는 이들에게 “공동체의 기념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종교를 다시 생각하다
덴마크에서 인터뷰 대상이었던 모르텐은 6개월 정도 미국 사회를 경험한 다음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했던 덴마크에서의 인터뷰 내용을 철회한다. 미국 사회의 종교성과 신앙심을 기준으로, 그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라면 자신은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르텐의 말은, 주커먼에게 자신은 신을 믿는다고 말한 많지 않은 인터뷰 대상들의 경우 미국 사회의 기준으로는 엄밀히 말해 신앙인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모르텐은 말한다, “우리 덴마크인들은 미국이 우리한테 전쟁에 같이 나가자고 권유(…)할 때 아주, 아주 조심해야 한다고 말할 거야. 미국에서는 광신도들이 굉장히 커다란 영향을 갖고 있으니까. 내가 보기에 덴마크인들은 이 점을 모르는 것 같아.” 덴마크에서는 신앙인이었던 그가 미국 사회를 경험한 다음엔 자신을 “불가지론자, 어쩌면 무신론자”로 규정하게 된 것이다. 이런 모르텐의 태도는 종교 지향적 정체성과 세속주의적 정체성이 사회적 여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초월적인 존재에 의지하려는 종교적 성향이 인간의 본성에 내재해 있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다.
1년여 동안 스칸디나비아의 세속적 공기를 들이마신 주커먼은 자신이 살아온 미국 사회를 떠올리며 되묻는다. 한 “사회의 도덕성과 종교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구성원들이 성경을 많이 사랑하는 사회가 도덕적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빈곤을 사실상 퇴치한 사회가 도덕적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많은 구성원이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사회가 윤리적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어린이와 노인, 고아의 복지를 위해 (…) 전문적인 보살핌을 제공해주는 사회가 윤리적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신 없는 사회』는 어느 쪽(대표적으로 미국 사회와 스칸디나비아 사회)이 결과적으로 종교적 교리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미국 사회를 비롯해 몇몇 나라에 만연한 표층적 종교 근본주의를 비판할 근거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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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 12편
신이 필요없는 그들만의 낙원 bosch777 ㅣ 2013-03-18 ㅣ 공감(2) ㅣ 댓글 (0)
우선 저자의 의도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하느님이 없는 사회는 지상의 지옥이 될 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입에 담는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라니... 『신 없는 사회』는 약 1년간 덴마크에 살면서 스웨덴과 덴마크의 비종교성에 대한 연구를 한 결과를 담고 있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내용도 명확하다. 덴마크와 스웨덴 같은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은 빈부의 격차가 크지 않고 막중한 세금을 내지만 그에 합하는 강력한 복지정책을 통해 안정된 국민생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국민 대다수가 기독교인이라 생각하고 있는 이 나라 국민들은 신을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 없고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신을 믿지 않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율배반적 표현이 어째서 가능한지를 저자는 다양한 계층과 연령의 사람들과 많은 인터뷰와 사회학적 연구를 통해서 도덕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종교가 반드시 필수적이지는 않음을 역설한다.
사실 이 책은 기독교의 힘이 거의 미비한 스웨덴과 덴마크의 모습을 소개하는 것과 동시에 저자가 주로 살고 있는 미국의 왜곡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고도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근본주의적인 기독교가 맹신하고 있는 초자연주의적 유신론이 낳는 패단에 대한 경계와 우려를 곳곳에 표출하고 있다. 세상의 분쟁이 일어나는 주요 원인 중 하나인 종교간 갈등은 왜곡된 종교상이 낳은 결과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지 않은가?
이 책을 통해 재고할 수 있었던 편견 하나는 (어떤 형태라도) 종교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면 도덕적으로도 타락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내 속의 욕망과 탐욕을 절제하고 이웃과 뭇 피조물들을 사랑하라는 종교의 가르침이 없는 곳이 과연 살기 좋은 곳이 될 수 있을까? 내세에 대한 기대도 구원에 대한 희망도 없이 우리를 악의 세력에서부터 스스로를 지키면서 현실을 잘살 수 있을까? 헌데 저자가 인터뷰한 덴마크와 스웨덴 국민들에게 이러한 불안과 걱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책의 전개가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고 느껴졌던 것은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과의 인터뷰내용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수많은 사람들의 인터뷰 내용은 대체로 대동소이하다. 삶의 의미란 없으며, 신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고, 기독교인이긴 하지만 교회는 거의 나가지 않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며 종교는 개인적인 문제이기에 당연히 정치와는 분리되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국민들의 자연스러운 세속화가 이뤄진 이유에 대해 저자는 크게 3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이들 국가에서 가장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루터파 교회는 국민들에게 자연스레 스며든 것이 아닌 통치자들의 정략적 이점을 얻고자 기독교를 들여온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수세기 동안 국가의 지원까지 받으며 사실상 국교나 다름없는 종교적 독점은 사람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노력을 게을리 하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두 번째로 (가장 설득력 있게 생각되는 부분인데) 사람들이 점점 안전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면서 종교에서 멀어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 삶을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들이 충족되면서 가난과 질병에서 멀어짐에 따라 안정적인 생활을 영유할 수 있게 되고 굳이 초월적 절대자에게 의지하지 않게 된 것이다. 엄청난 재벌도 없지만 비참하게 가난한 사람들도 없는 스웨덴과 덴마크 국민들은 전반적으로 현재의 삶의 수준에 만족하고 있다. 세 번째는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증가하면서 점점 종교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밖에 여러 의견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분명 이 모든 것들이 크거나 작게 복합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이른바 “문화적 종교”라는 개념에 대한 설명은 무척 중요하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이 책에서는 문화적 종교에 대해 “오랜 역사를 지닌 종교적 전통에 일체감을 지닌 사람들이 종교 안의 초자연적인 요소를 진심으로 믿지 않으면서도 확연히 종교적인 행사에 참여하는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이 나라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내가 속한 교회에서도 기독교에 대해 일종의 문화적 종교로 대하는 젊은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교리적 지식이나 신앙적 깊이는 알 수 없지만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사회적 기여나 봉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신을 믿지 않고 교회는 그저 자신들 삶에 매우 친숙한 환경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들이 구원을 받지 않고 지옥에 간다고 말하는 것은 무척 무식한 생각일 것이다.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것이 이 세상에 종교적인 갈등이 없어지는 길이 되지는 아닐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사회학자의 관점에서 충분히 유의미한 결과물로 인정되는 이 책에서 물론 동의하지 않는 것들은 있다. 한국이 종교적이지 않다는 것에는 나는 좀 다른 생각이다. 그저 기독교인의 비율이 낮을 뿐이다. 어느 통계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종교에 등록된 교인이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1.5배 ~ 2배라고 하니 한국은 (다양한) 종교적 영향력이 강하게 존재하는 나라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아마 저자가 한국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또한 저자가 바라보는 기독교라는 것은 여전히 미국국민 대다수가 생각하고 있는 초자연주의적 유신론을 근간으로 하는 근본주의(복음주의) 기독교라는 점이다. 저자가 미국사람들에게 강하게 어필하기 위한 목적에 충실한 책의 구성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이 책을 읽은 내가 생각하는 종교의 정의와는 차이가 있다. 덴마크와 스웨덴의 이 현상들과 정확히 다른 대척점에 알맞은 근본주의적 종교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저자가 언급하는 종교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신을 믿지 않고도 이렇게 행복하게 잘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말로 (저자가 정의하는)종교가, (일반적 신자들이 생각하고 있는)신이 우리에게 필요한 건가?”라고 저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비록 종교는 다르지만 아직도 개발도상국이나 문명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신을 잘 믿고 살면서도 행복도나 삶의 만족이 높은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마지막으로 과연 덴마크와 스웨덴에 기독교의 힘이 미비한 것처럼 보여도 정말로 그런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비록 저자가 정의하는 종교나 현상적으로 종교기관의 힘이 약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허나 약자를 돌보고 더불어 잘사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면서 현재를 충실히 살고자 노력하는 그들의 모습은 종교가 지향해야 하는 “현실에서의 새 하늘과 새 땅 혹은 땅에서도 이뤄진 하늘나라”에 근접한 모습이란 생각이 든다. 책 뒷면에도 적혀 있듯이 사람들의 가치관이 종교에 바탕을 두고서 살아가는 것... 그것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범위를 국가에까지 확장시키면서 낙원을 건설하려는 성숙한 국민의식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런지... 분명 현재 그들이 만들어가는 “신이 필요 없는 사회“는 왜곡된 신앙이 낳은 초자연주의적 유일신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증거이자 참된 신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가야 하는 사회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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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는 사회' 살만한가? junghoi92 ㅣ 2012-06-16 ㅣ 공감(2) ㅣ 댓글 (0)
신 없는 사회 by 필 주커만
오래간만에 만나 보는 내 입맛에 딱 맞는 책이었다. 우선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무거운 주제 ? 신 또는 종교는 난해하면서 민감한 소재임에 틀림 없다 ? 를 단순 명료하게 쉽게 풀어가는 작가의 능력이다. 사회학자인 작가는 거대 담론이나 형이상학적 철학의 유혹을 뿌리치고 오직 자신의 관심사인 “종교 (=신)없이도 행복한 사회 ? 민주적이고, 관용적이고, 평등하고, 경제적으로 풍요한 사회 ? 가 가능한가?” 라는 질문에 답을 찾고자 하며 그의 대답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비종교적이면서도 사회적/정치적/경제적/문화적으로 행복한 사회가 충분히 가능 하다는 것을 덴마크와 스웨덴을 통해서 확신한다. 그리고 이 책의 주제를 넘어서는 문제일 수도 있지만, 작가는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종교가 인간에게 반드시 선험적이거나, 자연적이거나, 내재적인 것은 아님을 덴마트, 스웨덴에서 1년 동안의 여러 인터뷰를 통해서 깨닫게 된다.
그럼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인터뷰 본론으로 들어가 덴마크와 스웨덴인 들이 얼마나 비종교적인지를 알아 보기로 하자. 저자가 생각하는 종교의 최소한의 구성 요소는 초자연적 것, 다른 세상의 것, 그리고 영적인 것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런 점에서 죽음 뒤의 세상을 믿지 않고 삶의 의미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덴마크, 스웨덴인들을 종교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연한 결과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하느님, 예수님, 죄악, 악마, 천당, 지옥, 부활, 성경과 같은 기독교의 절대적 가치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덴마크, 스웨덴 ? 물론 스웨덴에서 루터교는 더 이상 국교가 아니라고 한다. - 사람들은 국교회에 소속되어 있어 교회에 세금을 납부하며, 아이들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남녀 커플이 교회에서 결혼하는 것을 당연시 생각 한다. 저자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초자연적인 존재는 믿지 않으나 종교적인 행사에는 참여하는 모습이 이 나라에서는 보편적이며, 또한 어찌 보면 이율 배반적일 수도 있는 상황에 대해 별 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흥미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미국 종교 사회학자 N.J. 디머래스의 ‘문화적 종교’ 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데, 이 개념은 “문화적 종교는 오랜 역사를 지닌 종교적 전통에 일체감을 지닌 사람들이 종교한의 초자연적인 요소를 진심으로 믿지 않으면서도 확연히 종교적인 행사에 참여하는 현상이다 (p261)” 라고 요약 될 수 있다. 이 북유럽 사람들은 종교를 영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한 집단이 오래 동안 공유한 문화적 전통 ? 경험, 개념, 가치관가 여러 가지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 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결론은 단순하지만 시사적이다. 종교 없이도 사회 ? ‘인간’ 이란 단어도 동일하게 적용 가능하다 ? 는 충분히 건강하고, 건전하고, 풍요하고,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덴마크와 스웨덴이 과연 정답일까? 라는 질문에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여러 국제 기구들이 제시하는 사회적 지표를 볼 때 최소한 이 국가들이 소위 말해 ‘살만한 국가 상위 리스트’의 윗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본래 의도가 이토록 순하고 약한 수준에 불과 했을까? 내가 보기에는 저자가 종교의 천국, 아니 종교 과잉국이라고 할 수 있는 모국 미국 ? 우리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뭐 나라 (아니 서울이었던가, 하여튼) 를 하나님한테 바친다는 분이 대통령을 하고 계시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지… ? 사회에서 본인의 연구 결과가 가져 올 수 있는 파장을 고려하며 미리부터 연구 범위를 안전한 수준으로 조율한 게 아닌가 싶다. 저자의 말하지 못한 부분을 내가 감히 대신한다면 - 물론 나도 수위를 조절했음을 미리 밝혀 둔다 - 다음과 같다.
종교는 누구나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남에게 강요하지는 말자. 혹자는 이를 전도, 포교, 선교라고도 하나 본데, 나 만이 정말로 유일하게 옳다고 할 수 있는 지, 그래서 내가 남을 가르칠 위치에 있는 지에 대한 고민은 해보고 그 짓을 하는 지 궁금할 따름이다. 자신들의 종교 만이 옳다는 일방적인 사고 방식에서 타 종교를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는 배타적인 종교는 ‘우리’를 행복하게 할 지는 몰라도 ‘저들’을 불행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을 반드시 명심하자. 종국에는 ‘저들’의 불행이 우리’의 불행으로 돌아오리라는 것을 인류의 역사는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음을 잊지 말자.
...신(神)없는 나라 신(興)나는 나라... 한사람 ㅣ 2012-06-13 ㅣ 공감(15) ㅣ 댓글 (4)
반가운 소식
나는 종교를 기회의 문제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친구들은 뱃속에서부터 부모님과 함께 교회를 다녔다. 일요일이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교회에 나갔다. 그들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종교를 가진 것이 아니라 환경 속에서 종교를 수용할 기회를 가지고 태어난 쪽에 속했다. 친구들을 보면서 나 역시 부모님이 무신론자가 아니었다면 교회를 다니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중고등학교는 불교학교를 대학교는 기독교 학교를 졸업했다. 그래서인지 성인이 되고나서 부터 종교는 내게 학문에 가까웠다. 하지만 무교일지라도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선 긍정적인 편이었다. 아무래도 신이란 일단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 부재한다고 믿는 쪽보다 손해를 덜 본다는 지극히 계산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듯하다. 물론 가끔 신에 의지해 남몰래 기도를 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은 없다. 그러니까 내 인생에 있어 종교는 일상으로 체화될만한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단지 신이 존재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만으로 학문과 철학, 그리고 문화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종교와 신, 그리고 죽음, 삶의 의미 등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가치를 하나 배울 수 있었다. 바로 종교를 가지지 않아도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돌이켜보면 종교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을 전공이 무엇이냐는 질문만큼 많이 받아 온 것 같다. 그때마다 나는 종교가 없다고 당당히 답해왔지만 우리 사회는 어쩐지 확실한 종교가 있는 사람을 더 신뢰 하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무신론자라는 어감도 불신이나 부정적 인 의미로 전달되는 듯 했다. 특히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모종의 우월감을 가지고 비종교인을 대할 때 교화나 전도의 대상으로 보곤 한다.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생의 어느 시기에 위기가 닥쳤을 때 종교의 필요성을 운운하며 위로나 의지의 방편으로 대안을 제시하곤 한다. 또 보편적으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말년에 더 행복하게 살아가며 죽음을 맞이할 때 더 편안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할 때, 죽음이 두려워 질 때, 상실감에서 헤어나고자 할 때 종교는 일반적인 해법처럼 여겨져 왔다. 그런데 저자는 그렇다고 해서 종교가 없으면 무슨 큰 일이라도 벌어지는 것은 아니라 말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종교가 없으면 개인은 타락하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며 국가는 재앙이 닥친다고 주장하는 미국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을 똑바로 지칭한다. 종교는 인생을 충분하게 할 순 있지만 인생을 충분하게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종교를 믿지 않아도 아무 일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그들을 반박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고백한다. 체험, 삶의 현장과도 같은 이 책은 저자만의 소중한 증거물이다. 저자는 그런 나라에서 직접 살아보고 사람들과 부딪히며 대화를 나누고 돌아왔다. 이 책이 지루하지 않고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던 것은 저자의 체취와 발자취가 묻어나는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나라 미국은 종교가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대표적인 나라이다. 미국 보수주의자들은 툭하면 애국심을 앞세우며 태연하게 전쟁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이때 단결 전략으로 사람들을 집중시키는 것이 종교적 메시지이다. 지난 시절 미국은 전쟁에 참여할 때 마다 자신들은 세계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 말해왔다. 그런 자신들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신의 계시라며 정당성과 초월성을 부여해온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정작 세계에서 가장 신을 믿지도 않고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는 나라가 가장 평화롭고 안전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을 향한 짜릿한 일침. 하느님을 믿는 것과 세계평화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이야기. 교회를 다니는 것과 행복하게 잘 사는 것 역시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 그것은 미국사회의 주류가치를 은연중에 받아들이게 되는 우리 생활 정서에 간만에 날아든 고마운 소식이었다.
놀라운 만남
많은 영역에서 미국사회를 복제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저자도 언급했듯이 아직 미국만큼 종교적인 나라는 아니다. 종교적 다원성이 지켜지는 나라이고 비종교인, 무신론자를 사회에서 배타하는 분위기는 미약하다. 하지만 상하, 수직적 체계에 익숙한 조직과 학교, 가정에서 원하지 않는 종교를 억지로 수용해야 하는 일은 의외로 빈번하다. 대학 친구의 부모님은 배우자도 당연히 같은 종교인이길 바라셨다. 친구는 처음부터 같은 종교를 가진 남자와 만나야 했기 때문에 연애와 결혼에 있어 아픔이 많았다. 종교가 없었던 또 다른 친구는 결혼 후 시어머니와의 종교적 갈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친구의 남편은 공부중이고 마침 친구가 아이를 가졌을 때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한동안 생활비를 주지 않으셨다. 나 역시 결혼 후 시어머니를 따라간 어느 지방의 절에서 백배의 절을 올린 적이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초창기엔 영문도 모르고 그렇게 계절마다 절기마다 절에 따라다닌 기억이 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절에 가는 날이 일주일에 한번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며느리에게 종교의 권유 차원을 넘어서 강요를 하는 시집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집 사람이니 같은 종교를 믿어야 한다는 생각은 전근대적인 발상이지만 우리네 시집문화라는 것이 생각만큼 현대화되지 않아 종교 갈등은 고부갈등에서 자주 등장하는 원인 중 하나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등장하는 덴마크와 스웨덴은 어쩌면 모든 인간, 특히 여성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이상향의 나라가 아닐까 싶다. 여성평등지수가 가장 높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혼전성교, 낙태, 동성애 결혼이 합법적으로 허용된 나라이다. 빈곤과 질병, 범죄와 전쟁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나라이다. 교육수준이 높고 투표율이 가장 높으며 최빈국에 가장 많은 기부를 하는 나라이다. 친구나 애인, 가족, 동료들 사이에서 종교 때문에 인간관계의 갈등이 생길 이유가 없는 나라이다. 할아버지와 섹스에 대해선 자유롭게 대화하지만 종교는 개인적인 일로 여기며 서로 물어보지도 궁금해 하지도 않는 나라이다. 저자는 일 년 동안 덴마크와 스웨덴에 살면서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꺼려하고 부담스러워 하는 질문을 일삼았다. 그 결과 대부분 종교가 무엇이냐 묻는 것은 그들에게 살면서 중요한 질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남의 종교가 무엇인지 남들은 왜 교회를 가는지 혹은 가지 않는지 전혀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하느님을 믿는다거나 교회를 다니는 것은 조직이나 사회에서 소외당할 조건으로 기능한다. 미국과 정반대이다. 예수의 부활이나 동정녀의 출산, 내세와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다윈의 진화론을 배웠기에 그것은 허위사실이고 아이들에게 믿으라 가르치는 것은 그릇된 행동이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도 원하면 목사가 될 수 있고 목사라는 직업에 특별한 권위의식은 서로가 느끼지 않는 듯 했다. 이건 내 추측인데 그래서 종교인에 대한 존경심 같은 것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국민들은 아주 옛날부터 교회세를 내왔고 늘 그래왔듯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한다. 별 고민 없이 자기 자식에게 세례를 받게 한다. 믿음을 행하는 종교는 철저한 개인의 선택일 뿐이고 생활 속에서 전통이나 풍습처럼 편하게 받아들인다. 가장 놀라고 신기했던 건 사람들이 종교를 믿지 않아도 오로지 추억을 만들기 위해 낭만적인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장례식도 마찬가지다. 우리 문화에서 결혼식 장소로 교회를 택하는 사람들은 특정 종교인에만 해당하는 관행이 아닌가. 특정 종교에 해당하는 구속력이 없으므로 특정 종교가 행하는 배타성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을 보면서 오랜 세월 제사를 지내온 우리 풍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명절을 맞아 가족들이 모여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고 부모님의 기일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종교적 행사가 아니라 장례문화로 보아야 하듯 그들의 교회결혼식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미국에선 종교가 공동체적 연대감을 조성하고 개인의 상실감을 치유하며 사회의 봉사를 유도한다. 그런데 왜 가장 종교적인 나라 미국은 가장 비종교적인 나라 덴마크와 스웨덴보다 부유하지도 평등하지도 민주주의적이지도 않은 것일까. 종교가 부재하는 세속적인 사회에선 개인의 이기심과 그에 따른 범죄와 타락, 혼란에 빠져들기 쉽다고 하는데 가장 세속적인 덴마크와 스웨덴은 왜 그 반대인 것일까. 덴마크나 스웨덴은 자신들이 비 종교적이라서 나라가 행복하다 말한 적이 없는데 왜 미국은 종교 없는 나라는 불행 할 것이라 주장하는 것일까. 저자는 종교의 부재가 사회의 혼란이 아니라 외려 사회적 건강과 안녕, 도덕과 질서, 행복과 풍요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비교적 비종교적이라는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일부 보수파 종교단체는 조폭과 연대하여 이권을 챙기는 것으로 유명하고 최근엔 스님들도 도박과 룸살롱 출입을 일삼는 것으로 알려졌다. MB가 다닌 소망교회는 이 정권에서 주요 핵심인력들을 배출하는데 기여해 왔다. 부패지수가 가장 낮은 나라들이 덴마크, 스웨덴 같은 비종교적 국가라는 것이 아이러니한 기록이다. 종교적 가르침을 가장 잘 수행하고 있는 나라들은 하나같이 세계에서 가장 비종교적인 나라들이니 이제 우리는 종교와 도덕을 원인관계로 연결 짓지는 말아도 되지 않을까?
무심한 대답
종교에 대한 질문이 재미가 없듯 이들은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도 시큰둥했다. 나는 그들이 답한 재미없는 답변들을 떠올리며 삶을 의미 있게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이 책을 덮고 비로소 삶을 의미 있다고 여기고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꼭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인터뷰 대상자들 중 거의 충격에 가까웠던 대답은 삶의 의미가 꼭 있어야 하느냐는 무심한 답이었다. 그들에게 삶이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며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 그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삶의 의미이고 살아가면서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가 중요하지 그런 질문 자체는 크게 의미 없다는 것이었다.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죽은 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생명은 자연의 모든 것처럼 똑같이 끝나는 것이라 믿는다. 그러니 현재를 소중히 여기며 지금의 삶 자체에 만족하는 것이 중요하지 죽음이나 그 이후를 생각하는 시간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죽음이 그다지 두렵지 않으며 그것이 언제인지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말했다. 그렇다고 그들 누구도 무의미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었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 중에는 외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신자들이 죄책감에 시달리며 두려움에 떤다는 호스피스의 인터뷰는 종교에 대한 반전에 가까웠다. 천국에 가지 못하고 혹시 지옥에 갈까봐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삶을 믿지 못한다니 소름이 끼쳤다. 다음 세상이 있다고 믿는 것이 마지막 까지 욕심이 될 수 있다니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종교상식과 정반대되는 실례라 이도 충격이 적지 않았다.
통계상으로 보면 전 세계 무신론자는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다음으로 많은 수치라 한다. 믿는 사람만큼 믿지 않는 사람도 많으며 종교는 인간에게 선천적인 것도 필수적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저자는 새삼 종교의 필요성을 폄하하거나 근본적으로 반론하려 이 책을 쓴 것 같진 않다. 단지 종교가 없어도 신을 믿지 않아도 인간은 타락하지 않고 사회는 안전할 수 있으며 국가 또한 건강해질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삶의 의미를 종교에서 찾지 않고 죽음에의 두려움을 신에 의존하지 않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 만족하고 주변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곧 삶의 의미요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생이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저자는 아마도 미국사회가 많은 기득권을 내려놓고 덴마크나 스웨덴 같이 종교 없이도 최상의 사회를 유지하는 국가가 되기를 바랬던 것은 아닐까.
이 책을 덮기 전 나는 공교롭게도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을 읽은 바 있다. 도킨스는 늘 종교를 반대하는데 앞장서온 과학자였다. 그는 진짜 마법이란 허구가 아닌 진실이며 진짜 기적은 종교가 아닌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이라 강조했다. 신화적 상상력도 의미 있지만 더 중요한 건 바로 과학적 증거들로 가득한 우리 사는 현실이라며 그 현실을 과학이 가진 고유의 마법이라 칭하고 있다. 종교나 신화보다 더 경이로운 세계인 현실이 얼마나 가슴 뛰는 마법인가 하고 말이다. 종교의 절대성을 냉철하게 해체시켜 서구세계에서의 교회가 가지는 물리적, 심리적 폭력을 고발하고자 했던 영국 철학자 러셀은 ‘신념’이란 아무런 증거가 없는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러셀은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입증할 증거가 전혀 없을 때 신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신이 있다는 증거가 없으니 믿게 된다는 논리가 인간의 나약한 본성을 꿰뚫은 일침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혹시 신이 보이지 않고 증명할 수 없기에 초자연적인 것이라 믿는 것은 아닐까.
새로운 발견
과학자들은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 하여 ‘초자연적인 사건’이라고 결론내리는 것을 싫어한다. ‘초자연적’이라 치부해버리면 자연적인 설명은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 되 버리고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것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자의 주장을 접하고 나면 나는 늘 차동엽 신부같은 종교인의 주장을 반사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종교인들은 당연히 신의 존재와 사후 세계에 대해 과학자와는 반대되는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진화론은 인간이 어떤 과정을 통해 생성되었는지는 설명할 수 있어도 태초에 창조주가 있었는가 없었는가에 대해서는 답을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화론이 반드시 창조론에 배치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p 246, <잊혀진 질문>
차동엽 신부는 신앙에 바탕을 준 종교와 합리성에 바탕을 둔 과학이 서로 보완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에 언젠가부터 우주 대폭발, 빅뱅이론이 끼어들기 시작했는데 이는 우주가 먼 과거의 어느 시점에 갑자기 존재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차동엽 신부는 창조주의 치밀한 설계 없이 단지 우연히 빅뱅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있었기에 이처럼 질서정연한 우주가 되었다고 본 것이다. 그러니까 우주 밖에 있는, 아마도 자연계를 초월하는 어떤 존재가 우주를 존재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그 분이 신이라는 설명이다. ‘저절로’ 생겨났다는 우주에 대한 해답을 필연적으로 생기게 했다는 창조주 하느님으로 바꾼 것이다. 덴마크와 스웨덴 사람들은 신을 믿더라도 전지전능한 존재로서의 초월적인 대상이라기 보다는 필요 할 때 내가 일상에서 기도하면서 떠올릴 수 있는 친근한 존재로 여기는 듯 하다. 또 국가의 사회적 유산으로 전수되어온 기독교의 가치관들은 소중히 받아들이면서 내 삶에서 종교를 최우선시 하지는 않는 주체적이고도 이성적인 태도를 발전시켜 온 듯하다. 진화론과 창조론의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이상향이 아닌 현실에도 존재했던 것이다.
이 책은 과학자와 종교인의 상반되는 시각, 그리고 철학자의 논리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바로 종교를 가족적, 전통적 문화로 이해하는 관점이다. 절대가치로서의 신념이 아닌 상대가치로서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나약한 인간이니 만큼 때론 초자연적인 존재에 삶의 한 순간을 기댈 지라도 그 무엇도 내 삶은 초월하지 않는 태도의 가치관이 매우 현실적인 대안으로 여겨진다. 어떤 교리든 이웃을 도우고 가진 것을 나누는 공동체적 가치는 얼마든지 실천하고 현재의 내 삶에선 이성과 합리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 것. 평생가도 겪어 보지 못할 기적에 기대고 현실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환상에 의지하지 않고 과학이 해석하는 실재의 현실을 더 믿고 그 안에서 진실을 찾는 삶. 그러한 삶이라면 비록 신이 없더라도 얼마나 이상적이면서 현실적인가. 내 삶은 초월적인 신을 향한 믿음이 아니라 내가 사는 현실 속에서 발견하는 진실로만 이루어진다. 내가 사는 곳 너머, 내 인생 너머의 초자연적인 현상과 존재는 지금의 나를 알지도 못하고 안다고 해서 나를 나답게 말해주지도 않는다. 지금 여기, 이곳에서 가장 진짜인 내 삶이 존재한다. 행복은 저 언덕 너머 파랑새가 살고 있는 나라가 아닌 바로 여기 두근두근 가슴 뛰는 내 삶 속에 살고 있다. 신(神)없는 나라가 신(興)나는 나라가 아닐까. 신을 버리니 새삼 내 삶이 더 커 보인다. 당연히 그 삶의 주인공도 근사해 보인다. 내 안에 삶이라는 새로운(新) 신(神)이 있다. 이제 나는 가장 오래 그리고 분명하게 믿을 수 있는 내 삶만을 믿어(信)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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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보단 든든한 논리를 기대했었는데... 이네사 ㅣ 2012-06-13 ㅣ 공감(22) ㅣ 댓글 (0)
신없는 사회라는 제목에서 내가 무엇을 기대한 것인지 모르겠다. 신 없이도 인간의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 내진 신은 인간이 만든 것이기에 그다지 믿을 필요가 없다는 논증을 나는 기대한 것일까? 몇년전 논쟁의 중심이 되었던 책인 리처드 도킨스의 < 만들어 진 신>과 같은 맥락에서, 신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이며, 신을 믿지 않은 인간은 인생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멍청한 인간이라는 명제에 맞서 통쾌하게 종교인들을 까발리는 그런 책이길 바라는 것이었을까? 솔직히 <만들어진 신>의 기본 골자에 대해선 나는 동의한다. 하지만 리처드 도킨스의 어조가 꽤나 거만하다고 느껴진 관계로 나는 너보다 똑똑하다는 전제에서 말하는 사람 아닌, 차분한 어조로 거부감없이 무신론을 설파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길 기대한 듯하다. 적어도 난 그걸 기대했었다. 그런데 내용을 알고 보니...
그저 광신없이 살아가는 사회도 멀쩡하다는, 오히려 열렬히 종교를 지향하는 사회보다 건전하더라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 김이 팍 새는 기분이었다. 그래, 이 교수가 1년간 살았던 덴마크와 스웨덴이 행복한 나라고, 종교를 그다지 신봉하지 않음에도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시민 의식을 기반으로 해서 살아가는 사회라는건 알겠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단지" 종교 때문이라고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거 좀 비약 아니야? 전체를 설명하면서 조그만 일부분으로 전체를 다 조망한 것인양 부풀린 것 아닐까 라는 의문이 모략모략 머리에서 피어 올랐다.
일단 스웨덴과 덴마크가 다른 나라들보다 행복하고 살기 좋은 나라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그게 단지 무신론의 영향때문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본다. 일단 그들은 다른 나라들보다 잘 산다. 교육 수준이 높을 수도 있고, 비이성적인 논리를 배격하는 감각이 다른 나라보다 발달한 나라일 수도 있다. 인구밀도가 다른 나라들보다 낮기 때문에 개개인에 대한 자아존중감이 특별하게 높은 나라일 수도 있고, 각자가 중요하다는 관념을 어린 시절부터 뼈에 새기면서 성장시키는 그런 나라여서 그럴 수도 있다. 불행이 들불처럼 번지는 곳에 종교가 성하다는걸 감안해보면, 어쩌면 원인과 결과가 바뀐 것일지도 모른다. 즉, 그들은 행복하기 때문에 종교가 필요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종교가 없어서 행복한게 아니고 말이다.
인간에게 신이 왜 필요한지 그걸 알아낸다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아니, 그보단 복잡하다고 하는게 맞는 말이겠지. 인간의 심리나 역사, 근본, 문화에 위치한 것이라서, 단지 필요하다 아니다란 논리론 설명이 불충분할 거란 뜻이다. 나야 물론 종교를 필요악이나 귀찮은 것 정도로 여겨, 때론 그것의 성가심에서 벗어나면 좋겠다 싶을때가 많지만서도, 적어도 난 종교를 근절시킬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안다. 만약 내가 종교가 전혀 필요없는 것이라는 이유로 모든 이들에게 종교를 믿지 못하게 말리고 다닌다면, 그건 말도 안 되는 독재이자 강압일 것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마치 종교를 믿지 않으면 착한 사람이 아니고 ,그렇기에 어떻게 해서든 종교를 믿어야 한다고 길거리에서 나를 붙잡고 설교를 늘어놓는 기독교 인들처럼 말이다. 다를게 뭐가 있겠는가. 남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는 바보같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는 다를바가 없다. 그래서 내가 종교인들을 붙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일랑은 믿지 말라고 충고하지 않는 것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생각과 감정이란게 있고, 그게 옳다 그르다 할 권리는 내게 없다. 남들이 내게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예전에 어떤 심리학 책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길거리에서 선교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은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일면 수긍이 되더라. 자신이 너무우울하고 불행하기 때문에, 어쩌면 그들에겐 동지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자신보다 더 우울하고 불행하며 행복할 기미가 없는 그런 사람들을 붙잡아, 그래, 나보다 더 정신이 나간 사람이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왜 그들이 내 소매를 붙들고, 왜 하나님을 믿지 않냐고 따지는 것에 대해 조금 아량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적어도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그들이 말하는 대로 종교를 믿으라는게 아니라, 왜 너만 행복하냐는 것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붙잡아서 그들에게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하는게 어쩌면 그들의 숨은 의도일지도... 그렇게, 종교는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많은 다른 양상들을 지녔다. 종교가 생겨난 것도, 그리고 그렇게 많은 비리와 위선의 온상이 되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것도, 실은 종교 자체의 문제라기 보단 종교가 인간 사회의 다른 반영이라는 점에 있는게 아닐까 한다. 그러니까 ,종교는 인간이 없어지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은 어떤 거울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모습을 비스듬하게 투영하고 있는...
모르겠다. 사회가 지금보다 보다 진일보하고 이성적이 되며,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일반화 된다면 우리에겐 신이 필요없게 될지도. 그러나, 인간이 그렇지 못하다는걸 아는 지금, 단지 신이 없는 사회가 신이 있는 사회보다 더 낫다는 말은 단순한 비약이라고 밖엔 생각되지 않는다. 깊이 있는 분석이나 통찰력에서 내린 결론이 아닌. 해서 역시 심도 있는 분석이었어, 내진 그래, 바로 그거야를 외치면서 동조하고 팠던 이 책은, 뭐야 시시하게...를 외치면서 덮을 수밖엔 없었다. 그래, 우리 나라도 이렇게 건전하고 올바르며 윤리적이고 행복한 사회가 되었음 하는 바람이다. 하지만 그게 신이 없음을 전제로 해서 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신을 열심이 믿는다고 해서 그렇게 될 거라고도 생각되지 않고. 우리가 열렬히 바란다면, 그런 사회를 말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열심히 쓴다면 언젠가는 미래에 어느날에 우리 후손에게 그런 사회를 물려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데, 그건 신이 있다 없다와는 관련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신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일지도. 우리가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는,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는데는 종교가 전부는 아니니 말이다. 어쩌면 신에게 매달리는 사회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회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우리나라가 그런 나라가 되기는 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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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가장 미약한 덴마크,스웨덴이 가장 도덕적으로 깨끗하다. 안티고네 ㅣ 2012-06-04 ㅣ 공감(2) ㅣ 댓글 (0)
#특히 오르후스(덴마크 제2의 도시)에서 호스피스 간호사로 일하는 43살의 안네가 무척 흥미로웠다. 오랫동안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일을 하면서, 무신론자들이 대개 임박한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안네가 말하는 것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안네는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걱정과 불안으로 마음이 망가져서 죽음을 가장 힘들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지니계수를 바탕으로 경제적 평등을 살펴보면 덴마크는 세계 2위, 스웨덴은 4위다. 소득 평등이 가장 잘 이루어진 상위 20개국 중 대다수도 역시 종교의 세력이 미약한 곳이다. ...세계 경제포럼에 따르면, 스웨덴의 경쟁력은 세계 3위고, 덴마크는 4위로 그 뒤를 잇고 있다. 20위권 국가 중 종교의 세력이 강한 곳은 미국(6위)뿐 다른 나라들은 국제적 기준에 비추어볼 때 모두 종교성이 약한 곳이다.
#정치가와 공무원의 청렴도 면에서 덴마크는 세계 4위, 스웨덴은 6위며, 역시 상위 20개국 중 대다수가 비교적 종교성이 약한 곳이다. 가난한 나라를 위한 자선 행위를 살펴보면 덴마크는 2위, 스웨덴은 3위고, 세계 최빈국들에 가장 많은 원조를 하는 20개국 중 많은 나라가 확연히 비종교적이다.
#내가 지금까지 확고하게 밝히려고 한 것은, 지구 상에서 가장 비종교적인 나라들이 가장 건강하고 성공적인 나라들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물론 상관관계가 곧 인과관계는 아니다. 덴마크나 스웨덴 같은 나라들이 지금처럼 성공적이고 건강한 사회가 되는데 비종교성이라는 '원인'이 반드시 존재했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종교의 '부재'가 사회에 방해가 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독일의 싱크탱크인 한스뵈클러슈티프퉁은 최근, 사회적 정의의 확립에 얼마나 성공했는지를 근거로 각국의 순위를 매겼다.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비종교적인 나라인 덴마크와 스웨덴이 공동 1위를 차지했다.
#만약 이 세상에 가장 '안전하고 견실한' 사회가 있다면 비교적 세속적인 덴마크가 바로 그런 곳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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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난 소감
1. '서양=미국'으로 간주하는 우리의 오래된 고정관념을 산산조각내버리는, 신선한 충격을 주는 책. 세상은 넓다.
2.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해 돌아볼 기회를 주는 책. 기독교는 '빛과 소금'으로 자처한다. 그런데 기독교가 가장 미약한 덴마크와 스웨덴이 가장 도덕적으로 깨끗하다는 이 역설...
1. '서양=미국'으로 간주하는 우리의 오래된 고정관념을 산산조각내버리는, 신선한 충격을 주는 책. 세상은 넓다.
2.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해 돌아볼 기회를 주는 책. 기독교는 '빛과 소금'으로 자처한다. 그런데 기독교가 가장 미약한 덴마크와 스웨덴이 가장 도덕적으로 깨끗하다는 이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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