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시대를 넘어선 문학사 순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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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 전하시면서 염무웅 선생이 눈물을 흘리시더라고, 그 점잖으신 양반이 진짜 막 우시더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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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무웅 선생의 눈물」(https://bit.ly/2A03Vbf)이라는 김해자 시인의 시는 분단과 독재의 시대를 넘어선 한 비평가의 모습을 아프게 전해준다. 비평가는 '전하는' 역할을 한다. 전하되 제대로 전해야 한다. 염무웅 선생은 무엇을 "전하시면서" 눈물까지 흘리셨을까. 그의 정치(精緻)한 평론과 조심스런 대담에서도 나는 그 눈물에 밑줄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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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사 염무웅 교수님 저서 『살아있는 과거』(창비, 2015, 이후 '과거'로 표기), 대담집 『문학과의 동행』(도서출판 한티재, 2018, 이후 '동행'으로 표기)을 읽었다. 선생님은 반백년의 한국현대문학사를 온몸으로 체험하신 분이다. 두 권 모두 곰삭여 읽었는데 특히 『동행』은 질문자와 대화하며 생긴 입체적인 울림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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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고전은 대담집이다. 『맹자』는 맹자가 컨설턴트처럼 이 나라 저 나라 왕의 질문에 답했던 기록이다. 『성경』 누가복음 10장은 예수가 당시 지식인들과 대담 나누는 부분이다.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하는 유명한 대담이다. 대담집 중에 최고의 대담집은 『괴테와의 대화』다. 이 대담집에서 괴테는 아시아 문학을 무시하지 않는 세계문학 개념을 말한다. 가라타니 고진의 중요저서 중에 대담집이 여러 권 있다. 두 권의 책을 읽으며 깨달은 선생의 문학적 발원지는 두 군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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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분단문학이다. 『동행』을 읽고 선생께서 당시 소련군 관할지역이었던 속초에서 월남한 실향민이란 사실을 처음 알았다( 『동행』, 421면). 2006년 6.15 민족문학인협회 남쪽 대표로 북한을 방문하고 평생 글을 쓴 문사로, 현재 겨레말사업회 이사장이란 직책을 맡고 있다.
둘째는 4.19 정신이다. "우리 세대의 대학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두말할 것 없이 4.19였다"( 『동행』, 436면)). 무능한 장면 정부의 쿠데타를 불러 일으킨 4.19가 실패일지 모르나 프랑스 혁명처럼 4.19는 이 나라에 자유의 근원을 가르쳐 주었고, 그 자유사상에서 선생의 비평정신은 뿌리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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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과거』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4.19 문학세대로서 본 한국문학사였다. 해방기부터 1980년대 문학사가 깨진 유리 모양으로 반짝이며 담겨 있었다. 김수영에게 4.19는 "시의 언어로 기록된 혁명일지"(309면)였다. 김지하가 「풍자냐 자살이냐」(1970)을 쓰며 "김수영의 문학에 대한 김지하의 이해가 과연 가장 깊은 곳까지 갔었느냐 묻는다면 대답은 의문이다"(315면)라는 지적에 나는 동의한다. 김지하는 김수영의 전면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본다. 실은 이후에 김지하가 외국 이론가들을 인용할 때 위험한 인용 혹은 지나친 자기투 해석이 염려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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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이 병사한 것이 아니고 전장에서 싸우다 죽은 것이라는 천상병의 발언은 통렬하게 우리의 의표를 찌른다. 그의 말은 신동엽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전복한다. 신동엽이 무엇과 싸우다 전사한 것이라고 그는 보고 있는가 ...(중략)... 신동엽 시의 '현실에의 투기'는 그런 자기과시적이고 기만적인 행태와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요컨대 신동엽의 참여는 온몸을 현실 속에 던져 넣는 진정한 참여였다. 이 대목에 이르러 우리는 천상병이 자기도 의시기하지 못하는 사이에 김수영의 '온몸의 시론'에 근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42~4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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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역사에 바쳐진 시혼-김남주를 다시 읽으며」에서 김남주 시를 신동엽, 김수영과 비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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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그(김남주-인용자)에게 큰 자극을 준 것은 그 잡지(창비-인용자) 1968년 여름호에 김수영 번역으로 소개된 파블로 네루다의 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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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보는 신동엽, 김수영, 김남주의 뿌리에는 임화가 있다. 다만 "토착적 전통과의 관계라는 면에서 본다면 김수영은 임화의 계보이고 김남주는 신동엽의 후계자"(89면)에 속한다. 「임화 문학사의 내재적 기원」은 꼭 인용해야 할 임화 연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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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행』의 대담은 쉬운 구어체로 써있어 술술 읽을 수 있다. 당시 문단 상황이나 선생님의 건강상태도 나와서 전기적인 자료도 된다. 선생님곁에 있으면 낮고 천하고 쓰잘데없는 것들을 무시하는 가벼움이 없다. 오히려 그런 존재에서 의미를 보려고 뜸들여 귀 기울이시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선생님 강연도 모셔 듣고, 옆에 앉아 말씀을 들으면서 지금도 내 귀에는 선생님의 말투가 가슴 속에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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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요? 있지요? 아니잖아요? 하잖아요? 쓰잖아요? 식의 의문이 아닌 청유형으로 말씀하신다. 듣는이의 의견을 물어보는 태도다. 혹은 "~겠지요"라는 종결형 어미를 많이 쓰신다. 단언하고 명령하는 방식이 아니라, 내 말을 선택해서 들을 필요가 있다는 식의 열린 자세다. 이른바 꼰대 태도를 선생님에게서 보기는 어렵다. 남의 말을 들으려 하는 대가 앞에서 젊은이는 창의적인 생각을 조심스럽게 풀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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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도 앨범에 숨어있을 작은 사진과 함께 따스한 마음을 만날 수 있다. 여러 대담 중에 2012년 냉정한 비평자 황규관 시인이 묻고 선생님께서 답하신 「현실의 위기와 시의 역할」을 먼저 읽었다. 선생님이 오래전부터 당뇨를 앓으셨다는 사실을 이 글을 읽고 처음 알았다. 1967년 12월 21일자 『서울신문』 문화란에 하반기 문단 월평을 김수영 시인과 분단해서 쓰셨던 신문기사(223면)도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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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남정현, 신동엽, 그 밖에 여러 분들과 신구문화사에서 사귀었어요. 그러니까 1960년대 중반에 벌써 다수의 선배 문인들을 알았어요.... 김수영 선생은 번역 일거리를 얻기 위해서 왔던 것 같고요"(1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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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문장을 읽으며 선생님 글을 더 읽어야 하고, 들을 얘기도 많은데 게으르기만 한 나를 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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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이 사라진 이 삭막한 시대에 그 삭막함을 느끼는 일이라도 할 수 있도록 남겨진 게 시가 아닌가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시는 최악의 시대에 최전선을 감당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어요."(25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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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뒤에 실린 「문학의 계단을 오르며」는 꼭 읽어야 할 문학적 자서전이다. 선생께서 함석헌 선생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탐독하셨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함석헌에 심취하며 "철학과로 진학하고 싶었다"(434면)고 한다. 김승욱, 김현, 최하림과 함께 했던 『산문시대』 증언도 종요로운 기록이다. 1980년 2월 영남대에 취직하기까지 십여 년간 그가 겪었던 수난사는 오늘 우리 세대가 얻는 자유를 위한 희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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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60년대와 4.19에 관한 선생님의 증언은 내가 연구하고 있는 연구대상에게 직접적인 자료다. 특히 김수영에 대한 증언들은 누구도 체험하지 못한 선생님만의 증언이다. 선생은 신구문화사에서 많은 이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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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은 번역 일감을 얻으러 오거나 천상병 김관식처럼 술값을 뜯으러 오거나 혹은 이런저런 의논을 하러 들러거나 간에 신동문은 그들 모두에게 심리적 후원자였다."(『과거』, 5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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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김수영 선생과는 작고하기 전 2년여 동안 아주 가깝게 지내면서 적잖은 추억거리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여름날 새벽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급보를 받고 얼마나 놀라고 통분했던지! 구수동 옛집으로 달려가 목격했던 그의 깨진 머리통! 시민회관(현재의 세종문화회관 자리) 광장에서 열린 문인장에서 나는 떨리는 소리로 그의 유작 「사랑의 변주곡」을 낭송했다. 그 원고는 지금도 내 서랍에 모셔져 있다." (『동행』, 44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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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에 얽힌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서 11월 10일(토) 오후 2시 한국작가회의 주최로 열릴 <김수영 50주기 문화제> 때 강연을 부탁했었다. 선생은 내 첫 전화에 선뜻 응해주시지 않으셨다. '살아있는 과거'에 대해 삼가하는 마음이셨을 것이다. 일주일이 지나 다시 전화 드렸을 때 "다 했던 얘기인데"라며 응해 주셨다. 이 글을 보는 분이라면 11월 10일 선생님의 나즈막한 강연을 와서 꼭 들으시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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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페이스북에도 마음을 열어주셔서 넉넉하고 정확한 가르침을 가끔 써주신다. 글의 행간에서 나는 있잖아요? 있지요? 아니잖아요? 하잖아요?를 다시 듣는다. 그 물음은 끊임없이 자성과 실천을 재촉하는 질문이다. 선생님의 열린 가르침과 너무도 높지만 낮추신 삶에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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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 전하시면서 염무웅 선생이 눈물을 흘리시더라고, 그 점잖으신 양반이 진짜 막 우시더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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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무웅 선생의 눈물」(https://bit.ly/2A03Vbf)이라는 김해자 시인의 시는 분단과 독재의 시대를 넘어선 한 비평가의 모습을 아프게 전해준다. 비평가는 '전하는' 역할을 한다. 전하되 제대로 전해야 한다. 염무웅 선생은 무엇을 "전하시면서" 눈물까지 흘리셨을까. 그의 정치(精緻)한 평론과 조심스런 대담에서도 나는 그 눈물에 밑줄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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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사 염무웅 교수님 저서 『살아있는 과거』(창비, 2015, 이후 '과거'로 표기), 대담집 『문학과의 동행』(도서출판 한티재, 2018, 이후 '동행'으로 표기)을 읽었다. 선생님은 반백년의 한국현대문학사를 온몸으로 체험하신 분이다. 두 권 모두 곰삭여 읽었는데 특히 『동행』은 질문자와 대화하며 생긴 입체적인 울림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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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고전은 대담집이다. 『맹자』는 맹자가 컨설턴트처럼 이 나라 저 나라 왕의 질문에 답했던 기록이다. 『성경』 누가복음 10장은 예수가 당시 지식인들과 대담 나누는 부분이다.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하는 유명한 대담이다. 대담집 중에 최고의 대담집은 『괴테와의 대화』다. 이 대담집에서 괴테는 아시아 문학을 무시하지 않는 세계문학 개념을 말한다. 가라타니 고진의 중요저서 중에 대담집이 여러 권 있다. 두 권의 책을 읽으며 깨달은 선생의 문학적 발원지는 두 군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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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분단문학이다. 『동행』을 읽고 선생께서 당시 소련군 관할지역이었던 속초에서 월남한 실향민이란 사실을 처음 알았다( 『동행』, 421면). 2006년 6.15 민족문학인협회 남쪽 대표로 북한을 방문하고 평생 글을 쓴 문사로, 현재 겨레말사업회 이사장이란 직책을 맡고 있다.
둘째는 4.19 정신이다. "우리 세대의 대학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두말할 것 없이 4.19였다"( 『동행』, 436면)). 무능한 장면 정부의 쿠데타를 불러 일으킨 4.19가 실패일지 모르나 프랑스 혁명처럼 4.19는 이 나라에 자유의 근원을 가르쳐 주었고, 그 자유사상에서 선생의 비평정신은 뿌리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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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4.19 문학세대로서 본 한국문학사였다. 해방기부터 1980년대 문학사가 깨진 유리 모양으로 반짝이며 담겨 있었다. 김수영에게 4.19는 "시의 언어로 기록된 혁명일지"(309면)였다. 김지하가 「풍자냐 자살이냐」(1970)을 쓰며 "김수영의 문학에 대한 김지하의 이해가 과연 가장 깊은 곳까지 갔었느냐 묻는다면 대답은 의문이다"(315면)라는 지적에 나는 동의한다. 김지하는 김수영의 전면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본다. 실은 이후에 김지하가 외국 이론가들을 인용할 때 위험한 인용 혹은 지나친 자기투 해석이 염려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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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이 병사한 것이 아니고 전장에서 싸우다 죽은 것이라는 천상병의 발언은 통렬하게 우리의 의표를 찌른다. 그의 말은 신동엽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전복한다. 신동엽이 무엇과 싸우다 전사한 것이라고 그는 보고 있는가 ...(중략)... 신동엽 시의 '현실에의 투기'는 그런 자기과시적이고 기만적인 행태와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요컨대 신동엽의 참여는 온몸을 현실 속에 던져 넣는 진정한 참여였다. 이 대목에 이르러 우리는 천상병이 자기도 의시기하지 못하는 사이에 김수영의 '온몸의 시론'에 근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42~4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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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역사에 바쳐진 시혼-김남주를 다시 읽으며」에서 김남주 시를 신동엽, 김수영과 비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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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그(김남주-인용자)에게 큰 자극을 준 것은 그 잡지(창비-인용자) 1968년 여름호에 김수영 번역으로 소개된 파블로 네루다의 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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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보는 신동엽, 김수영, 김남주의 뿌리에는 임화가 있다. 다만 "토착적 전통과의 관계라는 면에서 본다면 김수영은 임화의 계보이고 김남주는 신동엽의 후계자"(89면)에 속한다. 「임화 문학사의 내재적 기원」은 꼭 인용해야 할 임화 연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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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의 대담은 쉬운 구어체로 써있어 술술 읽을 수 있다. 당시 문단 상황이나 선생님의 건강상태도 나와서 전기적인 자료도 된다. 선생님곁에 있으면 낮고 천하고 쓰잘데없는 것들을 무시하는 가벼움이 없다. 오히려 그런 존재에서 의미를 보려고 뜸들여 귀 기울이시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선생님 강연도 모셔 듣고, 옆에 앉아 말씀을 들으면서 지금도 내 귀에는 선생님의 말투가 가슴 속에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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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요? 있지요? 아니잖아요? 하잖아요? 쓰잖아요? 식의 의문이 아닌 청유형으로 말씀하신다. 듣는이의 의견을 물어보는 태도다. 혹은 "~겠지요"라는 종결형 어미를 많이 쓰신다. 단언하고 명령하는 방식이 아니라, 내 말을 선택해서 들을 필요가 있다는 식의 열린 자세다. 이른바 꼰대 태도를 선생님에게서 보기는 어렵다. 남의 말을 들으려 하는 대가 앞에서 젊은이는 창의적인 생각을 조심스럽게 풀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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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도 앨범에 숨어있을 작은 사진과 함께 따스한 마음을 만날 수 있다. 여러 대담 중에 2012년 냉정한 비평자 황규관 시인이 묻고 선생님께서 답하신 「현실의 위기와 시의 역할」을 먼저 읽었다. 선생님이 오래전부터 당뇨를 앓으셨다는 사실을 이 글을 읽고 처음 알았다. 1967년 12월 21일자 『서울신문』 문화란에 하반기 문단 월평을 김수영 시인과 분단해서 쓰셨던 신문기사(223면)도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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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남정현, 신동엽, 그 밖에 여러 분들과 신구문화사에서 사귀었어요. 그러니까 1960년대 중반에 벌써 다수의 선배 문인들을 알았어요.... 김수영 선생은 번역 일거리를 얻기 위해서 왔던 것 같고요"(1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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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문장을 읽으며 선생님 글을 더 읽어야 하고, 들을 얘기도 많은데 게으르기만 한 나를 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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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이 사라진 이 삭막한 시대에 그 삭막함을 느끼는 일이라도 할 수 있도록 남겨진 게 시가 아닌가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시는 최악의 시대에 최전선을 감당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어요."(25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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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뒤에 실린 「문학의 계단을 오르며」는 꼭 읽어야 할 문학적 자서전이다. 선생께서 함석헌 선생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탐독하셨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함석헌에 심취하며 "철학과로 진학하고 싶었다"(434면)고 한다. 김승욱, 김현, 최하림과 함께 했던 『산문시대』 증언도 종요로운 기록이다. 1980년 2월 영남대에 취직하기까지 십여 년간 그가 겪었던 수난사는 오늘 우리 세대가 얻는 자유를 위한 희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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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와 4.19에 관한 선생님의 증언은 내가 연구하고 있는 연구대상에게 직접적인 자료다. 특히 김수영에 대한 증언들은 누구도 체험하지 못한 선생님만의 증언이다. 선생은 신구문화사에서 많은 이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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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은 번역 일감을 얻으러 오거나 천상병 김관식처럼 술값을 뜯으러 오거나 혹은 이런저런 의논을 하러 들러거나 간에 신동문은 그들 모두에게 심리적 후원자였다."(『과거』, 5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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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김수영 선생과는 작고하기 전 2년여 동안 아주 가깝게 지내면서 적잖은 추억거리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여름날 새벽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급보를 받고 얼마나 놀라고 통분했던지! 구수동 옛집으로 달려가 목격했던 그의 깨진 머리통! 시민회관(현재의 세종문화회관 자리) 광장에서 열린 문인장에서 나는 떨리는 소리로 그의 유작 「사랑의 변주곡」을 낭송했다. 그 원고는 지금도 내 서랍에 모셔져 있다." (『동행』, 44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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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에 얽힌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서 11월 10일(토) 오후 2시 한국작가회의 주최로 열릴 <김수영 50주기 문화제> 때 강연을 부탁했었다. 선생은 내 첫 전화에 선뜻 응해주시지 않으셨다. '살아있는 과거'에 대해 삼가하는 마음이셨을 것이다. 일주일이 지나 다시 전화 드렸을 때 "다 했던 얘기인데"라며 응해 주셨다. 이 글을 보는 분이라면 11월 10일 선생님의 나즈막한 강연을 와서 꼭 들으시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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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페이스북에도 마음을 열어주셔서 넉넉하고 정확한 가르침을 가끔 써주신다. 글의 행간에서 나는 있잖아요? 있지요? 아니잖아요? 하잖아요?를 다시 듣는다. 그 물음은 끊임없이 자성과 실천을 재촉하는 질문이다. 선생님의 열린 가르침과 너무도 높지만 낮추신 삶에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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