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08
[김상봉, 씨알의 철학] 서울대생의 촛불, 너릿재 너머의 아이들
2019-09-08 사설.칼럼
전남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생들이 조국 교수의 일로 촛불을 들었다는 보도를 접하고 가장 먼저 든 생각 은, 저 촛불을 광주의 전남대생들이나 나주의 동신대생들이 같이 들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었다. 만약 같이 들 수 있다면, 그것은 새 아침을 부르는 촛불일 것이다. 아니 라면? 그것은 공동묘지 도깨비불일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를 위한, 모두에 의한, 모 두의 좋음만이 참된 공공선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소수를 위한, 소수에 의한, 소수의 좋음은, 타도해야 할 특권일 뿐이다. 촛불 아니라 횃불이라도, 우리 모두가 같이 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불장난일 뿐이다. 그러므로 먼저 촛불을 드는 사람 역시, 그 것이 정녕 모두를 위한 것이라면 자기가 든 촛불을 남들도 같이 들자 불러야 할 것 이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내 물음은 필요 없는 물음이었다. 주최 측에서 학생증을 검사하 고 서울대생들만 집회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한다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고려대 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이유를 물으니, 외부의 정치 세력의 개입을 우려해서라 한다. 하지만 그 촛불이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라면, 내부와 외부를 나눌 까닭이 무 엇이며, 처음부터 정치적인 촛불집회에 누가 오든, 같이 동참하겠다는데 마다할 까 닭은 또 무엇인가?
답은 없고, 무심히 불구경을 하다, 다시 보니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 대다수가 서울대 출신이었다. 주연 배우, 조국 서울대 법대, 조연 배우, 나경원·윤석열·원희룡 서울대 법대, 유시민·이진경 서울대 사회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이번엔 도대체 이 드라마 의 끝이 어디일까 하는 궁금증을 억누를 수 없었다. 만약 아베 정부가 수출 규제로 못 이룬 문재인 정부의 붕괴를 엉뚱하게도 조국 사태가 이루어주면, 그 뒤에 황교안 이 대통령이 되어 나경원을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하고, 이번에는 그 가족이 운영하 는 학교에 압수수색이 들어가고 딸의 대학 입학을 빌미로 다시 서울대생들이 정의 의 촛불을 들면, 서울대 학생증도 졸업증명서도 없는 나는 관악산 공동묘지에 어른 거리는 좀비들의 불장난을 무심히 바라보며, 술잔이나 비우고 있을 것인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조국 교수가 젊은 시절 몸담았던 남한사회주의노동 자동맹(사노맹)은 의장이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의 백태웅이었지만, 학생증 검사 따위는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지금 서울대생들의 촛불보다 훨씬 나았다. 그래서 그 시절, 낮엔 노동자로 일하고 밤에는 선린상고 야간을 마친 박노해 시인도 사노맹 중앙위원으로서 백태웅, 은수미와 함께 선언문을 기초했던 것이다. 박노해가 7년이나 옥살이를 할 때, 비슷하게 6년이나 옥살이를 하고 고문 후유증으로 끝내 불임이 되 어버린 그 은수미 성남시장도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이었는데, 건강한 젊은 여성을 불임이 되도록 만들려면 어떻게 고문해야 되는지, 그리고 그런 상처는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러야 아무는지, 나는 아무 것도 상상이 되지 않는다. 어쨌거나 그 모두 야 간 상고 출신 노동자와 서울대 법대 출신의 신출내기 교수가 출신학교를 묻지 않고 세상의 악과 같이 싸울 수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시간의 맷돌은 한 때 사랑과 우정 속에 하나였던 조직을 가 루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게 분리되어, 원자로 돌아간 개인은 엠페도클레스의 네가 지 원소처럼 가벼운 불은 위로 올라가고 무거운 흙은 아래로 가라앉게 된다. 같이 고문 받고 같이 옥살이를 했어도, 서울대 나온 사람들은 강남좌파가 되어 청와대나 국회로 올라갔고, 야간 상고를 나온 사람은 시인이 되어 카메라를 들고 지상에서 가 장 낮은 땅, 팔레스타인으로 내려갔다. 생각하면 운명의 여신은 얼마나 비정한가? 오이디푸스가 파멸에 이른 것은 그가 특 별히 사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절대 아니다. 그의 잘못은 단지 그가 코린토스가 아 니라 테바이를 향해 갔기 때문이다. 그 길 위에서 우연히 부딪힌 사람을 제 아비인 줄 모르고 살해한 것은 누구라도 그럴 법한 정당방위였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할 아비의 피 값을 손자에게 받아내기도 하고, 딸이 받은 특혜의 청구서를 아비에게 내 밀기도 한다. 저주도 축복도 개인이 아니라 집안에 내린다.
그것이 역사고, 그것이 우리 존재의 서로주체성이다. 나는 오직 너와의 만남 속에서만 내가 되니까. 조국 교수가 당하는 봉변도 그가 우리보다 특별히 더 사악하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그가 개인으로서 단정하게, 공인으로서 헌신적으로 삶을 살아온 것을 존경한다. 그 런데도 그가 지금 같은 봉변을 당하는 까닭은 그가 이른바 강남좌파이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가 그 길로 가지 말았어야 했던 것처럼, 그도 ‘스카이 캐슬’의 저주를 피 하려면 강남 길로 가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강남 길로 갔고 더불어 그의 딸 도 본의 아니게 강남 길을 따라 걸었다. 걸으라고 열려 있는 길이었으니 그들의 잘 못은 아니다. 다들 그렇게 그 길을 걸어 서울대도 가고 고대도 갔으니까.
그러나 열린 길이라고, 모두가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카이 캐슬’의 자식들이 대학에서 인턴도 하고, 무슨 논문도 쓰고, 장관이나 총장의 상도 받고 하던 무렵, 너 릿재 너머 화순의 학생들 가운데 거칠게 말해 3분의 1은 집에서 할머니를 돌보고, 3 분의 1은 읍내에서 5만원 짜리 단과반을 듣고, 3분의 1은 고개 넘어 광주에서 20만 원 짜리 종합반을 들었다. 강남 길이 열려 있다 한들, 그 아이들이 그 길을 같이 걸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무너뜨려야 할 것은 조국도, 그의 딸 도 아니고, 강남 길이며, 그 길의 처음과 끝에 버티고 선 ‘스카이 캐슬’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바로 그 강남 길을 걸어 서울대도 가고 고대도 간 학생들이 촛불을 든 것은 무슨 희극인가? 똑같이 상장도 모으고 스펙 쌓아 거기 들어간 것이 드러날 까 봐, 알리바이를 만들려는 것인가? 아니면, 자기들은 정당한 방법으로 강남 길을 걸어 ‘스카이 캐슬’에 들어왔으나, 그의 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그러나 입시가 아무리 공정하게 관리되더라도 너릿재 너머 아이들이 강남 길을 걸을 수는 없다. ‘스 카이 캐슬’ 사람들이 대학입시와 선발제도를 끊임없이 더 복잡하게 만들기 때문이 다. 그 과정을 이해하려면 입시 설명회가 필요하고 그 길에서 앞서려면 입시 컨설턴 트도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스카이 캐슬’에 살지 않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입시 자 체가 불평등의 재생산장치가 되어 버린 지가 너무 오래 되었다. 서울대 촛불은 그것 을 은폐하기 위한 연막이다. 그러니, 학생증 검사가 없더라도, 광주나 나주의 대학생들이 그 촛불을 같이 들 일은 없을 것이다. 건투를 빈다! 열심히 촛불을 들어라. 닥쳐올 분노의 심판 날에 그 불장 난이 그대들의 성채를 잿더미로 태워버릴 때까지! 전봉준과 유관순과 전태일과 윤 상원이 물려준 이 나라는 별장에서 살뜰하게 접대 받으면서 살 너희들만의 것이 아 니라, 또한 너릿재 너머에 사는 대지의 아이들 것이기도 하므로.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의 고정 칼럼 ‘김상봉, 씨알의 철학’ 연재를 시작합니다. <한겨레> 오피니언면에는 9월11일치 지면부터 첫회가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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