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현 “사소한 정의 외면했던 좌파, 부끄러움을 알아야”
임지현 “사소한 정의 외면했던 좌파, 부끄러움을 알아야”
입력 2019.09.08 13:00
임지현
----
편집자 주-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검찰 수사와 인사청문회를 두고 ‘촛불정부’의 의미가 무엇인지 되묻는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2000년 전후 민족주의 비판과 대중독재론을 통해 한국사회에 지대한 논쟁을 불러왔던 임지현 서강대 사학과 교수가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주제로 이번 사태를 정리했습니다. ‘조국 대전’이라 불리는 이번 사태에 대한 다양한 시각, 주장을 환영합니다.
지난 6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 참석하기 위해 국회를 찾은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서재훈 기자
-------
촛불 혁명의 힘으로 최순실을 심판하고 박근혜 대통령마저 탄핵하여 문재인 정권이 탄생했을 때, 사람들은 ‘정의가 살아있다’는 실감으로 환호했다. 먼 것처럼만 보였던 정의가 추상적 관념이기를 그치고 우리네 삶의 현실이 된 것 같았다. ‘조국 사태’에서 표출된 사람들의 분노를 넘어선 허탈감은 ‘정의가 살아있다’는 환상이 깨진 데서 오는 것이었다.
장관 후보 지명 직전까지만 해도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본인이 ‘죽창가,’ ‘신친일파’ 등의 거친 언사를 동원해 진보와 도덕의 아이콘처럼 처신했기에 대중의 실망감과 분노는 더 컸을 것이다. ‘강남좌파’라는 딱지를 붙여 그의 위선과 가족의 탐욕을 질타하는 목소리들이 크다.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러나 ‘조국 사태’를 조 후보자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환원시켜서는 곤란하다. 타락한 ‘586’ 엘리트주의 같은 세대론도 사태의 일면만을 드러낼 뿐이다.◇큰 정의 위한 작은 정의 희생, 정당한가
‘조국 사태’는 개인적 도덕성의 차원을 넘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고민하는 계기를 한국 사회에 던져 주었다. 조 후보자도 몸담았던, 유토피아를 꿈꾼 20세기의 모든 진보적 변혁 운동에는 독특한 집단 심성이 있다. 큰 정의를 위해서는 작은 정의는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다는 정서가 그것이다.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혁명적 민주화 운동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군사주의와 엄격한 위계질서, 가부장주의와 성차별주의, 인종주의와 지역주의, 가족주의와 동성애 혐오주의 등의 민낯이 드러난다.
군사독재 타도와 민주주의 쟁취라는 큰 정의에 비하면, 이들은 사소한 정의일 뿐이고 이 문제들을 드러내 전선을 흐트려서는 안 된다는 게 80년대의 지배적 생각이었고 나도 그랬다. 사소한 정의의 실현 요구는 소시민적 발상이라고 일축되거나 심지어 반혁명적인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독재의 엄혹한 정치적 탄압 아래 민주화 운동의 동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큰 목표에 집중하는 ‘전략적 본질주의’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치러진 지난 6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 민주광장에서 열린 비판 집회에서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가 숙환(위선과 편법)으로 별세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뉴시스
문제는 민주화 이후였다. 큰 정의를 위해 작은 정의를 유보하거나 희생한다는 발상은 이미 일상의 관행으로 굳어졌고, 그것은 1987년 정치적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큰 무게로 짓눌렀다. 정확히 20년 전인 1999년 계간지 ‘당대비평’의 특집 “우리 안의 파시즘”은 ‘큰 정의’를 선점하고 도덕적 우월성으로 무장한 좌파 민주화 운동에 내재하는 위험성에 대한 경고였다. 첨예한 논쟁이 이어졌지만, 그 내용은 참담했다.◇불가피한 거짓말이라는 명분
이 특집은 ‘민중을 파시스트로 간주’하고, ‘극우와 내통하는 논리’이며, ‘민중을 적으로 돌리는’ ‘진보허무주의’라는 좌파의 진영론적 반비판에 내내 시달렸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약속에 조국 후보자가 과연 적합한 사람인가라는 소박한 질문조차 자유한국당에 영합하고 보수와 내통한다는 비난을 접하고 보면, 작금의 상황에서 지난 20년간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는 자괴감을 떨굴 길이 없다.
진정한 개혁과 혁신을 반대하는 보수 세력들이 힘을 합쳐 진보진영에 흠집을 내려는 보수의 음모론도 오래된 레퍼토리 중의 하나이다. 예컨대 검찰 개혁과 같은 중차대하고 본질적인 개혁을 가로막기 위해 딸 아이의 학교 표창장 같은 사소한 문제를 꼬투리 삼아 ‘큰 정의’의 실현을 방해하고 있다는 식의 논리이다.
더 큰 정의를 위해서라면 때로 거짓말도 불사할 줄 알아야 한다. 조국 후보에 대한 비판 칼럼을 삭제해서 젊은 기자들의 반발을 부른 ‘진보신문’ 한겨레신문의 편집자들에게도 그런 심사가 있지 않았나 싶다. 검찰 개혁이라는 큰 정의를 위해 ‘선의의 거짓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프라우다의 상습적 거짓말도 처음에는 그런 식으로 시작했다. ‘포위된 요새’인 사회주의 모국 소련을 지킬 수 있다면 거짓말이 대수겠냐는 것이다.
소련의 당 기관지뿐 아니라, 68혁명 이후 민주적 사회주의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로자 룩셈부르크조차 거짓말을 서슴지 않았다. 1890년대 ‘노동자대의’라는 폴란드 사민당보에 실린 현장 노동자의 편지들은 대부분 룩셈부르크가 직접 썼다. 노동자들의 곤궁한 현실을 알리고 또 사회주의 혁명과 역사의 진보를 위해서는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컸을 것이다.◇민주주의의 민주화, 부끄러움에서 온다
1980년대 암울한 독재의 긴 터널에서 암중모색하며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거나 진보 사상의 영향을 받은 많은 한국 젊은이들의 사유방식도 룩셈부르크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1990년대 폴란드에서 현실 사회주의의 음험한 잔재와 씨름한 후에야 ‘큰 정의’를 위해 사소한 정의는 희생할 수도 있다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깨달았다. 현실 사회주의처럼 거짓말을 많이 하는 체제는 붕괴될 수밖에 없다.
나는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에 나선 야당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1980년대 민주화 운동 주역들보다 더 도덕적이고 더 정직한 삶을 살았을 거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박근혜 정권 당시 황교안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청문회 기사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래도 조 후보자 스스로 밝혔듯이 ‘사회주의자인 동시에 민주주의자’라면 자유한국당 의원들과 다른 점은 분명히 있어야 한다.
더 엄격하고 높은 도덕적 잣대를 요구하는 게 아니다. 근대화의 주역이었다는데 자부심을 느끼는 보수와 좌파의 차이는 아마도 부끄러움에 있지 않을까 한다. 엄혹한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을 했으므로 더 당당하고 자랑스럽다는 태도가 아니라, “나는 과연 최선을 다했는가”하는 자기 성찰에서 오는 부끄러움 말이다. 그래야 좌파이고, 그래야 사람이다.
민주주의를 민주화하는 힘은 자기 정당성이 아니라 부끄러움에서 온다.임지현 서강대 교수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