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시 일본 와세다대 교수 “한·중·일, 과거 선점 욕망에 ‘일국사’ 틀에서 아전인수격 고대사 접근” - 경향신문
이성시 일본 와세다대 교수 “한·중·일, 과거 선점 욕망에 ‘일국사’ 틀에서 아전인수격 고대사 접근”
이성시 와세다대 교수는 서양에 대해 열등한 존재인 ‘오리엔트’처럼, 근대 일본도 한국과 중국을 일본의 ‘오리엔트’로 만들려고 했다는 지적을 한다. 근대에 만들어진 역사 담론은 시민사회의 노력으로 반박되고, 역사학계가 새로운 인식을 공유하기도 한다. 1970년대 이후 진구황후의 삼한정벌 담론 해체가 대표적인 사례다. 삼인출판사 제공
배문규 기자2019.09.23 20:51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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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의 장으로서의 고대사’ 펴낸 이성시 일본 와세다대 교수한·일, 광개토대왕비 등 해석 맞서 한·중은 발해사 놓고 치열한 갈등“식민주의, 지배·피지배 관계 포함…국가 넘어 계급 문제 등도 파악을”
역사는 만들어진다. 19세기 유럽 근대국가에서 만들어진 ‘민족’ 개념과 마찬가지로 고대사 연구도 국민국가 형성기의 이데올로기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이성시 일본 와세다대 문학부 교수(67)는 최근 펴낸 <투쟁의 장으로서의 고대사>(삼인)에서 한·중·일 세 나라가 고대사를 일국사(一國史)의 틀에서, 그것도 근대의 맥락을 끌어당겨 해석해왔다고 지적한다. 1000년도 넘은 고대사에 대한 해석이 실제로는 최근 100년 남짓한 시간에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각국의 현재 상황과 욕망이 투사된 고대사는 국가 간의 울타리를 높이고, 서로 충돌하며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투쟁의 장’이 됐다.
이 교수는 대표적으로 고대 일본 진구황후의 삼한정벌설을 소개한다. 진구황후가 군사를 이끌고 신라왕을 일본에 복속시키고, 고구려왕과 백제왕도 조공을 바치게 했다는 내용이다. 이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며 고대부터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우위를 드러내는 ‘사실’로 받아들여졌으며, 메이지 정부에선 진구황후 초상화가 그려진 화폐를 만들기도 했다. 반면 1970년대 한국에선 이에 대한 비판으로 선진 문화를 가진 기마민족(부여나 고구려)이 일본에 진출해 야마토 조정을 세웠다는 ‘기마민족정복설’ 혹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일본에 나라를 세웠다는 ‘분국론’이 등장했다. 오늘날 삼한정벌설은 학계에서 부정됐지만 아직도 일본인 기억에는 남아 있고, 기마민족정복설·분국론도 남북한에선 ‘국민적 기억’으로 퍼져 있다.
한국과 중국이 대립하는 발해사도 “현실의 정치 과제”가 역사에 투영된 사례다. 한국은 남북 분단의 맥락에서 발해사를 받아들이면서 말갈의 존재를 축소하고, 중국은 오늘날 소수민족을 통합시키는 맥락에서 발해를 당나라 시대 소수민족의 지방정권으로 본다.
이 교수는 이런 갈등에서 벗어나려면 “일국사에 갇힌, 국민국가 이야기로서의 고대사에서 해방”돼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달 수술을 마치고 회복 중인 이 교수는 23일 e메일로 인터뷰 답변을 보내왔다.
- “현재를 과거에 투영하여 과거를 배타적으로 점유하려는 투쟁”에서 비롯된 갈등은 ‘동아시아적 상황’인가.
“미국 사학자 패트릭 기어리의 <민족의 신화, 그 위험한 유산>에선 유럽에서도 같은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국민들은 학술적으로 사료를 검토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고대사를 둘러싼 ‘투쟁’에 동원되고, 선동된다고 기어리는 강조한다. 근대 일본의 경우 연구자가 적극적으로 역사학을 이용해 국민을 교화하고, 국민 의식의 동원에 참여하기도 했다. 동아시아 각국의 역사학은 이런 근대 일본의 국민주의적 역사학을 패러다임으로 하고 있고, 그것을 공유하기 때문에 같은 차원의 ‘투쟁’이 이어지는 것이다.”
- 한국의 역사 연구는 근대 일본의 역사 해석에 대한 재반박이기도 했다. 일본이 만든 해석에서 벗어나려는 과정 자체가 후기식민주의적 상황으로도 읽힌다.
“근대 일본에 대한 단순한 비판은 같은 논리에 빠져들게 된다. 식민주의의 극복은 같은 지평이 아닌 다른 논리에서의 극복이 요구된다. 거시적으로 보면, 현재 한국사는 근대 일본 역사학의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같은 틀 내에서 투쟁의 결과, 같은 틀을 서로 강화하는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광개토대왕비 신묘년조 32자를 둘러싼 해석이 대표적인 사례다. 1880년대 비를 발견한 일본은 ‘왜’의 우위로 보는 해석을 했고, 반면 남북한은 일제에 의한 개찬설, 고구려 우위 정세로 해석했다. 이 교수는 1775자 전체 구성 속에서 왜의 존재를 광개토대왕의 위대함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트릭스터)로 볼 것을 주장한다.
-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 연원을 역사적 배경에서 찾는 움직임이 있다. 일본 사학자 쓰다 소키치(조선 식민사학 이론을 만든 혐한의 원조)에 대한 검토에서는 일본의 한국 ‘멸시’의 근원을 엿볼 수 있었다.
“최근 일본 미디어의 한·일관계 보도에선 식민지배에 대한 깊은 반성이 없음은 물론, 근대 일본의 국민국가 형성 과정에서 만들어낸 한국인과 중국인 차별이 노골적으로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쓰다의 중국과 한국에 대한 그로테스크한 인식은 근대 일본인에게 널리 공유된 인식으로 볼 수 있다. 최근 두 나라 국력이 일본에 근접하거나 넘어서면서 과거의 멸시감에 매달리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유럽 극우정당의 대두에서 보듯, 경제적 불안이 국민(민족) 의식의 고양으로 이어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일본에서도 한국·북한·중국에 대한 비판이 현 정권 안정의 토대가 되고 있다고 본다.”
- 일국사의 한계를 넘어 동아시아 역사를 함께 조망하자는 주장을 했다. 해결되지 않은 역사 문제들을 흐리는 것 아니냐는 부정적 반응도 있을 것 같다.
“일국사는 한쪽으로 쏠려 전체의 균형을 잃은 불공평한 역사이다. 역사에 근대국가의 틀을 투영하고, 한정된 사실에만 근거해 재구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식민주의도 지배·피지배 관계뿐만 아니라 국가를 뛰어넘는 계급 문제 등 복잡한 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단순히 가해(국과 민족)와 피해(국과 민족)로는 파악할 수 없다. 식민주의 청산을 위해서도 역사의 여러 현상을 단순화하는 일국사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떤 나라 고유의 문제로만 파악했던 정치·사회·문화상을 동아시아 전체 관계 속에서 파악한다면 새로운 사상(事相)이 적지 않을 것이다.”
배문규 기자2019.09.23 20:51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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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의 장으로서의 고대사’ 펴낸 이성시 일본 와세다대 교수한·일, 광개토대왕비 등 해석 맞서 한·중은 발해사 놓고 치열한 갈등“식민주의, 지배·피지배 관계 포함…국가 넘어 계급 문제 등도 파악을”
역사는 만들어진다. 19세기 유럽 근대국가에서 만들어진 ‘민족’ 개념과 마찬가지로 고대사 연구도 국민국가 형성기의 이데올로기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이성시 일본 와세다대 문학부 교수(67)는 최근 펴낸 <투쟁의 장으로서의 고대사>(삼인)에서 한·중·일 세 나라가 고대사를 일국사(一國史)의 틀에서, 그것도 근대의 맥락을 끌어당겨 해석해왔다고 지적한다. 1000년도 넘은 고대사에 대한 해석이 실제로는 최근 100년 남짓한 시간에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각국의 현재 상황과 욕망이 투사된 고대사는 국가 간의 울타리를 높이고, 서로 충돌하며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투쟁의 장’이 됐다.
이 교수는 대표적으로 고대 일본 진구황후의 삼한정벌설을 소개한다. 진구황후가 군사를 이끌고 신라왕을 일본에 복속시키고, 고구려왕과 백제왕도 조공을 바치게 했다는 내용이다. 이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며 고대부터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우위를 드러내는 ‘사실’로 받아들여졌으며, 메이지 정부에선 진구황후 초상화가 그려진 화폐를 만들기도 했다. 반면 1970년대 한국에선 이에 대한 비판으로 선진 문화를 가진 기마민족(부여나 고구려)이 일본에 진출해 야마토 조정을 세웠다는 ‘기마민족정복설’ 혹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일본에 나라를 세웠다는 ‘분국론’이 등장했다. 오늘날 삼한정벌설은 학계에서 부정됐지만 아직도 일본인 기억에는 남아 있고, 기마민족정복설·분국론도 남북한에선 ‘국민적 기억’으로 퍼져 있다.
한국과 중국이 대립하는 발해사도 “현실의 정치 과제”가 역사에 투영된 사례다. 한국은 남북 분단의 맥락에서 발해사를 받아들이면서 말갈의 존재를 축소하고, 중국은 오늘날 소수민족을 통합시키는 맥락에서 발해를 당나라 시대 소수민족의 지방정권으로 본다.
이 교수는 이런 갈등에서 벗어나려면 “일국사에 갇힌, 국민국가 이야기로서의 고대사에서 해방”돼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달 수술을 마치고 회복 중인 이 교수는 23일 e메일로 인터뷰 답변을 보내왔다.
- “현재를 과거에 투영하여 과거를 배타적으로 점유하려는 투쟁”에서 비롯된 갈등은 ‘동아시아적 상황’인가.
“미국 사학자 패트릭 기어리의 <민족의 신화, 그 위험한 유산>에선 유럽에서도 같은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국민들은 학술적으로 사료를 검토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고대사를 둘러싼 ‘투쟁’에 동원되고, 선동된다고 기어리는 강조한다. 근대 일본의 경우 연구자가 적극적으로 역사학을 이용해 국민을 교화하고, 국민 의식의 동원에 참여하기도 했다. 동아시아 각국의 역사학은 이런 근대 일본의 국민주의적 역사학을 패러다임으로 하고 있고, 그것을 공유하기 때문에 같은 차원의 ‘투쟁’이 이어지는 것이다.”
- 한국의 역사 연구는 근대 일본의 역사 해석에 대한 재반박이기도 했다. 일본이 만든 해석에서 벗어나려는 과정 자체가 후기식민주의적 상황으로도 읽힌다.
“근대 일본에 대한 단순한 비판은 같은 논리에 빠져들게 된다. 식민주의의 극복은 같은 지평이 아닌 다른 논리에서의 극복이 요구된다. 거시적으로 보면, 현재 한국사는 근대 일본 역사학의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같은 틀 내에서 투쟁의 결과, 같은 틀을 서로 강화하는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광개토대왕비 신묘년조 32자를 둘러싼 해석이 대표적인 사례다. 1880년대 비를 발견한 일본은 ‘왜’의 우위로 보는 해석을 했고, 반면 남북한은 일제에 의한 개찬설, 고구려 우위 정세로 해석했다. 이 교수는 1775자 전체 구성 속에서 왜의 존재를 광개토대왕의 위대함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트릭스터)로 볼 것을 주장한다.
-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 연원을 역사적 배경에서 찾는 움직임이 있다. 일본 사학자 쓰다 소키치(조선 식민사학 이론을 만든 혐한의 원조)에 대한 검토에서는 일본의 한국 ‘멸시’의 근원을 엿볼 수 있었다.
“최근 일본 미디어의 한·일관계 보도에선 식민지배에 대한 깊은 반성이 없음은 물론, 근대 일본의 국민국가 형성 과정에서 만들어낸 한국인과 중국인 차별이 노골적으로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쓰다의 중국과 한국에 대한 그로테스크한 인식은 근대 일본인에게 널리 공유된 인식으로 볼 수 있다. 최근 두 나라 국력이 일본에 근접하거나 넘어서면서 과거의 멸시감에 매달리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유럽 극우정당의 대두에서 보듯, 경제적 불안이 국민(민족) 의식의 고양으로 이어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일본에서도 한국·북한·중국에 대한 비판이 현 정권 안정의 토대가 되고 있다고 본다.”
- 일국사의 한계를 넘어 동아시아 역사를 함께 조망하자는 주장을 했다. 해결되지 않은 역사 문제들을 흐리는 것 아니냐는 부정적 반응도 있을 것 같다.
“일국사는 한쪽으로 쏠려 전체의 균형을 잃은 불공평한 역사이다. 역사에 근대국가의 틀을 투영하고, 한정된 사실에만 근거해 재구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식민주의도 지배·피지배 관계뿐만 아니라 국가를 뛰어넘는 계급 문제 등 복잡한 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단순히 가해(국과 민족)와 피해(국과 민족)로는 파악할 수 없다. 식민주의 청산을 위해서도 역사의 여러 현상을 단순화하는 일국사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떤 나라 고유의 문제로만 파악했던 정치·사회·문화상을 동아시아 전체 관계 속에서 파악한다면 새로운 사상(事相)이 적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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