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hrs ·
진회숙
27 September at 20:53
어느 서울대생의 글
정말 읽어볼만한 글입니다.
1. 들어가며
장이 끝나고 막은 내렸습니다. 새로운 장이 펼쳐질 수 있으나 그것은 그 때 생각할 일입니다. 복기를 하며 되뇌어야 하는 본질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정치·민주적 절차에 있어 검찰 개입의 허용 여부, 사회구조적 양극화의 확대에 대한 해결책, 대통령의 내각구성권에 대한 견제 장치 도입 여부, 균형과 사실보도 측면에서의 저널리즘적 자성입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 저는 조금 다른 측면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2. 논란들
제 이력을 약간 설명하겠습니다. 저는 일반계고 출신으로, 조국 장관의 딸과 비슷한 시기에 같은 교육과정과 입학제도를 통해 서울대에 입학한 학생입니다. 또한 현재는 서울대 학부를 졸업한 이후 자대 대학원을 다니며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번 청문회 과정을 거치며 각자의 방식대로 감정을 증폭했지만,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마치 제가 검증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이력과 제 이력은 무척이나 닮아 있었습니다.
먼저 제 판단부터 밝히자면, 조국 후보자의 자녀는 자신이 속한 맥락에서 이 악물고 최선을 다한 학생입니다. 성실함과 악바리 근성으로 자신이 갈 수 있는 한국 사회에서의 엘리트코스 중 가장 최상의 길을 밟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께 칭찬 받으려고 노력하는 공부 잘하는 학생의 전형, 그래서 어른들에게 예쁨 받는 아이. 그녀의 이력으로부터 저는 그것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기에 특혜로 보이는, 그녀에게만 허용되는 그 수많은 행운들은 무엇일까. 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이력으로부터 국민들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 ‘특혜’들은 사실 우리 사회가 엘리트 학생에게 부여하고 있는 ‘합법적이고 제도적인 특혜’입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 도입된 입시정책은 교육제도에도 효율성의 마법을 도입하는, 그리하여 대학에게 학생선발의 자유를 부여한 제도였습니다. 당대의 서울 상위권 대학들은 어떻게 하면 특목고 학생과 같은 우수한 학생을 한 명이라도 더 합법적으로 뽑을 수 있는지 고민하였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제도가 입학사정관제였습니다. 저 역시 서울대의 입학사정관 전형을 통해, 생활기록부와 자기소개서로 수시 서류전형에 합격하였습니다. 당대 학교와 학부모들은 자소서와 생기부에 기입할 스펙을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특목고는 발 빠르게 그러한 프로그램들을 ‘제도화’하였고, 부족한 자원의 일반고는 전교에서 뛰어난 아이 몇을 뽑아 그 아이들에 온 선생님들이 달려들어 포트폴리오를 만들었습니다. 특목고는 ‘시스템화’한 것이고, 일반고는 ‘선택과 집중’을 한 것이죠. 조국 후보자의 자녀는 특목고에 진학하여 그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탄 것이고, 저는 학교로부터 간택을 받아 ‘분재’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논문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역시 당대에는 그러한 프로그램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특목고는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과학고는 자체적으로 유수 대학 박사출신의 선생님과 학생들이 조를 이루어 실험을 진행하고 논문을 투고합니다. 그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저널도 운영되어 최소한의 성과라도 그럴듯한 논문 발간 이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그런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외고는 이과 학생들에게 조국 후보자 자제가 수행한 것과 같은 인턴십 프로그램을 제공합니다. 일반고의 경우는 동아리 활동이나 학부모의 인맥을 동원해보지만 사실 특목고에 비해 역부족입니다.
많은 이들이 고등학생이 대학 연구실에서 실험을 진행하고, 논문 및 포스터의 저자를 가져가는 것에 분노하고 있던 그 와중. 이번 여름방학에도 어김없이 과학고 및 특목고 학생들은 서울대를 비롯한 명문대의 실험실에 다녀갔습니다. 이런 시국에서도 입시의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실험실의 자투리 시간, 자투리 주제, 자투리 데이터를 이용하여 간단한 실험 및 분석을 진행하는데, 이는 조국 후보자나 나경원 원내대표 자제들의 결과물과 비슷한 수준입니다. 한국 학회에서 발행하는 임팩트 팩터가 낮은 저널에 ‘논문’으로 실을 것이냐, 아니면 학계에서 인정받는 국제 학술대회에 ‘포스터’로 발표할 것인가는 교신저자와 학생의 선택일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교신저자를 제외하고 해당 연구에 가장 기여한 사람이 고등학생일 경우, 제1저자를 그 학생에게 줄 것인가 아니면 제1저자 역시 교신저자가 가져갈 것인가는 교신저자의 선택이고 그 책임 역시 교신저자가 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장학금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이러니 하게도 그녀에게 문제가 되었던 장학금은 모두 ‘교외’장학금입니다. 교외장학금은 기준이 없습니다. 이준구 교수님 및 많은 교수님들의 노력으로 대부분 서울대의 ‘교내’ 장학금은 소득수준을 기준으로 선정됩니다. ‘국가 장학금’과 합치게 되면 소득 8분위 미만 대부분의 학부 학생들은 장학금을 수여받을 수 있게 됩니다. 남는 것은 학점 기준을 못 맞추거나, 소득수준이 높은 학생인데 이런 학생들에게는 보통 교외장학금이 주어집니다. 저 역시 소득수준이 높아 교내 장학금을 받지 못하던 와중에, 교외 장학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교외장학금은 출연자의 기준에 맞추어 지급됩니다. 일반적으로는 성공한 기업가가 자신과 분야가 비슷한 연구를 수행하는 서울대 교수에게 추천권을 부여하고, 해당 교수는 매 학기마다 관련된 주제에 걸쳐있는 학생들 중 장학금을 받지 못하는 학생을 추천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소득수준이 높음에도 장학금을 받았다는 ‘상대적 박탈감’ 주장은 적어도 서울대 내에서는 기각됩니다. 소득수준이 낮은 대부분의 학생들은 장학금을 받기 때문입니다.
봉사활동은 무엇인가. 솔직하게 말해서, 제 또래 학생들 중 진정 정직하게 봉사활동을 한 친구들은 거의 없습니다. 정말 성실하여 동네 도서관에서 네 시간 봉사활동을 하더라도 그 확인서에는 여섯 시간으로 찍혀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역시 하지 않은 대청소를 봉사활동으로 인정해주거나, 두 시간의 쓰레기 분리수거 활동을 다섯 시간의 활동으로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어머니가 대신 봉사활동을 가서 아이의 이름으로 확인서를 받았고, 심한 경우는 봉사 대신에 일정 금액을 기부하고 해당 기관으로부터 봉사활동 확인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대입에서나 중요한 요건이었지, 대학원 입시에서는 하등 중요하지 않은 요건입니다.
저는 위의 굵직한 사건들을 맥락화하여 합법적이고 제도적으로 구성하였습니다. 모두가 이해됩니다. 실제로 서연고 및 설포카에는 조국 장관의 딸과 비슷한 코스를 밟은, 혹은 더 대단한 이력을 가진 학생들은 수두룩합니다. 그들 모두를 입학 취소할 자신이 없다면,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지울 순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없는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짚어야 할 지점이 있습니다. 각각의 사건은 이해가 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전혀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영외고 – 고려대 – 서울대 – 부산대 의전원’이라는 엘리트 코스를, 보통의 사람들은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도 하나도 성취하기 힘든 그 과정들을 코스로 큰 장애물 없이 밟아가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3. 첫 단추와 모순
해답은 ‘첫단추’입니다. 모든 것은 ‘한영외고’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순간부터 그 아이는 사회에서 제공하는 ‘합법적이고 제도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을 기회가 주어집니다. 대부분 방향과 인프라는 주어져 있고, 학생은 열심히 노력만 하면 됩니다. 서울대는 30%가 특목고 출신입니다. 카이스트는 70%가 특목고 출신이고, 포스텍은 50%입니다. 의전원과 로스쿨의 압도적 다수는 서연고 및 설포카입니다. 우리 사회는 첫 단추를 잘 낀 아이가 마지막 단추까지 별 탈 없이 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실수를 하거나, 잠깐 게을렀던 아이는 처음 발생했던 격차가 시간에 따라 점차 벌어져 마침내는 아무리 ‘노오력’을 하더라도 그 격차를 메울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청문회 과정에서 조국 장관이 국정농단을 한 것 마냥 분노하는 제 또래의 청년들을 보았습니다. 맨 처음, 저는 단순히 엘리트의 사회를 이해하지 못하는 우경화된 ‘범부대중’의 분노표출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 보니 제가 정말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찬성과 반대의 국민 그 누구도 비판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효율성이 강조된 무한 경쟁의 입시제도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낭만이 없이 도서관에서 학점 경쟁을 벌이다가, 지금은 바늘구멍 취업 시장에 던져진 청년들이 분노의 주체입니다. 이 청년들에겐 ‘어차피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기적으로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마치 자기 자신은 고고한 척하며 사익을 앞세우는 자들을 꾸짖었던 인물이 보여준 ‘위선’이 ‘배신감’으로 느껴졌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 사회가 ‘첫 단추 사회’임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 자신이 그 첫 단추를 만회하기 위해 투입했던 ‘노오력’의 무력함과 그 절망감을 마주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렇게도 그들은 조국 개인의 ‘비리’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시스템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비리가 되고, 그리하면 아직 개인적 차원의 노력을 할 명분이 있는 것이죠.
실제로 특목고의 손쉬운 명문대 입학, 설포카에 쏟아지는 장학금들, 서연고에게 유리한 전문대학원 입학 등은 대다수 사회구성원들의 희생을 밟고 서있습니다. 국가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일명 ‘효율성’ 혹은 ‘엘리트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특정 집단에 역량을 쏟아 붓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엘리트 교육이 잘못된 것은 전혀 아닙니다. 사회적 선택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엘리트 교육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한 적이 있는가 하면, 그렇진 않은 것 같습니다. 교육적으로 계급을 나누고 그에 따라 수반되는 불평등은 개개인에게 주어진 ‘처지’일 뿐 각 구성원들이 동의한 ‘의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금의 분노가 표출되는 것이겠죠.
문제는 모순입니다. 약자라 하여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제 또래의 청년세대는 ‘불평등한 것은 견딜 테니 과정만은 공정하게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험’이 가장 공정하다고 생각하고, ‘시험의 부활’을 외칩니다. 하지만, 분명 모순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제 또래 청년 세대들은 학교에서 근무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나, 공공기관 및 정부에서 일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개선 요구에 대해 ‘그렇게 주장할 거면 시험보고 합격해라’라며 분노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시험을 통해 진입한 엘리트 집단의 ‘불평등’에 분노하고 있죠. 불평등은 증가하는데 불공정이 감소하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생물학적 노화에 따라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게다가 ‘정규직 채용’도 아닌 ‘처우개선’에도 시험이 공정하다는 명분으로 반대하면서, 첫 단추를 만회할 수 없는 사회에 분노하는 것은 분명 모순입니다. 서울대생들만 뽑는 대기업을 비판하며 ‘블라인드 채용’을 주장할 때에, 서울대생들이 ‘그렇게 억울하면 너도 다시 공부해서 서울대 들어와’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과학고 학생들을 위주로 뽑는 카이스트를 비판할 때에 과학고 학생들이 ‘그렇다면 너도 중학교 때 공부 열심히 해서 과학고 들어오지 그랬어.’라고 말한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서울대에서 조국 장관 임명 반대를 위한 집회를 했다고 미디어는 보도합니다. 그러나 사실 압도적 대다수의 서울대 사회 내부는 잠잠합니다. 그 시기의 저 역시 침묵하였습니다. 먼저는 ‘입시부정’이라는 키워드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 입장에서는 너무나 이해되는 일들에 대해 시민들이 분노하는 이유를 그 당시에는 전혀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서울대로 대표되는 엘리트 집단이 누려왔던 ‘제도적 특혜’가 이슈화되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표면위로 드러나 명문대 학생이라는 신분만으로 합법적으로 제공되는 제 눈앞의 이익이 사라지는 것은 제게 손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분노해야할 여타의 대학생들의 분노는 주목받지 아니하고, 우리 사회에서 가장 기득권에 속하는 서울대, 고려대 학생들의, 그것도 그들 중 소수들이 모인 집회만이 미디어에 노출된다는 것입니다. 제 눈에 서울대 집회에 모인 이들은 자신이 이룩한 엘리트 신분의 가치가 조국 장관 딸의 사건으로 하락하는 것에 분노하는 것으로 보일 뿐, 여타의 대학생들이 겪는 불평등에 연대하는 것으론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작년에는 설포카 학생들만이 주로 혜택을 받는 ‘병역특례의 유지 및 확대’를 주장했던 자들이 현재 서울대 내 조국 임명 반대 집회의 주축이 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미디어는 이러한 집회들 역시 불평등하게 조명하고 있습니다. 명문대 학생들이 분노하면 뭔가 대단한 이유가 있고, 사회적 파급력이 있을 것이라는 편견 속에서 말이죠.
이 역시 모순입니다. 비난받아야 할 주체들은 적반하장 식으로 분노하고 있고, 분노해야할 주체들은 오히려 침묵하고 있습니다. 미디어 역시 엘리트는 뭔가 다르겠지 생각하며 불평등하게 이들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불평등은 받아들이라 하면서, 불공정은 참지 못하는 것 역시 모순입니다. 그런 사회는 존재치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사태를 겪으며 우리는 여러 가지 생각하여야 할 문제들과, 풀어내어야 할 모순들을 떠 앉게 되었습니다.
4. 나오며
모든 정치인들은 빚을 집니다. 그리고 그 빚진 자들에 휘둘리며 그들을 위한 정치활동을 하게 됩니다. 조국 장관은 가장 먼저 본인의 가족들에게 빚을 졌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앞서 이야기한 이 계층에 ‘상처’를 주었습니다. 즉, 조국 장관은 우리 사회의 ‘낙오된 자’들에게 빚을 졌습니다. 그것이 의도했던 아니던, 실은 매우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조국’이라는 인물이 우리 사회 엘리트의 화신이 되는 순간부터 조국 장관은 사회 전체가 지분을 나누어 공동 소유하고 있던 모든 채무를 혼자 인수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장관 임기 중에 이들을 생각해야함은 물론이고, 특히 장관 임기 후에 ‘고고한 학자’의 표상으로 연구실에 틀어박혀 논문이나 쓸 생각은 버리시기 바랍니다. 정치는 아니더라도, 사회에 뛰어들어 본인에게 표출된 그 분노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공직자의 의무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번 계기로 권력기관에게 빚을 지지 않았다는 점이 확실해진 것은 참 다행입니다.
이 글을 마치며 제 견해를 밝히자면, 비겁하지만, 저는 엘리트 교육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효율성 있는 엘리트 교육의 장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엘리트 교육에 찬성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 사회가 ‘첫 단추 사회’에서 벗어나 ‘노오력’으로 패자부활을 할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자고 합의를 한다면 기꺼이 그에 발맞추어 제 기득권을 내려놓을 뿐 아니라 그에 연대할 것입니다.
대선에 버금가는 이 사회적 비용을 헛되이 버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가장 먼저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합니다. 분노를 모으고, 스스로의 모순을 풀어내어, 분노의 대상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끝내는 연대해야 합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양분된 사회가 치열한 논쟁으로 그 간극을 좁힐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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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몰라 [미디어 오늘]에 무기명 칼럼으로 투고하였으나, 게재되지 못하였습니다. [딴지일보]에 투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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