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23

“완장 찬 청년들이 농민 구타…경찰은 테러단과 야합” : 학술 : 문화 : 뉴스 : 한겨레



“완장 찬 청년들이 농민 구타…경찰은 테러단과 야합” : 학술 : 문화 : 뉴스 : 한겨레




“완장 찬 청년들이 농민 구타…경찰은 테러단과 야합”

등록 :2019-09-22

[토요판] 정용욱의 편지 현대사 (19) 테러의 일상화 (상)

1947년 전국에 테러 공포
‘독청’ 등 각종 우익단체들
농촌지역 원정테러도 감행
미 특사에 하소연 편지 쇄도

호남지역 특히 테러 심해
좌익 몰아낸다는 명분 아래
마을마다 테러단이 휩쓸어
‘사상전향서’·기부금 강요
친일파 출신 경찰은 방조


1947년 여름 전국은 테러 공포에 휩싸였다. 우후죽순처럼 설립된 우익단체들이 좌익 척결을 명분으로 백색테러를 자행했으나, 친일파 출신이 장악한 경찰은 방조하거나 이를 조장했다. 대표적인 우익단체의 하나였던 서북청년회 회원들이 1948년 5월 소련의 철수를 요구하는 펼침막을 들고 집회를 열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친애하는 웨더마이어 중장 각하!!!

혹서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수고하십니까. 36년간 제국주의 기반(羈絆: 굴레)으로부터 해방된 기쁨은 2년 반이나 되는 오늘날에는 공포와 불안으로 화(化)하고 말았습니다.

진정한 해방, 독립을 주고자 진주하신 미군정 하에 있는 남조선에는 왜 이리 살벌한 분위기가 도는지 모르겠습니다.

삼상(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하여 ‘빨갱이’라고 하여 남편을 동생을 아들딸을 감옥과 테로(테러)의 심판소로 끌려보내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각하!!! 미군정 내에 있는 친일파 민족반역자 그의 ◯◯단 한민 한독 독촉 그의 테로단 대한노총 서청 광청 건청 등을 해체시키시고 삼상 결정으로 하루속히 실천하여 전 인민 전 여성이 다 잘 살 수 있는 정부로 세워주시기를 진정합니다. 끝으로 각하의 건강을 축하합니다.

1947년 8월30일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508의 32

정문자 (인)”



시민들에 대한 우익단체의 테러 위협을 미국 웨더마이어 특사에게 고발하는 편지. 서울 인사동에 사는 여성 ‘정문자’가 자신의 신원을 밝힌 채 썼다. 정용욱 교수 제공서울 인사동 여성의 편지

1947년 8월 말 늦더위가 한창인 때 서울 인사동에 사는 한 여성이 미국 대통령 특사로 남한을 방문한 앨버트 웨더마이어(Albert C. Wedemeyer) 중장에게 진정서 한 통을 보냈다. 이 여성은 자신의 절박함을 편지 서두와 중간에서 웨더마이어 장군을 부를 때 연이어 찍은 세 개의 느낌표로 대신했다. 웨더마이어 장군이 이 여성의 소원을 들어주었을까? 아니, 이 여성은 편지를 보낸 뒤 과연 무사했을까?

신변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는 이런 편지를 기명으로 보낼 수 없는 것이 1947년 8월 서울의 상황이었다. 몽양 여운형조차 한 달여 전 수도경찰청장으로부터 공공연히 정가에 떠도는 암살 협박을 전해 들은 며칠 뒤 피살된 판국에 우익 정당, 단체들을 친일파 민족반역자 집단으로 규정하고 우익 청년단체들을 테러 집단으로 규정하며 그 해체를 주장한 편지의 작성자가 무사하기를 바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상황이 그러함에도 편지 작성자는 주소를 밝힌 것은 물론 이름 아래 도장까지 찍어 자신의 신원을 확인해주었다. 이 여성은 용감한 것인가, 아니면 순진한 것인가? 편지는 해방 이후 미군정하 남한 사회의 변화와 최근 동정을 한두 문장으로 요약해버리고 자신의 고통과 그 해결 방향을 간결하게 정리한다. 단정한 필체에다 능숙한 펜 놀림으로 보건대 편지 주인은 일상적으로 글을 쓰는 인텔리 여성 같다. 마지막 단락에서 ‘전 인민’ 다음에 굳이 ‘전 여성’을 병렬하여 여성의 입장을 강조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1947년 여름, 웨더마이어 장군이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특사로 현지 사정을 조사하기 위해 중국과 남한을 방문했다. 웨더마이어 장군은 중국 방문을 마치고 1947년 8월26일 서울에 도착했고, 9월6일 서울을 떠날 때까지 11박12일 여정으로 한국에 머물렀다. 웨더마이어 특사는 남한에 체류하는 동안 한국인들의 의견을 널리 청취한다는 취지로 한국인들에게 서한으로 의견을 보내줄 것을 신문과 방송을 통해 홍보했다. 이에 호응해 많은 한국인들이 그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 편지들이 미국 국립문서관 ‘웨더마이어 사절단 문서철’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에게 보낸 한국인들의 편지는 그가 방문한 시점의 한국 상황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에게 도착한 한 농부의 편지도 읽어보자.

“농민의 한 사람으로서 각하에게 현 농민 상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나는 한 농부입니다. 나의 불만이 있어도 말할 데도 없고 말만 하면 경찰에서 잡아가고 하였습니다. 이 기회를 얻어 각하에게 말 한마디 하고자 합니다.

어느 날 저녁에 동네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있으니까 어데선지 ‘독청’(獨靑)이란 완장을 찬 청년 오십 명이 트럭을 타고 와서 무조건하고 구타하였습니다. 이유는 ‘삐라’ 부쳤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을 수 없어 대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네들 테로단은 도망하였습니다.

그 후일 전야(田野)에서 일하는 우리 농부를 경찰은 무조건하고 트럭에 태워서 유치장에 넣습니다. 현재는 더 심하게 테로단과 경찰은 야합하야 테로 검거를 계속하고 있으니 우리 농부는 어떻게 살랍니까. 미군정은 점점 신용만 잃어갑니다. 그럼으로 한주먹도 안 되는 친일파의 말만 듣고 인민의 의사를 무시하는 것이 현 남조선입니다.

우리 농부는 빨리 공위(共委)를 성공시켜서 민주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을 기대하며 친일파를 협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테로단을 즉시 해체하고 경찰 책임자와 테로 수괴를 엄벌로 처단하며 민주주의 애국자를 석방해야만 암흑 상태의 남조선이 회복될 수가 있습니다.”



농촌에서의 우익 테러를 고발하는 내용의 농민 편지. 정용욱 교수 제공이 편지의 작성자는 자신을 농부로 소개했지만 정갈한 필체와 정연한 논조, 선명한 주장으로 보건대 평범한 농부는 아니고 유식자(有識者)다. 편지에 작성 일자가 나와 있지 않지만 웨더마이어 사절단 문서철에 들어 있는 한국인 편지들이 대부분 8월 말에 작성된 것을 고려하면 이 편지도 8월 말쯤 작성되었을 것이다. 앞의 편지가 당당하게 자신의 신원을 밝힌 데 반해 이 편지는 발신인 주소, 이름 등 신원을 전혀 밝히지 않았다. 문서철에 있는 다른 한국인들 편지 가운데 이런 논조와 주장을 편 편지들은 대부분 무기명이었고, 그런 면에서 앞의 정문자의 편지가 오히려 예외적이다.

테러 시찰기자단의 현장 조사

한 통은 농촌 거주민, 다른 한 통은 서울 거주민이 보냈지만 당시 남한 사회를 바라보는 양자의 상황 인식과 주장은 대동소이하다. 편지들에 따르면 해방의 감격도 잠시였고, 해방된 지 2년여가 지난 지금 남한은 공포와 불안에 떠는 암흑사회다. 그러한 상황은 미군정 내 친일파 민족반역자, 그와 결탁한 극우 정치세력에 의해 초래되었고, 그들에 의해 동원된 극우 청년단체의 폭력과 이를 비호하는 경찰에 의해 유지, 확산되고 있다. 두 편지는 테러단체의 해체를 당면한 요구로, 또 미소공위 성사를 통한 정부 수립을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농부의 편지는 보다 구체적으로 미소공위 협의 대상에서 친일파를 제외할 것과 경찰 책임자와 테러 수괴의 처단, 정치범 석방을 요구한다.

1946년 5월 1차 미소공위 휴회 이후 서북청년회(서청), 대한독립촉성청년총연맹(독청), 광복청년회(광청), 건국청년회(건청) 등 우익 청년단체들은 경쟁적으로 서울로부터 지방으로, 또 도시에서 농촌으로 원정 테러를 조직했고, 그 과정에서 지방 지부 설치를 통해 조직을 확대했다. 마을 주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독청’ 완장을 찬 청년들은 대한독립촉성청년총연맹 소속이었을 테고, 그들은 아마 낮에 트럭을 타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몰려다니며 테러와 파괴를 일삼았을 테지만 밤에는 마을에 머물지 못하고 읍내의 숙소로 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낮 동안 좌익 세력을 몰아낸다는 명분 아래 자신들이 장악하지 못한 주변 촌락을 헤집고 다녔지만 아직은 밤에 읍내를 벗어나는 것이 그리 안전하지 않았다. 그들이 이튿날 낮에 경찰과 함께 다시 마을을 찾아와 논밭에 흩어져서 일하는 주민들을 검거한 것도 그러한 사정 때문이었다.

편지가 묘사했듯이 도회지와 주변 농촌 마을의 점과 선을 따라 일어나는 이러한 부류의 테러가 1947년 봄과 여름에는 예외적인 사건이었다기보다 일반적인 사건이었다. 그 무렵 미군정 정보보고서들은 그러한 테러 사건이 각지에서 일상다반사로 일어났음을 보고한다. 특히 1947년 5, 6월에 호남지방에서 빈발했던 테러 사건들은 그 잔인성과 농민들이 입은 혹심한 피해로 인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고, 그것을 조사하기 위해 서울에서 군정청과 산하 부서들, 서울시청, 경기도청에 출입하는 기자들이 공동으로 ‘호남사정 시찰기자단’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시찰기자단은 6월22일부터 28일까지 김제, 완주, 부안, 줄포 등 전북 지방을 시찰했는데 어디에서나 우익 청년단체 회원들이 경찰 면전에서 공갈과 협박을 일삼았고, 심지어 기자수첩을 빼앗는 등 기자를 폭행했다. 기자단은 28일 정읍에서 광주로 이동하여 6월29일부터 7월1일까지 담양, 나주, 광주 등지를 시찰했고, 목포, 장성 등 예정했던 다른 지역 시찰을 포기하고 7월2일 서울로 상경했다. 경무부가 기자단을 호위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전라북도 현지 경찰은 해당 지역 안내를 독청 등 청년단체에 맡겼고, 청년단체원들의 협박과 폭행을 방관했으며, 기자단은 조사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현지에서 기자단을 처음 맞이한 것은 도처에 붙어 있는 “지방단체가 경찰권을 발동하여 좌익분자의 가옥을 몰수할 것”이라는 삐라였다. 기자단에 의하면 호남지방에서 만연한 테러 사건은 대개 공통된 조건하에 공통된 수단으로 전개되었다. 테러단은 50~60명을 단위로 야음을 타서 개인 또는 집단적 목표에 대하여 폭행 파괴를 자행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기자단이 분석한 테러의 원인은 전국적으로 전개되는 우익 진영의 좌익 진영에 대한 정치공세가 파괴적 수단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피해를 입은 마을은 좌익이 강하다는 극히 간단한 이유로 공격을 받았다. 기자단은 이를 ‘적구(赤狗) 타도와 반탁 구호가 독립봉으로 나타나서 인민의 머리 위에 날아온’ 것이라고 묘사했다.



우익 청년단체의 테러가 극심했던 호남지역을 현지 취재해서 쓴 <조선중앙일보>(1947.7.5) 지면.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948년 8월5일 미군 한국대표단 고문인 보스 중령이 서울 우이동의 대한민족청년단(족청) 캠프에서 단원들에게 운동기구를 선물하고 있다. 족청 역시 대표적인 우익 단체였다.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경찰은 방관, 조장, 야합”

기자단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테러단은 마을을 습격한 뒤 주민들에게 “사상전환서”를 강요하고 독청 가입을 촉구했으며, 또 기부금 강제징수와 약탈을 자행했다. 이 일련의 과정은 농민들에게 익숙한 것이자 동시에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사상전환’은 일제 강점기에 나라의 독립을 찾겠다는 의지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에게 일제가 집요하게 강요한 ‘전향’ 공작을 대중적으로 확대하여 일부 인사들뿐만 아니라 농민들에게까지 강요한 것이었고, 단체 가입과 기부금을 강요한 것 역시 일제 말 전시동원체제 아래서 자주 겪었던 익숙한 경험이었다. 아마 농민들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불과 2년 만에 이런 일을 다시 겪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테고, 해방된 조국에서 같은 동족과 과거 일제의 주구 노릇을 했던 자들로부터 그런 핍박을 받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기자단은 또 경찰은 우익 청년단의 테러를 방관, 조장했고, 또 그들과 야합했다고 했다. 테러를 당한 주민들이 경찰에서 조사되기 전에 테러단 특설 취조실에서 온갖 악형으로 예비취조를 당하여 형벌이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기자단은 호남지방에 테러가 멋대로 횡행하는 것은 당국과 청년단체의 언론 탄압, 경찰의 방관이 이를 조장하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지적했다. 기자단은 극우단체들이 테러를 동원하여 반탁의 애국심을 강요하고 그것을 경찰서장이 공공연히 ‘사상전환’이라고 말하는 것이 현재 호남지방의 상황이며, ‘테러단의 만행이 애국심의 발로이며 그 결과가 독립을 위한 시련이므로 그대로 간과되어야 한다는 합리성이 그럴듯하게 조작되고 있다는 점이 가장 위험한 사상’이라고 적고 있다.

해방된 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1947년 여름, 한국 사회는 도시건 농촌이건 청년단체의 노골적인 폭력과 테러에 의존하는 동원의 정치가 일상을 지배했고, 다수의 대중이 공포와 불안에 떨어야 했다. 몽양 여운형만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 정용욱 :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 현대사 전공.
사료의 확대를 통한 역사 서술 주체의 확장, 역사 해석의 다양성 확보에 관심이 많다. 사회적 소통의 수단이자 에고도큐먼트인 편지 자료를 활용해 8·15 이후 3년 동안 한국인들이 겪은 해방과 미 점령의 역사를 격주로 살펴보려고 한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910395.html?fbclid=IwAR1VKG6wVFTa9VrktR7G67c-7GvbsyOAWXPhX3FrWCX02wC1GuNsGrhbNMo#csidx71ec848ae278b149052122877f10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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