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이준영
이준영
· 1 August ·
3년에 걸친 석사과정을 마쳤다.
논문의 주제는 해방 후 우익 학생운동이다. 한국 지배계급의 형성사라고 평가받았지만 사실 내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학생운동의 독자성/자율성과 관련된 문제였다.
한국 학생운동은 우리 사회의 엘리트 계층으로서 결사를 이룬 (대)학생들에 의해 수행된 운동이었다. 해방 후 우익 학생운동은 그 중 남한 우익세력의 정치 노선을 지지하는 학생들이 이끌었다.
이들은 학생이라는 계층의 특성으로 인하여 다른 어떤 사회 집단보다 빠르게 결집할 수 있었고, 사회 일반의 가치 지향에서 한 층 나아간 도덕적 실천을 수행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식민지 시기 이래 청년 지식인으로 호명되며 오랜 기간 쌓아 온 저항의 유산이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권력에 의해 동원대상으로 전락할 여지가 있는 집단이기도 했다. 제국주의-식민지 권력은 끊임없이 이들 젊은 엘리트 집단을 체제 내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해방정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해방 후 반탁운동의 열기 속에서 우익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잡게 된 이철승 등의 주류세력은 적극적으로 권력과 영합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존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 결과 전체 우익 학생운동은 자율성을 그 대가로 치렀으며, 그 성격도 미군정과 우익 정치세력의 전위대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들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이들이 권력과 결탁한 결과, 전체 우익 학생운동은 도매급으로 우익진영의 행동대/전위대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이후 한국 학생운동에서 수없이 반복된다. 학생운동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자율성을 상실 했을 때, 기존의 정치운동·사회운동으로 포섭되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었다.
공통의 한계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우익 학생운동 세력 중에는 ‘학생운동 본연의 길’을 고민하는 비주류 세력도 존재했다. 이들 비주류 세력은 남한 정치가 우익 세력에 의해 주도되는 시점에서 주류세력과 함께 문해계몽운동, 국대안 반대운동 저지투쟁, 남북협상 국면에서의 활동 등 다양한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철승 등 주류세력의 물리적 폭력과 권력을 통한 압박을 이겨내지 못한 채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와해되었다.
결론적으로 폭력 일변도의 강경한 반탁·반공 투쟁노선, 미군정 및 우익 정치세력과의 과도한 밀착, 친일 자본가의 자금지원에 골몰한 우익 학생운동 주류세력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비교할 수 없이 거대한 폭력, 권력, 자금을 갖춘 국가에 의해 무력하게 해체되고 만다.
이후 한국 학생운동은 학도호국단이라는 준국가기구 속에 완전히 포섭되었지만,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 일부 담지할 수 있었던 자율성의 유산은 개별 학생운동가들의 경험으로 연속되어 강압적인 국가 체제가 이완되었을 때 다시 등장할 수 있었다.
아무튼 이러한 골자를 갖춘 논문인데, 최선을 다 했는가 반문해보면 쉽게 답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교수님과 심사위원 선생님들을 비롯, 학교 안팎에서 논문에 대해 함께 고민해 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형식을 갖춘 글이 될 수 있었다. 앞으로는 학문적인 내용이 아니더라도 학생운동·우익 세력의 계보와 관련된 이야기를 다양한 분들과 나눠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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