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28

[지승호의 경청] 日강제동원 전문가 정혜경, '반일 종족주의'를 논하다① | 다음 뉴스



[지승호의 경청] 日강제동원 전문가 정혜경, '반일 종족주의'를 논하다① | 다음 뉴스




[지승호의 경청] 日강제동원 전문가 정혜경, '반일 종족주의'를 논하다①
김호경 입력 2019.09.13. 06:00 수정 2019.09.13. 20:57댓글 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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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종족주의> 에 강제동원 유족들 상처 많이 받았을 것
이영훈·이우연·주익종, 우수한 능력 갖고 무책임한 길 걸어
'관련 자료가 얼마 없어서 모든 자료 다 봤다' 주장에 놀라
노무자 공탁금 자료만 6~7명이 팀 만들어 몇 년 연구해야
젊은이들 동조 보며 반성.. <반일 종족주의> 반론서 준비
피해자성을 밝히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자료 모으는 일
학계에 가장 큰 책임..피학적인 부분만 얘기해서는 안 돼
식민지 피해 진짜 교훈, 우리 주변 약자들 헤아리는 실천
'日에 소송하러 갈 때마다 치욕감에 죽고 싶다'는 피해자
'나라 없어서 남편도 잃었지만, 지금은 나라가 있는데 왜?'
피해자들이 직접 나서게 내버려두지 말고 정부가 나서야


이미지 크게 보기【서울=뉴시스】배훈식 기자 = 정혜경 박사가 지난 4일 서울 서초구 토즈에서 지승호 인터뷰 전문 작가와 '반일 종족주의' 등에 대해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09.13. dahora83@newsis.com

【서울=뉴시스】지승호 인터뷰 전문 작가 = <반일 종족주의>(이영훈 외)라는 책이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습니다. 이 상황에 대한 의견을 듣기 위해 이 분야 대표적 전문가 중 한 분인 정혜경 박사를 얼마 전 만났습니다. <반일 종족주의>에 대한 비판과 함께 좀 더 근본적인, 우리가 성찰하고 반성해야 될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정혜경 박사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식민지 시기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에서 11년 동안 조사과장을 지내며 3000명의 피해자를 면담, 조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느낀 감동과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 학계가 해야 할 일, 국가의 책무 등에 대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한국 사람이라면 한번쯤 곱씹해서 생각해볼만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길지만 한번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지승호(이하 지) - 요즘 많이 바쁘시죠?
정혜경(이하 정) - 매년 3월 삼일절부터해서 8월 광복절까지는 바쁜데, 요즘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 때문에 조금 더 바쁘네요. 제가 또 일을 벌이는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어서요.(웃음)

지 –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정 – 저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우연씨 글을 보면 강제동원, 노무동원 됐거나, 그 유족 분들이 계신데요. 이 분들이 참 많은 상처를 받으셨겠다, 하는 생각을 먼저 했습니다. '학자가 도대체 뭔데, 남한테 상처를 주나? 자기는 자유롭게 말하고 글쓰고 하지만, 어떤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거라는 생각을 못하나'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미지 크게 보기【서울=뉴시스】배훈식 기자 = 정혜경 박사가 지난 4일 서울 서초구 토즈에서 지승호 인터뷰 전문 작가와 '반일 종족주의' 등에 대해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09.13. dahora83@newsis.com

지 – 누군가 상처를 받든 말든 우리 주장을 하겠다는 거 아닌가요?(웃음)
정 – 몇 년 전에 그 분을 행사장에서 봤는데요. 그때는 표정이 좋지 못했는데, 요즘 보면 자신감이 넘치더라구요. 이영훈 선생도 그렇고, 이우연, 주익종 선생 다 일본어도 물론이고, 한학도 정말 뛰어난 분들이에요. 주익종 선생님은 제가 위원회에 있을때, 피해조사 한 건 한 건을 직접 검토하는 분과위원으로 오셨어요. 우리가 피해자 판정을 하는데, 객관성을 담보해야 하잖아요. 오랜 세월이 지나서 일본 우익이 와서 봐도 '아, 맞다' 할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해서 낙성대연구소 쪽에 연락을 했습니다. '어떤 분이 좋겠냐'고 하니까 주익종 선생을 추천해주셨어요. 이 분이 기업사를 하니까 이 분을 모셔서 자료를 분석하는 일을 부탁드렸죠. 자료들을 피해자들이 기증을 해요. 사진도 있고, 명부도 있고, 밥 숟가락도 있고, 담배 케이스도 있고, 그렇거든요. 그것을 하나 하나 검토해서 평가하는 평가위원으로 모셨습니다. 이 분이 기업 관련 자료만 보다가 이런 자료를 보니까 너무 좋아하시는 거에요. 그러면서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 판정하는 일을 하셨는데요. 조서를 쓴 조사관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이 분들이 하나씩 검토하시고, 질문을 하시면 답변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굉장히 세밀하게 하죠. 하나 하나 딸린 자료들을 보시면서 '이렇게까지 꼼꼼하게 하시냐. 이게 피해가 아니면 뭐가 피해겠습니까?' 하는 말씀도 하셨어요. 제가 이번에 얼른 주익종 선생이 쓴 부분을 봤는데요. 다행히 위원회에서 피해 판정을 한 부분에 대해서는 어떠한 비판도 하지 않으셔서 본인도 의미있는 작업에 참여했다고 생각하시나 보나, 라고 느꼈죠.(웃음) 이렇게 우수한 능력을 가지신 분들이 왜 이렇게 학문 외적인 의도를 가지고 무책임한 길을 걸어가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한겨레 신문에 기고문을 냈는데요. 이우연씨가 반론서라고 써서 뿌려요. 그런데 반론서 내용은 더 그래서, 페이스북에다가 대응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반론서를 준비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일본하고 한국에서 동시에 낼 거거든요. 거기에서는 그 분들이 간과하고 있거나, 방향을 잘못잡고 있는 것을 독자분들에게 좀 더 제공을 해드려야 될 것 같아서요. 그 당시의 체제가 어떻고, 시스템이 어떻고, 이걸 우리가 단순하게 볼 문제가 아니다, 그런 문제를 좀 다양하게, 그야말로 실증적으로 제시해볼려고 합니다.

지 – <반일 종족주의>가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는데요. 한일 관계가 악화되고, 많은 국민들이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을 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시점에서 사람들이 그 책에 그렇게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요? 유튜브 독자도 많다고 하던데요.
정 – 열광까지는 아닌 것 같구요. 제가 볼 때는 유튜브의 독자들이 기본 구독자가 됐다고 봅니다. 조국 수석이 책도 안 읽고 비판을 하는 것을 보고 샀다는 사람들도 있구요. 우리 같이 분석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유튜브의 내용하고 책이 같지는 않아요. 유튜브 내용보다는 책이 순화된 부분이 있어서요. 유튜브를 보고 젊은이들이 상당히 동조를 한다고 해서 학계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반성을 해야 되는 것 아니냐, 그 젊은이들이 동조하게끔, 우리가 다른 것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미지 크게 보기【서울=뉴시스】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외상이 20일 베이징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고노 외상은 21일 열리는 한일 외교장관 회담 때 징용을 둘러싼 문제에 한국 정부의 신속한 대응을 거듭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출처 : NHK> 2019.8.20

지 – 어떻게 보면 역설적으로 이런 책이 나옴으로서 반론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반론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지 않겠습니까?(웃음)
정 – 저도 구석에 쳐박아놨던 책을 끄집어냈습니다. 이 말을 하려면 확실히 이게 맞는지도 확인을 해야 되니까 공부를 좀 더 하게 되구요. 우리 연구회가 있지만, 연구회 사람들이 책을 내고 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책을 내자'고 하면 '뭘 귀찮게 이런 것을 하냐?'고 했는데, 이번에는 본인들이 먼저 '내야 되지 않겠냐'고 하니까요.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학계의 오류들이 있어요. 그런 오류들을 앞에 먼저 제시를 할 생각입니다. 이런 것들은 제가 계속 주장했던 거거든요. 오류라고. 오류를 생산하는 사람들 중에서 친한 사람들도 있어요. '그건 하지마' 그래도 안 듣고 그랬었어요. 친하니까 어디 드러내고 글을 쓰거나, 이름을 밝히거나, 하지는 않았거든요. 하지만 이번에는 '이건 오류다. 당신들도 이런 주장하지 마라' 하고, 실명을 밝히고, 그렇지만 이런 오류가 있다고 해서 사실이 이런 식으로 왜곡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얘기를 전부 하려고 합니다. 거기서 주장하는 사진 네 장이 있잖아요. 그건 제가 페북에다가도 '이 사진 쓰지마라. 이건 아니다'라고 계속 올리고, 방송 감수 하면 제가 그것부터 제일 먼저 빼주는데요. 보셔서 아시겠지만, 지금도 계속 그렇게 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저도 계속 주장을 하고, 여러 사람이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을 잘못 썼다고 해서 있었던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것과는 다른 문제라고 봐요. 이 분들은 '한건 했다. 우리는 진실이고, 너희는 가짜야' 라고 하니까요. 학문 세계가 그렇게 단순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학문이라는 것이 객관성을 추구하는 지리한 과정인데요. 자료 하나 봤다고 모든 것이 다 끝난다고 하면 정말 공부하기 편한 거죠. 그래서 '이 분들 참 행복하게 사시는구나' 하는 생각도 좀 하게 됐습니다.(웃음)

지 – 일부러 그랬는지, 학자로서 게을러서 그랬는지 잘 모르겠지만요. 침소봉대도 많이 있었던 것 같구요. 지엽적인 사실을 하나 찾아내서는 '이게 팩트야. 니들은 다 거짓말쟁이야'라고 하는 것 같거든요.
정 – 제가 KBS하고 인터뷰를 하는데요. PD가 이우연씨하고 인터뷰한 내용을 들려줬습니다. 거기서 너무 놀랐던 사실은 뭐냐 하면요. 저희 고민이 그거거든요. 강제 동원 관련해서 자료가 너무 많아요. 개인적으로는 다 읽을 수가 없어서 팀 플레이를 해야 된다고 해서 팀을 짜서 자료를 읽고 있는데요. 그래도 다 읽지를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여기에 관련된 자료가 얼마 없어서 나는 모든 자료를 다 봤다'고 하셨대요. '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는 그래도 운이 좋아서 현장을 많이 다녔거든요. 한반도는 물론이고, 일본, 동남아, 사할린, 만주, 태평양을 다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현장이 다 달라요. 현장도 안 가보시고, 자신있게 '탄광은 넓이가 이 정도예요, 근대화가 이렇게 됐어요' 이렇게 얘기할 수가 있다니, 탄광 좁은 데서 밀차를 밀다가 밀차가 거꾸로 떨어져서 죽은 사람을 화장했다는 기록도 나오는데, 그 분은 근대적인 곳에서 왜 손으로 밀다가 그렇게 됐을까,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현장과 자료와 경험자가 있는데, 저는 그래도 그 중에서는 제일 많이 봤다는 사람인데요. 그래도 조심스러운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미지 크게 보기【서울=뉴시스】이영환 기자 = 광복절인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자주와 평화를 위한 8.15민족통일대회·평화손잡기 행사를 마친 참가자들이 강제징용노동자상과 함께 일본대사관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2019.08.15. 20hwan@newsis.com

지 – 일제 시대 때는 탄광의 넓이도 그렇고, 근무 환경이 굉장히 좋았다는 건데요. 그럴 정도로 기술이 발달한 일본이 전쟁에는 왜 졌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구요.(웃음)
정 – 총동원 전쟁이라고 하지만, 일본은 당시 전쟁 참전국 중에서 총동원 전쟁을 할만한 능력이 안됐었거든요. 의무 교육이 다 안 돼서 끌고 가려고 해도 말귀를 못 알아듣기도 했구요. 징용제도도 1939년에 법을 만들었지만, 기술직만 하게 된 것이 이 사람들을 다 파악할 수 있는 국민동원 시스템이 안 되어 있었거든요. 호적은 있지만, 주민등록제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지방 같은 경우는 시골에 사니까 우리 마을에 50명 산다고 파악이 되지만, 도시 같은 데로 이동을 했을때는 파악이 안 돼서 징용장 전달을 못했거든요. 그 다음에 독일 같은 경우나 영국 같은 경우 전쟁을 해도 배급제도를 나중에 실시했어요. 일본은 일찍부터 배급제도에 들어가요. 그러니까 국민들이 '이기고 있다며, 근데 뭐가 부족한 거야. 잘 안 되는 거야' 하는 불안감을 가지게 됐구요. 독일은 당시 7시간 노동제를 주장했다고 하거든요. 나치에 노동자들이 혹했던 이유가 뭐냐 하면 7시간 근무가 끝나면 별장 같은 데서 휴식을 취하면서 즐겁게 지낼 수 있는 일상의 여유를 제공했다는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생산을 많이 하고, 돈도 많이 들어오고, 생활이 풍요로워졌는데요. 일본은 그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직장이 있는데, 이 직장을 버리고 가서 일을 하는데, 돈을 조금 밖에 안 주면서 일을 시키면 도대체 이게 뭐냐?' 이렇게 돼서 일본 민중들이 구청에 가서 항의하고, 어떤 사람은 안 간다고 자기 손가락을 자르고 했거든요. 그게 자료에도 나오고 하는데요. 그런 시스템인데, 어떻게 일본을 근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나요? 물론 한국보다는 근대적이었죠. 탄광도 사할린의 탄광을 가보면요. 1930년대부터 탄광을 개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전에는 기업이 안 가니까, '우리가 여기다가 도로를 깔아줄게, 근대화를 해줄게' 해서 전체를 기계화를 합니다. 그래가지고 밀차가 올라올 때 기계로 돌릴 때 동력 장치를 해놨더라구요. 제가 2005~2006년에 갔을 때 그 기계를 그때도 쓰고 있었어요. 그것을 돌려서 탄이 올라오면 그 밑에 밀차가 대기하고 있고, 호퍼라는 기계에서 문을 열어서 떨어지면 딱딱 이동해서 항구로 가는 시스템이 되어 있었거든요. 그런데 1880년대부터 판 일본의 탄광들은 점점 안으로 들어가야 되기 때문에 갱도도 더 좁고 상황이 더 열악했죠. 탄질도 안 좋고, 탄을 끌어올리는 것도 힘들고, 그러니까 1000미터, 2000미터를 들어갔어야 되니까요. 그러니까 그것을 끌어올릴 때 동력이 아니고, 사람이 끌어올려야 되니까, 더 고생스러웠죠. 탄을 언제 캤느냐, 탄질이 어떠냐, 탄의 성분이 어떠냐에 따라서 같은 석탄이라도 하더라도 역청탄이냐, 무연탄이냐 등에 따라서 노동 환경이 달랐거든요. 그래서 저는 탄광이 이렇다는 말씀을 못 드리구요. 다만 하시마는 이랬다, 사도광산은 이랬다, 제가 특정한, 확인해본, 조사를 해본 곳, 연구를 해 본 곳에 대해서만 말씀드릴 수 있지, 전체 탄광이 이랬다, 1930년대에는 이랬다, 이렇게는 말씀을 못 드리거든요. 제가 그 외에 자료현황만 논문을 쓴 적이 있습니다. 워낙 자료가 많기 때문에요. 그것도 한국에 공개된 자료 현황만 썼는데도 두꺼운 논문이 한 편 나올 정도로 자료가 많구요. 아시아 역사 자료센터라고 일본 정부에서 만드는 디지털 아카이브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일제 시대에 있었던 모든 자료를 계속 올리고 있습니다. 수백만 건의 자료를. 파일로 다 다운을 받고, 출력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있고, 한국어로도 들어가서 검색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거기 자료를 다 볼 수가 없습니다. 너무 많아서. 그 다음에 예를 들면 한일협정문서 자료도 한국 정부 자료는 얼마 안 되는데요. 일본에서 시민들이 재판을 해서 공개를 받은 것이 있습니다. 전부가 아니고, 일부인데도 한국에 공개한 자료보다 몇십배가 많습니다. 제가 출력을 하다가 포기를 했습니다. 너무 많아서. 그래서 하나의 주제에 팀을 만들어요. 예를 들어 노무자 공탁금 자료, 그러면 6~7명이 팀을 만들어서 몇 년 연구하고 이런 식으로 하고 있거든요. 그렇게 안 하면 도저히 그 자료를 볼 수가 없어서요. 그런데 그 많은 자료를 다 보셨다고 하니까.

지 – 선생님께서는 자료를 충분히 조사를 해둬야 일본하고 협상을 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요. 이스라엘이 야드 바셈(기억하라)을 설치해서 1953년부터 2000년까지 조사를 해서.


이미지 크게 보기【서울=뉴시스】이영환 기자 = 광복절인 15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광복 74주년 일제 강제동원 문제해결을 위한 시민대회 및 국제평화행진에 참가한 강제징용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 이춘식 할아버지가 행진을 하고 있다. 2019.08.15. 20hwan@newsis.com

정 –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지 – 2000년에 소송을 제기해서 독일의 배상을 받아냈다고 하던데요. 우리가 거기로부터 교훈을 얻어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정 – 그게 단지 배상 때문이 아니라요. 우리가 피해자성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자료를 모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피해자성 하면 많은 분들이 그게 뭘까 하고 생각을 하시는데요. 세월호 얘기하면 이해하실 것이라고 보거든요. 세월호의 유가족이 원하는 것이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자 하는 거잖아요. 또 하나는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면 안된다는 거잖아요. 그럴려면 옛날에 강제동원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싶다고 하면 자료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소위 말해서 피해국에게는 공식 자료가 없어요. 가해국이 가지고 있죠. 그러면 피해국이 할 수 있는 것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담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해서 꾸준히 자료를 축적을 했다면 지금 같은 열악한 한일 관계는 없었을 거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했다면 사람들이 '아, 옛날에 우리가 이런 일을 겪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러면 '우리가 이런 일을 겪었으니까, 이런 권리가 있다'는 주장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구요. 나아가서 '이런 일을 겪었으니까 앞으로는 이런 일을 겪지 말자' 하고 나갈 수 있는데요. 우리는 첫번째 단계에서 막혔어요. 우리가 무슨 일을 겪었지? 하면 잘 몰라요. 대표적인 것이 일본군 위안부가 몇 명이 갔지? '3만명에서부터 40만명까지요', 이건 통계가 아니죠. '모릅니다' 하는 거잖아요.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지금 일본 위안부가 이러니 저러니, 징용이 이러니 저러니 말을 하게 되는 거잖아요. 광복 74주년인데, '강제 동원이 있었다, 없었다'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피해자성을 유지하지 못했나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거든요. 지금 있는 자료라도 열심히 분석해서, 공개를 해서 사람들에게 '이런 자료가 있습니다' 그러면 모르는 사람들도 보면 '이게 피해 자료구나' 하는 것을 느끼면서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구나, 이런 일이 있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디딤돌이 되거든요. 그 과정에서 배상을 받는 부분도 있을 수 있는데요. 우리는 그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라도 자료는 열심히 모으기도 해야 되고, 지금 있는 자료도 활용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된다고 봅니다. 지금 한국 내에 상당히 많은 자료가 있어서 우리도 이런 자료들을 국민들이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만 만들면 많은 분들이 피해 내용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최소한 <반일 종족주의> 같은 책이 나왔을 때 '자료 찾아보니까 이게 아니네' 할 수 있는 자료들을 정부 기관이 가지고 있다는 거죠. 그런 것들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고민을 해야 된다고 봐요.

이미지 크게 보기【서울=뉴시스】최동준 기자 = 14일 서울 용산역 일제강제징용노동자상 앞에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강제징용노동자들을 추모하는 화환이 놓여 있다. 2019.08.14. photocdj@newsis.com

지 – 말씀하셨던 것처럼 자료 조사, 공부가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일본하고의 관계에서도 감성적으로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지만, 세부적인 내용은 잘 모르잖아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을 보면서 답답하면서도 반론을 하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일부에서는 '이런 분위기에서 진짜 사이다 같은 책이다'라고 반응하고 있구요.
정 – 저는 그런 점에서 학계가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책에서 지적하는 것 중에서 일본인 사진인데 조선인 사진이라고 한 것이 있잖아요. 그 사진은 재일동포 역사학자가 사진집도 냈습니다. '일본인 사진'이라는 캡션도 달려있고, 사진집이 한국에서 출간도 됐어요. 그런 것을 처음에 누군가가 잘못 사용했죠. 그것이 계속 오류로 가는 거잖아요. 예를 들어서 '어머니 배가 고파요'는 학자들도 많이 썼어요. 교과서에서도 썼구요. 그런데 그것도 2000년에 '아니다' 하고 공개가 됐거든요. 그러면 안 써야 되잖아요. 그런데 지금도 부산역사관에 돌에다가 새겨 놨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역사 학자 중에 유발 하라리가 있는데요. 그 사람이 뭐라고 하냐 하면 '역사는 과거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벗어나고 해방되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거죠. 우리가 계속 새로운 것을 의문을 가지고 탐구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인데요. 학자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어요. 친한 사이니까, '논문에다가 잘못됐다고 써' 하면 절대 쓰지 않습니다. 저도 잘못 본 사례들이 있었어요. 군인이 아니고 군무원인데, 군인으로 잘못 판단한 것이 있었습니다. 다음 논문을 쓸 때 그것을 썼습니다. '몇년 전에 이런 글을 썼었는데, 잘못 쓴 것이다'라고. 그렇게 자기 오류를 자기가 수정하면, 남이 지적하는 것보다 훨씬 낫잖아요. 그렇게 했으면 지금 같이 이렇게 오류가 계속 제거되지 않았을 수는 없다고 보구요. 저는 중요한 것은 그 거라고 봅니다. 제가 시민강의를 1년에 열 번 이상 하는데요. 그때 항상 강조하는 건데요. '우리가 왜 일본한테 잘못했다고 얘기하는지 한번 생각해본 적이 있냐'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일본 싫어요. 되게 싫어요' 라고 해요. 그것은 콤플렉스입니다. 하나는 우리를 침략했으니까, 그랬지, 침략만 해서 그럴까, 그게 아니라 침략했는데, 제대로 사과를 하지 않고, 강제 동원을 했는데도 거기에 대해서 인정하고, 사과를 하지 않는 거잖아요. 결국 뭐냐하면 너희가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를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야, 뭘 잘못했으면 사과해, 그런데 그런 말을 안 하잖아요. '그러니까 사과하세요. 사과하고 같이 가요'라고 해야 되는데요. 우리는 그게 아니라 '저것들은 종자가 못되먹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잖아요.(웃음) 우리 스스로도 문제 의식을 못 가진다는 거예요. 최소한 우리가 먼저, '우리가 왜 일본에 대해서 비판을 하지. 왜 문제를 제기하지' 하는 생각을 해보자, 그러고 나서 비판을 하고, 일본이 거기서 대해서 따라오면 같이 손잡고 가는 그런 모습으로 우리가 가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가 좀 비참해보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일단은 우리가 먼저 그 생각을 해야 되는데요. 교육자료를 감수하면서 느끼는 것은 뭐냐 하면 다 피학적이에요. 이렇게 당했고, 이렇게 당했고, 이렇게 당했어요. 그러면 학생들한테 물어봐요. 이런 것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냐고 해요. '그래서요? 어쨌다는 거예요?' 이런 생각이 든데요. 저도 그렇거든요. 일본을 떠내려보낼 겁니까, 옆나라인데. 그거 안 되잖아요. 친구는 절교할 수 있어요. 이웃은 이사를 가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사를 못 가요. 그러면 저 사람들한테 손을 내밀어서 가르쳐주고, 같이 가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데 학생들한테 피학적인 것만 가르치면 '우리가 당했구나, 어우 나쁜 놈들' 하고 끝나는 겁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냐 하는 대안을 제시해야되죠. 그러면 우리가 가르쳐주고, '같이 갑시다', 무엇을 향해서,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해서. 전쟁이 나니까, 여성이나 아이나 노인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잖아요. 이런 세상이 없도록 가야 된다고 하는 것이 교육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뒤를 잘라내고, 앞부분만 이야기하니까요. 제가 <군함도> 영화를 감수를 했습니다. 자료를 제공해드리니까 영화 표를 주셔서 저희 팀이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학생들이 나오면서 '일본놈들 다 죽어야 돼'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이게 잘못됐구나' 저런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저러니까 전쟁은 나쁜 거야' 이래야 되는데, 우리는 <실미도>를 보고 나와도 그렇잖아요. '김일성을 죽이러 우리가' 이렇게 하지, '저렇게 하면 안 되지' 하는 교훈을 못 얻는다는 거죠. 역사의 교훈은 널려있는데, 우리가 교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74년 전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다보니까 저런 책을 보고 '사이다'라고 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나 싶습니다. 저것을 보면 사이다라고 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냐고 언론사에서 물어보더라구요. 우리 세대가 반성을 해야죠. 우리 세대가 젊은 사람들에게 저런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한 것은 아니냐. 젊은 세대들이 역사의 왜곡에서 이미 벗어났어야 되는데, 여전히 철사줄로 꽁꽁 묶여서 끌고 가고, 총칼로 끌어가고, 밤에 자는데 닭장에서 닭을 채가듯이 갔다는 이야기를 지금도 하고 있고, 지금도 어느 장소에서 어느 학자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그렇게 알고, '우리를 괴롭힌 저 놈들을 어떻게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해서 건강한 세계 시민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거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반성을 해야지, '사이다'라고 하는 사람을 비판하거나 비난할 자격은 없다고 봐요. 그 말씀은 다시 말씀드리면 당시에도 징용 가면, 또는 강제 동원을 가면 좋은 곳인 줄 알고 갔다가 속은 사람들도 그 사람들 잘못이 아니고, 그렇게 속이고 데려가는 사람, 속이도록 한 사람의 잘못이라는 것도 똑같이 봐야된다는 거죠.

지 – <실미도>도 말씀하셨지만, 그런 영화를 보고 나면 인권에 대해서 생각하고, '저런 야만의 시대가 다시 안 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를 고민해야 될 것 같은데요. 김일성을 욕하거나, 박정희를 욕하고 끝나잖아요.
정 – 그러니까 사이다가 아니고, 답답한 거예요. 박정희, 김일성은 죽었는데, 어떻게 할 거예요. '최소한 우리는 저렇게는 안 살아, 저렇게 살지는 말자'라고 해야죠. 제가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요. 강의할 때마다 소개를 합니다. 위안부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상가집을 갔습니다. 그때는 요새 같이 위안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없었을 때인데요. 그게 4~5년 전인데, 상갓집에 사람이 별로 없는 거예요. 문상을 하고 나오려고 하는데, 문상객이 별로 없어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자제 분을 많이 두셨고, 다 성공하신 분들입니다. 따님이 장학사에 교감을 하시고, 손자가 박사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위안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부고는 났지만, 가족 부고는 안 내서 아무도 없더라구요. 며느님이 혼자 상가를 지키고 계셨는데, 며느님이 미용사였어요, 그런데 그 분이 뭐라고 하시냐 하면 우리 어머님이 활동을 많이 하셨대요. 일본 대사관 앞에서 활동을 많이 하셨는데, 자기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니까 드는 생각이, 자기 남편은 계속 보상을 받아야된다고 하는데, 자기는 '그건 의미가 없다고 본다, 안 줄려고 하는데 거지 같이 달라고 하냐' 그런 게 하나 있구요. 또 하나는 '우리 어머님 아픔은 그게 아닌 것 같다'고 하시더라구요. 그게 뭐냐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 약한 사람, 그 분 표현이 그렇습니다. 외국인 노동자, 이런 사람들 있잖아요. 일하러 온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는 것이 우리 어머니의 아픔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 말씀하세요. 제가 그때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어요. 제가 정부에서 일을 하면서도 왜 이런 것을 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말로는 인권을 주장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뭘 해야 되는지에 대한 구체성은 없었는데, 미용사 그 분이 바로 그 말씀을 하실 때 정신이 번쩍 나면서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큰 얘기만 하잖아요. 베트남에 가서 민간인을 학살한 것을 반성하자는 이야기는 합니다. 그런데 생활 속에서 시민들이 지킬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안 했단 말입니다. 이 분이 그 얘기를 하면서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이 많잖아요' 하세요. 영등포구였는데, 그런 분들이 많다는 거죠. 그런 사람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차별 안 하는 것이 우리 어머니의 아픔을 우리가 되새기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자기 집에 일본의 시민단체 사람들이 많이 왔대요. 아이들이 철이 없어서 일본 사람이 오니까 좋아서 오면 꼭 '게임 시디 갖다 주세요' 하는 얘기를 했대요.(웃음) 자기는 그러는 게 너무 싫었답니다. 할머니한테 일본에서 손님들이 왜 오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게임 시디나 받으면 좋아하는 것을 보면서 '내가 애들을 잘못 가르쳤네' 하는 생각이 들더래요. 자기 어머니가 커밍아웃을 했을 때, 시누이가 자살을 기도했었다고 합니다. '위안부와 위안부 피해자 가족들의 인권도 생각해주세요' 그러면서 자기는 '우리 고모를 탓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해요. 얼마나 힘들었겠나, 하면서. 사회적으로도 어려운 일인데, 당사자가 자기 엄마라는 사실을 본인이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들었겠어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딸이 그랬다고 손가락질을 하는데, 위안부 피해자와 그 가족의 인권을 생각하면 그러면 안 되잖아요. 시어머니와 평생 같이 살았던 며느님이 느꼈던, 그 며느님이 제시한 해법이 바로 우리가 생활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구나 하고 느껴서 그 다음에는 제가 지하철 화장실에서 청소하시는 분들에게 인사를 해요. 그러면 그 분이 '보험 회사에서 나왔나' 하고 뜨악하게 쳐다보시는데요.(웃음) 저는 그렇게 주변에 따뜻하게 말 한 마디라도 하고, 식당에 가서 알바생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그것을 실천해야겠구나, 그 정도까지 나아가야 되는구나, 그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요.

이미지 크게 보기【서울=뉴시스】최동준 기자 = 어린이청소년단체 세움이 8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정부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강제 징용 노동자와 위안부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고향의 봄' 연주를 하고 있다. 2019.08.08. photocdj@newsis.com

지 – 말씀하신대로 식당에서 일하는 분들에게 반말 안 하고 그러면 스트레스 받을 일이 줄어들텐데요. 다른 데서 당한 것을 여기서 갚아야지, 하다보면 악순환이 되는 건데요.
정 – 요새는 더 사회가 불안한지, 우리 동네가 봉천동인데, 거기 보면 밤에 남자 어르신들이 술 드시고 때리고 싸우시는 분들이 계세요. 여유가 없으신 거예요. 나를 누가 무시하지 않나, 이런 생각도 들고 하니까, 그렇게 우리가 진짜 식민지 피해의 교훈을 그 며느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실천을 했다면 정말 사회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요.

지 – 정말 좋은 말씀을 해주셨네요. 우리가 예전에 외국인 노동자들을 추방하기 전에 가둬뒀는데, 불이 나서 죽었잖아요. 우리가 외국에 나가서 일을 하다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엄청나게 분노했을텐데요.
정 – 저는 그때 어떤 생각을 했냐 하면요. 제가 일제시대 재일조선인 노동운동사를 전공했습니다. 오사카가 노동 운동을 가장 격렬하게 했던 지역입니다. 거기는 한인도 많이 사셨지만, 이 분들이 보통 투쟁을 하신 분들이 아니시거든요. 그래서 정말 권리를 쟁취했어요. 그 분들이 메이데이 때 일곱 시간 노동, 이런 거 플래카드 들고, 애기 엄마가 한복을 입고 애기를 업고 나가서 플래카드를 들고 나가서 집회를 하고 그랬습니다. 파업도 많이 하시고. 집달리들이 '무단 점거를 했다'고 쫓아내면, 일본 변호사들이 나타나서 막아주고 했거든요. 제가 그걸 보면서 일제 시대 때 일본에서 노동하던 사람들도 노동자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했는데, 그것보다도 이 분들은 못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요. 얼마나 우리가 반성을 해야 될 부분이 많은가, 그런데 반성을 한다고 우리가 마이너스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반성을 하면 앞으로 나갈 수 있는데, 반성을 하면 마치 자존심이 상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계세요. 그런 것도 생각을 좀 해야 되지 않나, 싶어요.

이미지 크게 보기【서울=뉴시스】박주성 기자 = 법원 노조가 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 부정하는 아베 정권 규탄 법원공무원 기자회견 중 아베 사진과 일본 전범기업 사진에 압류물표시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2019.08.07. park7691@newsis.com

지 – 말씀드린 것처럼 서로 존중하면 좋을텐데, '내가 백화점에서 얼마를 샀는데, 주차요원이 이럴 수 있나' 이러고 나면 자기도 피곤하거든요. 늘 일상적으로 사회구성원들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그렇게 되는 것 같기도 하구요.
정 – 저는 강의할 때도 학생들에게 반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게 웃긴 것이 뭐냐 하면 북한 같은 사회주의 국가나 일본에서는 학교에서 학생들한테 반말을 하지 않거든요. 한국에서는 학교에서 반말을 한단 말이죠. 학교 내에서 인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없고, 거기서부터 시작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초등학교 들어간 아이가 잘 모르니까 일본 애들 보면 반말을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도 선생님은 존대를 해요. 그 속에서 아이들의 인권 의식이 싹트는 거잖아요. 우리는 반말을 하니까 '이것부터 좀 바꿔야되지 않겠나' 싶어요.

지 – '국무총리 소속 대일 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회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에서 11년 동안 조사과장을 하셨잖아요. 2004년에서 2015년까지, 그때 피해자 3000여명을 면담, 조사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어마어마한 숫자인데, 만나보고 어떤 느낌이 드셨나요?
정 – 제가 3000명을 만났던 것은 사할린에 갔기 때문입니다. 1995년부터 다니면서 많은 분들을 만났는데요. 사할린을 가서는 강제 노동 피해조사를 해야 되는데요. 그 전에 사할린에 갔던 정부 기관 사람들은 유즈노사할린스크에만 갔어요. 가서 '어디 모여라' 해서 교민들이 모이면 설명회를 하고 끝났습니다. 우리는 지역을 다 돌아다녔거든요. 지역을 가서 학교를 하나 빌려서 거기서 피해 조사를 하고, 그러면 그 분들을 차로 모시고 오고, 못 오시는 분들은 저희가 댁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분들을 만날 수가 있었구요. 그 다음에 위원회 있으면서 만주나 중국의 동북지역을 가면 거기서 옛날에 피해를 당한 분들도 다 찾아다녔으니까요. 더 많이 만날 수 있었는데요. 저는 그 분들이 일단 노무 동원으로 가신 분들은 계층이 상당히 열악한 분들입니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전시 동원 체제라 물자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은 강제 동원을 안 갔습니다. 쌀을 낼 수 있는 사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은 안 가고, 그런 것이 없는 사람들이 가는 겁니다. 저는 이 분들이 상당한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놀랬습니다. 뭐냐하면 일단 이분들이 피해 내용을 말씀하시고 나서 저희가 물어보잖아요. '당시에 누가 때렸어요' 하고 물어보면 조선 사람들이 더 많이 때렸다고 얘기하고 그래요. '그러면 그 사람 밉지 않았어요?'라고 하면 '그 사람 탓인가, 시킨 사람이 있는데' 라고 하세요. 그렇게 말씀하시기는 쉽지 않다고 봐요. '그러면 일본 사람이 밉지 않아요?' 하면 '일본 사람도 사람인데, 그 사람도 똑같이 전쟁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면 그 사람들 잘못인가 싶을 때가 있잖아'라고 하시기도 하구요. 또 하나는 평창에 갔는데, 95년인가 지도교수가 일본의 시민단체 사람들을 모시고 와서 이 분들을 안내해서 거기 가서 조사를 하라고 했습니다. 처음 인터뷰를 하는 거였습니다. 그때는 제가 강제동원도 잘 모르고 하니까, 박경식(일본 내에서 강제연행 및 징용 문제를 처음 공론화했던 재일 사학자) 선생님 책을 얼른 읽고 그걸 가지고 질문지를 만들어서 녹음기를 가지고 갔습니다. 그 분들은 한국말도 잘 모르고 하니까. 제가 인터뷰를 하고, 그 분들 질문을 대신 받아드리고 했는데요. 그 분들이 옛날에 태평양에 군무원으로 가셔서 정말 먹을 것이 없어서 뱀이나 쥐를 잡아 먹는 것은 물론이고, 굉장히 고생하다가 온 분들이 계셨어요. 북해도 가신 분들도 계시고, 여러분들이 계셨는데요. 그 분들이 마을에다가 조그맣게 역사관 같이 민속관을 하나 만들어놨어요. 집 하나에다가 인형 같은 것들이 있잖아요. 결혼식 하는 모습, 공부하는 모습, 실생활의 모습들을 만들어놨는데, 이걸 자비로 하신 거예요. 그런데 운영비가 없어요. 전기세 이런 것이. 그래서 학생들이 거기에 소풍 같은 것을 오면 그때 문을 열어 주신데요. 그 앞에 마당도 있고, 굉장히 이쁘게 잘 만들어놨어요. 그런데 비용을 만들려고 이 분들이 풍물을 잡아요. 지역 유지도 아니고, 마을에서 여유 있는 분도 아니고, 그냥 농사 짓고 근근히 사시는 분들이 마을에 있는 것을 다 모아놓은 겁니다. 솥단지부터 그릇 같은 것을 다 모아서 역사관 같은 것을 만들어서 운영비용을 만들려고 풍물까지 잡으면서 저걸 하시는 게 어떤 에너지에서 나오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 분이 그러시는 거예요. '옛날에 그런 피해를 당했다고 그렇게 살 수만은 없잖아요. 그러니까 학생들한테 제대로 역사를 가르쳐주고 싶은데, 집들을 허무니까, 집이 없어져요. 그래서 옛날 모습을 보여주려고 우리가 만들었어요' 라고 하세요. 잘 만들었어요. 인형 옷도 입히고. 그렇게 어려움을 겪었는데, 상당한 역사 인식도 가지고 계시구나, '우리가 옛날에 이런 역사를 겪었는데, 앞으로 우리가 뭘 해야 될지' 하는 것을 분명히 아시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한테 얘기를 할 때도 '우리가 고생했으니 일본놈 다 죽여버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옛날에 그런 시절이 있었어. 그런 시절을 다시 살면 안 되지' 이런 이런 말씀을 해주시니까요. 저런 분들은 저렇게 하시는데, 공부를 업으로 한다는 분들이 뭐 하나 적발했다고, 그야말로 한건 했다고 뭐나 되는 것처럼 하는 것이 과연 저 분들하고 정말 격이 많이 차이가 나는구나, 하는 것을 느끼겠더라구요.

지 – 이걸 또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피해를 입었어도 저렇게 멀쩡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왜 자꾸 피해를 입었다고 얘기를 하냐?'고 할 것 같은데요.(웃음)
정 – 안내해주신 그 분은 일주일 동안 한끼도 못 먹고, 해상에서 봉쇄되어서 물자가 공급되지 않으니까 거기서 간신히 살아돌아오신 분이었어요. 피골이 상접해서. 언제 먹을 것을 먹었냐 하면 수용소에 들어갔더니 비타민을 과자처럼 만들어서 주더래요. 그걸 먹고 살아난 건데요. 죽을 고생을 했죠. 죽을 고생을 했지만, '할아버지 거기 가라고 한 사람, 밉지 않냐'고 했더니 '당시에는 그게 그 사람 일인데 안 하면 어떻게 하겠냐, 이 조선팔도에서 살겠냐' 고 말씀하시는 여유, 그것이 대단하다고 느껴졌습니다. 3000명 중에 그런 분들에게 받은 감동이 정말 컸어요. 그때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부정부패를 하지만, 저렇게 저런 경험을 하신 분들이 정말 굳건하게 바닥을 지키고 계시니까 우리 사회가 지금 유지가 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지 – 국가가 과거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인정하고, 반성하고, 사과하고, 보상하는 것이 창피한 것이 아니잖아요. 발전한 사회와 국가가 해야 될 일인데요. 가해자가 반성하지 않는데도 미리 용서하고,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 – 그 대목에서 한가지 예를 들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제가 큰 영향을 받은 피해자 유족 회장님이 계세요. 여자 분인데, 지금은 100세가 되셔서 오늘내일 하세요. 이 분은 집안이 워낙 좋았고, 평양의 부잣집 따님이셨구요. 여기서도 경성 여학교를 나왔고, 결혼식도 이화예식장에서 했어요. 남편이 결혼하고 나서 아이가 갓난쟁이일 때 군속으로 가서 돌아가신 거예요. 그 이후에 본인은 본인의 아픔만 생각했고, 집도 여유가 있고 하니까 친정에서 편하게 살았대요. 이 분은 제가 봤을 때 피해자성을 정말 올곧이 지켜가는 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처음에는 자기 아픔만 생각했다고 합니다. 어느날 광주에서 유족을 만났는데, 너무 기가 막힌 유족을 만난 거예요. 그래서 보니까 그런 사람이 한 명, 두 명이 아니고, 여러분이 계세요. 정말 많은 분이. '나는 저 사람들에 비해서는 행복했는데, 그런 것을 몰랐구나' 하는 생각을 해서 단체를 만드셨어요. 천인소라고 천인을 이끌고 소송을 했는데요. 그게 얼마나 힘드냐 하면 소송을 하면 변호사가 계속 서류를 제출해야 합니다. 변호사 한 사람이 세명 것 밖에 못합니다. 진술서를 써야 되고, 내야 할 서류가 많습니다. 이 분이 1000명의 진술서를 일본어로 직접 다 쓰신 분입니다. 얼마나 엘리트입니까, 이 분의 피해자에 대한 헌신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자기 집을 아예 내놓고 했으니까요. 이 분은 지금은 오도가도 할 데가 없게 됐는데요. 이 분이 기가 막힌 말씀을 하셨는데요. 천인소를 위해 일본에 소송하러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요. 표현을 어떻게 하냐 하면 '내가 적국에 소송을 하러 갈 때마다 치욕감에 견딜 수가 없어서 약을 먹고 죽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시냐 하면 '내가 나라가 없어서 내 남편을 잃고, 여기 있는 사람들도 나라가 없어서 이렇게 된 것 아닙니까? 지금은 나라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가 왜 적국에 가서 우리 피해를 이야기해야 됩니까' 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때 제가 느낀 것이 '아, 정부가 해야 되는구나' 지금도 소송을 하는 분들이 있잖아요. 미쓰비시에 1억을 달라고 하잖아요. 저 분들이 저렇게 하도록 한국 정부는 왜 내버려둡니까, 일본 아베하고 멱살을 잡든지, 어디 가서 무릎을 꿇든지 무슨 짓을 해서라도 국민들이, 피해자들이 직접 나서서 그렇게 하지는 않도록 해야 되잖아요. 우리가 세월호 때도 봤잖아요. 왜 피해자들이 나서서 진상규명을 요구해야 됩니까? 정부가 해줘야죠. 그 분이 이금주 회장님이신데, 정말 연약한 여성이에요. 그런데 결연한 표정으로 '내 나라가 있는데, 내가 왜 적국에 가서 우리 피해를 이야기해야 되는가. 그렇게 할 때마다 치욕감 때문에 죽고 싶습니다'라고 하는데, 우리 정부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느꼈습니다. 제가 정부 일을 하면서는 공익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같이 생각해야 된다고 하면서 직원들에게도 늘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회장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우리는 공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일하는 과정에서 사익이 들어갈 수 있다. 만약에 사익이 들어가면 우리는 여기서 일을 하면 안 된다. 내가 만약에 사익에 따라서 지시하면 내 지시를 받지 마라'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도 또한 제 윗사람이 사익에 따라 지시를 하면 지시를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인사 조치도 많이 당했습니다.(웃음) 윗분들한테 '천벌을 받을 것이다' 라는 악담도 퍼부어서 미움도 많이 받고 고생도 많이 했지만, 제가 위원회를 나오면서 아쉬운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들은 '거기를 그만두고 나와서 아쉽지 않으세요?' 하는데, 하나도 아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정말 거기 있으면서 정말 공익을 위해서 일을 하겠다고 생각했고, 우리팀들은 그렇게 했구요. 정말 좋은 직원들하고 같이 그것을 11년 동안 원도 한도 없이 했기 때문에 더 이상 바라는 것도 없고,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고 늘 얘기하는 거죠.

(2부에서 계속됩니다)

이미지 크게 보기【서울=뉴시스】배훈식 기자 = 정혜경 박사가 지난 4일 서울 서초구 토즈에서 지승호 인터뷰 전문 작가와 '반일 종족주의' 등에 대해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09.13. dahora83@newsis.com


□ 지승호 작가는
1966년 부산 출생. 월간 <인물과 사상>에서 인터뷰 코너를 오래 담당했으며, 월간 <전원생활>의 인터뷰를 맡고 있다. 인터뷰 단행본 저서로 <마주치다 눈뜨다> <7인 7색> <만화, 세상을 그리다> <영화, 감독을 말하다> <감독, 열정을 말하다> <우석훈, 무엇으로 희망을 말할 것인가?> <신해철의 쾌변독설> <공지영의 괜찮다, 다 괜찮다> <박원순, 희망을 심다>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 <강신주, 맨 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이석연의 페어플레이는 아직, 늦지 않았다> <장하준, 한국경제 길을 말하다> <바이러스가 지나간 자리> <김의성, 악당 7년>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등 50여권이 있다. 인터뷰론을 정리한 책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인터뷰 특강>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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