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04

손민석 한반도는 동아시아 세력균형의 핵심적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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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는 동아시아 세력균형의 핵심적 지역이다. 오카모토 다카시가 지적했듯이 이미 19세기에 '6자회담'의 원형인 열강들의 회의가 나타났을 정도로 한반도 문제는 열강들에게 있어 첨예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이는 1876~1910년에 이르는 조선망국사의 과정을 단순히 못난 민족의 못난 망국으로 치부하기에는 이 나라를 규정하는 외부적 요인이 너무 강력하다는 걸 의미한다. '자주'라는 말이 듣기는 좋을지 몰라도 "미완의 기획"으로서의 "조선의 독립"은 자주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조선왕조는 사대교린에서 '속국 자주'라는 형용모순적인 상태를 거쳐 "독립 자주"를 꾀하다가 패망했다.
이 외교적 관계의 변화는 조선왕조 국내 세력의 변화와도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급진개화파의 등장과 붕괴, 온건개화파의 친청에서 친일로의 전환, 동학농민봉기, 청일전쟁, 온건개화파를 이끌던 김홍집의 타살, 삼국간섭,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고종의 대한제국 건설, 러일전쟁, 친러파 이완용의 친일파로의 전환 등등의 복잡다단한 사건들이 한반도 문제라는 지정학적인 규정 속에서 이뤄졌다. 지금 한국이 친일친미사대주의 대 친북친중좌파라 서로 비난하는 축으로 갈라졌듯이 조선왕조도 그렇게 갈라졌던 것이다. 친일파와 친청파가 차례차례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본 약간의 친러파와 고종은 어떠한 몰락의 계기도 만들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하였지만 독립 자주를 지킬 수는 없었다. 고종이 개혁을 잘 했더라면 독립을 지킬 수 있었을까?
“속국 자주"라는 표현에 이미 답이 들어있다. 조선은 청의 속국이지만 동시에 자주적인 국가라는 이 기묘한 표현은 청과 조선의 동상이몽이 집약된 것이다. 조선왕조는 청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는 대신 다른 국가들과 대등한 관계를 꾀하고자 했고, 청은 속국이기는 하지만 조선은 자주적인 국가이기에 책임지고 싶지 않아 했다. 청의 세력권이 작동하고 있지만 자주적이기에 여러 선택지를 갖고 있으며 다른 국가들과는 독립적이고 대등한 국가. 이 속국 자주 상태가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 조선왕조의 평화는 유지될 수 있었지만, 청왕조가 속국을 실질화하려고 하자 급진개화파가 일본을 등에 업고 움직이며 갑신정변이 터졌다. 이런 속국의 실질화를 막는 최종적인 귀결이 청일전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청일전쟁도 삼국간섭으로 무너지면서 친청파에서 친일파로 바뀌었던 김홍집은 길거리에서 민중에게 맞아죽었다. 일본의 보호를 잃은 친일파가 세력을 유지할 수도 없게 되며 김홍집이 맞아죽었던 것이다. 그뒤로 1898년 이후 한반도는 다시금 군사적 공백 상태에 놓이며 러일전쟁까지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게 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에야 일본은 한반도를 독점할 수 있었다. 그뒤에 한반도는 북조선과 한국으로 쪼개졌다. 이미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6세기부터 한반도를 양분하려는 움직임은 나타나고 있었다. 중국, 러시아를 묶는 대륙세력의 힘이 강할 때는 한반도가 안정적으로 그 영향권 안에 있었지만 16세기 세계자본주의의 발전 속에서 일본, 미국, 영국 등을 묶는 해양세력의 힘이 강해지며 한반도를 양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다가 20세기 와서 그것이 현실화된 것이다. 이러한 국제적 힘의 변화에 따라 국내적인 정치역학관계도 변해왔다.
즉, 친일친미사대주의도, 반대로 친중친북좌파도 외세의 규정력이 여전히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뿐 그것 자체만으로도 상대를 비난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다.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문재인의 실패도 한국의 자주적 능력으로는 상황을 타파하기 어렵다는 걸 증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외부적 요인에 의해 대한제국이 꾀하던 '독립 자주'의 기획은 실패했고 한반도는 양분됐다. 한반도를 다시 통일하려는 세력은 제2의 '독립 자주' 기획을 꾀하는 것인데 이것은 19세기 조선왕조가 그랬듯이 한반도 내부의 힘보다는 6자회담으로 대표되는 외부의 규정에 의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현실적으로 1991년 소련이 무너진 뒤에 북조선이 무너졌다면 그때가 기회였겠으나 무너지지 않았다. 북조선 내부에 그것을 이끌 새로운 동력도 없었고 경제위기가 대규모 반란으로 이어지지도 못했다. 기회는 흘러갔다.
여기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 고작 대한제국이 내부개혁을 잘해서 힘이 있었다면 그들이 주장했던 중립화가 잘 진행되어 성공했을 것이라는, 민족주의적 결론이어야 하는가? 힘을 더 가져야 할까? 한국이 힘을 더 가진다고 해서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이라는 주변국들을 압도할 수 있을까? 가장 힘이 약한 일본만 해도 인구는 한국의 2배 이상, 경제규모는 한국의 3배나 된다. 생산력 증대로 압도하려면 몇배는 앞서야 한다. 가능할까? 적어도 0%대의 인구증가율로는 불가능하다.
세력균형을 뚫기 위해서는 규모를 키워야 한다. 다른 국가들과 연합해야 하고, 그에 맞게 우리를 이념부터 시작해서 전부다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미중 간의 충돌을 방지할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하고, 그에 맞는 이데올로기를 지녀야 한다. 그런 걸 할 생각이 있는가? 친일친미사대주의 보수세력과 친중친북좌파 진보세력이라는 두 정치세력을 대체할 세력이 있는가? 한줌도 안되는 좌파 세력은 친러파와 고종처럼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눈치만 보고 있다가 망할 것인가? '미완의 기획'으로서의 '조선의 독립'은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이다. 좌파가 국힘당/민주당 비판할 때 이런 맥락 속에서 하지 않으면 둘 중 어느 한쪽을 지지하는 게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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