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 - 민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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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 직. 후의 국민보도연맹원 및 정치범 불법처형, 미군의 기총사격과 공중폭격. 에 의한 피난민 및 주민 다수의 희생, 인민군 점령지구에서의 우익인사 ·. 군경가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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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
김영범
전쟁과 민간인 학살 한국 현대사와 한국사회는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의 결과 및 영향 과 떼어 놓고 논의할 수 없다. 분단의 상처와 전쟁의 기억은 국민 의식구 조에 오래도록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고, 정치 • 사회 구조의 형성 • 재형 성에도 절대적 영향력을 미치는 변수가 되어 왔다.
그 전생의 기원과 전개과정 , 성격과 결과는 1980년대 초부터 새로운 시 각으로 논구되기 시작하여 성과 면에서 큰 진전을 보았다. 그러나 전쟁으 로 인해 남 • 북한 민중들이 겪게 되었던 고통과 피해의 실상, 그 후유증 등의 문제는 아직 제대로 규명되지 못하였고 본격적인 접근이 이루어지 지도 않았다.
전쟁의 결과는 늘 비참하며, 그 피해는 거의가 민중에게 집중되고 전가 된다. 그것은 한국전쟁도 마찬가지였는데, 민중의 피해는 우선 막대한 인 명손실로 나타났다. 남 • 북한 통틀어 군인 65만 명과 민간인 26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민간인 희생자가 군인 희생자의 4배수에 달할 만큼 엄청
기억과전망
나게 많았다는 것인데, 그 대부분은 전선이 아닌 후방에서 미필적 고의에 의해 발생한 무차별적 살해 즉 집단학살에 의한 것이었다. 학살 희생자가 남한에서만 무려 100만 명에 육박했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으니 ,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증언과 기록들로 드문드문 전해지는 학살의 실상과 양태도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한국전쟁이 '동족상잔 의 비극이었다는 말의 '뜻에 는 미증유의 비참한 학살사태가 수반되었다는 사실도 같이 함축되어야 하는 것이다.
최근 3,4년 동안에 있어 온 활발한 문제 제기와 공론화 시도의 결과로 한국전쟁 기간 및 그 직전 시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사실 을 인지하게 된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그러면서 민간인 학살 사건들을 과 거청산의 중요한 대상으로 삼아서 그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고 희생자를 구제해야 한다는 문제의식과 특별법 제정운동 등의 실천적 움직임이 시 민사회 내에서 상당한 정도의 공감과 호핑을 얻어가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움직임을 염두에 두면서 , 우리가 왜 한국전쟁 전후의 민 간인 학살을 그냥 덮어 들 것이 아니라정직하게 대면해야 하고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를 같이 생각하 보기 위한 것이다
민간인 학살의 실상1 민간인 학살은 1948년부터 남한에서 국지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었
1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의 실상에 관해서는 다음의 책들이 주로 참고될 수 있다: 노민 영 • 강희정 편저,『거창양민학살 : 그 잊혀진 피을음』, 온누리, 1988,. 정회상,『이대로는 눈을 감을수 없소 : 6 • 25 전후 민간인 학살사건 발굴 그』. 돌베개, 1劈0•,〈부산매일〉취재팀,『을 부짖는 원혼』, 국제출판사. 1991 ; 전라북도의회 6 25양민학살진상실태조사 특별위원회, 『6 • 25양민학살진상실태조사보고서』, 1994; 정은용,『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 다리 ,
1994; 채의진 편저,『아, 통한 44년』(증보2판), 문경양민학살피학살자우족회. 1994; 김삼웅, 『해방 후 양민학살사』, 가람기획, 1豌: 서중석『조봉암과 1950년대 (하): 피해대중과 학살의 정치학』, 역사비평사, 19卿정찬동,『함평양민학살』, 시와사람 1″; 김동춘,『전생과 사회』,
• 특집 4 . 한국전쟁전후의 찝이
다. 1948년 여순사건에서 주민 2천여 명의 피살, 제주4 3항쟁 진압 과정 에서의 3만 명 가량의 주민학살, 그리고 1949년의 빨치산 토벌작전 중에 남원 • 문경 • 영덕에서 벌어진 주민학살사건들이 그것이었다.
6 • 25 전면전의 발발과 더불어 민간인 학살은 남한 전역에서 빈발하면 서 대상과 규모의 급격한 확대를 통해 전국적 현상이 되어 갔다. 개전 직 후의 국민보도연맹원 및 정치범 불법처형 , 미군의 기총사격과 공중폭격 에 의한 피난민 및 주민 다수의 희생, 인민군 점령지구에서의 우익인사 • 군경가족 • 공무원 등의 학살, 남부 산악지대에서 빨치산과 토벌군에 의 해 자행된 주민학살, 수복지구에서 벌어진 부역자' 처단 명분의 보복학 살 등, 계기와 요인을 달리하면서 학살 행위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막연한 의심이나 평소의 사감, 또는 즉흥적 판단으로 보안요원이나 군 인들에 의해 빨갱이' • '통비분자 로 몰려서 학살된 사람도 수없이 많았 다.
빈발했던 학살사건들은 계곡과 하천변, 동굴과 폐광산, 철로와 교량, 수 풀과 과수원, 언덕과 들판, 낭떠러지와 고갯마루, 갯벌과 연안바다에 이 회까지, '금수강산' 의 모든 산야와 강과 바다를 피학살자의 피로 물들 게 했다. 노근리, 괴개굴, 골령골, 가창댐, 왜관교 금정굴, 익산역, 석달 마을, 외공리, 동창교, 신원면, 초막마을, 섯알오름 강화 갑곶, 신천 등 등•••통한의 기억이 서린 참극의 기호들이 방방곡곡에 수없이 널려 있게 되었다.
군과 경찰, 그 보조원, 우익단체원들에 의해 벌어진 집단학살은 다음의 네 가지 유형 중에서 어느 하나에 속했다.
들배개, 2000: 경상북도의회 양민학살진상규명특별위원회,『양민학살진상규명특별위원회 활 동보고서』, 2000; 이도영,『죽음의 예비검속』, 월간 말, 2000; 신경득,『조선 종군실화로 본 민 간인 학살』살림터, 2002; 김기진,『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 역사비평사, 2002.
기억과전망
첫째, 개전 직후의 '좌익관련(형의)자 대학살로서, 그 대상은 주로 국 민보도연맹원과정치범 • 재소지들이었다. 약 30만 명 정도의 보도연맹원 들이 경찰에 '예비검속' 된 후 집단으로 수용되었다가 야산이나 해상에서 불법처형되었다.
특정 지역에서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학살이 이루어진 점에서 정부 고위층의 지령 • 재가나 중앙정부 및 각군 수뇌부로부터 내려오는 조직 적인 지휘명령 계통이 있었을 것임이 짐작된다. 이에 대해 전 해군제독 남상휘는 증언하기를, 당시 군의 '처형' 명령은 국방장관이 발령하여 육 참총장과 해참총장을 거쳐 예하 부대로, 경찰의 처형 명령은 내무장관 이 발령하여 치안국장과 각 도경국장을 거쳐 예하 경찰서로 하달되었다 한다. “군경은 피검자들의 좌익활동 여부를 일일이 확인하거나 재판을 열 겨를이 없었다는 말도 그는 덧붙였는데, 이는 '계엄하 군사재판 이 라는 최소한의 절차마저도 생략한 채 국가가 국민을 무단살해했음을 말 해준다.
그렇게 마구잡이 살육을 저지름으로써 이승만 정부는 정당성의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리면서 초법적 국가테러리즘의 길로 치달았던 것이다.
재소자불법처형도 조직적이고도 큰 규모로 진행되었다. 대전 • 대구 • 부산 형무소와 전주 • 청주 • 공주 • 광주 • 목포 진주 교도소에서 수백, 수천 명씩 처형되었디는 증언이 속속 나오고 있다 집행 • 감독 주체는 육 군 헌병과 경찰이었고, 법무장관의 재가에 의해 재소지들의 신병이 군에 인도되었다.
대전과 대구의 학살 현장에는 미군 장교들이 참관하고 사진촬영도 했 다. 최근에 비밀해제된 미국의 정보보고 문서에 의하면, 재소자 집단학살 은 육군본부 정보국과 내무부 치안국이 기획하고 미국정부가 묵인 • 방조 하여 저질러진 것으로 나타난다.
둘째, 남부지방의 치안확보 과정에서 자행된 무단학살로서, 근거 없이
• 특집4:t!국전쟁전후의
빨갱이' 로 몰리거나 '용의자 로 지목된 사람들이 무더기로 살육극의 제 물이 되었다. 헌병 • 경찰 • 특무대 • 청년방위대 • 해상방위대 • 해군첩보 대 요원들이 초법적 처결권을 행사하며畔의 민간인을 마구잡이로 학 살한 것이다. 해안과 섬 마을들에서는 경찰부대가 인민군으로 위장하여 좌익 동조를 유도한 후 빨갱이로 몰아 주민 다수를 학살해 버린 일도 있 었다.
셋째, 1950년 10월부터 약 반년 동안 지리산 일대에서 벌어진 국군과 빨치산의 공방전 과정에서 전남 • 북 및 경남 지방의 여러 군 주민들이 '통비분자' 또는 '반동' 으로 몰려 수없이 애꿎은 죽음을 당한 경우들이 다.
특히 11사단(사단장최덕신) 예하부대들은 건벽청야' 작전명령을 '적 성부라 초토화와주민학살의 좋은 구실로 삼았다. 어린이 • 노인 • 여자 를 가릴 것 없이 무차별 학살이 자행되었다. 전북 순창군에서만 2년 동안
7천여 명의 주민들이 좌 • 우익 연쇄학살의 희생물이 되고 말기도 했다.
넷째, 수복지구에서의 '부역자' 처리를 빙자한 보복학살로서, 월북 또는 피신해 버린 적극 부역자나 좌익 동조자 대신에 그 가족 • 친지와 소극 부역자들이 억을하게 죽어 간 경우가 많았다. 경기도 고양에서 벌 어진 금정굴사건에서는 경찰과 우익단체(태극단)원들이 좌익활동자 가 족과 부역혐의자 1천 명 이상을 몰살시키고 시신을 금정굴 속에 유기해 버렸다.
인민군 점령기간 동안에 각 지방의 우익인사와 군경가족 • 공무원 등 약 13만명이 '친미 • 친일 • 민족반역의 반동분자 로분류되어 '숙청' 즉 학살을 당하기도 했다. 이 역시 전쟁 발발 이전과 전쟁 초기에 좌익세력이 탄압받은데 대한 보복의 성격이 강했다. 또한 9 28 직후부터의 퇴각과 정에서도 인민군과 좌익단체원들은 호남지방 곳곳에서 주민 수천 명을 잔혹하게 학살했다.
기억과 전망
미군도 참전 초기부터 학살의 공동정범이 되어 갔다. 미군의 민간인 살 상은, ㉦주로 피난민 대열에 대한 총격 • 포격, 통행 중 교량 폭파, @피 난민 야영지와 민가 마을들에 대한 전폭기의 표적폭격과 무차별 기총소 사, ㉭적군과의 조우전 상황에서의 총기난사로 인해 빚어졌다. 그들은 흰옷만 보이면 반사적으로 적 =인민군을 연상하는 것처럼 행동하며 피난 민들을 공격 했다.
그러한 공격행동은 피난민 대열 속에 잠입해 있을지 모를 인민군의 기 습공격에 대비한자위조치로 정당화되고 있었으며, “의심이 가는 피난민 은 사살하라'는 명령이 상부로부터 내려져 있었다고 한다. 갑작스런 전선 투입에 따른 불안심리와 공포심도 일부 작용했지만, 아시아인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편견과 경멸감의 발로인 점도 컸다. 그러나 미군 역시 나름의 작전 개념과 명령계통에 의해, 또는 모종의 정치적 목적으로 그런 행위를 용인 또는 조장하게 되었을 기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 공군의 무차별 공습폭격과 기총소사는중 남부 지방 곳곳에서 주 민과 피난민들의 막대한 희생을 초래했다.
냇가에서 피난생활 중인 마을 주민들과 민가가 자주 표적이 되어 , 경북 내륙 및 동해안 일대와서부경남지방, 대전 용인 등지에서 수십, 수백 명의 주민들이 일시에 죽음을 E당하곤 했다. 양민임을 알리고자 일부러 흰 옷을 입고 미군 정찰기에 잘 관측될 수 있을 하천변에 모여 집단생활을 한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기도 했다.
민가 마을들이나 민간인 집체에 대한 공격은 오폭이기는커녕 아주 의 도적이고 조직적인 공격이었음을 말해 주는 기록필름도 공개된 바 있다. 익산역과 평택역에 대한 미군 중폭격기의 돌연한 공습으로 역무원, 후송 중인 신병 , 주민과 학생, 기숙 중이던 피난민 등, 수백 명이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에서는 피난민 은신처 표시가 확연히 나는 괴개굴에 폭탄투하와 기총소사가 가해져 , 3백여 명이 질식
특집 4. 호국전쟁전후의
사하거나 불에 타 죽었다. 미국인들의 생명경시 관행과 인종주의적 편견 이 여지없이 드러난 학살의 비극들이었다.
학살의 특징과 성격 한국전쟁 기간 동안 특히 남한 땅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은 대체로 다 음과 같은 특징점들을 내보였다.
㉦피학살 인원이 남한 총인구(1949년 당시 2 017만 명)의 1/20이 될 정 도로 매우 큰 규모였다.
@우발적 • 감정적 요인에 의한 학살도 상당수 있었지만, 명령계통이 분명히 있는 의도적 학살, 조직적 학살, 준비된 학살이 더 큰 비중을 점했 다. 이 점에서 남한에서의 학살은 전시를 틈타 벌어진 '국가후원적 대량 살해' 범죄요국가테러리즘그자체인 측면이 컸다
㉭동족에 의해서든 미군에 의해서든 무고한 죽음 억을한 죽음이 엄청 나게 많았다. 굳이 '죄' 를찾는다면 남 • 북정권 어느 일방에 대한 정치적 반대자이거나그럴 개연성이 있다는 정도였을 터인데, 그것이 '죽을죄' 가 될 수는 결코 없었다. 따라서 그런 경우의 처형 숙청 • 살해도 단연코 불법적 조치요 억울한 죽음일 수밖에 없었다.
㉦ 좌 • 우익 쌍방에 의한 동족 학살의 본질은 '이데올로기적 학살 또 는 정치적 학섈 politicide이었고, 미군이 저지른 학살행위들은 정치적 학 살의 외양을 띠면서도 종족 학살' (좁은 의미의 genocide)의 성격이 다분 했다.
㉭ 보복의 악순환에 의한 연쇄학살의 양장도 많이 나타났다.
㉭ 어린이 • 노인 • 부녀자등, 방어능력도 어떤 혐의의 여지도 거의 없 는 약소지들에까지 무차별적 학살이 자행된 경우가 많았다.
㉨ 학살수법과주검처리 방식이 매우잔인하고 원시적이었다.
기억과 전망
㉭ 어느 쪽이든 학살자(집단)들은 별 죄의식이 없이 자기 정당화와 합 리화를꾀했다.
작전 중인 군부대가 저지른 주민학살은 지휘관의 통솔력 부족이나 병 사들의 품성상의 결함의 소치인 것만은 아니었다. 상부로부터 주어진 '건 벽청야' 의 작전명령 자체가 학살행위의 발생을 충분히 예견케 하는 것이 었다. 보다 큰 맥락에서는 좌 • 우익 양편의 절멸주의적 논리가 상호 적 대 • 증오 심리를 양성 • 증폭시키고, 끝없는 학살의 악순환으로 모두 다 빠져들게끔 만들었다고도 하겠다.
더욱이 남한에서는 이승만이 그 정점에 서는 극우세력이 전쟁 상황을 민중의 저항 기능성과 반대파의 도전의지를 미리 철저히 분쇄해 버릴 호 기로 삼아서, 멸공 • '타공'의 명분으로 학살을준비하고 벌여7갔을가능 성이 높다. 그에 질세라 인민군과 좌익세력도 반동분자 박멸' 을 고창했
다. 그래서 아무런 죄책감이나 거리낌 없이 , 마치 짐승사냥하듯 동족학살 이 자행된 것이다.
학살의 희생자와 피해자들 그러면 피학살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거의 대부분이 평범하고 선량한 일반 국민들이었다. 자기 의사와 관계 없이 그들은 인민군 점령지 구 주민으로서 '부역자 가 되어 버리기도 했고, 마을 이장의 권유에 못이 겨 보도연맹원' 으로 등록되기도 했으며, 깊은 산촌에 살다보니 '공비' 에 게 한 끼 밥을 내 주게도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불시에 닥치는 죽음의 이 유가 되었다. 좌 • 우익 어느 한쪽의 입장을 명시적으로 드러냈거나 적극 지지해서가 아니라, 혐의와 개연성만으로 정치적 학살 의 제물로 삼아 지곤 했던 것이다.
밥에는무장대-빨치산세상, 낮에는 군경의 세상 또는 '어제는 인민
특집 4 . 한국전쟁전후의
군 치하, 오늘은 국군 치하 로 전변하는 불확실성의 전황 속에서 그들은 늘 '이쪽이냐, 저쪽이냐 의 선택과 의사 표명을 강요받는 위치에 놓여 있 었다. 명백히 '이쪽 편이라고 확인 또는 판정이 되지 않으면 그대로 '저 쪽' 편인 것으로 간주되어 절멸의 대상으로 삼아져 버렸다.
이분법적 혹백는리의 수쇄 속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받은 국민들이 종국 에 입게 된 희생과 피해의 극단이 떼죽음이고 대량학살이었다. 한 번 말살 되고 능욕된 피학살자들의 생명권과 생존권, 그리고 인간존엄성 유지권 은 결코 원상회복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민간인 학살은 어떤 이유로 행 해지든 그 자체로 반인권의 극치를 이루는 행위였다.
피학살자의 유가족과 후손들도 엄청난 정신적 고통과 심리적 부담을 겪고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만 했다. 가족이나 친족원 중에 누군가가 전쟁 통에 '빨갱이' 로 지목되어서건 다른 모호한 이유로건 죽임을 당했다면, 그 사실 자체가 1950년대 이후의 극우반공주의 체제 속에서는 크나큰 심 리적 억압과 신원결함 인자로 작용했다.
그래서 전쟁 직후에는 그 사실을 감추고 제2의 피해를 모면하기 위해 타지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그런 중에 가족이산과 가족해체 도 지주 빚어졌다. 심리적 충격을 견디지 못하여 아무 일도 못하고 무력증 에 빠져 있다가 일찍 사망한 이들도 적지 않았으며 , 그런 조사자나 피학살 자의 유자녀들은 극심한 생활고와 교육기회의 상실, 연좌제로 인한 정상 적 취업 곤란 등의 요인이 겹쳐 극빈층으로 전락하거나 사회적으로 완전 히 버림받은 층이 되고 말았다. 피해의식 때문에 입도 벙긋 못하고 침묵과 통한의 세월을 견디어야만 했다.
학살행위의 직접 집행자 혹은 하수인들도 결국은 피해자가 되어 갔다. 여생 내내 어두운 기억에 시달리며 크나큰 마음의 상처와 심각한 정신장 애 증후군을 겪기도 했다. 참전 미군들만 하더라도 자신들이 저지르거나 겪었던 비극적 사건들 때문에 오래도록 악몽과 알코올 중독, 가정 파탄,
기억과전망
사회 부적응 등의 후위증에 시달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전쟁과 학살의 기억이 그들의 나머지 인생에 큰 상처를 남긴 것이다.
그처럼 학살은 결국 학살자까지도 희생물로 만드는 것이었다. 학살을 지 령하고 교사한 자들만이 이득을 보았을 뿐, 그 그늘에서 국민 모두가 피 해자로 남게 된 것이었다. 학살의 죄업을 똑바로 인식하고 올바로 청산해 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중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학살사 청산의 필요성과 방함 학살의 역사가 한반도의 주민집단에게 안겨준 정신적 외상과 후유증은 너무도 깊고 컸다. 그러나 그것을 치유하려는 시도나 노력은 너무도 미미 했다.
그 환부에 메스를 대 보는 일조차 쉽지가0-1•으 2斝이 卽--1 트 -에서 ^지 우리는 지난 세월을 보내 왔다. 공식기록들에서는 적대자의 도발과 참살행위만 을 고발하고 비난하는 식으로, 일방적인 단죄만 거듭되어 왔다. 이데을로 기 사관이 드리워 놓은 짙은 그늘이기도 했다.
그러나 진실의 요체는 명백하다. 좌 • 우익, 남 북한, 그 어느 쪽도 학 살의 원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학살문제에 대해서만은 좌 • 우 편향에 빠질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기초적인 인권문제이기 때 문에 더욱 그렇다.
사실 민간인 학살은 1970~80년대의 무도한 국가폭력 이 낳은 고문치 사, 의문사, 광주학살 등의 인권유린 역사의 기원을 이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현대 한국의 인권문제의 원형이요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그러 프로 민간인 학살 문제의 적절한 해결이야말로 이 땅에 진정한 평화와 인 권의 시대를 열어7는 데 필요한 시금석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그 런데도 학살의 과거사가 인권과 민주주의를 운위하는 이들에 의해서도 아예 외면%+하거나 무지의 대상으로 방치되어 버리는 수가 람다. 인권문
특집4:힌국전쟁전후의
제가 아닌 이념문제로 손쉽게 치부해 버리기 때문인데, 잘못돼도 한참 잘 못된 인식이다.
자기 나라의 역사 속에, 그것도 매우 가까운 시기에,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동족살육의 궤적이 숨겨져 있다는 점을 우리는 부끄러워할 줄 알아 야 한다. 엄연한 사실로 존재했음에도 여지껏 제대로 인식되지도, 기억되 지도, 진실이 규명되지도 못해 온 것은 모두들 감추고 가리기에 급급하고 잊어버리는 것만이 능사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독재와 극우반공체제가 우리에게 강요했던 삶의 방식이기도 했 다. 무지와 무책임이 마치 삶의 지혜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새 세기에는 그런 낡고 추한 모습이 결코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올바른 과거 인식과 제대로 된 과거청산을 통해서만 우리는 거듭날 수가 있다.
되돌아보면 우리는 제대로 된 과거청산의 경험을 거의 가져 본 적이 없 다. 일제 잔재와 친일파의 청산도, 독재와 탈법과 인권유린 통치의 유산 청산도 늘 미흡하기만 했다. 하물며 첨예한 이념대립의 산물로 여겨져 온 민간인 학살 문제가 청산 대상으로 올려지기는 거의 불기-능했음이 저간 의 사정이었다.
그러나 민족분단과 냉전적 대결구조 및 그 여러 표상들에 기대어 형성 되었을지도 모르는 기형적 발전영볙과 그 그늘에서 족생한 수많은 부정 과 비리 , 사회적 모순과 불합리를 이제 과감히 청산해야 할 때가 왔다면, 민간인 학살 문제 역시 이제라도 청산되어야 할 과거사로 직시하여 정직 하게 대면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냉정하게 직시하여 받아들일 건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실의 역사를 써 내고 전승시킬 수가 있다. 수치와 오욕의 역사일 수록 더 적극적으로 문제 삼고 공론화를 해야만 올바로 청산할 길도 열린 다. 그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피해자의 관점에서, 인권중심 사관에 입각
기억과전망
해서 과거를 돌아볼 것이 요청된다. 그래서 전쟁의 부정적 결과와 여러 후 유증을 추체험해 봄에 의해 평화에 대한 갈망을 키우고, 잔혹한 살육의 비 극을 똑바로 인식하고 기억함에 의해 생명과 인권의 가치를 더 소중히 여 기게 되는 것, 이것이 정전 50주년을 맞는 오늘의 시점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성찰의 새로운 호}두요 의미 망을 이루게끔 해야 하지 않을까?
학살의 역사를 청산하기 위한 첫걸음은 당연히 진상규명 , 진실의 복원 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진상규명을 위해 던져져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학살은 언제 , 어디서 , 어떻게 벌어졌는가?
-누가, 얼마나 죽었는가?
-누가, 어떤 식으로 죽였는가?
-왜, 어떤 경위로 살해되었는가?
그런데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은 오래도록 사실 자체와 진상이 감추어져 왔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조차도 거의 없었다. 1960년 4월 혁명 직후에 피학살지계유족회가 조직되어 진상규명과 사법적 조처를 요구 하면서 큰 호응을 얻기 시작했으나 5 • 16쿠데타로 곧 와해되어 버렸다. 그 후 30년이 넘도록 민간인 학살은 언급조차 금기시되었다. 아무도 그 사실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죽은 지는 말이 없고, 산하도 말이 없었다. 산 지들은 그 문제를 회피하고 외면하였다. 모두가 공모한 듯이 은폐와 망각 의 늪에 빠져들어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학살의 진상은 고사하고 시걸조 차도 알 수 없게끔 되어 갔다.
이 문제가 다시 거론되고 진상규명 요구도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87년 6월항쟁 이후의 민주화 열기 속에서 몇몇 우쬼회와 한두 명의 선각적 저 널리스트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정부의 태도는 요지부동으로 별 변화가
• 특집4 한국전쟁전후의 114
없었고, 학계에서도 진지한 대응이 얼른 나오지를 않았다. 오직 4 • 3 학 살사만이 문학 • 예술계 일부와 지방언론의 재조명 , 그리고 극소수 학자 의 꾸준한 문제제기에 의해 관심의 끈을 이어갈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던 차 1999년에 AP통신이 노근리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연말에 제주 4 • 3특별법 제정안이 통과됨을 계기로, 닫혀 있던 말문이 열리고 억눌렸 던 목소리들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김동춘 서중석 교수 등에 의 해 본격적인 학술연구가 시도되고 그 성과를 정리한 연구서가 출간됨으 로써 이 문제에 대한 대중적 관심의 촉발과 함께 지적 갈증의 해소가 어느 정도 기능해지게 되었다.
아무튼 이제 우리 앞에는 반세기 전의 학살의 비극에 관한 진실 규명의 책무가 주어져 있다. 늦었더라도 이제는 비극적 사건들의 진상을 규명하 고, 버려진 진실의 시신들을 수습해야만 할 때이다. 시민사회도 국가도 그 과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무관심 • 무지의 늪으로부터 걸어나끄 무표정의 탈을 벗어던져서, 냉전사 • 학살사의 청산 도정에 적극 합류해 야 한다. 가장 바람직하기는 국가가 앞장서서 과거의 죄업을 반성하고 청 산하는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그리하여 남 • 북한 정부당국과 미국정부 는 남아 있는 모든 학살관련 기록을 흔연히 공개함과 아울러 ,2 인권 말살의 역사적 범죄를 낳게 된 정치적 • 군사적 과오를 솔직히 시인하고 피해자 와 유족에게 정식으로 사과해야만 한다. 그래야 남북통일에 앞서 민족화 합의 초석도 다져질 것이다.
나아가, 무명의 망자들을 위한 진혼의 의례를 적극 추진하고, 후세를 위 해서는 불행한 과거사가 재연되지 않도록 그 교훈을 하나씩 챙겨서 간직 하고 전승시켜야 한다. 학살을 명령하고 사주한 자, 지휘한 자, 적극 실행
2 1951년의 거창학살사건에 대한 3부 합동조사보고서와 중앙고등군법회의의 재판기록 및 판결 문조차도 국방부는 분실했다고 주장하며 내놓지를 않아, 지금까지 공개 된 바 없다.
기억과 전망
한자가 져야 할 역사적 책임도 반드시 물어야만 그런 교훈이 제대로 성립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무단불법으로 학살되어 간 이들의 영혼을 위무하 고, 불명예의 멍에는 벗겨 주어야 한다.
설움과 원한과 증오의 올 들 을 풀고 펴며 삭히는 일에 머뭇거림 없이 임 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불화와 갈등이 빚어질지도 모르지만,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과거청산을 가능케 하면서 장기적으로는 한반도에서의 평 화 정착과 인권 개화의 지반을 다지게 되는 전제조건이면서 새로운 출발 점을 이를 것이다. 또한 민족적 화해와 통합에로 이르는 지름길도 될 것
학살사 청산의 방법: 통합특별법 제정과 진상규명 민간인 학살은 '중대한 인권침하 행위에 해당하며, 전쟁이라는특수상 황에서도 민간인 살상은 그대로 '전쟁범죄 요 '반인륜 범죄' 를 구성하게 된다는 것이 국제적으로 확립된 인식이다. 그런 근거에서 민간인 학살 사 건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배제되는 것이다.
중대한 인권침해에 관해서는 피해자는 물론 일반인들도 '진실을 알 권 라 를 가진다. 언제 자기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 충분한 정보로 써 미리 경각심을 가지고 대비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권리는 어떤 경우에도 제한할 수 없고, 당사국이 회피할 수도 없는 절대적 원칙을 이룬다. 그리고 1997년에 유엔 인권위원회는 '국가와 사회가 진실을 기억할 의무' 를 전제로 하여 , 독립적 지위를 가지 고서 강력한 기능과 권한을 행사하는 전문적 중립적 국가기관이 모든 진실을 완전히 조사하석 드러낼 수 있는 책임을 맡아야 한다고 밝힌 바 있 다.
따라서 민간인 학살 문제도 입법을 통해서 조사권한을 충분히 갖게 되 는 국가기관이 철저히 진실을 규명하고 이에 따라 명예회복 등 기다 조치
특집4•한국전쟁전후의
를 진행시켜야 한다는 것이 유엔의 확고부동한 원칙이다.
반세기 전에 전국에 걸쳐 광범위하게 벌어졌던 학살사건들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내는 것은 실로 만만치 않은 공력과 시간을 요한다. 거대한 국 가적 프로젝트로 추진되고 이루어져야 할 성질의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 진상규명을 법적 • 제도적으로 뒷받침해 주기 위한 특별법의 제정과 특별기구의 설치가 필요하다. 모범적 선례는 1999년에 제정되어 민간인 학살진상규명의 한 돌파구가 되어 주었던「제주4 3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위한특별법」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사건마다 개별적으로 특별법을 제정하려 들면, 이 미 알려져 있는 사건만도 수십 건이 되므로 수십 개의 비슷한 법률을 만들 어야 하게 되고, 입법과정에만도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이다. 또한 현 재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사건은 아예 진상규명의 대상에서 제외되 어 버려 형평성의 원칙이 훼손될 수도 있다.
따라서 학살사건 전체에 대한 일괄적 진상규명과 해결을 모색하는 통 합특별법 제정이 가장 바람직하다. 통합특별법이 제정되면 대통령 직속 의 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하여 충분한 조사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충실하 고 철저한 진상규명 작업이 이루어지게끔 할 수 있다.
2000년 9월에 연구자, 사회운동가, 유족회 대표, 종교인, 문화예술인 등 의 발기에 의해 순수 민간단체로 창립된「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 상규명 및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는 통합특별법 제정을 가장 중요한 실천과제로 설정하여 그 성사를 위해 진력해 왔다.
2001년 1월에 범국민위는「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사건의 진상 조 사 및 피해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통합특별법 제정에 관한 입법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배기운 의원이 대표 발의한「6 • 25 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안」이 , 9월에는 김원용 의원이 대표 발의한「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사
기억과 전망
건 진상규명 및 피해자 명예회복 등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에 제출되어 행정자치위원회로회부되었다.
이들 법안은진상규명, 명예회복 및 기타 피해구제 조치의 시행을 직접 적인 목적으로, 유사한 인권침해 사태의 재발 방지, 인권 신장, 국민화합 에의 기여를 간접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으며, 1948년 8월 15일부터 1953 년 7월 27일까지를 적용기간으로 설정해 놓고 있다. 국군, 경찰, 기타 공 무원, 참전 국제연합군, 준 군사조직원, 비정규 전투조직원들의 작전수 행 및 기타 조직적 활동 과정에서 불법적으로 민간인이 희생당한 집단 적 • 개별적 사건을 조사대상으로 삼아, 사망 • 행방불명 • 고문 • 강간 • 부상 등의 구체적인 희생 내용을 파악하려 한다. 희생자에 대한 보상 또 는 배상은 배제하되 , 명예회복과 위령사업 (위령공간 조성, 민간인 희생사료 관 건립 등), 생활지원금 및 의료지원금 지급 형식의 간접 보상을 꾀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방부가㉦ 법적 안정성 및 소급효금지원칙을 침해할 우려 , @통합특별법에 의한 민간인 희생 전반에 대한 조사는 기존 사법체계와 맞지 않으며 행정효율성 및 예산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음, ㉭ 군인의 충정과 애국심이 폄하될 우려, @6 • 25 전쟁은 역사적 사실로 묻어두는 것이 준칙임 등의 이유로 반대 입장을 표하였으나, 법적 정의 확립의 중 요성 몰각, 부처이기주의 노출, 과거사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거부하는 오만한 자세, 희생자의 억울함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반인권적 발상이라 고 비판받았다.
국회에 제출된 통합특별법안 처리의 주무 상임위가 되는 행정자치위원 회는 2002년 10월에 국회 '과거청산특위' 설치 결의안을 가결시키면서 민간인 학살 문제도 그 특위 소관사항으로 삼아서 이 법안의 처리-근 工0 0력0 위로 이첩시켰다.
이는 이 법안의 심의와 처리를 계속 지연시키려는 책략이 아닌가 하는
• 특집 4. 한국전쟁전후의
의구심을 자아냈고, 이에 범국민위는 금년 2월부터 6월까지 114일 동안 통합특별법의 제정을 촉구하는 장기 농성투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법 무부, 행정자치부, 국방부, 청와대 고위 관계자들이 범국민위측과의 개별 면담 또는 국회 답변을 통해, 통합특별법 제정에 반대하지 않으며 진상규 명 활동에 적극 협조 • 지원할 용의가 있다는 긍정적 입장을 표명하는 성 과도 보게 되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범국민위 산하의 각 유족회 조직에서 지난 1월부터 3월까지 사이에 68건의 집단진정을 낸 것을 계기로 이 문제를 검토하여, 결국은 전향적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즉, 지난 7월 에 국가인권위는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희생과 관련하여 , 전국적 규 모의 진상조사와 억울한 희생자의 명예회복 등을 위한 국가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국회의장과 국무총리에게 통합특별법 제정을 권 고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특별법 제정의 당위성을 재확인시켜 줌과 동 시에 그 가능성을 낙관하게 하는 좋은 조짐이었다. 범국민위의 입법투쟁 에 대한 227개 시민사회단체 • 인권단체의 지지 표명도 큰 보탬이 되어 주고 있다.
농성투쟁의 목표였던 6월 입법에는 비록 실패했지만, 통합특별법 제정 을 1차적 목표로 하석 범국민위의 주도로지난 3년 동안 전개되어 온 민간 인 학살 진상규명 운동은 상당한 성과를 일구어 냈다. 전국 각처에서의 유 족들의 자생적 조직화와 전국조직의 결성, 특별법 제정 청원의 전국화, 인권 • 사회단체들의 굳건한 연대 구축, 진보적 연구진의 결합 등이 그것 이다.
또한 민간인 학살문제에 대한국회 • 정부 • 언론 시민사회단체의 인 식에서도 적지 않은 변화의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대중적 수준에서의 관심 증폭도 기대되고 있다.
따라서 통합특별법 제정의 전망은 그리 어둡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기억과전망
입법 주체인 국회의원들이 얼마 만큼의 관심과 성의로써 이 문제에 대응 해 주느냐 하는 것이 연내 입법화의 관건을 이룬다고 할 것이다.
김영범 kint@daegu.ac.kr I 대구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주요 저서로『한국 근대민~과 의 열단』(1%)7)이 있 고, 이 글과 관련되는는문으로「집단학살과 집합기억」,「한국전쟁과 양민학살」을 발표한 바 있다.
• 특집4 한국전쟁전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