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이광수는 어쩌다?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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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툭 ・ 2019. 12. 8. 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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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일본을 만나다
저자
하타노 세츠코
출판
푸른역사
발매
2016.09.15.
이광수 평전.
1937년 동우회 사건 후 재판과정에서 이광수는 대일협력을 공식표명하고 일본어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도대체 왜 그는 마음을 바꿔 먹었을까?
작가는 이광수라는 작가를 일본인에게 알리기 위해 집필했다고 한다. 만약 이 책에서 이광수에 대한 호의가 느껴지면 그것을 '앎은 사랑'이기 때문이라고.
이 책은 1916년 말 이광수가 도쿄에서 <<무정>>을 쓰기 시작한 지 꼭 100년째 되는 2016년에 출간되었다.
<책머리에>
후타바테이 시메이 <뜬구름>과 루쉰의 <광인일기>, 이광수의 <무정> 최초의 근대소설들.
(11)한국 근대문학의 아버지 이광수를 이야기하면서 일본을 빼놓을 수는 없다. 그가 처음 문학을 접한 것은 도쿄 시로가네의 메이지학원이었고, <<무정>>을 집필할 것은 와세다 대학 당시의 일이며, 식민지시대 말기에는 일본어로 창작했다.
이광수에게는 항상 '친일'이란 꼬리표가 붙는다. 친일은 '대일협력'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전의 이광수는 민족을 계몽하기 위해 논설을 쓰고 <<무정>을 집필했고 1919년 삼일 독립운동 직전에 도쿄에서 <2.8조선독립선언>을 기초했고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13)이광수는 조국을 삼키려 하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원동력을 '욕망'이라고 갈파하고, 쇠퇴한 민족을 재생시키려면 자신들도 '욕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소설을 통해 인간의 욕망이 헛된 것임을 그려냈고, '친일'의 낙인을 얻은 뒤 최후에는 종교에서 구원을 찾았다.
이광수의 삶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사실 19세기 후반부터 근대화를 목표로 질주한 일본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이광수의 생애를 더듬은 것이다. 동시에 그의 삶을 통해 과거의 일본을 응시한 것이기도 하다.
@목차
1. 유년시절 -몰락, 야심이 싹트다
2. 일본유학(1905~1910)
3. 교사생활의 좌절에서 대륙방랑으로(1910~11915)
4. <<무정>>의 시대-명성의 획득과 3.1 운동
5. 수양동우회와 두 개의 신문사(1920~1930년대)
6. 대일협력시절-중일전쟁, 태평양전쟁기
7. 해방 후 -'친일'에 대한 비난, 북한군의 연행.
<이광수 연보>
-1892년
음력 2월 1일 (양력 2월 22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이종원(42세)과
김씨(23세)의 장남으로 태어나다.
-1894년
8월, 청일전쟁 발발(~1896)
-1897년
10월, 국호가 대한제국이 된다.
-1902년
8월, 부모가 콜레라로 사망,
친척집을 전전하고 반 방랑생활을 보낸다.
-1903년
동학교도의 전령으로 활동한다.
-1905년
겨울, 상경. 여름., 동학의 유학생으로 도일.
9월 포츠머스 강화조약. 11월 제2차 한일협약(보호조약)체결,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기고 한성통감부 설치.초대 총독은 이토 히로부미
-1906년
4월, 간다 미사키초의 다이세이 중학에 입학한다.
여름, 학비가 단절되어 귀국
-1907년
1월, 황실유학생으로 재차 도일, 9월, 메이지학원중학 3학년에 편입학.
-1908년
4월, 4학년에 진급. 야마사키 도시오가 메이지 학원에 전학온다. 여름방학에 귀국했을 때 백혜순과 결혼한다.
-1909년
4월, 5학년 진급. 10월, 이토히로부미 암살. 12월<<시로가네학보>>에 '사랑인가'가 게재된다.
-1910년
다수의 초기 창작. 3월, 중학을 졸업하고 오산학교에 부임. 8월, 한일병합
-1911년
1월, 105인 사건으로 오산학교 교주 이승훈이 체포되고, 학교 운영이 교회의 손에 넘어간다.
-1912년
학교 일에 전념하지만 교회와 대립
-1913년
2월, 신문관에서 <<엉클 톰슨 캐빈>의 초역 <<검둥의 설움>>을 간행.
11월, 대륙방랑에 나서 상하이에 간다.
-1914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와 무링을 경유하여 2월 치타에 간다.
8월,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귀국
-1915년
8월, 장남 진근이 테어난다. 여름, 5년 만에 도쿄로.
9월, 와세다대학 예과에 편입학.
-1916년
9월, 와세다대학 문학부 입학. <<매일신보>>에 논설을 발표하여 각광을 받는다.
이 무렵에 결핵 발병.
-1917년
1월 장편 <<무정>>연재. 이 무렵 허영숙을 알게 된다. 10월 <<개척자>>연재.
-1918년
10월, 허영숙과 베이징으로 애정도피를 한다.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것으로 알고
도쿄로 돌아간다.
-1919년
도쿄에서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상하이로 망명. 3,1 독립운동, 임시 정부 수립에 참여.
안창호와 만나 흥사단사상을 알게 된다.
-1920년
2월, 흥사단 입단
-1921년
3월, 귀국. 5월, 허영숙과 재혼.
-1922년
2월, 수양동맹회 창립. 5월, <민족개조론>발표
-1923년
5월, 동아일보사 입사. 9월, 간토대지진.
-1924년
1월, <민족적 경륜>발표. 11월, 장편 <<재생>>연재.
-1925년
3월, 척추 카리에스로 수술을 받다.
-1926년
1월. 수양동맹회를 수양동우회로 통합.
5월, <<마의태자>>연재
6월 입원
11월 <<동아일보>>편집국장
-1927년
1월, 결핵 재발, 차남 봉근이 태어나다.
-1928년
7월, 병세 회복, 11월 <<단종애사>>연재
-1929년
5월, 신장 결핵으로 대수술
9월 수양동우회로 명칭 변경. 삼남 영근 태어나다.
-1931년
6월, <<이순신>>연재, 9월 만주사변
-1932년
3월, 만주국 건국. 4월 안창호 체포.
5월 <<가이조>>의 사장 야마모토 사네히코와 회식.
9월, 도쿄에 출장하여 일본 문인과 교류
-1933년
8월, 동아일보사에서 조선일보사로 옮김.
9월, 장녀 정란이 태어난다.
10월, 장편 <<유정>>연재
-1934년
2월, 봉근이 패혈증으로 급사/ 5월, 조선일보사 사임. 9월 북한산 기슭 자하문 밖 홍지문으로 이사.
12월 차녀 정화가 태어나다.
-1935년
여름, 허영숙이 일본으로 연수를 떠난다. 연말연시를 가족과 일본에서 보내다.
-1936년
5~6월. 일본에 체류. <<가이조>> 9월호에 일본어 단편 <만영감의 죽음> 발표
12월 <<그의 자서전>>연재
-1937년
6월,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
7월 중일전쟁 발발. 병으로 보석되어 경성의전병원에 입원.
-1938년
3월, 안창호 사망. 8월, 동우회사건으로 기소.
11월, 사상전향서 <합의>를 재판소에 제출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12월. 동우회사건의 1심에서 전원 무죄. 판결받지만 검사측이 항소.
-1940년
2월11일, 가야마 미츠로로 창씨개명. 같은 날, 제1회 조선예술상 수상.
7월 <<세조대왕>>간행, 8월 동우회 사건으로 전원 유죄 판결을 받고 上告. 이달부터 당국에 의해 조선어 신문이 폐간된다.
-1941년
11월 17일. 동우회 사건 최종심에서 전원무죄 판결. 12월 8일, 태평양 전쟁 발발.
-1942년
3월, <<원효대사>>연재. 11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 참가
-1943년
11월, 일본 유학생에게 학병지원 권유하기 위해 도쿄행
-1944년
11월 난징에서 열린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
-1945년
3월 사릉에 소개. 8월 15일 사릉에서 해방을 맞고 그대로 사릉에 머문다.
-1946년
9월, 봉선사로 거처를 옮기고, 광동중학에서 영어와 작문을 가르친다. 이 무렵 다시 붓을 든다.
-1947년
9월, 12월 <나. 소년편> 간행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10월 <나. 스무살 고개>, 11월 <나의 고백>간행
-1949년
2월,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수감된다. 3월 병으로 보석되고 8월에 불기소된다.
-1950년
한국전쟁. 7월, 북한군에 연행되어 평양으로 강제 이송된다. 그 후의 소식은 불명
-1991년
미국에 거주하는 삼남 이영근 씨가 북한에 가서 부친 묘소 참배. 1950년 10월 25일 결핵으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2009년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친일반민조특별법)에 의해 친일반민족 행위자 301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규정된다.
<1> 유년시절
(1)성장과정
그는 조선 건국 만 5백년이 되던 해 태어났고 18세 되던 해에 일본이 한국을 병합해 왕조의 명맥이 끊겼다. 이광수는 항상 민족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에 중첩시키며 살았다.
부친이 낮잠을 잘 때 노승이 안경을 주는 꿈을 꾸었다고 해서 보경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가 태어난 정주는 벽촌이었지만 1905년 한성과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이 완공되자 가까이에 고읍역이 생겼다.
이광수는 왕조는 물론이고 집안도 운이 다할 무렵 태어났다. 아버지는 생활 무능력자였다.
여덟 살 때 옮겨간 황폐한 집은 가족이 함께 산 마지막 장소였다. 끼니를 잇기 어려운 나날을 보내다가 콜레라로 부모가 급작스럽게 죽음을 맞았다. 다섯 살, 두 살된 누이와 남겨진 열 살의 이광수는 친척집을 전전했다. 눈칫밥.
둘째 누이는 민며느리로, 막내누이는 피골이 상접하여 죽었다.
(2)전통문화의 세계
이광수는 다섯 살 때 한글을 익히고 눈이 나쁜 조모에게 이야기책을 읽고 상을 받았다. 한문은 서당에서 배웠으나 집안이 몰락한 뒤 독학했다. <<고문진보>>, <<시전>>를 보고, 동학가사를 암송했다.
이광수와 재당숙인 이학수는 독립운동을 하고 훗날 출가해 운허대사라는 이름 높은 승려가 된다. 그는 해방무렵 봉선사 주지로 이광수에게 거처를 제공했다. 이학수의 세 누이는 이광수를 오라비처럼 사모했다. 이광수가 그녀들을 위해 지는 창가가 그의 첫 작품이었다.
(3)동학과의 만남.
1902년 영일동맹.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 격화.
이광수는 양국이 충돌하기 직전 동학을 만난다. 동학은 경주의 몰락한 양반 최제우가 1860년 창시한 조선의 독자적인 종교다. 고아가 된 이광수는 성격이 비굴해지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된 게 가장 슬펐다고한다. 열한 살 때 친척집에 가던 중, 골짜기 양지에 이를 잡다가 승이달이란 동하교 교도를 만난다. 그는 1000면의 교인을 거느린 대접주였다. 그는 이광수에게 문명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이 무렵 동학의 교주 손병희는 일본에 있었고, 수제자인 이용구가 국내 10만 교인을 통솔하고 있었다.
3대 교주 손병희는 문명개화에 눈을 뜨고 교세 재건을 위해 일본과 결탁하여 친러파 정권을 쓰러뜨릴 방침을 세웠다. 교인을 동원해 일본군의 철도 부설 공사에 협력했다. 이용구는 함경도와 평안도 북부에 동학을 퍼뜨렸다.
이광수는 동학의 교리를 배운 뒤, 전령 일을 맡게 된다. 세상을 위해 일한다는 숭고한 목적이 그의 자존심의 회복에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1904년 러일전쟁이 시작되고 이용구는 진보회를 조직하고 교인들은 개화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검은 옷을 입고 상투를 잘랐다. 미혼인 이광수는 긴 머리를 세 갈래로 땋아 늘어뜨리고 부모의 3년상 중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흰 댕기를 매고 있었다.
이용구는 송병준의 친일단체 일진회와 진보회를 합쳐 '합동일진회'를 조직하고 일본과 긴밀히 협동해나갔다.
<'삼전론'의 제자>
이광수는 한성에 간다. 그는 손병희의 문명개화론 '삼전론'을 새긴다.
삼전론에 의하면, 지금 세계는 우승열패, 약육강식, 즉 잘난 놈은 이기고 못난 놈은 져서 약한 놈의 살을 강한 놈이 먹는 생존경쟁의 시대다. 그들과 싸우는 세가지 방법은, 인전(사람 싸움), 언전(말의 싸움), 재전(재물의 싸움)이다. 재물을 많게 하는 방법은 농상공업에 힘쓰는 것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이익이 많은 것은 철도, 화륜선, 양잠이다.
하지만 손병희가 말한 건 인전이 아니라, '도(道)전' 재전은 식산흥업, 언전은 외교상 불이익을 입지 않도록 재주가 뛰어난 청년을 유학시켜 외국의 언어, 물정, 법률에 정통케 하라는 주장.
동학이 이광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야심'
<2>일본유학(1905~1910)
일본 유학.
일본 유학생의 계보
1. 최초의 유학생은 1881년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던 길에 잔류하여 게이오의숙에서 공부한 유길준., 유정수, 나카무라 마사나오(도진샤의 창설자이자 흥아회 회원, 후쿠자와 유키치 등과 함께 메이로쿠샤 설립. 새뮤얼 스마일즈의 <<자조론>>을 <<서국입지편>>으로 번역 출간) 이 운영하는 도진샤에서 공부한 윤치호 세 사람이다. 그 후 개화파는 게이오의숙과 계약을 맺고 100여 명의 유학생 파견. 갑신정변 실패로 중단
2. 10년 후 개화파 정권이 유학생 파견을 결정. 113명이 게이오의숙에 파견. 아관파천으로 중단. 이 시기 유학생은 안국선, 이인직, 석진형(<<몽조>>)한국 문학사에서 신소설.
3. 러일전쟁. 1904년 양반자제들이 황실특파유학생 자격으로 일본으로. 도쿄부립 1중학교.
이광수가 도쿄에 간 1905년 여름에는 황실특파유학생을 비롯하여 400명 이상의 한국인. 사비 유학생이 중심. 일본 유학경험과 일본어 능력이 출세에 유리한 조건이 되었기 때문.
(같은 시기에 중국, 인도나 베트남에서도 일본 유학)
*불쾌한 몇몇 사건들
아시아 국가 멸시하는 풍조 확산
-1903년 오사카 개최 권업박람회 인류관 사건. 어느 민간업자가 조선, 중국, 아이누, 대만, 류큐, 인도, 자바 사람들을 인류관에 전시. 중국 유학생 분노.
-1905년 말 도쿄부립 제1중학 교장이 <<호치신문>>과 인터뷰하며 한국에 대해 모멸적인 언사. 동맹휴학. 주모자 퇴학
-1906년 혼고 단고자카 국화축제.
조선왕이 도쿠가와 장군에서 절하는 국화인형 장식을 한국인 학생이 망가뜨려 경찰 연행.
-1907년 우에노 권업박람회,. 수정관 사건. 조선의 매춘부 구경거리.
-1907년 와세대대학생들이 대한제국 황실 모독. 모의국회에서 한국 황실을 일본 화족으로 대우한다는 의제. 한국학생들 집단 귀국. 주모자는 최남선. 귀국하여 1908년 신문관을 세우고 한국 최초의 종합잡지 >>소년>>창간.
*거세지는 아시아 멸시
러일전쟁 승리, 보상금 없음. 상실감.
타자를 업신여김으로써 자신을 확립했다는 안이한 생각. 그것이 아시아 멸시로.
홍명희가 우수한 성적을 받자 교사가 본인을 앞에 세우고 "조선인에게 지는 따위는 일본 남아의 수치"라며 학생들을 꾸짖는 일화.
*어학학교 '도카이 의숙' 입학
이용구와 손병희가 일본의 한국 병합 촉구하는 성명서 밢표.
이 무렵 손병희는 변성명하고 아자부의 가젠보초의 일본인 집에서 살고 있었다.
이용구는 손병희 쪽에 사람을 보내 '합방'이란 나라의 독립을 유지한 채 한 사람의 군주를 섬기는 것, 또는 외교권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라 설명. 손병희는 거부. '천도교' 개칭. 그 후 일진회와 손을 끊고 이용구를 추방하여 교단이 분열. 유학생에게 영향을 미침.
보호조약을 체결. 이광수를 비롯한 유학생들은 고우지마치의 한국공사관에 모여 '일본이 우리를 속였다"며 울었다. 외교권을 잃은 대한제국에는 '외부'가 없어 한국공사관이 철폐되고, 그 자리에 '학부' 소속 유학생감독부가 들어섰다.
*다이세이 중학 입학과 홍명희와의 사귐.
1906년 입학.
홍명희와 대중목욕탕에서 처음 만남. 증조부가 이조판서, 조부가 참판을 지낸 명문 양반가의 장남이 평안도 벽촌의 고아와 친구가 되는 건 상상할 수도 없던 일. 이국의 목욕탕에서 그들이 만난 건 이 시대의 한 면모.
*귀국과 단지사건
동학교단에서 학비 끊김. 1907년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유학생들은 일제히 새끼 손가락 한 마디를 잘라 혈서를 썼다. 결국 대한제국 황실이 학비 지급 결정.
*메이지학원 편입-문학소년의 길로.
학적부 주소란에 혼고구 마루야마 후쿠야마초 22 다나카 댁.
마루야마 후쿠야마초는 벼랑 아랫길을 끼고 늘어선 길고 좁다란 마을. (히구치 이치요의 집이 있던 마을)
벼랑 아래쪽엔 가난한 사람이 사는 위험한 지역.
*메이지 학원 보통학부에서 학창 생활
메이지 학원은 헵번식 로마자 표기로 유명한 미국인 선교사 제임스 커티스 헵번이 창시한 기독교 학교.
기숙사 비는 한 달에 1원 50전, 여기에 식비 5원, 학비 2원 50전을 더하면 한달 최저 경비는 8원. 매월 20원을 학비로 지급받았던 이광수는 책을 사거나 이따금 좋아하는 덴뿌라 소바를 사먹는 여유로운 생활. 문학서를 탐독하게 된 뒤, 홀로 지내기 위해 하숙집으로 옮겼지만, 졸업 무렵에는 유학생들과 함께 집 한 채를 빌려 공동생활을 했다.
시로가네 캠퍼스에는 1회 졸업생인 시마자키 도손의 자전소설 <버찌가 익을 무렵>에 등장하는 서양관이 서 있었다. 이광수는 여기서 난생처음 성경을 접하고 영어를 배운다.
*기노시타 나오에, 톨스토이, 바이런
문학에 눈을 뜬다. 유학생감독부에 학비를 받으러 갔다가 <불기둥>이란 책을 사서 집으로 돌아와 그날 밤에 통독한다. 불기둥은 기독교 사회주의자이자 비전론자 주인공, 그를 연모하는 아름다운 여인,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는 계모, 주인공의 연인을 짝사랑하는 악덕 군인이 등장하는 기노시카 나오에의 다소 통속적인 반전 소설이다. 그 후에도 기노시타의 작품에 열중했던 이광수는 신경과민이 되어 밤중에 돌아다니거나 히스테릭하게 울곤 해서 주위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괴짜 야마사키 도사오가 다이세이 중학에 전학. 톨스토이의 <나의 종교>를 권해줌. 이광수는 감동받아, 교회에 나가지 않고 홀로 기독교 실천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매일 밤 몰래 숲에서 기도를 올리는가 하면 남몰래 선행을 실천하는 청교도적 소년이 되었다.
홍명희가 권한 바이런의 시가 정신을 흔든다.
*기무라 다카타로의 <<바이런 문학계의 대마왕>(1902)
낭만주의 시대로 불린 1890년 후반부터 1900년 중반까지 바이런은 인기가 높았다. 바이런 하이네 열기.
바이런을 통해 이광수는 옹색하고 청교도적인 인생관을 무너뜨리고 자아를 각성시켜 자신의 모습과 욕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문학의 원점을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기무라의 바이런 평전은 당시 일본문학의 근저에 흐르던 우승열패 사상을 고취한 것이기도 했다.
*제국주의시대의 통념.
해적주의 대 악마주의.
해적은 넓은 바다에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하는 불기의 정신. 악마주의란 타락천사 루시퍼의 반역정신.
기무라 다카타로는 이 이원론의 세계를 생존경쟁과 결부시킨다. '강대한 의지'를 가진 자에게 지배되는 약자를 열등한 자로 규정. 기무라는 '강대한 의지'의 정체를 '욕망'이라고 하였다.
일본이 '폭군'인 제국으로 변모하려던 때, 이광수는 문학에 눈을 떴던 것이다.
*루쉰과 이광수, 서로 다른 영향.
루쉰도 바이런 영향. 그러나 강대한 의지를 강자가 되어 약자를 지배하기 위한 것이라 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도태될 약자의 운명을 거부하는 인간의 존엄으로 간주했다.
<초기 창작-일본어와 조선어의 구사>
번역에서 시작.
<혈루-희랍인 스팔타쿠스의 연설> 투고.
일본어 단편 <사랑인가>, 조선어 단편 <무정> 연재.
졸업하고 18세이 오산학교로
<3> 교사생활의 좌절에서 대륙방랑으로(1910~1915)
<오산학교-윗연배 뿐안 학생들>
*이승훈과 안창호
조선 북부의 평안도와 황해도를 '서북지방'이라고 한다. 이들은 중앙으로 진출하지 못했기에 대륙으로 향하고, 중국과 교역하는 상인을 배출했으며 새로운 것에 관용적. 기독교 사립학교가 많이 들어서 있었다.
돈으로 양반 신분을 산 거상 이승훈은 안창호의 연설에 감동. 정주에 오산학교 설립.
안창호는 독립협회 명연설가. 독립운동. 미국 유학. 귀국한 뒤 '신민회' 조직. 실력양성론, 자강론(준비론)
안창호는 평양에 대성학교 설립.
*이광수 오산학교 부임.
생각과 다른. 애국지사는 수가 적었고, 그들을 에워싸고있는 것은 신문과는 인연이 먼 수많은 민중이었다. 민중은 사립학교의 교원보다 금실로 꼰 끈을 달고 허리에 서양 칼을 찬 헌병보조원을 더 존경했다.
*시로가네의 세계와 오산의 세계
이광수의 아내 백혜순, 죽음을 앞둔 부친의 친구가 딸을 부탁하자 일시적인 격정에 의해 결혼. 식을 올린 이튿날 아침부터 후회 시작.
도쿄에서 머릿속에 잔뜩 집어 넣은 생각은 4첩반의 공중누각으로 여겨지고 방황.
<한국병합의 충격>
*힘에 대한 희구
이광수는 논설에서 조선의 부모세대는 지식도 힘도 없어 자녀 세대를 이끌어줄 수 없기 때문에 청년들이 단체를 만들어 자기 수양을 해야한다고 언급.
고읍 역 대합실 벽보에서 대한제국의 황제가 신민과 통치권을 일본제국의 천황에게 양도한다는 조서.
"왜? 대황제가 이 나라의 주인이냐? 그가 무엇이길래? . 이 나라와 이 백성을 남의 나라에 줄 권리가 있느냐?" 이런 생각도 났으나 그것은 '힘'이 있고야 할 말이다.
*헌신에서 갈등으로
고된 노동, 아내와 갈등.
민족을 위해 희생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오산의 세계'라면 개인의 욕망을 긍정하는 것이 '시로가네의 세계'
이광수는 톨스토이와 바이런을 인정하지 않는 학교를 떠나기로 한다.
1913년 11월 대륙방랑의 길에 올랐다.
<대륙방랑의 길-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 치타>
상하이에서 서양과 조우한 뒤, 서양이 동양을 식민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봄.
홍명희와 만남. 조소앙은 새로운 종교를 일으킨다고 코란을 읽고 문일평은 중얼거리며 오락가락.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으로. 1911년 시 당국이 조선인들을 교외에 몰아넣고 집단 거류지를 조성해 이곳 신한촌에 모여 살게 했던 것. 1937년 그들은 소련의 스탈린에 의해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
이용익의 손자 이용호를 만남, 이동녕, 이동휘, 홍범도 만남.
중동철도(동청철도)를 타고 무링으로 향함. 독립운동가 이갑을 만남.
대한인국회의 시베리아 지부가 있는 지타로 감.
조선으로 돌아가지만 마음은 이미 떠남; 경성으로 가서 최남선이 만드는 잡지 <<청춘>>의 편집을을 도움. 송진우를 만나고 김성수에게 학비를 조달받음. 다시 도쿄로
<와세대대학 입학-반일사상과 특고의 감시>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 자연주의를 대신해 시라카바파가 문단의 중심. 자신의 자유의지를 살리는 것이 그대로 인류의 의사표현이라 하여 개인의 천부적인 재능을 펼칠 것을 주장하는 시라카바파는 이광수에게 큰 영향.
와세다 대학 입학.
문학을 하겠다는 조선 유학생 증가. 문학동인지 <<창조>>를 창가낳고 근대적인 단편소설을 쓴 김동인, 주요한, 염상섭, 김명순, 나혜석 등.
유학생을 감시하는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 산하의 특별 고등경찰, '특고' 유학생 485명. '배일사상'을 가진 조선인은 감시등급에 따라 갑호, 을호로 구분. 갑호는 엄격히 감시. 갑호는 83명인데 그 중에 이광수도 있었음. 특고는 1916년 <<학지광>>편집 회의에서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까지 파악. 내부에 밀고자가 있었음.
<4> 무정의 시대
1916년 와세다 대학교 고등예과를 마치고 정주에 들른 이광수는 가을에 도쿄로 돌아가는 길에 <<매일신보>>기자였던 친구의 권유로 경성일보사 사장 아베 이츠이에의 집을 방문.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설립한 경성일보사는 일본어 신문 <<경성일보>>와 조선어 신문 <<매일신보>>발행. 3.1운동 이후 1920년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되기 전까지는 <<매일신보>>가 조선에서 유일한 매체.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경성일보사의 경영을 고쿠민 신문사의 도쿠토미 소호에게 일임. 경성에 상주할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의 심복을 사장에 앉혔는데, 마지막 5년 간은 아베 미츠이에가 사장을 ㅣ냈다.
당시 <<매일신보>>는 독자를 끌어들이는데 애쓰고 있었다. 구로이와 루이코가 번안한 서양소설과 기쿠치 유호가 쓴가정 소설(<<쌍옥루>>)를 번안해 연재, 그런데 오자키 고요의 <<금색야차>>를 번안한 <<장한몽>>등은 큰 인기를 끌었지만 소설은 부녀자나 아이들이 읽는 것이라는 선입견과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라는 반감으로 지식인 독자 확보에 어려움.
이광수는 <<매일신보>>에 글을 연재하기로 함. 지면이 없고, 계몽을 위해 자신의 글을 널리 읽혀야 한다는 판단, 더불어 청년다운 허영심과 야망.
매일신보에 글을 연재하면서 '물결 위에 떠 있는 고독한 배와 같은 처지'를 뜻하는 '고주'라는 필명을 '춘원'으로 바꿈.
매일신보에 논설 게재. 동경 소식을 전하거나 결혼제도와 가정의 개선을 호소하는 <조선 가정의 개혁>, <조혼의 악습>, <혼인론>, 하구의 틀을 빌려 농촌개량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한 <농촌개발>, 조선의 교육방식을 논한 <교육가 제씨에게>, 그리고 본격적인 근대문학론 <문학이라 하오> 발표.
이 시기의 이광수는 생존경쟁론에 기반해 유교를 공격했다. <교육가 제씨에게>>에서 조선이 오늘날처럼 쇠퇴한 것은 이용후생을 등한시하고 공리공론만 가르친 유교 탓이라고 성토. 대욕망을 가진 청년을 길러내야 한다는 '욕망의 교육' 주장.
<<무정>>은 1917년 1월 1일부터 6월 14일까지 126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연재.
이광수는 소설이란 "어느 시대 어느 방면의 충실한 기록" 그는 무정에서 1916년 여름의 조선을 여실히 그려냈다. <<무정>>은 과도기의 조선을 그린 '시대의 그림'이었다.
독자가 지지하는 건 신여성이 아니라 기생 영채. 작가의 과거를 영채에게 의탁한 소설.
형식 마음의 움직임. '욕망'을 그려냄. 작가는 문학을 통해 생을 향한 욕망을 독자에게 심어주려고 했던 것이다.
<<무정>>을 연재하다 허영숙을 만났고 1921년 그녀와 재혼. 도쿄에서 허영숙은 결핵에 걸린 이광수를 돌봐주었음. 허영숙의 자존심은 처자가 있는 남성에 대한 연애 감정을 부정했고, 이광수는 젊은 여성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이는 <<무정>>후반부에서 형식과 선형의 심리적 갈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결말에서 인물들은 희망에 찬 근황을 말하고, 과거 조선의 '무정'한 세계를 떠나보내자고 부루짖는다. 개인의 행복과 민족의 행복을 동시에 추구하고자 한 이광수의 낙천주의와 적극성은 작품의 결말을 밝게 비추고 어두운 시대의 독자에게 희망을 주었던 것이다.
이광수는 기행문을 쓰고, 허영숙과 베이징으로 사랑의 도피를 떠난다.
이광수는 도쿄에서 조선청년독립당을 결성하고, 손수 <독립선언서>를 기초했다.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간다 오가와마치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집회. 유학생 300명이 모인 단상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지만 이광수는 이미 상하이로 간 뒤였다. 열흘 뒤 이광수는 학비 미납으로 와세다대학에서 제적당한다.
상하이에 도착한 이광수는 신한청년단 활동에 가담한다. 신한청년당의 소환에 응해 해외에 있던 독립운동지도자들이 상하이에 모였다. 4월 11일 신한청년단이 이날을 위해 준비해둔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의 서양 주택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 선언되었다. 국무총리는 이승만, 내무총장에 안창호가 부재 중에 선출되었다. 이광수는 임시 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창간 준비에 들어갔다.
이광수는 안창호를 도와 <독립운동방략>을 작성했고, 독립운동사를 정리했다. 안창호는 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이란 단체를 설립했다. '무실역행'을 중심으로 각 개인이 덕을 기르고 전문지식을 습득해 자립하는 것을 지향하는 수양단체. 김산은 안창호가 자유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지도자로서 공산주의 이론과 전략에도 관심을 갖고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인 역할을 인정한 반면, 이광수는 프롤레타리아 세력의 확장에 반대하는 비장한 희생적 정신과 가부장적 정신으로 충만한 톨스토이주의자라고 회상하고 있다.
이광수는 귀국. 아베와 사이토 라인을 이용해 조선에서 합법적으로 흥사단 활동을 벌이겠다고 결심. 세간에서 변절자로 취급받는 건 각오한 일.
<5>수양동우회와 두 개의 신문사(1920~1930)
<민족개조론>에 대한 비판
1921년 경성에 돌아온 이광수는 허영숙과 결혼하고 서대문 그녀의 집에 칩거.
1922년 천도교단이 운영하던 잡지 <<개벽>>에 <민족개조론> 발표.
수양동맹회 발족.
동아일보사 취직.
1924년 1월 <<동아일보사>>의 신년사설로 <민족적 경륜>발표. 식민지 지배를 용인하는 개량주의라는 맹공격. 동아일보 불매운동. 이광수 사직.
이 사건을 계기로 민족주의자들은 합법적인 운동을 통해 자치를 지향하는 민족주의 우파(타협파)와 식민지 지배를 절대 용인하지 않는 민족주의 좌파(비타협파)로 나뉘었다. 민족주의 좌파는 사회주의 세력과 연합해 1927년 민족통일전선 '신간회' 창립. 홍명희가 주도적인 역할
1920년대 후반 조선에서는 사회주의 세력이 대두해 대중운동이 활발해졌다. 그 물결은 1927년 신간회 창립, 1929년 원산의 동맹파업, 같은 해 전라도 광주에서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 간의 충돌이 발단이 된 광주 학생운동으로 절정에 달했다.
1920년대 후반 이광수는 계속 큰 병을 앓고 있었다.
1924년 연재한 <<재생>>의 인기. 1926년 <<마의태자>> 후백제의 멸망을 그린 역사소설.
이광수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1928년 <<단종애사>> (이때에 <조선일보>에 홍명희의 <<임꺽정>>이 연재되기 시작)
신간회 1931년 총회를 열고 해산.
1926년 이광수를 부르주아 문사라고 칭하며 타도 대상으로 삼았던 카프도 1935년 해산.
이와 대조적으로 동우회의 활동은 1931년부터 활발해짐. 동우회는 <<동아일보>>가 학생들에게 대대적으로 호소하며 시작한 '브나로드 운동(인민 속으로)'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농촌계몽운동에 나선 것이다.
10만 명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성과.
이광수의 <<흙>>이 1932년 동아일보에 연재. 다른 하나는 심훈의 <<상록수>>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현상모집에 당선되어 연재.
<<흙>>의 연재가 시작된 1932년 윤봉길의 폭탄투척 사건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안창호 체포. 징역 4년. 동우회의 실질적 지도자의 체포는 회원에게 충격.
이광수는 동아일보를 사임하고 경쟁지인 조선일보 부사장에 취임. 방응모 사장. 평안도 출신의 아성.
첫 아들 봉근의 죽음으로 절망. 민족운동의 좌절로 절망. '조선이 이대로 식민지로 남게 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불길한 예감이 현실감은 갖기 시작.
출가 결심하고 금강산의 장안사를 찾아감. 허영숙이 다섯 살된 아들 영근을 데리고 가서 만류.
북한산 기슭의 자하문 밖 홍지동에 집을 짓는다. <<법화경>>을 한글로 번역하고 독서와 명상.
고문이라는 지위로 조선일보사에 돌아간 그는 연재를 중단했던 <<그 여자의 일생>>을 끝내고 <<이차돈의 사>>, 근대소설 <<애욕의 피안>>, 자서적 소설 <그의 자서전> 연재.
허영숙은 산원을 차리기로 결심. 모윤숙이 이광수를 연모(<<유정>>의 모델이 됨)허영숙은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남편에게 자립하겠다고 결심하고 산원을 차린다는 목표.
이광수는 <<가이조>> 사장 야마모토 사네히코와 만남. 이광수는 <조선의 문학>을 가이조에 발표. 1936년 <<가이조>>에 단편 <만영감의 죽음> 발표. 일본어 소설.
1936년 미나미 지로가 조선총독에 부임하고 황민화 정책 추진.
이광수는 서구문명에 대한 반발이 심화. <공화국의 멸망>에서 조선의 전통적인 사회가 '외부'에서 주입된 자유와 권리사상에 의해 오염된 것 한탄. 생존경쟁에 대한 증오와 그 발신지에 대한 서양에 대한 반발.
1932년 <<동광>>에 발표한 논설 <옛 조선인의 근본도덕-전체주의와 구실주의 인생관>에서는 조선의 촌락공동체 정신이었던 '집단주의'가 영미식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에 잠식돼 절멸 위기라는 걸 지적. '전체주의 칭송'
<6> 체포, 사상 전향의 표명-동우회 사건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한 달 전인 1937년 6월 7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수양동우회 회원 검거. 이광수도 체포. 모두 182명. 조선에 남은 민족주의자를 없애려는 의도.
이광수는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된 후 병감에 있다가 경성의전병원에 입원.
이때 쓴 시에는 민족운동을 모래성, 조선총독부를 영원한 바다에 비유함. 이광수의 체념.
안창호는 사망. 20대부터 스승이자 의지처였던 안창호의 죽음은 타격. 동우회 회원들은 가정과 직장에서 성실하고 근면하게 사는 것이 민족의 독립으로 이어진다는 온건한 사고를 지닌 중산층이었다. 그들이 직장을 뺏기고 생활이 파괴될 위험에 처했던 것이다.
<<무명>>과 <<사랑>>
이광수는 병상에서 중편 <무명>과 장편 <<사랑>>을 구술집필.
불교 용어로 번뇌를 일으키는 미망이라는 뜻을 가진 <무명>은 일종의 전향소설. 이 세상의 가장 밑바닥이라는 병감에서 매일 작은 욕망과 싸우면서 죽어가는 죄수들. 불교적 체념이 배어들어간 작품.
<<사랑>>은 아내가 있는 의사 안빈을 스승으로 우러러 지고한 사랑을 추구하는 여성 순옥의 이야기.
허영숙 산원 건립을 위해 집을 팜.
이광수를 비롯한 42명의 동우회 호원 기소. 불기소 처분을 받은 18명은 전향성명서 발표. 기소된 회원은 <합의>를 발표. "일본은 팔굉일우의 이상을 통해 우선 아시아 각 민족을 구미 제국주의와 공산주의의 질곡에서 벗어나게 하고, 동양 본래의 정신문화 위에 공존공영의 신세계를 건설하는 데 일본 제국의 국가적 이상이자 목적을 두었음을 이해했고, 동시에 조선민족도 결코 종속자나 추종자로서가 아니라 이본 국민의 중요한 구성분자로서 함께 이 위업을 분담하고 또 이로부터 다가올 행복과 영예를 누릴 자임을 국가로부터 허락받고 또 요구받았다는 것을 우리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미나미 총독의 정책에 협력. 조선인에게 병역의 의무를 지운 2월의 육군지원병제도와 조선의 교육제도를 일본과 동일하게 개정한 3월의 조선교육령/
재판소에 합의를 제출하고 강당에서 전향자를 중심으로 '시국유지원탁회의'가 열렸다.
이광수는 "조선이라는 고집을 버리고 일본인이 되어 일본정신을 가질 것을 결심"했다고 말한다.
내선일체는 조선의 고유성을 유지하면서 일본인이 되는 것. 한국사 연구자 미야타 세츠코는 미나미 총독이 내건 내선일체가 '아메바 같은 무정형의 것'이라고 표현. 해결 불가능한 문제에 뚜껑을 덮은 채, '평등'을 내세우고 조선인의 자발적인 황민화를 이끌어내고자 한 슬로건.
이광수는 ‘내선일체’의 논리를 역이용함으로써 ‘차별에서의 탈출’이라는 실리를 얻고자 한 것.
대일협력을 위한 한 걸음 '황군위문작가' , 조선문인협회 결성.
1940년 가야마 미츠로로 창씨 개명 <진정 마음이 다가서야말로> 일본인과 조선인이 평등하게 연애하려면 일본인 쪽에 그만한 결함이 있어야 한다는 설정.
1940년 8월 동아일보, 조선일보 폐간.
조선인 2,150만 명 중 일본어 해독자는 5퍼센트.
이광수는 일본인 독자를 향해 애정을 가지고 조선인을 대해달라고 호소.
<반도 민중의 애국운동>에서 천황에게 귀일해 멸사봉공하는 '진정보편' 전향이 필요하다고 주장.
"혈통은 문제가 안 된다. 정신까지 일본정신이 되려면 조선 민중은 양자로서 일본인이 될 수 있다."
"조선인이 진짜 일본인이 되려면 우선 종래의 조선적 마음을 뿌리째 뽑아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대동아 전쟁에서 역할.
일본문학보국회의 대동아문학자대회. 이광수 참여.
1943년 10월 일본정부는 만 20세 이상 학생들의 징병유예를 칙령으로 정지하고 학생들을 전쟁터로. 학도출진. 이광수는 일본유학생 학병지원에 나선다.
일본어로 친일소설 집필. (1943~1944)
이광수는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우수하다. 따라서 조선인이 선거권을 갖고 국정에 참여한다면 조만간 문부대신도 나오고, 재무대신도 나올 것이다. 그러면 일본인은 이러다 조선인이 일본을 장악할 날이 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합방을 취소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못 이기는 체하고 조선을 되찾아 독립한다. 나는 앞일을 이렇게 내다보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일본인이 조선인을 믿도록 보이기 위해 그런 글을 쓴 거라오. ‘춘원의 망상’
“이마를 바늘로 찌르면 일본피가 나올 만큼 일본인이 되라”
<7>해방 후 -친일에 대한 비난, 북한국의 연행
자전적 소설 <<나>> 집필.
반민특위. 이광수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습니다."
한국전쟁 때 북한으로 끌려가, 자강도 강계에서 노동하던 중 1950년 10월 25일 폐결핵으로 사망.
[출처] 191. 이광수는 어쩌다?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작성자 툭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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