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25

대자보 80년대와 90년대, 단절과 연속의 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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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자보

 80년대와 90년대, 단절과 연속의 변주
 지나간 사실들은 인간들의 기억에 어떻게 자신을 각인시키는가?

자유기고가 김철수 

 

   80년대는 아직 화석화되기엔 이른 역사다. 누구나가 80년대가 몰고 온 전사회적 변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일정한 부채를 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역으로 80년대는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이미지로 팔리던가, 애잔한 추억의 과거, 혹은 영광찬 투쟁의 역사로 기억되던 간에 80년대 그 자체가 몽상적 현실이 아니듯, 80년대는 더 이상 노스탤지어의 대상이 되어선 안된다.

                                  
 1. 들어가며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은 80년대를 여는 장엄한 레퀴엠이었다. 그로부터 80년대의 역사는 흘러나왔다. 이 역사의 물결 속에는 수많은 인간집단들의 슬픔과 고뇌, 처절한 자기부정과 확신의 교차, 좌절과 희망의 충돌이 뒤섞여 있다. 이것을 경험해보지도 못한 사람이 어찌 80년대를 가벼이 논할 수 있으랴......
  

 필자의 한계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80년대의 운동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연원해 있다고 판단되는 현실의 학생운동일지언정, 그것이 전적으로 80년대인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섣부른 판단의 오류를 낳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물론 혹자는 그러하기에 오히려 객관적 판단의 이점이 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현실에 처해 있는 '나'의 처지와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객관이 가능하냐는 질문 앞에 논란의 여지가 충분히 있는 문제다.
 

 우리의 기억 속에 80년대는 어떻게 남아있는가?
 우리의 현실에서 80년대는 무엇으로 현존하는가?
 그래서 80년대는 우리의 미래에서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

 2. 단절로부터의 시작, 80년대
 

 80년대는 70년대와의 단절로부터 시작됐다.
 80년 5월의 광주항쟁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이전의 시대와 이후의 시대를 갈라쳤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마도 서슴없이 80년대를 혁명의 연대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최소한 지금 학생운동 주체들에게 80년대는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무수한 사회변혁노선들이 명멸하였고, 수많은 조직들이 '전위'를 지향하며 출현했다 사라져 갔다. 80년대 말의 치열했던 사회성격 논쟁을 어렴풋이라도 아는 사람에게 이 시대는 혁명을 위한 '이념의 시대'였다고도 기억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지점들이 70년대와는 다른 80년대의 특징인 것이다.
  

 80년대 학생운동은 이러한 80년대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전체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던졌던(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운동세력은 다름 아닌 학생운동이었으며, 그 파장은 단지 대중투쟁의 폭만이 아니라 이념과 문제제기라는 측면에서도 그랬다. 물론 당대의 학생운동이 80년대를 장식했던 모든 사상과 이론을 생산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수많은 사상과 이론들 중 오로지 학생운동과 결합된 것들만이 사회적 파장을 미칠 수 있었다.
 

 80년대에서 학생운동만이 당대의 사회변혁적 운동을 수행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노동운동에 있어서도, 농민운동에 있어서도 80년대는 비약적인 자기발전의 시대였다. 그러나 여전히 최대의 투쟁동원력과 상시적 정치투쟁역량에 있어서 학생운동은 여타의 부문을 압도했었다. 이것이 80년대에서 학생운동이 차지하는 역할을 비중있게 만든 시대적 조건이었다.
 

  이 80년대는 70년대와는 다른 토대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80년 5월 항쟁이라는 격렬한 통과의례를 의미한다. 80년 5월 항쟁은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정규군과 민간인이 총을 들고 대립한 사건이었다. 운동사적으로 이는 민중이 폭압에 맞선 최고형태의 투쟁방식을 채택했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6, 70년대의 학생운동을 역사적으로 일거에 소멸시키고 그 자리에 완전히 새로운 학생운동을 태동시킨 결정적 촉매가 됐다.
 

  6, 70년대까지의 학생운동에서 '민중' 개념은 여전히 '계몽주의적' 이었다. 투쟁의 주력이며, 주체로서 민중에 대한 적극적 사고보다는 여전히 동정의 대상이었던 것이 주류였다. 그러나 80년대 학생운동에서 민중은 '모든 것을 해결하는 전능의 신'으로서 격상되었다. 민중은 학생운동에게 구세주로서 인식되었으며, 민중과의 결합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된 것이다.
 

 6, 70년대의 학생운동은 주로 낭만적 민주주의 이념에 의해 주도되었다. 유신반대라는 기형적이고 전근대적인 국가체제에 대한 저항이념은 민주주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에 있어서 민주주의란 대체로 절차상에 있어서의 민주주의, 권위주의에 맞선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 80년대에 들어서도 학생운동의 대중적 이념은 반파쇼 민주주의였다. 그러나 80년대에 있어서 민주주의란 단지 낭만적이고 추상적 의미에 있어서의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민중개념의 적극적 포섭을 의미했다. 따라서 민주주의란 단지 절차상 민주성의 확대, 권위주의의 청산만을 의미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민중권력'을 의미했다. '민중권력'이라는 개념이 그 자체만으로는 여전히 추상적이긴 했지만, 거기엔 평등, 사회적 인권개념의 포섭이라는 보다 진일보한 민주주의 인식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후 학생운동에서 선거에 대한 입장문제가 중요한 정치쟁점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6, 70년대의 학생운동이 자생적 성격이 강한 대중투쟁이었다면, 80년대의 학생운동은 목적의식적인 조직운동으로서 대중투쟁의 성격을 띤다. 물론 6, 70년대에 학생운동 조직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지만 80년대는 그야말로 학생운동 조직이 학생운동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대였다. 이런 현상은 87년 6월 항쟁 이전 시기까지 학생대중투쟁을 지배했다. 각종 이념써클이 우후죽순처럼 성장해 왔으며, 매시기 투쟁 때마다 입장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해 왔다. 써클들을 아우르는 패밀리체계가 발달하고, 이들 패밀리들 간의 대립과 논쟁도 상당히 치열했었다.

 이러한 부정적 모습에도 불구하고 학생운동은 강력한 조직력을 갖춘 세력으로 80년대에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일례로 서울대 83학번의 경우 절반 이상이 각종 이념써클들로 조직됐었다. 80년대 학생운동의 조직적 발전은 86년과 87년을 거치면서 질적 상승을 이루게 된다. 각종 써클들과 거대 패밀리간의 이전투구식 대립에 대한 비판과 반성은 86년 전체 학생운동의 단결이라는 극적인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것의 조직적 표현이 이른바 혁명적 대중조직의 결성이었다. 김영환의 굴곡많은 인생만큼 유명한 서울대의 구국학생연맹, 고려대의 애국학생회, 연세대의 반미구국학생동맹 등은 이러한 형태로 조직들로서 학내의 거의 모든 학생운동가들을 포괄하는 학생운동조직으로 출현했다. 비록 공안당국의 검거로 모두들 단명하긴 했지만 써클적 대립을 극복하고 혁명적 대중조직을 건설하려는 노력은 학생운동의 조직적 발전상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또 다르게 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학생대중조직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대중의 폭발적인 투쟁을 기존의 투쟁체라는 틀로는 담아낼 수 없는 상황은 학생대중조직의 중요성을 극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다. 이전에는 학생운동조직의 외피로서만 사고되던 총학생회가 명실상부하게 학생대중의 대표조직으로 학생대중의 유일한 단결의 무기로 떠오른 것이다. 이렇게 80년대는 학생운동에 있어서 조직적 발전의 모든 성과와 교훈들을 생산해 냈다. 이것은 여전히 써클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6, 70년대 학생운동과의 중요한 차이들이다.
 

  80년대 학생운동은 6, 70년대 학생운동에서 보기 힘들었던 '전위적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 즉, 우연적이고 자연발생적인 운동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의식적으로 투쟁을 창조하려는 시도, 운동의 전국적 통일성에 대한 지속적인 추구, 전체 운동의 단일한 '지도'를 형성하려는 시도들이 그것이다. 이것은 대표적으로 학생운동의 전국적 연대기구 건설이라는 시도를 통해 표출되었다. 전학련, 전민학련, 애학투련 등의 조직들은 그러한 시도의 일단을 보여준다. '전위적 지향'은 학생운동가들 개인들에게 있어서의 삶의 지향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당시 학생운동가들을 특징짓는 엄격함, 철저함, 자기 희생성 등의 삶의 문화가 전형화되었으며, 서슴없이 공장과 농촌으로 자신의 존재를 이전시키는 풍토를 만들어 냈다. 물론 6, 70년대에도 그러한 일은 있어왔지만 80년대처럼 다수의 학생운동가들이 공장과 농촌으로 자신의 존재를 이전시킨 경우는 없다.
  

 80년대의 학생운동을 특징짓는 것 중 하나는 치열한 이념논쟁이다. 우리가 지금도 익히 알고 있는 NL/PD라는 개념들도 이 시대에 창출된 것들이다. 80년대는 학생운동에서 나름의 변혁사상과 노선을 확립하는 일련의 이념적 모색과 정립의 시대였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수많은 정파들이 명멸해 갔다. '정파'라는 개념은 80년대에 들어와서 유명해지게 된다. '정파'가 무엇이냐는 정의는 '정파'라는 말만큼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분파'를 의미할 수도 있으며 학생운동조직들의 존재방식을 의미하기도 하며, 학생운동의 현실태를 상징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여간 이 와중에서 NL과 CA라는 정파가 학생운동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부상하였으며 87년 대선과 88년을 거치면서 이는 다시 NL과 PD의 분별정립으로 정리된다. 이러한 정파들의 주의, 주장, 정책과 노선이 무엇이었냐는 이 글의 논점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생략한다. 중요한 것은 80년대 말 일간신문까지 흥미진진하게 서술했던 학생운동내의 이념논쟁이 일련의 부정적 효과를 낳기도 했지만 역으로 그만큼 '현실인식'에 치열했던 당시 학생운동의 '진지함'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현실인식에 대한 치열한 진지함은 80년대 학생운동을 특징짓는 것이다.
  

 그 밖에도 6, 70년대와 80년대 학생운동을 구별시키는 여러 요소들이 있을 것이다. 그중에는 분단과 통일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의 충격적인 전환도 들어있을 것이다. 반미문제의 전면적 부각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차이점이다. 또한 양심적 저항에서 혁명적 투쟁으로의 전화가 6, 70년대와 80년대를 가르는 중요한 계선이다. 80년대의 학생운동은 공공연히 '혁명'을 내걸었으며, 이는 곧 국가권력에 대한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그것을 재구성하겠다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80년대의 학생운동 명망가들이 제도권 정치에 적극적으로 진출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결코 아닐 것이다.
  

 80년 5월항쟁을 전후로한 학생운동의 단절은 오늘날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지금의 학생운동은 여전히 80년대의 자식들임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대의 스타들이 국가권력을 향해 '공공연히' 쇄도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3. 감수성으로서의 80년대
 

 자기 희생, 헌신, 엄격한 규율성, 책임성.
 어느날 극우파로 다시 나타난 강철 김영환이 과거 '품성론'을 들고 화려하게 등장하기 이전에도 학생운동가들에게 희생, 헌신, 책임감 등은 기본적 덕목이었다. 80년대를 돌아보는 숱한 회고담류 소설 속에서 우리는 그러한 전형적 학생운동가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민족문학계열 작가들의 학생운동 관련 소설에서 우리는 더욱 전형화된 주인공들을 접하게 된다. 소설에서 이러한 전형화가 가능한 이유는 실제 80년대의 학생운동이 그러했던지, 아니면 최소한 '당위적'이라도 그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80년대가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다면 당시의 이론들보다는 당시의 그러한 감수성들이 보다 오래 남을 것이다.  학생운동의 감수성이란 무엇인가?
  

 양심, 격정, 사랑, 분노, 절망, 분노, 희생 등등. 이 얼마나 극적인 요소들인가? 그러기에 한때 회고담류의 소설들이 인기를 끌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학생운동은 그 자체로 마치 영화같은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욱 극적이라 할 것이다. 그 안의 개개인들을 역사적으로 고찰한다면 그 극적인 성격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이런 것들이 추억이 된다면 그것은 더욱 아련한 추억이 될 것이며, 때론 슬프도록 아름다운, 혹은 서럽고 쓰라린 하지만 애잔하게 돌아볼 수 있는 추억이 될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80년대를 돌아보는 사회적 시각이 한없이 포용성있고, 아량있는 이유일런지도 모른다.
 

  80년대의 학생운동은 사회변혁뿐만 아니라 삶의 영역에서도 혁명적 변화를 낳았다. 엄격한 규율성, 무한한 책임성 등은 군부파쇼라는 막강한 적에 맞서는 일방이 취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조직적 선택 속에서 일반화되었다. 학생운동가들에게 있어서 엄격한 규율성과 무한한 책임성은 기본적인 삶과 활동의 방식이었다. 이것은 군대의 그것이 가지는 강제성으로 인한 것은 아니었다.

 학생운동가들에게 규율성과 책임성은 자기 선택의 문제이지 강제의 문제는 아니었다. 떠나고자 한다면 그 누가 총칼들로 말리겠는가? 총칼든 자들은 오히려 환영하지 않겠는가?  비판과 자기비판의 문화는 때로 그것이 동지공격의 수단이 되기도 했지만 원칙적으로 인간관계의 민주화에 대한 전반적 요구를 삶으로 내면화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누구도 비판과 자기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원칙은 권위주의적 정치현실 속에서 학생운동의 도덕적 우월성을 내면화시키는 핵심기제였다. 사생활을 공생활에 복종시키는 원칙은 학생운동의 무한한 헌신성과 자기 희생성으로 표현되었다. 학생운동가들에게 있어서 대의를 위해 소자아를 기각시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것은 사적 연계로 온 사회가 부정부패의 올무에 잡혀있는 현실에서 학생운동이 도덕적 우월성을 내면화시킬 수 있는 기제였다.
 

  80년대 학생운동이 대중의 전반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데는 당시의 시대적 현실뿐만 아니라 학생운동가들의 삶에서 보여주는 그러한 견결함 또한 주된 요인이었을 것이다. 물론 삶의 원칙들이 정작 개인의 삶과 집단의 문화 속에서 '원칙적'으로 구현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지향'과 이를 위한 노력의 모습만으로도 80년대엔 충분했다.
 

  80년대는 서사적 감수성이 높게 발양되던 시대였다. 조국과 민중을 위해 분노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시대였다. 오늘날 그것은 언뜻 자기 감정의 과잉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사실 모든 눈물이 자기 감정의 과잉에서 발로된 당연한 결과임에도)
  
 4. 노스탤지어의 현실
  

 90년대의 끝자락이었던 99년 우리는 80년대를 대표한다고 볼 수도 있는 두 사람의 극적인 변모를 목도했다. 주사파의 대부라는 김영환이 북한혁명론을 들고서 김정일정권 타도라는 센세이셔널한 구호와 함께 다시 등장했다. 그 한편엔 노동해방과 사회주의의 기치를 선명히 내걸었던 박노해가 화해와 인간사랑의 전도사로서 세상에 나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인간 또한 그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말이다.

 오늘날 80년대는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의 특수를 누리고 있다. 386세대라는 조어가 전사회적으로 유행하고 있으며, 정치권에서부터 시작해서 386세대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80년대는 이렇듯 새로운 세기의 전환이라는 주객관적 조건 속에서 자신의 승리를 소리높이 외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자신을 80년대의 정통계승자로 자부하는 일단의 학생운동세력이 여전히 다수파로서 존재하고 있는가하면, 80년대엔 애초 관심도 없는 젊은이들이 DDR로서 '혁명'을 대체하고 있다. 80년대를 휘감았던 대중적 혁명의 열기는 대학사회에서 찾아보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며, 집단보다는 '나'에 대한 호칭이 일반화되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렇듯 80년대는 10년의 세월을 격해서 자신의 승리를 노래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 노랫소리는 이러저러한 변주들로 인해 일그러져 있다. 80년대는 계속되고 있는 반면 역사 속에 화석화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총련으로 대변되는 학생운동은 여전히 80년대에 대중적으로 제기된 정치적 과제의 실현을 위해 투쟁하고 있으며, 국가보안법의 굴레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이것은 80년대가 의연히 오늘날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80년대가 가졌던 학생운동의 대중적 권위가 여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 또 다른 현실이다. 현 시기 학생운동이 '운동 대중화'를 절박한 과제로 제기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현실에 대한 대응일 것이다.

 우리는 80년대를 돌아보면서 80년대를 살아낸 학생운동가들을 분리해서 바라보기 힘들다. 최근 총선을 앞두고 학생운동 명망가 출신들이 대거 정치권에 입문한다고 한다. 이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긍정적으로 판단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과거 4.19세대나 6.3세대의 경우와 같이 지금의 386세대로 정치권의 부정적 현실에 물들어 갈 거라는 비관적 전망 또한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거 김영삼 정권 초기에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당시 민자당-신한국당에 들어간 재야, 학생운동 출신 정치인들이 결국 '별로' 채찍을 가하지 못했다는 경험도 이런 비관적 전망의 근거로 되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 극단적 판단으로 해명될 일은 별로 없듯이 오늘날 386세대의 정치입문도 가려 볼 필요성이 있다. 아마도 사람들은 정치입문을 할 386세대에게 거는 기대란 개혁과 민주주의, 진보의 확대에 거는 희망일 것이다. 80년대 이념의 세례 속에 성장하고, 치열한 투쟁 속에서 오늘날의 민주주의에 기여한 사람들에 대한 기대란 과거 4.19, 6.3세대에 거는 기대와는 또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80년대의 사상과 이론을 스스로 폐기했더라도 80년대의 감수성마저 폐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기대. 사실 감수성이란 쉽게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386세대의 정치권 진출은 사람들에게 일말의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80년대가 하나의 이미지 상품으로서 팔리는 것에는 경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나 자민련, 한나라당 등 노골적인 보수, 반개혁 정치세력과 손잡는 일련의 386세대들에 보이는 것은 상품화된 '이미지'밖에는 없다. 이런 비판에서 민주당 입당자들이 자유로운 것도 결코 아니다. 특히나 몇몇 사람들이 80년대를 독점하고 대표하는 현상은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그것은 일종의 소영웅주의에 다름 아니며, 학생운동마저 사회적 출세의 도구로 삼는 출세주의의 표현일 것이기 때문이다. 80년대가 몇몇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당시의 학생들, 국민대중에 의해 창출된 것이란 점을 항상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80년대는 아직 화석화되기엔 이른 역사다. 누구나가 80년대가 몰고 온 전사회적 변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일정한 부채를 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역으로 80년대는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이미지로 팔리던가, 애잔한 추억의 과거, 혹은 영광찬 투쟁의 역사로 기억되던 간에 80년대 그 자체가 몽상적 현실이 아니듯, 80년대는 더 이상 노스탤지어의 대상이 되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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