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 - 원흉과 원훈의 두 얼굴
이종각 (지은이)동아일보사201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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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원흉과 원훈의 두 얼굴을 지닌 문제적 인물, 이토 히로부미. 이 책은 베테랑 기자 출신으로 일본 전문가인 저자가 이토 히로부미에 관한 자료들을 망라하고 새로운 사실들을 조사 발굴해서 엮은 것이다. 이를 통해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이토 히로부미의 파란만장한 68년 생애를 냉정하게 재구성했다.
우리가 잘 몰랐던, 그리고 의식적으로 외면했던 이토 히로부미의 행적들을 살펴봄으로써, 일본은 어떻게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이루고 제국으로 나아갔으며, 한국은 암흑의 식민지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는지 그 역사의 이면을 짚어본다.
목차
프롤로그
제1장 밑바닥에서의 출발
리스케, 이토 가의 양자가 되다 | 이토의 인생에 전기가 된 ‘흑선내항’ | 행운: 요시다 쇼인 문하에 | “이토는 ‘주선가’가 될 것”
제2장 막말유신의 풍운 속에
요시다의 처형과 구루하라의 자살 | 영국 공사관 방화에 가담하다 | 자진해서 국학자를 암살하다 | 결혼 그리고 ‘준 무사’로 신분상승
제3장 영국 유학과 사고의 전환
‘조슈 5’, 영국으로 밀항 | 런던행 배에서 죽을 고비를 맞다 | 영국을 경험하고 ‘양이’를 버려 | 죽음을 각오하고 중도 귀국 | 4국 함대 포격… 강화회담 통역으로 | 막부 타도 위한 ‘삿초동맹’ 시동 | 첫 아내와 이혼하고 우메코를 선택하다
제4장 도약의 기회, 메이지유신
일약 효고 현 지사에 오르다 | 폐번치현 주장으로 좌천되다 | 재정제도 시찰 차 미국 출장 | 이와쿠라 사절단 부사로 구미 시찰 | 이토, 사절단에 두 거물 동행을 제안하다 | 외교 문외한 이토의 치명적 실수 | 조슈파 리더 기도, 이토를 맹비난하다 | 사절단, 일본 근대화 필요성을 절감하다
제5장 주선가로서 능력 발휘
정한론을 둘러싼 정변 | 사이고, “조선에 사절 보내면 폭거가 일어날 것” | 정한론자 기도, 구미 순방에서 생각 바꿔 | ‘주선가’ 이토의 암약 | 오쿠보, 정한파와의 대결을 결심 | 이토의 기책: 천황에게 두 안을 상주 | 이와쿠라, 각의 결정 반대안을 상주 | 정한파 패배: 이토, 참의 겸 공부경에 | 오쿠보, 정권 주도권 장악 | 이노우에, 강화도조약 협상 부사로
제6장 행운, 유신 3걸의 잇단 죽음
사이고의 반란: 세이난전쟁 | 사이고는 자살, 기도는 병사 | 오쿠보 암살 이후 권력의 중심에 | 이토, 이노우에 문제로 진퇴양난 | 천황, 어쩔 수 없이 중신들에 굴복
제7장 평민에서 초대 총리대신으로
유럽에서 1년여 동안 헌법 연구 | 베를린에서 독일 헌법을 모델로 삼다 | 이토, 갑신정변 처리 전권대사에 | 내각 발족: 천황, 초대총리로 이토를 지명 | 헌법 제정을 주도하다 | ‘메이지 헌법’ 제정 공로로 최고 훈장을 받다 | 귀족원 의장에서 다시 총리로
제8장 한국과의 악연
총리로 청일전쟁 지휘 |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청일전쟁의 서곡 | 일본 승리, 다시 리훙장과 강화협상 | 일본, 삼국간섭에 굴복 | 이노우에, 주한 공사를 자청 | 이토, 이노우에 후임으로 무장 미우라 임명 | 미우라, ‘여우사냥’을 지휘하다 | 우범선, 왕비 사체 소각을 지시 | 석방된 미우라, 이토에 노골적으로 불만 토로 | 흔들리는 ‘이토 체제’ | 이토, 총리 사직하고 서울 처음 방문
제9장 고종과 대신들을 협박, 공갈
러시아 방문과 ‘만한교환론’ 협상 | 인천 앞바다에서 러일전쟁 시작 | 이토, 러일전쟁 중 한국 특파대사로 | 러일전쟁 승리로 한국에서의 우월권 확보 | 헌병 동원해 을사늑약 체결
제10장 초대 한국통감으로
통감 수락 조건으로 군 지휘권 요구 | 조슈 번 출신이라는 행운 | 메이지 천황의 두터운 신임 | 외교뿐만 아니라 한국 국정 전반에 간섭 |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 퇴위 강요 | 한국에 대한 이토의 인식: ‘야만’ ‘무능’ ‘나태’
제11장 통감 이토, 한국의 친왕이 되다
사실상 인질로 간 영친왕의 일본 유학 | 일본 황태자 방한 추진 | 태자태사로 영친왕 교육 담당 | 영친왕의 “잘들 있소”에 상궁들 통곡 | 영친왕에 대한 메이지 천황의 관심 | 조선어를 배운 일본 황태자 | 노회한 이토, 상궁을 교묘히 이용 | 엄비, 데라우치 총독에게 언성 높여 항의 | 이토, 순종 순행 강요 | 한국병합안에 쉽게 동의한 이토 | 자진해 통감 사퇴 | 이토, 타고난 건강과 호색
제12장 죽음의 만주행
죽음을 예감하다 | ‘천하의 경륜’을 의식한 만주행 | 안중근, 이토의 만주 일정을 신문에서 확인 | “당했다. 누가 쏘았는가” | “코리아, 우라(한국 만세)” | 이토의 죄상 15개조
제13장 이토가 죽은 뒤
원로들, 이토의 죽음을 선망 | 고종, “이토는 한국의 자애로운 아버지” | 영친왕 ‘동궁 대우’는 흐지부지 | 안중근을 극형으로 몰고 간 일본 | 영친왕과 방자의 정략결혼 | 서울 한복판에 이토 기리는 절 세워져 | 안 의사의 친일파 아들, 박문사에서 ‘화해극’ | 안준생, 이토 아들에 “아버지 대신 깊이 사과” | 백범, 안준생 친일에 통분하며 극언도
에필로그
맺는말
연보
참고문헌
접기
===
책속에서
P. 41 “개국이냐, 양이냐, 존왕이냐, 좌막이냐로 갈려 있던 막말의 일본은 암살, 방화, 테러 등이 횡행하는 풍운의 시대였다. 그 와중에 갓 약관을 넘은 이토도 암살을 서슴지 않는 테러리스트가 되어 있었다. ‘유신 3걸’이라 불리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기도 다카요시 등은 전쟁에 참가했어도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인 일은 없었다. 다른 일급 무사들도 테러에 나서 칼을 빼드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메이지 시대에 이토를 포함하여 7명이 총리직을 수행했으나 이토 이외에 직접 사람을 죽인 경험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접기
P. 52-53 “이토 일행은 런던대학에 적을 올리고, 우선 영어를 공부하는 한편 영국인 학생들과 교류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산업혁명을 이룬,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영국의 발달상을 눈으로 직접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은 유길준이다. 1883년 유길준은 보빙 사절단 일원으로 보스턴대학에서 수학했다. 이것이 한국인 도미 유학의 효시다. 이토의 영국 유학이 1863년이니, 유길준의 유학보다 20년 빨랐다. 이토는 영국의 발달된 문명과 강대한 국력에 감복해, 양이가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절감했다. 곧 ‘외세를 배척한다’는 ‘양이(攘夷)’라는 사고를 버렸다.” 접기
P. 272-273 “이때 한국 황실은 놀라운 결정을 했다. 이토를 태자태사로 임명하면서, 그를 친왕(親王)으로 예우키로 한 것이다. 친왕은 황제의 아들, 즉 왕자를 의미하는데 이토를 한국 황족으로 모시겠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해 순종이 내린 소칙(1907년 11월 19일)은 다음과 같다.
[…] 짐은 세계의 대세와 나라의 영구한 계책을 깊이 생각하여 장차 문명한 교육을 황태자에게 실시하려고 하였는데 사(師)와 부(傅)의 책임을 맡길 사람을 얻기가 실로 어려웠다. 안팎으로 널리 찾았다가 이제 대훈위(大勳位) 통감 공작 이토 히로부미를 특별히 선발하여 태자태사로 삼아서 보도(輔導)할 책임을 맡긴다. 이토 통감은 덕과 공로가 높고, 학문은 고금을 통달하였으며,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실로 크게 떠받들고 지탱해준 공로가 있기에 짐이 언제나 존경하는 사람이다. 지금 비록 관직의 차이는 있지만 우대하는 것은 달리해야 하므로 특별히 친왕의 예로 대우하여, 모든 관리의 윗자리에 있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 아, 우리 이토 태사는, 공경하여 짐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 접기
P. 304-305 “호색과 관련해서도 이토다운 에피소드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당시는 정부 유력자가 지방으로 출장을 가면 현 지사 등이 연회를 베풀고, 연회에 나온 게이샤 중 마음에 드는 여인을 데리고 자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관기가 수청 드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이때 이토가 고른 게이샤는 대부분 일류가 아니고 이류, 삼류 ... 더보기
P. 345-346 “이토의 죽음을 고종과 순종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순종실록》에는 이토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순종은 총리대신 이완용을 정부 대표로 이토 태사를 위문하게 하고(10월 27일), 천황에게 조전을 보내는 한편,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를 내렸다(10월 28일). 그리고는 황태자에게 이토 태사의 죽음에 대해 석 달 상복을 입도록 했다(10월 29일)는 등의 내용이 간단히 언급돼 있다. 한국 황제가 자신의 나라를 뺏기 위해 혈안이 됐던 자에게 시호까지 내렸다니, 망자에 대한 예에 불과하다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과공(過恭)이다. 그런데 일본 측 자료에는 이토의 죽음에 대해 순종은 “국운이 다했다”고 탄식했고 “고종과 엄비는 통탄, 통곡했다”고 적혀 있다. 통감부 와카바야시 라이조 경시총감이 소네 통감에게 올린 10월 29일 보고서에 따르면, 고종은 이토를 ‘한국의 자부(慈父)’라고 치켜세우고, 그 ‘흉한’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울 뿐’이라고 개탄한 것으로 돼 있다. 가히 충격적이다. 발언이 사실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접기
이종각 (지은이)
1952년 대구 출생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
도쿄대학교 대학원 졸업(석사)
동아일보 기자, 차장, 부장
일본 주오(中央)대 겸임강사
전 동양대 교양학부 교수(한일관계사)
주요저서;
『일본인과 이순신』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
『일본난학의 개척자 스기타 겐파쿠』
『이토 히로부미』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
『韓?いまどき世相史』 등
최근작 : <근·현대 영국·일본인 역사가들이 본 징비록>,<일본인과 이순신>,<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 … 총 8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한국 식민지화의 원흉’ vs ‘일본 근대화의 원훈’. 이토 히로부미는 지난 100년간 한일 양국에서 가장 상반된 평가를 받아온 문제적 인물이다.
안중근 의사 순국 100년, 한일 강제합병 100년을 맞이한 지금, 우리는 안중근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가 단죄한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정말 무엇을 알고 있는지 자문하고 기억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의 운명이 엇갈린 결정적 시기에 그가 있었고, 그의 생애는 일본의 국운(國運)의 변화와 궤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베테랑 기자 출신으로 일본 전문가인 저자가 이토 히로부미에 관한 자료들을 망라하고 새로운 사실들을 조사 발굴해서 엮은 것이다. 이를 통해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이토 히로부미의 파란만장한 68년 생애를 냉정하게 재구성했다.
우리가 잘 몰랐던, 그리고 의식적으로 외면했던 그의 행적들을 살펴봄으로써, 일본은 어떻게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이루고 제국으로 나아갔으며, 한국은 암흑의 식민지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는지 그 역사의 이면을 짚어본다.
안중근 의사 순국 100년, 한일 강제합병 100년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불편한 진실
이토 히로부미 혹은 이등박문!
1907년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통감 재직 중 순종으로부터 ‘친왕(親王)’의 예우를 받았다!
1932년 서울 한복판에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 ‘박문사’가 세워졌다!
1939년 이토 히로부미 30주기에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은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에게 사죄했다!
우리는 과연 우리 근현대사의 진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뜬금없는 얘기로 시작해보자. 한 나라의 지폐 도안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시대의 한 단면을 드러낸다. 일본의 지폐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메이지 시대(1868~1912년) 인물들 일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만엔권에는 교육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 5천엔권에는 여성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 1천엔권에는 과학자 노구치 히데요의 초상이 그려져 있는데, 이들 모두 메이지 시대에 활약한 인물들이다. 구권(1984~2004년)도 그리 다르지 않다. 1만엔권은 후쿠자와 유키치로 지금과 같고, 5천엔권은 교육사상가 니토베 이나조, 1천엔권은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초상이 담겼다. 현재의 지폐를 도안하면서 여성과 과학의 높아진 위상을 반영했을 뿐, 도안 인물들의 주요 활동 시대는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지폐 초상에 관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 이유는 한국 지폐들이 조선시대 인물 일색이라는 해묵은 비판을 되풀이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지폐 도안 인물로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시대의 일면을 꿰뚫어볼 수 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기 위해서다. 조금 과장하자면, ‘지폐를 보면 그 나라가 보인다’. 그 점에서 보면, 일본 지폐에 등장하는 인물 구성은 일본인들이 메이지 시대를 얼마나 중요하고 결정적인 시대로 보는지 방증한다.
그렇다면 메이지유신의 원훈(元勳)이자 일본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인물로 평가받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왜 일본 지폐 도안에 없을까? 현재 지폐에 없을 뿐, 예전 지폐에는 그의 초상이 들어가 있었다. 그것도 1963년부터 1984년까지 무려 21년간,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1천엔권 지폐에 말이다. 이것은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일본 내 평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에서도 유명하다.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극적인 최후를 맞은 탓에 삼척동자도 이름을 알 정도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가장 유명한 일본인’이라고 해도 그리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평가는 일본에서의 평가와는 반대편 극단에 있다. ‘일제 식민지배의 원흉’이란 한마디로 모든 게 요약된다. 입장은 명쾌하고, 이견은 없다. 그런데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안중근 의사가 단죄한 일제 침략의 원흉’이라고 정리하고 말아도 괜찮은 것일까?
이토 히로부미 혹은 이등박문, 그 ‘불편한 진실’
2010년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지 100년, 일제에 의해 한국이 강제합병된 지 100년을 맞이하는 해다. 올 초에는 순국 100주기를 맞이해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재조명하고 그의 삶과 정신을 기리는 출판물, 영상물, 공연물, 행사들이 잇따랐다. 하지만 안중근의 영웅적 면모를 되새기는 움직임이 붐을 이룬 것과 달리, 그가 온몸을 던져 숨통을 끊은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관심에 가깝다.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지 100년이 넘었지만, 우리는 그에 대해 ‘침략의 원흉’이란 낙인에서 한 뼘도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혹시 치욕의 역사를 잊고 싶어 하는 집단심리가 작용한 것은 아닐까? ‘100년 전 한국’을 제대로 알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에서 영웅의 의거와 삶을 기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영웅의 의거로도 돌리지 못한 역사의 물줄기, 그 한 축을 알아야 지난 100년의 한국과 일본을 알 수 있고, 나아가 미래를 예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교사(反面敎師), 지피지기(知彼知己)의 차원에서도 그렇다.
《이토 히로부미》(이종각 지음, 동아일보사 발행)는 한 세기 전 우리에게 악몽 같은 존재였던 문제적 인물 이토 히로부미(1841~1909)의 생애를 그린 평전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일본 역사상 가장 극적인 신분상승을 이룬 인물로 여겨진다.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 지방의 벽촌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신분단계를 차례로 밟아가 하급무사가 되었으며, 메이지유신 이후 관선 효고 현 지사, 내무경, 내각총리대신(네 차례), 추밀원 의장(세 차례), 귀족원 의장, 초대 한국통감, 입헌정우회(정당) 총재 등을 역임했다. 메이지 천황에게 공작의 작위를 받았고, 대한제국 순종에게 친왕(親王)의 예우를 받았으며, 구미(歐美) 각국에서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정치 지도자로 대우받았으니, 만인지상(萬人之上)이란 말이 그보다 적절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극적인 신분상승을 이룬 인물이자 극단적 평가를 남긴 인물을 그리기 위해 이 책은 이토 히로부미(와 주변 인물들)에 관한 방대한 사료들을 토대로 그의 68년 생애를 재구성한다. 양이(洋夷)를 위해 서슴없이 칼을 들던 하급무사의 모습에서부터, 죽음을 무릅쓴 영국으로의 밀항 유학과 중도 귀국, 서구의 발전상에 큰 충격을 받아 양이를 버리고 근대화에 매진하게 된 일, 메이지 헌법을 기초해 근대 일본의 기틀을 세운 공적, 그를 만인지상의 위치로 이끈 탁월한 현실감각과 국제적 안목 그리고 주선가(周旋家)로서의 모습, 안중근에 의한 극적인 최후를 동년배 원로들이 부러워한 까닭, 죽음 이후 그의 아들과 안중근의 아들의 화해극까지, 우리가 잘 몰랐던 새로운 사실과 면모들을 만날 수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소식을 듣고, 순종은 국운이 다했다고 탄식했으며, 고종은 이토가 한국의 자부(慈父,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았다면서 이토를 죽은 그 ‘흉한’이 한국인이란 사실이 부끄럽다고 개탄했다는 충격적인 자료도 볼 수 있다. 이토가 죽은 뒤 서울 한복판(장충단공원 동쪽, 현재의 호텔신라 자리)에 그를 기리는 절 박문사(博文寺)가 건립되었으며, 이토 사후 30주기를 맞아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이 이토의 아들을 만나 사죄했다는 믿고 싶지 않은 사실도 자세히 서술되고 있다.
베테랑 기자 출신으로 일본 전문가인 저자는 기존에 출간된 이토 히로부미 관련 책들이 비난과 미화 어느 한 쪽에 치우친 한계점을 직시하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그의 생애를 그리고자 했다. 또한 풍부한 사료들을 토대로 많은 일화와 쉽게 보기 힘든 자료 및 도판들을 싣고 있다.
비난과 미화의 이분법을 넘어, 미래의 반면교사로
1800년대 중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격동의 막말유신(幕末維新, 도쿠가와 막부 말기와 메이지유신) 시기를 지나온 이토 히로부미의 파란만장한 여정은 그 자체로 ‘근대 일본의 탄생’을 보여준다. 일본인들이 메이지 시대를 나라의 국운(國運)을 바꾼 시대로 평가하며, 이토는 메이지 시대의 원훈이자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추앙받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의 생애를 읽으면, 서구 열강의 위협과 개방 및 근대화란 공통된 시대적 요청에 발빠르게 대응해 국운을 상승 반전시킨 일본과 달리, 고답적인 쇄국의 길을 걸은 한국의 행보가 아프게 다가온다.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원흉의 얼굴과 함께 원훈의 얼굴도 균형 있게 다룬 이 책을 읽어야 한다면,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올해는 엄혹한 질곡의 100년을 보내고 새로운 100년이 시작되는 해다. 한 세기 전 쓰라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치열해진 경제전쟁의 포화 속에 당당한 미래를 예비하기 위해 터닝포인트가 되는 중요한 때다. 이를 위해서 이 책은 작지만 의미 있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미래는 역사의 불편한 진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며, 이토 히로부미를 객관적으로 짚어보는 것은 하나의 단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토 히로부미, 원흉의 얼굴뿐 아니라 원훈의 얼굴도 기억하자.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자. 접기
평점
분포
8.5
저자가 용감하게 이토를 주제로 책을 썼지만 반응은 영 신통치 않은것 같다.
slbm00 2010-07-15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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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불편한 진실 하지만 알아야 반복안함
이토 히로부미
한국인과 일본인이 정반대의 평가를 내리는 인물이다. 조선에게는 나라를 망하게 한 원흉이지만 일본에서는 욱일승천기의 리더다. 나는 조선의 입장에서는 미워할 수 밖에 없어도 그냥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서 그에 대해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이토의 출신은 지금의 시모노세키 주변 죠슈 번의 최말단 무사계급이었다. 어려서부터 용기가 특출 났고 어학과 사교에 천부적 재질이 있었다.
큰 의욕을 보이고 자질이 있는데 마침 좋은 후원자를 만나 영국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여기서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을 키웠고 영어를 잘 하게 되었으며 서양인들과 사교에서 빼어난 솜씨를 보였다. 이렇게 닦은 능력은 하나 하나가 후일 메이지유신이라는 거대한 변혁의 마무리 단계에서 큰 역할을 하는 기반이 되었다.
당시 유신의 큰 흐름을 만들었던 사이고, 오쿠보, 료마 등이 이런 저런 일들로 단명한 상태에서 그 성과를 거의 다 물려받게 되었다. 덕분에 성장이 눈부실 정도로 빨랐는데 막판에는 일본의 수상이 될 수 있었다.
밑바닥에서 정상까지 올라간 그의 인생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잘 비교된다. 본인은 이런 비유를 싫어했지만. 하나 더 참고로 말하면 조선 최초의 주미대사도 신분이 매우 미천한 통역관 출신이지만 발군의 어학능력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
이 책은 그런 이토라는 인물에 대해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체계적인 분석을 통해 한국적 시각에서 정리해내었다. 이토라는 존재는 접근해갈수록 편하지 않은 진실들이 드러난다.
그 진실은 주로 당대 조선인들의 치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고종이 실제로 이토에게 사정을 많이 했고 덕을 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반대로 이토 또한 고종의 아들 영친왕을 일본에 데려와 상당히 후하게 대우 했고 조선에 대해서도 보호국이지만 체면을 살려주려 노력했다.
이토는 국제정치는 미묘해서 힘으로만 밀어 붙이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점을 잘 알았다. 조선의저항이 강해지고 모양새가 나빠지면 비용이 더 많이 들기 때문에 내린 현실적 판단으로 보인다. 그래서 끊임없이 당근을 제시하면서 한발한발 자기 쪽으로 유도해낸다.
조선이 왕족에게는 왕가의 보전을, 대신에게는 보상금과 가문의 지속을, 궁녀들에게 까지 각종 선물을 주면서 자신들의 논리를 관철하려고 했다. 그리고 청일,로일 두번의 무력 행사의 결과 조선의 주변에는 아무도 의지할 이웃이 없어져버린다.
실로 교묘한 솜씨를 보면서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어진다.
영친왕의 경우도 일본에서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다보니 거의 이토를 보호자로 여겼다고 한다. 이토는 자신의 천황인 메이지도 이리 끌고 저리 끌고 다니면서 필요한 일은 거의 강제로 시켰다고 한다.
반면 조선쪽의 입장을 보면 안타까움이 많다. 고종과 이토의 대화, 이토의 조선 대신들 휘어잡기 등 진행의 경과를 보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 무척 서글프다.
고종이라는 인물은 돈많은 집 아들로 세상물정 모르고 가만 있다가 이제 기업이 망한다고 하니 아쉽기는 한데 무엇을 할 줄도 모르겠다는 그런 태도가 많다.
그는 끊임없이 주변 탓을 했다. 아버지, 아내 그러다가 맨 나중 한일 합방조약에는 대신들에게 최종책임을 떠넘기고 적당히 역사를 비판을 동점심을 뒤집어 쓰면서 빠져나왔다.
이토는 그런 고종에게 나라를 포기시키는 결심을 촉구하는 마지막 해결사 역할을 자임한다.
아주 직설적으로 세상이 이렇게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굿이나 하고 있다며 비판하고 정말 필요한 것은 과학이라고 질타한다.
나중에 고종은 이토가 안중근의 총에 맞아 죽자 그를 위문하였고 후일 서울에는 이토의 이름을 딴 커다란 절이 세워졌다. 박문사라는 이름의 절이 지금의 호텔신라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마치 로일전쟁의 영웅 도고의 신사가 메이지신궁 앞에 있는 것 처럼 그의 이름은 한일합방의 주요공로자로 각인되는 꼴이다.
더 우울하게 만드는 사실은 안의사의 아들이 마치 사죄하는 형태로 이토의 아들을 위문하는 장면이다. 그가 아버지를 부정하는 형태를 취했을 때 속마음이야 어떠했겠는가? 김구 선생이 한스러워 했던 장면이다. 지금 남산의 주변에는 안의사의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고 반대편의 박문사는 호텔신라가 세워졌다. 역사는 돌고 돌지만 과거의 흔적을 무조건 지워서는 안된다. 큰 비용을 지지불했다면 그만큼 큰 깨달음을 얻어야만 한다.
저자는 한국인으로서는 거의 최초로 체계적인 공부와 정리를 통해 우리가 자각해야 할 점을 드러내주었다.
역사를 모른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이웃나라에서 말단 사무라이가 수상이 되어 한국에 나타날 때 한국의 조정은 그에게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히데요시는 인생이 연극이고 배우들은 늘 가면을 써야 한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이토는 수제자에 가깝다.
덕분에 이번에는 히데요시의 꿈이 이루어지고 만 것이다.
다음 대에는 그런 일이 없도록 진정한 앎이 만들어지는 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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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11-03-07 공감(2) 댓글(0)
한사람 두 얼굴...
우리들은 살면서 한 사람을 평가할때 그사람에 대하여 한가지 면만을 고려하려는 경향이 강한것같다. 특히 역사적으로 인물에대한 평가는 대게 민족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보면 매우 주관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주관적인 태도는 우리가 처한 21c의 세계화 시대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위험한 사고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이 자칫 세계화 시대에 필수적일수있는 사고의 유연화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런점에서 볼때 이책은 현대인들이 읽어야할 필수적인 책이라 볼수있다. 이책은 우리가 잘 알고있는 이토히로부미를 다루고 있다. 히로부미는 한국 학교교육을 받은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원흉의 얼굴을 띤 인물일 것이다. 하지만 이책은 단순히 우리의 시각이 아닌 그 누가 보아도 객곽적일수 있는 균형잡힌 인물평을 서술한다. 그러므로써 우리의 한쪽으로 경직된 사고를 바로잡아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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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위 2010-12-11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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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와 이토 히로부미
장제스(1887-1975)와 이토 히로부미(1841-1909)의 생몰연대를 확인해보니 장제스가 스물두 살 때 이토가 안중근 의사에게 피격당하므로 직접적인 인연은 있을리 없다. 같이 묶은 건 두 인물에 대한 평전이 최근에 출간됐기 때문이다. 조너선 펜비의 <장제스 평전>(민음사, 2014)과 이토 유키오의 <이토 히로부미>(도서출판선인, 2014). 각각 중일 양국의 한 시대를 쥐고 흔들었던 거물들이라 동아시아 근대사를 이해하는 데도 꽤 유익한 자료가 되겠다.
장제스에 관한 단행본은 생각보다 적다. 레이 황의 <장제스 일기를 읽다>(푸른역사, 2009)와 정두음의 <장제스와 국민당 엘리티스트>(도서출판선인, 2013)가 눈에 띄는 정도인데, 영어권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장제스 평전>이 2003년에 나온 책인데, 저자가 "이 책은 거의 30년 만에 나온 최초의 전격적인 장제스 평전"이라고 서두에 적고 있기 때문이다.
황제가 지배하는 청나라가 무너지고 현대 중국이 탄생하기까지, 격랑의 중국 근대사 한복판에 장제스가 있었다. 신해혁명 이후 안으로는 군벌이 할거하고 밖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이 침략하는 가운데 장제스는 중국을 강대하고 안정된 국가로 세우려는 이상과 실천 역량까지 지닌 유일한 지도자였다. 저명한 동아시아 전문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조너선 펜비는 장제스의 일기에서부터 세계 각지의 연구, 당대의 언론 보도, 인터뷰와 현장 조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자료를 망라하여 장제스가 중국을 잃어버린 패배자라는 일반적인 평가를 철저히 재검토하고, 사실적이면서 역동적인 필치로 그의 초상을 그려 낸다.
레이 황의 책과 나란히 읽으면 장제스와 그의 시대에 대한 꽤 상세한 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 듯싶다.
장제스와 달리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책은 평전을 비롯해서 적잖게 출간돼 있다. 새롭게 추가된 내용이 있는지가 포인트. 실제는 확인해봐야 알 수 있겠다.
이토 히로부미만큼 한국과 일본에서 서로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근대 일본의 정치가는 없다. 한국과 일본, 일본의 식민지 연구자와 정치외교사 연구자 사이에서조차 이토를 둘러싼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그 원인은 한국의 일본 연구자와 일본의 식민지 연구자는 이토가 한국(조선)에 관여하지 않았던 시기의 이토에 관한 사료를 거의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토 자신과 이토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정치가, 가족들의 편지, 일기, 서류 등 1차 사료를 중시하고, 또한 그들의 회상록과 당시 신문, 잡지 보도 등도 두루 살펴, 한국통치 시기도 포함하여 이토의 실상을 탐색하고자 한다.
이토 히로부미 관련서로는 근대일본의 국가 형성과정에서 이토의 역할을 다룬 <근대일본의 국가체제 확립과정>(혜안, 2008), 그리고 한국과의 관계를 다룬 책으로 <한국과 이토 히로부미>(도서출판선인, 2009), <이토 히로부미의 한국병합 구상과 조선사회>(열린책들, 2012) 등을 더 참고할 수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안중근 의사 평전도 한번 더 언급한다. 어린이용을 제외하면 황재문의 <안중근 평전>(한겨레출판, 2011), 김삼웅의 <안중근 평전>(시대의창, 2014)이 표준적이고, 박도의 <영웅 안중근>(눈빛, 2010)은 "안중근 순국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출판한 책으로, 1909년 10월 21일 우덕순 동지와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할 계획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10월 26일 거사에 성공하고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기까지 150여 일에 걸친 안중근의 마지막 여정을 현지답사하고 기록, 정리하였다." 이수광의 <안중근 불멸의 기억>(추수밭, 2009)과 원재훈의 <안중근, 하얼빈의 11일>(사계절, 2010)도 안 의사에 행적에 대한 답사에 근거해 쓰인 책이다...
14.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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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14-12-20 공감 (2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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