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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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사림파(士林派)는 훈구파(勳舊派)와 양립(兩立)하면서 조선 중기의 사회와 정치를 담당했으며, 조선 중후기 정권을 장악해 붕당(朋黨)을 이룬 관료집단이다. 선비 사(士), 수풀 림(林)자를 쓰며, '수풀 림' 자는 속세(권력욕, 출세욕 등등)에서 벗어난 이미지를 상징한다.[1] 고려 후기 조선 건국에 협력하지 않은 길재, 정몽주 등을 시조로 여겼으며, 향촌에서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그 지위를 유지하였다. 그중에서도 사림은 기본적으로 "왕이 도덕으로 다스린다"는 왕도 정치를 기본적으로 추구하였다. 이 왕도정치 실현을 두고 붕당이 형성되었는데 동인과 서인이 실현 방법에 대하여 다르게 된 부분도 없지않아 있다.
본래 이들은 조선의 건국에 협력하지 않고 지방에 내려가 있던 학자들로, 중소 지주층을 이루고 있었다. 성리학은 "이치를 깨달아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가 주된 이념이었기에, 당시의 권력자들이 행하는 몇몇 지나친 점들에 대항하려 했지만, 그들이 워낙 굳건히 버티고 있기도 했고,[2] 중앙에 나아갈 기반이 거의 없었으므로 변방에서 세력을 키워갔다. 흔히 사림파를 신진사대부 중에서도 온건개혁파의 후신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오히려 온건 개혁파 중에서도 조선이 건국된 뒤 새 왕조 건설에 기여한 인사도 의외로 많았다. 하륜, 권근, 이첨 등이 새 왕조 조선이 건국되고 이성계 밑으로 들어가, 후에 태종 정권의 핵심이 된 인물들이다. 이들은 관학파(官學派)에 속하며, 조선의 문물/제도 정비에 일조한 반면, 이조차 거부하고근본주의자 재야(在野)에서 성리학을 연구한 학자들이 바로 사림파이다. 그러니까 "온건 개혁파 = 사림파가 아니라 온건 개혁파의 한 갈래가 사림파"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어찌 보면 관학파와 훈구파의 관계와 비슷하다.
사림파가 본격적으로 역사의 행보에 진출하게 된 것은 훈구파의 본격적인 출현 이후부터로 본다.[3] 지방 향교에서 이름을 날리던 재야 학자들을 성종이 등용하면서[4] 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다.[5] 한편 훈구파의 세력 확장은 점점 사림파의 경제기반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른다. 은퇴한 훈구파가 낙향(落鄕)하여 유향소(留鄕所)를 이용해, 낙향해서도 나름 권세를 누리며, 지방 유생들을 억누른 것 또한 사림파에게 정계에 진출의 동기로 작용하였다.[6]
어쨌든 정계에 진출한 사림파는 성종의 지원과 김종직의 끌어주기(?)[7] 등에 힘입어, 주로 삼사(三司)[8]에서 요직을 차지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독단적인 발언을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퍼부어, 훈구파와의 대결 속에서 네 번의 사화를 겪어 큰 타격을 받는다. 그러나 을사사화 이후 선조 시기 척신(戚臣) 세력을 몰아내면서 조선 중후기의 권력의 핵심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인사권을 쥐고 있는 핵심직위인 이조전랑(吏曹銓郎)[9]의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를 놓고 세력다툼을 벌여, 사림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갈라졌으며, 여기서 붕당 정치가 시작되었다. 이후의 내용은 붕당 정치에서 확인하도록 하자.
본래 이들은 조선의 건국에 협력하지 않고 지방에 내려가 있던 학자들로, 중소 지주층을 이루고 있었다. 성리학은 "이치를 깨달아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가 주된 이념이었기에, 당시의 권력자들이 행하는 몇몇 지나친 점들에 대항하려 했지만, 그들이 워낙 굳건히 버티고 있기도 했고,[2] 중앙에 나아갈 기반이 거의 없었으므로 변방에서 세력을 키워갔다. 흔히 사림파를 신진사대부 중에서도 온건개혁파의 후신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오히려 온건 개혁파 중에서도 조선이 건국된 뒤 새 왕조 건설에 기여한 인사도 의외로 많았다. 하륜, 권근, 이첨 등이 새 왕조 조선이 건국되고 이성계 밑으로 들어가, 후에 태종 정권의 핵심이 된 인물들이다. 이들은 관학파(官學派)에 속하며, 조선의 문물/제도 정비에 일조한 반면, 이조차 거부하고
사림파가 본격적으로 역사의 행보에 진출하게 된 것은 훈구파의 본격적인 출현 이후부터로 본다.[3] 지방 향교에서 이름을 날리던 재야 학자들을 성종이 등용하면서[4] 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다.[5] 한편 훈구파의 세력 확장은 점점 사림파의 경제기반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른다. 은퇴한 훈구파가 낙향(落鄕)하여 유향소(留鄕所)를 이용해, 낙향해서도 나름 권세를 누리며, 지방 유생들을 억누른 것 또한 사림파에게 정계에 진출의 동기로 작용하였다.[6]
어쨌든 정계에 진출한 사림파는 성종의 지원과 김종직의 끌어주기(?)[7] 등에 힘입어, 주로 삼사(三司)[8]에서 요직을 차지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독단적인 발언을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퍼부어, 훈구파와의 대결 속에서 네 번의 사화를 겪어 큰 타격을 받는다. 그러나 을사사화 이후 선조 시기 척신(戚臣) 세력을 몰아내면서 조선 중후기의 권력의 핵심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인사권을 쥐고 있는 핵심직위인 이조전랑(吏曹銓郎)[9]의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를 놓고 세력다툼을 벌여, 사림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갈라졌으며, 여기서 붕당 정치가 시작되었다. 이후의 내용은 붕당 정치에서 확인하도록 하자.
2. 평가[편집]
2.1. 옹호[편집]
사림파가 훈구파에 꼬장꼬장하게 대응한 탓에 성리학 원리주의자로 꼽히기는 하지만,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성리학은 그렇게 딱딱하고 교조적(敎條的)인 학문이 아니었다.[10] 16세기에 쌓인 사림의 성리학 정리가 17세기 성리학의 경직화에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양반층의 시대적 필요성[11]을 반영하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이 거의 정설이다. 조선 전기에는 남녀가 비교적 평등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율곡 이이 남매 분재기가 꼽히고 있다는 사례[12]가 이를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13][14]
또한 훈구파가 방납(防納)의 권리를 얻으면서, 그로 인한 전황(錢荒)과 민생의 피폐가 심해지는 것을 막은 것은 바로 사림이다. 대표적인 것이 사림이 주장한 수미법(收米法)이다. 그리하여 점점 사유지를 넓혀 대지주(大地主)로 커가는 관학파에게 제동을 걸었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
그리고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볼수만도 없는게 일단 조선사의 대부분은 이들에 의해 이끌어졌으며 이들이 만악의 근원이라 하는것도 무리가 크다. 만약 이들에게 모든 책임을 물리자면 반대로 모든 공도 이들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심지어 세도정치도 이들탓이라 하는데 세도정치의 근본적 원인은 외척 세력의 강화에 있지 사림세력 이전의 문제다. 오히려 외척세력이 힘을 얻는 과정에서 환국정치등으로 많은 관료들이 죽어나갔으며 붕당이 무너져내린 결과 외척이 힘을 얻게 된것이다. 즉 세도정치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왕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것을 사림파의 문제로 몰아간다면 사림파가 들어서기 이전에 한명회 등이 외척으로서 세도를 부린것은 무엇이 되는가?누가보면 외척은 사림출신 아닌줄 알겠다 한명회는 사림 아닌데?
그리고 실무 능력을 탓하는것도 물론 훈구를 견제하기위해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인재들을 등용한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으나 만약 이들이 정말 실무 능력이 없었다면 임진왜란때 류성룡같은 활약이 일어날리가 만무했을 터이다. 심지어 송시열이 사문난적으로 몰아갔던 윤휴의 경우 그의 반대파이던 서인과 사문난적이라 지목한 송시열이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등용되었다.
당초에 국력을 대폭으로 손실한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을 다시 재건한것을 생각하면 이들이 과연 저 비판대로 실무 능력이 전무한 낙하산 인사 투성이라고 할수 있는가? 거꾸로 훈구파가 실무 능력 있는 인사들만 썼느냐 하면 그것도 문제인게 이들중에선 단종으로부터 왕권을 빼았는 패륜에 가담한 공신들이 들어가 있으며 이들이 모두 관료 출신이라 하기 힘들다.[15] 심지어 이들은 그런 패륜 과정에서 사육신으로 대표되는 많은 인재들을 죽였다. 되려 학문적으로도 검증이 안된 인물을 공신이란 이유로 편익을 봐주는 훈구파쪽도 낙하산 문제에서 자유로울수 없다. 아니 당초에 나라에서 정한 과거제를 통해서 관료가 되고 그 관료가 된 이후에도 능력이나 학연을 인정받아야 하는 시대와 패륜에 가담한 연줄을 통해 관직에 오르는것 둘중 어느쪽이 낙하산인가? 얼자출신이라 차별 받았다는 유자광이나 남이의 경우를 보더라도 왕의 총애를 받아 광속으로 승진 하는 등 낙하산 문제는 훈구쪽이 더 심하면 심했지 결코 덜하다 볼수가 없었다.
잡학 부분에 대해서도 김종직이 그런 발언을 했었다곤 하나[16] 이후 조선이 정말로 무기 개발에 게을렀던가?[17] 되려 임진왜란때 많은 유학자들이 의병을 일으켜서 직접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며 패배도 많았지만 승리도 하였다. 북벌같은 명분으로 무기 연구를 무시하지 않았으며[18] 조엄 등은 일본에서 고구마 같은 작물을 들여오기도 했으며 잡학에 관심이 많았던 실학파라 불리는 이들도 근본은 사림이다. 거꾸로 비교 대상인 관학파와 훈구파를 보면 우선 관학파가 주류이던 세종때엔 반박할 여지 없이 모든 분야에서 눈부신 성과를 보였으나 세조때에 들어서 세조가 집현전을 폐지한 시점에서 관학이 쇠퇴할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19] 이후 홍문관등으로 부분적으로 집현전의 역할을 부활시켰으나 완전한 부활은 아니었으며 이로인해 세조 이전때와같은 다양한 분야의 학문 연구가 힘들어질 수 밖에 없었다. 즉 세조와 그의 공신들인 훈구파가 저지른 행적에 누명을 씌워진것이라 볼수 있다. 훈구파에서 잡학의 재능이 있는 인물이 있던건 이들 중 일부가 관학파 출신인것도 있으나 이 이후 선조에 이르기까지 잡학의 발전이 더뎌졌다 본다면 그때까지 남은 훈구파는 뭘 했던건가? 심지어 총통위를 해체시킨건 세조때다.[20] 즉 훈구파는 과학과같은 분야를 권장하긴 커녕 이들로 인해 이전 관학파의 다양한 학문이 손실된것이라 할수도 있다.[21]
무엇보다 세도정치때를 사림 집권시기라 할수나 있는가도 문제이다. 물론 세도정치를 시작하게 만든 장본인인 김조순은 분명 사림이었으며 안동김씨들도 모두가 무능력자는 아니었고 개중엔 능력있는 인물도 있었다곤 하지만 이당시에 매관매직이 성행했으며 이로인해 나라가 피폐해진것을 생각하면 이는 사림 이전에 국가 시스템 붕괴의 문제이다. 특히나 이 세도 정치를 불러온것이 붕당이 아닌 왕권 강화의 부작용이란걸 생각하면 이것마저도 사림에게 문제를 전가하는건 누명을 씌우는 것이다. 심지어 훈구파가 득세할때마저도 한명회는 자신의 딸들을 이용해 세도를 누리려는 시도까지 했었다.[22]
명과의 사대 문제는 굉장히 복잡한 부분인데 우선 조선 입장에선 명에게 반항할만한 국력은 없었다.[23] 그런 상황에서 이들의 정통성에 도전하는것은 득보다 실이 더 큰 상황이었으며 이들에게 사대하는것은 조선 입장에서 손해조차도 아니었다. 이는 명청 교체기도 마찬가지였으며 청이 완전히 명을 이기리란 보장도 없던 상황에서 청의 편을 들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중립을 취하자니 양쪽 모두에게도 좋지 않은 태도로 보일수밖에 없었다. 결국 청은 그런 불안정한 요소를 없애기 위해 조선을 침공했고 이로인해 굴욕을 당한 조선 입장에서 청이 곱게 보일리가 만무했으며 임란 등으로 빛을 진 명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가진건 당연한 일이다. 무엇보다 명, 청 양국에게 조그마한 빌미를 주더라도 이는 조선에 대한 압박에서 심하면 침공까지 갈수도 있는 문제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의 정통성에 도전하는 행위를 비판하는건 결과적으로는 올바른 판단이다.
또한 조정에서 명나라가 망했다는소식을 듣고 나라가 망했음에도 자결한 충신이없는것에 대해 황제가 임금답지 못하여 지조와 절개있는 자들이 떠나 그렇다고 은근히 명나라를 디스하는 기록이 있으니 정말 명나라를 진심으로 섬겼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24]
신분 관련해서도 과부의 재가를 금지시킨 장본인은 성종이였으며 이는 그 훈구파들 조차 반대하던것을 오직 성종 개인의 의지만으로 강행한 사례다.[25] 심지어 서얼 출신의 등용에 제한을 둔것도 경국대전에 실린 내용이며 장영실과 같은 사례를 생각하면 신분에 따른 차별은 사림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있어온 문제였다. 되려 학문을 갖췄음에도 노비란 신분때문에 능력을 발휘 못하는것을 슬퍼하는 사례들도 훈구파가 사라진 이후의 이야기다. 물론 이를 통해 사림이 신분제에 부정적이었다 할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문제의식이 없거나 이러한 천민에 대한 차별을 강화시키만 해왔다고 하기엔 문제가 있단걸 보여준다.
당초에 이 부분은 천민이란 존재를 남겨둔 조선의 신분제의 한계라고 밖에 할수가 없는 문제이다.[26] 서얼 관련해서도 서얼이 첩의 자식이란걸 생각하면 문제가 발생하는데 서얼을 차별하지 않게되면 처와 첩의 차이에 문제가 생기게 되고 이는 결혼 문화에 문제가 생길수밖에 없다.그러게 왜 첩을 둬서 문제를 만드는건가 [27] 서얼 차별에 대해서도 사실 유자광을 제외하면 훈구파에서도 특별하게 언급될만큼 능력있는 서얼에 대한 배려같은건 등장하지도 않고 유자광마저도 훈구 내에서 지지를 얻어 올라간게 아니라 왕의 총애가 큰 역할을 했다.
결정적으로 관학파는 세조 직전까지, 훈구파는 성종때부터 밀려나서 선조때에나 사라지는데 사림 세력은 성종때부터 등장하기 시작해서 끝까지 갔다. 즉, 이들의 문제점이 크게 부각되는건 그만큼 이들이 오랬동안 조선을 이끌어 왔기 때문이며 이는 거꾸로 조선이 그만큼 유지되고 발전해온것 또한 이들의 공적이란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후 사림파는 수많은 당파로 나뉘어 사림이란 한 단어로 묶을수 있을만한 성격과는 거리가 멀어지며 그들 내부에서도 다양한 성향을 보이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단순히 훈구와의 비교를 위해 하나로 묶는것은 맞지 않는 일이다.[28]
어떻게 보면 이런 논리는 노론 음모론과 약간 이어지기도 한다. 조선의 정치 모습을 비난하면서 처음에는 노론을 비난하다가 서인, 붕당으로 점점 비난하는 범위가 넓어지더니 이젠 사림파 전체로 확대되는 것.
그리고 군사력의 경우, 조선군의 문제점이라고 지적되는것들은 알고보면 조선이 영향을 많이 받은 명나라도 가지고 있던 문제점들이라 조선에게만 뭐라하는것도 부당한 면이 크다. 당장 조선을 비웃은 명나라만 해도 토목보의 변에서 대군을 동원하고도 2만의 몽골군에게 참패하여 황제가 사로잡히는 굴욕을 겪었으며 1555년에는 정규군도 아닌 왜구들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국토가 유린당했을 정도로 처참했다. 출처:https://www.instiz.net/pt/6009168?frompc=1[29] 게다가 명나라도 조선처럼 장군들에 대한 견제와 감시가 지나칠정도로 심했으며[30] 황제들과 대신들이 군사적 역량이 모자라는데도 그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장수들에게 무리한 전쟁을 강요했다가 토목보의 변, 정난의 변, 송산 전투처럼 우세한 상황인데도 열세인 적군에게 참패하는 참사를 발생하게 만들었다.
또한 전면전이 아니라 조선군이 중점으로 뒀던 토벌전만 놓고 보면 명나라와 비교해도 조선군의 전과는 나쁘지 않았다.[31] 1467년 조선과 명의 건주 여진 협공 당시 조선군은 1만 명이었는데, 총 286급을 참수하고 2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被虜人) 7명을 탈취하였다. 반면 명군(明軍)의 군세는 5만 명이었는데, 총 638급을 참수하고 25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 1,165명을 탈취하였다. 언뜻보면 조선군의 전과보다 명군의 전과가 월등해 보이지만, 조선의 동원 병력이 명군의 5분의 1이었다는걸 감안하면 오히려 조선군이 명군보다 병력대비 여진족을 더 많이 죽였으며[32], 예상치 못했던 럭키샷이 터져 예전부터 골칫거리였던 건주여진의 추장 이만주(李滿住)를 조선군이 직접 죽여 복수하기도 했다. [33] 조선군이 건주여진 정벌에서 이만주를 죽인건 명나라에서도 높이 평가했는데 당시 명나라의 황제인 성화제가 세조(조선)를 칭찬하며 후하게 상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 #[34]
또한 훈구파가 방납(防納)의 권리를 얻으면서, 그로 인한 전황(錢荒)과 민생의 피폐가 심해지는 것을 막은 것은 바로 사림이다. 대표적인 것이 사림이 주장한 수미법(收米法)이다. 그리하여 점점 사유지를 넓혀 대지주(大地主)로 커가는 관학파에게 제동을 걸었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
그리고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볼수만도 없는게 일단 조선사의 대부분은 이들에 의해 이끌어졌으며 이들이 만악의 근원이라 하는것도 무리가 크다. 만약 이들에게 모든 책임을 물리자면 반대로 모든 공도 이들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심지어 세도정치도 이들탓이라 하는데 세도정치의 근본적 원인은 외척 세력의 강화에 있지 사림세력 이전의 문제다. 오히려 외척세력이 힘을 얻는 과정에서 환국정치등으로 많은 관료들이 죽어나갔으며 붕당이 무너져내린 결과 외척이 힘을 얻게 된것이다. 즉 세도정치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왕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것을 사림파의 문제로 몰아간다면 사림파가 들어서기 이전에 한명회 등이 외척으로서 세도를 부린것은 무엇이 되는가?
그리고 실무 능력을 탓하는것도 물론 훈구를 견제하기위해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인재들을 등용한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으나 만약 이들이 정말 실무 능력이 없었다면 임진왜란때 류성룡같은 활약이 일어날리가 만무했을 터이다. 심지어 송시열이 사문난적으로 몰아갔던 윤휴의 경우 그의 반대파이던 서인과 사문난적이라 지목한 송시열이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등용되었다.
당초에 국력을 대폭으로 손실한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을 다시 재건한것을 생각하면 이들이 과연 저 비판대로 실무 능력이 전무한 낙하산 인사 투성이라고 할수 있는가? 거꾸로 훈구파가 실무 능력 있는 인사들만 썼느냐 하면 그것도 문제인게 이들중에선 단종으로부터 왕권을 빼았는 패륜에 가담한 공신들이 들어가 있으며 이들이 모두 관료 출신이라 하기 힘들다.[15] 심지어 이들은 그런 패륜 과정에서 사육신으로 대표되는 많은 인재들을 죽였다. 되려 학문적으로도 검증이 안된 인물을 공신이란 이유로 편익을 봐주는 훈구파쪽도 낙하산 문제에서 자유로울수 없다. 아니 당초에 나라에서 정한 과거제를 통해서 관료가 되고 그 관료가 된 이후에도 능력이나 학연을 인정받아야 하는 시대와 패륜에 가담한 연줄을 통해 관직에 오르는것 둘중 어느쪽이 낙하산인가? 얼자출신이라 차별 받았다는 유자광이나 남이의 경우를 보더라도 왕의 총애를 받아 광속으로 승진 하는 등 낙하산 문제는 훈구쪽이 더 심하면 심했지 결코 덜하다 볼수가 없었다.
잡학 부분에 대해서도 김종직이 그런 발언을 했었다곤 하나[16] 이후 조선이 정말로 무기 개발에 게을렀던가?[17] 되려 임진왜란때 많은 유학자들이 의병을 일으켜서 직접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며 패배도 많았지만 승리도 하였다. 북벌같은 명분으로 무기 연구를 무시하지 않았으며[18] 조엄 등은 일본에서 고구마 같은 작물을 들여오기도 했으며 잡학에 관심이 많았던 실학파라 불리는 이들도 근본은 사림이다. 거꾸로 비교 대상인 관학파와 훈구파를 보면 우선 관학파가 주류이던 세종때엔 반박할 여지 없이 모든 분야에서 눈부신 성과를 보였으나 세조때에 들어서 세조가 집현전을 폐지한 시점에서 관학이 쇠퇴할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19] 이후 홍문관등으로 부분적으로 집현전의 역할을 부활시켰으나 완전한 부활은 아니었으며 이로인해 세조 이전때와같은 다양한 분야의 학문 연구가 힘들어질 수 밖에 없었다. 즉 세조와 그의 공신들인 훈구파가 저지른 행적에 누명을 씌워진것이라 볼수 있다. 훈구파에서 잡학의 재능이 있는 인물이 있던건 이들 중 일부가 관학파 출신인것도 있으나 이 이후 선조에 이르기까지 잡학의 발전이 더뎌졌다 본다면 그때까지 남은 훈구파는 뭘 했던건가? 심지어 총통위를 해체시킨건 세조때다.[20] 즉 훈구파는 과학과같은 분야를 권장하긴 커녕 이들로 인해 이전 관학파의 다양한 학문이 손실된것이라 할수도 있다.[21]
무엇보다 세도정치때를 사림 집권시기라 할수나 있는가도 문제이다. 물론 세도정치를 시작하게 만든 장본인인 김조순은 분명 사림이었으며 안동김씨들도 모두가 무능력자는 아니었고 개중엔 능력있는 인물도 있었다곤 하지만 이당시에 매관매직이 성행했으며 이로인해 나라가 피폐해진것을 생각하면 이는 사림 이전에 국가 시스템 붕괴의 문제이다. 특히나 이 세도 정치를 불러온것이 붕당이 아닌 왕권 강화의 부작용이란걸 생각하면 이것마저도 사림에게 문제를 전가하는건 누명을 씌우는 것이다. 심지어 훈구파가 득세할때마저도 한명회는 자신의 딸들을 이용해 세도를 누리려는 시도까지 했었다.[22]
명과의 사대 문제는 굉장히 복잡한 부분인데 우선 조선 입장에선 명에게 반항할만한 국력은 없었다.[23] 그런 상황에서 이들의 정통성에 도전하는것은 득보다 실이 더 큰 상황이었으며 이들에게 사대하는것은 조선 입장에서 손해조차도 아니었다. 이는 명청 교체기도 마찬가지였으며 청이 완전히 명을 이기리란 보장도 없던 상황에서 청의 편을 들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중립을 취하자니 양쪽 모두에게도 좋지 않은 태도로 보일수밖에 없었다. 결국 청은 그런 불안정한 요소를 없애기 위해 조선을 침공했고 이로인해 굴욕을 당한 조선 입장에서 청이 곱게 보일리가 만무했으며 임란 등으로 빛을 진 명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가진건 당연한 일이다. 무엇보다 명, 청 양국에게 조그마한 빌미를 주더라도 이는 조선에 대한 압박에서 심하면 침공까지 갈수도 있는 문제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의 정통성에 도전하는 행위를 비판하는건 결과적으로는 올바른 판단이다.
또한 조정에서 명나라가 망했다는소식을 듣고 나라가 망했음에도 자결한 충신이없는것에 대해 황제가 임금답지 못하여 지조와 절개있는 자들이 떠나 그렇다고 은근히 명나라를 디스하는 기록이 있으니 정말 명나라를 진심으로 섬겼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24]
신분 관련해서도 과부의 재가를 금지시킨 장본인은 성종이였으며 이는 그 훈구파들 조차 반대하던것을 오직 성종 개인의 의지만으로 강행한 사례다.[25] 심지어 서얼 출신의 등용에 제한을 둔것도 경국대전에 실린 내용이며 장영실과 같은 사례를 생각하면 신분에 따른 차별은 사림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있어온 문제였다. 되려 학문을 갖췄음에도 노비란 신분때문에 능력을 발휘 못하는것을 슬퍼하는 사례들도 훈구파가 사라진 이후의 이야기다. 물론 이를 통해 사림이 신분제에 부정적이었다 할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문제의식이 없거나 이러한 천민에 대한 차별을 강화시키만 해왔다고 하기엔 문제가 있단걸 보여준다.
당초에 이 부분은 천민이란 존재를 남겨둔 조선의 신분제의 한계라고 밖에 할수가 없는 문제이다.[26] 서얼 관련해서도 서얼이 첩의 자식이란걸 생각하면 문제가 발생하는데 서얼을 차별하지 않게되면 처와 첩의 차이에 문제가 생기게 되고 이는 결혼 문화에 문제가 생길수밖에 없다.
결정적으로 관학파는 세조 직전까지, 훈구파는 성종때부터 밀려나서 선조때에나 사라지는데 사림 세력은 성종때부터 등장하기 시작해서 끝까지 갔다. 즉, 이들의 문제점이 크게 부각되는건 그만큼 이들이 오랬동안 조선을 이끌어 왔기 때문이며 이는 거꾸로 조선이 그만큼 유지되고 발전해온것 또한 이들의 공적이란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후 사림파는 수많은 당파로 나뉘어 사림이란 한 단어로 묶을수 있을만한 성격과는 거리가 멀어지며 그들 내부에서도 다양한 성향을 보이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단순히 훈구와의 비교를 위해 하나로 묶는것은 맞지 않는 일이다.[28]
어떻게 보면 이런 논리는 노론 음모론과 약간 이어지기도 한다. 조선의 정치 모습을 비난하면서 처음에는 노론을 비난하다가 서인, 붕당으로 점점 비난하는 범위가 넓어지더니 이젠 사림파 전체로 확대되는 것.
그리고 군사력의 경우, 조선군의 문제점이라고 지적되는것들은 알고보면 조선이 영향을 많이 받은 명나라도 가지고 있던 문제점들이라 조선에게만 뭐라하는것도 부당한 면이 크다. 당장 조선을 비웃은 명나라만 해도 토목보의 변에서 대군을 동원하고도 2만의 몽골군에게 참패하여 황제가 사로잡히는 굴욕을 겪었으며 1555년에는 정규군도 아닌 왜구들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국토가 유린당했을 정도로 처참했다. 출처:https://www.instiz.net/pt/6009168?frompc=1[29] 게다가 명나라도 조선처럼 장군들에 대한 견제와 감시가 지나칠정도로 심했으며[30] 황제들과 대신들이 군사적 역량이 모자라는데도 그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장수들에게 무리한 전쟁을 강요했다가 토목보의 변, 정난의 변, 송산 전투처럼 우세한 상황인데도 열세인 적군에게 참패하는 참사를 발생하게 만들었다.
또한 전면전이 아니라 조선군이 중점으로 뒀던 토벌전만 놓고 보면 명나라와 비교해도 조선군의 전과는 나쁘지 않았다.[31] 1467년 조선과 명의 건주 여진 협공 당시 조선군은 1만 명이었는데, 총 286급을 참수하고 2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被虜人) 7명을 탈취하였다. 반면 명군(明軍)의 군세는 5만 명이었는데, 총 638급을 참수하고 25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 1,165명을 탈취하였다. 언뜻보면 조선군의 전과보다 명군의 전과가 월등해 보이지만, 조선의 동원 병력이 명군의 5분의 1이었다는걸 감안하면 오히려 조선군이 명군보다 병력대비 여진족을 더 많이 죽였으며[32], 예상치 못했던 럭키샷이 터져 예전부터 골칫거리였던 건주여진의 추장 이만주(李滿住)를 조선군이 직접 죽여 복수하기도 했다. [33] 조선군이 건주여진 정벌에서 이만주를 죽인건 명나라에서도 높이 평가했는데 당시 명나라의 황제인 성화제가 세조(조선)를 칭찬하며 후하게 상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 #[34]
2.2. 비판[편집]
시작이 그리 교조주의(敎條主義)적이지 않았든 어쨌든 간에, 사림파가 초반부터 가졌던 문제점이 결국 조선에 오랜 세월에 걸쳐서 악영향을 끼쳤음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문제는 처음부터 이데올로기에 치우친 것과 관련해 점차 시간이 흐르며 성리학이 변질되면서 점차 조선을 망가뜨려갔다. 그나마 견제 세력이 살아있던 훈구파 시절이나 붕당정치가 작동하고 있던 시기에는 그나마 정상적이었으나 순조 이후 노론 벽파가 조정을 장악하면서 사림파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문제점이 드러났다.
일단 사림파가 전형적인 성리학 엘리트로 이루어진 집단이라고는 하지만, 이 엘리트의 판별 기준에서 실무 능력보단 학연 쪽에 기울어진 것이 문제이다. 청요직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특정 자리만 잘 잡는다면, 현장 경험과는 아무 상관없이 엘리트 코스를 밟을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실무 경험이 아예 없거나 몹시 부족한 자가 관직에 앉으면 그 능력을 보장할 수 없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며, 그로 인한 부정적 파급효과는 가히 인재(人災)를 넘어 천재(天災) 수준까지 가기도 한다. 특히 사림파가 이전의 관학파에 비교하면, 실무 능력이 아예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지적을 받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런 폐단 때문이다. 물론 훈구파도 홍윤성 같은 인간 백정 양아치들이 패거리 잘 타서 낙하산으로 떨어진 것은 마찬가지지만 여기는 최항이나 신숙주 같은 일부 관학파 출신이 포함되어 있어 사림파보다는 조금은 낫다.[35]
사림파가 실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이념에만 치우친 것을 극명히 드러내는 유명한 예시가 또 있는데, 성종 시절의 창경궁 통명전 연못 수통 사건이다.
통명전 옆 연못에 물을 대는 수통이 나무로 된 거라서 다 썩어버렸기에, 성종의 명에 의해 시간이 지나도 상하지 않는 구리로 새 수통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사림파 대간인 정성근[36]이 사치라고 간하는 바람에 구리 수통을 부수고 돌로 만들었다. 그런데 만들고 보니 동재보다 석재 수통 제작비가 훨씬 비쌌다. 이 석재 수통은 지금도 창경궁 통명전지에 남아있다. 만약 공임비가 더 드는 것을 감수하더라도 임금의 이미지 메이킹을 강조하거나, 포를 만드는데 필요한 귀중한 구리를 저런 곳에 쓸 수 없다는 주장을 했다면 납득할만한 하나, 실무능력이 전무해서 단순히 돌보다 구리로 수통을 만드니 사치라고 억지를 써서 이미 만들어놓은 것을 더 비싼 것으로 대체하게 한 것.[37] 이 때문에 사림이 정권을 잡기 시작한 이후로는 조선의 정치가 점점 백성들의 현실과 이격된 채 뜬구름 잡는 정치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덕치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정작 그 덕치를 베푸는 데 필요한 기초적인 지식이 전무한 채 공자왈 맹자왈만 반복하는 사람들이 호조판서, 공조판서를 하고 있으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여말선초의 혼란기와 세종대왕의 신밀레 덕분에 현실인식과 실무능력이 없는 무능아들은 살아남을 수가 없던 관학파나, 그 유산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훈구파와 달리, 사림파 집권기에는 현실인식, 실무능력은 전무한 도덕주의 교조주의자들이 학맥이라는 낙하산을 타고 실무경험 없이 청요직을 거쳐 고위직에 떨어지니, 당연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38] 이는 제조업 회사인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의 CEO와 임원진으로 전문적인 관련 지식이 있는 전화기, 재료, 컴공, 물리학과 졸업자들이 사내정치에 의해 철저히 배제되고, 현장 경험과 기술 전문 지식이 하나도 없는 법률자문, 영업부서 출신 인사들만 낙하산으로 떨어진 것과 마찬가지니 말이다.
또한 비교적 과학기술, 경제, 법률, 신무기 개발, 국방 시스템 등 실학에 우호적인 관학파와 훈구파들에 비해 과학기술과 군사를 천시하여, 세종 때부터 지속적으로 발전해 조선 초중 때 절정을 이뤘던 조선의 과학기술과 군사력 발전을 저해시켰다.[39] 특히 사림의 사상적 시초인 조광조는 대놓고 실무에 필수적인 학문인 산학을 천시했다.[40]
권력을 잡은 사림은 점차 고려말 권문세족과 조선초의 훈구파처럼 새로운 기득권층으로써 사회개혁과 변화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였으며 피지배층의 신분상승과 신분상승한 피지배층에 대한 차별도 성리학적 명분을 이용해 훈구파보다 훨씬 노골적이었다.[41] 위의 김종직 예를 보듯이 김종직도 유자광의 단지 서얼출신이라는 이유로 노골적으로 미워하고 배척하였으며 그 외에도 나라에 공을 세워 신분상승된 사람들을 배척하는 등 권력과 신분이동에 반대하였다.[42] 이후 박제가 같은 인재가 등용되지 못하거나 거상으로서 나라에 공을 세워 관직에 오른 임상옥 또한 과거 신분에 의해 박해받는 등 문제를 남긴 부분인 건 분명하다. 그놈의 신분제 때문에 인재들만 쳐버린 격. 물론 이는 동서양 막론하고 있던 일이다만.
붕당으로 분리되기 이전의 비판을 하자면 사림파의 시초라 할만한 김종직과 김일손 사제는 능력도 없는 주제에, 자신들만 옳다는 태도를 보이고 주어진 역할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결과 무오사화를 불러일으켰다. 조광조의 경우에도 지나치게 비현실적인데다가 자신이 부정적으로 보는 인물들을 죄다 소인이라 몰아세우며 천민 출신의 공신을 옥사시키는 등, 신분 차별 문제마저 있었다. 이로 인해 별 문제없던 인물들마저 그들을 모함한 소인배로 후대에 알려게 만들었으며 동시에 동문들이나 제자들, 그리고 유능한 관료들까지 말려들어 후대에까지 불이익을 당하게 만드는 문제를 일으켰다.
무오사화(戊午士禍)를 가끔 무오史화라고도 하는 것도, 사림의 권력쟁취에 사실상 영수(領袖 리더) 역할을 했던 김종직과 그의 제자인 김일손이 사초(史草)를 기록하면서 저지른 뻘짓이 큰 원인이기 때문이다.[43]
현대 한국인들의 조선에 대한 부정적 인식, 특히 씹선비와 같은 비하가 생긴 것에는 사림파들의 역할이 가장 컸다.
세도정치가 사림과는 큰 관련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사림이 조선의 대부분을 보냈다는 것만으로 실무 능력에 대한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렇게 오랫동안 조선의 주요 세력이었는데 유능한 사람이 그만큼도 없으면 그게 더 큰 문제다.[44] 사림이 실무 능력에 비판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애초에 사림의 근본적인 사상부터가 실무와는 거리가 먼 철학 ONLY 스타일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즉 사림의 기본 성향 자체가 실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게다가 실학파도 근본은 사림이라곤 하지만, 정작 그 실학파는 당대엔 사림 내에서 거의 왕따 수준이었다. 애당초 실학파 자체가 정치적으로 배제된 남인계가 다수였고. 실학자들의 근본이 사림이었으니 사림도 실무적인 성향이 있었다는 게 아니라, 그런 성향이 사림 내에서 지지를 얻지 못했던 점이 사림의 성향이 문제가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그 사림들이 잡학이라고 신나게 까던 실용적 학문을 지향한 후대의 실학자들도 당대의 고위급 인사들보다 현실 개혁쪽에 초점을 더 두었을 뿐, 근본적으로 성리학과 크게 구별되지 않았다. 오히려 성리학 자체가 현실지향적, 실용주의적 경향이 큰 학문인 만큼[45], 이쪽이 되려 성리학의 본질로 되돌아간 셈이고, 사림파의 주류 세력이 이단에 더 가까운 이들이다. 그리고 이들조차도 보수파 세력으로 알려져있던 서인이나 그 후신 세력인 노론보다도 오히려 보수주의 성향이 더 강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주류 역사학계의 평가가 날로 박해지는 상황이다[46][47].
성종 시대의 문명적 퇴행에 대해서도 훈구파가 득세할 때라고 주장하였으나. 성종을 검색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그건 즉위 초반의 일에 불과하고, 사림파가 득세하기 시작한 지점이 바로 성종 때라는걸 감안하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변론이다. 성종 치세의 훈구파의 집권은 7년이지만 사림파는 그 나머지 기간인 18년으로 훈구파보다 2배 이상 집권했다.
특히 세조와 훈구의 트롤이 사림에게 누명으로 씌워졌다고 하는데 애초에 관학≠훈구다.[48] 훈구는 관학의 한 갈래였을 뿐 순수한 관학도 아니었다. 또한 훈구가 관학을 온전히 계승했고 아니고 여부를 떠나서 이는 완전히 논점을 흐리는 주장인 것이, 훈구의 공과(功過) 여부를 떠나서 결국 사림이 중점으로 삼던 기치가 실무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그것이 결국 탁상공론과 이념싸움에 매진하는 정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훈구가 못했고 사림이 그걸 밀어냈으면 사림이 잘해야 하는데 그걸 못했으니 나라의 발전이 정체된 것이다. 훈구의 일부가 관학을 망친 것은 사실이지만 관학이 망가진 토대 위에 선 사림이 그걸 완전히 땅 밑으로 묻어버린 걸 비판하는 것이지 조선의 모든 잘못이 온전히 사림만의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또한 사림의 문제는 사림의 학자들 개개인이 무능한 것이 아니라 사림이 추구하던 가치관 자체가 국가의 실무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이다. 재능 있고 유능한 누군가가 사림의 한계를 넘어서서 일할 수는 있어도 사림 자체가 유능한 실무진을 계속 배출하기에는 여러모로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49] 물론 사림이 한 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국가의 제도나 법에 관련된 것들은 트롤링도 많지만 성과도 지속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제도적인 부분은 그나마 괜찮은데 기술적이고 현장에 걸맞는 성과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이다. 당장 사림 집권 이후 실학파가 내놓은 것들을 제외하고 물질적이고 기술적인 결과물이 뭐가 있냐고 물어보면 얼른 떠오르는 게 거의 없다. 결정적으로 세조 때 혁파된 총통위를 부활시켜야 할걸 끝내 하지 않아 조선의 군사력 보강에 영 도움이 되지 않게 된 것이다.
게다가 임진왜란 때의 의병도 무기나 기술 연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애초에 조선은 기술적 연구가 정체된 나라지 인구가 적거나 군대가 없었던 나라도 아니고, 의병들이 기술적인 우위로 일본군에게 승리를 거둔 것도 아니다.[50] 나선정벌 등에서 활약한 것도 조선군의 기술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당시 국왕이었던 효종이 훌륭한 사수를 육성하여 사수의 실력에 기인한 바가 컸다. 게다가 나선정벌 활약의 계기가 된 북벌론은 평소부터 해오던 훈련이 아니라 청나라에게 복수하자는 명분으로 일어난 일시적인 활동이었다.[51] 당시의 상황과 명분에 따라 촉발된 것이지 사림이 군대와 기술을 육성하는 데에 앞장선 것은 결단코 아니다.
그리고 사림이 세도정치를 직접적으로 유발하진 않았지만 결국 세도정치의 간접적인 계기가 된 건 부정할 수 없다. 정확히는 세도정치의 전조라 할 수 있는 게 개판이 된 붕당을 누르려는 영조의 탕평이었고 시초라 할 수 있는 건 정조 대의 홍국영이었다. 그리고 정조 사후 당대의 문제점들이 꼬이고 꼬여 결국 세도정치가 터진 것이다.[52] 물론 이에 앞서 숙종의 환국과 숙종 말년에 노론을 밀어준 것이 영조의 탕평의 원인이기는 하지만, 환국 자체가 그놈의 개판 붕당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왕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53] 거기다 세도정치 시기에도 어디까지는 중앙권력에서 사림이 안동김씨에 밀려난 거지 지방권력까지 밀려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특히 이들은 세도정치 세력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하지 않으면 그들의 대리인인 수령과 아전이랑 같이 농민들을 수탈하였고 그 중 서원을 중심으로 지역 농민들을 수탈하였다. 이는 조선 말기에 민란이 빈번해지는 원흉이 되었으며, 대원군이 47개를 제외한 7백개 서원 전부 폐쇄하는 강경책을 내놓게 된다. 또한 5백년 넘게 군역에 면제된 양반층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제가 실시되자 전국의 사림들은 반발하며 한양으로 집결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할수 없다는 의지와[54] 서원 철폐 취소를 요구한 적도 있다.
게다가 사대부들이 중시했던 재조지은의 경우 명나라에서는 왜란 이후 이 재조지은을 빌미로 조선에게 엄청난 양의 은을 요구했는데 이는 만력제의 잘못으로 명나라의 경제가 어려워지자 만력제는 자신의 국고를 여는 대신 광세라고하여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국의 은을 긁어모았으며 불똥이 조선으로도 튀어 조선에 엄청난 양의 은을 요구했다.
즉 명나라와 만력제는 정작 조선 입장에서도 마냥 고마운 존재는 아니었음에도 조선은 일부 사례들을 제외하면 명나라와 만력제를 재조지은이라며 칭송했던것이다.출처:https://www.google.com/amp/s/mnews.joins.com/amparticle/24096357
문제는 처음부터 이데올로기에 치우친 것과 관련해 점차 시간이 흐르며 성리학이 변질되면서 점차 조선을 망가뜨려갔다. 그나마 견제 세력이 살아있던 훈구파 시절이나 붕당정치가 작동하고 있던 시기에는 그나마 정상적이었으나 순조 이후 노론 벽파가 조정을 장악하면서 사림파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문제점이 드러났다.
일단 사림파가 전형적인 성리학 엘리트로 이루어진 집단이라고는 하지만, 이 엘리트의 판별 기준에서 실무 능력보단 학연 쪽에 기울어진 것이 문제이다. 청요직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특정 자리만 잘 잡는다면, 현장 경험과는 아무 상관없이 엘리트 코스를 밟을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실무 경험이 아예 없거나 몹시 부족한 자가 관직에 앉으면 그 능력을 보장할 수 없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며, 그로 인한 부정적 파급효과는 가히 인재(人災)를 넘어 천재(天災) 수준까지 가기도 한다. 특히 사림파가 이전의 관학파에 비교하면, 실무 능력이 아예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지적을 받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런 폐단 때문이다. 물론 훈구파도 홍윤성 같은 인간 백정 양아치들이 패거리 잘 타서 낙하산으로 떨어진 것은 마찬가지지만 여기는 최항이나 신숙주 같은 일부 관학파 출신이 포함되어 있어 사림파보다는 조금은 낫다.[35]
사림파가 실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이념에만 치우친 것을 극명히 드러내는 유명한 예시가 또 있는데, 성종 시절의 창경궁 통명전 연못 수통 사건이다.
통명전 옆 연못에 물을 대는 수통이 나무로 된 거라서 다 썩어버렸기에, 성종의 명에 의해 시간이 지나도 상하지 않는 구리로 새 수통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사림파 대간인 정성근[36]이 사치라고 간하는 바람에 구리 수통을 부수고 돌로 만들었다. 그런데 만들고 보니 동재보다 석재 수통 제작비가 훨씬 비쌌다. 이 석재 수통은 지금도 창경궁 통명전지에 남아있다. 만약 공임비가 더 드는 것을 감수하더라도 임금의 이미지 메이킹을 강조하거나, 포를 만드는데 필요한 귀중한 구리를 저런 곳에 쓸 수 없다는 주장을 했다면 납득할만한 하나, 실무능력이 전무해서 단순히 돌보다 구리로 수통을 만드니 사치라고 억지를 써서 이미 만들어놓은 것을 더 비싼 것으로 대체하게 한 것.[37] 이 때문에 사림이 정권을 잡기 시작한 이후로는 조선의 정치가 점점 백성들의 현실과 이격된 채 뜬구름 잡는 정치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덕치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정작 그 덕치를 베푸는 데 필요한 기초적인 지식이 전무한 채 공자왈 맹자왈만 반복하는 사람들이 호조판서, 공조판서를 하고 있으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여말선초의 혼란기와 세종대왕의 신밀레 덕분에 현실인식과 실무능력이 없는 무능아들은 살아남을 수가 없던 관학파나, 그 유산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훈구파와 달리, 사림파 집권기에는 현실인식, 실무능력은 전무한 도덕주의 교조주의자들이 학맥이라는 낙하산을 타고 실무경험 없이 청요직을 거쳐 고위직에 떨어지니, 당연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38] 이는 제조업 회사인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의 CEO와 임원진으로 전문적인 관련 지식이 있는 전화기, 재료, 컴공, 물리학과 졸업자들이 사내정치에 의해 철저히 배제되고, 현장 경험과 기술 전문 지식이 하나도 없는 법률자문, 영업부서 출신 인사들만 낙하산으로 떨어진 것과 마찬가지니 말이다.
또한 비교적 과학기술, 경제, 법률, 신무기 개발, 국방 시스템 등 실학에 우호적인 관학파와 훈구파들에 비해 과학기술과 군사를 천시하여, 세종 때부터 지속적으로 발전해 조선 초중 때 절정을 이뤘던 조선의 과학기술과 군사력 발전을 저해시켰다.[39] 특히 사림의 사상적 시초인 조광조는 대놓고 실무에 필수적인 학문인 산학을 천시했다.[40]
권력을 잡은 사림은 점차 고려말 권문세족과 조선초의 훈구파처럼 새로운 기득권층으로써 사회개혁과 변화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였으며 피지배층의 신분상승과 신분상승한 피지배층에 대한 차별도 성리학적 명분을 이용해 훈구파보다 훨씬 노골적이었다.[41] 위의 김종직 예를 보듯이 김종직도 유자광의 단지 서얼출신이라는 이유로 노골적으로 미워하고 배척하였으며 그 외에도 나라에 공을 세워 신분상승된 사람들을 배척하는 등 권력과 신분이동에 반대하였다.[42] 이후 박제가 같은 인재가 등용되지 못하거나 거상으로서 나라에 공을 세워 관직에 오른 임상옥 또한 과거 신분에 의해 박해받는 등 문제를 남긴 부분인 건 분명하다. 그놈의 신분제 때문에 인재들만 쳐버린 격. 물론 이는 동서양 막론하고 있던 일이다만.
붕당으로 분리되기 이전의 비판을 하자면 사림파의 시초라 할만한 김종직과 김일손 사제는 능력도 없는 주제에, 자신들만 옳다는 태도를 보이고 주어진 역할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결과 무오사화를 불러일으켰다. 조광조의 경우에도 지나치게 비현실적인데다가 자신이 부정적으로 보는 인물들을 죄다 소인이라 몰아세우며 천민 출신의 공신을 옥사시키는 등, 신분 차별 문제마저 있었다. 이로 인해 별 문제없던 인물들마저 그들을 모함한 소인배로 후대에 알려게 만들었으며 동시에 동문들이나 제자들, 그리고 유능한 관료들까지 말려들어 후대에까지 불이익을 당하게 만드는 문제를 일으켰다.
무오사화(戊午士禍)를 가끔 무오史화라고도 하는 것도, 사림의 권력쟁취에 사실상 영수(領袖 리더) 역할을 했던 김종직과 그의 제자인 김일손이 사초(史草)를 기록하면서 저지른 뻘짓이 큰 원인이기 때문이다.[43]
현대 한국인들의 조선에 대한 부정적 인식, 특히 씹선비와 같은 비하가 생긴 것에는 사림파들의 역할이 가장 컸다.
세도정치가 사림과는 큰 관련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사림이 조선의 대부분을 보냈다는 것만으로 실무 능력에 대한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렇게 오랫동안 조선의 주요 세력이었는데 유능한 사람이 그만큼도 없으면 그게 더 큰 문제다.[44] 사림이 실무 능력에 비판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애초에 사림의 근본적인 사상부터가 실무와는 거리가 먼 철학 ONLY 스타일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즉 사림의 기본 성향 자체가 실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게다가 실학파도 근본은 사림이라곤 하지만, 정작 그 실학파는 당대엔 사림 내에서 거의 왕따 수준이었다. 애당초 실학파 자체가 정치적으로 배제된 남인계가 다수였고. 실학자들의 근본이 사림이었으니 사림도 실무적인 성향이 있었다는 게 아니라, 그런 성향이 사림 내에서 지지를 얻지 못했던 점이 사림의 성향이 문제가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그 사림들이 잡학이라고 신나게 까던 실용적 학문을 지향한 후대의 실학자들도 당대의 고위급 인사들보다 현실 개혁쪽에 초점을 더 두었을 뿐, 근본적으로 성리학과 크게 구별되지 않았다. 오히려 성리학 자체가 현실지향적, 실용주의적 경향이 큰 학문인 만큼[45], 이쪽이 되려 성리학의 본질로 되돌아간 셈이고, 사림파의 주류 세력이 이단에 더 가까운 이들이다. 그리고 이들조차도 보수파 세력으로 알려져있던 서인이나 그 후신 세력인 노론보다도 오히려 보수주의 성향이 더 강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주류 역사학계의 평가가 날로 박해지는 상황이다[46][47].
성종 시대의 문명적 퇴행에 대해서도 훈구파가 득세할 때라고 주장하였으나. 성종을 검색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그건 즉위 초반의 일에 불과하고, 사림파가 득세하기 시작한 지점이 바로 성종 때라는걸 감안하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변론이다. 성종 치세의 훈구파의 집권은 7년이지만 사림파는 그 나머지 기간인 18년으로 훈구파보다 2배 이상 집권했다.
특히 세조와 훈구의 트롤이 사림에게 누명으로 씌워졌다고 하는데 애초에 관학≠훈구다.[48] 훈구는 관학의 한 갈래였을 뿐 순수한 관학도 아니었다. 또한 훈구가 관학을 온전히 계승했고 아니고 여부를 떠나서 이는 완전히 논점을 흐리는 주장인 것이, 훈구의 공과(功過) 여부를 떠나서 결국 사림이 중점으로 삼던 기치가 실무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그것이 결국 탁상공론과 이념싸움에 매진하는 정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훈구가 못했고 사림이 그걸 밀어냈으면 사림이 잘해야 하는데 그걸 못했으니 나라의 발전이 정체된 것이다. 훈구의 일부가 관학을 망친 것은 사실이지만 관학이 망가진 토대 위에 선 사림이 그걸 완전히 땅 밑으로 묻어버린 걸 비판하는 것이지 조선의 모든 잘못이 온전히 사림만의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또한 사림의 문제는 사림의 학자들 개개인이 무능한 것이 아니라 사림이 추구하던 가치관 자체가 국가의 실무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이다. 재능 있고 유능한 누군가가 사림의 한계를 넘어서서 일할 수는 있어도 사림 자체가 유능한 실무진을 계속 배출하기에는 여러모로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49] 물론 사림이 한 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국가의 제도나 법에 관련된 것들은 트롤링도 많지만 성과도 지속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제도적인 부분은 그나마 괜찮은데 기술적이고 현장에 걸맞는 성과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이다. 당장 사림 집권 이후 실학파가 내놓은 것들을 제외하고 물질적이고 기술적인 결과물이 뭐가 있냐고 물어보면 얼른 떠오르는 게 거의 없다. 결정적으로 세조 때 혁파된 총통위를 부활시켜야 할걸 끝내 하지 않아 조선의 군사력 보강에 영 도움이 되지 않게 된 것이다.
게다가 임진왜란 때의 의병도 무기나 기술 연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애초에 조선은 기술적 연구가 정체된 나라지 인구가 적거나 군대가 없었던 나라도 아니고, 의병들이 기술적인 우위로 일본군에게 승리를 거둔 것도 아니다.[50] 나선정벌 등에서 활약한 것도 조선군의 기술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당시 국왕이었던 효종이 훌륭한 사수를 육성하여 사수의 실력에 기인한 바가 컸다. 게다가 나선정벌 활약의 계기가 된 북벌론은 평소부터 해오던 훈련이 아니라 청나라에게 복수하자는 명분으로 일어난 일시적인 활동이었다.[51] 당시의 상황과 명분에 따라 촉발된 것이지 사림이 군대와 기술을 육성하는 데에 앞장선 것은 결단코 아니다.
그리고 사림이 세도정치를 직접적으로 유발하진 않았지만 결국 세도정치의 간접적인 계기가 된 건 부정할 수 없다. 정확히는 세도정치의 전조라 할 수 있는 게 개판이 된 붕당을 누르려는 영조의 탕평이었고 시초라 할 수 있는 건 정조 대의 홍국영이었다. 그리고 정조 사후 당대의 문제점들이 꼬이고 꼬여 결국 세도정치가 터진 것이다.[52] 물론 이에 앞서 숙종의 환국과 숙종 말년에 노론을 밀어준 것이 영조의 탕평의 원인이기는 하지만, 환국 자체가 그놈의 개판 붕당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왕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53] 거기다 세도정치 시기에도 어디까지는 중앙권력에서 사림이 안동김씨에 밀려난 거지 지방권력까지 밀려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특히 이들은 세도정치 세력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하지 않으면 그들의 대리인인 수령과 아전이랑 같이 농민들을 수탈하였고 그 중 서원을 중심으로 지역 농민들을 수탈하였다. 이는 조선 말기에 민란이 빈번해지는 원흉이 되었으며, 대원군이 47개를 제외한 7백개 서원 전부 폐쇄하는 강경책을 내놓게 된다. 또한 5백년 넘게 군역에 면제된 양반층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제가 실시되자 전국의 사림들은 반발하며 한양으로 집결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할수 없다는 의지와[54] 서원 철폐 취소를 요구한 적도 있다.
게다가 사대부들이 중시했던 재조지은의 경우 명나라에서는 왜란 이후 이 재조지은을 빌미로 조선에게 엄청난 양의 은을 요구했는데 이는 만력제의 잘못으로 명나라의 경제가 어려워지자 만력제는 자신의 국고를 여는 대신 광세라고하여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국의 은을 긁어모았으며 불똥이 조선으로도 튀어 조선에 엄청난 양의 은을 요구했다.
즉 명나라와 만력제는 정작 조선 입장에서도 마냥 고마운 존재는 아니었음에도 조선은 일부 사례들을 제외하면 명나라와 만력제를 재조지은이라며 칭송했던것이다.출처:https://www.google.com/amp/s/mnews.joins.com/amparticle/24096357
3. 나무위키에 등재된 사림파 인물[편집]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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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대 집권자 · 집권 붕당 |
[1] 죽림칠현 등 예로부터 많이 쓰이던 글자였다.[2] 정치적인 이유로는 처음부터 조선 건국에 반대했던 사람들이 주축이 된 집단들이어서 명분이 충분했다.[3] 훈구파의 출현 시점은 계유정난부터이다.[4] 성종이 어린 나이에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성종의 아내가 훈구파의 영수(領袖)인 한명회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성종이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훈구파 덕이 컸다고는 하나, 훈구파가 유자광과 한치인의 세력으로 나뉘어 왕권과 맞서게 되자, 그 대항마에 가까운 성리학적 이상주의를 외치던 사림을 밀어주게 된 것이다.[5] 그러나 사림을 밀어준 성종은, 훗날 성리학적 이상(理想)군주를 원하던 사림에게 허구한 날 까인다. 예를 하나 들자면, 궁궐의 나무로 만든 수통이 오래되어 구리로 새로 만들려고 했는데, 대간 정성근이 "어찌 사치를 부릴 수 있사옵나이까!"라며 빽빽댔다. 그래서 결국 돌로 만들긴 했는데, 성종이 꽤 속이 상했는지 나중에 구리 수통을 꺼내서 "이거 내비두면 신하들이 또 나 사치한다고 깔 테니깐 때려 부숴버려!"라는 식으로 나름 울화통을 터뜨린다. 더욱 웃기는 건 구리로 만들었을 때보다 돌을 다듬어 만든 게 비용이 더 들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정책 입안 → 사림의 반발 → 수정 혹은 철회 → 화풀이"라는 순환고리는 《성종실록》에서 아주 많이 보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던 성종의 아들은 즉위한 뒤 전대미문의 사림 숙청을 감행한다.[6]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1》, 역사비평사, 2009, p259~261[7] 김굉필의 제자인 조광조가 행한 현량과가 결정적이다. 인재를 골고루 천거하여 등용한다는 의도는 좋았는데, 학연+인맥+지연(地緣)의 부정적인 점들만 모아놓은 종합선물세트 같은 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조광조 항목 참고.[8]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 홍문관(弘文館). 오늘날의 탄핵기관 & 언론기관과 유사하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9] 조선 시대 육조의 하나인 이조의 전랑이다. 인사과답게 관리의 등용/해임에 큰 힘을 행사할 수 있는데다, 후임의 추천권까지 있었기에 진정한 신의 자리였다. 게임에서 유닛 배치를 우리 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리라고 볼 수 있다.[10] 관학파랑 훈구파보다는 비교적 딱딱했던 것이 사실이긴 하다.[11] 뭔가 거창한 표현이지만 까놓고말해 양반만이 잘먹고 잘살아야하고 백성들은 신분제에 저항할 수 없도록 죽도록 힘들고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오직 양반들만을 위한 지극히 이기주의적인 발상에 불과하다.[12] 율곡 이이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이이의 7남매가 모여 유산을 분배하며 작성한 문서. 알다시피 이이는 16세기 조선 성리학의 태두(泰斗)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학자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성리학이 당시부터 굳은 학문이었다면, 그런 집안에서 이런 사료(史料)가 나오리라 생각하긴 힘들다.[13] 그러나 사림 초창기, 채수같은 사람을 보면 교조주의적 성향이 초창기에도 어느 정도 있었던 건 사실이다. 이런 교조주의자(敎條主義者)의 좋은 예가 바로 조광조다. 청렴결백하고 이상정치를 추구한 학자요 선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역사를 좀 깊이 공부해보면 조광조는 내 생각만이 옳다고 소리치고 다닌 자였다.[14] 또한 이이의 경우는 신사임당 문서를 봐도 알 수 있지만, 덕수 이씨 가문 자체가 원래부터 여자들의 힘이 강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이이는 신사임당의 영향으로 한때 승려가 된 적도 있는 인물이다. 불경공부 열심히 한 결과 성리학을 불교적 성향을 잔뜩 섞어서 심성학으로 변천시키기도 했지만.[15] 조광조의 문제점중 하나가 천민 출신이던 공신을 주로 죽게 만들었단 부분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천민이라고 모두 무능한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관료 능력이 있어서 관직에 오른것인가? 천민 등 사림들에게 있어서는 기피되는 신분 출신들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것 외에 다른 출세수단이 있었는데 공을 세워 공신이 되는것이었다. 특히 세조, 중종 때는 엄청난 공신을 제조했고 그러니 사림들 입장에서는 신분은 미천한데 벼락출세한 인물들이 나올 수가 있던거다. 문제는 공을 세웠는 이유로 출세한 이들이 과연 실력도 검증되었는지 의문이라는것 더 처참한건 세조, 중종은 원종공신까지 합쳐 수천명이나 책봉했는데 그들 상당수는 공도 없는데 책봉된게 대다수다.[16] 심지어 김종직은 후대의 평가가 그리 좋지 못하다.[17] 임진왜란때의 졸전행보를 보인 선조 역시도 무기 개발에는 뒷전인 왕이 아니라서 이순신이 그렇게나 써먹은 천차총통은 바로 선조때 개발되었고 일본군에게 털린 인상만 깊어서 그렇지 북방의 여진족과의 분쟁에서는 잘 대처했다.[18] 이는 나선 정벌 등에서 활약한것으로 알수 있는 부분이다.[19] 이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는데, 애초에 중화식 관료제를 채택한 국가에서는, 송나라 이후 관학은 줄곧 쇠퇴 일변도였다. 애초에 관학은 국초에 매우 짧은 기간에만 유지될 뿐, 장기간 유지되었던 적 자체가 없던것이다. 애초에 정치집단으로서 자생적인 생명력이 없던 집단이 관학파이다. 역사적 사례를 참고 할 때, 관학의 쇠퇴는 필연일 뿐이다. 참고로 세종시절이라고 관학파가 멀쩡 했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냥 세종의 하드케리였을 뿐, 이 시기도 만만치않게 썩어돌아가던 시절이다. 황희집안 비리 하나를 덮어주기 위해서 관학파 중진이 총 출동하여 세종 vs 관학파 올스타 전 빅매치를 치룬 것만 봐도... 집현전의 연구기관으로서의 능력도 세종 후기로가면 시들해지고, 세종사후 문종와병이 시작되자, 이들은 정치적 적대세력인 고명대신을 쳐낸다는 이유로 계유정난에 적극, 소극적으로 협조까지 했었다...[20] 다만 총통위의 해체와 화기 기술개발의 정체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입증되기 힘들다. 총통위는 그 자체로서 화기를 연구하는 기구가 아닌, 화기의 운용과 일선 부대에 보급, 훈련을 담당하는 특수기구였고, 이들이 해체된 것은 그 목적이 달성되었기에 해체된 것인지라... 일단, 세조 이후 화기개발에 있어 이전과 같은 적극성이 없어진 것은 사실이긴 하다. 다만 그 이유가 세조와 훈구파의 협소한 전략안 때문이 아닌, 당대의 기술적 한계로 인해, 그 이상의 화기를 개발하는것은 비용 낭비였기 때문이다. 세조가 이만주를 척살 한 이후 대규모 정규전은 점차 줄어들어갔다. 이 상황에서 군비라도 남아 돌면 모르겠지만 조선의 군비는 이미 세종시절부터 고갈된 상황이었다...[21] 단, 훈구파의 정의부터도 애매한데다가 엄밀히 말해 세조의 독단에 의한 행위이니 훈구로 분류된 인물들이 어떤 성격이었다고 정의 내리기 힘든 부분이 있다.[22] 반대로 세조같은 인물의 독단으로 만들어진 폐해와 공신들이 지나치게 큰 권위를 가져 만든 병크들을 훈구파로 분류되는 모든 인물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23] 삼국시대처럼 중국이 남북으로 혹은 소규모 국가들이 자웅을 겨루던 시대라면 모를까 이 당시는 그런건 택도 없었다.[24] 상이 이르기를,"3백 년을 지켜온 종묘 사직이 일조에 빈 터가 되어 버렸으니, 의당 순절한 신하들이 있었어야 할 터인데, 지금까지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하니, 석윤이 아뢰기를,"만일 절개를 지키고 의리에 죽은 사람이 있었다면, 비록 어리석은 남녀라도 반드시 모두 그들을 칭송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적막한 것은 반드시 황제가 임금답지 못하여 환관들이 정권을 쥐게 되고, 예의가 쓸어버린 듯이 흔적도 없고, 염치가 무너져 버림으로써 지조와 절개 있는 사대부들이 이미 먼저 자리를 떠나가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pa_12208023_002[25] 교육과정에서는 훈구와 성종이 대립한 것처럼 가르치지만, 몇몇 사례를 제외한다면, 훈구는 기본적으로 근왕세력이었다. 그런 이들도 과부개가금지법의 실익은 도통 이해할 수 없어서 반대했던 것이다..[26] 이에 대해서 정도전은 천민도 없애야 한다는 개혁안을 가지고 있었었다.[27] 문제는 이 첩을 양반가에서 들일수 밖에 없는 이유가 종종 있곤 하는데 우선 그집 처의 건강에 문제가 생겨서 집안일을 돌보기 힘들때 그것을 대신해주기 위해 들이기도 했으며 관직 특성상 본가에서 떨어져 지낼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 지역에서 살기 위해 첩을 들이는 등 생활형 문제도 적지 않았다. 물론 성적인 이유도 적지 않았고 현대적 관점에선 결코 좋게 볼수 없는 부분이지만[28] 이는 훈구파 또한 마찬가지인데 하다못해 고려의 학자로부터 이어진 학연에서 갈라진 사림과 달리 이쪽은 명백히 묶일만한 기준이 사림파와의 갈등 외엔 없다.[29] 이 부분에 대해서는 척계광이 원앙진 전법을 개발하면서 해결되었다는 반론이 있지만 척계광은 왜구에 특화된 전술을 이용해 척가군이라는 정예병을 양성했을뿐 당시 명나라군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해결하지는 못했다.[30] 이로 인해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이 웅정필과 원숭환이다.[31] 당시 명나라는 비록 토목보의 변이후 영락제시절에 비해서는 국가위상이 낮아졌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여전히 오늘날 미국 정도의 위상을 가진 강대국이었다.[32] 당시 명나라군은 1만명당 128명의 여진족을 죽였다.[33] 출처:https://www.krm.or.kr/krmts/search/detailView.html?dbGubun=SD&category=Report&m201_id=10038483&local_id=10052878[34] 하사품이 하도 많아서 세조(조선)가 "우리 나라는 작은 공(功)으로써 천은(天恩)을 우악하게 받으니, 황공하여 몸둘 바가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35] 홍윤성과 같은 사례는 정통성 없이 찬탈로 정권을 잡은 세조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과도하게 공신을 만들고 이들의 힘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비정상적인 사례다. 조선 초기만 해도 단순히 공자왈 맹자왈만 잘 한다고 고관대작에 오르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역관이나 의관과 같은 실무직들도 나름의 대우를 받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장영실. 그는 노비출신에서 면천되어 관직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세자인 문종과 함께 연구하여 측우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 성종조차 사림파의 반대를 물리치고 능력 있는 중인들을 문관 및 무관으로 등용했다. 또 황희나 조말생같은 조선 초 네임드 정승 판서급들의 실무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들이 조선 중후기 같으면 당장 탄핵되었을 법한 대형 부패 스캔들에도 버틴 건 이들 없이는 행정을 꾸리기 힘들다는 세종의 판단 덕이다.[36] 진주 정씨 공대공파. 부친은 훈구 대신인 정척인데 성향은 완전한 사림이다. 정척은 계유정난으로 사사된 정분의 먼 친척(11촌)으로, 관학/훈구/사림을 가문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예시중 하나다. 이 때문에 훈구가 사림을 쓸어버리고 싶어도, 아버지는 훈구인데 아들은 사림인 경우가 많아서 쓸어버릴 수도 없었다. 따라서 사림을 강남 좌파에 비유하는 경우도 있다.[37] 참고로 이 사태를 만든 대간 정성근은 성종의 국상을 이일역월제로 치르는 것을 비판하고 혼자 삼년상을 치러 연산군에게 어그로를 끌었고, 이 바람에 갑자사화 때 세트로 사사된다.[38] 학맥 낙하산도 문제지만 실무 경험 없이 삼사와 대간 경력만으로 고위직이 되는게 가능했던 조선의 승진체계가 수포자 조광조 같은 교조주의 무능력자들이 고위직에 진입할 수 있게 만든 대표적인 원흉으로 꼽힌다. 후술된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는 직책에 관계 없이 입사 직후 fab에 3개월을 처박아두거나 생산라인에서 차를 조립시킨다.[39] 사림의 시초중 한명인 김종직은 세조에게 "왕이 잡학에 집중해서 쓰나요?" 라고 말해 미움을 받아서 파직된 이야기도 있다.[40]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있는데 당시 동아시아 국가들의 과학기은 정체되어 있었고 조광조 처럼 수학을 천시한 이도 있었지만 천문학과 수삭부분은 꾸준히 연구를 이어갔다.[41] 조선에서 남녀차별과 서얼차별이 심해지고 가부장제가 강화된 시기가 사림이 집권하고 성리학이 교조화되던 시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들은 '남자는 남자의 할 일이 있고 여자는 여자의 할 일이 있는 것이다.' 라는 의미일 뿐인 음양사상을 이상하게 왜곡해 남존여비라는 해괴한 원칙을 만들어냈다.[42] 한 보기로 노비에서 시작해 출세를 거듭해 형조판서까지 간 반석평도 사림들 등쌀에 시달렸다. 오죽했으면 사관이 "사람을 능력보고 써야지 가문보고 쓰면 되나?" 라고 기록했을 정도.[43] 그들이 한 행위는 역모라 해도 할 말 없는 중죄였다. 더 큰 문제는 실무능력도 없고 현실도 모르지만 나는 대인이고 군자라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답게, 처음엔 자신들이 한 짓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인식하지도 못했다는 점이다. 자세한 것은 무오사화 항목 참조.[44] 사림이 독점적으로 집권한 300여년 동안 실무적 능력이 출중한 관료, 명재상으로 류성룡,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김육, 최명길, 윤휴, 채제공등이 꼽히는데, 사림 이전에 겨우 50년 동안 존재한 관학파 신료들 중 실무적으로 출중한 이들로 정도전, 조준, 하륜, 황희, 맹사성, 허조, 조말생, 윤회, 김종서, 황보인, 남지, 정분, 정인지, 최항, 신숙주 등이 꼽힌다. 사림 집권기가 관학파 집권기보다 6배 이상 긴데 사림 중에 실무능력이 우수하다고 꼽히는 사람의 수가 관학파의 것보다 적다. 심지어 앞서 기술한 사림출신 명재상 중 윤휴, 채제공은 후술하였듯이 남인 출신으로 사림 내에서는 거의 왕따수준이었다.[45] 괜히 정도전같은 초기 개국공신들이 성리학에 기반한 이상국가를 지향한 게 아니다.[46] 오죽하면, 임오화변의 원인을 사도세자가 노론의 주류 세력과의 돈독한 유대로 인해 진보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기 시작하자, 이를 보수주의자였던 아버지 영조가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노론 자체를 박살낼 목적으로 벌였다는 가설까지 나오고 있다. 물론 꼭 이것만 가지고 아들을 죽이는 비정한 짓을 벌인 건 아니겠지만, 노론과 함께 어울리면서 아들이 조선 사회의 기강을 흐트러놓는다고 생각한게, 아들을 미워하기 시작한 계기로 작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47] 실학자들보다는 정몽주, 정도전 등의 여말선초 때의 성리학자들이 진짜 진보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아예 오늘날에도 대한민국 사회에 완전히 도입되지 못한 토지 공개념에 기반해서 계민수전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고, 혈통에 관계없는 공정한 인재 등용을 위해 과거 제도를 매우 중시하면서, 기득권 자체를 완전히 타파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실학자들 중에서 정말로 진보적이었다고 평할 수 있는 인물은 연암 박지원이나 담헌 홍대용 등 몇 사람 안 된다.[48] 훈구는 기존의 관학파 중 대대로 고관대작을 이어오며 권세를 쌓은 기존 고위 사대부 층과 계유정난 이후 세조의 공신남발로 인해 새로이 권세를 얻은 세력이 합쳐져 이루어진 세력이다. 당연히 모든 관학파가 훈구였던 것은 아니다.[49] 이는 현대의 운동권 세력들이 세대를 막론하고 욕을 먹는 이유와 비슷하다. 운동권 역시 독재세력에 저항하면서 쌓은 논파력이나 철학적 지식은 뛰어나지만, 쌓은 지식이 그것뿐이라 막상 국가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실무적 지식은 제로에 가깝다는 것, 그리고 그런 자신들의 문제점을 '우리가 더 고등의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우리가 더 우월하다.' 는 논리로 정신승리한다는 점에서 사림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50] 의병의 승리 역시도 대부분 소규모 전투가 대다수지 대규모 전투는 관군, 명나라군과의 협동없이는 별로 기를 펴지 못했다. 물론 이는 국가적 조직인 관군, 명나라군에 비해 모든 면에서 절대적 열세에 놓은 의병의 한계이기도 하지만[51] 물론 현대의 평가는 실제로 청나라에게 복수하기보단 이걸 명분으로 조선의 군사적 제도를 정비했다는 것이지만 어쨌든 조선 전반에 걸친 것이 아니었다.[52] 정확하게는 이전까지 개판이 되었던 붕당을 영조와 정조가 자신들의 카리스마와 강력한 왕권으로 억지로 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홍국영 때부터 기미를 보이던 외척 중심의 척신 정치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지나친 감이 많지만 붕당은 어찌되었든 특정 집단의 정치적 독점을 막는다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으나, 갈수록 견제와 균형이 무너지고 폐쇄화, 극단화되는 문제점이 나타났다. 그래서 이에 염증을 느낀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으로 붕당을 조지는 과정에서 근왕세력의 필요성을 느꼈고, 이 두 왕의 눈에 든 것이 풍산 홍씨와 안동 김씨라는 외척이었다. 그러나 영조와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가 즉위한 후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마저 죽자, 그동안 왕권 강화라는 명분으로 권력이 비대해진 외척세력을 막을 수 있는 집단이 하나도 없었고, 이후에 김조순에 의해 벽파가 숙청되며 붕당이 사실상 소멸하자 본격적인 세도정치가 시작된다.[53] 다만 숙종이 환국을 시행한 것 자체는 정치를 정상화하기 위해서라기보단 본인의 왕권 강화를 위해서였다. 붕당이 개판이라서 숙종이 그걸 정상화시켰다는 게 아니고, 왕이 나서서 손을 볼 때까지 개판이 정리가 안 되던 붕당 자체의 폐단을 지적한 것이다. 문제는 숙종의 성격이 워낙에 지랄맞았다는 것. 자기 딴에는 개판이었던 붕당을 손보겠답시고 환국을 시행했으나, 그 과정은 인현왕후와 장희빈이라는 두 여인이 죽어나가고 수많은 서인과 남인들이 쓸려나갈 정도로 피바다였기에, 붕당이 개판이 된 원인 중 하나인 서로에 대한 증오를 오히려 증폭시키고 말았다. 송시열-윤휴 관계를 보면 알겠지만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여길 정도로 싫어하면서도 그의 능력만은 높이 평가해 윤휴를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영조때가 되면 소론 영수 이광좌에 대해서 노론가에선 아이들도 광이나 광좌라 부르는 꼴이다. 여기에 상대 당을 역당(역적의 당), 상대 당의 인물들을 소인으로 낙인찍어 비하하는건 덤.[54] 이때 호포제를 반대한 명분은 "선비들에도 세금을 거두면 반상의 구별이 어렵다"는 궤변이었다. 당시 대원군이 호포제를 실시할 때 선비라 할만한 이들은 2010년대에 생긴 단어를 빌려 씹선비라 불러야 할 정도로 부패하고 자질이 없었으며(세도정치기 세도가에 맞서긴 커녕 세도가 문전이나 기웃대거나 아부하던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나마 이항로와 그 제자들은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을 닦아 명분상 꿀릴건 없었다만.) 세금 문제도 원래 세금은 양인(양반 포함)은 다 내는것이다. 효종 때 호포제 실시 논의가 있었을때 반대파들은 "우리나라를 지탱하는건 사대부들인데 그들에게 세금 거두라 하면 원망이 크지 않을까요?"처럼 궁색하긴 하지만 대원군 때처럼 뻔뻔한 주장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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