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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보수의 재구성(박형준, 권기돈)
김대호(사회디자인연구소장) 승인 2019.04.19
한국사회의 사상이념 논쟁의 수준을 한뼘은 높일 것 같은 책이 한 권 나왔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공화(주의), 평등(주의), 국가(주의), 개인(주의), 정치, 정부 등 헌법의 핵심 가치와 수단을 화두로 연구, 고민하고 실천하고 투쟁하는 사람들에게는 가히 교과서라고 할만한 책이다. 혼돈스러운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한다. 그리고 정치철학적으로 채워야 할 지적 공극 내지 미완의 과제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을 채우면 우리 사회의 정치철학의 키가 한뼘 두뼘 더 커질 것이다. 이는 수십 수백년에 걸쳐서 공동으로 노력할 대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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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류의 책뭔가 ‘주의’를 주장하는 정치철학 담론--들은 매력이 별로 없다. 거의가 남의 나라(선진국) 얘기라서, 책을 덮고 나면 대체로 공허하다. 다 아는 얘기거나, 아무런 실천적 시사점을 주지 못하는 그저 좋은 얘기 일뿐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 관련 논문이라면 날카로운 깨우침이 있고, 읽은 사람을 이를 기반으로 사물에 대한 이해도=과학기술 수준을 조금이라도 높여 나갈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몰라도(수십 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인문사회과학 책, 그 중에서 이념(정치철학)을 논한 책은 '지금 여기' 한국사회를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우리가 힘겹게 씨름하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해왔다.
아마도 정치의 소명인 국가적 문제 해결에 관한 한 성찰도 반성도 경험도 경륜도 필요 없게 만드는 야만적인 한국 정치 현실 때문에 더 더욱 정치철학 내지 국가비전과 전략이 홀대받는지도 모른다. 정치판의 생판 초짜들문국현, 안철수, 문재인, 황교안 등이 열화와 같은 대중의 지지를 모아 당의 실권을 쥐는 현상이 그 단적인 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대중의 이런 행태는 기존 정치 내지 경륜을 자랑하는 정치인들이 정치철학도 없고, 담대한 비전도 없고, (운동, 법안, 예산, 감사, 아젠다 세팅 등에 걸쳐), 날카롭되 숙성이 잘된 대안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두 저자는 “우리에게는 정치철학적으로 더 깊고, 이론적으로 더 정교하고, 미래의 중심 세대에게 더 매력 있는 정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이 책을 썼다. 물론 정치철학적 깊음과 이론적 정교함과 매력은 독자들이 판단할 일이다.
저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은 대체로 책 제목및 부제와 책 띠지와 표지에 집약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도 그렇다. 게다가 이 책은 책 뒷면에 16쪽에 걸쳐서 책의 핵심 내용을 요약해 놓았다. 바로 "자유공화주의선언"이다. 이것이 역사적 선언인지는 독자들이 읽고 한번 판단하기 바란다. 그외 출판사가 만들기 마련인 보도자료에 책의 참신한 주장들이 집약되어 있다.
책의 키워드는 “보수의 재구성” 과 “자유공화주의(21세기 시대정신)”와 “보수는 무엇을 반성하고 무엇을 혁신해야 하는가”이다.
출판사 보도자료 내용 잠깐 훑어보자.
먼저 어감 싸움에서 진보에 한참 지고 들어가는 보수라는 말을 왜 썼는지부터 보자.(그래서 보수 일각에서는 보수 대신 자유라는 말을 쓰자고 하여 지금 널리 회자되는 이름이 자유진영 또는 자유우파라는 이름이다.)
“‘보수’라는 말이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현재 정치지형에서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세력과 국민 들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개념이라면 그 개념을 그대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보수 개념은 과거와는 다른 무언가를 의미한다.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의 축적물 또는 기억 속에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 얼룩은 지우고, 기울어진 것은 바로 잡고, 새로 부가해야 할 것은 추가해서 재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_pp. 33, 34
그리고 공화주의라는 말은 왜 썼을까책(보도자료)은 이렇게 답했다.
“민주주의보다 공화주의를 강조한 것은 파벌의 이익을 넘어서는 국가의 이익이라는 공동선의 중요성과 더불어 권력의 견제와 균형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 결국 자유에 기초한 국가의 생명은 법에 의한 지배이다. 그것만이 권력을 자의적으로 사용하거나 개인의 권리를 함부로 침해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법의 지배는 자유의 보루인 것이다.”_p. 53
그런데 공화주의는 1인 전제/폭정과 다수 전제/폭정 둘 다를 견제 하는 이념인데, 보도자료는 이를 명료하게 표현하지 못한 것 같다. 책 본문에는 잘 나와있던데.......사실 지금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치명적인 문제는 다수 아닌 다수(41% 득표율)의 전제/폭정이다. 선거제도와 권력구조의 치명적인 결함이요, 몇 년 뒤를 보지 못하는 정권의 놀라운 어리석음의 소산이다. 아마 보수/우파를 친일독재, 반북, 반통일, 수구, 기득권, 재벌, 신자유주의의 연합체 내지 계승자로 간주하여 척결되어야 할 적폐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주의에 전혀 맞지 않는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이 민주적 선거로 집권한 것이 국가적 비극 내지 망조의 원천이다.
그나저나 보수주의는 또 뭔가
“보수주의는 원래 인간의 근원적인 도덕적, 지적 불완전성을 인정해 이상적 설계에 기초한 급격한 변화에 반대할 뿐 자생적, 점진적 변화에 반대하지 않으며, 고유의 확정된 설계를 가지고 있지 않 기 때문에 수용력이 큰 이념이라 할 수 있다.”_p. 56
촛불시위가 큰 정치적 변곡점을 만들었기에, 최근 한국에서 널리 퍼진 무지와 착각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았다.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는 직접민주주의가 대의민주주의보다 원리상 뛰어나지만 기술적 불가피성 때문에 대의민주주의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대의민주주의는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직접민주주의보다 우월한 제도이다. 그러므로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 대의민주주의가 중심이고, 직접민주주의가 가미되는 것이지 그 역이 되어서는 곤란하다.”_p. 140
책의 핵심인 공화주의에 대한 설명이다.
“공화주의는 권력자의 전제적, 자의적 지배를 방지하기 위한 시스템이다. 따라서 공화주의의 기본은 견제와 균형의 원리이다. 인간의 불완전성과 권력의 질주 본능을 제어하기 위해 전문화된 조직들이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을 갖추도록 한 것이 삼권분립이고, 그것이 근대 공화주의 체제의 핵심 원리 이다.”_p. 149
“이제 새로운 보수는 시민 참여와 시민적 덕성을 중시하는 시민 공화주의를 중심적 가치로 장착해 야 한다. … 큰 국가가 아니라 큰 시민사회를 지향해야 한다. 이것이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고 또 그것을 윤택하게 할 것이다.”_p. 169
출판사 보도자료 내용은 이 외에도 많은데, 이걸 보고 책을 사서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의문이다. 솔직히 내가 밑줄을 그은 부분과 출판사 보도자료가 겹치는 부분이 그리 많지 않다.
내 눈에 맨 먼저 들어온 것은 책 서론 부분의 한국을 지배하는 보수와 진보 이념의 핵심과 이를 받아 안은 정치세력의 행태에 대한 적확한 묘사다. 글 좀 써 본 사람으로서, 복잡다단한 한국 현실을 정확히 묘사하고 진단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1)진보의 철학부재"에 대한 일침이 따갑다.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나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 전체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맹렬히 비판할 뿐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전체주의적 사회주의 정당과는 연대를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다면, 우리의 경우에는 이 문제가 모호하게 섞여 있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이들이 1980, 1990년대 운동권 문화의 정서적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한국의 진보 좌파는 이념을 앞세우기보다는 여전히 ‘독재’와 ‘민주’의 구도, ‘수구’와 ‘개혁’의 구도로 정치지형을 포획하기를 원했다…..진보 좌파라는 우산하에 온갖 잡동사니가 다 섞여있는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진보 좌파의 이념적 특성”(19쪽)
"집권한 진보 세력이 (집권 전후하여) 얼굴이 달라지는 것은 ‘자유의 가치’를 수단으로 생각하고 ‘평등의 가치’를 목적으로 생각하는데서 연유(20쪽)
그런데 내가 볼 때 이런 현상은 보수나 진보나 공히 권력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평등의 가치 조차 목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얘기다.물론 권력을 목적으로 삼을 수밖에 없도록 몰아가는 어떤 구조가 있다. 더불어민주당 세력이 자신의 이념과 가치가 무엇인지 분명히 표방하는 것을 듣지 못한 이유도 동일하다.
"더불어민주당이 민노당, 통진당, 정의당 등과 공개적이고 치열한 가치 이념 논쟁을 하지 않는 것도….이들이 공유하는 역사의식과 정서적인 동지의식이 이들을 포괄적인 단일한 정체성으로 묶고 있기 때문이다(22쪽)……국민들 입장에서는 국정 방향에 대한 의구심을 키우는 원인이다. 이념과 가치를 당당하게 내세우지 않으면 국민들은 자신의 이념적 프레임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 (22쪽)
내(김대호)가 볼 땐 이런 현상은 민주당, 정의당과 시민단체들이 기본적으로 선악, 정사 구도로 세상을 재단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상대에 온갖 나쁜 색칠을 하여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친일, 부역, 양민학살, 사대, 매국, 부패, 냉전, 세월호 은폐조작, 민족의 화해협력을 질색하는 호전광(전쟁 획책세력), 적폐 등으로 규정한다. 자신들은 ‘촛불혁명’세력 어쩌구 하면서 선이요 정이라고 강변한다. 이런 황당무계하지만 너무나 널리 퍼진 사고방식의 역사적 뿌리와 현실적 뿌리(재생산 메커니즘)가 요즈음의 내 화두 중에 하나다.
보수에 대해서도 철학이 과소하다고 말한다.
"2)보수, 경험의 과잉과 철학의 과소
한국 보수의 뿌리는 근대 이전의 전통에 있지 않다. 이 점이 귀족 사회 전통에서 많은 것을 물려받은 영국이나 유럽의 보수와 한국의 보수가 다른 점이다”(23쪽) 1948년 확립된 대한민국 헌정체제는 당시 한국 사회 발전 단계로 보면 몸에 안 맞은 옷이었다”(23쪽)
내(김대호)가 볼 때는 한국은 귀족 사회 뿐만 아니라 (시민혁명=자유주의 혁명을 주도했던) 상공업자와 전문 직업인(법률가, 의사 등) 등으로 구성된 부르주아지의 전통조차 없다.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으려면 무리(사기, 억압 등)를 할 수밖에 없다. 설상가상으로, 1940~60년대까지는 남한 좌익-북한-중국-소련이 합세한 적화 시도와 생사를 건 내전, 전쟁, 체제 경쟁을 치렀으니, 자유주의, 민주주의, 공화주의가 왜곡, 변질, 억압되지 않을 수가 있나!!! 물론 나는 과거의 얼룩에 대해서는 불같이 분노했으나 나이가 들면서 상당부분, 아픈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보수와 진보의 본질적 차이에 관한 통찰 중의 하나다.
"3)보수의 새로운 가치 정립을 위하여
“보수가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을 수긍하면서 출발한다면, 진보는 본원적으로 인간이 이타적임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편다…...현대의 위대한 성취는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 이기성의 발현이 이타성으로 귀결되는 체제를 발견하고 진화시켰다는데 있다”(33쪽)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있게 읽은 부분은 2부 제5장과 6장이다. 정착과 애착, 시민종교, 행복국가, 행복한 공화주의 등이 나온다. 기존 정치철학에서는 좀체 못 들어본 개념들이다.
"5장 정착과 애착의 시민사회를 위하여
1. ‘우리’라는 1인칭 복수 2. 1인칭 단수로 점철된 한국의 시민사회 3. 한국에는 왜 시민종교가 없을까4. 시민적 덕성이 있어야 복지가 튼튼하다 5. 시민사회를 중시하는 공화주의
책은 로저 스크러튼(roger scruton)의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보수주의는 정착과 애착의 철학......그 출발점은 집(가족)이다. 가족, 이웃, 시민사회라는 1인칭 복수는 공동의 의도없이 자생적으로 발생하였다.(154쪽)
정착의 관념없이 정체성을 구성하기 어렵다……내가 뿌리를 내린 물리적, 역사적 공간을 의미하는 정착, 그리고 그에 대한 나의 애착은 일종의 도덕적 질서로 부과 된다. 이 도덕적 질서 없이는 어디든 삶의 안정적 재생산이 불가능하다. 시장 참여자 사이의 신뢰를 전제하는 경제적 질서도 도덕적 질서에 의존한다.(155쪽)
국민과 국가는 모두 가족, 이웃, 시민사회의 연장. 이웃들이 자유로운 결사를 통해 상향식으로 형성된 것이 국민이다.사회계약을 맺는 사람들은 항상 공동체 속에 존재하는 1인칭 복수로서의 인간이었다......국가주의가 위험한 것은 국가의 촘촘한 통치의 촉수가 이 자생적 1인칭 복수를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156쪽)
소집단에 애착하는 것, 사회에서 우리가 속한 작은 소대(little platoon)를 사랑하는 것은 공적 애정의 첫번째 원칙(즉 기원)이다. 그것은 나라에 대한 사랑과 인류에 대한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연쇄의 첫번째 고리이다….이 작은 소대의 근간은 구성원들 사이의 신뢰다(157쪽)
6장 삶을 고양시키는 정치체제: 어떻게 행복을 추구할 것인가
1. 제퍼슨의 행복추구권 2.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국가 3. 행복 국가의 의미 4. 삶의 세 가지 차원: 합리적, 윤리적, 심미적 차원 5. 행복한 공화주의에 대한 긍정심리학의 함의"
6장에서는 헌법에는 있지만, 기존 정치담론(철학)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은 행복(추구)권을 논한다. 책은 토머스 제퍼슨의 행복추구권을 자유와 연관지어 설명한다.
각자가 저마다의 행복을 선택할 자유, 그리고 행복에 이르는 수단을 자기 스스로 선택할 자유야말로 그것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다.(176쪽)
자유는 가장 근본적으로 선택의 자유..... 국가의 역할은 자유의 영역을 확대하고 선택의 기회를 넓히는 환경을 마련함으로써 개인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국가가 개인의 행복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국민 각자가 넉넉한 자유와 선택의 기회를 가지고 자아실현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182쪽)
정치철학은 흔히 이념이라 부른다. 인간관, 세계관, 가치관 등의 총체다. 정치는 인간사 전반을 다루기에 정치철학은 종합성과 체계성도 갖춰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정치철학은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국가비전과 전략이라고 할 수있다. 그래서 초석, 기둥, 대들보, 외벽, 지붕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된집으로 표현한다.
정치철학의 초석, 기둥, 대들보, 지붕에 해당하는 개념들은 헌법 전문과 조문에 나와있는 가치와 기관들인데,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길고 오랜 고민,토론과 실천, 성찰의 경험과 고뇌가 녹아 있다. 자유, 민주, 공화, 정의, 평등, 법치, 보수, 진보, 가족 국가(이상 여기까지는 다 주의를 붙일 수 있다), 정부, 행복, 균형발전, 시민사회, 시민적 덕성, 빈곤과 고독 등.
한국 정치집단의 강령과 그 골조인 정치철학의 과제는 크게 네가지다.
첫째,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대통령, 국회의원, 지자체장 등 핵심 권좌를 차지하는 것이다. 원래 이것은 정치철학을 실현하는 수단인데, 한국의 야만적 정치행태(사화정치)와 권력구조와 선거제도 등으로 인해 사실상 목적이 되었다. 그리고 모든 공적가치를 왜곡하고 억압하고 변질시키고 멀리 날려 버린다.
둘째, 서구에서 발원한 유서깊은 이념(정치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다. 자유, 민주, 공화, 평등, 정의, 행복등이 핵심 키워드다. 이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문명 국가와 선진 정치라는 집의 기본 골조를 이룬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 지식사회와 정치사회는 이런 기본 설계 능력이 한참 떨어진다.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의 헌법을 벤치마킹해서, 적당히 짜집기 한 헌법을 만들었다고 해서 우리가 살만한 집이 지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재 우리의 정치철학과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주요 개념들이 거의 수입산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핵심 헌법적 가치(자유, 민주, 공화 등)를 표현하는 단어들은 거의 일본 메이지 시대 일본 지식인들이 만든 개념이다.
게다가 모든 정치이념에서 가장 선차적이고 우선적인 개념이 자유인데, 유감스럽게 중국-조선을 관통한 정치철학(유가, 법가 등)에는 자유와 진리 개념이 취약하다. 대신에 좋은 통치와 도덕 개념이 강하다. 특히 예, 인, 덕을 중시한 조선 성리학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누르는 극기, 염치 등을 강조했다. 자유 등 헌법적 가치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래서인지 대한민국 사람들, 특히 진보좌파 성향의 사람들은 북한을 바라볼 때, 자유의 부재에 치를 떠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반대로 대한민국의 자주의 굴절 내지 비교 열위에 대해서는 북한에 주눅이 든 사람이 많다. 핵심 가치 중의 핵심 가치인 자유, 민주, 인권 개념이 뇌리 깊숙히 자리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이 책이 해명하려고 한 것은 헌법적 가치의 정확한 개념 및 역사적 연원과 상호관계와 (우리에게 도움을 줄) 서구의 최신 이론이다. 이 책의 지적 기여의 핵심이다.
셋째, 갈라파고스에 비유할 수 있는 한국의 독특한 국가, 시장, 사회, 문화,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다. 이는 집의 외적 환경이라고 할 수있다. 집이 딛고 선 땅(모래인지 암반인지 경사지인지), 비바람, 추위와 더위 등에 해당된다. 집을 지을 소재(흙, 목재, 벽돌재, 철강재, 유리)도 여기에 포함된다. 사막 지방에 맞는 집과 북극 지방이나 대륙성 기후에 맞는 집은 다르다. 그런데 이런 환경을 직시하지 않고, 선진국 집 설계를 그대로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한국 사회는 정말 독특하다. 지중해 문명권과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 일본과도 다른 점이 너무나 많다. 가히 동양의 갈라파고스라고 할만하다. 토양이 너무나 달라서, 외래 사상들이 그 원산지와 전혀 다르게 변신한다. 조선의 성리학과 북한의 사회주의/주체사상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헌법적 가치들을 대한민국에 이식하여 주요 분야에서 법제도, 정책 등을 도출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이 책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이 다루지 않았다. 이는 한국(조선, 남북한)의 사회(커뮤니티), 사상, 습속(문화), 역사를 천착해야 어느 정도 해명할 수 있다. 물론 정치학이나 사회학을 전공한 저자들이 할 수있는 일은 아니다.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토양을 살피지 않고 펼치는 수입산 담론을 경계한다. 시민적 덕성과 복지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북유럽식 보편복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현실(우리 토양)을 직시하라는 얘기다.
"북구의 관대한(generous) 복지는 북구 국민의 시민적 덕성과 함수 관계이다. 허위급여 청구에 대한 비난의 수치가 높은 국가들은 대개 관대한 실업급여제도를 채택하고, 낮은 국가들은 강한 고용보호제도를 채택했다.(164쪽)
허위 (복지) 급여 청구에 대한 비난의 강도는 프랑스가 꼴찌에서 두번째로 멕시코와 비슷한 수준이다.(166쪽)
북구 출신 조상을 가진 미국인들은 복지 수준에 관계없이 높은 시민적 덕성을 보여준다.(167쪽)
가족, 이웃, 지역사회, 시민사회야 말로 새로운 보수의 일차적 관심 대상이다. 이 자생적 단위들이 보수의 근거지이자 생태숲이다.(168쪽)
넷째, 분야별 정책 전문가, 관료, 언론인, 사회운동가의 경험, 지식을 정치철학의 틀로 해석하고 총화하여, 실천강령으로 집약하는 일이다. 이것이 집의 창문과 방과 가구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 부분은 미완의 과제로 남겨 놓았다. 책 3부에서 집중적으로 다룬 정책은 교육, 젠더, 외교안보통일(북한 북핵), 정부 개혁 분야 정도다.
일반적으로 정치와 정치철학의 핵심 과제나 주제를 다루는 관점은 크게 세가지다.
첫째는 권력(쟁취) 게임의 관점이다. 대부분의 현실 정치인들이 채택하고 있는 관점이다. 여기서 비전/정책은 정치 구도, 인물 다음의 3순위나 4순위다. 사실 그래서 정치철학과 정책(전문가)이 홀대 받는 것이다.
둘째는 주로 서구에 뿌리른 둔 '학'의 관점이다. 정치학, 사회학, 경제학, 철학, 법학, 역사학 등을 전공한 학자들의 관점이다. 이들은 '학'이 제공하는 이론과 프레임으로 세상을 해석한다. 물론 한국은 대단히 독특한 사회고, 또 유학파 학자들이 너무 게을러서(일단 자리만 잡으면 테뉴어도 너무 쉽게 주고, 학생들도 공부할 의사나 능력이 없어도 학위나 학벌을 따기위해 몰려오니까) '학'과 현실의 괴리는 심하다. 아마 한국에서는 정치학과 (현실) 정치만큼 괴리가 심한 분야는 없을 것이다. 다른 분야라고 해서 많이 나아 보이지 않는다.
셋째는 현장이나 실물에서 던져주는 과제(의문) 해결의 관점이다. 이는 기업인(근로자 포함), 언론인, 시민운동가 등 보통 시민이 채택하고 있는 관점이다. 사실 이들이 정치와 각종 '학'의 최종 소비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주로 셋째 관점, 즉 내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현장(구로지역 노동현장과 대우자동차와 지자체 등)에서 솟아오른 의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담론('학')과 현실 정치를 보았다.
어찌보면 나는 '학'의 프레임이나 '권력 게임' 프레임이 아닌, 맨 눈으로 현실을 본 것이다. 내 직관, 내 통찰, 내가 접하는 각종 통계로 세상을 봤다는 얘기다.
거기서 나는 '지금 여기'의 '학'과 '정치'의 부실을 봤고, '학'과 그것이 다루는 '현장'의 부교합(mis matching)도 눈이 아프게 봤다. 그 때문에 의문과 관심 영역이 좌우(수평)로 확대되고, 상하(수직)로 확대되었다. '학'의 성과와 '현실정치'의 고민을 섭렵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그래서인지 현실과 이를 바꿀 킹핀(국가비전과 전략과 킹핀)을 고민하는 나 같은 사람들의 생각의 상단 내지 골조(정치철학)를
깔끔하게 정리해 준 이 책이 여간 반가운게 아니다.
물론 현실에서 작동가능하고, 정치적으로 활용가능한 국가비전- 전략-킹핀은 거대한 도킹이 여러 번 있어야 한다. 현실 정치와 '학'과 실물 현장의 고민/지식/지혜가 크게 도킹하고, 실물 현장은 산업, 금융, 공공, 노동, 의료, 복지, 지방자치 등 수많은 분야의 도킹(통섭과 융합)이 일어나야 한다. 물론 그 전에 각 분야별 비전=큰 그림도 정리되어야 한다. 이는 한 두명의 천재가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실물/현장에 밀착한 전문가들과 학자들과 진짜 정치인들의 소통, 교류가 풍부하게 이뤄지고, 이를 토대로 각 분야의 경험, 지식, 지혜의 통섭과 융합이 일어나야 가능하다. 이 책은 작은 시도이다. 수많은 후속작업이 필요하다.
책의 결론은 이 한 줄이다.
“이 시대에 요구되는 보수주의자는 진정한 자유주의자, 진정한 민주주의자, 진정한 공화주의자 여야 한다”(34쪽)
아마도 '이 시대에 요구되는 진보주의자'도 동일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진보와 보수가 오로지 권력 게임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다 보니, 상대는 악/사요, 자신은 선/정이다. '촛불혁명'과 '적폐청산'은 이 프레임의 최신 변주곡이다. 이런 야만 내지 전쟁 프레임을 벗어던지지 않는 한 이 땅에는 결코 진정한 민주주의자도, 공화주의자도, 자유주의자도 나올수 없다.
읽으면 최소한 후회 안할 책이다. 돈 값을 하고도 남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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