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
4·3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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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평화공원 다랑쉬굴 학살 현장 재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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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미군정 (-1948) 대한민국 (1948-) 서북청년단 | 남조선로동당 | ||||||
지휘관 | |||||||
윌리엄 F. 딘 송요찬 유재흥 김익렬 조병옥 박진경 † | 김달삼 † 이덕구 † | ||||||
병력 | |||||||
3000여명 | 남조선로동당원 500여명 제주도민 지원자 1,000여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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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
1,091명 (군인 162명, 경찰 289명, 우익단체 640명 등) | ?명 (전멸) | ||||||
민간인 희생자 14,442명 (진압군에 의한 희생자 7,624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 1,528명 외) 민간인 희생자는 최대 25,000~30,000 명으로 추정 |
제주 4·3 사건(濟州四三事件)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1][2] 2019년 12월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결정한 제주 4.3 사건 민간인 희생자수는 14,442명이다(진압군에 의한 희생자 7,624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 1,528명).[3] 단, 민간인 희생자는 최대 25,000~30,000 명으로 추정된다.[3] 한편 진압군은 1,091명 사망하였다.
배경 및 경과[편집]
배경 및 발단[편집]
당시 제주도 상황 (1946)[편집]
제주도 인구는 해방 전해인 1944년 21만9천여 명에서 1946년 27만6천여 명으로 2년 새 5만6천 명 이상 늘어났다. 인구의 급증은 전국적인 대흉년과 맞물려 사회경제적으로 제주 사회를 압박하는 요인이 됐다. 1946년 제주도의 보리 수확량은 해방 이전인 1943년과 1944년에 견줘 각각 41%, 31%에 그쳤다. 제조업체의 가동 중단과 높은 실업률, 미곡 정책의 실패 등으로 제주 경제는 빈사 상태에 빠졌다. 게다가 기근이 심했던 1946년 여름 제주도를 휩쓴 콜레라는 2개월여 동안 최소 369명의 사망자를 냈다.[4]
남로당의 제주도 활동 (1947)[편집]
미군 제6사단 브라운 대령이 1948년 5월 22일부터 6월 30일까지 제주도민 5,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공산진영의 남로당은 1946년부터 제주도에서 공작을 시작했다. 남로당은 5.10 총선거 실시가 확실해지자 활동을 강화하고 특수 공작원을 본토에서 제주도로 파견했다. 남로당을 조직하기 위해 본토에서 보낸 훈련받은 선동가 및 조직가는 6명에 불과했으나, 곧바로 500~700 명의 동조자가 합류했다. 제주 4.3 사건 발생 당시 제주도민 60,000~70,000명이 남로당에 가입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들 대부분은 당시 전쟁과 전후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남로당의 반미사상에 동조했었다[5]
제주 3.1절 발포사건 (1947)[편집]
1947년 제주북초등학교에 열린 3.1절 기념식을 마친 30,000여 군중중 17,000여명의 좌익,남로당계열 군중이 미군정 통치반대등을 내세워 가두 시위에 들어갔는데, 이때에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채여 소란이 발생하였다. 기마경관이 어린이가 채인 사실을 무시하자 주변에 있던 3만여 군중들이 몰려들어 기마경관에게 돌을 던지고 야유를 보내며 경찰서까지 쫓아갔다. 그런데 경찰이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판단하여 시위대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6] 사상자 가운데는 시위대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일반 구경꾼도 여러 명이 포함돼 있어서 민심을 자극시켰다. 남로당은 이런 민심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조직적인 반경활동을 전개했다. 처음에는 전단지를 붙이는 일과 사상자 구호금 모금운동을 벌였다.(남로당의 개입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으나 순수한 도민 자발적 단합 행위의 성격이 강하다 볼수 있다)
1947년 3월 9일부터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민관 총파업이 발생하여, 제주도의 경찰 및 사법기관을 제외한 행정기관 대부분인 23개 기관, 105개의 학교, 우체국, 전기회사 등 제주 직장인 95%에 달하는 4만여 명이 참여하였고, 심지어 제주 경찰의 20%도 파업에 참여하였다.[7](대부분의 파업 참여 경찰관은 파직되었고 그 결원 부분은 서북청년단으로 보충되었다). 3월 18일까지 선동 주범자들 약 150명이 검거되면서 파업이 일단락 되었고 각자 다시 집무에 복귀하였다.[8][9]
1947년 3월 19일 미군정 정보 보고서에서는 미군정은 제주도 주민 70%가 좌익 또는 그 동조자로 인식했다. 박헌영의 비서 박갑동은 어느 정도 지지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10]
2.7 사건 (1948)[편집]
1948년 미군정에 의해 불법화된 남로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남한 단독 총선거 일정이 발표되자 단선단정을 반대하며 전국적인 대규모 파업을 일으켰다. 이것이 2·7 사건이다. 이 파업 중 일부가 과격화 되어 경찰과 물리적 충돌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제주 4·3 사건과 여수순천 사건의 전초전이 되었다. 2·7 사건은 자연발생적이며 우발적인 요소가 많았던 대구 10·1 사건과 달리 사전에 충분히 계획되고 준비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미군정 지배하에 있던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시에 사건에 돌입할 수 있었다. '단선단정 반대'라는 이해와 공감이 쉬운 구호와 함께 투쟁의 목표 또한 분명히 통일되어 있었다. 2·7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 지역에서 미국에 반대하는 세력은 지구전 태세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는 각 지역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조선인민유격대의 초보적 형태를 구성하면서 제주 4·3 사건으로 이어졌다.
제주도인민유격대 결성 (1948)[편집]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5.10 총선거가 시작되기 전에 섬 전체에 걸쳐 모든 마을과 읍면에 공산주의 세포를 조직하였다. 각 세포조직은 한 명의 지도자와 선전원, 보급책 등으로 구성되었다. 규모가 큰 읍면에는 현 정부(미군정)가 무너지면 민간 정부 역할을 수행하게 될 인원까지 있었다. 세포조직을 심는 것 외에도 조직을 군사부 중심으로 개편하고 조선인민유격대 예하 '제주도인민유격대'를 조직하였다. 총사령관에 김달삼, 특별경비대장에 이덕구를 임명하였다. 제주도인민유격대는 전투부대 25부대와 직속부대 25부대, 그리고 각 읍,면 단위로 한 두개의 유격중대와 자위대가 각각 편성되었으며, 제주도인민유격대 본부는 한라산에 설치되었고 애월면 샛별 오름 하단의 들판에 훈련장을 설치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11] 인사장교가 임명되었고, 인원 모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폭동이 절정이었을 때, 제주도인민유격대 규모는 대략 4,000명의 장교와 사병을 갖춘 것으로 추산되었다. 무장병력 중 10% 미만이 소총으로, 나머지는 일본도와 지역에서 만든 창으로 무장했다.[5]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거가 예정되면서 당의 존립이 위협받게 되자, 남로당 제주도당 골수당원 김달삼 등은 남로당 중앙당과 아무런 협의도 없이 독단적으로 무장폭동을 결정하였다.[12]
경과[편집]
초기 (1948.4.3~10.10)[편집]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김달삼 등 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하면서 '제주 4.3 사건'이 시작되었다. 경찰과 서북청년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지목해 습격하였다.[13][14]
무장봉기가 발발하자 미군정은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하고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국방경비대에 진압출동 명령을 내렸다. 당시 국방경비대 제9연대의 김익렬 중령은 경찰·서북청년단과 도민의 갈등으로 발생한 사건에 군이 개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귀순작전을 추진하였다. 김익렬은 약 일주일 동안에 걸쳐 수차 산록일대에 비행기로 삐라를 산포하여 "사건계속은 이 이상 유해무익이므로 향토평화회복을 위하여 하로바 손을 잡자"는 을 피력하고 그들의 민족적량심에 호소하였으나 이에 대하여 산중으로부터 만족할만한 회답이 없었다. 이에 국방경비대 특별부대는 1948년 4월 27일 오전 10시경부터 행동을 개시하였다.[15]
1948년 4월 28일 김익렬은 무장대측 책임자 김달삼과 '평화협상'을 벌였다(단 김익렬은 그의 회고록에서 '평화협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그 구체적 내용은 '귀순공작'이었다). 이날 평화협상이 체결되어 '①72시간 내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본다, ②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③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뤄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고 합의하였다.[16]
그런데 1948년 4월 29일 오라리 마을의 대동청년단 부단장과 단원이 납치된 후 행방불명되었고, 4월 30일에는 동서간인 대동청년단 단원의 부인 2명이 납치됐는데 두 여인 중 한 명은 맞아 죽고 한 명은 가까스로 탈출해 이 사실을 경찰에 알리는 일이 있었다.[16] 조병옥에 의하면 "임신 9개월된 부인을 경찰관에 협력한 대동청년단의 형수가 된다는 이유로 죽창으로 찔어 죽였다"고 한다.[17] '평화협상'을 결렬시킨 결정적인 사건은 1948년 5월 1일 오라리 방화 사건이었다.[16][18] 오라리 방화 사건의 주범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대체로 대동청년단이 일으켰거나 경찰이 국방경비대를 견제하기 위해 일으킨 것으로 보고 있다.
1948년 5월 3일 김익렬은 다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전단을 비행기로 산록일대에 산포하였다. "형제제위여 본관이 제위의 민족적량심에 호소하고 사건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수차에 긍한 권고문과 교섭은 형제제위의 지도자의 무성의에 의하야 수포에 귀하였다. 국방과 치안의 중책을 쌍견에 짊어진 국방경비대는 사건발생 후 20일 이상을 은인자중(隱忍自重)하여 왔다. (중략) 본관은 전투를 개시할 것을 선언한다. 그러나 본관은 '동족상쟁'은 어데지 든지 원치 않는다. (중략) 지금도 늦지 않았다. '동족상쟁'을 원치 않거든 속히 귀순투강하라. 연락원을 급속히 파견하라."[15]
1948년 5월 5일 제주 4.3 사건의 해결을 놓고 제주중학교 미군정청 회의실에서 진압회의가 열렸다.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경찰의 기강문란을 탓하며 제주경찰을 자기의 지휘 하에 달라는 요구를 하자 경무부장 조병옥은 설명과 증거물이 전부 조작이라며 부인하더니 김익렬을 공산주의자로 몰기 시작했다. 그러자 김익렬이 조병옥에게 달려들었고 몸싸움이 벌어져 회의장은 난장판이 되어 진압 회의는 결말을 보지 못한 채 종결되었다.[19][20]
1948년 5월 6일 제9연대장이 김익렬 중령에서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되었다.[3]
1948년 5월 10일 제주도는 계엄상태하에서 5·10 총선을 치렀다. 선거 당시 선거위원의 반수이상이 피신납치되었다고 한다. 제주도 85,517명이 유권자로 등록, 45,862명이 투표를 완료하였다.[21]
1948년 5월 18일 제주도 선거결과가 국회선거위원회에 전달되었는데, 북제주군 갑구는 73투표구중 31개구가 투표되었고(등록유권자 27,560명 투표자 11,912명), 북제주군 을구는 61투표구 중 32개구의 투표(등록한 유권자 20,917명, 투표자 9,724명)가 시행되었다. 이에 국회선거위원회는 선거법 제44조에 따라 북제주군의 선거무효를 군정장관에게 건의하였다. 남제주군에서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오용국이 당선되었다.[22] 그나마 수거된 투표함을 개봉한 결과 최다득표자는 북제주군 갑구는 양귀진(梁貴珍), 북제주군 을구는 대한청년단 양병직이었다.[23]
1948년 6월 말 김달삼은 9월 해주에서 개최되는 최고인민회의 참석차 제주도를 빠져나갔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 문제를 뛰어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승만 정부는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강경진압시기 (1948.10.11~1949.3.1)[편집]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10월 20일 이후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에 처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포고령은 소개령으로 이어졌고,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변마을로 강제 이주됐다.[18][24]
1948년 11월 21일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실시되고 11월 23일 계엄령 포고 제1호로 교통제한, 우편통신·신문잡지 등 검열, 부락민 소개, 교육기관에 대한 제한, 처소벌채 급 도로의 수리보전 급 폭동에 관한 벌칙 등 7종목의 세칙이 발표되었다. 군경부대는 계속 잔여폭도 적출 소탕에 분투중이며 한편 도 당국을 중심으로 군과 관민이 협력하여 11월 22일부터 일반 민중의 지도를 위한 선무반이 편성되어 도내 요처를 순회하며 이재민 구제, 시국강연 좌담회 등을 개최하였다.[25]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중산간지대는 초토화의 참상을 겪었다. 진압군은 중산간마을 방화에 앞서 주민들에게 소개령(疎開令)을 내려 해변마을로 내려오도록 했다. 그러나 일부 마을에는 소개령이 전달되지 않았고, 혹은 채 전달되기 전에 진압군이 들이닥쳐 방화와 함께 총격을 가하는 바람에 남녀노소 구별 없이 집단학살을 당했다.[3]
당시 미군 정보보고서 등 미국 측 자료에는 이 강경진압시기에 벌어진 토벌대의 무차별 주민 총살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누락되어 있다. 그러나 1948년 11∼12월 제9연대의 진압 활동을 기록한 《제주도 주둔 9연대 일일보고서》에 따르면 1948년 11월 21일부터 12월 20일까지 한 달 동안 토벌작전을 전개해서 사살 1,335명, 생포 498명의 전과를 올렸다고 했다. 반면 이 시기에 9연대 군인들 중 교전 중 사망자 수는 15명으로서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3] 이는 강경진압작전의 대상이 무장대 뿐만 아니라 제주도인민유격대에 선동 당했거나 아예 무고한 제주도민들이었음을 의미한다.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없는 경우에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하여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이른바 '대살(代殺)'을 자행하기도 하였으며, 재판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기도 하였다. 또한 세화·성읍·남원 등의 마을에서는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주민들이 희생되고 인민재판에 처해지기도 하였다.[12]
1948년 12월 31일 제주도에 대한 계엄령이 해지되었다.[26]
종결기 (1949.3.2~1954.9.21)[편집]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선무를 병용하는 작전이 전개됐다. 신임 유재흥(劉在興)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한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치러졌다. 5·10 총선거에서 무효로 처리된 제주도 2개 선거구의 투표가 완료되었다. 선거인 등록은 북제주군 갑 선거구가 95%, 북제주군 을 선거구가 96.9%의 좋은 성적을 나타냈으며, 투표율도 97% 가량이었다. 출마한 후보는 북제주군 갑 선거구 홍순녕 文大유 金仁善 金時學 양귀진(梁貴珍) 咸尙勳 高학수, 북제주군 을 선거구 양병직 金道鉉 李응숙 金경수 文鳳濟 梁濟博 朴창희 李영북 洪문준이었다.[27] 5월 11일 제주도 2개 선거구에서 독촉국민회 홍순녕, 대한청년단 양병직이 당선되었다.[28]
1949년 4월 9일 존 무초 주한미특별대표부 특사가 제주도 치안상황에 대해 미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소련의 통제를 받는 라디오 방송에서 나오는 선전의 속성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제주도는 남한 내 혼란과 테러의 씨를 뿌리는, 소비에트의 노력의 주요한 현장으로 선택된 것이 분명하다." "소비에트의 첩자들이 제주도로 별 어려움 없이 스며들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일로 판단된다. 신장관(신성모)은 그들 대부분이 북한에서 소형 낚시배로 출발하여 제주도에 도달하였다고 말하였다." "제주도 작전 관련 사진은 정부와 게릴라 양측 모두의 가학적 성향이 도를 넘어서 버렸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을 주민들에 대한 집단 학살을 나타내는 본보기적인 잔학 행위가 보고되었다. 이 집단 학살에는 여자와 어린이들도 희생되었으며, 약탈과 방화도 수반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몇몇 경우에 국군이 게릴라에 대한 복수로서 벌인 작전 과정은 비무장 마을에 대한 복수로까지 이어졌다." "지난 주 일요일의 평양 방송은 괴뢰 인민공화국의 제주도 투쟁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을 집중적으로 보도하였다."[29]
1949년 6월 제주도인민유격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제주도인민유격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30]
1950년 2월 6일 제주 4·3 사건으로 피해 입은 제주도민의 생활상이 보도되었다. 돌과 흙을 가져다가 집을 짓고 살고 있었으며, 잡곡죽이나 고구마로 하루 한 두끼 밖에 못 먹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삶을 포기하고 걸인이 되거나 자살하는 자는 없었다고 하였다.[31]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집단으로 희생되었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 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30][32]
1950년 3월 21일 김달삼은 게릴라부대를 이끌고 남침했다가 강원도 정선군 여량면 봉정리 전투에서 사살됐다.[33]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禁足) 지역이 전면 개방됨으로써 발발 이후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30]
피해규모[편집]
인명피해[편집]
제주 4·3 사건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25,000∼30,000명으로 추정된다.[16][3]
- 2011년 1월 26일 기준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4·3위원회) 통계
- 2019년 12월 기준 4·3위원회 통계
- 총 희생자 14,442명(진압군에 의한 희생자 7,624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 1,528명 외), 유족 72,845명[3]
- 가해자의 비율은 진압군 78.7% (7,624명), 무장대 15.7% (1,528명), 기타 5.6%였다. 여기에서 기타 사망을 제외하고 난 가해자의 비율은 토벌대 83.6%, 무장대가 16.4%였다. 이와 같은 통계는 주한미육군사령부의 《제주도사건종합보고서》에 주민들이 토벌대에 의해 80% 이상 사망한 것으로 보고한 내용과 일치한다.[16]
- 진압군(토벌대) 전사자는 군인 162명, 경찰 289명, 우익단체 640명 등 총 1,091명으로 나타났다.[3]
- 연령별 희생자는 유아 688명, 10~15세 399명, 16~19세 1,504명, 20대 5,916명, 30대 2,466, 40대 1,419명, 50대 1,023명, 60대 614명, 70대 388명, 미상 25명이었다. 아동의 범주를 15세 이하(2.8% 399명)까지 확대하면, 제주 4·3 사건 당시 어린이와 노인층의 희생은 14.5%인 2,089명에 달한다.[3]
- 사건 단계별 사망자수는 4·3배경과 기점(1947.3.1.~1948.4.2.) 104명, 무장봉기와 5·10선거(1948.4.3.~1948.5.10.) 214명, 초기 무력충돌기(1948.5.11.~1948.10.10.) 637명, 주민 집단희생기(1948.10.11.~1949.3.1.) 9,709명, 사태평정기(1949.3.2.~1950.6.24.) 2,668명, 사건종결기(1950.6.25.~1954.9.21.) 800명, 미상 310명이었다.[3]
당시 제주도 인구가 한국 전체의 1.26%임에 비추어 볼 때 제주지역 실업자 수 73,263명은 한국 전체의 8.24%를 차지한다. 또한 제주도 전체 인구의 28.8%가 실업상태에 놓여 있었다.[16]
물적피해[편집]
제주 4·3 사건 당시 165개 마을 중 소개(疎開)된 마을은 87개인데, 이 중 중산간마을이 62개 마을이었다. 제주 4·3 사건으로 인해 초토화된 마을들은 1950~60년대 지속적인 ‘난민정착사업’에 의해 복구되었다. 그러나 복구사업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원주민들이 복귀하지 않아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 들이 생겨났다. 이들 ‘잃어버린 마을’은 현재 제주도 내에 134곳으로 조사·확인되었다.[3]
학교, 관공서, 경찰지서 등 공공시설에 대한 피해는 주로 무장대의 습격으로 빚어졌다. 특히 학교는 주로 진압군 부대의 숙영지로 활용되기 때문이었다. 반면 1948년 11~12월에 걸친 강경진압작전 기간에 중산간마을에 있는 학교나 관공서는 강경진압작전에 따라 주로 군부대에 의해 소각 파괴되었다. 1950년경 기준 피해액은 공공시설 1,207,995,000원~1,428,334,000원, 수산 1,125,550,000원, 농산 7,352,059,677원, 기타 1,400,000,000원, 축산임산약초 3,224,210,000원, 공업 183,765,064원으로 추산된다.[16]
사건 이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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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 이후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 회원들은 국가유공자로 남한 정부의 보훈 대상자가 되었다.
- 남로당 제주도당 수뇌부였던 김달삼은 제주 4.3 사건이 진행 중이던 1948년 8월 25일 월북, 국기훈장2급을 수여받았으며, 사후 '남조선혁명가'의 비문을 받고 평양근교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는데, 이러한 사실은 2000년 3월 평양을 방문했던 우근민 제주지사에 의해 확인되었다.
- 제주 4.3 사건을 경험한 유족들의 회고에 따르면, '좌익도 우익도 자기 마음에 안들면 마구잡이로 죽여버리는, 완전히 미쳐버린 세상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34]
- 6.25 전쟁 발발 당시 제주도민들은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대한민국 해병대에 자원입대하는 경우가 많았다.[35][36]
-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 측으로부터 좌익 경력에 대한 공격을 받자 제주도민들은 오히려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자신들의 아픈 상처를 치유해주고 과거사에 대한 정리가 가능해 줄것이라 기대하여 오히려 70%에 달하는 압도적인 지지를 하였다 . 이는 여수 순천 및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에서 박정희 후보에 대한 강력한 지지 및 집중 투표로 이어졌다 (수도권 및 강원 . 충청권 윤보선 우세 / 경북 박정희 52% 경남 박정희 63% 전북 박정희 48% 전남 박정희 57% 득표)
- 매 해 4월 3일 같은 날 제사를 하는 제주도민이 상당수였다.[37]
- 1970년대부터 제주 4·3학살 피해자 가족과 시민단체에서 줄곧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였으나 역대 정부는 이를 무시하였고, 오히려 금기시하였다. 이 사건을 다룬 소설인 《순이삼촌》의 경우 책은 금서가 되고 작가 현기영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 1998년 11월 23일 김대중 대통령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제주 4·3은 공산폭동이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벗겨줘야 한다."고 말했다.[38][39]
- 1999년 12월 26일 국회에서 제주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 사건과 관련된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줌으로써 인권신장과 민주발전 및 국민화합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법인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되었다.
- 2000년 1월 12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약칭 '4·3사건법') 제정 공포되면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착수되었다.
- 2003년 4월 3일 제주 4.3 사건으로 인한 민간인학살과 제주도민의 처절한 삶을 기억하고 추념하며,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제주4·3평화공원'이 세워졌다.
- 2003년 8월 28일 '4·3사건법'에 따라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부차원의 진상조사를 실시하였다.
- 2003년 10월 15일 4·3위원회가 작성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노무현 정부에 의해 채택되었다.[18]
-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4·3사건 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하였다.
- 2014년 1월 17일 박근혜 정부는 국무회의(의장 박근혜)를 통해 4월 3일을 제주 4.3 사건 희생자 추념일로 입법 예고 했다.[40]
- 2018년 4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회와 인권센터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제주 4·3 역사 정의와 화해를 위한 기도회’를 열고 제주 4.3 유족들과 국민에게 기독교인이 학살에 동참했던 과거를 사죄했다.
- 2019년 1월 17일 법원이 제주 4·3 사건 생존 수형인에 대해 공소기각 판결을 내리며 70년만에 사실상 무죄를 인정했다.[41]
관련 사안[편집]
논란[편집]
계엄령 적법성 논란[편집]
1948년 11월 17일 발효된 계엄령이 적법한 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위법하다고 보는 측에서는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에 계엄령을 발효한 것은 법률에 의해 정하는 바에 의해 계엄을 선포하도록 되어있는 제헌 헌법에 어긋난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를 적법하다고 보는 측에서는 일제 강점기 당시의 계엄법이 효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적법하다고 주장한다.[42] 이 부분은 사건이 1948년 8월 15일 이전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까지 지속된 것이기 때문에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폭동 논란[편집]
- 2000년 1월 12일 공포된 《제주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은 제주 4.3 사건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하였다.[1]
- 월간조선은 2000년 2월호에서 4·3사건을 '공산당의 폭동'이라고 주장한 일본 산케이 신문의 글을 인용했다가 4·3사건 유족회에게 소송을 당해 1,2심에서 패소했으나 최종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 재향군인회를 비롯한 일부 우익 단체들은 제주 4·3 사건을 '남로당계열의 좌익세력들이 주도하여 인민군이 주민들을 선동해 일으킨 폭동'이라고 주장하며 1999년 4·3 특별법에 서명하고, 제주도 방문 당시 제주도민들에게 사과한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사과해야 할 당사자는 한반도에 공산체제를 만들고자 했던 공산주의자들인 남로당과 이들을 흡수 합병한 북한을 통치하는 조선노동당이라고 주장한다.
- 나라정책연구원 김광동 원장은 제주 4.3 사건의 본질적 성격은 '체제 전복'이었음에도 이를 진압한 우리 정부의 잘못을 비판하는 연구에 치우쳐 있었다며 "1948년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시기를 전후하여 공산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세력들이 자유민주주의적 체제에 기반한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세력을 대상으로 벌인 무장 투쟁이자 반란"이라고 주장했다.[43]
- 2008년 장로교(통합) 목사 이종윤은 그가 목회하는 서울교회(강남구 대치동 소재) 예배시간에 "4·3 사건은 공산당 프락치 등 좌익 세력들이 5·10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벌인 것"이라고 발언했다. 이 발언은 케이블방송 CTS를 통해 방송되기도 했다.[44]
- 2010년 11월 20일 이영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은 제주 4.3 사건에 대해 'communist-led rebellion'(공산주의자가 주도한 모반폭동)이라 주장했다.[45][46]
- 2014년 6월 10일 총리로 내정된 문창극 총리 후보자는 2012년 교회 강연에선 ‘제주 4.3사건’을 폭동이라 규정하며 “제주도 4.3 폭동사태라는 게 있어서, 공산주의자들이 거기서(제주도) 반란을 일으켰다”라고 말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추념일 날짜 논란[편집]
- 2000년 1월 제정된 《제주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은 제주 4.3 사건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하였다.[1]
- 2014년 1월 17일 박근혜 정부는 국무회의(의장 박근혜)를 통해 4월 3일을 제주 4.3 사건 희생자 추념일로 입법 예고 했다.[40]
- 2018년 4월 3일 홍준표는 "4월 3일은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위원장인 김달삼이 350명의 무장 폭도를 이끌고 새벽 2시에 제주경찰서 12곳을 습격했던 날"이라면서 "이날을 제주 양민이 무고하게 희생된 날로 잡아 추념한다는 것은 오히려 좌익 폭동과 상관없는 제주 양민들을 모욕하는 것"이라며 "김대중 전 대통령도 1998년 미국 CNN 방송과 인터뷰할 때 제주 4.3은 공산폭동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고 강조했다.[47]
참고자료[편집]
제주 4.3 사건의 원인에 관한 미군정 보고서[편집]
1948년 7월 1일 미군 제6사단 브라운 대령(Colonel Rothwell H. Brown)은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제주도 활동, 1948년 5월 22일부터 6월 30일까지"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 요지는 아래와 같다.
미군 제6사단 브라운 대령이 1948년 5월 22일부터 6월 30일까지 제주도민 5,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공산진영의 남로당이 1946년부터 제주도에서 공작을 시작했음을 밝혀냈다.[5]
남로당은 1947년 초부터 서서히 공작을 개시했는데,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 실시가 확실해지자 활동을 강화하고 특수 공작원을 본토에서 제주도로 파견했다. 이들은 처음에 공산당 침투 전술에 중점을 둔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다.[5]
1948년 5.10 총선거가 시작되기 전에 섬 전체에 걸쳐 모든 마을과 읍면에 공산주의 세포가 조직되었다. 각 세포조직은 한 명의 지도자와 선전원, 보급책 등으로 구성되었다. 규모가 큰 읍면에는 현 정부(미군정)가 무너지면 민간 정부 역할을 수행하게 될 인원까지 있었다. 세포조직 외에도 조선인민유격대 예하 '제주도인민유격대' 또는 '제주도인민군'이 조직되었다. 이는 두 개의 연대와 보충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인사장교가 임명되었고, 인원 모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폭동이 절정이었을 때, 제주도인민군 규모는 대략 4,000명의 장교와 사병을 갖춘 것으로 추산되었다. 무장병력 중 10퍼센트 미만이 소총으로, 나머지는 일본도와 지역에서 만든 창으로 무장했다.[5]
남로당을 조직하기 위해 본토에서 보낸 훈련받은 선동가 및 조직가는 6명에 불과했으나, 곧바로 500~700 명의 동조자가 합류했다. 제주도민 60,000~70,000명이 남로당에 가입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들 대부분은 무지하고 못 배운 농민과 어민들로, 전쟁과 전후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 상황을 해결해주겠다는 남로당의 제안에 쉽게 넘어갔다.[5]
브라운 대령은 공산주의자들의 조직 활동이 성공한 이유에 대해 "제주도 경찰부대, 특히 경찰 정보부대가 효과적으로 조직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는 선거 기간에 폭동이 성공한 것은, 제59 군정중대 민사참모장이 제주도 경찰을 통제하기 위해 신속하고 결정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했고, 경찰보충대가 섬에 도착한 후 효율적으로 배치되지 못했다는 것을 이유로 지적했다. 그는 경찰보충대가 과도한 잔혹행위와 테러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았다.[5]
제주 4.3 사건 초기의 미군정 보고서[편집]
주한미군사 3권(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Part Ⅲ)에는 제주 4.3 사건 초기의 미군정 보고서가 게재되어 있는데, 그 요지는 아래와 같다.
1948년 2월 제주도에서 발생한 각각의 소요들은 배후에 주도세력이 있었으며, 이는 5월 총선거를 방해하려는 목적이었다.[48]
1948년 4월 3일 처음 소요가 시작된 후 기존 정부에 대해 지속적으로 공격이 이루어졌다. 첫째 주엔 경찰 4명이 죽었고, 경찰 초소 10군데가 공격 받았으며, 경찰 시설 1군데가 방화로 인해 파괴되었다. 4월이 끝나기도 전에 20차례 이상 공격이 있었었으며, 경찰관 8명이 죽었고, 심지어 경찰 가족들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살해 당했다.[48] 마을 전체가 공산세력에 의해 몰살당하거나, 죽은 시체를 매달거나, 창으로 여자와 어린아이를 찌른다는 이야기들이 들려왔고, 납치된 경찰은 목을 매달리거나 참수 당하였다.[48] 같은 기간 경찰은 유격대(무장대) 25명을 사살했다.[48]
제주도 산악지대는 마을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기 위한 은신처와 기지를 제공했다. 무장대는 필요할 때 마을에서 차출하고, 임무를 마치면 마을로 되돌려 보냈다. 경무부 공안국장 김정호는 폭도들에 대해 "낮에는 농민이고 밤에는 전사"라고 표현했다.[48] 이 무렵 폭도들의 장비는 경찰에게서 뺏거나 경비대 탈영병으로부터 획득한 미제 카빈 12정, 미제 M1 소총 25정, 상당한 수의 일제 칼, 소총 99자루, 일본식 수류탄, 일본식 기관총, 다양한 종류의 폭약, 곡괭이, 삽, 죽창 등이었다.[48]
1948년 5.10 선거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6월 장마도 시작되자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폭력은 일단 잦아들었다.[48]
1948년 8월 말 유격대의 공격이 재개되었다는 첫 보고가 나왔다. 경찰 2명이 죽고 5명이 부상을 입었다.[48]
1948년 9월 중순 15명의 사람들이 시위대에 의해 사살되었고, 경찰초소 1군데가 총격을 받았다. 이 두 사례를 통해 마을 주민들에 대한 유격대의 명령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마을 주민들이 옛 명성을 되찾으려는 좌파들에 의해 선동 당했음을 알 수 있다.[48]
1948년 10월 1일 유격대는 경찰 7명을 죽이고 다수의 경찰들을 부상 입혔으며, 경찰 2명을 납치하였다. 경찰 초소 1군데는 전소되었다.[48]
1948년 10월 6일 경찰과 유격대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였다.[48]
한국사데이터베이스(자료대한민국사) 자료[편집]
1948년 4월 5일 미군정은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이어서 미군정은 즉각 각 도로부터 차출한 대규모의 군대, 경찰, 서북청년단 등 반공단체를 증파하였고, 제주도 도령을 공표해 제주 해상교통을 차단하고 미군 함정을 동원해 해안을 봉쇄하였다.[49]
1948년 4월 6일 경무부장 조병옥이 제주도 소요사건 진상을 발표하였다.[50]
1948년 4월 7일 제주도경비사령부는 제주4·3사건 사상자가 72명이라고 발표하였다.[51]
1948년 4월 9일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은 각 지방의 5.10선거사무상황을 감시하기 위해 제주도로 출발하였다.[52]
1948년 4월 13일 경무부는 김대봉(金大奉) 공보실장 외 4명으로 구성된 위무공작대를 파견하였다.[53]
1948년 4월 13일 호주·중국·엘사바도르·프랑스·인도·필리핀대표로써 구성된 제1반은 서울·개성·인천·춘천 및 제주도를 방문하였으며 제주도에서는 3개 투표구 중에서 2개소를 방문하여 선거위원회의 대표들과 면회하였다. 또한 동반은 4월 3일에 시작된 소요사건에 관하여 제주도지사 동 경찰최고책임자 및 미군당국과 회담하였다.[54]
1948년 4월 14일 '2개소의 경찰이 습격을 받아 경관 1명이 사망하였고, 약 3백명의 제주도인민유격대는 한라산 동굴 속에서 반항하고 있으며 제주도 연해안은 제주도령으로써 선박의 항행이 금지되어 있고 육지의 통행도 극도로 제한되고 있으며, 선거반대 폭동으로 인한 전신 전화의 불통은 12일 이후로 대부분이 복구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55]
1948년 4월 23일 제주도경비사령부는 사건발생 이래 4월 19일까지의 피해상황을 발표하였다.[56]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육군중령은 상황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약 1주일 동안 산기슭 일대에 비행기로 '사건 계속은 이 이상 유해무익이므로 향토의 평화회복을 위하여 하루 바삐 손을 잡자'는 내용의 삐라를 수차례 살포하였으나 산중으로부터 만족할만한 회답이 없었다. 이에 국방경비대 특별부대는 1948년 4월 27일 오전 10시경부터 제주도인민유격대 진압을 개시하였다.[57]
제주도소요를 진압하고자 현지에 파견되었다가 1948년 4월 28일 귀경한 경무부 공안국장 김정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본군이 전쟁중에 구축한 한라산 진지를 중심으로 약 2천명으로 추정되는 폭도가 모여있으며 이들은 약 3개월분의 탄약과 식량을 저장하고 있다 한다. 그들 중에는 기관총을 소지한 자도 보았다고 하며 지형을 이용하여 게릴라 작전을 쓰고 있으나 전면적으로 소탕할래도 관련없는 민중이 상해될 염려가 있어 공격을 중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리고 오후 8시 이후면 전도의 통행을 금지하고 위반자는 사살해버리는 삼엄한 경계진을 베풀고 있다."[58]
1948년 4월 28일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은 제주도를 포함한 9도에 각각 1반씩 선거감시반을 파견하였다.[59]
1948년 4월 29일 제주도경비사령부는 사건발생 이래 4월 25일까지의 피해상황을 발표하였다.[60]
소요사건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육군중령은 약 일주일 동안에 걸쳐 수차 산록일대에 비행기로 삐라를 산포하여 "사건계속은 이 이상 유해무익이므로 향토평화회복을 위하여 하로바 손을 잡자"는 을 피력하고 그들의 민족적량심에 호소하였으나 이에 대하여 산중으로부터 만족할만한 회답이 없었으므로 이에 국방경비대 특별부대는 사건의 최후 결말을 짓기 위하여 4월 27일 오전 10시경부터 행동을 개시하였다. 1948년 5월 3일 김익렬은 다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전단을 비행기로 산록일대에 산포하였다. "형제제위여 본관이 제위의 민족적량심에 호소하고 사건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수차에 긍한 권고문과 교섭은 형제제위의 지도자의 무성의에 의하야 수포에 귀하였다. 국방과 치안의 중책을 쌍견에 짊어진 국방경비대는 사건발생 후 20일 이상을 은인자중(隱忍自重)하여 왔다. (중략) 본관은 전투를 개시할 것을 선언한다. 그러나 본관은 '동족상쟁'은 어데지 든지 원치 않는다. (중략) 지금도 늦지 않았다. '동족상쟁'을 원치 않거든 속히 귀순투강하라. 연락원을 급속히 파견하라."[15]
1948년 5월 4일 경무부 공보실장 김대봉(金大奉)은 4월 16일부터 5월 4일까지의 선무공작(현지 주민을 대상으로 한 선전활동) 결과 대체로 치안은 확보되어 있다고 발표하였다.[61]
1948년 5월 5일 군정장관 윌리엄 F. 딘과 경무부장 조병옥이 제주도 현지를 시찰하였다.[62] 이날 미군당국의 보고에 의하면 제주도에서는 또다시 게릴라대의 2회의 습격사건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또한 4월 중 미점령지대 내에서 폭동으로 의하여 사망한 자는 154명인데 그 내용은 경관 15명 폭도 62명 양민 77명이라고 한다. 최근의 제주도내 습격사건 중 첫 번째는 백명의 게릴라대가 소을읍에 습래하였으며 두 번째는 60명의 무장대가 희드로에 습래하였다.[63]
1948년 5월 6일 군정장관 윌리엄 F. 딘은 "우리들의 종합적 조사 결과에 의하면 제주도 외에서 들어온 공산주의자들의 선동과 모략과 위협에 잘못 인도된 청년들이 선거공무원 경찰관 선량한 애국적 도민들을 살해하고 방화하고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제주도의 분위기는 평온하게 유지되고 있다. 지금 경찰과 국방경비대가 협력하여 활동하고 있어 불원 완전히 평정되어 평화와 질서를 회복할 것이다"라고 말했다.[64]
1948년 5월 8일 경무부장 조병옥은 제주도소요 치안수습책에 대해 정예부대 출동 등의 담화를 발표하였다.[65]
1948년 5월 8일 미군정 당국은 5·10 총선에 대비해 미군에 특별경계령을 내렸다. 또한 최근 제주도에서 58명의 폭도가 믈륭의 경찰지서를 습격해 폭도 1명을 사살하였으며, 이들 폭도는 미국 및 일본의 탄약을 소지하고 있으며, 선거위원 10명이 살해되고 기타가 부상을 당하였으며 선거위원 다수가 선거를 중지하라는 협박을 받았다고 전했다.[66]
1948년 5월 10일 제주도는 계엄상태하에서 5·10 총선을 치렀다. 선거 당시 선거위원의 반수이상이 피신납치되었다고 한다. 제주도 85,517명이 유권자로 등록, 45,862명이 투표를 완료하였다.[21]
1948년 5월 11일 UP특파원 제임스 로퍼는 5·10선거 논평에서 제주도 경찰이 囚人을 구타함을 우려하였다. 그리고 그리스 아테네에서 영국군이 좌익에게 발포했다가 대폭동이 일어났던 사례를 들면서 미군정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10월에 일대 시련이 올 것이라 예견하였다.[67]
1948년 5월 15일 당국은 사건의 원인과 규모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직접 원인은 단선단정 반대구호 밑에 남로당 계열의 지시에 의한 것, 간접 원인은 경찰관 인사문제에 있어 타도인이 많이 들어가 본도인의 감정을 조발시킨 것과 약 2개월전부터 폭도들의 조직적 훈련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시찰치 못하였다는 것이 큰 원인이다." "인원수 2천여명이 조직적 계획적 무장봉기를 하여 실전의 경험이 많은 지도자가 지휘하고 있다. 무기는 죽창·일본도·기관총·장총·소총·지뢰·수류탄 등을 가지고 있으며 독와사(독가스)까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일군이 최후적 저항을 목적으로 약 25만명 가량이 한라산에 있었는데 퇴각시 일부는 폐하였던 무기를 발견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경찰은 현재까지 30여회 교전하여 폭도 약 5백명을 검거하고 무기 다수를 압수하였다. 쌍방 사상은 1백여명이나 있었다. 현 정세로는 총선거는 불가능 하다고 보며 선거위원과 입후보자 수명이 피살당하였다."[68]
1948년 5월 17일 경무부장 조병옥에 의하면 "제주읍 오라리에서는 임신 9개월된 부인을 경찰관에 협력한 대한청년단의 형수가 된다는 이유로 죽창으로 자살(찔러죽임)"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17]
1948년 5월 18일 제주도 선거결과가 국회선거위원회에 전달되었는데, 북제주군 갑구는 73투표구중 31개구가 투표되었고(등록유권자 27,560명 투표자 11,912명), 북제주군 을구는 61투표구 중 32개구의 투표(등록한 유권자 20,917명, 투표자 9,724명)가 시행되었다. 이에 국회선거위원회는 선거법 제44조에 따라 북제주군의 선거무효를 군정장관에게 건의하였다. 남제주군에서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오용국이 당선되었다.[22] 그나마 수거된 투표함을 개봉한 결과 최다득표자는 북제주군 갑구는 양귀진(梁貴珍), 북제주군 을구는 대한청년단 양병직이었다.[23]
1948년 5월 18일 조병옥은 제주도에 경찰정예부대를 파견하였다.[69]
1948년 5월 20일 경찰당국에 의하면 북제주군 한림면(翰林面) 저지리(楮志里)에서 부락민이 일하러 나간 사이에 부락전체에 방화한 사건이 있어 가옥 식량 및 의류까지 소실당하고 150여호의 부락은 단지 4호밖에 남지 않았다는 바 약 700여명의 남녀노소 부락민들은 뒷산에서 공포와 굶주림에 떨며 노숙하고 있는 것이 5월 27일에야 경찰에 발견되었다 하였다. 그 중 4명의 여자는 한림원(翰林院)에 입원 치료중이라고 하였다.[70]
1948년 5월 21일 검찰청장의 명령으로 5월 6~17일 제주도 현지 실정을 조사한 광주지검 김희주(金禧周) 검찰관은 귀청 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소요사태는 점차 규모가 확대되어 쌍방에 매일같이 희생자를 내고 있다. 발단 원인으로는 5·10선거 반대가 직접 원인이 되고 있으나 간접적으로 관민을 막론하고 도내인 특유의 배척심리가 각 방면에서 발발된 점도 있다고 본다. 즉 일례를 들면 서북출신 경관들의 과도한 태도에 분개한 인민의 반항도 관계되고 있는 듯 하다. 한라산에 본거를 두고 주야로 각 부락에 출몰하는 그들은 기관총과 사제 수류탄 죽창 등으로 경관과 우익요인을 살해하려 하고 있는데 본도에서는 상상못할만한 산림이 방해가 되어 그의 토벌은 실로 어려운 상태에 있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 쌓여 있는 양민들의 희생은 날로 심각하여 가고 있으며 시장에는 겨우 보리·조 등이 간혹 한말 정도씩 매매되고 있는 형편으로 도민생활은 극도로 피폐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급속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71]
1948년 5월 26일 군정장관 윌리엄 F. 딘은 북제주 선거무효와 재선거를 포고하였다.[72]
1948년 5월 27일 제주도비상경비사령관 최천은 하곡(보리·밀 등) 수집 철폐 및 "하산하여 생업에 종사하는 양민에 대하여는 이를 관용 포섭"한다고 포고하였다.[73]
1948년 5월 28일 제주도 전산업국장 임원호(任瑗鎬)가 제주도지사에 임명되었다.[74]
1948년 5월 29일 제주도경비사령부는 사건발생 이래 5월 23일까지의 피해상황을 발표하였다(사망=경찰관 23, 경찰관가족 13, 양민 2, 관공리 3, 폭도 119, 放火=경찰관서 4, 동사택 4, 관공서 4, 양민가옥 223, 관공리가옥 3, 경찰가옥 3).[75]
1948년 6월 2일 경무부는 제주도인민유격대의 귀순을 권고하는 전단지 10만매를 제주도에 산포하였다.[76]
1948년 6월 2일 미군정 통위부장 유동열은 4월 27일 제주도인민유격대 토벌작전 개시 이래 5월 27일까지의 전과를 발표하였다. 또한 "최근 항간에서 경비대의 행동이 소극적이라든가 혹은 좌익에 대하여 동정적이라든가 하는 낭설이 유포되고 있는 듯하나 이는 피상적 관찰 또는 일부 불순분자의 모략이다"라고 입장을 밝혔다.[77]
1948년 6월 4일 현지 시찰 기자단은 국방경비대 장교의 안내로 교전지구를 거쳐 피해 당한 각 부락을 시찰하였다. 다음은 현지 시찰 기자단의 보고 내용이다. "도중 무수한 도로와 교량은 모두가 소요민의 방해 공작으로 파괴되었다. 무수한 전주는 비어진 채로 밭고랑에 넘어져 있으며 절단된 전선은 마치 狂女의 허트러진 머리카락처럼 바람에 너풀거리고 있다. 비교적 제주읍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촌락은 경비대와 경관들의 보호지구이다. 산간부락은 순전히 소요민측세력하에 있는 것이다. 경관들은 주로 해안선을 방위하고 내외연락을 두절시키는 방침을 취하고 있으며 경비대가 주력이되어 산악지대를 진격하고 있다."[78] "4월 3일 미명에 돌발한 제주도사건은 날이 갈수록 험악의 도를 가하고 있다. 구름속 높이 솟아있는 한라산속 무수한 동굴에는 당지에서 인민해방군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조직부대가 출몰하고 산간부락에는 끊임없이 총성이 은은하다. 읍을 멀리 떨어져 있는 부락은 거의 다 그들의 세력하에 있으며 이를 소탕하는 경비대와 경찰의 전투는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30만 도민은 지금 분화구 어구에 서 있는 불안 가운데 있다. 1읍12면의 경찰지서는 그 대부분이 습격을 받았고 그들의 가족 및 우익계열 인사들에 대한 습격은 접종하였으며 또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연일 증가되는 경비대와 경찰무장부대는 각기 소탕에 전력을 다하고 있으나 진압의 시기는 속단을 불허하는 상태이다. 각 한편 경찰과 경비대의 주력이 주둔하고 있는 제주읍은 밤이되면 죽음의 거리로 화한다. 이모퉁이 저구석에서 남국의 야기를 진동시키고 터지는 총성은 살기찬 이섬의 공기를 더한층 공포속에 몰아다 넣고 있다."[79]
1948년 6월 4일 통위부 참모총장 이형근은 제주소요 진압방법을 언명하였다. "폭동이 진정되지 않어 경비대와 경찰이 출동하고 있으나 그 임무에 관해서는 현지 군경사이에 협정으로 치안은 경찰이 담당하고 경비대는 오로지 작전행동만을 하고 있으며 경비대와 경찰관에 서로 지휘 명령을 받는 일은 전연 없다. 현재 포로와 귀순자들은 비행장에 집결시켜놓고 폭도와 양민을 엄격히 구별하고 폭도는 법에 의하여 처단을 받도록 될 것이나 일단 군에서 조사한 결과 완전히 양민이라고 인정되여 증명서를 교부받은자에 대해서는 경찰에서 재조사하는 등의 일은 절대로 없기로 되었다. 그리고 진압시간에 대해서 확언은 할 수 없으나 약 1개월이면 현지 질서도 회복되고 선거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80]
1948년 6월 7일 통위부 참모총장 이형근은 6월 4일 정오 이후 6월 7일까지 국방경비대의 제주소요진압 전과를 발표하였다(포로 41명, 살상 3명, 초거(哨居)소각 1개소).[81]
1948년 6월 8일 경무부장 조병옥은 제주소요사건과 관련 공산계열의 만행 폭로하였다. "폭동이 일어나자 1읍 12면의 경찰지서가 빠짐없이 습격을 받었고 저지리 청수리 등의 전 부락이 폭도의 방화로 전부 타버렸을 뿐만아니라 그 살상방법에 있어 잔인무비하여 4월 18일 신촌서는 6순이 넘은 경찰관의 늙은 부모를 목을 짤러 죽인후 수족을 절단하였으며 대동청년단 지부장의 임신 6개월된 형수를 참혹히 타살하였고 4월 20일에는 임신 중인 경찰관의 부인을 베를 갈러 죽이였고 4월 22일 모슬포에서는 경찰관의 노부친을 총살한 후 수족을 절단하였으며 임신 7개월된 경찰관의 누이를 산채로 매장하였고 5월 19일 제주읍 도두리서는 대동청년단 간부로써 피살된 김용조의 처 김성히와 3세된 장남을 30여명의 폭도가 같은 동리 김승옥의 노모 김씨(60)와 누이 옥분(19) 김중삼의 처 이씨(50) 16세된 부녀 김수년 36세된 김순애의 딸 정방옥의 처와 장남 20세된 허연선의 딸 그의 5세 3세의 어린이등 11명을 역시 고히숙집에 납치 감금하고 무수 난타한 후 눈노름이라는 산림지대에 끌고가서 늙은이 젊은이를 불문하고 50여명이 강제로 윤간을 하고 그리고도 부족하여 총장과 죽창·일본도 등으로 부녀의 젖·배·음부·볼기등을 함부로 찔러 미처 절명되기전에 땅에 생매장하였는데 그중 김성히만이 구사일생으로 살어왔다. 그리고 폭도들은 식량을 얻기 위하여 부락민의 식량 가축을 강탈함은 물론 심지어 부녀에게 매음을 강요하여 자금을 조달하는 등 천인이 공노할 그 비인도적 만행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정도이다."[82]
1948년 6월 10일 제주도선거위원회는 북제군내 133개소의 투표소에 있던 선거인명부 중 절반 이상이 탈취 혹은 방화 등으로 말미암아 없어졌다는 등의 이유로 중앙선거위원회에 재선거 시일 재연기를 요청하였다.[83] 이날 군정장관 윌리엄 F. 딘은 6월 23일로 예정되었던 재선거를 무기연기하겠다고 발표하였다.[84]
1948년 6월 12일 제주도사건 재판관계차 서울에서 온 모변호사는 재판에서 제주 4.3 사건의 해결책에 대한 견해를 기자단 일행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폭도측의 소요책임자는 하나도 구속되지 않았고 지금 재판에 회부된 자는 대개가 19세 내지 25세 정도의 청년들이다. 그들은 모두가 아무 것도 모르고 기계적으로 행동한 자들이다. 법정은 매일 울음의 바다로 변하였고 도민들의 고통은 지금 절정에 달하고 있다. 무고한 도민들이 폭도와 경찰의 중간에서 동란의 희생이 되고 있다. 폭도측에서 요구하는 자금이나 식량을 제공하면 경찰은 그들을 처벌하고 경찰의 요구에 응하여 기부금을 내면 폭도측의 제재를 받는 것이다. 이럴수도 없고 저럴수도 없는 그들이 누구보다도 억울한 처지에 있으며 제주도에는 지금 일대 복수전이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감정적 대립이 우심하고 독특한 전통을 가지고 살아나온 제주도의 금번 사건은 그 근본원인을 적출 해결치 않고 무력저항만으로는 쉽사리 해결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다 사건 해결책으로는 이것이 근본책은 못될지언정 외지에서 들어간 사설단체를 일체 해산시키고 제주도 출신자로 신망있는 자를 치정 책임부서에 등용함으로써 도민의 감정을 풀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직접 살인·방화를 선동 교사한 자 외의 기계적으로 움직인 도민들을 처벌하지 말 것이다. 행정당국은 과거의 제주 치정상태를 인식하여야 하며 도민의 신망을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서 폭도들에게 준 정치적 구실의 근인을 없애야 한다. 역사적인 조선의 축도판이 금번의 제주도다. 끝으로 한마디 우는 어린애를 운다고만 꾸중할 것 아니라 왜 우는지 그 울게된 원인을 없에 주어야 할 것이다."[85]
서울로부터 제주도로 파견된 판검사일행은 5월 26일부터 6월 12일까지 사건처리를 끝마치고 귀경하였는데, 1948년 6월 14일 서울지방검찰청 검찰관 박근영(朴根榮)은 검찰관을 대표하여 다음과 같이 그 실정을 말하였다. "제주도에는 일본에서 귀환한 동포가 많은데 그 중에는 공산주의자가 섞여 있으나 이번 사건이 전적으로 공산당의 지령에서만 발생했다고 볼 수는 없다. 사건원인은 경찰이 민심과 유리된 것인데 사건이 발생하면 민중은 경찰에 신고를 아니하고 방관하며 심지어는 반항까지 하고 있다. 이 사실은 경찰이 제주도 특수 사정에 대한 사찰을 등한시한 시책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최고 책임자는 사건해결을 단시일 내로 수습할 수 있다고 말하였으나 수습은 무력으로 하는 것도 좋지만 먼저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경찰력과 행정력을 통일하는 유능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설단체를 경찰력으로 이용한데 대하여 사설단체에 대한 비난이 높아가고 있다."[86]
1948년 6월 15일 검찰총장 이인은 제주 4.3 사건 해결은 관공리의 개편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제주도라는 곳은 워낙 살기 어려운 곳이고 특히 관공리들은 제주도에 가는 것을 무슨 정배나 가는 양으로 생각하므로서 인재될만한 사람은 제주도로 안가고보니 명예나 돈이나 바라는 친구들이 어찌 옳은 시정을 할 수 있었겠는가! (중략) 고름이 제대로 든 것을 좌익계열에서 바늘로 이를 터진 것이 제주도 사태의 진상이라 할 것이다. (중략) 우선 사법·행정·경찰의 3수뇌부를 갈되 가장 양심적이고 덕망이 높은 사람으로 임명하면 폭도들 측에서도 안심하고 하산할 것이고 특히 굴속에 숨어 있는 소위 좌익지도자들도 무슨 구실이던간 찾아서 내려올려고 하고 있으니 반드시 선정을 베풀 것을 당국에서 표시만 하면 문제는 일단락 될 것으로 확신하는 바이다."[87]
1948년 6월 17일 경무부는 제주도의 치안을 확보하기 위하여 제주경찰감찰청을 경찰청으로 승격하여 청장을 임명할 것이며 경찰서 두 곳을 증설하고 경찰관도 증원배치 하기로 하였다. 그동안 정직중이던 제주경찰감찰청장에 제8관구경찰청 부청장 김봉호(金鳳昊) 총경이 17일 임명되어 18일 현지에 부임 하였다. 그리고 전청장 최천(崔天)은 정직이 해제되어 경무부 출사로 되었다.[88]
1948년 6월 17일 약 2주일간에 걸쳐 제주도를 시찰한 서울지방심리원 양원일(梁元一) 판사는 제주 4.3 사건의 원인과 대책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 해방후 그 세력이 강대하였고 사실상 정부행세를 하여 왔던 인민위원회를 도민들이 너무나 과대히 평가하였다는 점. (2) 경찰이 가혹한 행동을 하므로서 인심을 잃었다는 점. (3) 청년단원들이 경찰에 협력하는 반면 경찰 이상의 경찰권을 행사하고 혹독한 짓을 하므로써 도민의 원망을 샀다는 점. (4) 중국 일본 등지와의 밀무역 기지가 되는 관계상 정치에는 등한하고 모리에만 열중 하였기 때문에 관공리는 일반 도민으로부터 멸시를 당하여 왔다는 점. (5) 도민들은 타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경향이 있어 강대한 세력에 아부하고 지위와 재산을 보존하려는 심리가 있다는 점. (6) 남북협상을 과대평가하고 이에 많이 의지해 왔다는 점. 등을 열거할 수 있다. 좌익은 이러한 정세하에서 도민의 사소한 불만불평을 신속히 포착하고 단선단정 반대를 구호로 도민을 선동하여 4·3 사건을 폭발시켰던 것이다. 금번사태에 대한 대책으로서는 제주도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미국인 측에서 제주도의 실정을 잘 파악하고 경찰의 압박을 완화시키는 동시에 군경간의 마찰을 제거하도록하고 경비대를 좀 더 효과적으로 이용하여야 할 것이다. 한편 제주도 내의 관공리를 재편성하는 동시에 정당 청년단체를 편달하고 도민을 계몽하여 사건수습에 협력하도록 하여야 한다."[89]
1948년 6월 17일 통위부장은 국방경비대가 6월 1일부터 모슬포(慕瑟浦) 동북방 15킬로 지점인 석악(石岳)을 공격하여 6월 3일 그 근거지를 소탕했다고 발표하였다.[90]
1948년 6월 18일 오전 3시 15분경 공보부는 제주도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동연대본부 숙사에서 암살 당했으며 범인은 아직 체포하지 못했다고 발표하였다. 윌리엄 F. 딘 군정장관은 이 사건을 직접 조사하기 위하여 제주로 출발하였다.[91]
1948년 6월 21일 제주도사건 수습차 두 번째 현지 출장 중인 최란수(崔蘭洙) 경감은 이날 서울에 들러 다음과 같이 중간 보고를 하였다. "최근 제주도를 시찰하고 돌아온 중앙의 경찰관 등도 폭동의 원인이 경찰에 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사실이다. 해방직후 경찰행정책임자들의 부패로 말미암아 좌익 진영의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모든 조직체 훈련을 방임하고 제주도를 공산혁명의 거주지로 만들게 하여 사상·정치·경제적 혼란을 이용하여 민중의 불평 불만을 그때 그때의 투쟁형식으로 폭발시켰다. 그와 같이 도민은 대소폭발사건으로 투쟁의 세력과 조직체를 완비하였다. 부패한 경찰은 모리배와 결탁하여 돈벌이에 눈이 어두워서 이를 미연에 방지치 못한데 큰 원인이 있다. 현재의 수습상황을 말한다면 폭도들은 5월 20일 이후 투쟁방법을 변경하여 일부(약 2천명)는 귀순을 가장하고 일부 정예부대는 수개 부대로 분산하여 무장한 채로 산중에 도피 잠적중이다. 말하자면 장기항전에 돌입한 모양이다. 현재 제주도 경찰은 군경 1천여명과 운수경찰 수백명의 증원을 받고 있는데 완전수습을 하려면 대다수의 강력무장 부대의 응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92]
1948년 6월 21일 제주도 출신의 친목단체인 서울濟友會를 대표하여 장홍식(張鴻植) 외 3인은하지중장·딘군정장관을 비롯한 관계요로에 제주도사태 수습 청원서를 제출하였다.[93]
정부 내부에서 제주 4.3 사건의 원인은 행정·사법기관의 편파적인 인사행정 혹은 처사의 원만성 결여 등에 대한 불평불만 및 경찰관의 비민주적 과오라는 지적이 계속 나오자, 1948년 6월 23일 경무부장 조병옥은 '제주도의 역사적 특수성과 도민의 배타심과 그리고 경찰말단의 비민주적 과오 등은 제주 4.3 사건의 간접적 또는 보충적 원인'이며 이를 직접적 원인이라 지적하는 것은 '본말전도(本末顚倒)'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근본원인은 조선의 소련방화 내지 위성국화를 기도하는 공산당의 남조선파괴공작의 강행된 그 일단으로 총선거방해공작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치안수습책은 정부에 반대한 자는 엄중처단하고 부화뇌동한 자는 어르고 달래는(善撫善導) 방침 외에는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94]
1948년 7월 3일 제주도 출장중인 이인 검찰총장은 조선통신기자와의 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부 산간부락을 제외하고 서울에서 상상한 것보다 평온하다. 직접 현지를 시찰하고 원인 동기를 조사하여 대책을 세우겠다. 군경이 활동중에 있으나 요는 관민융화가 제일이다. 하루속히 명랑한 제주도를 건설하기 바란다."[95]
1948년 7월 6일 제주도에 파견됐던 철도관구경찰청 제주응원부대는 선무공작 성과에 대한 중간발표를 하였다.[96]
1948년 7월 12일 통위부 참모총장 이형근은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기간 경비대의 수사망이 맹활동을 한 결과 사건관계자 8명을 일망타진하였다. 12일 그 범인을 서울에 호송하고자 비행기가 제주도에 갔다. 범인은 특히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 서울고등군법회의에 부치어 처단하겠다."[97]
1948년 7월 20일 서울신문과 조선일보 등에 제주의 근황이 알려졌다. 박진경 대령 암살의 용의자로 제주 출신의 강 중위 이하 하사관을 포함한 8명이 체포되었음이 보도되었다. 한림면 저지리 부락 180여호 전소 사건에 대해 玄모 일족이 방화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으며 8백여명의 이재민이 방황하고 있다고 보도되었다.[98] "기자가 방문한 곳곳에서 행방불명자가 수다한 것을 들었는데 지난 6월중순 북촌이라는 마을에서 행방불명된 5명의 시체가 7월 6일 오라리 근방 한 구덩이에서 발견되었다 한다"고 보도되었다.[98] "일시 치열히 전개되었던 전투는 5월 20일을 경계로 하여 거의 종식되어 7월 1일에 도내 교통이 해제되고 7월 5일에 육지와의 교통도 해제됨에 이르러 극도로 긴장하였던 공기는 현저히 완화된 듯하다. 읍내 주변 바다에는 하나 둘의 어선과 해녀의 모양도 간혹 볼 수 있고 상점은 문을 열어 손님을 부르고 있다"고 보도되었다.[98] "김봉호(金鳳昊) 신청장의 완화정책으로 말미암아 도내 각 부락에는 점차 명랑한 빛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한다. 한편 우리 기자단 일행이 수집한 정보로 한라산 깊이 숨어있는 소요 측 동정을 살펴보면 아직도 약 1천에 가까운 주력부대가 건재하고 있다 하며 그들은 김달삼이 사는 총사라장의 지휘를 받고 있으며 1) 도민생활의 안전을 복구시키는 당국의 적절한 시책, 2)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경찰의 무장해제, 3) 경찰관의 권력남용의 엄금 및 모모 사설단체의 숙청등의 요구조건을 걸고 이 현실문제의 해결이 실현되지 않는 한 최후까지 도내 전인민의 생명 재산의 안전을 위하여 제궐기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보도되었다.[98]
1948년 7월 23일 한국독립당, 민주독립당을 위시한 20여 정당 사회단체는 7월 18일 제주도사건대책위원회주비회를 구성하고 동족상잔의 폐해를 하루바삐 시정하기 위해 그 진상조사대를 제주도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제주 4.3 사건에 대한 견해를 다음과 같이 성명하였다. "현하 제주도에서 계속되고 있는 동족상잔의 처참한 사태의 원인은 (생략) 각종의 정보를 종합하여 보면 첫째로는 작년 3월 1일 기념행사시의 경찰관 발포사건 발생이 금반 사건의 직접원인을 조성하였음은 이미 세인의 주지하는 바이다. 둘째로 수백 사설단체원들이 일종의 관권력을 행사하여 이 지방의 민심을 극도로 자극시켰던 것이다. 셋째로는 경찰과 각 행정기관의 중요한 지위에서 이 지방출신을 일소하여 관민의 소격(疎隔) 등을 들 수가 있다. 최근의 당국 발표로도 사건이 수습되고 있다고 전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건의 현재 상태를 두가지 이유에서 더욱 중요시하는 바이다. (생략)"[99]
1948년 8월 3일 오후 3시 제주 4.3 사건의 주범 하사 강운성, 하사 이영배, 이등병 도인송에 대하여 통위부장이 승인한 장소에서 제9연대장과 2명의 미국장교 그리고 제주 신문기자단 등 입회하에 총살형이 집행되었다.[100]
1948년 8월 9일 오전 9시 군기대사령부에서 고등 군법회의 재판장 대령 이응준 주심하에 박진경 암살 사건에 대한 공판 개정이 결정되었다. 여기서 심문을 받은 암살범은 모두 박진경의 부하로 11연대에서 근무하던 문상길 중위 외 하사 5명이었다.[101]
1948년 8월 10일 박진경 암살 사건 제1회 제1회 공판이 개정되었다. 군법회의에서 이지형 검사가 제주 4.3 사건 총지휘자 김달삼과 두 번이나 만난 문상길 중위와 저격범 손선호(孫善鎬) 하사와 이를 도와준 배경용(裵敬用)의 4명에 관한 청취서류를 낭독한 것으로 공판을 끝마치었다. 이어서 재판장으로부터 사실심리가 있었는데 이날 변호인측은 전일 검사가 낭독한 조서는 고문에 의한 진술이라는 반박 변론이 있었다. 이어서 제주도군기대장 이풍우(李豊雨) 중위 외 5명에 대한 증인심문이 있었으나 고문이 있었는지에 관한 증언을 거부하였다. 이에 변호인 측은 이번 재판은 법정중심이 아니라 검사중심이었다는 이의를 제출하고 오전 11시 30분 휴정하였다.[102]
1948년 8월 12일 박진경 암살 사건 제4회 공판에서 피고 문상길 중위는 검사의 심문에 대략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4월 3일 제주도 소요가 봉기한 이후 전 11연대장 김중령(김익렬) 재임시에는 경찰의 폭도와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에 대하여 경비대는 도민을 선무하기에 노력하여 그들의 신뢰를 받았으나 박중령(박진경) 부임후로는 경찰과 협력하여 소요부대에 무조건 공격명령이 내렸으며 도민도 탄압하기 시작했으므로 도민들의 신뢰도 잃게 되었으며 경비대 내부 공기도 동요하였다. 나는 김중령의 동족상잔을 피하는 해경방침에 찬동하였으며 처음으로 김달삼과 만난 이유는 김중령과 회견시키기 위하여서였다. 두 번째 만났을 대는 박대령 부임후였는데 그대 김달삼은 30만 도민을 위하여 박대령을 살해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였을 뿐 아무런 지령도 받지 않았고 김과 두 번이나 만난 것은 30만 도민을 동족상잔으로부터 건지기 위하여 경비대의 근본이념 국가지상 민족지상의 정신으로 원만 해결책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심리조서에 날인한 것은 고문 끝에 눈을 막은 후 조서에 대한 기록여하를 모르고 강제적으로 무조건 날인한 것으로 이 법정에서 진술한 것이 진실이다."[103]
1948년 8월 12일 박진경 암살 직접 하수자 손성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박대령(박진경)의 30만 도임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 공격은 전연대장 김중령(김익렬)의 선무작전에 비하여 볼 때 그의 작전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그릇된 결과로 다음과 같은 사태가 벌어졌다. 우리가 하북이란 부락에 갔을 때 15세가량 되는 아이가 그의 아버지의 시체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보고 무조건 살해하였다. 또 5월 1일 오라리란 부락에 출동하였을 때 수많은 남녀노소의 시체를 보았을 뿐인데 이들은 자세한 조사의 결과 경찰의 비행임을 알게 되었다. 사격연습을 한다 하고 부락의 소 기타 가축을 도살하였으며 폭도가 있는 곳을 안내했다가 폭도가 없으면 총살하고 말았다."[104]
1948년 8월 14일 박진경 암살 사건 공판에서 문상길 중위, 신상우(申尙雨) 1등상사, 손선우(孫善鎬) 하사, 배경용(裵敬用)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104]
1948년 8월 17일 새벽 4시경 한림면 비양도 해상을 초계 중이던 해안경비대 경비정은 부근 해상에서 정체모를 괴선 한 척을 발견하고 즉시 정지를 명하였는데, 괴선은 도리어 2정의 기관총으로 위협하면서 경비정으로 돌진코자 하다가 북방으로 달아나 버렸다.[105]
1948년 8월 20일 중앙에 귀임한 제3차 제주도사건 토벌대장이자 수도청의 주철순(朱哲淳) 경감은 '제주 4.3 사건은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나, 아직도 부락 지서 습격사건 같은 국부적 소충돌이 발생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또한 사건발생 이래 8월 3일까지의 폭도 검거 수는 977명인데, 그 중 436명을 송청하였다고 하였다.[106]
1948년 8월 25일 등 재악화될 우려가 있는 제주 사건의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사회민주당 외 7개 정당사회단체 및 기자단으로 조직된 실태조사단이 제주도 현지로 출발하였다.[107]
1948년 8월 25일 남한지역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선거에서 선출된 대의원 명단에 김달삼이 포함되었다.[108]
1948년 8월 27일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朝鮮民主愛國靑年同盟)과 법학자동맹(法學者同盟)은 박진경 암살 용의자 문상길 등의 총살형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들은 "박대령(박진경)은 그 생모가 일녀이며 대동아 전쟁 당시 학병에 자원 참가하여 미·영 격멸에 위훈을 세운 알짜 친일파로 제주도에 파견되자 무고한 애국인민에 대하여 천인공로할 야수적 학살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반역도인 박대령을 정의의 총탄으로써 처단한 문중위(문상길) 등의 의거는 실로 민족정기의 발현임에도 불구하고 총살형 언도는 언어도단으로 즉시 총살언도 철회를 강경히 요구한다"고 말하였다.[109] 단, 박진경은 대동아 전쟁에 징집 당한 것이었으며 훗날 일체의 친일파 명단에도 오르지 않았다.
1948년 8월 28일 제주 4.3 사건 해결을 위해 서울을 출발하여 제주도 현지에 향하던 각 정당·사회단체로 구성된 제주현지조사단은, 8월 29일 목포경찰 당국의 용인을 얻어 제주행 연락선에 승선하려던 찰라 돌연 경찰 당국에서는 "제주도행 응원경관대 총감독의 명령"이라 하여 승선을 제지하였다. 이에 조사단 일행은 목포서장과 재교섭한 결과 9월 1일 승선허가를 받고 오후 2시 승선하였는데, 목포서 사찰계에서는 조사단 일행에 대하여 엄중한 신체수색을 실시한 다음 광주경찰청의 지시라고 조사단 일행의 신분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승선을 재차 제지하였다. 조사단 일행은 목포경찰 당국에 엄중 항의하였다.[110]
1948년 8월 30일 오후 5시경 시내 화신 5층으로부터 돌연 수많은 삐라가 가두에 살포되었는데, 삐라의 내용은 문상길 중위에 대한 사형집행을 철회하라는 것이 있다 한다.[111]
1948년 8월 31일 제주 4.3 사건 진압에 대한 응원부대로서 경상남도 제7관구 경찰청 소속 ○○명이 항만청 소속선 영등포호를 타고 제주도로 출발하였다.[112]
1948년 8월 31일 기독교민주동맹(基督敎民主同盟)은 "제주도사건을 해결 지우려는 것은 천만부당하다"고 전제하고, "文중위(문상길)가 朴대령(박진경)을 암살한 동기는 애국충정에서 나온 민족정의 수호에 있음으로 사형언도는 부당하다"고 지적하는 동시 "그 감형을 요구한다"고 주장하였다.[111]
1948년 9월 1일 민중동맹(民衆同盟)은 박진경 살해범 문상길에 대한 사형선고의 철회를 요구하는 진정서를 발표하였다.[113]
1948년 9월 3일 경찰청장회의에서 제주도 근해에 정체 모를 무장선박이 출몰한 사실, 제주도인민유격대에 의해 한림면 경찰지서장이 살해당한 사실, 김달삼이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여 제주도 인민항쟁상황을 보고하였다는 사실 등 이런 객관적 정세에 비추어 윌리엄 F. 딘 군정장관을 비롯한 중앙당국의 수뇌부 간에서는 미리부터 계획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결과 제주도에 몇 천명(실제론 800여명)의 무장응원대 파견이 결정되었다.[114]
1948년 9월 4일 민주한독당 등 정당·단체들은 제주 4.3 사건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115]
1948년 9월 7일 제주도사건 진상조사단 및 근로인민당 등은 제주 토벌 즉시중지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116]
1948년 9월 9일,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48년 9월 23일 박진경을 암살한 문상길과 손선호(孫善鎬)에 대해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문상길의 유언은 다음과 같다. "스물세살을 최후로 문상길은 갑니다. 여러분은 조선의 군대입니다. 마지막 바라건대 ×××의 ××아래 ×××의 ××아래 ××를 하는 조선군대가 되지 말기를 바라며 갑니다." 손선호의 유언은 다음과 같다. "훌륭한 조선군대가 되어 주십시오." 그리고 총살 직전에는 "오! 3천만 민족이여!"라고 외쳤다.[117]
1948년 10월 1일 제주 4·3 사건 관련자 18명에 대한 제1회 공판이 개최되었다. 이 중 최고 구형을 받은 박성선 부자의 범죄사실은 다음과 같았다. 북제주군 한림동 금악리에 사는 박성선, 박남호(朴南昊, 한림면 금병리 자위대장) 부자는 대한청년단 강공오(姜公五), 이문오(李文五, 洞□事長)가 자기집에 불을 질렀다며 이들을 납치하여 산에서 소위 인민재판에 걸고 박남호가 재판장이 되어 사형언도 끝에 5월 14, 17일 양차에 걸쳐 강공오와 이문오를 총살하고 이문오의 처는 동굴 속에 집어넣은 다음 죽창으로 사살하였다.[118]
1948년 10월 2일 조선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한때 잠잠하던 제주도에 다시 소요가 발생되고 있어 수도청에서는 10월 2일 유충열(柳忠烈) 경감 인솔하의 응원대를 현지에 급파하였으며, 제주읍 관내 13처 구장과 북제주군내 5개 면장이 생명의 위협과 경제적 타격을 참지 못하여 사표를 제출하였다.[119]
1948년 10월 8일 제주도 미국민사청장 노우엘소좌는 오전 11시 50분경 성산포 전면 5마일 해상에서 국적을 알 수 없는 잠수함 1척이 부유 중임을 정찰기로 발견했으며, 오후 1시경 역시 동25마일 해상에서 잠수함 번호가 'C53'이고 함미에 인민공화국기가 달려있는 잠수함 1척이 부산방면으로 향하여 항행 중인 것을 발견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잠수함 출현과 동시에 제주도내 각처에 인민공화국기가 일제히 살포 혹은 게양되었다고 하였다.[120]
1948년 10월 17일 보병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본도(제주도)의 치안을 파괴하고 양민의 안주를 위협하여 국권침범을 기도하는 일부 불순분자에 대하여 군은 정부의 최고지령을 받들어 차등 매국적 행동에 단호 철추를 가하여 본도의 영원한 평화를 유지하며 민족 만대의 영화와 안전의 대업을 수행할 임무를 가지고 군은 극렬자를 철저 숙청코자 하니 도민의 적극적이며 희생적인 협조를 요망하는 바이다.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로할 만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탕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행동 종료기간 중 모든 제주도 해안선부터 5킬로 이외의 지점 밑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이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단 특수한 용도로 산악지대 통행을 필요로 하는 자는 그 청원에 의하여 군 발행 특별통행증을 교부하여 그 안전을 보증함."[24]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 중이던 14연대 군인들이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김지회와 지창수를 중심으로 일으킨 소위 여수·순천 사건이 발생되었다.[121] 김지회와 지창수의 명분은 '동족상잔 반대'였지만, 사실 이들은 '병사 소비에트'라는 남로당 소속 세포 조직의 조직원들, 즉 간첩이었다. 같은 날인 10월 19일 경무대 폭파 음모 사건이 발생하였다.[122]
1948년 10월 30일 제주도 제9연대장 송요찬은 '제주읍을 노리고 준동중이던 무장폭도 수백 명이 고성(高城) 부근에서 밀회중임을 탐지하고 포위섬멸 작전을 전개하여 사살 수십명, 체포 200여 명 등의 전과를 거두었다고 하였으며, 동 작전으로 인하여 외도(外都) 신흥(新興) 애월(涯月) 부근을 횡행하던 무장폭도는 공공히 거세섬멸되었다'고 하였다.[123]
1948년 10월 28일 국방부는 제주도 고성리 작전 결과 제주인민군총사령 이덕구(李德九) 외 간부 다수를 사살하였다(이덕구는 춘계작전에 있어 참모장이었는데 당시 사령 김달삼이 현재 해주에 가 있으므로 총사령의 임무를 대행하였던 것임).[124] 단, 이날 이덕구를 사살했다는 보도는 오보인 것으로 보인다.
1948년 11월 7일 제주 서귀포 발전소 피습되었으나 권천석(權千石) 하사 혼자서 5명의 제주도인민유격대를 상대하여 2명을 사살하고 무기를 압수하였으며 나머지 적을 쫓아냈다. 그 결과 발전소에는 아무 피해도 없었다. 같은 날 서귀포 시내에는 방화로 인하여 민가 81호가 소실되었으나 관공서를 비롯한 주요건물은 군경의 신속한 노력으로 피해를 입지 않았다.[125]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를 합위지경(合圍地境)으로 정하고 계엄을 선포하였다. 계엄사령관은 제주도 주둔 육군 제9연대장(송요찬)이 임명되었다.[126]
1948년 11월 19일 국방부는 제주도 계엄령 발포를 부정하였다.[127]
1948년 11월 21일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실시되고 11월 23일 계엄령 포고 제1호로 교통제한, 우편통신·신문잡지 등 검열, 부락민 소개, 교육기관에 대한 제한, 처소벌채 급 도로의 수리보전 급 폭동에 관한 벌칙 등 7종목의 세칙이 발표되었다. 군경부대는 계속 잔여폭도 적출 소탕에 분투중이며 한편 도 당국을 중심으로 군과 관민이 협력하여 11월 22일부터 일반 민중의 지도를 위한 선무반이 편성되어 도내 요처를 순회하며 이재민 구제, 시국강연 좌담회 등을 개최하였다.[25]
1948년 11월 30일 광주지방법원은 제주 4.3 사건 관계자 22명에게 무기징역 등을 언도하였다(△무기징역 : 李用泰 △징역 15년 : 鄭東日·高기華·高유河 △10년 : 吳順培·金泰洙, 高甲洙·鄭亮洙·金桂先 △8년 : 高斗行 △7년 : 李楊鎬·朴景光 △5년 : 金□保·李暢玉, 姜君五·金萬福·具炳玄·任昌法·李昌富 △무죄 : 文斗□·韓鳳俊 △장기 5년, 단기 3년 : 黃桂奉).[128]
1948년 12월 8일 제주도지사 임관호(任琯鎬)는 최근 제주사태가 점차 호전된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제주도에 있는 집을 죄다 없애라는 북로당 지령에 의하여 폭도들이 방화한 가옥소실 동수는 무려 3,000동에 달하고 있는 그 중에서도 제일 참상을 이루고 있는 곳은 남원(南元)의 300호의 남원면(南元面) 위미리(爲美里) 부락에 있는 400호의 민가가 지난 11월 하순경 폭도들의 방화로 한꺼번에 전소하여 버린 것이다. 그리고 폭도들의 만행은 지난 11월 중이 가장 악랄하여 서귀포 공립중학교 서귀포 면사무소를 비롯한 해안부락 1,100호에 대한 잔인한 방화는 전부 11월에 감행된 것이다. 현재 제주도에는 폭도들의 방화로 인하여 집을 잃고 헐벗은 이재민의 수가 12,000명인데 그 중 8,000명은 긴급원호를 요하는 요구호자들이다. 그리하여 제주도 당국으로서는 이재민구호회를 조직하고 폭도의 손에 있던 것을 국군이 압수하여 온 식량과 기타 구제미를 양민에게 특배하여 식량문제 해결에 비상조치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현지의 치안상태는 계엄령 하에 있다고는 하나 폭도들의 감언이설에는 다시는 속지 않겠다고 굳은 결심을 한 양민을 조직하고 군경 당국에 자기들의 주위에 있는 폭도를 속속 고발하고 있어 12월에 들어서서는 점차 호전되어 가고 있으며 본관의 생각으로는 금월말까지는 폭도를 완전히 소탕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는 바이다. 그리고 추곡매입은 도민 각자가 자기들의 책임량을 정부에 매도하지 않으면 중앙으로부터 부족한 식량에 대한 원조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자각하고 있으므로 계엄령만 해제되면 배정량 매입은 단시일 내에 가능할 것이다. 또 한 가지 중앙에 있는 여러분에게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재난을 당한 현지난민에게 구호물자를 보내주기를 바라는 바이다."[129]
1948년 12월 8일 국무총리 이범석은 제주도사건, 호남사건, 대구사건, 강원도사건에 대해서 종합 보고를 하였다.[130]
1948년 12월 14일 제주 4.3 사건 제11회 공판이 있었고, 12월 21일 광주지방법원은 피고 강문보(姜文輔) 외 9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최후언도를 하였다(姜文輔 징역 8년, 元啓正 징역 8년, 文聖寶·文聖彦, 奇元澤 각7년, 李元宅 3년, 金熙斗 단기 5년 장기 8년, 高常富·金昌熙·洪重化 각2년 단 집행유예 5년). 그리고 지난번 공판에서 무죄 또는 집행유예 등의 언도를 받은 피고 중 金在奎, 宋昌善, 金永旭, 金永熙, 金英洙, 金聲振 이상 6명이 12월 22일 출감하였다.[131]
1948년 12월 31일 제주도에 대한 계엄령이 해지되었다.[26]
1949년 1월 21일 대통령을 대리하여 제주 현지 시찰 및 위문을 마친 내무부장관 신성모는 "제주도의 사태와 금후 전망은?"이라는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첫째 느끼는 것은 공산분자의 악질적이며 비애족적인 침략행동으로 인하여 양민의 주택 기타 재산이 많은 소실을 당하여 주민들이 신고(辛苦)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가슴 아프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야 주민들도 공산분자의 흉계를 잘 알고 그들을 불신하여 국군 이상으로 제1선에서 그들과 싸우고 있으며, 동시에 국군도 숙군 이후 군기 엄정한 모범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므로 폭도들이 지리적 유리함을 이용하고 있으나 수개월 내로 진압될 줄 믿는다."[132]
1949년 1월 25일 사회부장관 이윤영은 제주사건 피해·구호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제주도는 1월 8일 기준 피해상황보고에 의지하면 사망자가 334명, 중상자 70명, 소실가옥 493호, 요구호자 호수 607호, 사람으로 3,038명, 본부에서는 12월 28일 여기에 대한 구호응급비로 사상자 처리비 47만 4,000원, 주택비가 4,428만 원, 의료비가 1,900만 6,680원, 학용품 60만 7,000원, 생업 보조비로 303만 원, 이렇게 합계해서 6,739만 7,680원을 재무부당국에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피해실황·구호실시상황 등 이것은 자세히 청취해서 항구적인 대책을 수립해 가지고 이미 배당물자를 발송하는 중이며 방금 후생과장으로 하여금 여기에 오기를 命하고 있는 중입니다."[133]
1949년 2월 17일 육군총참모총장 이응준(李應俊) 소장은 "제주도사태의 현황과 앞으로의 시책은?"이라는 기자의 질문에 "아직도 무장폭도 약간이 남아 있으나 3월 이내로 적극적인 토벌작전을 개시하는 한편 그 지방행정기관과 협력하여 계몽·선무공작을 추진하여 최단기일 내에 평화를 회복케 할 작정이다"라고 답했다.[134]
1949년 3월 2일 제주도민대표 홍순재(洪淳宰)는 다음과 같이 제주도 현지사정을 밝혔다. "...폭도는 오늘까지 각처에서 준동되고 있어 당지의 피해는 형언키 어려울 만한 참상을 이루어 30만 도민은 당국의 구호대책이 없이 사선에서 방황하고 있는 형편인데 이 참상을 정부에 보고하여 시급한 구호대책을 요청하기 위하여 도민대표 홍순재(洪淳宰)씨 외 6명은 정부에 진정차 상경하였는데 씨는 현지사정을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제주도의 폭도로 인한 피해는 제주도 60,000호 가운데 연 3년 두고 20,000호가 소실되고 400부락 중 105부락만 남은 형편이며 식량의 공급이 없이 소·돼지 등을 잡아먹고 있는 형편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소실된 가옥이 12,985호이고 동수(棟數)로 26,337동이다. 그리고 이재민의 총수는 64,378명이 노천에서 지내고 있다. 그리고 교육기관의 피해는 전도 초·중등학교 107교 중 남은 것이 73교이며 34교와 181학급이 소실되고 초등학교 이재학생이 9,800명, 중등학교 이재생도가 590명이나 된다. 그리고 폭도는 현재 무장한 폭도가 약 500명 가량 있고 이에 노동한 폭도가 약 수천 명 있는데 이들은 전부 최근에는 부락에 내려와 식량만 강탈하고 부락을 불사르고 있을 따름이다. 중앙당국의 시급한 구호가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도민은 전부 아사(饑死)하고 말 참상을 이루고 있다. 다만 주요 도시의 치안은 경찰과 국군으로 확보되어 가고 있다."[135]
1949년 3월 4일 제주도지사(임관호)는 제주 4.3 사건으로 인한 제주도 각 지역의 피해상황을 알렸다. 또한 임관호는 제주 4·3 사건의 발생원인에 대하여 대략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8·15 해방 직후 제주도는 김택주(金澤주)·오동진(吳大珍) 등이 영도하는 그대로 도내 각계각층 모든 기관을 그들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가 발표되자 도내 재래세력과 주로 외부로부터 도입된 우익세력 사이에 차차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이승만 정부를 위시한 우익세력이 제주도 내에서 점차 확대되자 이들과 도내 재래세력 사이의 알력은 심각의 도를 가하여 1947년 제주 3·1절 발포사건, 1947년 3·9 총파업에 이어 결국 1948년 제주 4·3 사건이 발생한 것.'[136]
1949년 3월 13일 이범석 국무총리는 군·경·관에게 여순사건 및 제주 4.3 사건을 3월말까지 종결하라고 훈화하였다.[137][138][139]
1949년 3월 21일 신성모 내무부장관은 제2회 59차 국회본회의에서 제주도 시찰결과를 보고하였다. "우리 제주동포는 두 사람이 같이 가면서 얘기를 자유롭게 하는 사람을 못 보았고 열흘 동안이나 있었는데 얼굴을 들고 서로 쳐다보는 동포를 못 보았습니다. 길거리에 걸어가면 땅을 쳐다보고 비참한 꼴로 기운 하나 없이 다 죽는 기세로 그림자가 다니는 것처럼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도민대회를 열어서 모시어다가 놓고 내가 물었습니다. “제주도도 대한민국의 한 부분이거늘 왜 제주도의 사람들은 이와 같이 처참하게 길을 다닙니까” 나는 물었습니다. 말씀해 달라고... 상점에는 집이 좋은 데도 불구하고 상품이 보이지 않고 시장에는 사람 하나 와서 시장 보는 일이 없고 만여 명의 해녀는, 여러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헤엄쳐서 고기잡는 여자들입니다. 한 사람도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제주도 숙청을 끝내야 된다고 역설하였다.[140]
1949년 4월 7일 김효석 내무부장관은 제주 4.3 사건과 반민특위 문제 등에 대한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경들의 눈물겨운 토벌과 선무공작으로 점차 사태는 호전돼 가고 있다. 그것은 애매하게 끌리어 갔던 폭도들 중에 참회에 뉘우쳐 울다 못해 귀순하여 오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더욱 국군의 맹렬한 산악전에서 거반 폭도들의 소굴을 섬멸시킨 탓으로 이들의 주력은 자연 소멸되고 일부분씩 흩어져 대항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불원 사태가 진압될 것을 확신하며 시간이 곧 해결해 줄 것이다."[141]
1949년 4월 9일 존 무초 주한미특별대표부 특사가 제주도 치안상황에 대해 미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소련의 통제를 받는 라디오 방송에서 나오는 선전의 속성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제주도는 남한 내 혼란과 테러의 씨를 뿌리는, 소비에트의 노력의 주요한 현장으로 선택된 것이 분명하다." "소비에트의 첩자들이 제주도로 별 어려움 없이 스며들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일로 판단된다. 신장관(신성모)은 그들 대부분이 북한에서 소형 낚시배로 출발하여 제주도에 도달하였다고 말하였다." "제주도 작전 관련 사진은 정부와 게릴라 양측 모두의 가학적 성향이 도를 넘어서 버렸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을 주민들에 대한 집단 학살을 나타내는 본보기적인 잔학 행위가 보고되었다. 이 집단 학살에는 여자와 어린이들도 희생되었으며, 약탈과 방화도 수반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몇몇 경우에 국군이 게릴라에 대한 복수로서 벌인 작전 과정은 비무장 마을에 대한 복수로까지 이어졌다." "지난 주 일요일의 평양 방송은 괴뢰 인민공화국의 제주도 투쟁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을 집중적으로 보도하였다."[142]
1949년 4월 9일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의 치안상황을 시찰하고 현지 군경을 격려하고 귀환한 뒤 4월 12일 제주도 숙청 완결과 이재민 구호 등을 강조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143]
1949년 4월 20일 내무부는 3월 20일부터 4월 20일까지 제주도와 38접경지대의 치안상태를 발표하였다.[144]
1949년 4월 27일 장경근 내무부차관은 "제주도의 치안상태와 38선 지역의 상황은?"이라는 기자의 질문에 "제주도는 성적이 대단히 양호하다. 토벌의 완성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해안을 봉쇄하고 산록을 포위하여 보급로를 차단한 관계로 전투능력을 상실한 폭도들이 속속 귀순하고 있다"고 답했다.[145]
1949년 4월 30일 사회부 노동국은 제주도 실업자가 73,000명에 달한다고 발표하였다.[146]
1949년 5월 10일 5·10 총선거시 무효로 처리된 제주도 2개 선거구의 투표가 완료되었다. 선거인 등록은 북제주군 갑 선거구가 95%, 북제주군 을 선거구가 96.9%의 좋은 성적을 나타내고 있었다 하며, 투표율도 97% 가량으로 예상된다고 하였다. 출마한 후보는 북제주군 갑 선거구 홍순녕 文大유 金仁善 金時學 양귀진(梁貴珍) 咸尙勳 高학수, 북제주군 을 선거구 양병직 金道鉉 李응숙 金경수 文鳳濟 梁濟博 朴창희 李영북 洪문준이었다.[147] 5월 11일 제주도 2개 선거구에서 독촉국민회 홍순녕, 대한청년단 양병직이 당선되었다.[148]
1949년 5월 10일 제주도인민유격대 숙청에 출동했던 해군 제3특무정(사령관 남상휘 南相徽)이 목포에 귀환하였다. 또한 '출어를 금지하고 있던 어선을 개방하여 해군의 철저한 보호 아래 수산물 생산은 평화시의 수준에 달하게 되었으며 해녀들도 활발한 기운을 띄고 있다'고 보도되었다.[149]
1949년 5월 14일 김효석 내무부장관은 제주도 선거가 우수한 성적으로 무사히 완료된 것은 제주도의 치안이 완전 회복되었다는 뜻이라고 발표하였다.[150]
1949년 5월 14일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은 "제주도 시찰의 목적과 소감?"이라는 기자의 질문에 "반란지역의 피해상황을 시찰하고 민국정부에서 시행된 5·10선거를 감시코자 한 것이다. 제주도 치안은 작년과 금년은 천양지판으로 우리의 실지 보는 인상으로는 완전히 치안이 확보되었다"라고 답했다.[151]
1949년 5월 14일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유재흥 劉在興)가 제주도에서 철수하였다.[152]
1949년 5월 15일 국방부 보도과는 제주 4.3 사건 숙청 상황을 발표하였다.[153]
1949년 5월 15일 제주도 북제주군 애월면 신엄리(新嚴里) 제1구 민보단 신엄지단(新嚴支團), 애월면 하가리(下加里) 유지대표 윤창언·장□학·윤성보·강응삼·고정돈·강상문 등 제주도민 대표들이 내무부장관에게 치안확보에 대한 감사장을 전달하였다.[154]
1949년 5월 16일 조병옥은 "1948년 2월부터 금년 2월까지에 제주도에서는 1만 2,000명이 살해되고 1만 5,000호의 가옥이 파괴되었다"고 말했다.[155]
1949년 5월 17일 유엔 한국 위원회는 제주 소요로 파괴된 지구를 시찰하였고, 국군이 작성하고 있는 전투본부를 방문하였고, 제주시내에 있는 남녀노소 약 1,000명이 수용되고 있는 수용소도 보았고, 그 전일 수 명의 포로와도 이야기를 하였다. 또한 제주도 주변을 지프로 시찰하였는데, '이번 여행 중 시찰한 부락들은 거의 변화할 정도로 파괴되었고 특히 남부에 있어서는 전소(全燒)한 부락이 많았다'고 하였다. '피해를 입지 않은 부락은 모두 석벽으로 축조된 것들이었으며 이러한 가옥문에는 주민이 수위(守衛)를 보고 있었다'고 하였다.[156]
1949년 5월 18일 제주도파견 경찰대 505명의 서울 귀환보고식이 거행되었다.[157]
1949년 5월 22일 내무부는 제주도가 치안 상태를 완전 회복히 회복했다고 발표하였다.[158]
1949년 6월 2일 평화일보 제주도 특파원 한홍렬(韓紅烈)이 제주 4·3 사건의 1년 간 진상과 진압소탕전의 경과를 보도하였다.[159]
1949년 6월 3일 제주 4.3 사건 도중 전사한 제2연대 92인의 유골이 서울 태고사에 안치되었다.[160]
1949년 6월 7일 16시 제주도공산군 총사령 이덕구가 국군의 맹공을 받아 623고지에서 사살되었다.[161][162]
1949년 6월 13일 제주도치안수습대책위원회는 지난 5월 하순까지에 전후 4차에 걸쳐 도합 3,589명에 달하는 귀순자를 석방했다고 발표하였다.[163]
1949년 7월 1일 임시국회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여수·순천·제주도반란사건 이후로 이재민구제책을 정부만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으므로 복표를 발행해서 민간의 많은 재정을 얻어 상당한 구제책을 세우기로 한 것인데, 복표발행법안(福票發行法案)이 벌써 몇 달 째 지연된 것이 대단히 의외'라며 국회를 재촉하였다.[164]
1949년 7월 21일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구제비로 1억 2,000만원의 예산을 책정하였다.[165]
1949년 8월 30일 사회부는 사변 피해자 응급구호비 보조금을 다음과 같이 각 도에 송금하였다. △전남 4,100만 2,930원 △경남 1,953만 4,000 △제주 6,613만 9,210 △강원 324만 5,970 △경기 974만 3,890 △계 1억 3,966만 6,000.[166]
1949년 8월 30일 이남규 전라남도지사는 "제주를 일주하여 보았는데 그 곳 치안은 거의 완벽하고 간혹 산간지대의 지서에 식량을 약탈하려고 폭도가 나타나는 일이 있다고 하나 별것이 아니고 특히 제주도민의 근면성에는 감탄하였으며 거지가 한 명도 없고 도적도 없이 자기생활을 모두 해결하고 있었다"고 말했다.[167]
1949년 9월 14일 목포형무소 1,300여 명에 달하는 죄수들이 폭동, 탈옥, 무기고 약탈 후 군경 부대와 교전을 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탈옥수의 대부분은 지난번 제주 4.3 사건으로 복역중에 있던 장기수인 것으로 알려졌다.[168]
1949년 9월 21일 권승렬 법무부장관은 목포형무소 탈옥수 27~37명이 아직 체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169]
1949년 10월 4일 심형택(沈亨澤) 제주도 경찰국장은 제주도 재건에 대해 "자금 또는 가구재난(家具災難)보다도 한때 원수지간이던 양민과 귀순한 山사람과의 복잡한 문제를 어떠한 수단으로라도 완화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170]
1949년 10월 13일 존 무초 주한미국대사는 미 국무부장관에 보낸 보고서에서 "제주 작전의 성공이 너무 파괴적이어서 공산주의 반도들이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섬에서 어떠한 종류의 회복도 할 수 없음을 보고할 수 있어 기쁘다"고 평가했다.[171]
1949년 11월 14일 반란으로 황폐된 제주도를 재건할 중임 있는 도지사로서 직책을 망각하고 공금을 소비하다 걸려든 사건이 있다. 감찰위원회는 제주도지사 김용하(金容河)와 북제주군 주사 김용직(金容稷)의 면직을 결정하였다. 김용하는 제주도 공금 30만원을 횡령하고 김용직과 결탁하여 학교복구비 중 160만원을 소비한 사실이 적발되었다.[172]
1949년 12월 17일 김충희(金忠熙) 제주도지사는 제주 4·3 사건 이후의 최근 제주도 재건상황을 보고하였다. 그는 제주 4·3 사건에서 "3만 명이라는 젊은 청년들을 잃"었다고 하였다.[173]
1950년 2월 6일 제주 4·3 사건으로 피해 입은 도민의 생활상이 보도되었다. 돌과 흙을 가져다가 집을 짓고 살고 있었으며, 잡곡죽이나 고구마로 하루 한 두끼 밖에 못 먹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포기하고 걸인이 되거나 자살하는 자는 없었다고 하였다.[174]
1950년 2월 22일 육군총참모장 대리 신태영 소장은 경북지구에 김달삼의 공비부대가 나타났다고 밝혔다.[175]
1950년 3월 20일 국군 제185부대 수색대는 정선군 여량리(餘糧里)에서 18km 동남방 지점인 심운리에서 김달삼을 발견하였다. 이형근(李亨根) 준장의 지휘로 김달삼의 부대를 포위 압축하여 3월 21일 오전 10시까지 여량동 남방 3km 지점인 반론산(半論山)으로 몰았고 이어서 2중 포위망을 구성하여 압축하던 중 포위망에 갇힌 것을 깨달은 공비는 게릴라 전법으로써 그곳을 이탈하려고 했으나 오후 1시 반론산 동 단을 수비하고 있는 제185부대 예하 제336부대 제2중대와 마주쳐 전투가 벌어졌으며 오후 6시까지 섬멸전이 전개되었다. 3월 22일 새벽 전장을 정리한 바 공비가 괴멸되었음을 확인하였고, 9시 30분 반론산으로부터 약간 동북쪽인 지경리(地境里)(정선군 내)에서 목표 인물인 공비두목 김달삼 시체를 발견하였다. 그가 소지하였던 권총 모젤 1호, 용병작전에 관한 사항이 기록되어 있는 수첩 등을 압수하였는데 제185부대 陸정보참모는 검시 후 김달삼임을 확인하였다. 사진과 대조하여 용모가 일치되었으며 포로가 말하던 권총이 틀림없고 또한 압수한 수첩에는 러시아어로 용병작전 정보 등이 기록되어 있는 바, 김달삼의 글씨인 동시에 김달삼 밖에는 모르는 사항이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제주 4·3 사건 이래 남한 각처의 폭동야기의 주모자 김달삼이 사망하였다.[176]
1950년 4월 21일 이승만 정부가 제주도를 사수하자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은 제주도를 포함한 한국의 전 일본비행장을 중국 공격의 해공(海空)기지로 사용하고 싶다는 입장을 밝혔다.[177]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1950년 7월 26일, 12월 29일, 1951년 1월 10일 유엔군은 유엔군이 북한군에 밀려 한반도에서 전면철수한 후 한반도에 재진입하는 시나리오를 검토했는데, 그럴 경우 한국 정부는 제주도로 이전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하였다.[178][179][180]
1951년 1월 15일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제주도가 태평양이 아닌 동중국해쪽에 있어서 군사적으로 활용하기 어렵다고 평가하였다.[181]
1951년 1월경 휴전선 부근에 전선이 고착되었다.
1951년 1월 18일 존 무초 주한미국대사가 국무부에 제출한 제주도 시찰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도지사 및 제주도 해경사령관 및 경찰책임자에 따르면 섬에는 아직도 게릴라 문제가 남아있다고 한다. 5~60개 정도의 무장한 공비 부대들로 추정되는 무리들이 한라산 깊은 곳에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눈과 얼음 때문에 이 공비부대에 대한 소탕작전은 현재 중단된 상태라고 한다. 최근의 게릴라 활동은 식량을 얻기 위해서 고립된 마을과 부녀자를 공격하는 것에 한정되어 있다. 게릴라들이 위치한 경계지역에 18개의 전초기지가 설치되었다. 게릴라들은 상당한 문제거리를 제공하고 있다."[182]
1951년 3월 21일 에몬스는 존슨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에드워즈(Edwards)대령은 현재 제주도에는 왕성한 활동을 하는 게릴라가 100명도 안되며 그 중에 50여 명 만이 무장을 한 상태라고 보고했다. 하지만 이들 폭도들은 매우 활발하게 모집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만일 새로운 한국군이 제주도에 파견되어 게릴라 소탕작전을 지원하지 않으면 이들의 활동은 더욱 강력해질 것이다. 게릴라에 모집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은 약 3천여 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음식을 구할 곳이 없고 지방을 방황하던 자들로 한국군에 지원했다가 거절당한 이들로 보인다."[183]
1951년 8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를 순시하였다.[184]
1951년 11월 1일 제주도 경찰국은 제주 4·3 사건 주모자 조몽구(趙夢九)를 부산시 동강동 1가 노상에서 체포하였다.[185]
1951년 11월 2일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를 방문하여 시찰 및 연설을 하였다.[186]
1951년 12월 12일 제주도 경비사령부는 공산 게릴라 토벌 성과를 발표하였다. △적사살 4명 △생포 2명(통비자 2명) △아지트 파괴 13 △피복·식량 다수 △우마 31두 △금고 1개 △천□ 2매(大版朝共날인) △우피 20매 △우골 35 △기타 불온문서 다수.[187]
1951년 12월 21일 경찰은 제주도에서 70명의 무장게릴라를 소탕했음을 발표하였다.[188]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제주 4·3 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비로소 막을 내렸다.[18]
대중 문화에서의 제주 4·3 사건[편집]
- 《순이 삼촌》-(1978년 소설)
- 《잠들지 않는 남도》(1989년 노래)
- 《여명의 눈동자》(1991년 드라마)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주4.3》(1999년 다큐멘터리)
- 《야인시대》(2003년 드라마)
- 《백년여관》(2004년 소설)
-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2013년 영화, 감독:오멸)
- 《비념》(2013년 영화, 감독:임흥순)
-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2014년 수필)
- 《4월의 춤》(2015년 노래, 루시드폴)
- 《송아지》 (애니메이션)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 ↑ 가나 다 “제주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국가법령정보센터.
- ↑ 제주지방법원 2019. 1. 17. 선고 2017재고합4 판결
- ↑ 가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제주4·3사건추가진상조사보고서 (I)”. 제주4.3아카이브.
- ↑ “미국, 제주 4·3의 또 다른 가해자”. 한겨레21.
- ↑ 가나 다 라 마 바 사 “제주 사태의 원인과 영향(Causes and Effects of Cheju Outbreak)”.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전국에서 좌우익 충돌,경찰서 피습 등 소요사건 발생”.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도공무원,3·1절 경찰발포 책임을 요구하며 총파업 단행”.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도관공리 파업 일단락, 집무개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조병옥,제주도의 3·1절 소요사건 및 관공서파업사건 진상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KBS 한국전쟁 10부작[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6·25전쟁사 1, 전쟁의 배경과 원인 432~433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4년
- ↑ 가나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서중석 저. p80~p82
- ↑ “국가기록원 제주4·3사건”. 2019년 4월 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4월 26일에 확인함.
- ↑ “제주도에서 총선거 반대 폭동 발생”.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가나 다 “只今이라도늣지안타 不應時에는 行動開始 濟州島派遣警備隊 飛行機로 投降勸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가나 다 라 마 바 사 아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제주4.3아카이브.
- ↑ 가나 “조병옥, 남로당계 총선반대투쟁 진상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가나 다 라 마 “제주 4·3사건(濟州四三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김익렬 기고, 1948년 8월 6일, 8월 7일, 8일자 국제신문
- ↑ 김익렬 유고 : 1970년대 작성, 1988년 12월 김익렬 사망 후 발표, 미간행 출판물
- ↑ 가나 “5·10선거 실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가나 “국회선거위원회, 군정장관에게 북제주군의 선거무효 건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가나 “제주도선거위원 홍순재, 제주도의 선거결과 보고”.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가나 “宋堯讚 제9연대장, 제주도사건에 대한 포고문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가나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 포고 제1호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가나 “<대통령령 제43호, 제주도지구 계엄 해지에 관한 건>”.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5·10 총선거시 무효로 처리된 제주도 2개 선거구의 투표 완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도 2개 선거구에서 洪淳寧·梁秉直이 국회의원에 당선됨”.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무쵸 주한미특별대표부 특사가 제주도 치안상황에 대해 미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가나 다 “제주 4·3사건(濟州四三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제주 4·3사건으로 피해 입은 도민의 생활상”.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 4.3의 슬픈 증언 8”. 2006년 12월 5일. 2012년 3월 19일에 확인함.
- ↑ “金達三 공산유격대장을 강원도 정선에서 사살”.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문제안 등 (2005년 8월 5일). 《8·15의 기억: 해방공간의 풍경, 40인의 역사체험》. 서울: 한길사. ISBN 978-89-356-5556-4. p360~ 375. 양자생,양복천翁 구술
- ↑ 6.25 전쟁과 해병대
- ↑ 제주 해병의 날
- ↑ “"어릴 적 집집마다 같은 날 제사인 것 알고 충격"”. 2017년 7월 1일. 2018년 3월 13일에 확인함.
- ↑ 《한라일보》1998.11.24.
- ↑ 한나라당 제주도지부, 김총장 발언 유감 표명
- ↑ 가나 “제주4.3추념일, 국가기념일 공식 지정”. 노컷뉴스.
- ↑ “법원, 제주4·3 수형인 '공소 기각'…70년 만의 '무죄' 인정”. 《SBS 뉴스》. 2019년 1월 17일. 2019년 1월 17일에 확인함.
- ↑ [1] Archived 2013년 11월 13일 - 웨이백 머신
- ↑ 제주 4.3 사건, 공산주의 위한 무장 폭동
- ↑ 권나경,강남 대형교회에서 '광주출정가' 울려 퍼져, 민중의소리
- ↑ “진실화해위, '5.18 반란', '4.3 공산주의자 주도 폭동'”. 2013년 12월 2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11월 26일에 확인함.
- ↑ 제주-광주 격노, "망언한 이영조 사퇴하라"
- ↑ “[뉴스를부탁해]“DJ도 제주 4·3은 공산폭동이라고 했다?””. 서울신문.
- ↑ 가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제주도 소요(Disorders in Chejud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 작성 사건경과”. 2015년 6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4월 4일에 확인함.
- ↑ “경무부장 조병옥, 제주도 소요사건 진상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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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위 제1감시반이 제주도로 출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도폭동에 위무공작대 파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임위, 각 지방감시반의 제1차 감시상황에 관한 공보 55호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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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도소요의 진압을 위해 경찰정예부대 파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도소요, 일부락이 전소된 방화사건 발생”.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광주지검 검찰관 김희주, 제주도 소요진상 보고”.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딘, 북제주 선거무효와 재선거 포고”.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도비상경비사령관 崔天, 하곡수집철폐 등을 포고”.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任瑗鎬 제주지사 임명”.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소요상황 보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경무부장 조병옥,선거반대소요와 경찰업적에 대해 담화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통위부장 유동열, 제주도소요사태 담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기자단, 제주도소요지구 시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소요사건의 현지보고”.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통위부 참모총장 이형근, 제주소요 진압방법 언명”.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통위부 참모총장, 제주소요진압 상황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조병옥, 제주소요사건과 관련 공산계열의 만행 폭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도선거위원회, 중앙선거위원회에 제주도 재선거 연기 요청”.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딘, 북제주도 재선거의 무기연기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도사건 관계변호사, 사태와 해결책 피력”.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서울지방검찰청 검찰관 박근영, 제주도소요사건은 경찰이 원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검찰총장 이인, 제주소요사건 해결은 관공리의 개편에 있음을 주장”.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경무부, 제주경찰감찰청을 제주경찰청으로 승격”.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서울지방심리원 판사 양원일, 제주도 소요 원인과 대책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통위부장, 제주도소요 진압 전과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국방경비대 11연대장(제주) 박진경대령 암살당함”.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경감 최란수, 제주도 사태 언급”.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서울濟友會, 당국에 제주도사태 수습 청원서 제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조병옥, 제주사건 수습 담화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도 시찰중인 검찰총장 이인이 소감 피력”.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철도관구경찰청, 제주도응원부대의 치안과 선무공작 중간성과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통위부 참모총장 이형근, 기구개혁 등 언명”.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가나 다 라 “제주소요사태의 후유증 및 현상이 알려짐”.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도사건대책위원회주비회, 동 사건의 원인에 대한 견해 성명”.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도소요사건의 주범 하사 이영배 등 3명에 사형 집행”.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박진경대령 암살사건 제1회 군율재판”.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박진경대령 암살범 김달삼과 문상길 등에 대한 제1회 공판 개정”.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박진경대령 암살사건 제4회 공판 개정”.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가나 “박진경대령암살범에 대한 공판에서 문상길 등 4명에게 사형 언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 해상에 괴선박 출현, 기관총을 쏘며 북방으로 도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朱哲淳 제주사건 토벌대장, 제주사건에 대하여 보고”.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社會民主黨 등 제주도사건 실태조사단을 조직하고 현지로 파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남한지역 조선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선거에서 선출된 대의원 명단”.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朝鮮民主愛國靑年同盟과 法學者同盟, 朴珍景대령 암살용의자 文相吉중위 등의 총살형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정당·사회단체의 제주사건 현지조사단 승선을 경찰이 제지”.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가나 “基督敎民主同盟, 文相吉중위 감형을 요구하는 성명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경남 제7관구 경찰청의 응원부대, 제주사건 진압을 위해 출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民衆同盟, 제주국방경비대 朴珍景대령 살해범 文相吉중위 감형을 위한 진정서를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경찰청장회의, 제주도에 무장응원대 파견을 결정”.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民主派韓獨黨 등 정당·단체들, 제주사건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도사건 진상조사단 및 勤勞人民黨 등, 토벌 즉시중지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文相吉중위, 孫善鎬상사 총살형 목격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 4·3사건 관련자 제1회 공판”.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尹致映 내무부장관, 제1회 80차 국회본회의에서 제주도 및 남한일대 치안상황을 보고”.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도 근해에 괴잠수함들이 출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李範奭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여순사건 경위와 성격을 설명”.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수도경찰청, 景武臺 폭파음모를 사전에 적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여순사건 관련 국방부 발표 제8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4.3사건, 국방부, 제주인민군총사령 李德九를 사살했다고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 서귀포 발전소 피습”.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4.3사건<대통령령 제31호, 제주도지구 계엄선포에 관한 건>”.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국방부, 제주도 계엄령 발포를 부정”.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광주지방법원, 제주사건 관계자 22명에 무기징역 언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任琯鎬 제주도지사, 최근 제주사태가 점차 호전된다는 담화를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1회 124차 국회본회의에서 李範奭 국무총리, ‘1948년 4월 이후 국내 소란사건’에 대하여 종합 보고”.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사건에 대한 제11회 공판의 언도형량”.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申性模 내무부장관, 부산에서 제주사건·청년단체 통합 등에 대해 기자와 문답”.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李允榮 사회부장관, 여순사건·제주사건 피해·구호상황에 대해 제2회 13차 국회본회의에서 보고”.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李應俊 육군총참모총장, 광주에서 제주도·전남사태 등에 대해 기자와 문답”.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도 민간대표, 국무회의에 제주도 주민의 참담한 실정을 보고”.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반란사건으로 인한 제주도 각 지역의 피해상황”.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李範奭 국무총리, 여순·제주반란사건의 종결을 위한 군·경·관의 임무에 대해 훈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李範奭 국무총리, 제주도에서 민심수습에 대하여 훈시하고 광주에서 기자와 문답”.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李範奭 국무총리, 제주도·호남지방을 시찰한 후 소감을 피력”.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申性模 내무부장관, 제2회 59차 국회본회의에서 제주도 시찰결과를 보고”.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金孝錫 내무부장관, 제주도사건과 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문제 등으로 기자회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무쵸 주한미특별대표부 특사가 제주도 치안상황에 대해 미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李承晩 대통령, 제주도 시찰 결과와 국민조직 강화 필요성 등 치안에 대하여 담화를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도와 38선 접경지대의 1개월 간 치안상태 통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張暻根 내무부차관, 留宿屆 실시방침을 다시 확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사회부 노동국, 전라도를 제외한 4월 말의 실업자가 67만 명이라고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5·10 총선거시 무효로 처리된 제주도 2개 선거구의 투표 완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도 2개 선거구에서 洪淳寧·梁秉直이 국회의원에 당선됨”.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도에 출동했던 해군 제3특무정, 목포 귀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金孝錫 내무부장관, 제주도 선거와 관련 제주도의 치안이 완전 회복되었다는 담화를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유엔韓國委員團 제주도시찰단, 목포에서 시찰결과 등에 대해 기자회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濟州道地區戰鬪司令部, 철수 귀환중 광주에 도착”.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국방부 보도과, 각지의 폭도소탕 상황을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도민 대표들, 내무부장관에게 치안확보에 대한 감사장 전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趙炳玉 한국유엔대표, 한국은 민주주의 보루이며 다량의 무기원조를 요망한다고 미국민에 호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유엔韓國委員團, 제주도 시찰에 대한 公報 제16호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도파견 경찰대 귀환보고식 거행”.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도, 제주사건 이후 치안 상태 완전 회복”.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 4·3사건의 1년 간 진상과 진압소탕전의 경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도 토벌에 참가하여 전사한 제2연대 92柱 유골, 서울 太古寺에 안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국방부, 강릉 방면 인민군 월남과 제주도 사태에 대한 전황을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張暻根 내무부차관, 제주도·옹진 등의 전황을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濟州道治安收拾對策委員會, 4차에 걸쳐 귀순자 3,589명 석방”.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李承晩 대통령, 제4회 임시국회 치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정부, 제주도 구제비로 1억 2,000만 원 예산을 책정”.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사회부, 응급구호비 보조금을 각 도에 송금”.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李南圭 전라남도지사, 기부금을 정액제로 하는 문제와 제주도 치안상황에 대해 기자회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목포형무소에서 죄수 탈옥사건 발생”.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權承烈 법무부장관, 목포형무소 탈옥사건 수습상황과 인권옹호 문제 등에 대하여 담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沈亨澤 제주도 경찰국장, 제주도의 재건과 귀순자 선도에 대하여 언명”.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무쵸 주한미대사가 국무부장관에게 보고한 남한 게릴라 활동에 대한 평가”.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감찰위원회, 金容河 제주도지사의 면직을 결정”.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4·3사건 이후의 최근 제주도 재건상황”.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 4·3사건으로 피해 입은 도민의 생활상”.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申泰英 육군총참모장 대리, 공산유격대 소탕과 청년방위대조직 등에 대해 기자와 문답”.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金達三 공산유격대장을 강원도 정선에서 사살”.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蔣介石 중화민국 총통, 한국을 중국 공격의 海空기지로 사용 희망”.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유엔군 후퇴를 대비한 미국 정책, 한국인 주요 인사 소개 및 제주도로 정부를 이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유엔군의 전면철수 후 제주도를 수도로 사용하는 문제 검토”.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주한 미대사, 국무장관에게 철수문제와 제주도의 활용에 대해 보고”.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미 국무장관, 주한 미대사관에 남한정부의 제주도철수 문제를 보도한 뉴욕타임즈 기사 요약 발송”.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무쵸 주한 미대사, 국무부에 제주도 시찰보고서 제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에몬스, 존슨에게 제주도 내 게릴라 상황 보고”.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이승만 대통령, 제주도 순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도 경찰국, 4·3사건 주모자 趙夢九 체포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이승만 대통령, 제주도 방문하여 연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제주도 경비사령부, 공산 게릴라 토벌 성과 다대”.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경찰, 제주도에서 70명의 무장게릴라를 소탕했음을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참고 문헌[편집]
-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
- 문제안 등저 (2005년 8월 5일). 《8·15의 기억: 해방공간의 풍경, 40인의 역사체험》. 서울: 한길사. ISBN 978-89-356-5556-4.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계획. (2005년 4월 8일).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서울: 웅진지식하우스. ISBN 978-89-01-04959-5.
외부 링크[편집]
- 위키미디어 공용에 제주 4·3 사건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 제주 4·3 연구소
- 제주4·3사건 Archived 2019년 4월 1일 - 웨이백 머신, 국가기록원
- 제주4.3의 진실캐기, 내 마음속의 굴렁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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