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민지 기자 at 비마이너 - Be Minor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사안을 호도하네요.
1. 이 대표는 페북에 본인이 장애인과 성실히 소통한 것처럼 써 놨지만 정작 장애인이 뭘 요구하는지 제대로 모릅니다. 장애인이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시위하는 이유는 이동권 보장에 국한된 게 아닙니다. 이동권, 노동권, 교육권, 탈시설 권리를 포함한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입니다. 장애인이 투쟁해서 좋은 법, 제도, 정책을 만들어놔도 기획재정부가 예산 편성에 반대해서 법안은 수정되고 제도와 정책은 선심성, 시혜성 시행에 머물러 있습니다.
2. 이 대표가 언급한 교통약자법 개정안이 기재부 반대로 손질된 법안의 대표적 예입니다. 이 대표는 국힘이 입법했다고 썼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통과된 개정안은 천준호 더불어민주당 의원(기존 버스 대폐차 시 저상버스 도입 의무화)과 심상정 정의당 의원(장애인콜택시 운영 국가책임) 등이 발의한 여러 안을 합친 것입니다. 원안에는 장애인콜택시 운영에 국가가 의무적으로 예산을 편성하도록 돼 있습니다. 그런데 국회 논의 시 기재부 관계자가 출석해 반대 의사를 내비쳤고, 결국 국비 투입 의무조항은 ‘할 수 있다’는 표현의 임의조항으로 수정돼 국회 문턱을 넘었습니다. ‘할 수 있다’는 말은 ‘안 해도 된다’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장콜을 국비로 운영하지 않으면 가난한 기초지자체가 운영비를 책임져야 하는데요, 그러면 지금처럼 지자체 사정과 재량에 따라 운영을 제각각 하게 됩니다. 현재 장콜은 점심시간이나 야간엔 운행하지 않거나 하루 전날에 반드시 예약해야만 이용할 수 있는 등 갖가지 제약이 있고 심지어 이게 지역마다 다 다릅니다. ‘악마의 편집’에 의해 희생당한 장애인 활동가가 새벽에 어머니 임종 전화를 받고도 병원으로 가지 못 했다고 말한 배경에는 이런 사정이 있습니다.)
3. 이동권뿐만이 아닙니다. 교육권의 경우, 한국 장애인의 54.4%는 학력이 중졸 이하입니다(2017년 장애인실태조사). 62.7%는 비경제활동인구로 노동권 또한 보장받지 못 하고 있습니다(2019 장애인경제활동실태조사). 또한 장애인은 최저임금 적용제외 대상이고(최저임금법 7조) 평균 월급이 37만 원밖에 안 됩니다(한국장애인고용공단 ‘한눈에 보는 2020 장애인 통계’). 전국 1539개 장애인거주시설에는 29086명의 장애인이 갇혀 살고 있습니다(보건복지부 ‘2021 장애인복지시설 일람표).
4. 이런 일이 일어난 배경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현재 장애인은 적은 장애인복지예산을 가장 큰 문제로 꼽고 있습니다. OECD 가입국의 장애인복지 평균 예산은 GDP 대비 1.6%입니다. 한국은 0.6%밖에 안 됩니다. 장애인들이 시위할 때마다 “한국은 경제 대국이라고 자랑하면서 장애인복지 예산은 OECD 가입국의 절반도 안 쓴다”고 주문처럼 외는 배경에는 다 공식 통계가 있습니다.
5. 장애인은 이 같은 배경을 바탕으로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을 요구하고 있는데요, 처음엔 기재부를 상대로 시위했습니다. 그러나 기재부는 ‘관련 부처랑 상의하라’는 원론적인 답변만 되풀이하며 예산 편성 책임을 다른 부서로 떠넘겼습니다. 기재부가 이야기하는 ‘관련 부처’ 관계자들은 장애인과 면담하면 ‘기재부 때문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법안 만드는 국회의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은 기재부가 왕이잖아요. 저희도 어쩔 수가…’ 같은 말로 법안이 자꾸 손질당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국회의원을 찾아가도, 정책을 시행하는 정부부처 공무원을 찾아가도 전부 기재부 핑계를 대고, 기재부가 있는 세종시에 가서도 시위하고, 홍남기 기재부 장관 집앞에 가서도 시위해도 기재부는 입 꾹 다물고 있습니다.
6. 이런 현실에서 장애인은 기재부 위에 있는 대통령을 찾아가기로 합니다. 대통령에게는 각 정부부처 장관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새 대통령이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을 약속한다면, 기재부 장관 임명 시 당선자가 약속한 바를 잘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을 고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대선이 한창일 때부터 TV토론회에서 약속해 달라고 지하철 시위를 했고, 대선이 끝난 후에는 인수위 앞에 세 번을 찾아가 약속하라고 요구했습니다.
7. 이준석 대표 말대로, 작년 8월 24일에 장애인과 이 대표가 면담한 적이 있습니다. 녹취록에 따르면 이 대표는 ‘당 대표로서 이동권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고 말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후 장애인은 이 대표에게 기재부 문제를 말했습니다. 그때 이 대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기재부 혼내는 방법은 대선 성공하는 방법밖에 없다’
이 대표도 아시는 듯합니다. 기재부에 장애인권리가 발목잡혀 있다는 것을요.
8. 이준석 대표 말대로, 지난해 12월 8일 대학로 유세현장에서 윤석열 후보는 장애인을 만났습니다. 만남이 예정돼 있었던 건 아니고, 장애인들이 윤 후보 유세일정을 확인하고 찾아간 것입니다. 장애인들은 윤 후보에게 교통약자법 개정안 통과 될 수 있게 힘 좀 써 달라, 국회의원 100명이 넘는 거대정당 대선 후보 아니시냐, 국힘 의원들에게 말씀 좀 해 주시라 이야기했습니다. 수많은 취재진과 생중계 유튜버들, 지지자들이 보는 앞에서 윤 후보는 국토위 간사인 송석준 의원에게 바로 전화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더군요. “장애인분들이 요구하는 것이 빠르게 시행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교통약자법 개정안이 뭔지 잘 모르는 듯했습니다. 이 전화 이후로 2번에서 설명한 교통약자법 개정안이 통과됐습니다. 이런 내막이 있기는 하나, 이 대표가 정치인으로서 이 사례 하나와 59쇼츠공약 하나만 열렬히 붙들고서 “국힘은 장애인 이동권 보장에 힘썼고 약속도 했다”고 당당하게 말하기엔 민망합니다. 국힘이 힘썼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으려면, 2002년에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약속한 ‘지하철 엘리베이터 100%설치’를 후임이었던 오세훈 시장이라도 지켰어야 했던 것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9. 당시 대학로 유세현장에서 장애인은 ‘장애인권리예산 보장’ 내용이 담긴 정책요구안을 윤 후보에게 전달했습니다. 작년 8월 24일 이 대표와의 면담 때도 전달했습니다. 최근에는 인수위 관계자도 받아갔습니다. 이 요구안을 가지고 시위한 지 넉 달째입니다. 8시 혜화역 선전전은 75차례 진행했고 출근길 지하철 연착 투쟁은 24차례 진행했습니다. 이 대표는 이동권 하나만 붙들고 늘어지면서 ‘국힘이 법안 통과시켰다’, ‘59쇼츠공약도 만들었다’ 유일한 이 2가지 사례만 자꾸 언급하시는데요, 요구안의 정확한 내용은 ‘기획재정부를 통한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입니다.
10. 이준석 대표는 “장애인이 한 번 더 시위하면 시위현장에 찾아가 논박하겠다”고 했습니다. 확인해 보니 시위는 계속될 예정입니다. 인수위의 ‘장애인권리예산 보장’ 약속이 없으면 28일 월요일 오전에도 지하철에 타겠다고 밝혔습니다. 시위 현장에 오셔서 ‘우리가 기재부 혼내는 방법은 대선 성공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하신 말씀을 책임지시면 “국힘은 장애인 이동권 보장에 힘썼고 약속도 했다”고 하신 말씀이 현실이 될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추정됩니다. 페북에 이틀째 계속 글을 쓰시면서 장애인과 싸우시기보다는 하신 말씀을 책임지시는 게 정치인이자 예비 여당대표의 올바른 자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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