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25

297세대의 현재와 미래 변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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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7세대의 현재와 미래

변희재
편집국장(edit@jabo.co.kr)

297 세대들은, 언론운동을 하는 사람은 언론가로, 문화운동을 하는 사람은 문화생산자로서의 역할을 항상 염두에 두고 최소한의 희생만을 해가며 나름대로의 운동을 하고 있다. 또한 급진적인 노동운동가 역시 80년대보다는 좀 더 공적인 영역에서 활동할 수 있을 만큼 이 사회가 더 성숙해진다면 지금처럼 세대별로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고 영역별로 구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게 될 것이다.

80년대 학번들에게는 386세대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이름이 따라다니지만 그에 비해 297(?)세대는 신세대, X세대, N세대, Y세대 등 하나의 호칭으로 통일되지는 않는다. 물론 386세대 역시 이름처럼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될 수는 없겠지만 297세대에게서는 상징적 의미의 단일한 호칭조차 붙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언가 그 이전 세대보다는 사고방식이나 활동영역이 큰 폭으로 확장되었다고 추측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90년대 학번들은 문민 정부의 탄생을 보면서 대학에 입학했고 97년 이후에는 국민의 정부, 그리고 올해에는 21세기를 맞이하며 예비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대학생이 된 세대들이다. 그러니 당연히 하나의 독재권력에 맞서는 군부독재 시절의 고매한 지식인상에서 벗어나 각자의 적성에 맞는 영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아마 90년대 대학가의 변화상 중 대표적인 것은 학생운동권의 헤게모니 상실일 것이다. 80년대 학생운동가들은 최소한 정치적 도덕적 헤게모니만큼은 학내에서 확보했던 반면 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그런 것조차 기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 80년대에 진보운동의 전위세력으로서의 중요한 위치에 있던 학생운동이 이젠 전 사회적 민주화를 통해 성장한 노동단체, 진보단체에 밀리며 더 이상 진보운동의 1선에 설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장 구체적인 실례는 농민의 의식개혁을 목표로 시작되었던 농활 활동이 이젠 딱 '체험, 삶의 현장'정도의 무게만 갖고 있다는 것이다. 농촌 문제에 대해서라면 학교에서 책 몇 권만을 뒤진 저학년 학생보다야 땅에서 잔뼈가 굵은 농민들 자신이 더욱 더 잘 알 것이 아닌가? 오히려 농촌에 가서 농민들에게 농촌현실에 대해 잔뜩 배워오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다보니 빈활 활동의 교과서라 불리는 [페다고지]는 너무나 우습게도 같은 대학교 2학년이 1학년과 학회를 하는데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노동운동 쪽도 마찬가지이다. 90년대 초반을 넘기면서 학출이라 불리던 노동현장 활동은 더 이상 맥이 이어지지 않는다. 그 역시 노동조합의 성장으로 노동운동은 학생운동의 지원 없이도 자생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노사정 위원회 때 이갑용 민주노총 위원장이 한총련과의 연계설을 공적으로 부인했던 것이다. 오히려 현실감각이 없는 학생운동 세력이 노동운동과 손을 잡았을 때 노동운동이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더 이상 정치적인 영역에서의 학생운동이 설 자리는 그리 넓어 보이지 않는다. 연대를 한다고 해도 학생운동이 노동운동의 전위에 서는 일은 앞으론 거의 없을 것이다.

둘째. 이제껏 거시적인 대의명분에 의해 가려져 있던 학생운동가 개개인의 도덕성이 도마위에 오르는 일이 잦아졌다. 90년대 들면서 대두되는 여성해방론으로 인해 학내에서의 성폭력 문제가 심각한 주제로 받아들여졌고 상대적으로 공론에 노출되는 일이 많은 남성 학생운동가들이 성폭력 사건에 연루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였다. 99년도에 있었던 고려대, 성균관대 총학생회장의 성폭력 사건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비단 성폭력 문제 말고도 별로 중요시 여기지 않았던 음주 폭력이라던지, 대리 리포트, 대리 시험 같은 작은 문제에까지도 대의명분에 상관없이 개개인의 도덕성에 판단의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점점 확산되고 있다.

셋째. 사회가 요구하는 지식인의 상이 서서히 변화하고 있다. 신지식인과 같은 정부 홍보차원의 급조된 용어는 제외하고서라도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화 사회에서 분명히 새로운 지식이 창출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구호 하나로만 정당성을 확보했던 시대와는 달리 직접 대안을 제시하며 합리적인 절차를 통해 의사를 관철하는 시대가 오다보니 운동가의 개념 자체가 변화하게 된 것이다. 사르트르가 일찍이 언급했던 비판적 지식인과 전문적 지식인 중 지금껏 비판적 지식인에만 무게 중심을 두었던 것에서 이제부터는 이 둘 모두를 갖춘 새로운 지식인이 운동가의 모습으로 대두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학내의 운동세력은 기존의 커리큘럼의 답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대중과의 열린 소통"을 외치는 이론가들은 있어도 그것을 실제로 가능케 할 수 있는 인터넷 전문가는 좀처럼 보기 힘든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기존의 운동가와는 별로 관계가 없어보이는 일반 네티즌 대학생들에게 인터넷이라는 영역을 빼앗기게 되면서 헤게모니를 상실하고 있다.

넷째. 권력이 분권화 되면서 운동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있다. 기존 운동가의 가치관에 따른다면 총선시면연대의 낙천, 낙선운동은 기성 정치권 내에서의 도토리 키재기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분화된 운동이 힘을 얻고 있는 것이 현실적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운동권에서는 참여연대의 소액주주 운동마저 자본주의적 운동이라고 폄하하는 사이에 새로운 세대들은 그런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이번 총선시민연대의 사이버 팀에도 벌써부터 00학번들의 모습이 보일 정도이다. 이 사람들은 학생회나 학회를 통해 참여한 것이 아니라 본인들 스스로 사이버에서 정보를 얻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학생회 중심의 운동이 약화되는 이유는 학생회만을 통해서 운동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다양한 영역에서의 운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386 세대를 거론할 때면 항상 그들의 정치적 정체성을 먼저 이야기하게 된다. 하지만 297세대에게서 그런 것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의 중심으로 모이기 보다는 각양각색으로 흩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평가나 대책 역시 다른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학생회의 힘이 약화되었다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운동의 영역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내 정치 집회에 단지 200명 정도만 참여했다고 무작정 대학인의 정치의식이 실종되었다는 진단을 내려서는 어떠한 대책도 마련할 수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대학생 중 몇 명이나 시민단체에 소속되어 있고 아무런 소속이 없더라도 인터넷이나 PC통신 상에서 글쓰기를 통해 사회 참여하는 학생들은 몇 명이나 되며, 문화의 영역에서 직접 생산을 담당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인내심을 가지고 따져볼 필요가 있다. 만약 그런 사람들마저도 자본의 이해에 종속되어 있다며 칼 자르듯 해버리면 기존의 학생운동은 더 이상의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없을 것이며 386세대의 잔재에만 머물게 될 것이다.

386세대들의 현실 정치 참여가 언론에 화두가 되지만 아마 297세대에게서는 10년이 흐른 뒤에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다. 정치권과의 오랜 동안 싸움을 해왔던 386세대가 정치권에 유입되는 상황 자체가 뉴스거리가 될 수 있겠지만 297세대의 새로운 운동은 이미 대학시절부터 졸업 이후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운동을 하는 사람은 언론가로, 문화운동을 하는 사람은 문화생산자로서의 역할을 항상 염두에 두고 최소한의 희생만을 해가며 나름대로의 운동을 하고 있다. 또한 급진적인 노동운동가 역시 80년대보다는 좀 더 공적인 영역에서 활동할 수 있을 만큼 이 사회가 더 성숙해진다면 지금처럼 세대별로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고 영역별로 구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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