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덕기 목사가 남긴 민중목회 정신 이어가자"
전덕기 서거 100주년 기념, 추모식 및 학술대회 개최
기자명한연희
입력 2014.03.13
그는 9세에 부모를 잃고 숙부손에 맡겨져 남대문시장 숯장수로 지내다가 미국 스크랜튼 선교사를 만나 극적으로 목회자가 됐다. 나라가 바람 앞에 촛불과 같던 시절, 시무하던 교회는 독립운동을 위한 교육터전, 비밀집회 장소로 온전히 내어놓았으며 자신도 헌신한 채 39세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일제 시대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전덕기 목사 서거 100주기를 맞아, 그가 몸담았던 기독교단체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학술대회를 열고 그의 삶을 재조명했다.
▲13일 열린 전덕기 목사 서거 100주기 추모식 및 학술대회에서 증손자 전영일 씨(왼쪽)가 태극기를 펼쳐보이고 있다. ⓒ뉴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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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덕기 목사가 한국교회에 던지는 메시지
전덕기 목사 서거 100주기를 맞아 13일 상동교회, 협성대학교, 삼일학원 등이 서울 동대문 충무아트홀에서 추모식 및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전덕기, 왜 전덕기인가’란 주제로 열린 이번 학술대회는 목회자로서 민족과 소통하고 실천신학을 이뤄낸 고인의 민중목회 정신을 한국교회가 속히 이어가야 한다는 점에 방점이 찍혔다.
전덕기 목사가 소속된 교단인 감리교의 임준택 감독회장 직무대행은 이날 “고인은 기독교인으로서 교회의 울타리에서만 활동하지 않았으며, 서민 출신으로 민중들의 가난과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아는 분이었다”며 “서거 100주기를 맞아 우리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전덕기 목사의 정신을 배우고 우리도 이 시대 등불이 되기를 소망한다”고 밝혔다.
감리교신학대학교 박종천 총장은 추모사에서 “오늘 한국교회가 한국 초대교회의 기독정신을 온전히 계승되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면서 “그렇기에 전덕기 목사와 같은 신앙의 선배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기억하는 것은 매우 시의적절하다”고 말했다.
학술대회에서는 전덕기의 목회와 신학사상이 집중 조명됐다. 발표를 맡은 이덕주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는 전덕기의 생애와 목회 활동을 돌아보며,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을 가슴으로 품어낸 민중 목회자였다고 평가했다. 민중목회는 고아, 남대문시장 숯장수였던 그의 삶의 궤적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후에 목회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 그를 대표하는 정체성이 됐다는 설명이다.
이 시대, 왜 전덕기 인가
이 교수는 “전덕기의 실제 삶의 변화는 영혼의 변화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내적 변화가 이루어질 때 개인 혹은 국가 등 외적 변화에 눈을 뜰 수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며 “이처럼 전덕기는 성경과 기도 생활로 형성된 기독교 경건 신앙의 바탕을 두고 다양한 목회 사회 활동을 추구했다. 그에게서 기독교 신앙을 제외하고 민족 사회 운동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그의 민중목회는 당시 사회 상황에서 억눌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계층을 위한 것이었다”면서 “강한 자 보다는 약한 자, 건강한 자 보다는 병든 자, 누르는 자 보다는 눌림을 당한 자에게 관심을 두었고 이런 사회적 부조리와 억압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제시했다.
그러면서 “전덕기 목사 자신이 무기를 들고 폭력을 행사한 예는 찾아볼 수 없다. 그 자신은 비폭력 평화적 저항운동으로 일관했다. 그렇다고 폭력을 통한 불의한 세력 추방을 적극적으로 막았던 것도 아니다”며 “그만큼 전덕기 목사의 신학, 민족운동의 폭은 넓었다. 그는 교회와 사회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소통의 목회자였고 운동가였다”고 평가했다.
특히 이날 대회에는 전덕기 목사의 유족들이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미국에 살고있는 장손녀 전영애, 장손자 전영일, 차손녀 전영숙, 차손자 이소화, 증손녀 전지원 등이 참석했으며, 이들에 대한 초대비는 고인이 시무한 상동교회에서 지원했다고 밝혔다.
한편 전덕기 목사는 국가보훈처에서 ‘2014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인물이기도 하다. 이미 지난 1일 KBS ‘전덕기 특별 다큐멘터리’가 방영됐으며, 오는 23일 서울 중구 상동교회(서 철 목사)에서 추모예식이 열릴 예정이다.
한연희 redbean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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