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시의 힘 -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서경식 (지은이),서은혜 (옮긴이)현암사2016-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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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지식인, 서경식 선생 별세 (1951~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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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오늘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격려의 언어"
서경식의 글을 꾸준히 읽은 이라면 <시의 힘>이란 제목이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할 텐데, 그는 어린 시절부터 글로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1학년 조국을 처음 경험하고서는 그 기억을 시로 적어 자비 출판으로 시집을 만들기도 했다. 지금 그가 시인으로 불리지는 않지만, 그는 그 시절 어딘가에서 자신의 시를 읽고 공감해줄 미지의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문학 하는’ 의미를 깨닫는다.
그는 이와 겹쳐서 동아시아 근대의 흐름에서 ‘시의 힘’을 발견한다. 루쉰을 필두로 한용운, 윤동주, 박노해, 최영미가 승산과 효율성과는 무관한 시인의 일을 증명하고, 그들이 그때 부른 시가 소외되고 상처 입은 현실을 노래하는 시임을 확인한다. 그는 시와 문학에 힘이 있는지 되물으면서도 이 시대야말로 어느 때보다 그 힘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시대가 요청하는 자기 역할을 완수하고 그 과제를 공유하는 이들과 연대하고자 하는 그의 시, 문학론은 그의 삶과 글에서 이미 자기 증명을 마친 게 아닐까. 더불어 그가 전한 저항과 격려의 언어가 오늘의 숱한 독자를 흔들어 깨우는 건, 앞서 던진 물음 '시에 힘이 있을지'에 대한 답이라 하겠다.
- 인문 MD 박태근 (2015.07.14)
기본정보
파일 형식 : ePub(19.38 MB)
TTS 여부 : 지원
종이책 페이지수 : 296쪽
책소개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 사상가', '우리 시대 최고의 에세이스트', '베스트셀러 <나의 서양미술 순례> 저자'. 서경식을 수식하는 문장들이다. 그는 꾸준히 글을 읽고 쓰는 '글쟁이'이지만 지금까지 그가 발표한 작품 중 순수하게 문학만을 다룬 것은 없었다.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다룬 도서, 예술과 음악 등의 문화를 다룬 도서를 집필하다 보니 정작 문학과 글쓰기에 대해 말하는 것은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시인이 되길 열망했으며, 청춘기에는 "어떻게든 문학과 관련된 분야에 끼어들어 살고 싶다고 생각"한 그이기에 이 책의 출간은 늦었지만 예정된 일이었다.
<시의 힘>은 그의 첫 문학 에세이이자, 시대의 격류와 그 흐름에 휘말린 개인사를 아우르는 '언어'에 관한 비평집이다. 제목은 '시의 힘'이지만 그의 사유는 '시'와 '문학'을 넘어서서 '언어'의 바다에 닿는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습득하기 시작하는 '말'과 학습을 통해 배우는 '글'이 어떻게 개인의 사상을 구축하는지, '모어'와 '모국어'의 틈새에 갇힌 디아스포라의 외로움은 이해받을 수 있는지, '시'와 '문학'이 주는 힘은 무엇이며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진지하게 탐구한다.
목차
* 한국어판 서문
1장 의문형의 희망 - 사이토 미쓰구 시집 『너는, 티끌이니』에 부쳐
-너는, 티끌이니-사이토 미쓰구
2장 나는 왜 글쟁이가 되었는가
어린 시절-첫 단편소설
시집 『8월』-고등학교 1학년, 조국과의 첫 만남
대학 시절-현장도 없고, 독자도 없던
‘민족 문학’과의 만남
- 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
-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김수영
서양미술순례-미술과의 대화
그 후-일본을 ‘현장’삼아
* 시집 『8월』
3장 시의 힘
제1부 루쉰과 나카노 시게하루
동아시아-일본이 침략 전쟁 혹은 식민지 지배를 했던 지역
탈원전운동도 평화운동
엇갈린 만남
- 코코아 한 스푼-이시카와 다쿠보쿠
희망
어떤 측면-나카노 시게하루
망각을 위한 기념
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 결정
제2부 조선의 시인들-‘동아시아’ 근대사 속에서
역사적 분기점
- 당신을 보았습니다 - 한용운
지금도 일본인에게 묻고 있는‘3·1독립선언’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조선.오키나와.후쿠시마
생략해서는 안 되는 것
- 별헤는 밤-윤동주
번역에서 보이는 식민지주의의 심성
- 서시-윤동주
안락사하는 일본 민주주의
한국민주화 투쟁.노동운동 속에서
- 겨울 공화국-양성우
- 노동의 새벽-박노해
- 서른, 잔치는 끝났다-최영미
- 돌-정희성
- 세상이 달라졌다-정희성
시인이란 침묵해선 안 되는 사람
4장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을 둘러싼 단상 - ‘새로운 보편성’을 찾아서
‘한국문학’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문학’이 지닌 한계성과 보편성
5장 경계를 넘은 자의 모어와 읽기 쓰기 - 어느 재일조선인 1세 여성의 경험에서
어머니가 남긴 노트
어머니 앞을 막아섰던 네 개의 벽
배움의 원동력
‘배우지 못한’ 것의 강함과 괴로움
풍성한 이야기를 떠받쳤던 민중적 네트워크
‘참된 목소리’를 어디까지 담아낼 수 있는가?
역경이 불러온 만남, 언어의 획득
모국어를 일본인의 틀 밖까지 펼쳐내다
국민(nation)의 틀을 넘어서는 언어교육을
6장 ‘증언불가능성’의 현재 - 아우슈비츠와 후쿠시마를 잇는 상상력
「지상의 유력자들이여, 새로운 독의 주인이여」
- 폼페이의 소녀-프리모 레비
제노사이드 문학의 ‘불가능성’
표상의 한계
『안네의 일기』의 교훈
프랑클과 레비
동심원의 패러독스
7장 패트리어티즘을 다시 생각한다 - 디아스포라의 시점에서
어느 택시 기사와의 대화
향수와 국가주의
가족애와 애국심
‘패트리어티즘’이라는 용어
8장_픽션화된 생명
- 산다는 것-이시가키 린
* ‘돌아선 인간’의 저항-후기에 갈음하여
* 작품 해설
* 역자 후기
접기
책속에서
P. 4~5 “시에는 힘이 있을까? 문학에 힘이 있을까? 의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 ‘시의 힘’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우리를 끝없이 비인간화하는 이 시대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더 시와 문학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중략) ‘저항’은 자주 패배로 끝난다. 하지만 패배로 끝난 저항이 시가 되었을 때, 그것은 또 다른 시대, 또 다른 장소의 ‘저항’을 격려한다. 시에는 힘이 있을까? 나의 대답은 이렇다. 이 질문은 시인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던져져 있다. 시에 힘을 부여할지 말지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다.” 접기
P. 24~25 이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이유는, 열세 살 무렵의 에피소드에 그 후 일생에 걸친 ‘나의 글’의 구조적 원형이 이미 드러나기 때문이다. 요컨대 나는 저소득층 피차별자의 세계로부터 중산층 주류들의 세계로 옮아갔고(비유하자면 식민지에서 종주국으로, 조선에서 일본으로 옮아갔고), 양자 사이의 경계에 서서 주위 사람들에게 ‘타자’ 인식을 촉구하려는 동기로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물론 동시에, 이 두 세계 사이에서 온몸이 찢기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행위를 통한 자기 인식의 시도이기도 했다. 접기
P. 110~111 생각하면 이것이 시의 힘이다. 말하자면 승산 유무를 넘어선 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러한 시는 차곡차곡 겹쳐 쌓인 패배의 역사 속에서 태어나서 끊임없이 패자에게 힘을 준다. 승산 유무로 따지자면 소수자는 언제나 패한다. 효율성이니 유효성이라는 것으로는 자본에 진다. 기술이 없는 인간은 기술이 있는 인간에게 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원리로서 인간은 이러해야 한다거나, 이럴 수가 있다거나, 이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을 움직인다. 그것이 시의 작용이다. 접기
P. 154 그렇다면 시인이란 어떤 존재일까? 시인이란 어떤 경우에도 침묵해선 안 되는 사람을 가리킨다. 요컨대 이것은 승산이 있는지 없는지, 효율적인지 아닌지, 유효한지 어떤지 하는 이야기와는 다르다는 말이다.
P. 202 어떤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자들만이 그 나라의 국민이라고 승인된다. 해당 언어를 쓰지 못하는 자는 국민이 아니다. 제대로 쓰지 못하는 자는 2등 국민이나 동정해야 할 소수자로서 열등한 지위에 놓인다. 이렇게 언어와 국민(nation)을 의심 없이 연결하고, 오히려 언어 내셔널리즘을 강화하는 듯한 분위기가 언어 교육 현장을 지배하고 있다. (중략) 본래 언어 상호 간에는 우열 관계가 없다. 더불어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 인간 상호 간의 우열 관계가 생겨서는 안 된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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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서경식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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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1974년 와세다대학 문학부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도쿄케이자이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6년부터 2년간 성공회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머물며 한국의 다양한 지식인,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받았고 2000년 『프리모 레비로의 여행』으로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민주주의 실현과 소수자 인권 신장에 기여한 공로로 제6회 후광김대중학술상을 받았다. 저자는 1970년대 ‘재일조선인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알려진... 더보기
수상 : 1995년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 1995년 마르코폴로상
최근작 : <나의 미국 인문 기행>,<디아스포라 기행>,<치유의 인문학> … 총 38종 (모두보기)
서은혜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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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도리츠(東京都立)대학교 대학원에서 일본 문학을 공부한 후, 전주대학교 일본언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임했다. 나쓰메 소세키의 『이 몸은 고양이야』, 『한눈팔기』,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인 체험』, 『체인지링』, 『우울한 얼굴의 아이』, 『책이여, 안녕!』, 『회복하는 인간』 그리고 『게 가공선』(고바야시 다키지), 『라쇼몬』(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세키가하라 전투』(시바 료타로), 『시의 힘』(서경식), 『성소녀』(쿠라하시 유미꼬), 『언어와 탱크를 응시하며』(가토 슈이치) 등... 더보기
최근작 : <일본 문학의 흐름 2 (워크북 포함)>,<창비세계문학 단편선 세트 - 전9권>,<이상한 소리 - 일본> … 총 42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대표적 재일조선인 문필가 서경식의 첫 문학 에세이
디아스포라의 눈으로 본 ‘시’와 ‘문학’의 초월성
일제 강점기 윤동주의 시, 중일전쟁 중 루쉰의 에세이,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문학까지
국가와 민족을 뛰어넘는 문학의 보편적 울림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 사상가’, ‘우리 시대 최고의 에세이스트’, ‘베스트셀러 『나의 서양미술 순례』 저자’. 서경식을 수식하는 문장들이다. 그는 꾸준히 글을 읽고 쓰는 ‘글쟁이’이지만 지금까지 그가 발표한 작품 중 순수하게 문학만을 다룬 것은 없었다.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다룬 도서, 예술과 음악 등의 문화를 다룬 도서를 집필하다 보니 정작 문학과 글쓰기에 대해 말하는 것은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시인이 되길 열망했으며, 청춘기에는 “어떻게든 문학과 관련된 분야에 끼어들어 살고 싶다고 생각”한 그이기에 이 책의 출간은 늦었지만 예정된 일이었다.
『시의 힘』은 그의 첫 문학 에세이이자, 시대의 격류와 그 흐름에 휘말린 개인사를 아우르는 ‘언어’에 관한 비평집이다. 제목은 ‘시의 힘’이지만 그의 사유는 ‘시’와 ‘문학’을 넘어서서 ‘언어’의 바다에 닿는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습득하기 시작하는 ‘말’과 학습을 통해 배우는 ‘글’이 어떻게 개인의 사상을 구축하는지, ‘모어’와 ‘모국어’의 틈새에 갇힌 디아스포라의 외로움은 이해받을 수 있는지, ‘시’와 ‘문학’이 주는 힘은 무엇이며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진지하게 탐구한다.
고립과 패배를 예감하면서도 우직하게 길을 만드는 시의 힘
패배의 역사에서 태어난 시와 문학이 지금 여기의 삶을 뒤흔들다
그는 자신의 ‘글쟁이’ 인생을 거꾸로 되짚으며 본인 글의 구조적 원형을 중학교 시절에서 찾아낸다. 재일조선인인 자신의 ‘타자성’을 깨닫고 자비를 털어 문고본을 냈던 사건이 그것이다. 그는 그때 이미 조선과 일본이라는 두 세계의 균열에 발 딛고 서서 양자 모두에게 ‘타자’ 인식을 촉구하려 했으며, 이 문제의식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고 고백한다. 조선과 일본, 재일조선인 피차별 세계와 중산층 주류의 세계, 그 사이에 선 그는 복수의 아이덴티티를 끌어안고 분열의 아픔을 감내한다. 그리고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언설을 빌려 “인간은 승리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라 부정의가 이기고 있기에 정의에 관해 묻고, 허위로 뒤덮여 있기에 진실을 말하려고 싸운다”라고 말한다. 그의 ‘글쟁이’로서의 결심과 문제의식은 시에 관해 논하는 장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문학은 태생적으로 시대적 상황과 호흡하며 쓰인다. 저자 서경식은 조선, 중국, 일본의 시와 문학에 관해 이야기하며 역동적인 동아시아 근현대사를 통과한다. 당연히 일본의 침략 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되기는 하나, 여기에 주저앉아 잘잘못을 가리는 데 치중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서로 북돋고 연대하던 힘이 문학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더 큰 힘을 기울인다.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시에 흐르는 조선독립투사에 대한 안타까움, 침략국인 일본의 선구자를 애도하는 루쉰(魯迅)의 절절한 문장은 서로에게 칼을 겨누던 그 시대에 ‘있을 수 없었던’ 한 줄기 희망이다. 피로 물든 동아시아 역사는 일본의 잘못 떠넘기기식 역사관으로 아직도 말끔히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 만약 아직 이 관계에 희망이 존재한다면, 그 희망의 상당 부분은 ‘시’와 ‘문학’에 빚지고 있지 않을까.
그는 시의 힘을 이렇게 설명한다.
“생각하면 이것이 시의 힘이다. 말하자면 승산 유무를 넘어선 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러한 시는 차곡차곡 겹쳐 쌓인 패배의 역사 속에서 태어나서 끊임없이 패자에게 힘을 준다. 승산 유무로 따지자면 소수자는 언제나 패한다. 효율성이니 유효성이라는 것으로는 자본에 진다. 기술이 없는 인간은 기술이 있는 인간에게 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원리로서 인간은 이러해야 한다거나, 이럴 수가 있다거나, 이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을 움직인다. 그것이 시의 작용이다.”
분단과 이산의 민족적 아픔을 타자와의 연대로 승화하는 법
국경과 민족마저 뛰어넘은 새로운 차원의 ‘우리’를 꿈꾸다
조선 근대사 속의 유명 시인인 한용운, 이상화, 윤동주는 모두 나라를 ‘빼앗긴’ 상황 속에서 그 절절한 고통을 시로 표현해 많은 이의 지지를 받았다. 국민 애송시로 평가받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서시」, 「별 헤는 밤」은 우리가 당시 시대적 상황에 심리적으로 얼마나 공감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저자는 이 공감이 좁은 세계의 ‘우리들’이란 범위에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외친다. ‘우리 국토’를 빼앗긴 ‘우리 민족’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빼앗겼다’는 고통의 핵을 인지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변화는 우물 안 개구리 식의 시각에서 벗어나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디아스포라와 연대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준다. 예를 들어 일본의 내부 식민지로 평가받는 오키나와 주민, 동일본 대지진을 겪은 후쿠시마 주민 또한 국가에 의해 살 곳과 주권을 ‘빼앗긴’ 자들이다. 그들과 연대하여 기본권을 ‘빼앗은’ 국가와 자본에 함께 맞서야 한다는 그의 과감한 주장은 낯설지만 그만큼 날카롭게 파고든다.
그의 태도는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을 논할 때도 일관된다. 그는 우리에게 ‘한국문학’이 무엇인지 묻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같은 한국어를 공유하는 소비자에 의해 구성되는 시장이라는 것이 답이라면, 한국문학은 민족 문학보다 더 좁은 개념이 된다. 다른 나라에서 다른 언어로 작품을 발표한 디아스포라 작가는 자연스레 배제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분단과 이산이라는 현실 속을 살고 있는 민족의 문학을 ‘한국문학’이라는 말로는 담아낼 수 없다고 단언한다. 또한 ‘한국문학’의 틀에서 벗어나 세계적 보편성을 가진 문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문학은 숙명적으로 언어의 장벽이라는 한계성을 지닌다. 그러나 어떤 언어로 쓰였든 국가를 빼앗긴 자들의 싸움, 거대 자본과 거대 권력에 대한 저항이라는 공통점이 존재한다면, 그리하여 국가와 민족의 경계선을 뛰어넘은 새로운 ‘우리’를 형성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가진 보편성이자 힘이 아니겠는가.
모어와 모국어, 문맹자와 지식인… 다층적으로 존재하는 ‘언어의 감옥’
국민의 틀을 넘어선 언어교육이 필요한 이유
저자 서경식의 개인사, 즉 서승, 서준식 두 형이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으로 투옥된 이후의 지난한 과정에 대해서는 많이들 알고 있다. 그들의 어머니인 오기순 여사의 눈물겨운 노력 또한 잘 알려졌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재일조선인이자 문맹인 그녀가 처한 현실이 구체적으로 어땠는지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저자는 20세기의 증인 49인을 꼽은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격동의 20세기를 겪은 조선 민족의 상징으로 오기순 여사를 꼽으며 기린 적이 있다. 실제로 재일조선인 1세대인 그녀의 삶은 많은 부분에서 우리 민족의 아픔을 대변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교육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교육받을 기회가 없어 문맹으로 지내던 그녀는 자식의 옥바라지를 하며 조금씩 지식의 세계로 발돋움했으나 끝내 글로 자신의 참된 목소리를 전하지는 못했다.
저자는 교육받은 지식인으로서 어머니를 ‘해석’하는 특권을 행사하곤 했지만, 처지를 바꿔 보면 자신 또한 일본어의 메이저리티에게 해석의 특권을 행사당한다고 말한다. 일본어를 모어(母語)로 쓰고 있지만 조선인인 그는 ‘일본 보통 국민’의 틀 밖에 있다. 그로 인해 처한 부당한 처지를 설명할 만한 수단 또한 일본어밖에 없다. 일본어라는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것이다.
재일조선인 1세대이자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던 어머니가 갇힌 언어의 감옥과 재일조선인 2세대 지식인인 저자가 갇힌 언어의 감옥은 각기 다른 형태의 감옥이다. 그는 이 차이점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맥상통하는 공통점을 예민한 감각으로 다룬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국민의 틀을 넘어선 언어교육을 주장한다. ‘국어’는 곧 ‘한국어’인가? 한국에 사는 다른 나라 사람, 다른 민족은 한국에 있다는 것만으로 자신들의 국어를 버리고 ‘한국어’로만 소통해야 하는가? 저자의 예리한 질문은 언어와 국민을 의심 없이 연결하는 습성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준다.
홀로코스트, 동일본 대지진, 원전 피해…
피해자와 비(非)피해자가 함께 재난을 건너는 힘, ‘직시하는 용기’와 ‘상상력’
2011년 3월, 비극적인 자연재해 동일본 대지진은 끔찍한 원전 사고로 발전했다. 후쿠시마 현은 방사능으로 인해 죽음의 땅이 되었고, 많은 사람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듯 떠나야 했다. 서경식은 후쿠시마 사태와 아우슈비츠의 홀로코스트를 병치하여 희생자, 생존자, 증언자인 그들의 아픔에 관해 논한다.
일반적으로 제노사이드를 주제로 하는 증언 문학은 성립하기 어렵다. 경험자 대다수가 학살당해 부재하며, 생존자는 입을 닫고 기억을 억압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설사 증언이 이루어진다 해도 메시지가 왜곡되어 소비되거나, 진부화, 상품화될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증언 불가능’한 사건을 증언한 생존자 중 손꼽히는 인물이 바로 프리모 레비(Primo Levi)다. 그는 돌아보는 것 자체가 고통인 사건을 뼈아프게 직시하며 끊임없는 각성을 촉구했다. 사건을 깊이 성찰하는 곤란한 역할을 피해자인 그가 부당하게 맡은 것이다. “사건은 일어났고 따라서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핵심이다”라는 레비의 말은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났어’라고 쉽게 말하는 지금의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준다.
저자는 참극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 기울여야 할 노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피해의 진원지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일수록 피해의 진실에 스스로 상상력을 발휘하려 노력하고, 피해의 진원지에 가까운 이들일수록 용기를 내어 가혹한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증언자(표현자)는 ‘표상의 한계’를 넘어서는 증언(표상)에 도전해야만 하고, 독자는 스스로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발휘하려고 애써야만 한다.”
의문형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희망
‘생명’은 ‘픽션화’되지 않는다
『시의 힘』은 「의문형의 희망」이라는 장으로 시작한다. 동일본 대지진과 원전 사고를 다룬 일본 시인의 시집에 대한 감상문이다. 많은 이가 죽어간 바다,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이 표류하다 죽어간 바다. 고등학교 교사인 시인은 절망만이 존재하는 현장에서 고요하게 분노를 토로한다. “꾸며낸 혓바닥으로 / 상냥하게, 희망을 노래하지 마라”라며, 애도가 끝나지도 않은 자리의 섣부른 거짓 희망을 경계한다. 절망의 순간, 희망은 행복한 노래로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이 존재하는지 않는지도 알 수 없다. 지금은 의문을 함께하며 헤매야 하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 책의 주제를 관통하는 루쉰의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생각해보니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거였다. 이는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시 땅 위엔 길에 없다. 걷는 이가 많아지면 거기가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시의 힘』의 마지막 장 「픽션화된 생명」은, 첫 번째 장에 대한 저자 나름의 대답이라고도 볼 수 있다. 모든 것을 ‘픽션화’하며 거리를 두어 자신을 보호하는 요즘 학생이 시의 힘으로 처음 ‘생명’을 실감하는 순간을 다룬 이 짧은 글은, 묵직한 질문으로 점철된 이 책에 작고 연약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존재하는 희망의 날개를 달아준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거듭되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꿈을 가져야 할 이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 심지어 패배할 것이 뻔한 길을 묵묵히 걷는 이유, 한 편의 시를 읽는 이유. 어쩌면 이 의지 자체가 희망은 아닐까.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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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되는 서경식 교수의 책이다. 과거 자신의 경험, 현재, 그리고 일본의 미래를 보면서 우경화와 국가주의를 위한 민족의식고취를 비판한다. 흔히 진리로 믿는 국가, 민족, 모국 같은 개념이 얼마나 필요에 의해 조작되고 만들어지는 건지 생각해볼 수 있다
transient-guest 2017-02-15 공감 (1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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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진정 지성인이며 문인이다.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책을 읽고 이 후 그의 책은 거의 다 읽고있다. 서승, 서준식, 서경식 삼형제분에게 우리 조국은 미안해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로서 그들의 삶. 재인조선인의 삶과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그것이 역사의 의무이다.
backsuly 2015-07-16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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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지 않을 수 없는 길을 걸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처연하고 슬프다. 시를 왜 써야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왜 계속 저항해야 하는지, 왜 계속 말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어제 책을 받자마자 계속 읽고 또 읽는다. 모든 것을 픽션으로 만든다는 마지막 말에 심장이 덜컹한다.
arario 2015-07-12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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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받았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인문학책이 다 있구나, 감탄하며 아주 조금씩 읽고 있다. 특히 루쉰 이야기는 굉장히 뭉클했다. 아아, 내가 잘못 알고 있었어... ...
난나 2015-08-08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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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 결정 (루쉰), [안네의 일기]의 교훈 (브루노 베텔하임), `패트리어티즘`이라는 용어 (마르크 블로크) 등과 마지막의 이시가키 린의 시까지, 읽고 또 읽게 된다.
[경계에서 춤추다]에 이은 서은혜의 번역 또한 만족스럽다.
orangelamp 2016-03-14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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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시의 힘>
“I am a Japanese”
일본의 어느 중학교 교실, 모든 학생들이 선생님의 ‘아이엠어 재피니즈’를 따라 할 때
유독 한 소년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뭐시여, 왜 안 따라 혀? 개기는 거여, 시방?”
선생님이 소년을 다그치자 소년은 우물우물 말했다.
“저는..... 조선인....인데요.”
안아주고 등을 토닥이고 싶었던 이 소년은 어느덧 예순을 훌쩍 넘겼으니
<소년의 눈물>의 저자 서경식 선생님이다.
(위의 상황은 약간의 윤색을 했으니 너그러이 이해해주세요 ^^)
<시의 힘>은 저자의 강연과 에세이들 중에 ‘문학’과 관련된 글들을 추려 엮은 책이다. 책을 통해 저자는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처럼 자신이 어떤 책을 읽어왔고, 어떤 작가들에게 영향을 받았는지를 회고한다. 오에 문학 출발점이 <허클베리 핀>이었다면 저자의 경우엔 라이너 마리아 릴케였다.
이것이 나의 투쟁이다.
천만 줄기 뿌리를 뻗어, 저 멀리 인생 밖으로 성장해가는 것이.
저 멀리, 세상 밖으로.
이외에도 프란츠 파농, 폴 니장, 에드워드 사이드, 루쉰, 나카노 시게하루, 프리모 레비 등등
고등학교 축제 때 자신의 시집을 직접 팔았을 만큼 시에 열정을 보였던 저자는 청년시절 주로 한국 시인들의 시에 영향을 받는다. 김지하, 신동엽, 신경림, 양성우, 고은, 한용운, 윤동주, 이상화, 김수영, 박노해, 정해성 등등. 특히나 그는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을 애타게 읽었다.
(어린 시절 그에게 영웅 같았던 김지하가 도살자의 딸을 지지하는 걸 보고 그 역시 꽤나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 독립투사들이 있었다면 일본에도 침략 전쟁을 반대한 열사들이 있었다. 고바야시 다키지. 일본의 대표적인 프롤레타리아 작가로 일본 경찰의 고문에 의해 죽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한 대표적 인물이 중국의 국민작가인 루쉰이다.
30년 동안 나는 많은 젊은이들의 피를 목도했다. 그 피들은 켜켜이 쌓여 숨도 못 쉴 만큼 나를 매장했다. 나는 그저 붓과 먹만으로 몇 줄의 글을 쓸 수 있을 뿐이며 그것은 진흙 속에 조그마한 구멍을 내고 목숨을 부지하고자 거기서 계속 헐떡이려고 하는 바와 같다. 어떤 세상인가? 밤은 길고, 길은 멀다. 차라리 망각이 나을지도 모른다. 잊어버리고 말하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내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그들을 기억하여 다시 그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임을 나는 안다......
그리고 나카노 시게하루는 루쉰의 글에 감동을 받는다.
생각해보니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거였다. 이는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시 땅위엔 길이 없다. 걷는 이가 많아지면 거기가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나카노 시게하루는 루쉰의 정치와 문학의 결합을
“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 결정”이라 명명했다.
나도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어떤 일이 있어도 올바른 인간이 되어야지, 하는 것 이상으로 (중략) 일신의 이해, 이기라는 것을 떨쳐버리고, 압박이나 곤란, 음모가들의 간계를 만나더라도 그것을 견뎌내며 어디까지나 나아가자, 고립되고 포위당하더라도 싸우자, 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그곳으로 간다.
<시의 힘>이란 제목은 나카노 시게하루로부터 연유한 것이다.
생각하면 이것이 시의 힘이다. 말하자면 승산 유무를 넘어선 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러한 시는 차곡차곡 겹쳐 쌓인 패배의 역사 속에서 태어나서 끊임없이 패자에게 힘을 준다. 승산 유무로 따지자면 소수자는 언제나 패한다. 효율성이니 유효성이라는 것으로는 자본에 진다. 기술이 없는 인간은 기술이 있는 인간에게 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원리로서 인간은 이러해야 한다거나, 이럴 수가 있다거나, 이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을 움직인다. 그것이 시의 작용이다.
프리모 레비의 시를 읽은 저자는 ‘이것은 후쿠시마를 노래한 시가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을 읽고 내가 ‘이것은 세월호가 아닌가’하고 생각했던 것처럼.
저자는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를 쓸 만큼 레비의 삶과 제노사이드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책에 실린 일본의 레비 연구 일인자인 다케야마 히로히데의 말에 무릎을 쳤다.
프리모 레비와 프랑클은 같은 강제수용소에 있었지만 문제의식은 전혀 달랐다. 프랑클은 강제수용소에서의 인간의 정신적 변화에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그는 강제노동 끝에 쇠약해져서 죽음에 이르는 일반적 억류자, 즉 레비가 말하는 ‘익사하는 자’의 변화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어떻게 강제수용소에서 살아가는가, 극한의 생존 상황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정신을 고양시킬 수 있는가에 주안점을 둔다. 그는 ‘고통받는 것의 의미’에 관해 생각한다.
‘가혹하기 짝이 없는 외적 조건이 인간의 내적 성장을 부추기는 일이 있다’ 그리고 ‘외면적으로는 파탄되고, 죽음마저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있어서조차, 인간으로서의 숭고함에 이르는’ 것과 통한다. (중략) 여기서 프랑클은, 아우슈비츠를 만들어낸 이유를 묻기보다는, 그런 곳에서의 극한상황이 어떻게 인간의 정신을 고양하는가 하는 점을 중시한다. 그리고 ‘희생’이 되는 것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는 ‘순교자’라는 단어까지 사용한다.
프랑클은 극한 상황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었던 반면 레비는 내가 왜 이런 극한 상황에 처해있는지 그 시스템 자체를 문제시 삼았다. 과연 누가 옳았던 것일까?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장 아메리, 브루노 베텔하임, 프리모 레비, 말년엔 결국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온전히 살아남은 이는 프랑클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연 프랑클이 옳았던 것일까.
프랑클은 ‘감동적’으로 소비되었으나, 저자의 말처럼 원인을 규명하고 재발을 막는 데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프랑클의 ‘순교자’라는 표현에 베텔하임은 이렇게 말했다.
나치 희생자들을 ‘순교자’라고 부름으로써, 우리는 그들의 운명을 속이는 것이다. (중략) 그들이 자신의 신앙을 버리더라도, 단 한 사람도 죽음을 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독교로 개종한 자도 무신론자들이나 깊은 종교심을 지닌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가스실로 보내졌다.
그리하는 것은 그들의 것일 수 있는 마지막 인식을 그들에게서 빼앗는 것이며, 그들에게 부여할 수 있는 마지막 존엄을 부정하는 것이고, 그들의 죽음이 무엇이었는지 직시하며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왜곡이 우리에게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하찮은 심리적 해방감을 위해 그들의 죽음을 미화해서는 안 된다.
베텔하임의 지적에 따르면, 프랑클의 저서는 그 처절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감동적’결말에 의해 오히려 독자에게 거짓 위로와 해방감을 주고, 방어적 부인과 억압에 도움을 준다고 할 수 있다.
빅터 프랑클의 <죽음의 수용소를 찾아서>는 분명 감동적인 책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소비함으로써 우리가 거짓 위로를 받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성찰해 봐야 하지 않을까.
‘국가주의’에 물든 한국인들은 대개 국민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특히나 꾸준한 독서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잘못된 범주화 오류’를 저지르기 쉽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국민은 하나의 가족’이라거나 ‘피를 나눈 우리’와 같은 식으로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가족관계나 혈연관계에 비유하는 것은, 구성원 각자의 자발적인 참가를 전제로 해야 할 사회 조직을 마치 ‘운명 공동체’인 양 묘사하여 구성원들을 권력관계로 묶어둘 위험을 내포한다.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가족이라는 것이 각 개인에 의해 구성되는 사회적 단위라는 사실을 새삼 인식해야만 한다.
일찍이 니체는 ‘국가는 훔친 이빨로 물어뜯는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국가는 나를 대표하지 않는다. 루쉰이 자신들을 침략한 일본의 국민들에게 ‘친구’라는 표현을 썼듯 우리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친구’로 받아들여야 한다. 일본인이나 중국인이라고 해서 다르겠는가. 단, 국가의 수장들과 기득권자들의 악랄하고 비열한 행태에 침묵해서도 안 될 일이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모국일지언정.
얼마 전 우리 박근혜 각하께서 노동자들을 자르기 쉽게 해달라고 서명을 받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저건 박정희 유신시절, 장준하가 주도한 유신 철폐 백만인 서명운동을 보고 따라 한 것일까?’
각하를 따라 대기업 임원들도 길거리로 나와 서명을 받았다지.
시인 정희성의 시처럼 이제 가진 자들이 저항을 하고 있다니!!
저자의 마지막 말에 울컥하였다.
‘시의 힘’이란 ‘시적 상상력’을 가리킨다. 루쉰에게 있어 “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 결정(나카노 시게하루)” 역시 그러한 상상력이 가져온 것이다.
‘문학’이 저항의 무기로서 유효한지 의심스럽다. 내가 쓰는 것을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지는 더욱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이런 책을 내려는 이유는 본문에서 루쉰의 말을 빌렸듯, “걸어가면 길이 되기” 때문이다. 아직 걸을 수 있는 동안은 걷는 수밖에.
나 역시, 다짐해본다.
걸을 수 있는 동안 걸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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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2-16 공감(22)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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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여, 기침해야 할 계절이 돌아왔다
누구나 정치에 관해 얘기할 수 있고 잘못된 정책이라고 판단되면 신랄하게 꼬집을 수 있어야 한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유신체제의 폭압에 대해 어느 시점에 몸을 던져 저항할 것인가 하는 결단의 강박 아래 살아야 했다. 그렇지만, 가장 먼저 앞장서서 저항의 등불을 밝힌 청년들이 있었다. 대학 강의를 듣는 일보다 시위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였고, 조국의 현실 앞에 눈물을 쏟아냈으며, 때로는 온몸을 불살라 절규도 했다. 그들이 공유하는 문학도 새로웠다. 저항시가 문학적 위세를 떨쳤다. 80년대에 노동자시 혹은 농민시라는 이름으로 시들이 시대의 아픔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심어 주었다. 시인들은 저항과 투쟁의 거리 한가운데를 달리며 의연한 싸움으로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지켜내려고 노력했다.
길거리에 최루가스 냄새가 사라진 이후 대학생들은 자유분방해졌다.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과거에 들끓던 민주화운동을 정리할 필요를 느낄 만한 시점이다. 그래서일까.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젊은 작가들은 어느덧 세월이 흘러 문단을 주도하는 중견, 원로급 작가가 되었고, ‘역사의 시간’으로 남은 그 시절을 복원하려고 노력한다. 역사라 이름 지어진 순간들은 과연 시간의 저 너머 어딘가에 묻혀 발굴을 기다리는 유물 같은 것일까. 유신체제 시절을 그리워하는 자들은 역사를 거꾸로 돌아가려고 한다. 역사의 오욕과 역류가 벌어지는 오늘의 역사에 삶의 정당성을 위해 싸웠던 지식인들을 지금 무엇 하고 있는가. 그들의 모습에는 민주주의를 위해 달려오게 한 저항의 에너지가 보이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완성되지 않았다. 부정한 사회에 따끔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유도하는 에너지로 전환되기는커녕 과거 추억팔이에 한창이다.
시는 비틀거리고 있다. 자기 성찰 하나 없이 지고지순한 세상이 온다는 희망만 노래할 뿐, 진실한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진짜 큰 문제는 시인을 구속하는 현실이다. 시인의 희망을, 타인의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지 못하는 여린 마음을 불법이라고 낙인찍는 나라다. 송경동 시인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문인들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한 걸까, 아니면 그들이 과거의 학습효과 때문에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일까.
시가 휘청거릴 때 서경식 선생의 책이 구원의 손길처럼 다가온다. 만약에 서 선생이 시인이었다면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만한 사랑, 민주주의, 인권, 자유를 담았을 것이다. 선생은 독서와 시 창작에 매달리며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이겨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박일호라는 필명으로 개인 소장판 시집을 펴낸 적도 있다. 그는 고통스러운 삶 속에 ‘시’라는 작은 창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선생은 삶과 자유를 갈망하는 ‘실천자’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었다. 시는 그를 국가와 언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폭력을 고발하는 지식인으로 끌어들인 안내자가 됐다. 선생은 ‘시’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오늘날 시가 현실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찰하고 있는지 자문한다.
일제강점기 우리 문학에서 ‘저항시’라는 장르는 도드라진다. 시어는 감각적이고 함축적이어서 다른 장르에 비해 저항의 정치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는 빼앗긴 국토에 대한 상실감과 그것을 다시 회복시켜야 한다는 강한 의지력이 담겨 있다. 윤동주는 하늘, 바람, 별 같은 서정적인 시어를 골라 썼지만, 그것들이 속한 것은 ‘조국’이었다. 조국의 현실에 아파하던 시인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서시」)면서 삶의 괴로움을 외면하지 않고 이겨나갈 것을 다짐한다. 찌그러진 사회에 몸을 굽히지 않는 시인들의 의식은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시대에도 이어진다. 양성우가 ‘겨울공화국’이라고 칭했던 유신 때도 시인들의 저항은 멈추지 않았고, 박노해는 소외된 노동자들의 삶에 진지한 관심을 드러낸다.
정치와 문학의 결합. 서 선생은 사회 앞에 침묵하지 않는 시를 나카노 시게하루의 표현을 빌려 “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선생이 생각하는 시의 힘이요, 비정한 권력의 힘에 저항하게 하는 의지다. 선생은 여전히 저항시가 현실에 유효한지 의문부호를 단다. 그런데도 마땅한 좌표를 찾지 못하는 현실을 직시하는 저항시의 흐름이 이어지기를 원한다. 직설적 언어로 사회 개혁의 의지만을 천명하기보다는 거대한 대중들을 이끌어내도록 유도하는 실천의 언어가 절실히 필요하다.
문학의 비판 기능이 사라진다면 사회의 가치 체계는 전도되게 마련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우리의 적을 닮아버렸다. 정직하게 분노하는 방법을 잊고 만다. 부조리한 현실을 회의하고 생각하는 문학이 너무도 드물다. 시인이라는 직업은 불운하다. 직관과 영감으로 번뜩이는 아름다운 노래를 읊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렇지만 좋은 것만 보고 싶은 마음으로 시를 만든다면 그 시는 정말 진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까. 김수영, 송경동처럼 정의와 도덕이 무의미해지는 시대를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시인이 우리 사회에 존재해야 한다. 이들은 절대 침묵하지 않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시를 쓰면서)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그러한 문학을 꿈꾼다. 고통을 회피하지 않는, 더 정확하게는 회피할 수 없도록 정해진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시의 힘》을 읽고 있을 때, 김수영이 '눈'에서 젊은 시인들에게 재채기하라고 했던 구절이 퍼뜩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직한 분노를 묵살해버리는 백색으로 위장한 어두운 현실에 대고 ‘기침’을, 재채기하는 계절이 돌아왔다.
※ 일본은 타이완과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지배하고 ‘만주’의 패권을 러시아과 다투고 있다. (102쪽) → '러시아와 다투고 있다'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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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10-14 공감(18) 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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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역사를 응시하며 살아가기
지난 달 3월, 재일 조선인 서경식 작가는 20년간 일해 온 도쿄경제대를 정년 퇴직했다. 디아스포라 소수자로 살아온 그.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재일조선인은 공립학교 교원이 될 수 없었다. 서경식은 쉰 살이 넘어 정식 교수가 되어 학교 측으로부터 노동조합 가입의 권유를 받았을 때, 자신이 마치 ‘특권’을 받는 사람같이 느껴졌다고 회고한다.
“내 출신과 문화를 홀로 등에 짊어진 채 나는 다른 모든 학생들과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는 듯한 기분”을 짊어졌던 소년 서경식. 그는 책을 읽고 시를 쓰며, 문학 작품 속으로 도망치기도 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치열하게 찾으며 살아왔다.
가난한 재일 조선일들이 사는 교토에서 자란 서경식은 중산층 이상이 다니는 중학교에 들어간다. 소위 문화적 소양이 있는 친구들에게 둘러싼 그는 열등감, 동경, 경쟁심이 발동하여 더욱 문학작품 세계 속으로 빠져든다. 무엇보다도 글을 잘 써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했다. 일종의 과시욕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글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여 소수자로 주눅이 들었던 소년시절의 굴욕감에서 벗어나자 했다.
”나는 저소득층 피차별자의 세계로부터 중산층 주류들의 세계로 옮겨갔고 양자 사이의 경계에 서서 주위 사람들에게 ‘타자’인식을 촉구하려는 동기로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저자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되던 해, 1967년 한일 조약체결로 인해 조국을 방문할 수 있게 된다. 1971년에는 재일 교포 간첩단 사건으로 그의 두 형이 구속, 수감되자 그는 형들의 석방을 촉구하고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적극 가담한다. 사회변혁의 현장에서 서경식은 김지하, 정희성, 박노해의 시를 읽으며 시인이란 “시대에 침묵하지 말아야 함”을, “시는 사회에 소외되고 상처 입은 이들을 위해 노래해야 함”을 되뇌었다.
서경식 작가도 사회변혁의 현장과 시대의 아픔, 소수자의 차별, 잃어버린 모어와 역사를 주제로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어딘가에서 자신의 시를 읽을 독자에게 다가가고자 했던 시인. 그에게 한국문학을 읽는 독자는 국경을 넘어선다. 그는 ‘한국문학’보다는 ‘민족문학’이라는 용어를 써서 한국문학을 접하는 독자는, 남한뿐 아니라 휴전선 너머에 있을, 보이지 않는 독자들 까지도 포함해야 한다고 말한다. 재일조선인, 코리안 디아스포라까지. 재일 조선인 서경식의 글을 한국에 있는 독자가 읽고 있듯이, 일본 식민지배와 분단으로 흩어진 이들이 쓴 문학도 한국문학에 포함할 수 있지 않겠는가.
‘시’란, ‘문학’이란 역사의 패배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라면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연결해 준다. 식민지배를 부정하고 있는 일본인은 현재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다. 저자는 지금의 고통을 통해 "자국이 식민지 지배를 하며 타자에게 강요해온 고통을 통감할 수 있다면, 동아시아 근대사에서 보기 드문 만남이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묻는다. 그 둘의 고통을 이어주는 것이 바로 시, 즉 문학의 역할이라고 보았다.
현대문학은 세계의 독자들에게 어떤 보편성을 전할 수 있을까. 세계문학의 범위를 한 나라에 국한 짓지 말고 지리적 경계선을 내려보자. 예컨대, 세계 각지에는 오육백 만명이나 되는 조선 민족의 디아스포라가 있다. 그들은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고 삶의 현장은 한반도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근대 이후 조선 민족의 역사적 경험과 깊숙히 연결되어 있다. 그들이 쓴 문학은 ‘민족 문학’ 범주에 넣을 수 있지 않을까. 더 나아가 그들의 문학은 다른 국가의 디아스포라의 삶과 공유할 수 있기에 보편적일 수 있다.
저자는 “문학이 저항의 무기로서 유효한지 의심스럽다.”라고 고백하면서도 루쉰이 말할 것처럼 “걸어가면 길이 된다”는 말을 따라, 계속해서 글을 써나가리라 다짐한다. <시의 힘>은 재일 조선인이 문학의 힘에 기대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성장과정과 시에 담긴 섬세한 감성, 소수자로 살아가는 고뇌의 목소리가 담긴 책이다. 한반도의 바깥에서 조선의 역사, 모어에 대한 그리움, 시대의 변화, 역사적 사실과 현재를 시와 문학가들의 작품을 통해 찾고자 하는 저자의 치열한 사유가 돋보인다. 문학의 새로운 보편성과 한국문학의 범위를 지역과 경계를 넘어 상상해보는, 시선이 열리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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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공 2021-04-25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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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란 침묵해선 안 되는 사람
시인이란 어떤 경우에도
침묵해선 안 되는 사람을 가리킨다.
요컨대 이것은 승산이 있는지 없는지 효율적인지 아닌지,
유효한지 어떤지 하는 이야기와는 다르다는 말이다.
한국에서도 '상처입고 소외된 사람들'과 어떻게 연결된 것인가 하는 것이 시인에게 부과된 커다란 과제다.
1980년대 같은 피투성이 잔치는 끝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은 지금 눈앞에 있는 현실을 노래할 방법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155)
이 책은 단행본으로 집필한 책은 아니다.
이곳 저곳에서 강연한 것들을 모은 책인데,
내용이 썩 좋다.
무엇보다, 시라는 것이 서야 할 지점이 어디인지,
왜 김지하나 박노해의 변절이 나쁜 것인지를 말하고 있어서 좋다.
그들의 변절에 대하여 애써 변호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시답잖기는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니 '시답잖다'는 말은 '시답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일주일 전에 교실에 '바비'와 '밥충이'를 퍼다 두었더랬다.
같은 날 떠놓은 밥인데도,
칭찬을 퍼부은 밥은 이쁜 그대로인 반면, 욕을 한 밥은 곰팡이가 피고 아주 못쓰게 생겼다.
언어의 힘은 이렇게 큰 것이다.
귀가 없는 밥조차, 언어의 힘에 휘달리는 것인데,
인간으로 태어나서 해서는 안 될 소리를 지껄이는 인사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윤동주의 '서시'의 한 구절,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를
일본의 '이부키 고' 번역판에서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이라고 번역했다 한다.
지난 봄, 도시샤 대학에 가서 시비를 보면서도 미처 그것까지는 읽지 못했다.
그 죽어가는 것들...에는 안중근과 윤봉길, 그리고 그 자신의 목숨도 있었다.
그러나 '그저 살아있는 것들'은 다르다.
루쉰의 '고향'의 마지막 구절을 흔히 애송한다.
생각해보니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거였다.
이는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시 땅 위엔 길이 없다.
걷는 이가 많아지면 거기가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을 '명랑한 언설로 앞길의 광명을 생각하며 걷기 시작하는 자들의 구령처럼 인용'하는 예가 많다고 나카노 시게하루는 지적한다.
하지만 이 것은 읽는 이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희망은 업지만 걷는 수밖에 없다.
걸어야만 한다.
그것이야말로 희망이라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루쉰은 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암흑을 이야기한다.(108)
서정시로 된 '정치적 태도 결정'이야말로 시의 힘이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역할과 위치는 크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다.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국의 지배 이후 더 심해졌다.
지난 9월 일본은 이제 다시 전쟁이 가능한 나라로 바뀌었다.
동아시아는
근현대 역사에서 일본이 침략전쟁 혹은 식민지 지배를 했던 지역이다.
미얀마를 경계로 동쪽에 위치하는 아시아 국가중 일본 침략이나 식민 지배 흔적이 없는 곳은 없다.
따라서 역사에 등돌리는 것은
이 지역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기본 전제를 잃어버린 태도다.
센가쿠 제도는 청일전쟁 과정에서 일본에 편입되었고,
독도는 러일전쟁 와중에 편입된 것이다.
따라서 이들 지역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주장은,
총체적 근대사를 현재 시점에서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와 궤를 같이한다.
근대의 부(負)의 유산을 총체로서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그러한 성찰적 시점이 사라지고 있다.(91)
일본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한국 역시 역사에 등돌린 지배세력이 권력을 잡고 있는 한, 과거의 짐진 자들이 과거를 날조하는 한,
성찰적 시점이 설 자리는 점점 없어 진다.
그것이 시의 죽음이기도 한 것.
잔치가 끝나버렸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길은 계속 될 것이다.
꾸며낸 혓바닥으로
상냥하게, 희망을 노래하지 마라
거짓된 목소리로, 소리 높여, 사랑을 부리지지마라(목숨의 빛줄기가)
시인은 끝없는 의문형으로 현재에 질문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시인이 침묵하면 현재는 암울한 시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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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5-12-08 공감(9)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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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움직이는 힘
한국인인지만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일본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 이 두 가지가 갖는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옳고 그름을 논하는 가치명제와는 다르게 타고난 '조국'은 사실명제다.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사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인 서경식은 이 두 나라에 속하면서도 두 나라 모두에서 '주변'과 '경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시대를 성찰한다. 그 성찰의 도구가 바로 글쓰기이다.
양자 사이의 경계에 서서 주위 사람들에게 ‘타자’인식을 촉구하려는 동기로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물론 동시에, 이 세계 사이에서 온몸이 찢기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행위를 통한 자기 인식의 시도이기도 했다. -p25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객관하여 바라보는 것, 그것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디아스포라인으로서 최선의 선택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유학갔던 두 형들이 정치범으로 체포되자 저자의 정체성은 더욱 혼미해진다. 일본의 마이너리티로 살아가고 있던 저자에게 형들에게 내려진 무기징역과 징역 7년의 의미는 한국의 현대사를 객관화하여 바라보는 시도를 하게 한 신호탄이었다.
한국의 현대사를 객관화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라는 프레임의 역사를 새롭게 그려야 한다. 저자는 '동아시아'란 근현대 역사에서 일본이 침략 전쟁 혹은 식민지 지매를 했던 지역을 의미한다고 한다. 미얀마를 경계로 동쪽에 위치하는 아시아 국가 중 일본의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를 받지 않은 나라는 없다. 따라서,일본은 근현대사에서 대외 침략자라는 오명을 씻을 수도 없기에 동아시아와 함께 평화를 구축해야 하는 입장에 서 있다.
저자는 시가 시대와 궤를 같이하여 왔다는 방증으로 시와 현대사를 반추한다. 저자에게 영향을 미친 시들은 김수영의 [고궁을 나오면서],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와 같은 저항시들이었고 글쟁이로서의 숙명을 깨우쳐 주었던 시인들이었다. 조국의 분단과 민족의 이산이라는 현실에서 저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 그것은 글쓰기였다.
일본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지배층의 이야기에 대한 , 재일조선인이라는 마이너리티 입장의 대항적 이야기를 제시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넓은 강과 호수에 둘러싸여 살던 조선은 식민지배라는 홍수의 시대에 일본이라는 수레바퀴 자국에 고여 있는 물이 되었다. 강호로부터 떨어져 나온 수레바퀴 자국 웅덩이 속에 남겨진 코리안 디아스포라였던 저자는 <디아스포라 기행>에서 밝히듯 말라가는 웅덩이 속에서 숨을 쉬기 위해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미는 붕어의 간절함으로 글을 써왔다고 한다. 루쉰의 시를 읽고 감명을 받은 일본의 시인 나카노 시게하루의 비평을 통해 저자는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보았다고 한다. 바로 그것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시대의 힘이자 '시'가 가진 본질이다.
“생각하면 이것이 시의 힘이다. 말하자면 승산 유무를 넘어선 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러한 시는 차곡차곡 겹쳐 쌓인 패배의 역사 속에서 태어나서 끊임없이 패자에게 힘을 준다. 승산 유무로 따지자면 소수자는 언제나 패한다. 효율성이니 유효성이라는 것으로는 자본에 진다. 기술이 없는 인간은 기술이 있는 인간에게 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원리로서 인간은 이러해야 한다거나, 이럴 수가 있다거나, 이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을 움직인다. 그것이 시의 작용이다.”
3부 <조선의 시인들>은 시의 힘이 무엇인지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이다.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민중을 무력으로 진압하더라고 결코 평화를 불러올 수 없다는 사실을 역사가 가르쳐주듯이 식민지 탄압에서도 독립운동 선언서를 낭독하고 저항시를 쓴 시인들- 이상화, 윤동주, 김지하-에 이어 2000년대의 정희성까지 시에 담긴 시대의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소외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상' 시인은 침묵해서는 안되는 사명이 있다고 한다. 이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디아스포라와 연대할 수 있는 감성의 토대이며 동아시아의 평화를 구축해 줄 수 있는 단초이다.
디아스포라는 말에는 역사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한국인이지만 일본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재일조선인을 설명하려면 잊혀지지 않는 과거의 한 페이지였던 식민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대가 낳은 민족의 비극은 조국 분단과 민족 이산이라는 디아스포라들의 탄생이었다. 저자는 역사가 낳은 민족 이산에서 등을 돌린다는 것은 동아시아 평화를 지키기 위한 기본적 전제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며 근대사에 대한 성찰적 자세를 권고한다. 굴곡진 현대사 속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자각과 일본인들이 지향해야 할 점등을 문학에서 찾는 시도가 무척 신선했던 비평집이다. 역사와 문학을 외올실로 엮은 서경식만의 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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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모노로그 2015-08-05 공감(9) 댓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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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지식인, 서경식 선생 별세 (1951~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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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주간 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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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선택
"시, 오늘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격려의 언어"
서경식의 글을 꾸준히 읽은 이라면 <시의 힘>이란 제목이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할 텐데, 그는 어린 시절부터 글로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1학년 조국을 처음 경험하고서는 그 기억을 시로 적어 자비 출판으로 시집을 만들기도 했다. 지금 그가 시인으로 불리지는 않지만, 그는 그 시절 어딘가에서 자신의 시를 읽고 공감해줄 미지의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문학 하는’ 의미를 깨닫는다.
그는 이와 겹쳐서 동아시아 근대의 흐름에서 ‘시의 힘’을 발견한다. 루쉰을 필두로 한용운, 윤동주, 박노해, 최영미가 승산과 효율성과는 무관한 시인의 일을 증명하고, 그들이 그때 부른 시가 소외되고 상처 입은 현실을 노래하는 시임을 확인한다. 그는 시와 문학에 힘이 있는지 되물으면서도 이 시대야말로 어느 때보다 그 힘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시대가 요청하는 자기 역할을 완수하고 그 과제를 공유하는 이들과 연대하고자 하는 그의 시, 문학론은 그의 삶과 글에서 이미 자기 증명을 마친 게 아닐까. 더불어 그가 전한 저항과 격려의 언어가 오늘의 숱한 독자를 흔들어 깨우는 건, 앞서 던진 물음 '시에 힘이 있을지'에 대한 답이라 하겠다.
- 인문 MD 박태근 (2015.07.14)
기본정보
파일 형식 : ePub(19.38 MB)
TTS 여부 : 지원
종이책 페이지수 : 296쪽
책소개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 사상가', '우리 시대 최고의 에세이스트', '베스트셀러 <나의 서양미술 순례> 저자'. 서경식을 수식하는 문장들이다. 그는 꾸준히 글을 읽고 쓰는 '글쟁이'이지만 지금까지 그가 발표한 작품 중 순수하게 문학만을 다룬 것은 없었다.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다룬 도서, 예술과 음악 등의 문화를 다룬 도서를 집필하다 보니 정작 문학과 글쓰기에 대해 말하는 것은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시인이 되길 열망했으며, 청춘기에는 "어떻게든 문학과 관련된 분야에 끼어들어 살고 싶다고 생각"한 그이기에 이 책의 출간은 늦었지만 예정된 일이었다.
<시의 힘>은 그의 첫 문학 에세이이자, 시대의 격류와 그 흐름에 휘말린 개인사를 아우르는 '언어'에 관한 비평집이다. 제목은 '시의 힘'이지만 그의 사유는 '시'와 '문학'을 넘어서서 '언어'의 바다에 닿는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습득하기 시작하는 '말'과 학습을 통해 배우는 '글'이 어떻게 개인의 사상을 구축하는지, '모어'와 '모국어'의 틈새에 갇힌 디아스포라의 외로움은 이해받을 수 있는지, '시'와 '문학'이 주는 힘은 무엇이며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진지하게 탐구한다.
목차
* 한국어판 서문
1장 의문형의 희망 - 사이토 미쓰구 시집 『너는, 티끌이니』에 부쳐
-너는, 티끌이니-사이토 미쓰구
2장 나는 왜 글쟁이가 되었는가
어린 시절-첫 단편소설
시집 『8월』-고등학교 1학년, 조국과의 첫 만남
대학 시절-현장도 없고, 독자도 없던
‘민족 문학’과의 만남
- 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
-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김수영
서양미술순례-미술과의 대화
그 후-일본을 ‘현장’삼아
* 시집 『8월』
3장 시의 힘
제1부 루쉰과 나카노 시게하루
동아시아-일본이 침략 전쟁 혹은 식민지 지배를 했던 지역
탈원전운동도 평화운동
엇갈린 만남
- 코코아 한 스푼-이시카와 다쿠보쿠
희망
어떤 측면-나카노 시게하루
망각을 위한 기념
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 결정
제2부 조선의 시인들-‘동아시아’ 근대사 속에서
역사적 분기점
- 당신을 보았습니다 - 한용운
지금도 일본인에게 묻고 있는‘3·1독립선언’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조선.오키나와.후쿠시마
생략해서는 안 되는 것
- 별헤는 밤-윤동주
번역에서 보이는 식민지주의의 심성
- 서시-윤동주
안락사하는 일본 민주주의
한국민주화 투쟁.노동운동 속에서
- 겨울 공화국-양성우
- 노동의 새벽-박노해
- 서른, 잔치는 끝났다-최영미
- 돌-정희성
- 세상이 달라졌다-정희성
시인이란 침묵해선 안 되는 사람
4장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을 둘러싼 단상 - ‘새로운 보편성’을 찾아서
‘한국문학’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문학’이 지닌 한계성과 보편성
5장 경계를 넘은 자의 모어와 읽기 쓰기 - 어느 재일조선인 1세 여성의 경험에서
어머니가 남긴 노트
어머니 앞을 막아섰던 네 개의 벽
배움의 원동력
‘배우지 못한’ 것의 강함과 괴로움
풍성한 이야기를 떠받쳤던 민중적 네트워크
‘참된 목소리’를 어디까지 담아낼 수 있는가?
역경이 불러온 만남, 언어의 획득
모국어를 일본인의 틀 밖까지 펼쳐내다
국민(nation)의 틀을 넘어서는 언어교육을
6장 ‘증언불가능성’의 현재 - 아우슈비츠와 후쿠시마를 잇는 상상력
「지상의 유력자들이여, 새로운 독의 주인이여」
- 폼페이의 소녀-프리모 레비
제노사이드 문학의 ‘불가능성’
표상의 한계
『안네의 일기』의 교훈
프랑클과 레비
동심원의 패러독스
7장 패트리어티즘을 다시 생각한다 - 디아스포라의 시점에서
어느 택시 기사와의 대화
향수와 국가주의
가족애와 애국심
‘패트리어티즘’이라는 용어
8장_픽션화된 생명
- 산다는 것-이시가키 린
* ‘돌아선 인간’의 저항-후기에 갈음하여
* 작품 해설
* 역자 후기
접기
책속에서
P. 4~5 “시에는 힘이 있을까? 문학에 힘이 있을까? 의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 ‘시의 힘’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우리를 끝없이 비인간화하는 이 시대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더 시와 문학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중략) ‘저항’은 자주 패배로 끝난다. 하지만 패배로 끝난 저항이 시가 되었을 때, 그것은 또 다른 시대, 또 다른 장소의 ‘저항’을 격려한다. 시에는 힘이 있을까? 나의 대답은 이렇다. 이 질문은 시인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던져져 있다. 시에 힘을 부여할지 말지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다.” 접기
P. 24~25 이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이유는, 열세 살 무렵의 에피소드에 그 후 일생에 걸친 ‘나의 글’의 구조적 원형이 이미 드러나기 때문이다. 요컨대 나는 저소득층 피차별자의 세계로부터 중산층 주류들의 세계로 옮아갔고(비유하자면 식민지에서 종주국으로, 조선에서 일본으로 옮아갔고), 양자 사이의 경계에 서서 주위 사람들에게 ‘타자’ 인식을 촉구하려는 동기로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물론 동시에, 이 두 세계 사이에서 온몸이 찢기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행위를 통한 자기 인식의 시도이기도 했다. 접기
P. 110~111 생각하면 이것이 시의 힘이다. 말하자면 승산 유무를 넘어선 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러한 시는 차곡차곡 겹쳐 쌓인 패배의 역사 속에서 태어나서 끊임없이 패자에게 힘을 준다. 승산 유무로 따지자면 소수자는 언제나 패한다. 효율성이니 유효성이라는 것으로는 자본에 진다. 기술이 없는 인간은 기술이 있는 인간에게 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원리로서 인간은 이러해야 한다거나, 이럴 수가 있다거나, 이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을 움직인다. 그것이 시의 작용이다. 접기
P. 154 그렇다면 시인이란 어떤 존재일까? 시인이란 어떤 경우에도 침묵해선 안 되는 사람을 가리킨다. 요컨대 이것은 승산이 있는지 없는지, 효율적인지 아닌지, 유효한지 어떤지 하는 이야기와는 다르다는 말이다.
P. 202 어떤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자들만이 그 나라의 국민이라고 승인된다. 해당 언어를 쓰지 못하는 자는 국민이 아니다. 제대로 쓰지 못하는 자는 2등 국민이나 동정해야 할 소수자로서 열등한 지위에 놓인다. 이렇게 언어와 국민(nation)을 의심 없이 연결하고, 오히려 언어 내셔널리즘을 강화하는 듯한 분위기가 언어 교육 현장을 지배하고 있다. (중략) 본래 언어 상호 간에는 우열 관계가 없다. 더불어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 인간 상호 간의 우열 관계가 생겨서는 안 된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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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서경식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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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1974년 와세다대학 문학부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도쿄케이자이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6년부터 2년간 성공회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머물며 한국의 다양한 지식인,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받았고 2000년 『프리모 레비로의 여행』으로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민주주의 실현과 소수자 인권 신장에 기여한 공로로 제6회 후광김대중학술상을 받았다. 저자는 1970년대 ‘재일조선인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알려진... 더보기
수상 : 1995년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 1995년 마르코폴로상
최근작 : <나의 미국 인문 기행>,<디아스포라 기행>,<치유의 인문학> … 총 38종 (모두보기)
서은혜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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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도리츠(東京都立)대학교 대학원에서 일본 문학을 공부한 후, 전주대학교 일본언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임했다. 나쓰메 소세키의 『이 몸은 고양이야』, 『한눈팔기』,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인 체험』, 『체인지링』, 『우울한 얼굴의 아이』, 『책이여, 안녕!』, 『회복하는 인간』 그리고 『게 가공선』(고바야시 다키지), 『라쇼몬』(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세키가하라 전투』(시바 료타로), 『시의 힘』(서경식), 『성소녀』(쿠라하시 유미꼬), 『언어와 탱크를 응시하며』(가토 슈이치) 등... 더보기
최근작 : <일본 문학의 흐름 2 (워크북 포함)>,<창비세계문학 단편선 세트 - 전9권>,<이상한 소리 - 일본> … 총 42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대표적 재일조선인 문필가 서경식의 첫 문학 에세이
디아스포라의 눈으로 본 ‘시’와 ‘문학’의 초월성
일제 강점기 윤동주의 시, 중일전쟁 중 루쉰의 에세이,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문학까지
국가와 민족을 뛰어넘는 문학의 보편적 울림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 사상가’, ‘우리 시대 최고의 에세이스트’, ‘베스트셀러 『나의 서양미술 순례』 저자’. 서경식을 수식하는 문장들이다. 그는 꾸준히 글을 읽고 쓰는 ‘글쟁이’이지만 지금까지 그가 발표한 작품 중 순수하게 문학만을 다룬 것은 없었다.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다룬 도서, 예술과 음악 등의 문화를 다룬 도서를 집필하다 보니 정작 문학과 글쓰기에 대해 말하는 것은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시인이 되길 열망했으며, 청춘기에는 “어떻게든 문학과 관련된 분야에 끼어들어 살고 싶다고 생각”한 그이기에 이 책의 출간은 늦었지만 예정된 일이었다.
『시의 힘』은 그의 첫 문학 에세이이자, 시대의 격류와 그 흐름에 휘말린 개인사를 아우르는 ‘언어’에 관한 비평집이다. 제목은 ‘시의 힘’이지만 그의 사유는 ‘시’와 ‘문학’을 넘어서서 ‘언어’의 바다에 닿는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습득하기 시작하는 ‘말’과 학습을 통해 배우는 ‘글’이 어떻게 개인의 사상을 구축하는지, ‘모어’와 ‘모국어’의 틈새에 갇힌 디아스포라의 외로움은 이해받을 수 있는지, ‘시’와 ‘문학’이 주는 힘은 무엇이며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진지하게 탐구한다.
고립과 패배를 예감하면서도 우직하게 길을 만드는 시의 힘
패배의 역사에서 태어난 시와 문학이 지금 여기의 삶을 뒤흔들다
그는 자신의 ‘글쟁이’ 인생을 거꾸로 되짚으며 본인 글의 구조적 원형을 중학교 시절에서 찾아낸다. 재일조선인인 자신의 ‘타자성’을 깨닫고 자비를 털어 문고본을 냈던 사건이 그것이다. 그는 그때 이미 조선과 일본이라는 두 세계의 균열에 발 딛고 서서 양자 모두에게 ‘타자’ 인식을 촉구하려 했으며, 이 문제의식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고 고백한다. 조선과 일본, 재일조선인 피차별 세계와 중산층 주류의 세계, 그 사이에 선 그는 복수의 아이덴티티를 끌어안고 분열의 아픔을 감내한다. 그리고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언설을 빌려 “인간은 승리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라 부정의가 이기고 있기에 정의에 관해 묻고, 허위로 뒤덮여 있기에 진실을 말하려고 싸운다”라고 말한다. 그의 ‘글쟁이’로서의 결심과 문제의식은 시에 관해 논하는 장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문학은 태생적으로 시대적 상황과 호흡하며 쓰인다. 저자 서경식은 조선, 중국, 일본의 시와 문학에 관해 이야기하며 역동적인 동아시아 근현대사를 통과한다. 당연히 일본의 침략 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되기는 하나, 여기에 주저앉아 잘잘못을 가리는 데 치중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서로 북돋고 연대하던 힘이 문학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더 큰 힘을 기울인다.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시에 흐르는 조선독립투사에 대한 안타까움, 침략국인 일본의 선구자를 애도하는 루쉰(魯迅)의 절절한 문장은 서로에게 칼을 겨누던 그 시대에 ‘있을 수 없었던’ 한 줄기 희망이다. 피로 물든 동아시아 역사는 일본의 잘못 떠넘기기식 역사관으로 아직도 말끔히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 만약 아직 이 관계에 희망이 존재한다면, 그 희망의 상당 부분은 ‘시’와 ‘문학’에 빚지고 있지 않을까.
그는 시의 힘을 이렇게 설명한다.
“생각하면 이것이 시의 힘이다. 말하자면 승산 유무를 넘어선 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러한 시는 차곡차곡 겹쳐 쌓인 패배의 역사 속에서 태어나서 끊임없이 패자에게 힘을 준다. 승산 유무로 따지자면 소수자는 언제나 패한다. 효율성이니 유효성이라는 것으로는 자본에 진다. 기술이 없는 인간은 기술이 있는 인간에게 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원리로서 인간은 이러해야 한다거나, 이럴 수가 있다거나, 이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을 움직인다. 그것이 시의 작용이다.”
분단과 이산의 민족적 아픔을 타자와의 연대로 승화하는 법
국경과 민족마저 뛰어넘은 새로운 차원의 ‘우리’를 꿈꾸다
조선 근대사 속의 유명 시인인 한용운, 이상화, 윤동주는 모두 나라를 ‘빼앗긴’ 상황 속에서 그 절절한 고통을 시로 표현해 많은 이의 지지를 받았다. 국민 애송시로 평가받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서시」, 「별 헤는 밤」은 우리가 당시 시대적 상황에 심리적으로 얼마나 공감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저자는 이 공감이 좁은 세계의 ‘우리들’이란 범위에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외친다. ‘우리 국토’를 빼앗긴 ‘우리 민족’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빼앗겼다’는 고통의 핵을 인지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변화는 우물 안 개구리 식의 시각에서 벗어나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디아스포라와 연대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준다. 예를 들어 일본의 내부 식민지로 평가받는 오키나와 주민, 동일본 대지진을 겪은 후쿠시마 주민 또한 국가에 의해 살 곳과 주권을 ‘빼앗긴’ 자들이다. 그들과 연대하여 기본권을 ‘빼앗은’ 국가와 자본에 함께 맞서야 한다는 그의 과감한 주장은 낯설지만 그만큼 날카롭게 파고든다.
그의 태도는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을 논할 때도 일관된다. 그는 우리에게 ‘한국문학’이 무엇인지 묻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같은 한국어를 공유하는 소비자에 의해 구성되는 시장이라는 것이 답이라면, 한국문학은 민족 문학보다 더 좁은 개념이 된다. 다른 나라에서 다른 언어로 작품을 발표한 디아스포라 작가는 자연스레 배제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분단과 이산이라는 현실 속을 살고 있는 민족의 문학을 ‘한국문학’이라는 말로는 담아낼 수 없다고 단언한다. 또한 ‘한국문학’의 틀에서 벗어나 세계적 보편성을 가진 문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문학은 숙명적으로 언어의 장벽이라는 한계성을 지닌다. 그러나 어떤 언어로 쓰였든 국가를 빼앗긴 자들의 싸움, 거대 자본과 거대 권력에 대한 저항이라는 공통점이 존재한다면, 그리하여 국가와 민족의 경계선을 뛰어넘은 새로운 ‘우리’를 형성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가진 보편성이자 힘이 아니겠는가.
모어와 모국어, 문맹자와 지식인… 다층적으로 존재하는 ‘언어의 감옥’
국민의 틀을 넘어선 언어교육이 필요한 이유
저자 서경식의 개인사, 즉 서승, 서준식 두 형이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으로 투옥된 이후의 지난한 과정에 대해서는 많이들 알고 있다. 그들의 어머니인 오기순 여사의 눈물겨운 노력 또한 잘 알려졌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재일조선인이자 문맹인 그녀가 처한 현실이 구체적으로 어땠는지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저자는 20세기의 증인 49인을 꼽은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격동의 20세기를 겪은 조선 민족의 상징으로 오기순 여사를 꼽으며 기린 적이 있다. 실제로 재일조선인 1세대인 그녀의 삶은 많은 부분에서 우리 민족의 아픔을 대변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교육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교육받을 기회가 없어 문맹으로 지내던 그녀는 자식의 옥바라지를 하며 조금씩 지식의 세계로 발돋움했으나 끝내 글로 자신의 참된 목소리를 전하지는 못했다.
저자는 교육받은 지식인으로서 어머니를 ‘해석’하는 특권을 행사하곤 했지만, 처지를 바꿔 보면 자신 또한 일본어의 메이저리티에게 해석의 특권을 행사당한다고 말한다. 일본어를 모어(母語)로 쓰고 있지만 조선인인 그는 ‘일본 보통 국민’의 틀 밖에 있다. 그로 인해 처한 부당한 처지를 설명할 만한 수단 또한 일본어밖에 없다. 일본어라는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것이다.
재일조선인 1세대이자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던 어머니가 갇힌 언어의 감옥과 재일조선인 2세대 지식인인 저자가 갇힌 언어의 감옥은 각기 다른 형태의 감옥이다. 그는 이 차이점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맥상통하는 공통점을 예민한 감각으로 다룬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국민의 틀을 넘어선 언어교육을 주장한다. ‘국어’는 곧 ‘한국어’인가? 한국에 사는 다른 나라 사람, 다른 민족은 한국에 있다는 것만으로 자신들의 국어를 버리고 ‘한국어’로만 소통해야 하는가? 저자의 예리한 질문은 언어와 국민을 의심 없이 연결하는 습성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준다.
홀로코스트, 동일본 대지진, 원전 피해…
피해자와 비(非)피해자가 함께 재난을 건너는 힘, ‘직시하는 용기’와 ‘상상력’
2011년 3월, 비극적인 자연재해 동일본 대지진은 끔찍한 원전 사고로 발전했다. 후쿠시마 현은 방사능으로 인해 죽음의 땅이 되었고, 많은 사람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듯 떠나야 했다. 서경식은 후쿠시마 사태와 아우슈비츠의 홀로코스트를 병치하여 희생자, 생존자, 증언자인 그들의 아픔에 관해 논한다.
일반적으로 제노사이드를 주제로 하는 증언 문학은 성립하기 어렵다. 경험자 대다수가 학살당해 부재하며, 생존자는 입을 닫고 기억을 억압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설사 증언이 이루어진다 해도 메시지가 왜곡되어 소비되거나, 진부화, 상품화될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증언 불가능’한 사건을 증언한 생존자 중 손꼽히는 인물이 바로 프리모 레비(Primo Levi)다. 그는 돌아보는 것 자체가 고통인 사건을 뼈아프게 직시하며 끊임없는 각성을 촉구했다. 사건을 깊이 성찰하는 곤란한 역할을 피해자인 그가 부당하게 맡은 것이다. “사건은 일어났고 따라서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핵심이다”라는 레비의 말은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났어’라고 쉽게 말하는 지금의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준다.
저자는 참극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 기울여야 할 노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피해의 진원지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일수록 피해의 진실에 스스로 상상력을 발휘하려 노력하고, 피해의 진원지에 가까운 이들일수록 용기를 내어 가혹한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증언자(표현자)는 ‘표상의 한계’를 넘어서는 증언(표상)에 도전해야만 하고, 독자는 스스로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발휘하려고 애써야만 한다.”
의문형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희망
‘생명’은 ‘픽션화’되지 않는다
『시의 힘』은 「의문형의 희망」이라는 장으로 시작한다. 동일본 대지진과 원전 사고를 다룬 일본 시인의 시집에 대한 감상문이다. 많은 이가 죽어간 바다,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이 표류하다 죽어간 바다. 고등학교 교사인 시인은 절망만이 존재하는 현장에서 고요하게 분노를 토로한다. “꾸며낸 혓바닥으로 / 상냥하게, 희망을 노래하지 마라”라며, 애도가 끝나지도 않은 자리의 섣부른 거짓 희망을 경계한다. 절망의 순간, 희망은 행복한 노래로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이 존재하는지 않는지도 알 수 없다. 지금은 의문을 함께하며 헤매야 하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 책의 주제를 관통하는 루쉰의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생각해보니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거였다. 이는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시 땅 위엔 길에 없다. 걷는 이가 많아지면 거기가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시의 힘』의 마지막 장 「픽션화된 생명」은, 첫 번째 장에 대한 저자 나름의 대답이라고도 볼 수 있다. 모든 것을 ‘픽션화’하며 거리를 두어 자신을 보호하는 요즘 학생이 시의 힘으로 처음 ‘생명’을 실감하는 순간을 다룬 이 짧은 글은, 묵직한 질문으로 점철된 이 책에 작고 연약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존재하는 희망의 날개를 달아준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거듭되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꿈을 가져야 할 이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 심지어 패배할 것이 뻔한 길을 묵묵히 걷는 이유, 한 편의 시를 읽는 이유. 어쩌면 이 의지 자체가 희망은 아닐까.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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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되는 서경식 교수의 책이다. 과거 자신의 경험, 현재, 그리고 일본의 미래를 보면서 우경화와 국가주의를 위한 민족의식고취를 비판한다. 흔히 진리로 믿는 국가, 민족, 모국 같은 개념이 얼마나 필요에 의해 조작되고 만들어지는 건지 생각해볼 수 있다
transient-guest 2017-02-15 공감 (1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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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진정 지성인이며 문인이다.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책을 읽고 이 후 그의 책은 거의 다 읽고있다. 서승, 서준식, 서경식 삼형제분에게 우리 조국은 미안해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로서 그들의 삶. 재인조선인의 삶과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그것이 역사의 의무이다.
backsuly 2015-07-16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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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지 않을 수 없는 길을 걸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처연하고 슬프다. 시를 왜 써야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왜 계속 저항해야 하는지, 왜 계속 말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어제 책을 받자마자 계속 읽고 또 읽는다. 모든 것을 픽션으로 만든다는 마지막 말에 심장이 덜컹한다.
arario 2015-07-12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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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받았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인문학책이 다 있구나, 감탄하며 아주 조금씩 읽고 있다. 특히 루쉰 이야기는 굉장히 뭉클했다. 아아, 내가 잘못 알고 있었어... ...
난나 2015-08-08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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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 결정 (루쉰), [안네의 일기]의 교훈 (브루노 베텔하임), `패트리어티즘`이라는 용어 (마르크 블로크) 등과 마지막의 이시가키 린의 시까지, 읽고 또 읽게 된다.
[경계에서 춤추다]에 이은 서은혜의 번역 또한 만족스럽다.
orangelamp 2016-03-14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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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시의 힘>
“I am a Japanese”
일본의 어느 중학교 교실, 모든 학생들이 선생님의 ‘아이엠어 재피니즈’를 따라 할 때
유독 한 소년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뭐시여, 왜 안 따라 혀? 개기는 거여, 시방?”
선생님이 소년을 다그치자 소년은 우물우물 말했다.
“저는..... 조선인....인데요.”
안아주고 등을 토닥이고 싶었던 이 소년은 어느덧 예순을 훌쩍 넘겼으니
<소년의 눈물>의 저자 서경식 선생님이다.
(위의 상황은 약간의 윤색을 했으니 너그러이 이해해주세요 ^^)
<시의 힘>은 저자의 강연과 에세이들 중에 ‘문학’과 관련된 글들을 추려 엮은 책이다. 책을 통해 저자는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처럼 자신이 어떤 책을 읽어왔고, 어떤 작가들에게 영향을 받았는지를 회고한다. 오에 문학 출발점이 <허클베리 핀>이었다면 저자의 경우엔 라이너 마리아 릴케였다.
이것이 나의 투쟁이다.
천만 줄기 뿌리를 뻗어, 저 멀리 인생 밖으로 성장해가는 것이.
저 멀리, 세상 밖으로.
이외에도 프란츠 파농, 폴 니장, 에드워드 사이드, 루쉰, 나카노 시게하루, 프리모 레비 등등
고등학교 축제 때 자신의 시집을 직접 팔았을 만큼 시에 열정을 보였던 저자는 청년시절 주로 한국 시인들의 시에 영향을 받는다. 김지하, 신동엽, 신경림, 양성우, 고은, 한용운, 윤동주, 이상화, 김수영, 박노해, 정해성 등등. 특히나 그는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을 애타게 읽었다.
(어린 시절 그에게 영웅 같았던 김지하가 도살자의 딸을 지지하는 걸 보고 그 역시 꽤나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 독립투사들이 있었다면 일본에도 침략 전쟁을 반대한 열사들이 있었다. 고바야시 다키지. 일본의 대표적인 프롤레타리아 작가로 일본 경찰의 고문에 의해 죽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한 대표적 인물이 중국의 국민작가인 루쉰이다.
30년 동안 나는 많은 젊은이들의 피를 목도했다. 그 피들은 켜켜이 쌓여 숨도 못 쉴 만큼 나를 매장했다. 나는 그저 붓과 먹만으로 몇 줄의 글을 쓸 수 있을 뿐이며 그것은 진흙 속에 조그마한 구멍을 내고 목숨을 부지하고자 거기서 계속 헐떡이려고 하는 바와 같다. 어떤 세상인가? 밤은 길고, 길은 멀다. 차라리 망각이 나을지도 모른다. 잊어버리고 말하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내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그들을 기억하여 다시 그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임을 나는 안다......
그리고 나카노 시게하루는 루쉰의 글에 감동을 받는다.
생각해보니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거였다. 이는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시 땅위엔 길이 없다. 걷는 이가 많아지면 거기가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나카노 시게하루는 루쉰의 정치와 문학의 결합을
“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 결정”이라 명명했다.
나도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어떤 일이 있어도 올바른 인간이 되어야지, 하는 것 이상으로 (중략) 일신의 이해, 이기라는 것을 떨쳐버리고, 압박이나 곤란, 음모가들의 간계를 만나더라도 그것을 견뎌내며 어디까지나 나아가자, 고립되고 포위당하더라도 싸우자, 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그곳으로 간다.
<시의 힘>이란 제목은 나카노 시게하루로부터 연유한 것이다.
생각하면 이것이 시의 힘이다. 말하자면 승산 유무를 넘어선 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러한 시는 차곡차곡 겹쳐 쌓인 패배의 역사 속에서 태어나서 끊임없이 패자에게 힘을 준다. 승산 유무로 따지자면 소수자는 언제나 패한다. 효율성이니 유효성이라는 것으로는 자본에 진다. 기술이 없는 인간은 기술이 있는 인간에게 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원리로서 인간은 이러해야 한다거나, 이럴 수가 있다거나, 이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을 움직인다. 그것이 시의 작용이다.
프리모 레비의 시를 읽은 저자는 ‘이것은 후쿠시마를 노래한 시가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을 읽고 내가 ‘이것은 세월호가 아닌가’하고 생각했던 것처럼.
저자는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를 쓸 만큼 레비의 삶과 제노사이드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책에 실린 일본의 레비 연구 일인자인 다케야마 히로히데의 말에 무릎을 쳤다.
프리모 레비와 프랑클은 같은 강제수용소에 있었지만 문제의식은 전혀 달랐다. 프랑클은 강제수용소에서의 인간의 정신적 변화에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그는 강제노동 끝에 쇠약해져서 죽음에 이르는 일반적 억류자, 즉 레비가 말하는 ‘익사하는 자’의 변화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어떻게 강제수용소에서 살아가는가, 극한의 생존 상황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정신을 고양시킬 수 있는가에 주안점을 둔다. 그는 ‘고통받는 것의 의미’에 관해 생각한다.
‘가혹하기 짝이 없는 외적 조건이 인간의 내적 성장을 부추기는 일이 있다’ 그리고 ‘외면적으로는 파탄되고, 죽음마저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있어서조차, 인간으로서의 숭고함에 이르는’ 것과 통한다. (중략) 여기서 프랑클은, 아우슈비츠를 만들어낸 이유를 묻기보다는, 그런 곳에서의 극한상황이 어떻게 인간의 정신을 고양하는가 하는 점을 중시한다. 그리고 ‘희생’이 되는 것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는 ‘순교자’라는 단어까지 사용한다.
프랑클은 극한 상황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었던 반면 레비는 내가 왜 이런 극한 상황에 처해있는지 그 시스템 자체를 문제시 삼았다. 과연 누가 옳았던 것일까?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장 아메리, 브루노 베텔하임, 프리모 레비, 말년엔 결국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온전히 살아남은 이는 프랑클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연 프랑클이 옳았던 것일까.
프랑클은 ‘감동적’으로 소비되었으나, 저자의 말처럼 원인을 규명하고 재발을 막는 데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프랑클의 ‘순교자’라는 표현에 베텔하임은 이렇게 말했다.
나치 희생자들을 ‘순교자’라고 부름으로써, 우리는 그들의 운명을 속이는 것이다. (중략) 그들이 자신의 신앙을 버리더라도, 단 한 사람도 죽음을 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독교로 개종한 자도 무신론자들이나 깊은 종교심을 지닌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가스실로 보내졌다.
그리하는 것은 그들의 것일 수 있는 마지막 인식을 그들에게서 빼앗는 것이며, 그들에게 부여할 수 있는 마지막 존엄을 부정하는 것이고, 그들의 죽음이 무엇이었는지 직시하며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왜곡이 우리에게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하찮은 심리적 해방감을 위해 그들의 죽음을 미화해서는 안 된다.
베텔하임의 지적에 따르면, 프랑클의 저서는 그 처절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감동적’결말에 의해 오히려 독자에게 거짓 위로와 해방감을 주고, 방어적 부인과 억압에 도움을 준다고 할 수 있다.
빅터 프랑클의 <죽음의 수용소를 찾아서>는 분명 감동적인 책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소비함으로써 우리가 거짓 위로를 받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성찰해 봐야 하지 않을까.
‘국가주의’에 물든 한국인들은 대개 국민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특히나 꾸준한 독서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잘못된 범주화 오류’를 저지르기 쉽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국민은 하나의 가족’이라거나 ‘피를 나눈 우리’와 같은 식으로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가족관계나 혈연관계에 비유하는 것은, 구성원 각자의 자발적인 참가를 전제로 해야 할 사회 조직을 마치 ‘운명 공동체’인 양 묘사하여 구성원들을 권력관계로 묶어둘 위험을 내포한다.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가족이라는 것이 각 개인에 의해 구성되는 사회적 단위라는 사실을 새삼 인식해야만 한다.
일찍이 니체는 ‘국가는 훔친 이빨로 물어뜯는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국가는 나를 대표하지 않는다. 루쉰이 자신들을 침략한 일본의 국민들에게 ‘친구’라는 표현을 썼듯 우리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친구’로 받아들여야 한다. 일본인이나 중국인이라고 해서 다르겠는가. 단, 국가의 수장들과 기득권자들의 악랄하고 비열한 행태에 침묵해서도 안 될 일이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모국일지언정.
얼마 전 우리 박근혜 각하께서 노동자들을 자르기 쉽게 해달라고 서명을 받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저건 박정희 유신시절, 장준하가 주도한 유신 철폐 백만인 서명운동을 보고 따라 한 것일까?’
각하를 따라 대기업 임원들도 길거리로 나와 서명을 받았다지.
시인 정희성의 시처럼 이제 가진 자들이 저항을 하고 있다니!!
저자의 마지막 말에 울컥하였다.
‘시의 힘’이란 ‘시적 상상력’을 가리킨다. 루쉰에게 있어 “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 결정(나카노 시게하루)” 역시 그러한 상상력이 가져온 것이다.
‘문학’이 저항의 무기로서 유효한지 의심스럽다. 내가 쓰는 것을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지는 더욱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이런 책을 내려는 이유는 본문에서 루쉰의 말을 빌렸듯, “걸어가면 길이 되기” 때문이다. 아직 걸을 수 있는 동안은 걷는 수밖에.
나 역시, 다짐해본다.
걸을 수 있는 동안 걸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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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2-16 공감(22)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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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여, 기침해야 할 계절이 돌아왔다
누구나 정치에 관해 얘기할 수 있고 잘못된 정책이라고 판단되면 신랄하게 꼬집을 수 있어야 한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유신체제의 폭압에 대해 어느 시점에 몸을 던져 저항할 것인가 하는 결단의 강박 아래 살아야 했다. 그렇지만, 가장 먼저 앞장서서 저항의 등불을 밝힌 청년들이 있었다. 대학 강의를 듣는 일보다 시위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였고, 조국의 현실 앞에 눈물을 쏟아냈으며, 때로는 온몸을 불살라 절규도 했다. 그들이 공유하는 문학도 새로웠다. 저항시가 문학적 위세를 떨쳤다. 80년대에 노동자시 혹은 농민시라는 이름으로 시들이 시대의 아픔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심어 주었다. 시인들은 저항과 투쟁의 거리 한가운데를 달리며 의연한 싸움으로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지켜내려고 노력했다.
길거리에 최루가스 냄새가 사라진 이후 대학생들은 자유분방해졌다.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과거에 들끓던 민주화운동을 정리할 필요를 느낄 만한 시점이다. 그래서일까.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젊은 작가들은 어느덧 세월이 흘러 문단을 주도하는 중견, 원로급 작가가 되었고, ‘역사의 시간’으로 남은 그 시절을 복원하려고 노력한다. 역사라 이름 지어진 순간들은 과연 시간의 저 너머 어딘가에 묻혀 발굴을 기다리는 유물 같은 것일까. 유신체제 시절을 그리워하는 자들은 역사를 거꾸로 돌아가려고 한다. 역사의 오욕과 역류가 벌어지는 오늘의 역사에 삶의 정당성을 위해 싸웠던 지식인들을 지금 무엇 하고 있는가. 그들의 모습에는 민주주의를 위해 달려오게 한 저항의 에너지가 보이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완성되지 않았다. 부정한 사회에 따끔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유도하는 에너지로 전환되기는커녕 과거 추억팔이에 한창이다.
시는 비틀거리고 있다. 자기 성찰 하나 없이 지고지순한 세상이 온다는 희망만 노래할 뿐, 진실한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진짜 큰 문제는 시인을 구속하는 현실이다. 시인의 희망을, 타인의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지 못하는 여린 마음을 불법이라고 낙인찍는 나라다. 송경동 시인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문인들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한 걸까, 아니면 그들이 과거의 학습효과 때문에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일까.
시가 휘청거릴 때 서경식 선생의 책이 구원의 손길처럼 다가온다. 만약에 서 선생이 시인이었다면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만한 사랑, 민주주의, 인권, 자유를 담았을 것이다. 선생은 독서와 시 창작에 매달리며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이겨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박일호라는 필명으로 개인 소장판 시집을 펴낸 적도 있다. 그는 고통스러운 삶 속에 ‘시’라는 작은 창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선생은 삶과 자유를 갈망하는 ‘실천자’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었다. 시는 그를 국가와 언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폭력을 고발하는 지식인으로 끌어들인 안내자가 됐다. 선생은 ‘시’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오늘날 시가 현실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찰하고 있는지 자문한다.
일제강점기 우리 문학에서 ‘저항시’라는 장르는 도드라진다. 시어는 감각적이고 함축적이어서 다른 장르에 비해 저항의 정치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는 빼앗긴 국토에 대한 상실감과 그것을 다시 회복시켜야 한다는 강한 의지력이 담겨 있다. 윤동주는 하늘, 바람, 별 같은 서정적인 시어를 골라 썼지만, 그것들이 속한 것은 ‘조국’이었다. 조국의 현실에 아파하던 시인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서시」)면서 삶의 괴로움을 외면하지 않고 이겨나갈 것을 다짐한다. 찌그러진 사회에 몸을 굽히지 않는 시인들의 의식은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시대에도 이어진다. 양성우가 ‘겨울공화국’이라고 칭했던 유신 때도 시인들의 저항은 멈추지 않았고, 박노해는 소외된 노동자들의 삶에 진지한 관심을 드러낸다.
정치와 문학의 결합. 서 선생은 사회 앞에 침묵하지 않는 시를 나카노 시게하루의 표현을 빌려 “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선생이 생각하는 시의 힘이요, 비정한 권력의 힘에 저항하게 하는 의지다. 선생은 여전히 저항시가 현실에 유효한지 의문부호를 단다. 그런데도 마땅한 좌표를 찾지 못하는 현실을 직시하는 저항시의 흐름이 이어지기를 원한다. 직설적 언어로 사회 개혁의 의지만을 천명하기보다는 거대한 대중들을 이끌어내도록 유도하는 실천의 언어가 절실히 필요하다.
문학의 비판 기능이 사라진다면 사회의 가치 체계는 전도되게 마련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우리의 적을 닮아버렸다. 정직하게 분노하는 방법을 잊고 만다. 부조리한 현실을 회의하고 생각하는 문학이 너무도 드물다. 시인이라는 직업은 불운하다. 직관과 영감으로 번뜩이는 아름다운 노래를 읊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렇지만 좋은 것만 보고 싶은 마음으로 시를 만든다면 그 시는 정말 진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까. 김수영, 송경동처럼 정의와 도덕이 무의미해지는 시대를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시인이 우리 사회에 존재해야 한다. 이들은 절대 침묵하지 않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시를 쓰면서)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그러한 문학을 꿈꾼다. 고통을 회피하지 않는, 더 정확하게는 회피할 수 없도록 정해진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시의 힘》을 읽고 있을 때, 김수영이 '눈'에서 젊은 시인들에게 재채기하라고 했던 구절이 퍼뜩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직한 분노를 묵살해버리는 백색으로 위장한 어두운 현실에 대고 ‘기침’을, 재채기하는 계절이 돌아왔다.
※ 일본은 타이완과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지배하고 ‘만주’의 패권을 러시아과 다투고 있다. (102쪽) → '러시아와 다투고 있다'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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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10-14 공감(18) 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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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역사를 응시하며 살아가기
지난 달 3월, 재일 조선인 서경식 작가는 20년간 일해 온 도쿄경제대를 정년 퇴직했다. 디아스포라 소수자로 살아온 그.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재일조선인은 공립학교 교원이 될 수 없었다. 서경식은 쉰 살이 넘어 정식 교수가 되어 학교 측으로부터 노동조합 가입의 권유를 받았을 때, 자신이 마치 ‘특권’을 받는 사람같이 느껴졌다고 회고한다.
“내 출신과 문화를 홀로 등에 짊어진 채 나는 다른 모든 학생들과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는 듯한 기분”을 짊어졌던 소년 서경식. 그는 책을 읽고 시를 쓰며, 문학 작품 속으로 도망치기도 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치열하게 찾으며 살아왔다.
가난한 재일 조선일들이 사는 교토에서 자란 서경식은 중산층 이상이 다니는 중학교에 들어간다. 소위 문화적 소양이 있는 친구들에게 둘러싼 그는 열등감, 동경, 경쟁심이 발동하여 더욱 문학작품 세계 속으로 빠져든다. 무엇보다도 글을 잘 써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했다. 일종의 과시욕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글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여 소수자로 주눅이 들었던 소년시절의 굴욕감에서 벗어나자 했다.
”나는 저소득층 피차별자의 세계로부터 중산층 주류들의 세계로 옮겨갔고 양자 사이의 경계에 서서 주위 사람들에게 ‘타자’인식을 촉구하려는 동기로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저자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되던 해, 1967년 한일 조약체결로 인해 조국을 방문할 수 있게 된다. 1971년에는 재일 교포 간첩단 사건으로 그의 두 형이 구속, 수감되자 그는 형들의 석방을 촉구하고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적극 가담한다. 사회변혁의 현장에서 서경식은 김지하, 정희성, 박노해의 시를 읽으며 시인이란 “시대에 침묵하지 말아야 함”을, “시는 사회에 소외되고 상처 입은 이들을 위해 노래해야 함”을 되뇌었다.
서경식 작가도 사회변혁의 현장과 시대의 아픔, 소수자의 차별, 잃어버린 모어와 역사를 주제로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어딘가에서 자신의 시를 읽을 독자에게 다가가고자 했던 시인. 그에게 한국문학을 읽는 독자는 국경을 넘어선다. 그는 ‘한국문학’보다는 ‘민족문학’이라는 용어를 써서 한국문학을 접하는 독자는, 남한뿐 아니라 휴전선 너머에 있을, 보이지 않는 독자들 까지도 포함해야 한다고 말한다. 재일조선인, 코리안 디아스포라까지. 재일 조선인 서경식의 글을 한국에 있는 독자가 읽고 있듯이, 일본 식민지배와 분단으로 흩어진 이들이 쓴 문학도 한국문학에 포함할 수 있지 않겠는가.
‘시’란, ‘문학’이란 역사의 패배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라면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연결해 준다. 식민지배를 부정하고 있는 일본인은 현재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다. 저자는 지금의 고통을 통해 "자국이 식민지 지배를 하며 타자에게 강요해온 고통을 통감할 수 있다면, 동아시아 근대사에서 보기 드문 만남이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묻는다. 그 둘의 고통을 이어주는 것이 바로 시, 즉 문학의 역할이라고 보았다.
현대문학은 세계의 독자들에게 어떤 보편성을 전할 수 있을까. 세계문학의 범위를 한 나라에 국한 짓지 말고 지리적 경계선을 내려보자. 예컨대, 세계 각지에는 오육백 만명이나 되는 조선 민족의 디아스포라가 있다. 그들은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고 삶의 현장은 한반도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근대 이후 조선 민족의 역사적 경험과 깊숙히 연결되어 있다. 그들이 쓴 문학은 ‘민족 문학’ 범주에 넣을 수 있지 않을까. 더 나아가 그들의 문학은 다른 국가의 디아스포라의 삶과 공유할 수 있기에 보편적일 수 있다.
저자는 “문학이 저항의 무기로서 유효한지 의심스럽다.”라고 고백하면서도 루쉰이 말할 것처럼 “걸어가면 길이 된다”는 말을 따라, 계속해서 글을 써나가리라 다짐한다. <시의 힘>은 재일 조선인이 문학의 힘에 기대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성장과정과 시에 담긴 섬세한 감성, 소수자로 살아가는 고뇌의 목소리가 담긴 책이다. 한반도의 바깥에서 조선의 역사, 모어에 대한 그리움, 시대의 변화, 역사적 사실과 현재를 시와 문학가들의 작품을 통해 찾고자 하는 저자의 치열한 사유가 돋보인다. 문학의 새로운 보편성과 한국문학의 범위를 지역과 경계를 넘어 상상해보는, 시선이 열리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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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공 2021-04-25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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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란 침묵해선 안 되는 사람
시인이란 어떤 경우에도
침묵해선 안 되는 사람을 가리킨다.
요컨대 이것은 승산이 있는지 없는지 효율적인지 아닌지,
유효한지 어떤지 하는 이야기와는 다르다는 말이다.
한국에서도 '상처입고 소외된 사람들'과 어떻게 연결된 것인가 하는 것이 시인에게 부과된 커다란 과제다.
1980년대 같은 피투성이 잔치는 끝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은 지금 눈앞에 있는 현실을 노래할 방법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155)
이 책은 단행본으로 집필한 책은 아니다.
이곳 저곳에서 강연한 것들을 모은 책인데,
내용이 썩 좋다.
무엇보다, 시라는 것이 서야 할 지점이 어디인지,
왜 김지하나 박노해의 변절이 나쁜 것인지를 말하고 있어서 좋다.
그들의 변절에 대하여 애써 변호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시답잖기는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니 '시답잖다'는 말은 '시답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일주일 전에 교실에 '바비'와 '밥충이'를 퍼다 두었더랬다.
같은 날 떠놓은 밥인데도,
칭찬을 퍼부은 밥은 이쁜 그대로인 반면, 욕을 한 밥은 곰팡이가 피고 아주 못쓰게 생겼다.
언어의 힘은 이렇게 큰 것이다.
귀가 없는 밥조차, 언어의 힘에 휘달리는 것인데,
인간으로 태어나서 해서는 안 될 소리를 지껄이는 인사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윤동주의 '서시'의 한 구절,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를
일본의 '이부키 고' 번역판에서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이라고 번역했다 한다.
지난 봄, 도시샤 대학에 가서 시비를 보면서도 미처 그것까지는 읽지 못했다.
그 죽어가는 것들...에는 안중근과 윤봉길, 그리고 그 자신의 목숨도 있었다.
그러나 '그저 살아있는 것들'은 다르다.
루쉰의 '고향'의 마지막 구절을 흔히 애송한다.
생각해보니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거였다.
이는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시 땅 위엔 길이 없다.
걷는 이가 많아지면 거기가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을 '명랑한 언설로 앞길의 광명을 생각하며 걷기 시작하는 자들의 구령처럼 인용'하는 예가 많다고 나카노 시게하루는 지적한다.
하지만 이 것은 읽는 이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희망은 업지만 걷는 수밖에 없다.
걸어야만 한다.
그것이야말로 희망이라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루쉰은 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암흑을 이야기한다.(108)
서정시로 된 '정치적 태도 결정'이야말로 시의 힘이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역할과 위치는 크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다.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국의 지배 이후 더 심해졌다.
지난 9월 일본은 이제 다시 전쟁이 가능한 나라로 바뀌었다.
동아시아는
근현대 역사에서 일본이 침략전쟁 혹은 식민지 지배를 했던 지역이다.
미얀마를 경계로 동쪽에 위치하는 아시아 국가중 일본 침략이나 식민 지배 흔적이 없는 곳은 없다.
따라서 역사에 등돌리는 것은
이 지역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기본 전제를 잃어버린 태도다.
센가쿠 제도는 청일전쟁 과정에서 일본에 편입되었고,
독도는 러일전쟁 와중에 편입된 것이다.
따라서 이들 지역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주장은,
총체적 근대사를 현재 시점에서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와 궤를 같이한다.
근대의 부(負)의 유산을 총체로서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그러한 성찰적 시점이 사라지고 있다.(91)
일본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한국 역시 역사에 등돌린 지배세력이 권력을 잡고 있는 한, 과거의 짐진 자들이 과거를 날조하는 한,
성찰적 시점이 설 자리는 점점 없어 진다.
그것이 시의 죽음이기도 한 것.
잔치가 끝나버렸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길은 계속 될 것이다.
꾸며낸 혓바닥으로
상냥하게, 희망을 노래하지 마라
거짓된 목소리로, 소리 높여, 사랑을 부리지지마라(목숨의 빛줄기가)
시인은 끝없는 의문형으로 현재에 질문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시인이 침묵하면 현재는 암울한 시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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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5-12-08 공감(9)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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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움직이는 힘
한국인인지만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일본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 이 두 가지가 갖는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옳고 그름을 논하는 가치명제와는 다르게 타고난 '조국'은 사실명제다.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사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인 서경식은 이 두 나라에 속하면서도 두 나라 모두에서 '주변'과 '경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시대를 성찰한다. 그 성찰의 도구가 바로 글쓰기이다.
양자 사이의 경계에 서서 주위 사람들에게 ‘타자’인식을 촉구하려는 동기로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물론 동시에, 이 세계 사이에서 온몸이 찢기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행위를 통한 자기 인식의 시도이기도 했다. -p25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객관하여 바라보는 것, 그것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디아스포라인으로서 최선의 선택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유학갔던 두 형들이 정치범으로 체포되자 저자의 정체성은 더욱 혼미해진다. 일본의 마이너리티로 살아가고 있던 저자에게 형들에게 내려진 무기징역과 징역 7년의 의미는 한국의 현대사를 객관화하여 바라보는 시도를 하게 한 신호탄이었다.
한국의 현대사를 객관화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라는 프레임의 역사를 새롭게 그려야 한다. 저자는 '동아시아'란 근현대 역사에서 일본이 침략 전쟁 혹은 식민지 지매를 했던 지역을 의미한다고 한다. 미얀마를 경계로 동쪽에 위치하는 아시아 국가 중 일본의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를 받지 않은 나라는 없다. 따라서,일본은 근현대사에서 대외 침략자라는 오명을 씻을 수도 없기에 동아시아와 함께 평화를 구축해야 하는 입장에 서 있다.
저자는 시가 시대와 궤를 같이하여 왔다는 방증으로 시와 현대사를 반추한다. 저자에게 영향을 미친 시들은 김수영의 [고궁을 나오면서],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와 같은 저항시들이었고 글쟁이로서의 숙명을 깨우쳐 주었던 시인들이었다. 조국의 분단과 민족의 이산이라는 현실에서 저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 그것은 글쓰기였다.
일본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지배층의 이야기에 대한 , 재일조선인이라는 마이너리티 입장의 대항적 이야기를 제시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넓은 강과 호수에 둘러싸여 살던 조선은 식민지배라는 홍수의 시대에 일본이라는 수레바퀴 자국에 고여 있는 물이 되었다. 강호로부터 떨어져 나온 수레바퀴 자국 웅덩이 속에 남겨진 코리안 디아스포라였던 저자는 <디아스포라 기행>에서 밝히듯 말라가는 웅덩이 속에서 숨을 쉬기 위해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미는 붕어의 간절함으로 글을 써왔다고 한다. 루쉰의 시를 읽고 감명을 받은 일본의 시인 나카노 시게하루의 비평을 통해 저자는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보았다고 한다. 바로 그것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시대의 힘이자 '시'가 가진 본질이다.
“생각하면 이것이 시의 힘이다. 말하자면 승산 유무를 넘어선 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러한 시는 차곡차곡 겹쳐 쌓인 패배의 역사 속에서 태어나서 끊임없이 패자에게 힘을 준다. 승산 유무로 따지자면 소수자는 언제나 패한다. 효율성이니 유효성이라는 것으로는 자본에 진다. 기술이 없는 인간은 기술이 있는 인간에게 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원리로서 인간은 이러해야 한다거나, 이럴 수가 있다거나, 이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을 움직인다. 그것이 시의 작용이다.”
3부 <조선의 시인들>은 시의 힘이 무엇인지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이다.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민중을 무력으로 진압하더라고 결코 평화를 불러올 수 없다는 사실을 역사가 가르쳐주듯이 식민지 탄압에서도 독립운동 선언서를 낭독하고 저항시를 쓴 시인들- 이상화, 윤동주, 김지하-에 이어 2000년대의 정희성까지 시에 담긴 시대의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소외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상' 시인은 침묵해서는 안되는 사명이 있다고 한다. 이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디아스포라와 연대할 수 있는 감성의 토대이며 동아시아의 평화를 구축해 줄 수 있는 단초이다.
디아스포라는 말에는 역사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한국인이지만 일본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재일조선인을 설명하려면 잊혀지지 않는 과거의 한 페이지였던 식민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대가 낳은 민족의 비극은 조국 분단과 민족 이산이라는 디아스포라들의 탄생이었다. 저자는 역사가 낳은 민족 이산에서 등을 돌린다는 것은 동아시아 평화를 지키기 위한 기본적 전제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며 근대사에 대한 성찰적 자세를 권고한다. 굴곡진 현대사 속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자각과 일본인들이 지향해야 할 점등을 문학에서 찾는 시도가 무척 신선했던 비평집이다. 역사와 문학을 외올실로 엮은 서경식만의 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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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모노로그 2015-08-05 공감(9) 댓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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