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이 중국인의 ㅁ을 베는 사진
문학가 루쉰(魯迅) 탄생의 전설:
루쉰이 봤으리라 추측되는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2022.10.16. 오전 12:00
성민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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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엽의 문학 이야기 로그인
12/23/23, 8:17 PM 일본군이 중국인의 ㅁ을 베는 사진
20세기 중국문학의 기원이 이 한 장의 사진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20세기 중국문학을 대표하는 문학가 루쉰이 이 사진으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전설입니다. 하지만 이 전설의 진정한 의미는 이 전설을 해체하는 데서 드러납니다. 이 전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거짓의 감옥에 갇혀 버립니다. 거짓의 감옥을 부수고 나가야만 거짓 속에 들어 있는 진짜 의미와 대면할 수 있습니다.
루쉰의 첫번째 소설집 <납함(吶喊, 외침이라는 뜻)>에 실린 작가 서문 중 다음과 같은 대목이 전설의 출발점입니다.
이런 유치한 지식 때문에, 나중에 나는 일본 어느 시골의 의학전문학교에 학적을 두게 되었다. 나의 꿈은 아름다왔다. 졸업하고 돌아가서 나의 아버지같이 잘못된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들의 고통을 치유해주고,
전쟁 때에는 군의관이 되며, 한편으로 유신에 대한 국민의 신념을 촉진시킬 준비를 하자. 미생물학의 교수
법이 지금 얼마나 진보했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당시에는 환등기를 사용하여 미생물의 형상을 보여주었
다. 그래서, 때로 강의의 한 단락이 끝나고도 시간이 남게 되면 교수는 풍경이나 시사에 관한 필름을 학생
들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남은 시간을 이용했다. 그때는 마침 러일전쟁 때였으므로, 자연히 전쟁에 관한 필
름이 많은 편이었다. 나는 그 강당에서 학우들의 박수갈채에 늘상 동참해야 했다. 한 번은, 화면에서, 갑자
기 오랜만에 많은 중국인들을 만났다. 가운데에 한 사람이 묶여 있고 그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데,
건장한 체격이지만 마비된 표정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결같았다. 해설에 의하면, 묶여 있는 사람은 러시
아군의 스파이로서 일본군이 공개 처형으로 그 목을 베려는 것이고, 둘러싼 사람들은 그 공개 처형의 행사
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그 학년이 끝나기 전에 나는 동경으로 나와버렸다. 그 일 이후로, 의학은 결코 긴요한 것이 아니고, 무릇 어
리석은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건강하고 튼튼하다 하더라도 무의미한 공개 처형의 재료나 구경꾼밖에 되지
못하며, 병들어 죽는 사람이 많다고 해도 그것을 불행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첫 번째 임무는 그들의 정신을 개조하는 데 있고, 정신 개조에 유력한 것은, 당시 내 생각
으로는, 당연히 문예를 꼽아야 하므로, 그리하여 나는 문예운동을 제창하자고 생각했다. 동경의 유학생들
은 대부분 법학.정치학과 물리.화학, 그리고 경찰이나 공업을 배웠지 문학과 미술을 공부하는 사람은 없었
다. 그러나 냉담한 분위기 속에서도 다행히 몇몇 동지들을 찾아냈고, 그밖에도 필요한 몇 사람을 더 모아
서 상의한 결과, 제일보는 당연히 잡지를 내는 것이었다. 이름은 ‘새로운 생명’이라는 뜻을 취하기로 하였
는데, 당시 우리는 대체로 복고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단지 <신생(新生)>이라 칭하기로 했다.
1904년 9월, 23세의 중국 청년 저우수런(周樹人, 루쉰의 본명)은 일본의 선대의학전문학교(지금의 동북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1905년 가을로 추정되는 때에 이 학생은 수업 시간에 환등기로 보여주는 한 슬라
이드 필름에서 일본군이 중국인의 목을 베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위의 사진이 바로 그 사진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장소는 중국이고, 처형되는 중국인의 죄목은 러시아군의 스파이입니다. 러일전쟁은 1904년 2월 8일에 시작되어 1905년 9월 5일에 끝났습니다. 이 학생의 눈에 둘러서서 구경하는 중국인들의 표정
이 마비된 표정으로 보였습니다. 이 학생은 충격을 받습니다. 중국인의 체격이 아무리 건강하고 튼튼하다
하더라도 일본군의 공개처형을 위한 재료와 구경꾼밖에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이
에 비하면 병들어 죽는 사람이 많은 것은 불행도 아니지 않은가. 이런 의문에 사로잡힌 이 학생은 결국 의
학을 그만두고 중국인의 정신을 개조하기 위해 문예로 길을 바꿉니다. 이를 네 글자로 <기의종문(棄醫從
文)>이라고 합니다. 의학을 버리고 문학을 좇았다는 것이죠(주1). 기의종문의 결과 문학가 루쉰이 탄생합
니다. 그리고 루쉰으로부터 20세기 중국문학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전설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위 글을 살
펴볼 초점은 두 개입니다. 하나는 루쉰 자신이 왜 이렇게 썼느냐이고, 다른 하나는 이것을 전설이 어떻게
해석하느냐입니다.
(주1) 문학가 궈모뤄(1892-1978)도 의학에서 문학으로 바꿨습니다. 혁명가 쑨원(1866-1925)도 처음에는 의
학을 택했고 의사 개업까지 했었습니다. 당시 청년들의 의학 선택은 서양 의학을 근대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긴
데서 주로 비롯되었습니다. 의학에서 문학이나 정치로 바꾼 경우 그들의 문학과 정치도 넓은 의미에서 의학의 연
장이라는 의미를 띠는 것 같습니다.
환호하는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서 저우수런 혼자만 소외되어 있고, 소외되었을 뿐만 아니라 굴욕감을 느낍
니다. 그런데 굴욕감은 이 사진 이전에 먼저 있었습니다. 어려운 해부학 시험을 저우수런이 낙제하지 않고
통과했는데, 그것은 담당 교수인 후지노 선생이 저우수런에게 시험문제를 미리 알려줘서다라고 일본인 학
생들이 헐뜯었고 이에 저우수런은 큰 상처를 받은 것입니다. 이 사건이 있은 뒤에 환등기 사건이 또 발생
한 거죠. 루쉰은 시험문제 유출 루머 사건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나중에 다른 수필에
서 얘기합니다). 그리하여 이 글에서는 처음으로 굴욕감을 느낀 것이 환등기 사건인 것 같습니다(일본의
평론가 다케우치 요시미가 이미 예전에 지적한 내용입니다).
그 학년이 끝나기 전에 동경으로 나왔다고 했는데, 위 글의 뉘앙스는 문예운동을 선택하고 꿈에 부푼 채 동
경으로 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은 꿈에 부푼 것이 아니라 굴욕감을 씹으면서 동경으로 갔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이 역시 다케우치가 지적한 내용입니다). 더욱 주목할 것은, 위 글의 진술에 의전을 자퇴하기로
결정한 것과 문예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정한 것 사이의 시간적 선후 관계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없고 매우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 일 이후로> 두 가지 결정을 내렸다고 쓰고, 두 결정 사이를 <그
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연결했지만 그 시간적 관계는 모호한 것입니다. 전설은 이것을 동시적이라고 봅니
다. 하지만 사실은 동시적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환등기 사건 이후로, 아니 그보다 더 전의 시험문제 유
출 루머 사건 이후로 그러한 마음의 변화가 서서히 진행되었을 것이라고 다케우치는 추정했습니다. 그런
데 문학에 대한 관심 자체는 그보다 훨씬 더 이전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루쉰은 어려서부
터 문학과 미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환등기 사건을 계기로 갑자기 문학에 관심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이 점에 주목하면, 문학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환등기 사건 훨씬 이전부터 줄곧 있어 왔는지도 모릅니다.
요컨대 환등기 사건으로 인한 즉각적인 극적 변화라는 전설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품을 만한 의문이 있습니다. 루쉰이 문제의 사진을 본 것이 1906년이었고 그에 대해 글
을 쓴 것이 1923년이니 17년이라는 시차가 있습니다. 어디까지가 사진을 보던 당시의 생각이고, 어디서
부터 글을 쓸 때나 혹은 그 시차 사이의 어딘가에서 회상할 때의 해석인지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미국에
서 활동하는 홍콩 출신의 한 학자는 그 대부분을 글을 쓸 때의 해석이라고 보았는데, 이렇게 단언할 만한
근거도 당연히 분명치 않습니다. 어느 쪽으로 보든, 환등기 사건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극히 조심스러워지
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환등기 사건과 기의종문의 결심 자체가 어떻게 진술되었고 또 어떻게 해석될 수 있
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다음에 살펴볼 것은 그 사건과 그 결심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과 관련되는 다른
일들이 어떻게 진술되었으며 이 진술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드디어 문예운동을 시작하면서 루쉰이 처음 시도한 것은 잡지 <신생>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위 글은 인
용부분 바로 뒤에서 잡지 창간의 실패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1906년 4월에 시작된 잡지 창간 계획은
1907년 여름에 실패로 귀결되었는데, 위 글은 그 실패 후 큰 허무감을 느꼈고, 그 이유가 적막 때문임을
알게 되었고, 그 적막이 계속 자라나서 자신의 영혼을 휘감았고, 그래서 자신의 영혼을 마취시키고 옛 비문
을 베껴 쓰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고 쓴 뒤, 1917년 여름에 자신의 거처를 찾아온 한 후배와의 대화를 소
개합니다. 그 대화에서 <쇠로 만든 방(鐵屋子)>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환등기 사건 못지 않게
유명하며, 또 하나의 전설이 됩니다. 루쉰의 첫 소설 <광인일기>가 어떻게 쓰이게 되었는가에 관한 전설,
즉 루쉰 소설의 기원에 관한 전설입니다. 이 전설도 그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해체가 필요하지
만 이는 차후에 다시 살펴보기로 합니다.
잡지 창간의 실패(1907년 여름)와 쇠로 만든 방 이야기(1917년 여름) 사이에는 위 글이 쓴 것보다 훨씬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위 글은 그 일들을 대부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루쉰은 1907, 8년에 한문으로
평론을 써서 재일 유학생 사회에서 나오던 잡지에 잇달아 발표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또 하나의 좌절을 겪
습니다. 1908년부터 준비한 동구권 및 러시아 소설의 한문 번역 <역외소설집> 두 권을 1909년에 출판하
지만 상업적으로 완전히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고서 귀국하고, 귀국한 뒤 항주와 고향인 소흥에서 학교 교
사로 2년간 근무하다가 사직 중일 때 신해혁명을 맞이하고, 소흥부 중학교 교감으로 취임하면서 혁명을 지
지하는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지만 보수적 세력과의 갈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고, 1912년 2월에는 남경
정부의 교육부 직원이 되고, 같은 해 5월에 정부를 따라 북경으로 옮겨가서 동향인 회관인 소흥회관에 방
을 얻어 혼자 생활하던 중에 1917년 여름 후배 쳰쉬엔퉁의 방문을 받는 것입니다.
위 글에서 적막이 계속 자라나서 자신의 영혼을 휘감았다고 쓴 바로 뒤의 진술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끝없는 비애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조금도 분노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 경험이 나를 반
성케 했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팔을 높이 들고 한 번 외치면 그 외침에 응하는 자가 구
름처럼 몰려드는 그런 영웅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팔을 높이 들고 한 번 외치면 그 외침에 응하는 자가 구름처럼 몰려드는 그런 영웅>이 바로 문예운동을
시작할 때의 루쉰이 추구하던 목표였습니다. 잡지 창간이 실패한 뒤에도 루쉰은 그 목표를 계속 추구했습
니다. <악마파 시의 힘> 등의 평론을 유학생 잡지에 잇달아 발표했던 것입니다. 귀국 후 신해혁명을 맞아
서는 그런 영웅이 할 활동을 교육계와 언론계에서 그 자신이 실천했습니다. 그런 노력들이 결국 실패하고
거듭 좌절을 겪은 루쉰이 환멸에 빠진 채 남경 정부의 교육부 직원으로 간 것이 1912년 2월입니다.
위 글은 마치 잡지 창간의 실패 이후로, 즉 1907년 여름 이후로 큰 허무감을 느꼈고, 그 이유가 적막 때문
임을 알게 되었고, 그 적막이 계속 자라나서 자신의 영혼을 휘감았던 것처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
한 사정과 대조해 보면 1907년 여름부터 1912년 2월까지의 시간은, 혹시 갈등은 있었을지라도 여전히
영웅의 활동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루쉰은 위 글에서 1907년 여름부터 1912년 2
월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중요한 일들이 다 삭제되어
버리고, 잡지 창간의 실패와 자신이 영웅이 결코 아니라는 반성이 직접 연결되게 됩니다. 하지만 위 글에
서 말하는 반성은 1912년 2월 이전의 모든 것들에 대한 반성이며, 특히는 1911년 10월부터 몇 달 간의
신해혁명 체험에 대한 반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위 글은 그 점을 한사코 은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그
것이 트라우마이기라도 한 것처럼! 이는 역설적으로 신해혁명 당시의 체험이 루쉰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
이었나를 웅변해 줍니다.
환등기 사건과 기의종문의 전설은 이런 사정들을 다 도외시합니다. 물론 환등기 사건의 체험과 기의종문
의 결심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 자체로는 루쉰 문학의 시작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반성
의 대상입니다. 반성의 대상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로부터 신해혁명의 체험
까지를 대상으로 한 루쉰의 치열한 반성이야말로 루쉰 문학의 시작입니다. 그 반성의 대상을 잡지 창간의
실패까지로 축소하는 것만으로도 반성의 의미가 대폭 약화됩니다. 그런데 전설은 아예 환등기 사건과 기의
종문이 모든 것인 양 말합니다. 전설은 루쉰의 반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환등기 사
건과 기의종문을 반성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으려 하는 것 같습니다.
해당 콘텐츠를 무단 캡처 및 불법 공유시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전설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은 진실을 가려 버립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가려진 진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전설을 좋아하는 것은 혁명적 낭만주의인데 혁명적 낭만주의야말로 진실에 대한 억압으로 귀
결되기 쉽습니다. 그 실례를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1967년 조반파 홍위병의 상해 집회 장면, 출처: 중국어 위키백과
成民燁. 서울대학교 중문과 명예교수. 전공은 현대중국문학. 1982년부터 문학평론가로 활동해왔
다. 저서로 『문학의 숲으로』, 『언어 너머의 문학』, 『무협소설의 문화적 의미』 등이 있다.
junaur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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