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대미외교를 통한 국가생존 전략(1895-1953)
이 철 순 | 부산대학교
이 논문은 1895년부터 1953년까지의 이승만의 대미외교를 통한 국가생존 전략을 살 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비록 식민지 시기에 그의 대미외교가 가시적인 성과를 보 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1948년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데 성공 하였고 자신의 오랜 염원이었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1953년에 체결함으로써 한국의 안 보를 미국으로부터 문서상으로 보증받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국가생 존전략은 결과적으로 성공적인 것이었다. 이승만이 대미외교를 수행할 때 지속적으로 사용한 방법은 미국이 1882년 조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약속을 지키지 않은 배신행위 를 계속해서 지적하는 것이었다.
주제어: 이승만, 미국, 대미외교, 국가생존 전략, 거중조정
I. 머리말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사람이었다. 그는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미국과 처음으로 접한 이후 1904년 도미하여 1910년 미 국의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그 해에 귀국하였다가, 1912년 다시 미국으로 망 명하여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33년 동안 주로 대미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 다. 1945년 10월 귀국한 이후에는 미국식 민주주의 국가를 미국의 도움으로 건설하려 하 였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어 한국의 안보를 보장받고자 하 였다. 이런 면에서 이승만은 일생 동안 미국과 대면하면서 한국의 국가생존전략을 구상하 고 실천하고자 한 정치인이었다.
이 논문은 이승만의 대미외교를 통한 국가생존전략을 그가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하 여 처음으로 미국을 접한 이후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때까지의 시기 동안 살 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에서 국가생존전략이란 구한말 시기의 독립유지 전략, 일 제식민지 시기의 독립회복 전략, 해방 이후의 건국 전략, 한국전쟁 이후 국가안보 확보 전 략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차원의 국가생존전략은 시기별로 다음과 같이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첫째, 이승만이 미국과 처음으로 대면하고 한국이 1910년 식 민지로 전락할 때까지의 시기(1895-1910), 두 번째로 한국이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 해방될 때까지의 시기(1910-1945), 세 번째로 해방된 이후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될 때까지의 시 기 (1945-1948), 네 번째로 건국 이후 한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 결될 때까지의 시기(1948-1953)이다.
기존의 연구 가운데 이 시기 전체를 포괄하면서 이승만의 국가생존전략을 따로 다룬 연
구는 많지 않다. 첫 번째, 두 번째 시기까지의 이승만의 독립운동만을 주로 다룬다든지, ) 세 번째 시기의 국가건설 전략만을 다룬다든지, 네 번째 시기만을 따로 나누어 살핀 연구 들 )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전체 시기를 포괄적으로 다루지 않게 되다 보니 기존의 연구들 은 이승만의 국가생존전략 가운데 일관된 흐름이 무엇인지, 그 안에서 변화는 무엇인지 찾 아내기 어려운 한계를 가지고 있다.
또한 두 번째 시기까지만 다룬 연구들 가운데 결과적으로 이승만의 대미외교를 통한 국
가생존전략, 즉 독립운동전략으로 한국이 독립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승만의 대미외교 전략은 실패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 그러나 시기를 더 넓혀서 이승만이 어려운 여건 하에서 대한민국을 성공적으로 수립한 과정, 한국전쟁 이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 여 오늘날의 한국의 번영을 가져온 점을 고려한다면 비록 식민지 시기의 그의 대미외교를 통한 독립운동 전략이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 주지 못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그의 대미 외교를 통한 국가생존전략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1953년 한미상호방위 조약의 체결은 이승만 자신이 “1882년 조미통상조약 이후로 우리나라 독립역사상 가장 긴 중(緊重)한 진전”이며 “우리의 후손들이 앞으로 누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혜택을 누릴 것이다” )라고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조약은 군사동맹 이상의 다중(多重) 가치 를 지닌 구한말 이래 한국의 가장 큰 성과였다.
이 논문은 기존의 연구들이 이승만의 전 생애 동안의 국가생존전략을 포괄적으로 다루
지 못한 연구 시기상의 한계를 극복하고, 특히 식민지 시기 이승만의 독립운동전략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 연구는 이 승만의 대미외교를 통한 국가생존전략의 형성, 발전, 실행을 주로 이승만의 저작, 논설, 편 지 등의 자료와 미국의 외교문서 자료를 이용하여 규명하고자 한다.
II. 배 재학당 입학 이후 한일합병 시기까지의 국가생존전략(18951910)
이 시기의 이승만의 국가생존전략은 지극히 호의적인 그의 대미관에서 출발한다. 이승 만은 1894년 갑오경장으로 과거제가 폐지되자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서양의 정치 적 자유를 배웠고(이승만 1995, 88-89), 갑신정변의 주역인 서재필을 통해 미국의 자유주 의 사상과 민주주의 제도의 세례를 받았다.
그 후 그는 고종황제 폐위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한성감옥에서 1899년 1월부터 1904년 8 월까지 5년 7개월 동안의 긴 감옥생활을 하게 되는데 감옥 안에서 확고한 친미 사상을 정 립하였다. 그는 감옥에서 1904년 6월 집필을 완성한 『독립정신』에서 미국을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에 기초한 이상적 기독교 국가로 보고 ‘상등문명국’ 혹은 ‘극락국’이라고 찬양하 고(유영익 2002, 155-157), 미국이 택한 민주정치가 가장 좋은 제도라고 언급했다(이승만 2008a, 123-124). 그는 또한 감옥에서 미국의 역사, 정치제도 및 교육제도 등에 대해 면밀히 연구하였고, ‘미국의 교육을 일으킨 신법(美國興學新法)’을 베낄 정도로 미국을 흠모하기 도 했다(유영익 2002, 158). 이렇게 볼 때 감옥에서 형성된 이승만의 대미관은 친미를 넘어 무비판적으로 미국을 숭상하는 숭미(崇美)의 단계까지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승만은 1904년 11월 민영환의 특사 자격으로 미국의 씨어도어 루스
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한국을 떠나게 되는데 그 때 선교사들은 이승만에게 미국은 영토적 야심도 없고 가장 힘이 센 나라이니 그 곳의 문물을 배우고 미 국과 친선을 도모하라는 주문을 했다(서정주 1995, 181-182). 아마 이러한 말도 이승만의 대미관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국과 친선을 도모하라는 말은 미국과 의 연미(聯美)정책을 시사하고 있다.
이승만은 러일전쟁의 평화회담이 포츠머스에서 열리기 직전인 1905년 8월 4일 미국 뉴 욕 주의 씨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여름 별장을 방문하였다. 1882년 맺어진 한미수호 통상조약의 제1조에 있는 거중조정(Good Offices) 조항 )에 따라 미국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미 루즈벨트 대통령은 1905년 7월 27일 미국과 일본 사 이에 필리핀과 조선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인정하는 태프트-가쓰라 밀약(Taft-Kastsura Agreement)을 맺어 놓은 상태였다. 이승만을 만나기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따라서 이승 만의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태프트-가쓰라 밀약은 그 존재가 20여 년이 지난 1924년에야 알려졌는데 ) 이에 대한 이
승만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1945년 4월 9일 올리버(Oliver 2008, 33)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겨냥하여 “한국 사람들은 오래도록 참아왔던 모욕을 잊 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1905년 자기들을 일본의 멍에를 지도록 몰아넣은 미국 정치가 들의 배신 행위에 분개하고 있습니다”라고 미국에 대한 분노를 표현했다.
태프트-가쓰라 밀약의 존재는 이승만으로 하여금 두고두고 미국에 대한 배신감을 곱씹 게 만들었고, 이승만의 호의적인 대미인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 왜냐하 면 이승만은 후일 이 밀약의 존재와 미국의 배신을 계속해서 언급했기 때문이다. 이런 면 에서 이승만은 결코 맹목적인 친미주의자가 될 수는 없었다.
루즈벨트와 면담한 이승만은 바로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남아 유학 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 때 그는 한인 교포신문 『공립신보』에 중요한 논설을 발표하여 자신의 독립유지 전략 구 상을 드러냈다. 이승만은 1908년 3월 4일자 논설에서 실력양성을 강조하면서 유리한 국제 정세에 따라 일본과의 최후의 결전도 불사할 것임을 암시하였다. 그런데 이 논설에서는 의 병의 봉기와 같은 무력투쟁에 대한 비판적 언급은 전혀 없었다. ) 이승만이 의병을 비판하 고 더욱 강력한 준비론을 역설하게 된 계기는 1908년 3월 23일에 있었던 미국인 스티븐스 저격 사건이었다(장규식 2011, 168).
그의 이러한 태도변화는 1908년 8월 12일자 논설에서 나타났다. 그는 이 논설에서 세상
형편을 정확히 모른 채 자신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앞으로 나가려고만 하면 국민 장래를 크게 위태롭게 한다고 지적하고, 그 충애지심(忠愛之心)이 도리어 한국의 장래에 손해를 끼칠 것이라고 경고하고 그 예로서 의병의 봉기를 들었다. 그는 이 논설의 결론에서 “장래 에 어찌 행할 일을 낱낱이 준비하여 속힘이 든든하게 된 후에야 남과 경위를 다투어도 능 히 남을 꿇릴” 수 있다고 먼저 실력을 양성할 것을 주장했다. ) 이승만의 의병비판은 역시 같은 해 9월 2일자 논설에서도 이어졌다. ) 이어서 이승만은 같은 해 12월 16일자 논설에서 미국과 일본이 다섯 조건을 협상하여 세간에는 미·일전쟁설이 막혔다고 하나 오히려 양 국이 시비를 준비하는 시작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미·일간 협상이 비록 평화를 주장하지 만 “미·일간의 관계를 정돈시킬 것은 붓이 아니오 칼인 줄로 믿는 바”라고 미·일전쟁의
필연성 )을 강하게 주장했다. )
이승만의 논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그의 독립유지전략은 정세파악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행하는 의병봉기와 같은 무력투쟁보다는 장기간에 걸쳐 실력을 양성한 이후 미·일간 의 전쟁이라는 유리한 국제정세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1904년 도미하여 유학생활을 하던 이승만은 프린스턴 대학에서 주로 국제법과 외교론, 미국헌법사, 미국사 등을 수강하고 1910년 봄 학기부터 박사학위 논문 집필에 들어가 그
해 6월에 “미국에 의해 영향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라 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김학준 2000, 184-186). 그가 실제로 박사학 위 논문에서 논의한 중립은 영세중립과 같은 국제정치상의 중립보다는 상업상의 중립 또
는 교역상의 중립(neutral commerce) )이었다. 그 중에서 교역상의 중립을 의미하는 전시 중립제도가 국제법화 되어 가는 진화의 역사를 다루었는데 이러한 전시중립제도가 정착 되는 데 미국의 공헌이 컸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통상의 자유를 중시하는 미국은 무엇보 다도 전시중립국 교역의 자유를 지키려고 애썼고 그러한 미국의 노력이 미국식 국제법이 되었다는 것이다(최정수 2011, 106, 115-116). 상업상의 중립 또는 교역상의 중립을 강조하 는 이승만의 문제의식은 그가 『독립정신』에서 강조한 개방과 통상의 자유와 밀접한 관련 이 있는 것이었다(이승만 2008a, 361-369). 그런 면에서 그의 학위논문은 『독립정신』의 문 제의식이 그대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통상의 자유라는 문제의식은 뒤에서 살펴 보겠지만 1919년 윌슨에게 제출한 국제연맹 아래에서의 위임통치청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이 시기에 이승만은 기본적으로 친미적인 사고에 입각하여
무력투쟁이나 의열투쟁보다는 외교와 실력양성론을 바탕으로 한 독립유지 전략을 구사하 려고 하였다. 이승만이 외교를 구사할 때 중시한 개념은 통상의 자유에 기반을 둔 교역상 의 중립이었다.
III. 한일합병 이후 해방 시기까지의 국가생존전략(1910-1945. 8)
이 시기의 이승만의 대미외교를 통한 국가생존전략(독립회복전략)은 1910년 한일합병
이후 1919년 3·1운동 직전까지의 시기, 1919년 3·1운동 이후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으로 임명된 후 탄핵되었다가 주로 하와이에 머물면서 교육과 실력양성에 몰두하던 1939년까 지의 시기, 1939년 미국 본토로 들어가 일본의 침략야욕을 선전하면서 임시정부 승인 외교 를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하여 1945년 10월 한국으로 귀국할 때까지의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1. 한일합병 이후 3·1운동 직전까지의 국가생존전략
미국에서 학위논문을 쓰고 1910년 귀국한 이승만은 1911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
건’이 발생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1912년 3월 다시 도미했다가 하와이 교민의 요청으로 1913년 2월 그가 오랫동안 독립운동을 전개한 하와이로 들어가게 된다. 그는 같은 해 하와 이에서 출간한 『한국교회핍박』(2008b)과 자신이 창간한 『태평양잡지』를 통해 자신의 생각 을 피력하였다. 그의 저서와 논설을 통해 1910년대 이승만의 국가생존전략을 알아 볼 수 있다.
『한국교회핍박』은 1905년 발생한 ‘105인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집필된 저서로서 이승만은 이 책에서 교회야말로 한국인이 외교를 실행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창구이며, 교회의 국제적 네트워크에서 위기에 봉착한 외교독립 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장규식 2011, 170-172). 이승만은 박사학위논문을 쓴 이후에도 계속해서 외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외교를 교회라는 네트워크를 통해 수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승만이 이 책에서 1882년 체결된 한미수호통상조약의
제1조 거중조정 조항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동포들이 대표를 선출하여 대통령 루스벨트씨에게 보내어 도와주기를 요청한 것
은 바로 이 조항을 근거로 한 것이다 […] 그 후 일본은 각국에 선언하기를, 한일합병 이전 한국이 각국과 조약을 체결한 모든 조건은 다 취소해 주기를 청구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미국은 한·미통상조약 조건을 취소하는 뜻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이승만 2008b, 170).
이승만이 1905년 씨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날 당시에 이 조항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이 조항의 발동을 염두에 두고 만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승만은 『한 국교회핍박』에서 이 점을 다시 상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뿐 아니라 일본의 취소 요구에 도 불구하고 미국이 한미수호조약의 조건을 취소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조약이 아직도 유 효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이승만은 이 조항의 유효성 을 미국을 압박하는 무기로서 여러 차례 사용하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이승만의 이러한 언급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승만이 1913년 9월 창간한 『태평양잡지』에 쓴 1910년대의 논설을 통해 그의 국가생존전략 구상을 알아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이승만이 국제문제에 관하여 쓴 논설들 의 주장은 현실적으로 즉각적인 독립의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을 최대한 고려하여 내정의 자치권을 일제에 요구하여 얻어 내야 한다는 자치론을 염두에 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일종의 장기적인 준비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은 1914년 2월호에 쓴 “본 잡지의 주의”라는 논설에서 이 잡지의 주의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에 있다고 하면서, 용맹을 기르고 의리를 배양함으로써 피 흘리지 않고 될 전 쟁을 준비하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피 안 흘리는 전쟁으로 외교상, 경제상, 종교·도덕·문 명상의 싸움을 들고, 먼저 인민의 지·덕·체를 두루 발달시켜 이런 싸움을 담당할 인재를 만들어 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역설했다. ) 이승만은 외교상의 전쟁을 중심에 두고 국민 교 화와 교육, 경제적 실력 양성을 결합시킨 독립노선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필리핀, 인도, 발칸반도의 약소국들이 식민
통치하에서도 문명진보를 달성할 수 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 이러한 논리를 한국에 경우에 적용해 보면, 한국이 일본의 식민통치 하에서 내치의 권한을 인정받은 후에 실력을 길러 일본을 물리치고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는 논리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은 일본의 식민통치하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사례로서 아일랜드의 자치운
동을 중시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쓴 논설 “내치자주”에서 아일랜드 자치운동(Home Rule)에 대해 호의적 태도를 보였다. 아일랜드가 수도에 국회를 별도로 세워 내치를 자주 하되, 영국 여왕을 군주로 삼고 그녀의 통치하에서 영국 국민들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며 지내고 있다고 보았다. ) 그는 한국도 아일랜드와 같이 자치운동을 벌인다면 일본도 영국 과 같이 한국의 자치를 인정할 것이라고 보았다. )
이승만은 또한 미국의 필리핀 통치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지극히 호의적
인 미국관에 기초하여 필리핀 문제를 인식하였다. ) 그는 필리핀에 의회를 세워주고 일정 기간 미국의 보호통치를 받게 만든 후에 열강들의 약속 하에 필리핀을 영세중립국으로 만
들자는 미국 하원의원 존스(W. A. Jones) 제안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 이 사례를 한 국에 대입한다면 한국도 영토적 야심이 없고 자유를 사랑하는 미국의 보호 하에 중립을 지키며 장기적으로 실력을 배양하여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고 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승만이 하와이에 정착한 후 쓴 저서와 논설들을 살펴 볼 때 이승만은 아일랜드가 영
국으로부터 자치를 얻어냈듯이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자치를 얻어내거나, 필리핀이 미국의 보호 아래 중립을 보장받을 수 있듯이 한국도 미국의 보호 아래 중립을 보장받은 후에 실 력을 양성하여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준비론을 염두에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중요 한 것은 기독교 국가인 미국과 아시아에서 중요한 기독교 국가가 된 한국의 교회 네트워 크를 이용한 대미 외교 수행이었다.
2. 1919년 3·1운동 전후로 한 시기에서 1939년까지의 국가생존전략
이승만이 1913년에 정착한 하와이를 떠나 다시 외교무대에 설 수 있었던 계기는 1919년 1월 18일부터 6월 28일까지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해 열린 파리강화회의였다. 미 국에 있는 대한인국민회(총회장 안창호)에서는 1918년 11월 25일, 12월 3일 두 차례의 회 의를 거쳐 이승만을 파리대표로 선정하였다(오영섭 2012b, 85-86).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1919년 1월 6일 하와이의 호놀룰루를 떠난 이승만은 1919년 1월 15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 정한경과 함께 뉴욕과 워싱턴을 오가며 미국 정부로부터 여권을 얻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불
가능하게 되자 이승만은 안창호와 협의하여 윌슨 대통령(Woodrow Wilson)(파리강화회의 도중 2월 말~3월 5일 잠시 귀국했음)을 직접 만나 한국사정을 직접 호소하기로 하였다. 이 를 위해 이승만은 정한경과 연명으로 1919년 2월 25일자로 위임통치청원서를 작성하여 3 월 3일에 윌슨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게 되었다(오영섭 2012b, 87-88; 이주영 2011,
59-60).
위임통치청원서의 내용은 대체로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정책과 강제병탄 행위는 부당하
며, 일본의 한국통치는 모든 면에서 한국인에게 최악이었고, 따라서 한국 문제의 공정한 해결을 희망한다고 호소하는 것이었다. 위임통치청원서의 핵심적인 구절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저희들은 자유를 사랑하는 1,500만 한국인의 이름으로 각하께서 여기에 동봉한 청원서 를 평화회의에 제출하여 주시옵고, 또 이 회의에 모인 연합국 열강이 장래에 한국의 완전 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 하에 현재와 같은 일본의 통치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 연맹의 위임통치 아래에 두는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저희들의 자유 염원을 평화회 의 석상에서 지지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청하는 바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한 반도는 모든 나라에 이익을 제공할 중립교역 지역(a zone of neutral commerce)을 탄생 시킴으로써 동양에 있어서 어떤 특정 국가의 확장을 방지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데 도움
이 될 것입니다. ) (강조는 필자)
여기에서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 하에” 국제연
맹의 위임통치를 받는다는 것이며, 한반도가 “중립교역 지역”이 되어야 한다는 표현이다. 이것은 위에서 살펴 본 이승만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언급되거나 강조된 “중립교역”, “통상 의 자유”와 연결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중립교역 지역”이라는 언급은 당시의 국제연맹 규약 22조와도 통하는 것이었다. 국제연맹 규약 22조에 따르면 위임통치를 받는 지역은 일체의 군사 시설, 즉 요새나 육군 및 해군기지를 세울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거주민의 징 집도 금지되었다. 대신 그 지역에 대해 교역의 문호개방을 적용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 로 위임통치제도는 전시중립론과 같이 통상의 자유를 원리로 하는 제도였다(최정수 2011, 132). 이런 면에서 볼 때 이승만의 국제연맹하의 위임통치청원은 자신의 1910년 박사학위 논문의 문제의식의 연장이며, 국제연맹 규약 22조 위임통치청원의 실질적 내용인 통상의 자유에 근거한 중립론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미국이 위임통치제도를 만들 때 취지는 통상의 자유를 원리로 하는 세계적인 통 상망의 구축이었다. 그것이 윌슨의 꿈이었다. 미국은 당장 독립을 실현할 수 없는 식민지 에 대해서 잠정적으로 국제연맹의 보호 하에 위임통치령을 만들고 이 지역을 자유무역지 대로 설정함으로써 세계적인 통상 망에 끌어들이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최정수 2011, 133). 즉, 미국은 위임통치 지역을 통상의 자유에 기반 한 중립지역으로 만들려고 했다고 할 수 있다.
윌슨과 교분이 깊었던 이승만은 아마도 윌슨의 구상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면
에서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은 일시적인 방책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임통치청원 자체는 3·1운동 이전에 이루어졌으나, 이승만은 3월 10일 이 미 3·1운동의 발발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도 위임통치청원을 계속했고, 3월 16 일에는 직접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청원서를 언론에 배포하기도 하였다(오영섭 2012, 89, 101).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승만이 실질적인 위 임통치국으로 미국을 상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 이승만은 실질적으로 미국의 위임통치 를 받는 중립적 상업지대나 완충국인 한국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3·1운동 이후 만주접경에 수립된 ‘대한공화국 임시정부’, 서울에서 선포된 ‘한 성임시정부’, 상해 임시정부 등 세 곳에서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승 만은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1920년 말까지 부임하지 않고 그 대신 미국 수도 워싱턴 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여 이를 근거지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유영익 2009, 2-3). 이 승만은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고 1920년 말까지 워싱턴에 머무른 시기에 왕성한 문서 외교활동을 벌였는데 그는 이 시기에 많은 영문 문서를 남겼다. 이 영문 문서를 통해 이승 만의 전략을 추적해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문서를 자세하게 분석한 유영익 교수(2009, 41-
43)에 따르면 이승만은 1919년 시점에 확고한 친미 외교독립운동 노선을 수립하고 있었 다.
이승만이 생각하기에 미국이 한국을 도와야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로 한
국이 동양에서 가장 돋보이는 기독교 국가가 되었기 때문에 기독교 국가인 미국과 미국 국민은 당연히 한국을 도와야 할 도의적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1882년 체결된 조 미수호통상조약 제1조의 거중조정 조항 때문에 미국은 한국을 법적으로 도울 의무가 있 다는 것이다(유영익 2009, 39). 여기에서 특히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 두 번째 거중조정 조 항 부분이다. 위에서 살펴 본 『한국교회핍박』에서 이미 이 조항이 자세히 언급되었고, 이 승만은 미국이 이 조약을 파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약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인식을 보 였다. 또한 이승만은 윌슨에게 위임통치청원서를 제출할 즈음에 그의 비서 튜멀티(Joseph
Tumulty)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조항을 두 차례나 언급하였다. )
이상으로 미루어 볼 때 이승만은 1913년 시점부터 조미조약 제1조의 거중조정 조항에 주목하였고 자신이 외교무대에 다시 등장하게 된 1919년부터 이 조항을 미국과 교섭할 때 이용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승만은 이후 미국의 대통령이나 관계기관에 한국 문제 를 호소할 때 이 조항을 계속해서 상기시키면서 미국은 법적으로 한국을 도와야만 한다고 압박했다. 이 조항이 미국을 압박하는 중요하고도 유효한 용미(用美) 전략의 수단이 되었 던 것이다.
3·1운동이 일어난 시점의 이승만의 독립운동 노선은 미국을 이용한 외교 중심의 노선 이었음은 분명하나, 그가 무장투쟁이나 국제정세가 유리한 시기에 필요한 독립전쟁을 전 혀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흔히 이승만은 무장투쟁을 무시하고 외교일변도 노선을 추종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1920년대에 독립운동가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렇지 않 음을 알 수 있다.
이승만은 1922년 4월 독립운동의 선배 백순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의 일은 한국인의
피가 아니고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독립정신인 것입니다(韓國事 非韓人之血 無以成功 是獨立之情神也)”라고 하여 한국의 최후독립은 무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인식을 보여 주었다.22) 다만 이승만은 무력만을 가지고서는 독립이 불가능하며 무력과 외 교를 병행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즉, 외교와 무력이 양대 방면에서 착실히 준비를 하여 독립의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 독립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무력은 독 립전쟁을 수행할 한국인의 무장투쟁을 위해 필요하며, 외교는 독립전쟁에 필요한 국제사 회의 승인이나 원조를 받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보았다.23)
한편 이승만은 1920년 12월 5일이 되어서야 상해 임시정부에 귀환하였지만, 다른 독립
운동세력과 화합하지 못하고 불과 6개월도 시무하지 않은 채 1921년 5월 29일 임시정부를 떠나게 된다. 그 후 그는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까지 열린 워싱턴 군축회의에 한국대 표단 단장으로 참가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외교활동을 펼쳤지만 기대한 성과를 거
권리가 있으니, 파리행을 위한 특별 허가증을 발급하여 강화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해주고,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따라 미대통령이 거중조정(good offices)을 해 줄 것을 요청했다(유 영익 외 2009b, 72-73). 1919년 3월 3일자 편지에서는 “한국민에게 약소국의 지원자로 알려진 윌 슨을 만나는 것은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한국민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1882년 조 미수호통상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따라 한국을 도와 달라”고 하였다(유영익 외 2009b, 74).
22) 이승만→백순(1922. 4. 28)(유영익 외 2009a, 41).
23) 이승만→김병조(1920. 3. 6)(유영익 외 2009a, 13-14).
두지 못하였다. 이 회의에서 이승만이 주장한 내용은 그의 1910년 박사학위논문, 그 연장 으로서의 위임통치청원서의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즉 한국을 상업·무역·무력 의 중립지대로 만들었다가 최후에 독립을 시켜야 한다는 논리였다.
워싱턴 군축회의 당시 일본 정보 당국은 한국 대표들의 주장이 “일본의 대륙 침략 교두 보인 한국을 열강의 무력 간섭에 의해 영생중립국으로 함으로써 태평양 연안국의 영구 평 화를 보증할 수 있다”라는 것이었다고 요약했다. 이승만은 미국이 먼로주의를 통해 남미 에 대한 유럽제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아메리카대륙에서 패권을 차지했듯이, 일본이 아시 아에서 일본식 먼로주의를 추구함으로써 아시아 전역을 석권하는 패권 국가를 지향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문제는 일본의 국내 문제가 아니라 피침략국의 문제이며, 일본의 대륙 침략 교두보인 한국을 독립·문호 개방시킴으로서 전아시아를 독립·문호 개방시킬 수 있기에 ) 한국을 상업·무역·무력의 중립지대로 만들고 최후에는 독립시켜서 일본의 패권을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이승만이 워싱턴회의에서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하자 그가 이끌던 구미위원부는 유명 무실하게 되었고, 하와이에 있던 이승만은 1925년 3월 상해임정으로부터 탄핵되어 더 이 상 대통령직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거의 동시에 임시정부는 구미위원부에 대하여
폐쇄령을 내렸다. )
이승만과 임정이 공식적인 관계를 복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승만이 다시 외교무대에
나설 수 있었던 계기는 1931년의 만주사변이었다. 일본의 만주 침략을 규탄하기 위한 국제 연맹 총회가 1933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렸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승만과 관계가 좋았던 김구 영도하의 상해 임정은 공식적인 관계가 복원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을 국 제연맹총회 특명전권수석대표로 임명하였고 이에 따라 이승만은 이 회의에 참석하여 외교 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 이승만은 1933년 만주 침략을 조사하기 위한 국제연맹의 리튼 조사단(Lytton
Commission) 보고 회의에서, 한국을 중립국으로 독립시킴으로써 일본의 대륙 침략을 저 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일본의 대륙 침략 정책을 저지하고 극동의 평화를 유 지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대륙 침략의 발판인 조선을 열국 군대의 보증에 의해 중립국으로 서 그 독립을 승인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중립국 조선은 영토 확장론을 배격하며 문호 개방을 통한 통상 균등과 세력 균형을 약속한다고 했다. ) 여기에서도 한국을 통상의 자유 를 누리는 중립국으로 상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19년 3·1운동 이후 1930년대 중반까지의 그의 국가생존전략, 즉 당시의 독립운동 전 략은 대미외교를 통한 한국의 독립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력투쟁이나 독립 전쟁을 전혀 무시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유리한 국제정세가 도래하였을 때 시도해야 한 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의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한국이 통상의 자 유를 누리는 교역상의 중립국을 보장받은 후에 실력을 양성하고 최후의 시기에 독립전쟁 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는 방식을 구상하고 있었다. 특히 한국이 교역상의 중립국이 되어 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1919년의 국제연맹 하의 위임통치 청원, 워싱턴군축회의(1921/111922/02)와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총회 참가 시 그가 행한 발언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3. 1939년 이후 1945년 8월까지의 국가생존전략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자 이승만은 다시 외교무대에 서기 위해 1939년 3월 활동무대를 하와이에서 워싱턴으로 옮겼다. 그는 중경 임시정부의 주미외교위원장 겸 주차화성돈전권대표(駐箚華盛頓全權代表)의 자격으로 다 시 외교·선전 활동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일본의 실상을 미국 정부와 국민에게 알려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 이승만은 1941년 8월 1일 뉴욕에서 『일본군국주의실상』(Rhee 1987)를 출간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미국 내의 반전여론을 잠재우고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미국의 세력과 이권을 구축하고 있던 일본에 대한 선제적 대응을 촉구하고자 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진가는 미국과 일 본의 전쟁을 정확하게 예측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 책이 나온 지 4개월 만인 12월 7일 일 본이 진주만을 공습함으로써 미·일간에 전쟁이 발발하였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일본군국주의실상』이 그의 대미외교 전략과 관련하여 중요한 이유는 그 이 전과 달리 이 책에서 미국에 대한 매서운 비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는 미
국이라는 나라 자체에 대해서는 여전히 호의적인 인식을 보여 주었으나(Rhee 1987, 143), 이 책의 도처에서 미국 정부가 태프트-가쓰라 밀약이라는 배신 행위를 통해 한국과 맺은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을 지키지 않은 점(Rhee 1987, 218-221, 227) 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특히 이 책에서 이전과는 달리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처음으로 언 급한 점이 새롭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은 이 책에서 미국의 조약 이행의 의무를 언급함으 로써 미국의 지도자들과 일반 국민의 여론을 움직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 정치 인들의 책임 있는 공식적인 반응은 없었지만, 소설가 펄벅은 이 책의 서평에서 이승만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
이승만은 이 시기에 이전부터 바라오던 미·일간의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의 독립을 위 한 유리한 국제정세가 형성되었다고 보고 미국에 대한 맹렬한 외교공세를 펼치기 시작했
다. 이 시기의 이승만의 대미외교는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 요청, 군사적 지원(광복군 지원) 요청, 얄타밀약설 제기로 압축할 수 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승인을 위해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 공습 이틀 뒤인 12월 9일 미 국무부 극동문제담당국장 혼벡(Stanley K. Hornbeck)에게 편지를 보내, “마침내 피할 수 없는 충돌이 발생했으며”, “한국인은 미국의 대의에 도움이 될 모든 기회를 모색하고 있 다”고 밝히고, )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외무부장 조소앙의 명의로 작성된 ‘신임 장’(1941년 6월 4일자)을 비공식적으로 제출하여 국무부가 임정을 승인할 의사가 있는지 타진했다. 이와 동시에 중경임정은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연합국의 일원으 로 대일전쟁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신재홍 1992, 865-866). 1942년 1월 2일에는 이승만은 코델 헐(Cordell Hull) 국무장관의 특별보좌관이었던 알저 히스(Alger Hiss)와 극 동문제담당국장 혼벡을 방문하여 나찌 점령하의 유럽 망명정부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임 시정부를 승인해 주기를 요청하였으나 히스는 거절했다. 이승만은 이 면담에서 한국의 독 립을 미리 승안하지 않으면 일본 패망 뒤에 소련이 반드시 끼어들어 한국을 강점할 것이라 는 논리를 동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Oliver 2008, 28). 당시 미국은 전시동맹국이 었던 소련과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 이승만의 반소정책은 수용 될 수 없었다.
이승만의 지속적인 임정 승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1942년 2월 20일 경에는 이미 전후 의 미국의 대한정책의 핵심을 이루는 구상이 정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임정 승인은 이루
어질 수 없었다(고정휴 2004, 497). 그러한 구상은 국무부의 한국통이었던 랭던(William Langdon)의 보고서에서 다루어졌는데, 그것은 첫째, 전후 상당기간 한국의 독립유보와 신 탁통치 실시, 둘째, 임정을 포함한 현존 독립운동단체들에 대한 불승인 방침, 셋째, 광복군 과 조선의용대 등 중국본토의 한인무장조직에 대한 군사지원 불가였다. )
랭던의 구상 중 신탁통치 구상은 1943년 3월경부터 현실화되기 시작했고, 다음 달인 4
월 7일 『시카고 선』(Chicago Sun)지에 보도되었다(이정식 2006, 303). 이러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구상에 대해 이승만은 1943년 5월 15일 루즈벨트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강력히 항의했다. 그는 2300만 한국민들은 완전독립을 원하고 전후의 신탁통치에 반대하고 있다 고 하면서 지금이야말로 미국이 한국에 잘못한 것을 바로잡을 기회라고 주장했다.
이제야말로 미국이 지난 36년 동안 한국 민중과 한국에 행한 잘못과 부정을 바로잡을 때라는 사실에 대해 각하께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합니다. 각하께서 기억하듯이 1905년에 미국은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고 1910년에는 한국을 합병하도록 허락했습니다. 이것은 모 두 1882년 조미수호조약 위반입니다 […] 한국 민중은 그 이래로 세계의 정복당한 모든 인종보다도 더 그리고 오랫동안 고생해 왔습니다. )
여기에서 이승만은 미국의 조미수호조약 위반, 태프트-가쓰라 밀약에 대해 언급하면 서 미국을 비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이승만은 러시아가 ‘소비에트조선공화국
(Soviet Republic of Korea)’을 세우려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미국이 지난 40년
전부터 그렇게 두려워했던 소련의 극동에서의 팽창에 대한 두려움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 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임정 승인과 결부시켰 다.32) 이승만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소련의 한반도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빨리 임정 을 승인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승만의 소련에 대한 경계는 1945년 5월 얄타밀약설 )을 터뜨림으로써 절정에 다다랐
다. 그는 1945년 4월 25일부터 6월 26일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창립총회 참가 요청이 거부되자, 회의를 앞두고 미국과 소련 간에 전후 한국 문제에 대한 모종의 밀약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미국에게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회의가 열 리고 있던 5월 11일부터 대대적인 선전활동에 들어갔고, 5월 15일 직접 트루먼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얄타밀약설에 대해 강력히 강의했다.
한국과 관련하여 카이로선언에 반하는 얄타 비밀 협정이 있었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 지게 된 것은 본인에게는 물론이려니와 대통령각하께도 놀라운 일이었음에 틀림없었습 니다. 각하께서는 한국이 비밀외교의 희생물이 되었던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 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1905년에 한국을 일본에 팔아넘긴 첫 번째 비밀협정은 20년 후까지도 비밀에 붙여졌습 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얄타 협정은 연합국회의 개최 중에 현지에서 정당하게 폭로되었 습니다. 우리들은 각하께서 이번 일을 중재해 주시도록 간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이승만은 이 편지에서 과거의 태프트-가쓰라 밀약과 같이 미국이 또 다른 밀약을 맺는
것은 부당하며 오히려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미국이 중재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39년부터 1945년 한국이 해방될 때까지의 이승만의 미국에 대한 태도는 그 이전 시 기 특히, 1919년 3·1운동을 전후로 한 시기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1939년 이전 이승만 은 미국의 잘못을 지적한다 하더라도 그 어조가 그렇게 신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41 년 미·일 간의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처음으로 거론하면서 미국 을 강하게 몰아 부쳤다. 즉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맺는 바람에 미국은 한국에 대한 거중조 정 조항을 지키지 않고 한국을 배신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1941년 이후의 이승만의 우려는 미국이 한국을 소련에게 넘겨 버릴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는 소련의 한반도 진출로 인한 공산화의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이 시기의 이승만의 대미외교를 통한 국가생존전략은 태 프트-가쓰라 밀약을 거론하여 미국의 양심을 건드려서 미국이 다시 한국을 배신하지 않도 록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IV. 해방 이후 건국시기까지의 국가생존 전략(1945. 8-1948. 8)
이승만이 1945년 10월 귀국 이후 미국과 처음으로 대립하게 되는 지점은 바로 신탁통치
였다. 이미 1943년부터 신탁통치에 반대해 온 이승만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입장은 그대로 이어졌다. 한국에 대한 미·영·중·소의 신탁통치를 공식화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 이 1945년 12월 28일 알려지자 이승만은 신탁통치안에 대해 맹렬히 비난했다. 공산주의자 들의 탁치론은 궁극적으로 한국을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드는 음모라는 것이었다(우남실 록편찬회 1976, 140-141; 동아일보 46/01/02).
1945년 말까지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던 이승만과 미군정은 1946년 봄 미 소공위 개막을 앞둔 시점부터 갈등관계로 접어들었다. 미군정사령관 하지(John R. Hodge) 는 미·소공위의 성공을 위한 분위기 조성을 위해 이승만의 활동에 제약을 가하기 시작했 고(양동안 2002, 204), 미 국무부는 1946년 2월 이승만을 배제하고 미국의 정책 실행에 도 움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진보적 지도자들을 물색해서 그들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대항하는 집단이 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 이러한 지시는 좌우합작 정 책으로 가시화되었고, 반소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은 좌우합작 정책에 처음에는 미온적으 로 대처하다가 1946년 10월 좌우합작7원칙이 발표된 후 부정적인 생각을 드러냈다. 이승만은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5월 무기 휴회되자 남한만의 단독정부론 구상을 1946년 6월 3일 정읍발언을 통해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즈음에는 이미 북한에 사실상의 정권기관인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설립된 시점이었다. 이승만의 정읍발언이 보도되자 남 한의 주요정당 단체들 가운데 한민당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제외한 좌우익 모든 정당 들이 그에 대해 비판하고 나섰다. 미군정도 그에 대해 강력히 비판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에 개의하지 않고 호남지역 유세 중 남한단정에 관한 소신을 거듭 피력했다.
신탁통치 문제와 남한단독정부 수립 문제로 미군정과 갈등을 빚게 되자 이승만은 상황 을 반전시키기 위해 1946년 12월 초 미국을 방문하여 4개월 동안 도미외교를 펼쳤다. 서울 을 떠나 동경에 도착한 후 이승만은 기자회견에서 미·소의 협상을 통한 통일정부의 수립 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소련이 점령하고 있는 북한에는 ‘사실상의 정부’가 이 미 수립되었기 때문에 “남한도 그와 같이 되어야 한다”(우남실록편찬위원회 1976, 191)고 역설했다. 1947년 1월 27일 이승만은 측근인 올리버를 통하여, ‘한국문제의 해결방안’이라 는 자신의 구상을 담은 문건을 국무부에 전달했다. 6개항으로 구성된 이 문건에서, 이승 만은 남한에 과도정부를 수립하고, 그 과도정부가 양분된 한국이 재통일될 때까지 국정을 수행하며, 나아가 한반도의 점령과 다른 중요한 현안들에 관하여 미국과 소련을 상대로 직접 협상하도록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미소의 점령군이 동시에 철수할 때까 지 미군은 남한에 주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승만은 자신의 해결방안에 대해 국무부의 견해를 전달받고 싶어 했지만, 빈센트(John Carter Vincent) 극동국장은 올리버를 통해 그 와 같은 기대를 포기하라고 말했다. ) 국무부는 소련과의 협력을 통해 한국문제를 해결하 려 하였기 때문에 이승만의 제의를 수용할 수 없었다.
이승만이 도미하여 외교활동을 펼칠 때 트루먼 대통령이나 미국의 유력한 정치인들을
만나 자신의 생각을 직접 피력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도미외교를 성공적인 것이라고 평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국의 재계나 군부에서는 이승만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 다. 특히 국무부차관보 힐드링(John R. Hilldring)은 미국 재계의 초청으로 3월 10일 디트 로이트에서 행한 연설에서 한국의 전략적 위치와 한국을 끝까지 지킬 것이라는 국무부의 결의, 그리고 당시 한국이 처해 있는 곤경의 실제와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야심 등을 설명 하여 이승만에게 미국 정책의 변화를 기대하게 만들기도 했다(우남실록편찬위원회 1976,
198-200).
이승만의 도미외교의 직접적인 성과 때문은 아니었지만 1947년에 들어서 미국의 정책은 수정되기 시작했다. 미국은 남한 현지사령관 하지와 육군부의 조기철군 주장을 수용하여, 소련과의 협력을 통한 민주적인 통일정부의 수립이라는 기존의 정책을 점진적으로 철회 하고, 한국문제를 국제연합의 문제로 만들어, 남한에서 ‘명예롭게’ 철수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미국의 종래 방침인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현실적 으로 포기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 전환의 신호탄이 될 수 있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rine)이 1947년 3월 12일 발표되었다. 트루먼 독트린이 선포된 직후, 이승만은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 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남한의 군정당국이 트루먼의 정책을 따르고, 그리고 민족주의자 들과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연합과 협력을 추구하는 남한 군정당국이 그 노력을 포기하라 는 지시”를 내려 줄 것을 요청하면서, “남한에 ‘과도적 독립정부’를 즉각 수립하는 것이 공 산주의의 팽창을 막는 방파제가 될 것이며, 나아가 남북한의 통일을 실현시켜 줄 것”이라 고 주장했다. ) 이에 대해 트루먼과 국무부는 이승만의 요구를 묵살하고 답신도 보내지 않 았다.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 발표 이후에도 제2차 미소공위를 재개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하 였으나 공위가 1947년 8월 사실상 결렬되자, 1947년 9월 말 국무부와 국방부는 한반도에 서 “명예롭게, 그러면서도 가능한 신속하게” 철수해야 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되었 다. 신탁통치는 포기되었고 한국문제는 유엔에 이양하기로 결정되었다. 이후 유엔의 결정 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통해 남한에는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수립은 이승만의 단순한 권력욕의 소산이 아니라 북한의 공산 화 상황을 염두에 두고 나온 현실적인 차선책이었다. 이승만의 노력으로 미국의 정책이 바 뀐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미국은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이승만 노선을 수용하는 것 외에는 다른 마땅한 현실적 대안이 없었다. 결국 이승만이 미국을 주도한 격이 되었다. 1948년 7월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 자 미군정 고문 제이콥스(Joseph E. Jacobs)는 워싱턴에 보내는 한 전문에서 “과거 미국의 행동들은 결국 이승만 우익 정치집단의 지배를 가져오는 데 기여했다” )고 언급하여 위의 사실을 인정했다.
V. 건 국 이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시기까지의 국가생존 전략 (1948. 8-1953. 8)
1948년 8월 대한민국이 출범한 이후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1949년 초부터 장면 주미 대사와 조병옥 특사로 하여금 미국 정부를 상 대로 북한을 능가하는 국방군을 육성하는 데 필요한 군사원조를 요청하고 상호방위조약 체결의 가능성을 타진하였지만, 미국은 이승만의 요구를 충족시킬 생각이 없었다(이호재
1982, 448-450).
1949년 5월 중순 남한주둔 미군 철수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자 이승만은 미국 측에 다 음 세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즉, 미국이 한국과 북대서양조약과 유사한 태평양조약을 체 결하거나, 한·미 간에 상호방위협정을 체결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한국을 방위하겠다는 약속을 공개적으로 선언할 것을 요구했다. ) 그러나 미국은 이 요구도 역시 들어주지 않고 한국과 1950년 1월 ‘상호방위원조협정’을 맺는 것에 그쳤다.
이승만이 기대한 미국의 군사지원이 실현되지 않은 상태에서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
고 1951년 7월 10일부터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개시되었다.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진 1952년 3월초 이승만은 트루먼에게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지 않으면 한국군은 단독으로 북진통일 하겠다는 공한을 발송하여 트루먼을 위협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승만의 단독 북진을 ‘공상’이라고 일축하고 이승만의 조약체결 제의를 묵살하였다(차상철 2004, 348).
1952년 선거에서 전쟁의 조기 종결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미국의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이승만은 1953년 4월 14일 편지를 보내 상호방위조 약 체결을 제의했고(한배호 1982, 7, 165), 4월 30일과 5월 12일에 각각 서한과 면담을 통 해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Mark W. Clark) 대장에게 한국으로부터의 중공군과 미군의 동 시 철수를 조건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제의했다(한배호 1982, 165-166). 이승만의 거듭된 제의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 대통령, 덜레스(John F. Dulles) 국무장관 및 콜린스 (Joseph L. Colliins) 육군참모총장 등 미국의 전쟁지도자들은 한결 같이 한국과의 상호방 위조약 체결에 반대했다(차상철 2002, 295). 미국은 공산군의 재침을 억제하고 휴전 후 한 국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한·미 간에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대신에 16
개 유엔 참전국들 명의로 ‘확대제재선언(the greater sanction declaration)’을 공포하고 동시 에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시켜주는 것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1953년 6월 6일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과 미·필리핀조약이나 ANZUS조
약에 준하는 방위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협상을 개시할 용의가 있다고 통보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휴전 성립 ‘이전에’ ‘미·일 안보조약’에 준하는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줄 것을 기 대한 이승만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미국이 한국 측의 요구를 충분히 존중하지 않는다 고 판단한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6월 16일 반공포로 2만 7000명을 유엔군 사령관 동의 없이 독단적으로 석방하였다(유영익 2005, 158-161). 이승만 의 벼랑 끝 전술의 절정판이었다.
이승만이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극단적인 카드를 꺼내들자 미국은 국무부의 극동문제
담당 차관보 로버트슨(Walter S. Robertson)을 대통령 특사로 서울에 급파하여 그로 하여 금 이승만의 의중을 살피면서 상호방위조약 체결 협상을 벌이도록 조처하였다. 이승만은 로버트슨을 맞아 6월 26일부터 7월 10일까지 2주간 ‘작은 휴전회담’을 벌였는데, 7월 3일 회담에서 이승만은 로버트슨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미국을 압박했다.
우리는 미국을 확고히 신임했지만 과거에 미국으로부터 두 번씩이나 배반당했습니다. 즉, 1910년에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했을 때와 1945년에 한국이 분단되었을 때입니다. 현재의 상황은 다른 하나의 배반 같은 것을 시사합니다. )
이승만은 이렇게 과거 미국이 한국에 대해 저지른 배신행위들을 들추어내어 미국 대표 의 양심을 건드리면서 법적 구속력이 있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집요하게 강요했 다. 이승만은 식민지 시기, 특히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이후 미국에게 자신의 요구를 관철 시키고자 할 때 썼던 표현, 즉 미국의 배신행위에 대한 언급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로버트슨은 7월 1일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전문)에서 이승만이 ‘빈틈없고
책략이 풍부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기 나라를 국가적 자살행위로 몰고 갈 충분 한 능력이 있는 매우 감정적이며, 분별력이 없고, 비논리적인 광신자’이지만, 그의 철저한 반공주의와 불굴의 정신은 지원 받아야 마땅하다고 지적하면서, 회유와 압력이라는 양동 전략을 통하여 이승만의 협력을 얻어내는 것이 아직도 가능하다고 보고했다. )
이승만과 로버트슨과의 회담에서 보여준 이승만의 압박과 벼랑 끝 전술 덕분에 미국은
이승만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과정에서 보여 준 노련한 전략은 로버트슨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는 훗날 “그[이승만]는 우리[미국]를 궁 지로 몰아 넣었고, 그리고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술회하였다. ) 마침내 1953년 8 월 8일 변영태 외무장관과 델레스 국무장관은 서울에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 방위조약’에 가조인하였고 양국 국회의 비준으로 상호방위조약은 1954년 11월 17일 정식 으로 발효되었다. 이로써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배신’으로 한국 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뼈아픈 과거를 결코 잊지 않았기에 한국의 독자적 방위를 위 한 군사력 증강이 절실하다고 믿었던43) 이승만의 꿈은 실현되었다.
VI. 맺는말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승만이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한 후 1910년 한국이 식민지로 전락할 때까지의
시기에 이승만은 기본적으로 친미적인 사고에 입각하여 무력투쟁이나 의열투쟁보다는 외 교와 실력양성을 바탕으로 한 독립유지 전략을 구사하려고 하였다. 이때 이승만이 중시한 개념은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에서 제시한 통상의 자유에 기반을 둔 교역상의 중립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은 1919년 당시의 위임통치청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둘째, 1910년 이후 1945년까지의 시기는 다시 세 개의 작은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1910년부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이승만은 자력에 의한 독립이 어렵다
고 보고 일본으로부터 자치를 얻어 내어 장기간 실력양성을 한 후에 독립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국의 기독교회 네트워크를 통한 외교가 매우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1939년까지의 시기의 이승만의 독립운동 전략 은 대미외교를 통한 한국의 독립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력투쟁이나 독립전 쟁을 전혀 무시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미일간의 전쟁과 같이 유리한 국제정세가 도래하 였을 때 독립전쟁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의 연장선상에 서 한국이 통상의 자유를 누리는 교역상의 중립국을 보장받은 후에 실력을 양성하고 최후 의 시기에 독립전쟁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는 방식을 구상했다. 이것은 그가 3·1운동 직후 에 제출한 위임통치청원의 구상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1939년 이승만 이 미국 본토로 건너와서 1945년 귀국할 때까지의 시기에 그는 미일전쟁의 발발로 유리한
8에서 재인용.
43) Rhee to All diplomatic officials, 14 August 1953, Rhee Papers. 차상철(2008) 295쪽에서 재인용.
국제정세가 도래하였다고 보고 미국에 대한 맹렬한 외교공세를 펼쳤다. 그는 그 이전 시기 에 비해 미국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난하였고, 소련의 팽창 야욕을 계속해서 미국에게 경고 하였기 때문에 그의 노선은 미국의 미소협조노선과 큰 마찰을 빚었다.
셋째, 건국의 시기에 이승만은 미국의 신탁통치노선, 좌우합작 노선에 맞서 자신의 남한
단독정부 노선을 관철시키려고 노력하였고 마침내 이를 달성하였다. 그의 단독정부 노선 은 자신이 예전부터 꿈꿔 왔던 미국식 기독교 민주주의 국가를 차선책으로 실현한 것이었 다. 따라서 그의 단독정부노선은 단순한 권력욕의 산물이 아니라 평소의 자신의 신념의 발 로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 시기에 미국은 이승만의 노선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면에서 이승만의 국가생존전략은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넷째,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후 이승만은 한국의 안보를 미국으로부터 문서상으로 보증
받으려고 애썼다. 이것은 그 이전 시기의 미국의 배반 때문에 미국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 이었다. 이승만은 휴전 후 단독북진이라는 벼랑 끝 전술과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으로 미국을 압박하여 마침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것은 이승만 이 젊은 시절부터 꿈꿔 왔던 영토적 야심이 없는 미국과 연합하는 연미책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고, 구한말 이래 미국이 행한 배신이라는 우려에서 벗어나 한국의 안보를 문서상으로 확고하게 보증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섯째, 이승만은 미국을 압박할 때 두 가지 수단을 주로 이용하였다. 하나는 미국이 기
독교 국가이기 때문에 아시아의 대표적인 기독교 국가인 한국을 도덕적으로 도울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아직 파기되지 않은 것이기에 여전히 유효하며 미국은 제1조 거중조정 조항에 따라 한국을 법적으로 도울 의무가 있다 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 시기에 미국이 거중조정 조항을 지키지 않은 사실을 기회 가 있을 때마다 지적하여 미국의 양심을 압박하였고, 태프트-가쓰라 밀약의 존재가 드러 난 후에는 그 압박의 강도를 더 하였다.
투고일 2012년 8월 30일 심사일 2012년 9월 07일 게재확정일 2012년 9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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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Syngman Rhee’s Strategy of National Survival by U.S.
Diplomacy (1875-1953)
Chul Soon Lee | Pusan National University
This paper examines Syngman Rhee’s strategy of national survival by U.S. diplomacy from 1875 to 1953. Even though his U.S. diplomacy could not show visible outcom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he succeeded in establishing the Republic of Korea under the unfavorable conditions and securing a U.S. guarantee of Korea’s national security in writing by singing the R.O.K.-U.S. Mutual Defense Treaty with the U.S. in 1953. Accordingly, his strategy was successful. The method he used in conducting his US diplomacy was to persistently point out the betrayal of U.S. failure to live up to the Treaty of Amity and Commerce of 1882, which stipulated the duty to exert “good offices” to help the other in need.
Keywords: Syngman Rhee, the United States, US diplomacy, strategy of national survival, good offi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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