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28

[이영훈의 역사비평] 이승만 공7과3론의 허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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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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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자유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스마 tv의 시청자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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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오늘날 우리 한국인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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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이나 소속 정파에 따라서 극과 극을 달리고 있습니다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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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이승만에 대해 우호적인 진정의 수조차 이성만 대통령의 말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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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말해 1956년에서 1960년까지의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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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과 사선은 없었더라면 좋았을 과오라고 공통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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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의 존경하는 보컬 선생께서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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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대하 소설로서 물로 쓰여진 이름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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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출간하였습니다 복선생은이 소설 제 4층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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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 이승만의 과오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탁월한 지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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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도덕성의 인간도 늙으면 생리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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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과 도덕성이 감퇴할 수밖에 없는데 바로 이승만이 그러하였다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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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과 6.25 전쟁 방어와 한미동맹의 체결로 그의 역사적 사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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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되었다 그 단계에서 그는 헌법이 정한 바에 따라서 권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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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났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리하게 정신 집권을 허용하는 이른바 445인으로 불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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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개정을 강행하고 1956년 삼선 대통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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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준이는 시민들의 뜻을 따라 사회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이념이다 한 사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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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집권을 받기 위한 대통령 삼성 금지는 그런 원리를 실천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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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규칙이다 그런데 이승만은 그 규칙을 허물었다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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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숭고한 가치로서의 권력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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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으로서의 권력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회복을 선생은 이승만을 비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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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습니다이 선발에 대한 이같은 비판은 보컬 선생에게 고유한 것은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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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많은 연구자가 오래전부터 그런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이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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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를 선거적으로 개척한 바로 며칠 전에 작고와 하신이 유형이 교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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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공이치리라면 과하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마리 업적을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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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으로 평가해온 건국대학의 이주영 교수 이승만과 그의 시대라는 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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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이승만은 권자의 서대려 올 기회를 잃었다고 아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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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습니다 오늘 저는이 같은 이승만에 대한 통설적 이해와 비판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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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이 일을 피력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역사 비평의 제목을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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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칠과삼론 그 유형의 선생님 말씀하신 그 공치를 과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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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성으로 붙인 것은 그러한 취지에 있습니다 우선 지적해야 할 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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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사이 컨템포러리 히스토리의 어려움입니다이 벚꽃 선생이나 유행이 선생이나 이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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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나 또 기타 이승만의 말년에 가을을 지적하는 우리 많은 한국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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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은 그 50년대 후반을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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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분들은 역사이기 이전에 그 시대를 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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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서 나름의 체험과 나름의 기억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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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그 시대에 관한 역사를 스스로 할 때 부집을 습관에 나름의 주관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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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그 속에 압축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주관적 기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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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대사는 과연 역사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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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가라는 지금은 저는 어느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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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아웃사이더와 같다 그렇게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가 관찰하고 서술하고자 하는 그 시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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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렬로부터 빠져나와서 마치 홀로 높은 산이나 언덕에 올라가서 그 시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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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여를 앞과 뒤를 길게 관찰하는 그러한 자세 그러한 아웃사이들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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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아웃사이더 지닌 입장에서 저는 1950년대 후반들을 것이다 뭐 초등학교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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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이었습니다만은 그 시대에 대한 구체적인 개인적인 주관적인 기억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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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나 아웃사이드적인 입장에서 50년대 후반 이승만 대통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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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집권을 그의 개인적인 권력욕에 다시다 감퇴한 도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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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릴 수 없으며 거기에는 역사적으로 오랜 세월 켜켜이 쌓여온 모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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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피한 작용이 있었다 저는 그렇게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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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보컬 선생님께서는 민주주의를 시민의 자유의사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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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이 이루어지는 정치제도라고 했는데 이스만의 3000년이면 그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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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기초를 허물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1950년대 그때 우리 한국에 이제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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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이었습니까 이런 질문을 제기할 수 있어요 자유와 독립의 정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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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을지는 그런 시민이었을까요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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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점에 의문이 있습니다 이승만이 민주주의 제도의 기초를 허물었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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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기초가 성립에 있기나 했던 것입니까 헌법이 성립했다고 해서 그 기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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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적으로 자생적으로 자동적으로 성립했다고이야 할 수 있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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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1950년대 한국 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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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정치의 제도 민족 통일의 방안 경제개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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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식 등에 관한 국민적 합의가 성립해 있지 않는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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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과 조정이 불가능한 근본적인 대립 일종의 종교적 대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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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되고 오히려 강화되는 추세였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평화로운 정권 교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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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합니다 오히려 무리한 자기적인 정권 교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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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의 결과를 초래하기 십상인 그러한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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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를 관찰한 근본적 대립에 첫째로서 저는 정부 형태를 둘러싸고 벌어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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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제와 내가 책임제의 대립을 들 수가 있습니다 다 잘 아시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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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소집된 지은 국회가 헌법을 제정하면서 모색한 정부 형태는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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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지었습니다 당시 이수만 국회의장은 그의 강력히 반발하면서 그것을 대통령 중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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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로 둘렀습니다 이후 2년간 국회의 한민당과 미국당을 중심으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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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이승만 세력은 두 차례나 내각제 개헌안을 국회 제출했으며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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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그의지지 세력도 두 차례나 국민 직선제를 포함한 대통령 중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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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습니다네 번이나 서로서로 개헌안을 제출했는데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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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결국 1952년 부산 정치 파동을 통해서 대통령 정신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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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제를 어중간하게 절충한 그러한 이른바 발췌 개헌안이 제1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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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개정으로 성립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가 끝난다 그 2년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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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이스만 대통령은 이른바 제2차 헌법 개정 이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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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5의 바로 거기서 국무총리제의 폐지를 비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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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형태의 대통령 중심제 정부 형태를 성립시켰습니다 동시에 국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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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혜원과 참회원의 양현자로 개편하였습니다 곧 미국식 정부 형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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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 형태였습니다 그것은 이승만이 젊은 시절부터 추구한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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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가 성립을 당시에도 임시 대통령으로서 관철한 그의 소실이자 고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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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1954년 대통령 중심제 개헌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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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은 결코 그와 같은 이승만 대통령의 소신과 고집에 세포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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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습니다 1955년에 야당 세력이 통합해서 만든 민주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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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 책임제를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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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을 대통령 선거에 공약으로 내걸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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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1956년 그 대통령 선거에 나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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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고 기존 헌법에 따라서 재선에 만족하고 삼선을 포기했더라면 아마 야당으로 정권이 개최되었을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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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고 그렇게 되면은 그것은 단순히 평화적 정권 교체를 넘어서 정부 형태가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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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중심지에서 내가 책임제로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승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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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에서 충분히 예상되는 그와 같은 변화는 그가 평생에 걸쳐서 추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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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과업을 포기하는 일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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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각 책임제 정부는 민주정치의 전통과 제도한 불비 우리 한국의 여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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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를 망친 사색 당정이 부활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점은 이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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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적용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난 뒤 19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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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 성립한 장면 민주당 정권은 5.16이 발생하는 1년도 안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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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간에 무려 여섯 차례나 개각을 하였습니다 민주당 내에 심파와 우파의 전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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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하고 신파와 우파 내에서도 두게 되지 세계의 소규모 정파가 성립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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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각축한 그러한 결과였다고 하겠습니다 이 점은 1948년 대한민국의 성립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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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초창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48년 8월에서 6.25 전쟁이 발생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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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6월 사이 34개월간 13개 지계 장관 자리를 거쳐간 사람은 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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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명이나 되었습니다 결국 48년 이후 1950년대 60년대 초파제를 관찰한 한국 정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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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은 제한된 국무총리나 대통령이나 장관직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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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직을든 정치인들의 역관 활동 벼슬 추구 활동을 크게 벗어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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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던 것입니다 한국 정치사에서 대통령 중신자와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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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제에이 비생산적인 논쟁이 종식되는 것은 1962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한 제5차 개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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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해 했습니다 당시 박정희 군사 정부가 대통령 중심제 정부 형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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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안으로 제시했을 때 그토록 대각 책임제를 주장해 온 민간 정치인이나 언론을 그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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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의 입을 닫았습니다 내가 책임제의 실패를 너무나 처절하게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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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1950년대에 민주당은 내가 책임제를 그들의 불변의 소신으로 추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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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야당에게 건국의 주인공 이승만은 무책임하게 정권을 넘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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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대한 개인적인 도덕심에 타락 감퇴했다는 근력욕의 결코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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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국의 정체성에 관련하여서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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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잘못 설계된 정치 제도가 정장에 수단으로 활용되는 저속한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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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토로 인해 발생하는 근본적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맛보다 쉽게 이야기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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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직적으로 말씀드려서 부통령제로 인한 전쟁의 격화라고 하겠습니다 당초 제헌의 부통령제를 설치한 것은 대통령 이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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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전개의 유력자를 부통령으로 앉혀 놓으면 전국의 안정에 도움이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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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라는 발상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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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잘못된 엉뚱한 발상이었습니다 부통령은 아무런 권한이 없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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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통령은 대통령이 죽거나 유고시에 국회가 다시 대통령을 선출하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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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기간에 대통령직을 대행하는 역할밖에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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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건재하는 한 사당의 신조어 같이 조용히 있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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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은 전개의 유력자로서 사당의 신조처럼 조용히 앉아 있을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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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었습니다 초대 부통령 이시영은 6.25 전쟁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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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에 의한 거창 양변 학살 사건이 반발하자 그의 항의에서 부통령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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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하였습니다 그 사건의 대통령이 책임이라고도 보기도 힘듭니다 부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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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사임할 때 대통령과 하덕의 상의도 없었습니다 국회에서 여러 사람들이 그렇게만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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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된다고 말로 했습니다만은 이시영은 끝내 듣지 않고 부통령직을 사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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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의 정치적 해결을 한 것이죠 그리고 나서 그런 곧이어 대통령 선거에 당시 미국당 후보로서 출마했던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1952년 제1차 개혁대에 발생했습니다 당시 대통령 직선제가 만들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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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에서 부통령 직선제도 덩달아 성립하였습니다 부통령은 당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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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대통령과 한 팀으로 곧 런닝메이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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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마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부산 정치파동의 황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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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편 때문에 부통령이 진인 정치적 역할에 대한 정치가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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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야심과 모략 때문인지 아무런 실권이 없는 부통령을 국민이 직선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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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제도가 성립하고 이 기이하기 짝이 없는 부통령 직선제가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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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발생시킨 것이 바로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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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였습니다 선거 결과 1956년 대통령은 자유당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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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통령은 민주당 장면이 선출되었습니다 당시 선거 직전에 신익희 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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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후보가 사망하였습니다 그러자 민주당은 부통령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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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이 차지해야 대통령의 독재를 막을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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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이 80을 넘긴 초고령의 이승만이 언제 고충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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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기 때문에 민주당이 부통령이라도 차지해 두어야 자유당의 장기 직권을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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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치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논리였습니다 그 결과 이승만 대통령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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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부통령 사이에는 그 기회 대명한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자유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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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렬 당원의 소행입니다 있지만 장내 부통령을 적용하는 사건까지 벌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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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이후 59년까지 대통령과 부통령이 한 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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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닝메이트제로 출마하도록 헌법을 고쳐야 한다는 공론이 일고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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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간에 그러한 공감대가 성립해서 야당의 내각 책임제 주장까지 포섭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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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이원집정부제 비슷한 내용으로 헌법을 개정하자 그래서 예견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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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을 수습하자는 여야에 온건파 사이에 협상이 진행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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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과 야당의 강경파의 반발로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다 잘 아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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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 자유당의 강경파는 부통령 선거에서 부정 선거를 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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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에게 부통령직을 내어줄 수는 없다는 그들의 절박한 심정이 공공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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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 선거를 획책하게 했고 이런 국민적 분노를 이야기하여 결국 4.19를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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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4.19는 이승만의 장기집권에 대한 국민적 분노라기보다는 잘못된 정치
제도가 정략적으로 이용되는 가운데 여야간에 전쟁이 무한 격화함으로써
야당의 권력을 넘겨줄 수 없다는 자유당의 강경파에 그러니까 이승만 대통령의
큰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 부통령을 야당의 결코 넘길 수 없다는 자유당
강경파에 무리한 집권 연장 책으로 부정 선거가 자행되고 그로 인해서
발발한 정치적 병거였습니다 

그 일차적 책임에 물론 대통령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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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에 있습니다 그렇지만은 동시에 충분히 예상되는 파국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오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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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설계된 정치제들을 이용해서 직권을 누리며 전쟁을 과속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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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에게도 못지않는 책임이 있음을 부정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50년대를 관철한 또 하나의 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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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으로서 셋째는 바로 민족 통일 문제를 둘러싸고 남북협상을 주장하는 급진 세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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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두입니다 다름 아니라 조봉환과 그의 진보당 세력의 대두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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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은 조선공산당의 창당 멤버로서 원로 공산주의자였습니다 해방 후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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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의 영수 박은영의 과격한 급진 노선에 반기를 들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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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 인해서 조선공산당을 떠났습니다 그는 북한으로 올라간 박한영과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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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잔류했으며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는 1948년 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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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인천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된 다음 국회의원으로서 의정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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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발탁되었으며 6개월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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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으로 취직하면서 농지개혁안을 수입하는데 일조를 하였습니다 조봉암이 정치적 거물로 성장하는 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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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이 만들어낸 그의 소신이 관찰한 대통령 직선제가 중요한 역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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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습니다 그는 1952년 대통령 직선거에 출마하에서 미국당 후보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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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원로인 이시영을 능가하는 11.4%의 득표율을 보였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전개의 유력한 인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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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그는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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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마하여 민주당의 신의 기후보가 심장마비로 급소 하는 통에 그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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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표까지 더하여서 이승만의 55.7%에 비해 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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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에 해당하는 표를 획득하였습니다 선거구를 단위로 해서는 이승만의 득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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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하는 도시가 전국적으로 16군데로 되었으며 새론에서는
관건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사실상 조봉암 이겼다는 그런 이야기가 들리
퍼질 정도였습니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이 조봉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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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에 11%에서 23%로 크게 그 지지율을 2배로 올리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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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에는 그의 선거 공략 가운데 화평통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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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성향의 유권자들을 결집하는데 큰 힘을 발휘했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해서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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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자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1953년에 6.25 전쟁을 정결시키면서 체결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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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협정은 한반도의 통일 문제를 위한 국제회의를 개최한다고 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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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따라서 1954년 5월 달에 제네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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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참전 16개국과 북한 중국 소련이 참가하는 해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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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렸습니다이 회담에서 공산척은 un의 권위를 부정하고 남북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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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와 극우 세력이 배제된 정치 사회 단체가 대등한 비중으로 참여하는 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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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회 같은 것을 구성해서이 위원회에 감시하에서 남북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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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거를 실시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국회와 헌법을 구성할 것을 제의했습니다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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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이같은 통일 방안을 이른바 평화통일론이라 꼭 포장을 해서
1955년부터 대납 공작 라인을 통해서 널리 우리 남한 국민을 상대로
선전하기 시작하겠습니다 

그 같은 그 공산척에 주장의 맞서고 제네바 회담에서 한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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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가 된이 UN 연합군 측은 유엔 감시하에서 남북한의 총선거를 실시하되
21:13
북한에서 자유총선거를 실시하며 남한스는 이미 유엔 감시하에 자유총선거에 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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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성립했으므로 대한민국의 법에 따른 자유총선거를 실시한다
21:25
그렇게 해서 남북에서 자유 정글을 실시하는데 선거는 철저한 인구 비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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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에 의거해야 하므로 먼저 북한의 인구가 얼마인지 알아야 되겠다 북한에서 먼저 인구조사 쇠사슬을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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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하자 그렇게 해서 인구비례에 기초한 자유 보통 비밀 선거를 통해서
21:44
새로운 국민의 대표가 서울에서 국회를 소집하고 그 국회가
21:50
새로운 요법을 제정할지 말지 새로운 대통령을 뽑을지 말지를 결정하자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미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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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시한 참전 16개국은이 같은 한국의 입장을 지지했습니다 이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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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평화통일 13개 항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국의 평화통일 13개항은 북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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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과 동등한 위치에 두지 않고 인구가 절반이므로 절반의 정치적 비중만을 허용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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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인구 비례의 원칙에 건강한 자유 총선거를 실시하여 북한에서 공산 체제를 사실상 해체하는
22:24
부정할 수밖에 없는 대단히 어떤 그러한 그 통일 방안이었다고 볼
22:30
수 있습니다 근데 이승만 대통령이 제네바 회담에서 국제적으로 공포한 평화통일 방안은
22:36
사실상 북한의 공산 체제를 다수 주민의 자유의사를 억압하는 불법 체제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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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하고 그것을 몰아내고 북한 주민을 그로부터 해방시켜야함을
22:48
기본 취지로 하였습니다 그 통일 방안을 두고 이승만은 대내적으로는
22:54
북진 통일이라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조봉암은 이러한 이승만을
23:00
중심으로 한 우리의 건국 호국 세력의 통일 방안에 정면으로 도전을 했습니다
23:06
6.25 전쟁을 치르고 제네바 회담에서 공산책에 공세를 방해하면서 정치한 전쟁으로 희생된
23:14
백만장병의 피로 쓰여진 통일 방안입니다 그것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23:20
1956년 선거에 출무한 조봉암은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23:25
화평통교를 외쳤 이승만은 평화통일이 있느냐 나도 평화통일환이 있다 이런
23:31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남북한에 걸쳐서 조국의 통일을
23:36
저지하고 있는 극우 극좌 남북한에 걸친 거구 극좌 불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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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을 억제하고 유행감 시야에서 총선거를 다시 실시하자 이렇게 주장을
23:48
했습니다 조봉원과 진보당의 그 화평통일환에 대해서 자세하게는 제가 다음 시간에 그 조봉암 사건을 다시
23:54
한번 되돌아보면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이승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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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통일 안과의 본질적인 차이점을 그 지적하는데 그쪽에 있습니다만은 남북한이 대덕한 입장에서 협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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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는 것입니다 남북한의 국회 세력과 기타 진보적인 사회 단체를 포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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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국위원회 같은 것을 구성해서 자유총선거를 실시하고 국가를 다시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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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조봉하면 사실상 이승만을 위시한 우리의 건국 세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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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저해한 극우세력으로 매도한 가운데 북한 공산 체제의 존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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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정사실화하고 그 합법성을 기정사실하고 대등한 지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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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을 주장하였습니다 

그가 비록 유엔 감시하에서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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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방패막을 세우긴 했습니다만은 그것은 이승만의 통일 방안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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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을 통해서 백만장병들의 희생으로 피로스 세워진 그 통일 방안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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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조동하면 김구 김규식 저수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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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망섭 등 건국 당시 대한민국의 건국을 반대하고 수립을 반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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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검과의 협상을 주장한 세력들과 사실상 계보를 같이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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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방안을 내세웠고 바로 그로 인해 그 계통의지지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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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속해서 약 24.5%의 높은 지지율을 획득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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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승만 대통령이 1956년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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봅시다 그럴 대신해서 자유당에서 이기봉 후보가 나오고 민주당에서 신의 기후보가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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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창당중인 진보당에 조봉암이 출마했다 칩시다 그리고 신익기 후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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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그렇게 했듯이 급소 했다고 합시다이 기분과 조봉암의 대결에서 조봉암이 승리할 가능성은 부정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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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습니다 오히려 충분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역사에서 가정은 없다고 합니다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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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조봉암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북한으로부터 지원을 받았습니다 뭐 그런 혐의로 인해서 결국은 사형을 당한 비극적인 어떤
운명을 맞았던 사람입니다만은 북한의 지원을 받고 대통령의 출마한 그런 사람이 북한과의 대등한 협상을 통해서 새로운 국가를 세우자라는 공약을 있고 그 공약으로 인해서 대통령이 되었다고 했을 경우에이 나라가 어떠한 커다란 혼란 속에 빠질지는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다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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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 대한민국의 전도에는 커다란 위험이 잠복해 있는 그런 상황이었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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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성은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의 삼선에 의해서 차단이 되었습니다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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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오래 지려서 그건 30년이 지나서 그와 같은 급진 세력이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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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하기까지이 나라는 상당 기간 동안 통일 문제를 중심으로 훼손한 국가 정치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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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를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4452 병과 이승만 대통령의 삼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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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으로부터 그것에 비난의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마는 

결과적으로는 민주 정치 제도의 무임승차하면서 바로 가는 좌파 세력의 도전으로부터 우리의 국가 체제를 방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이승만은
스스로 내려올 수 없는 호랑이 등에 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황인은 정부 형태를 둘러싸고 또  민족 통일 방안을 둘러싸고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전쟁으로 분열 대립한 한국 정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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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내려오면은 그 호랑이의 잡혀 버틸 수밖에 없는 그러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승만이 삼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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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했다라면 대통령 중심제 정부는 내가 책임제 정부로 바뀔 것은 명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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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었습니다 이승만이 삼손을 포기했더라면 남북이 대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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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에서 협상을 통해서 다시 말해서 자오 업자에게 통일국가를 만들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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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 세력의 공산화 전략이 곧바로 실현될 수 있는 길이 일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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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있을 것입니다 종합하겠습니다 6.25 전쟁이 종결되고 한미동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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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했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토대가 민주정 기초가 확립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한민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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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껍질 뿐이었습니다 시민 계층의 성립은 무척이나 취약한 상태였습니다 정치는 본질적으로 유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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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이 벌이는 여권 활동으로서 전쟁 단경의 수준을 억지 않았습니다 대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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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정신문화도 여전히 혼타가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국민을 통합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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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방향으로 국가를 이끌어가는 정치적 리더십은 거의 대부분 이승만 대통령이 개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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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으로부터 얻고 있는 카리스마를 주요 원천으로 하였습니다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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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집권 12년간 전국적 규모의 선거가 무려 9차례나 실시되었습니다 다수의 국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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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 이상의 국민은 많게는 70% 이상의 국민은 이승만의 카리스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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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으로 수용하는 이른바 준봉 선거의 형태를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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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중봉 선거를 통해서 이승만은 그의 만들기 청사진 그가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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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왔던 선지민주 국가의 청사진을 하나하나씩 관찰해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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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을 끝내 독재자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잘 알려진 독재자들이 그러했듯이 자신을 둘러싼 독재 체제를 구축하지 않았습니다 국회의원 대통령 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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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회 선거는 법정 기일에 한 차례도 그러지 않고 꼬박꼬박 치러졌습니다 전쟁 도중임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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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자유는 무한정보장되었습니다 결사 집회 출판 문의 자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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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장되었습니다 사법부의 독립도 충분히 허용되었습니다 그에겐 국가 사회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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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 석가 그가 이끄는 대한 청년단과 같은 초등 세력이 있었습니다 대한 청년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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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는 무려 110만에 달했습니다 이승만이 마음먹기 따라 그들을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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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친히 부도로 조직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은 이승만은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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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자에서 이범석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런 오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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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그에게 특별히 부유한 축복으로서 그가 국민에 대해서 보유하고 있는 카리스마를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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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목표를 관찰하는 정치적 자원과 수단으로 활용하였을뿐입니다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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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그에게 강요한 십자가를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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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릅니다 근데 그 시대의 정치적 모습은 너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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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했고 그것을 감당한 정치적 자원은 너무나 빈약했습니다 

저는 그 시대의 아웃사이더로서 그 시대를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해방 건국전쟁
동맹 전후 복구 교육혁명 등을 관철한 당대의 주요 정치적 결정과 선택은
거의 이승만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였습니다 

역사가 그에게 특별히 허락한 정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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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이었습니다 그 자원은 1956년 당시에도 포기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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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경우 형태에서뿐 아니라 남북통일의 방안에 이르기까지대 혼란이 발생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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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쓰러진 이후에 어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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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가 발생했는지를 보아서 충분히 단언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제 종합하겠습니다 이승만의 장기지권은 1895년부터 시작된 그의 혁명가
일상에서 호랑이같이 살았고 그치는 역사가 그에게 강요한
십자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승만의 말년은 그의 장기지권은 어느
의미에서는 최후의 봉공이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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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이야기되는 이승만의 07과3로는 너무 경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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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적인 접근의 결론이라고 볼 수가 없으며 07과 3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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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갈 필요가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 장시간 경청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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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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