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적이 없다"
[이렇게 읽었다] '리딩 재팬' 시리즈와 <전후 일본, 그리고 낯선 동아시아>
한승동 <한겨레>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2.01.13
한국인이라면 이런 식의 어법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는 일본을 고의로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일본을 궁지에 몰린 쥐로 만들었다. 일본으로서는 사력을 다해서 고양이를 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러일 전쟁이란 세계사적인 제국주의 시대의 한 현상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 중에서 일본 측 입장은 궁지에 몰린 자가 있는 힘을 다해 임했던 하나의 방어전이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메이지 유신 100년이 되던 1968년 극우지 <산케이신문>에 연재됐던, 러일 전쟁을 무대로 설정한 일본의 국민 소설 <언덕 위의 구름> 작가 시바 료타로의 이야기다. 위 인용문에서 '러시아'를 '미국'으로 바꿔 넣고 러일 전쟁을 태평양 전쟁(또는 대동아 전쟁)으로 바꿔 읽어도 일본인 주류 다수는 아마도 전혀 이상한 느낌을 갖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 자리에 청을 넣고 러일 전쟁을 청일 전쟁으로 바꿔 놓아도 일본 주류 대다수는 거의, 또는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420년 전 임진년에 조선 땅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군이 자행한 참화에 대해서조차 그런 식의, 일본 방어를 위한 불가피한 전쟁이었다고 우길지 모르며, 1400년 전 백강에서 백제군과 함께 싸운 나당 연합군과의 대회전마저 그런 식으로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일본의 자학 사관을 극복하고 자유주의의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들자며 모인 후지오카 노부카쓰, 니시오 간지 등 이른바 우익 '새역모' 주도자들이 고집하는 새 역사의 핵심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근대 일본이 벌인 전쟁들에 대한 일본 주류의 인식은, 그게 침략 전쟁이 아니라 일본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벌인 방어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전쟁 책임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그것은 1931년 만주 침략(만주 사변) 이후 패전까지 15년 간 계속된 아시아 대륙 침략과 하와이 진주만 기습 이후 미국과의 전쟁에 고착돼 있다. 이른바 '15년 전쟁'이다. 일본에서 얘기하는 군국 일본의 전쟁 책임이라는 것은, 주로 이 15년 전쟁과 관련해서만 거론된다. 이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니까 일본 주류의 군국 일본 전쟁 책임의 인식 속에는 청일 전쟁과 명성황후(민비) 시해, 동학과 의병 전쟁 토벌, 러일 전쟁, 조선 식민 지배와 항일 전쟁 토벌 등 메이지 시절의 강화도 침범 이래 70년 가까이 한반도를 유린한 침략의 역사가 거의 완벽하게 누락돼 있다. 자민당 우파만 그런 게 아니라 민주당 주류도 거의 다를 바 없으며, 지한파나 진보적 리버럴, 좌파들조차 별로 다르지 않다. 그들에겐 미국에 대한 일본의 전쟁 책임은 인정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한국 또는 조선에 대한 전쟁 책임은 아예 개념조차 없어 보인다. 아시아에 대한 15년 전쟁 책임을 얘기할 때조차 그들 머릿속에 있는 것은 중국이지 조선이 아니다. 우파 주류야 말할 것도 없고, 다케우치 요시미나 마루야마 마사오나 난바라 시게루 같은, 전후 일본 민주주의와 이른바 평화주의 이념의 전파자들, 실천가들조차 그 점에선 크게 다르지 않다.
20년간 1000회나 이어진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 집회에 대한 저들의 무관심이나 한일 정상회담 뒤 기자 회견에서 총리가 독도 영유권 주장을 태연히 늘어놓을 수 있는 것도 조선 침략에 대한 무개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990년대부터 자민당 내 온건 보수파들이 얘기한 동아시아에 대한 전쟁 책임, 과거사 문제 또는 '아시아로의 회귀'조차 주로 중국을 그 대상으로 삼을 뿐, 조선은 안중에 없거나 곁가지였을 뿐이다.
조선이 일제에 병탄당한 지 100년이 지난 2010~11년 일본 공영 는 <언덕 위의 구름>을 영상으로 내보냈다. 쇠락 기미를 보이고 있는 지금의 일본과는 달랐던 일본, 메이지 시대의 시작과 함께 태어난 주인공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하나하나 그 꿈을 이루어가던 근대 일본의 행복했던 시절, 그 낙관주의를 되살리려 했을까. 아니면 그 행복했던 시절이 지속될 수 없게 만든 요인들에 대한 점검이었을까.
그 메이지와 다이쇼와 쇼와 시대의 낙관, 근현대 일본의 좋았던 시절, 바로 그 언덕 위의 구름이 조선·중국의 비참과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 그 이웃의 비참을 양산해낸 장본인이 일본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거기엔 송두리째 빠져 있을 것이다.
▲ <러일 전쟁과 대한제국>(와다 하루키 지음, 이경희 옮김, 제이앤씨 펴냄). ⓒ제이앤씨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가 펴낸 '리딩 재팬' 시리즈 제3권 <러일 전쟁과 대한제국>(와다 하루키 지음, 이경희 옮김, 제이앤씨 펴냄)은 새삼 그런 문제의식을 자극한다. 와다 도쿄대 명예교수는 시바의 <언덕 위의 구름>을 매개로 일본 주류의 그런 인식상의 맹점을 지적하면서, 러일 전쟁의 또 다른 이면을 열어젖힌다. 2009년과 2010년에 연속 출간된 방대한 그의 역작 <러일 전쟁-기원과 개전>(이와나미)에 집약한 연구 성과를 토대로 했을, 강연초록 같은 짤막한 <러일 전쟁과 대한제국>은 2010년 11월 19일 서울대 일본 연구소가 개최한 와다 교수 초청 강연회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와다 교수에 따르면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은 모두 조선 점령을 목적으로 조선에서 시작된 전쟁이다. 그럼에도 전쟁을 일으킨 일본 주류의 의식 속엔 그때나 지금이나 조선은 빠져 있다.
그 책에 이런 장면이 있다.
"1895년 10월 8일, 일본 공사가 지휘하고 일본 공사관의 2인자인 1등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도 가담한 가운데 일본인 정치 활동가와 일본군이 합세하여 궁전에 들어가 황후를 죽이고 맙니다. 황후가 시해당한 옆방에서 고종은 떨고 있었습니다. 이는 엄청난 폭거입니다. 그 폭거를 안뜰에서 보고 있던 것이 러시아인 고용 건축가 세레딘 사바틴입니다. 이 사람은 고종이 거주하는 건청궁 안에 서양관 관문각을 1888년에 지었습니다. 그리고 1897년에서 1899년까지 1905년 당시 고종이 살고 있던 중명전을 짓습니다."
이 참혹한 광경, 이방인들의 잔학무도. 명성황후 시해는 청일 전쟁(조선 지배 전쟁)에서 이긴 일본의 야심을 러시아 등 열강 3국이 간섭해 꺾자, 고종과 명성황후가 러시아 쪽에 기대면서 일본 최대의 전리품이 돼야 할 조선이 그들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하자 일으킨 일본 침략자들의 만행이었다. 그 만행 뒤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해 더욱 러시아로 기울었고 일본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됐다. 와다 교수는 그게 청일 전쟁에 승리해 기고만장하던 일본에 대한 최대의 반격이었다고 썼다.
여기서 '무능한 망국의 왕 고종'에 대한 우리의 기성 관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결국 망해버린 나라의 실질적 마지막 군주를 호의적으로 평가하긴 어렵겠지만 그 고착된 이미지 때문에 고종이 부당하게 취급당하는 면은 없을까. 고종에 대한 폄훼는 필연적으로 일제 식민 사관의 정당성 주장과 맞닿아 있고, 실제 일제 관학자들은 그런 고종의 이미지를 조장함으로써 자신들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데 이용했다. 12~13세기 유라시아를 휩쓴 칭기즈칸의 무적 군대를 막아내지 못한 중원의 왕들과 고려왕들을 무능한 왕들이라 간단히 매도해버릴 수 있을까.
이 부분은 예컨대 메이지 유신을 감행한 일본 침략자들의 유능을 상찬하면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무너져버린 조선의 무능을 탓하고 급기야 식민지 근대화론까지 읊조리는 뉴라이트적 세계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그 세계와 맞서 싸우느냐로 나뉘는 갈림길이 될 수 있다.
<역사가에게 묻다>(김효순 지음, 서해문집 펴냄)에 이런 대목이 있다.
"너희들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데, 식민지라는 것은 영국의 인도 지배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적이 없다. 조선을 일본의 일부로 하고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한 것일 뿐이다."
1950년대 후반 당시 20대 초반의 가지무라 히데키, 강덕상, 미야타 세쓰코 등 젊은 조선 근대사 연구자들 앞에 증언자로 나선 다나카 다케오 등 일제 시대 조선 총독부 정무총감 등 옛 식민지 경영자들이 꾸짖듯이 내뱉은 말들 중의 하나다.
오늘날 일본 주류의 생각은 저 일제 시대 조선 식민 경영자들의 그런 뒤틀린 세계관과 사고방식을 거의 그대로 복제한 듯 보인다. 리딩 재팬 시리즈 제2권 <착한 일본인의 탄생>(해리 하루투니언 지음, 정기인·이경희 옮김, 제이앤씨 펴냄)이 바로 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듀크대와 뉴욕대, 시카고대 교단에 선 미국의 저명한 일본 연구자 하루투니언은 역시 실제 강연 초록으로 보이는 이 책에서 시바 료타로가 <산케이신문>에 <언덕 위의 구름>을 연재하기 2년 전인 1966년 일본 정부 자문 기구인 제19회 중앙 교육 심의회가 답신으로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 '기대되는 인간상'을 분석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일본 교육이 천황의 가부장적 교육칙어가 지배하던 전쟁 전의 인간상, 말 잘 듣고 일 잘하는 '착한 일본인'을 재창출하는 세계로 회귀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 답신의 세계관이 지금 일본 주류의 세계관이 돼 있다.
강연 토론자로 참여한 김항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인문한국)교수는 지적한다.
"일례로 현대 일본의 보수화를 '군국주의의 부활'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오히려 근대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 형성된 주류파가 놀랍도록 오랜 동안 지배력을 행사해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즉 변화라기보다는 지속이야말로 근대 일본 사상사·문화사를 파악하는 기본 관점임을 하루투니언 교수의 강연은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일본의 문제는 '천황' 문제로 귀결된다. 가부장적 가족의 연장선상에 있는 천황제의 그 치명적인 독소를 점령 통치의 편의를 위해 패전 뒤의 일본에 온존시킨 건 미국이었다. '역코스' 이전, 일본을 다시는 미국에 대들 수 없는 하류 국가로 개조하려던 미국 점령자들의 초기 의도가 결과적으로 가장 완벽하게 맞아 들어간 케이스일 수 있다. 일본의 아킬레스건 천황.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1966년과 1968년에 일어난 일은 와다 교수가 지적한 다음과 같은 현상의 연장선상에 있다.
"'전(쟁)후 10년이 지나자 전(쟁)전 일본의 전쟁 역사는 전부 부정되어야 하는가? 만주사변 이후라면 몰라도 러일 전쟁까지는 괜찮았던 것 아닌가?'라는 인식이 나타나게 됐습니다."
<언덕 위의 구름>이야말로 그런 세계관을 정확하게 반영했다. 1931년 중국 대륙 침략이 본격화하기 전까지 조선에서 자행된 제국주의 일본의 모든 야만적 범죄 행각은 메이지 시절에 대한 향수와 낙관주의 그늘에 가려져 은폐됐으며, 조선은 제2의 일본이라는 실질과 동떨어진 허위의식이 그로 인한 불편함을 제거해 주었다.
▲ <봉인된 디아스포라>(테사 모리스 스즈키 지음, 박정진 옮김, 제이앤씨 펴냄). ⓒ제이앤씨
리딩 재팬 시리즈 제1권은 영국 출신으로 일본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다 호주 국립대 교수가 된 테사 모리스 스즈키의 <봉인된 디아스포라>(박정진 옮김, 제이앤씨 펴냄)다. 역시 강연 내용을 토대로 길지 않은 팸플릿 분량으로 묶은 이 책은 1959년 12월에 시작돼 1984년 7월에 완료되는 이른바 '재일동포 북송 사업' 문제를 다룬다. 총 9만 3340명의 재일동포들이 북으로 간 그 사건은 제네바 국제 적십자위원회(ICRC) 소장의 방대한 비밀 문서들을 발굴 조사한 테사 교수의 책 이 2007년에 출간되면서, 그때까지의 기존 이미지들이 뒤집히게 된다.
책은 요점은, 재일 조선인들의 대거 북쪽 귀국은 그때까지 알려진 대로 김일성의 환영 연설 때문이 아니라 그 3년 전인 1955년부터 일본 정부와 일본 적십자의 계획을 밑바탕으로 하여, 북쪽 당국 및 조선 적십자 국제위원회 등과의 비밀협상을 통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수십만의 (골치 아픈) 재일 조선인들을 북으로 귀국시킬 것을 먼저 구체적으로 제안한 것은 일본이었다. 말하자면 이른바 '북송 사업'은 북-일 공조의 산물이었다.
여기에 한국 정부의 재일 조선인 귀환 거부 정책, 그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의도된 복지 혜택 박탈 등을 보탤 수 있다. 그 책이 나가자 일본인 연구자들은 인신 공격적 비난까지 포함해 맹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문제 삼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는 결과적으로 처참하게 끝난 귀국 동포들에 대한 일본의 사실상의 추방 조처를 고발한 이 테사 교수의 보고를 날조 혹은 의도적인 일본 폄훼로 완강하게 몰아붙이는 자들도 있다. <봉인된 디아스포라>는 그런 그들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이기도 하다.
▲ <전후 일본, 그리고 낯선 동아시아>(남기정 엮음, 박문사 펴냄). ⓒ박문사
이들 리딩 재팬 시리즈와는 별도로 서울대 일본 연구소가 기획한 '현대 일본 생활세계 총서' 제1권 <전후 일본, 그리고 낯선 동아시아>(남기정 엮음, 박문사 펴냄)도 유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는 책이다. 남기정 교수가 연구 책임자를 맡아 새로운 "일본 연구 패러다임을 제공하겠다"며 꾸린 기획 연구팀의 다양한 참여자들의 학제적 연구를 종합한 이 묵직한 책에서 남 교수는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와 평화주의를 이끈 '평화 문제 담화회' 참여 지식인들의 조선관을 다룬다.
그 대표적 인물들 중의 한 사람, 전전의 민권·인권운동을 이끈 전전 자유주의자들 즉 '올드 리버럴'의 대표주자로, 일본의 대표적 진보 잡지로 분류되는 잡지 <세카이(世界)>(이와나미) 창간에도 깊이 관여했던 아베 요시시게, 그리고 마루야마 마사오, 우카이 노부시게 등 '일본의 양심'들도 조선문제엔 근본적으로 무관심했다.
한국인이라면 이런 식의 어법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는 일본을 고의로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일본을 궁지에 몰린 쥐로 만들었다. 일본으로서는 사력을 다해서 고양이를 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러일 전쟁이란 세계사적인 제국주의 시대의 한 현상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 중에서 일본 측 입장은 궁지에 몰린 자가 있는 힘을 다해 임했던 하나의 방어전이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메이지 유신 100년이 되던 1968년 극우지 <산케이신문>에 연재됐던, 러일 전쟁을 무대로 설정한 일본의 국민 소설 <언덕 위의 구름> 작가 시바 료타로의 이야기다. 위 인용문에서 '러시아'를 '미국'으로 바꿔 넣고 러일 전쟁을 태평양 전쟁(또는 대동아 전쟁)으로 바꿔 읽어도 일본인 주류 다수는 아마도 전혀 이상한 느낌을 갖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 자리에 청을 넣고 러일 전쟁을 청일 전쟁으로 바꿔 놓아도 일본 주류 대다수는 거의, 또는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420년 전 임진년에 조선 땅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군이 자행한 참화에 대해서조차 그런 식의, 일본 방어를 위한 불가피한 전쟁이었다고 우길지 모르며, 1400년 전 백강에서 백제군과 함께 싸운 나당 연합군과의 대회전마저 그런 식으로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일본의 자학 사관을 극복하고 자유주의의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들자며 모인 후지오카 노부카쓰, 니시오 간지 등 이른바 우익 '새역모' 주도자들이 고집하는 새 역사의 핵심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근대 일본이 벌인 전쟁들에 대한 일본 주류의 인식은, 그게 침략 전쟁이 아니라 일본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벌인 방어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전쟁 책임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그것은 1931년 만주 침략(만주 사변) 이후 패전까지 15년 간 계속된 아시아 대륙 침략과 하와이 진주만 기습 이후 미국과의 전쟁에 고착돼 있다. 이른바 '15년 전쟁'이다. 일본에서 얘기하는 군국 일본의 전쟁 책임이라는 것은, 주로 이 15년 전쟁과 관련해서만 거론된다. 이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니까 일본 주류의 군국 일본 전쟁 책임의 인식 속에는 청일 전쟁과 명성황후(민비) 시해, 동학과 의병 전쟁 토벌, 러일 전쟁, 조선 식민 지배와 항일 전쟁 토벌 등 메이지 시절의 강화도 침범 이래 70년 가까이 한반도를 유린한 침략의 역사가 거의 완벽하게 누락돼 있다. 자민당 우파만 그런 게 아니라 민주당 주류도 거의 다를 바 없으며, 지한파나 진보적 리버럴, 좌파들조차 별로 다르지 않다. 그들에겐 미국에 대한 일본의 전쟁 책임은 인정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한국 또는 조선에 대한 전쟁 책임은 아예 개념조차 없어 보인다. 아시아에 대한 15년 전쟁 책임을 얘기할 때조차 그들 머릿속에 있는 것은 중국이지 조선이 아니다. 우파 주류야 말할 것도 없고, 다케우치 요시미나 마루야마 마사오나 난바라 시게루 같은, 전후 일본 민주주의와 이른바 평화주의 이념의 전파자들, 실천가들조차 그 점에선 크게 다르지 않다.
20년간 1000회나 이어진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 집회에 대한 저들의 무관심이나 한일 정상회담 뒤 기자 회견에서 총리가 독도 영유권 주장을 태연히 늘어놓을 수 있는 것도 조선 침략에 대한 무개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990년대부터 자민당 내 온건 보수파들이 얘기한 동아시아에 대한 전쟁 책임, 과거사 문제 또는 '아시아로의 회귀'조차 주로 중국을 그 대상으로 삼을 뿐, 조선은 안중에 없거나 곁가지였을 뿐이다.
조선이 일제에 병탄당한 지 100년이 지난 2010~11년 일본 공영 는 <언덕 위의 구름>을 영상으로 내보냈다. 쇠락 기미를 보이고 있는 지금의 일본과는 달랐던 일본, 메이지 시대의 시작과 함께 태어난 주인공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하나하나 그 꿈을 이루어가던 근대 일본의 행복했던 시절, 그 낙관주의를 되살리려 했을까. 아니면 그 행복했던 시절이 지속될 수 없게 만든 요인들에 대한 점검이었을까.
그 메이지와 다이쇼와 쇼와 시대의 낙관, 근현대 일본의 좋았던 시절, 바로 그 언덕 위의 구름이 조선·중국의 비참과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 그 이웃의 비참을 양산해낸 장본인이 일본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거기엔 송두리째 빠져 있을 것이다.
▲ <러일 전쟁과 대한제국>(와다 하루키 지음, 이경희 옮김, 제이앤씨 펴냄). ⓒ제이앤씨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가 펴낸 '리딩 재팬' 시리즈 제3권 <러일 전쟁과 대한제국>(와다 하루키 지음, 이경희 옮김, 제이앤씨 펴냄)은 새삼 그런 문제의식을 자극한다. 와다 도쿄대 명예교수는 시바의 <언덕 위의 구름>을 매개로 일본 주류의 그런 인식상의 맹점을 지적하면서, 러일 전쟁의 또 다른 이면을 열어젖힌다. 2009년과 2010년에 연속 출간된 방대한 그의 역작 <러일 전쟁-기원과 개전>(이와나미)에 집약한 연구 성과를 토대로 했을, 강연초록 같은 짤막한 <러일 전쟁과 대한제국>은 2010년 11월 19일 서울대 일본 연구소가 개최한 와다 교수 초청 강연회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와다 교수에 따르면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은 모두 조선 점령을 목적으로 조선에서 시작된 전쟁이다. 그럼에도 전쟁을 일으킨 일본 주류의 의식 속엔 그때나 지금이나 조선은 빠져 있다.
그 책에 이런 장면이 있다.
"1895년 10월 8일, 일본 공사가 지휘하고 일본 공사관의 2인자인 1등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도 가담한 가운데 일본인 정치 활동가와 일본군이 합세하여 궁전에 들어가 황후를 죽이고 맙니다. 황후가 시해당한 옆방에서 고종은 떨고 있었습니다. 이는 엄청난 폭거입니다. 그 폭거를 안뜰에서 보고 있던 것이 러시아인 고용 건축가 세레딘 사바틴입니다. 이 사람은 고종이 거주하는 건청궁 안에 서양관 관문각을 1888년에 지었습니다. 그리고 1897년에서 1899년까지 1905년 당시 고종이 살고 있던 중명전을 짓습니다."
이 참혹한 광경, 이방인들의 잔학무도. 명성황후 시해는 청일 전쟁(조선 지배 전쟁)에서 이긴 일본의 야심을 러시아 등 열강 3국이 간섭해 꺾자, 고종과 명성황후가 러시아 쪽에 기대면서 일본 최대의 전리품이 돼야 할 조선이 그들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하자 일으킨 일본 침략자들의 만행이었다. 그 만행 뒤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해 더욱 러시아로 기울었고 일본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됐다. 와다 교수는 그게 청일 전쟁에 승리해 기고만장하던 일본에 대한 최대의 반격이었다고 썼다.
여기서 '무능한 망국의 왕 고종'에 대한 우리의 기성 관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결국 망해버린 나라의 실질적 마지막 군주를 호의적으로 평가하긴 어렵겠지만 그 고착된 이미지 때문에 고종이 부당하게 취급당하는 면은 없을까. 고종에 대한 폄훼는 필연적으로 일제 식민 사관의 정당성 주장과 맞닿아 있고, 실제 일제 관학자들은 그런 고종의 이미지를 조장함으로써 자신들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데 이용했다. 12~13세기 유라시아를 휩쓴 칭기즈칸의 무적 군대를 막아내지 못한 중원의 왕들과 고려왕들을 무능한 왕들이라 간단히 매도해버릴 수 있을까.
이 부분은 예컨대 메이지 유신을 감행한 일본 침략자들의 유능을 상찬하면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무너져버린 조선의 무능을 탓하고 급기야 식민지 근대화론까지 읊조리는 뉴라이트적 세계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그 세계와 맞서 싸우느냐로 나뉘는 갈림길이 될 수 있다.
<역사가에게 묻다>(김효순 지음, 서해문집 펴냄)에 이런 대목이 있다.
"너희들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데, 식민지라는 것은 영국의 인도 지배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적이 없다. 조선을 일본의 일부로 하고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한 것일 뿐이다."
1950년대 후반 당시 20대 초반의 가지무라 히데키, 강덕상, 미야타 세쓰코 등 젊은 조선 근대사 연구자들 앞에 증언자로 나선 다나카 다케오 등 일제 시대 조선 총독부 정무총감 등 옛 식민지 경영자들이 꾸짖듯이 내뱉은 말들 중의 하나다.
오늘날 일본 주류의 생각은 저 일제 시대 조선 식민 경영자들의 그런 뒤틀린 세계관과 사고방식을 거의 그대로 복제한 듯 보인다. 리딩 재팬 시리즈 제2권 <착한 일본인의 탄생>(해리 하루투니언 지음, 정기인·이경희 옮김, 제이앤씨 펴냄)이 바로 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듀크대와 뉴욕대, 시카고대 교단에 선 미국의 저명한 일본 연구자 하루투니언은 역시 실제 강연 초록으로 보이는 이 책에서 시바 료타로가 <산케이신문>에 <언덕 위의 구름>을 연재하기 2년 전인 1966년 일본 정부 자문 기구인 제19회 중앙 교육 심의회가 답신으로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 '기대되는 인간상'을 분석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일본 교육이 천황의 가부장적 교육칙어가 지배하던 전쟁 전의 인간상, 말 잘 듣고 일 잘하는 '착한 일본인'을 재창출하는 세계로 회귀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 답신의 세계관이 지금 일본 주류의 세계관이 돼 있다.
강연 토론자로 참여한 김항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인문한국)교수는 지적한다.
"일례로 현대 일본의 보수화를 '군국주의의 부활'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오히려 근대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 형성된 주류파가 놀랍도록 오랜 동안 지배력을 행사해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즉 변화라기보다는 지속이야말로 근대 일본 사상사·문화사를 파악하는 기본 관점임을 하루투니언 교수의 강연은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일본의 문제는 '천황' 문제로 귀결된다. 가부장적 가족의 연장선상에 있는 천황제의 그 치명적인 독소를 점령 통치의 편의를 위해 패전 뒤의 일본에 온존시킨 건 미국이었다. '역코스' 이전, 일본을 다시는 미국에 대들 수 없는 하류 국가로 개조하려던 미국 점령자들의 초기 의도가 결과적으로 가장 완벽하게 맞아 들어간 케이스일 수 있다. 일본의 아킬레스건 천황.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1966년과 1968년에 일어난 일은 와다 교수가 지적한 다음과 같은 현상의 연장선상에 있다.
"'전(쟁)후 10년이 지나자 전(쟁)전 일본의 전쟁 역사는 전부 부정되어야 하는가? 만주사변 이후라면 몰라도 러일 전쟁까지는 괜찮았던 것 아닌가?'라는 인식이 나타나게 됐습니다."
<언덕 위의 구름>이야말로 그런 세계관을 정확하게 반영했다. 1931년 중국 대륙 침략이 본격화하기 전까지 조선에서 자행된 제국주의 일본의 모든 야만적 범죄 행각은 메이지 시절에 대한 향수와 낙관주의 그늘에 가려져 은폐됐으며, 조선은 제2의 일본이라는 실질과 동떨어진 허위의식이 그로 인한 불편함을 제거해 주었다.
▲ <봉인된 디아스포라>(테사 모리스 스즈키 지음, 박정진 옮김, 제이앤씨 펴냄). ⓒ제이앤씨
리딩 재팬 시리즈 제1권은 영국 출신으로 일본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다 호주 국립대 교수가 된 테사 모리스 스즈키의 <봉인된 디아스포라>(박정진 옮김, 제이앤씨 펴냄)다. 역시 강연 내용을 토대로 길지 않은 팸플릿 분량으로 묶은 이 책은 1959년 12월에 시작돼 1984년 7월에 완료되는 이른바 '재일동포 북송 사업' 문제를 다룬다. 총 9만 3340명의 재일동포들이 북으로 간 그 사건은 제네바 국제 적십자위원회(ICRC) 소장의 방대한 비밀 문서들을 발굴 조사한 테사 교수의 책 이 2007년에 출간되면서, 그때까지의 기존 이미지들이 뒤집히게 된다.
책은 요점은, 재일 조선인들의 대거 북쪽 귀국은 그때까지 알려진 대로 김일성의 환영 연설 때문이 아니라 그 3년 전인 1955년부터 일본 정부와 일본 적십자의 계획을 밑바탕으로 하여, 북쪽 당국 및 조선 적십자 국제위원회 등과의 비밀협상을 통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수십만의 (골치 아픈) 재일 조선인들을 북으로 귀국시킬 것을 먼저 구체적으로 제안한 것은 일본이었다. 말하자면 이른바 '북송 사업'은 북-일 공조의 산물이었다.
여기에 한국 정부의 재일 조선인 귀환 거부 정책, 그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의도된 복지 혜택 박탈 등을 보탤 수 있다. 그 책이 나가자 일본인 연구자들은 인신 공격적 비난까지 포함해 맹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문제 삼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는 결과적으로 처참하게 끝난 귀국 동포들에 대한 일본의 사실상의 추방 조처를 고발한 이 테사 교수의 보고를 날조 혹은 의도적인 일본 폄훼로 완강하게 몰아붙이는 자들도 있다. <봉인된 디아스포라>는 그런 그들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이기도 하다.
▲ <전후 일본, 그리고 낯선 동아시아>(남기정 엮음, 박문사 펴냄). ⓒ박문사
이들 리딩 재팬 시리즈와는 별도로 서울대 일본 연구소가 기획한 '현대 일본 생활세계 총서' 제1권 <전후 일본, 그리고 낯선 동아시아>(남기정 엮음, 박문사 펴냄)도 유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는 책이다. 남기정 교수가 연구 책임자를 맡아 새로운 "일본 연구 패러다임을 제공하겠다"며 꾸린 기획 연구팀의 다양한 참여자들의 학제적 연구를 종합한 이 묵직한 책에서 남 교수는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와 평화주의를 이끈 '평화 문제 담화회' 참여 지식인들의 조선관을 다룬다.
그 대표적 인물들 중의 한 사람, 전전의 민권·인권운동을 이끈 전전 자유주의자들 즉 '올드 리버럴'의 대표주자로, 일본의 대표적 진보 잡지로 분류되는 잡지 <세카이(世界)>(이와나미) 창간에도 깊이 관여했던 아베 요시시게, 그리고 마루야마 마사오, 우카이 노부시게 등 '일본의 양심'들도 조선문제엔 근본적으로 무관심했다.
그들은 일본의 조선 지배는 사상적으로 선의에 의한 것이며 반성해야 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조선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 방법상의 치졸함이라고만 생각했다. 조선에서의 일본의 행동엔 크게 틀린 게 없었다고 봤다. 그들 역시 천황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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