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23

영화 '서울의 봄'은 하남자를 경멸한다?

영화 '서울의 봄'은 하남자를 경멸한다?

영화 '서울의 봄'은 하남자를 경멸한다?
서울의봄 영화 포스터 출처 :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56628#photoId=1549270
2023.12.03. 오후 11:04
손민석
15
혁명 읽는 사람
영화의 스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시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
이번주가 책 원고 마감일이 겹쳐 도저히 글을 쓸 시간이 나지 않아 영화 비평글
로 대신합니다. 죄송합니다. 다음주에 찾아뵙겠습니다.
책 원고를 마감하느라 바쁜데도 불구하고 영화 '서울의봄'을 꼭 봐야 한다 해서
보고 왔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렇게까지 재밌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쉽다는 생각
이 더 컸다. 결론을 모두가 알고 있는 상황에서 긴장감을 좀더 끌어올릴 수 있는
장치들을 사용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아쉬움을 제외하고 영
화에 대해 말해보자면,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에서 "감독이 남성을 참 싫어하
는구나"라는 생각밖에 안 떠올랐다.
이 영화의 핵심주제는 한국 사회의 저열한 남성 패거리 문화가 정상적인 국가
운영을 방해하는 주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정우성 역할의 이태신 장군은 아주 상
남자이자 참군인으로 묘사되는데 반해서 전두광 일파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하
남자 그 자체였다. 선후배를 가리지 않고 모든 이들이 전두광 하나만을 바라보
며 무슨 일만 터지면 전두광을 비난하거나 그에게 의존하여 사태를 모면하고자
하는 '하남자'들의 모임에서 전두광만 그 머리처럼 빛이 났다. 하지만 그조차도
'상남자' 이태신이 보기에는 군인으로서도, 인간으로서도 되어먹지 못한 놈일
뿐이다. 영화는 계속해서 전두광이 하남자들을 강하게 리드하면서 '남성미'를
드러내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그 모든 모습들은 막판에 이태신과 전두광의
대면씬으로 무너진다. '진짜' 상남자인 이태신이 전두광과 마주하여 그의 남성
성을 부정하며 되어먹지 못했다고 일갈할 때, 감독은 혹여나 이 영화를 보고 관
객들이 전두광의 '리더십'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내릴지도 모를 어떤 여지를 차
단해버린다.
실제로 전두광의 '본질'이랄까 '속내'랄까 이런 게 가장 잘 드러나는 장소는 그
가 사람들을 '지휘'하는 공간이 아니라, "화장실"이다. 화장실이란 본질적으로
인간의 가장 내밀한 배변활동이 이뤄지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로 인해
가장 불결한 장소로 인식되는 곳이기도 하다. 은밀하게 서로의 '성기'를 확인하
기도 하고(?) 비누를 줍기도 하는(?) 이 '남성적(?) 공간'이 바로 전두광의 속내
가, 본질이 드러나는 공간인 것이다. 이 '찌질한' 하남자들은 매순간순간 형님,
혁명 읽는 사람 로그인
아우 하며 위계를 확인하려 하고, 거사가 성공한 그 순간조차도 노태건은 전두광
에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우리 여전히 친구 맞지?"라는 말로 위계적 동등성을
확보하려 한다. 전두광은 막상 그 자리에서는 '상남자'답게 그렇다고 말했지만
그는 즐겁게 웃고 떠드는 하나회 멤버들을 뒤로 한채, 심지어 노태건까지도, 자
신의 내밀한 공간인 화장실에서 실성한 듯이 웃으며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 그
나마 그 화장실에서 전두광과 함께 의논할 수 있는 사람이 "친구"인 노태건인데
노태건 앞에서 전두광은 옆방에 있는 하나회 선후배들을 그 '아가리'에 무언가
처넣어줘야 하는, 떡고물 떨어지기만을 바라는 족속들이라 무시한다. 그렇게 말
하면서 그가 수건으로 자신의 구두를 닦는 장면은 그가 하나회 멤버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대단히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자신의 선후배들을 자기 발닦는 수
건정도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노태건은 영화 중간중간 그런 전두광을 묘한 표
정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이태신 같은 "상남자"는 그런 '떡고물'에 움직이지 않는다. 그게 영화 초
반부터 전두광이 이태신을 볼 때마다 기분이 나쁜 이유이다. 거사가 성공했는데
도, 자기가 승리했는데도 이태신은 '상남자'답게 "홀로" 경계선을 넘어 전두광
의 앞에 선다. 그리고는 너는 인간으로서도, 군인으로서도 되어먹지 못했다며
'하남자'라고 공개적으로 낙인을 찍어버린다. '하남자'인 노태건조차도 이런 상
황에서 상남자를 죽일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전두광도 노태건도 아무런 반격도 하
지 못하고 상남자의 "과시"를 지켜보고만 있는다. 기분이 상한 전두광은 사태가
진압되었는데도 홀로 길을 걸으며 담배를 핀다. "씹새끼, 지까짓게 뭐라고.." 아
마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는 승리하였지만 화장실에서 홀로 자신의 승리
를 즐기며 웃는다. 하남자는 다른 하남자와 진정으로 함께 즐길 수 없는 것이다.
월나라의 범여가 구천을 두고 함께 고난을 보낼 수는 있어도 부귀를 누릴 수는
없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이겠다.
이제 우리는 가장 중요한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위대한(?)" 상남
자 이태신은 어째서 하남자 전두광에게 패배하였는가? 답은 매우 간단하다. 그
를 제외한 모두가 하남자였으니까! '상남자' 이태신이 패하려면 그외의 모든 남
자들이 하남자가 되어야 한다. 영화는 계속해서 양쪽 진영의 '하남자'들이 전두
광과 이태신의 수싸움 사이에서 오합지졸처럼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감독의 시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하남자들밖에 없기 때
문에 하남자를 폭력적으로 다룰 줄 아는 '무식한' 전두광이 같은 놈이 그들을 휘
혁명 읽는 사람 로그인
어잡고 올라간다. 한국의 남성 패거리란 강력한 위계적 질서에 기초하여 학연,
지연, 혈연 등의 온갖 봉건적인 관계망으로 구성된 인간집단을 의미한다. 근대문
명에 가까울수록 그러한 봉건적 인간관계들로부터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전두
광이 옆에 주렁주렁 남성들을 달고 다니는 것과 달리 이태신은 홀로 다닌다.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한국 사회가 전두광 같은 이들이 힘을 모을 수 있을만큼
남성 패거리 문화에 침윤되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 된
다. 감독이 보기에는 이런 게 한국사회이다. 화장실에서 자신들끼리 시선 너머
의 성기 크기 비교하느라 소변이나 질질 흘리면서도 겉으로는 국가를 위해, 민족
을 위해 어쩌고 해대며 형님이, 아우님이 서로 우대하고 난리치는 그런 게 한국
사회라는 것이다. 전작인 영화 아수라에서는 형동생 하던 지들끼리(정우성과 황
정민, 정우성과 주지훈의 관계) 서로 "좆이나 뱅뱅이다"(아! 이 유구한 성기 사
랑!)이라 하면서 쏴죽이는 걸 보여주며 냉소하더니 이제는 아예 죄다 하남자라
고 일갈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고민을 해보아야 한다. 과연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
이 무엇인가? 이땅 어딘가에 이태신과 같은 상남자가 있고 그들이 하남자들에
의해 사라지는 게 아쉽다는 말을 하고 싶은건가?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다
른 주요 배역들은 실존 인물들의 이름을 따왔으면서 장태완 캐릭터를 따서 만든
이태신을 왜 굳이 장태신이라 하지 않았을까? 정우성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모델로 했지만 너무 많이 바뀌어서 실존 인
물과 매칭하기 어렵다. 전두광에 맞서는 외롭고 의로운 남자가 전두광처럼 호통
치거나 마초스럽고, 호랑이 같은 남자가 아니길 바랐다. 우리시대 아버지 중에
서 목소리가 크지 않으면서도 완고하고 신념을 지니고,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서
도 책임감은 대쪽 같은 아버지도 있다. 점잖지만 근사하고 자상하고 믿음직한 아
버지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마 실존 인물보다는 자기가 생각하는 이미
지에 맞는 캐릭터를 그리려다보니 그리 된 것이겠다.
정우성의 말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영화 속의 이태신과 같은 '남성'은 "실존하
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두광이든 뭐든 다른 '하남자'들은 실존했
고 지금도 우리 곁에 있지만, 이태신과 같은 상남자는 실존하지 않기에 모티브
만 따왔을뿐 실존하지 않는 새로운 캐릭터의 이름으로 불러주어야 한다. 정우성
은 이태신과 같은 "우리 시대 아버지"가 어딘가에 있다는 식으로 말을 한다. 이
혁명 읽는 사람 로그인
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정우성(혹은 감독)이 보는 한국사회가 지독할 정도
로 '하남자들밖에 없는' 사회라는 것이다. 하남자들의 사회, 모두가 서로를 이익
으로만 대하고, 모두가 서로를 위계관계로만 보며, 모두가 혼자만의 화장실에서
소변 찍찍 싸갈기며 남을 자기 구두닦는 걸레정도로만 보는 사회가 어떻게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 바로 어딘가에 이태신과 같은 상남자가 있다고 믿음으로써,
달리 표현하자면 나의 하남자스러움을 보완해줄 상남자가 어딘가에 있어 나를
대신하여 남성성을 수행하고 있을거라 믿기 때문에 유지된다.
지젝이 어디선가 말했듯이 아우슈비츠에 갇힌 유태인들은 공통적으로 그 지옥
속에서 모든 걸 초월한 신적(神的)인 선함을 지닌 존재를 보았다고 말한다. 그
런 지옥 속에서도 선행을 베푸는 선인들의 존재는 정말로 있었던 것일까? 지젝
은 이에 대해 그들의 실존하였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은 선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통해 그 지옥과도 같은 곳에서 자신의 죄책감을 누그
러뜨리며 생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나를 대신하여 누군가는 선행을 하
고 있기 때문에 나의 사소한 악행들, 살아남기 위해 행한 여러 악행들이 역설적
이게도 그 선인의 존재로 "사면"되는 것이다. 의인 10명이 있었다면 소돔과 고
모라가 망하지 않았을 것을! 소돔과 고모라의 일화는 여기서 반대로 해석되어
야 한다. 소돔과 고모라는 악해서 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소돔과 고모라의 악
인들은 자신의 죄악을 모두 인정할 정도로 너무나도 "정직"하고 "선했기"에 망
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영화의 이중적 역할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이 영화는 한편으로
는 한국 사회의 '하남자'들을 고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하남자 사회가
지속될 수 있도록 어딘가에 상남자가 있다며 하남자들을 '위로'해주고 있다. 우
리의 하남자들은 이 영화를 보고 기분이 나쁠까 아니면 위로받아 슬플까 그것도
아니면 아무 생각없이 전두광이 나쁜놈! 이라고 할까? 뭐가 됐든 하남자들에게
해줄 말은 정우성이 아수라에서 이미 해두었다. "좆이나 뱅뱅이다."


프리미엄 구독자 전용 콘텐츠입니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