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선택인가, 이승만의 선택인가?
혼란스러운 해방정국.
71세 나이로 고국에 돌아온 이승만.
그는 어떻게 최후의 승자로 남았나!
- 맥아더 기념관에 남아있는 이승만의 흔적
미국 버지니아에 위치한 맥아더 기념관. 세계 2차 대전 전후 시기, 맥아더의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해방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승만의 편지와 전보,맥아더가 이승만을 한국의 임시 대통령이라고 표기한 메모까지 소장하고 있다. 이승만은 어떻게 맥아더를 만날 수 있었나?
맥아더와 이승만이 만나 함께 그린 한국의 미래는 무엇일까?
- 상해임시정부에 불어 닥친 대통령 논란
1919년 임시정부 국무총리직과 한성정부 집정관 총재에 임명된 이승만은 국무총리나 집정관 총재가 미국식으로 해석하면 'president'라고 주장하고 이 호칭을 사용한다.
이에 임정 지도자들은 반발해 경고 전보를 보낸다.
이승만은 안창호에게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낸다.
“만일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면 독립운동에 큰 방해가 있을 것이며 그 책임이 당신들에게 돌아갈 것이니 떠들지 마시오."
-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그는 왜 탄핵되었나?
1919년 9월6일 상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
그러나 1923년 대통령직에서 탄핵된다. 임시정부는 이승만이 상해를 떠난다면 대통령직에서 탄핵 될 수도 있음을 경고한 상태였다. 그러나 결국 이승만은 상해를 떠난다. 임시정부 대통령의 의무를 저버리면서까지 미국으로 향하는 이승만.
그가 미국으로 향한 이유는 무엇일까?
- 같은 꿈 다른 길, 임시정부와 이승만의 노선 차이
1908년 샌프란시스코. 한반도 일본통치에 동조한 미국인 스티븐슨이 장인환에 의해 숨지는 사건이 벌어진다. 한인들은 이승만에게 장인환의 법정통역을 부탁하지만 이승만은 기독교도로서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한다.
이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비롯한 의열 투쟁 때도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던 이승만.
그는 이런 행위는 ‘무법한 개인행동’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 혼란한 해방정국, 고국으로 향하는 이승만의 행보
미국에서 교육과 외교활동을 펼쳤던 이승만은 그의 나이 71세에 조국 해방을 맞이한다. 미군정의 대대적인 이승만 환영식이 있던 날, 미군 중장 하지는 이승만이 연설하는 내내 부동자세로 서서 최고의 경의를 표한다.
미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해 임정요인들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던 때 미군의 환대를 받으며 고국에 돌아온 이승만.
그는 어떻게 미군을 움직일 수 있었을까? 이후 이승만의 행보는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한국사전 55회– 이승만 제2부 (2008.9.6.방송)
http://history.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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