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이승만(북한:리승만) | |
임기 | 1948년 7월 24일 – 1960년 4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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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통령 | 李始榮(1948-1951) 김성수 (1951-1952) 함대영 (1952-1956) 장면 (1956-1960) |
총리 | 李範奭(1948-1950) 張勉(1950-1952) 張沢相(1952) 백두진 (1953-1954) 卞栄泰(1954) |
임기 | 1947년 3월 3일 – 1948년 8월 15일 |
부통령 | 김구 |
임기 | 1919년 4월 10일 – 1925년 3월 |
출생 | 1875년 3월 26일 조선국 ,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현· 황해남도 봉천군 ) |
죽음 | 1965년 7월 19일 (90세) 미국 , 하와이 주 호놀룰루 |
정당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자유당 |
배우자 | 프란체스카 도너 |
서명 |
이승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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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1909년 촬영) | |
각종 표기 | |
한글 : | 이승만(한국) 리승만(북한) |
한자 : | 이승만 |
발음: | 이승만(한국) 리승만(북한) |
일본어 읽기: | 리 쇼반 |
로마자 : | Syngman Rhee 별도 표기로 I Seung-man 등. |
이승만 (리상반, 이승만, 1875년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 )은 조선 의 독립 운동가로 대한민국 의 초대 대통령 (재임 1948년 - 1960년 ). 본관은 전주 이씨 . 호 는雩南(우남, 우남 ). 글자 는 '승룡'(승영, 승룡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에서는 ‘ 리승만 ( 리승만 )’이라 불리는데 이는 한국에서는 어두자음ㄹ의 탈락 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조선어의 남북간 차이 참조). 한국에서도 1950년대 이전에는 ' 리승만 ( 리승만 )'이라고 쓰여져 있었다(영문에서 본인의 서명도 'Syngman Rhee '로 되어 있다).
약년표 [ 편집 ]
- 1875년 3월 26일 - 경기도 개성시 근교의 황해도 평산 군 마산면 대경리(현· 황해남도 봉천군 )에서 탄생.
- 복숭아 서당 에서 한학을 배우십시오.
- 1896년 - 미국인 기독교 선교사 아펜셀러 가 설립한 배재학당 에서 배우기 시작한다.
- 1896년 - 서재필 (소재필)의 ' 독립협회 ' 결성에 중심 멤버로 합류한다.
- 1897년 - 배재학당 재학 중에 고종 퇴위요구의 분문 살포에 가해져 투옥된다. 투옥 중에 개신교 의 감리교회파에 입신.
- 1904년 - 특사 에 의한 출옥 후, 미국 으로 건너간다.
- 1907년 - 조지 워싱턴 대학 에서 학사 학위 취득.
- 1908년 - 하버드 대학 졸업 으로 석사 학위 취득.
- 1910년 - 프린스턴 대학 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 취득. 박사논문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 올해 귀국한다.
- 1911년 - 미국에 망명.
- 1913년 - 하와이 에 정착.
- 1919년 - 중화 민국 상하이 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승만에 의해 워싱턴 DC 에 구미 위원부 설립.
- 1920년 -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파벌 항쟁에서 실각. 하와이에 거점을 옮긴다.
- 1933년 - 만주사변을 토의하는 국제연맹 총회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권대표로 출석.
- 1934년 - 오스트리아 인 프란체스카 기증자 와 결혼.
- 1941년 -『일본의 내막기』를 저술한다. 일본의 대미 선전을 예고.
- 1945년 10월 - 일본의 항복 과 조선 해방에 따라 재 조선 미국 육군 사령부 군정청 직접 통치하의 한반도 로 귀환.
- 1946년 2월 - 대한독립촉진국민회를 결성. 총재로 취임.
- 1948년 4월 3일 - 제주도 4·3 사건 반란 진압.
- 1948년 8월 15일 - 한반도 남부 단독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언.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
- 1948년 10월 - 연합국군 점령하의 일본 을 비공식 방문( 더글라스 맥아더 GHQ 사령관 등과의 회담을 위해).
- 1948년 10월 27일 - 여수·순천 사건 반란 진압.
- 1948년 12월 1일 - 국가보안법을 제정.
- 1949년 6월 5일 - 국민보도연맹을 조직시킨다.
- 1949년 12월 24일 - 문경학살 사건 .
- 1950년 6월 25일 - 조선전쟁 발발.
- 1950년 6월 - 국민보도연맹의 가맹자나 수감 중인 정치범 등 적어도 20만 명이 넘는 대량학살( 보도연맹 사건 ).
- 1951년 1월 - 전선에서 전투중인 장병의 물자를 전매하고 옷( 국민 방위군 사건 ).
- 1952년 1월 18일 - 해양 주권 선언. '평화선', 이른바 이승만 라인 (국제법 위반)을 설정한다.
- 1952년 5월 26일 - 계엄령을 시행하고, 반대파 의원을 감금· 헌법 개정을 강행( 부산 정치파동 ).
- 1953년 7월 27일 - 한국 전쟁 휴전.
- 1956년 5월 15일 - 대통령에 3선. 부대통령에는 야당의 장면 이 당선.
- 1958년 - 진보당 당수 의 봉봉암을 스파이 혐의로 체포하고, 1959년 7월에 처형.
- 1959년 - 니이가타 히토미 센터 암살·폭파 테러 미수 사건 .
- 1960 년 -3월 15일 대통령 선거. 부정선거가 문제가 되어 야당이나 국민의 비판이 공연화.
- 1960년 4월 19일 -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대와 경관대가 충돌. 죽은 자 186명. 4월 26일 에 시모노를 표명해, 5월 29일 에 하와이 에 망명( 4월 혁명 ).
- 1965년 7월 19일 - 망명처 하와이에서 90세에 객사.
평생 [ 편집 ]
출자로부터 독립운동 [ 편집 ]
이승만은 황해도 평산 군 마산면 대 경리릉내동 전주 이씨 의 몰락 양반 의 집에서 태어났다 . 아버지·이경선(1839년~1912년), 어머니( 김해김씨 , 1833년~1896년)의 3남2녀 막내(단, 두 형은 천연두로 떡)이다. 족보 에서는 태종 의 장남으로 세종 의 형인 양녕대군 의 16대 말예이다 [주석 1] . 양령대군의 장남 부림령 이순의 후손에 해당한다. 왕족으로는 13대 전의 수주정이윤인, 그 손자로 병자의 역할 때 무공을 세워 전풍군을 추증받은 이원약 등이 있다. 그 후, 몇 명의 후손이 관직에 착수하더라도, 6대 전의 이징 여름이 음직으로 현령 이 된 것을 마지막으로, 몰락했다. 승만 자신은 이씨 조선의 왕족의 분가 출신임을 자랑하고 있었다 [2] .
아버지·경선은, 재산을 방탕하게 소진하고, 2번째의 아들이 죽자, 지신을 막대기로 망가뜨리고, 대도를 휘두르고, 그 후, 3개월 동안 잠들었다 [3] .
소년 시절의 리는 과거 합격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1894년 에 조선 에 있어서의 과거 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미국인 선교사 에 의한 미션·스쿨 배재 학당 에 입학했다 [4] . 배재학당의 제1기 학생이 되어 [5] 1896년 에 설립된 독립협회 에도 참가했지만, 때의 친로 파 정권이 고종 황제에 칭언했기 때문에 1898년 11월에는 독립협회의 해산, 지도자의 체포가 명령되었고, 독립협회는 같은 해 12월, 강제적으로 해산되었다. 이승만도 1899년에 체포되어 [ 5] 고문을 받으면서 1904년 까지 옥중에 있었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 후 일본이 군사적·외교적·경제적으로 대한제국 에 침투하는데 위기감을 가한 고종 들은 1882년 북미 수호통상조약 의 제1조 의 「주선조항」에 근거해, 미국 에 조선의 독립 유지를 위한 원조를 요구하는 것을 구상했다. 거기서 영어가 말할 수 있는 리를 석방해, 미국에 파견했다 [5] . 하와이를 경유하여 미국으로 건너온 리는 1905년 8월 때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만나 “우리는 황제의 대표자가 아니라 일진회라는 단체 의 대표자이다” 그러면서 "황제는 조선인의 이익을 대변할 수 없다"고 대한제국과 고종을 적극 부정했다 [6] .
그 후 리는 미국에 남아, 조지 워싱턴 대학 , 하버드 대학 을 거쳐 프린스턴 대학 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5] . 이 프린스턴 대학에 의한 철학 박사 학위 수여에 의해, 리는 아시아인 최초의 박사 학위 취득자가 되었다 [ 요출전 ] [7] [ 출처 무효 ] . 이 시기에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이었던 것이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우드로우 윌슨 이다. 윌슨은 이를 마음에 들어 그가 집에서 열리는 간친회에 단골 손님으로 맞이해 접어서 ' 미래의 조선독립 구세주'로 소개했다 . 조지 워싱턴 대학의 성적은 평균 'C'로 낮은 성적이었다 [ 요출전 ] (C아래는 F로 낙제)가 위와 같이 석사 과정을 수료하고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또한 미국 유학 중인 1910년 일본과 대한제국 사이에서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에 따라 대한제국은 대일본제국에 병합되게 된다.
대학원 졸업 후인 1911년 (메이지 44년)에 일본령이 된 한반도 로 돌아와 서울의 기독교 청년회 에서 선교활동에 붙었다 [5] . 그러나 1년 반 후, 당시의 사원정인 조선 총독 암살미수사건(조선에서는 ‘ 105인사건 ’이라 불린다)의 관여를 의심받아 다시 미도리했다 [9] . 미국에 건너는 도중에 일본 본토에 들러 시모노세키 , 교토 , 도쿄 에 관광을 위해 체재하고, 가마쿠라시 에서 개최된 조선인 학생 대회에도 참가했다. 도미 후인 1913년 (다이쇼 2년)에 하와이의 일본인 으로서 [6] 호놀룰루 에 거주하고 학교 직원 으로 근무하는 가운데 조선독립운동 에 종사했다.
1918년 이와 친교가 있던 윌슨 대통령에 의해 '민족자결' 등을 내건 평화원칙이 의회에서 발표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파리강화회의 에서도 '민족자결'을 포함한 조약이 제기됨에 따라 로비활동을 하기 위해 리도 파리행을 희망한다. 그러나 국무성은 이의 여권을 발행하지 않도록 지시받았다 [10] .
임시정부와 다시 도미 [ 편집 ]
1919년 4월 10일 상하이 에서 결성된 ' 대한민국 임시정부 '(약칭: 임정 ) 의 초대 대총리로 취임하여 9월 11일 부터는 임시정부 대통령이 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단기적으로라도 조선독립을 위한 통일전선으로 좌우 양익을 규합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에서 획기적인 존재였다. 그동안 독립운동에서 그동안 거의 무명이었던 이가 대통령으로 선정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시 민족자결을 비롯한 '14조의 평화 원칙 ' 을 주창 한 미국 의 윌슨 대통령과 인맥이 있다고 생각되고, 한때의 대한제국황제 고종과도 연결 이 있다는 것이 지적되고 있다 [9] . 실제로, 동시기에 성립하고 있던 각종 조선독립운동의 '임시정부'에서 리는 리스트의 넘버 1 또는 2에 반드시 이름을 올리고 있다 [9] .
한편 리는 국제연맹 에 의한 조선의 위임통치를 제안하고 있었다 [11] . 이는 독립 달성을 위해서는 위임통치라는 단계를 밟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지만, 이것은 좌파 이동휘들의 강한 반발을 받아 '제2 의 이완용 ' 이라고 비난되었다 [11] . 승만은 완전히 정부에서 떠오르고 1920년 12월 8일 에 상하이에 들어갔을 뿐이었지만, 1921년 5월에 상하이를 떠났다 [11] . 이윽고 탄핵을 받아 1924년 부터는 1925년 3월 21일에는 대통령직도 쫓기고 있다. 이후는 미국에서의 로비 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일본은 어쨌든 미국과 적대한다, 그때는 조선을 전우로 해야 한다” [11] , “일본의 침략을 용인하고 조선을 견살하기로 한 미국도 동죄이다”(계류·태프트 협정 ) [12] 등과 강한 상태로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미국의 지원은 얻을 수 없었다 [12] .
1944년 9월, 카이로 선언 의 '적절한 절차에 의해(in due course)'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보장하겠다는 문언에 '왜 그들(연합국)은 우리를 실질적으로 돕거나 격려하거나 라고 자신들의 진심을 보여주려 하지 않겠는가”라고 우려를 느끼고, 미국의 관료에게 “우리 조선은, 국제사회에서 울고 있는 아이와 같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정의와 공정뿐이다 "우는 아이는 시간이나 장소를 깨달을 수 없다. 조선은 제국이 모여만 하면 시간도 장소도 깨어나지 않고 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3] .
대한민국 건국까지 [ 편집 ]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1945년 8월 15일 에 일본이 항복하고 , 그 후 연합국 정상 에 의한 얄타 협정에 근거해, 한반도 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북부는 소련군 , 남부는 미군 에 의한 연합국 군정 에 놓이게 되었다.
조선 독립에서 2개월 후인 1945년 10월 이승만은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직접 통치하 한반도로 돌아와 독립건국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는 다른 운동가에 비해 활동력이 긴 것,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 주석 2] ,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약칭 ' 건준 ')에 이름을 올린 것 30 년에 걸친 미국에서 의 로비 활동 으로 미국인의 지원 단체를 가지고 미국 내에서는 관계자에게 알려진 존재였기 때문에 미국 내에서는 "대통령에 취임해야 할 정통성 을 준비되어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고 한다 [ 요출전 ] .
리는 중국 국민당에도 인맥을 키우고 있어 맥아더에게 그를 강력히 추천한 것은 담개석이었다 [14] . 리는 맥아더의 전용기에 탑승해 귀국하자 미국의 뜻을 받아 건준과 임정과도 거리를 두고 반공통일 을 내걸었다 . 조선에는 그 밖에 유력한 반공의 우파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도 미국의 지지를 받은 이유 중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즉각 독립을 요구하는 민족파인 김구 와 중도파 의 로운亨, 좌파 의 박헌영 등 유력활동가가 미국과 정면에서 대립하는 가운데, 리는 미군정을 어느 정도 용인하고 있던 것도 크다 [ 15 ] .
또 이가 진지한 그리스도인이었던 것도 지지를 받은 이유로 여겨진다 [16] .
리는 일본 통치 시대에는 한반도에 있었던 적이 거의 없었고, 지반도 기반도 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를 뒷받침한 것이 전라도를 본거로 한 김성수가 이끄는 호남 재벌 [ 주석 3] 과 그것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한국민주당 (한민당)이다. 한민당 은 건준에 맞서 임정을 지지하고 있었다. 또한 해방 후에 신문이 실시한 각종 여론조사에서 리는 다른 지도자에 비해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17] . 반일 민족파인 김구 에 의한 친일파 숙청 에 두려움을 이룬 일본통치시대 의 대일협력자가 이의 지지 기반이 된 것이다 [18] .
그러나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은 아마 당초 예정대로 이를 지지하고 그와 한민당을 중개 했다. 임정과 한국민주당은 신탁통치 반대운동의 노선 등을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으며, 임정과 좌파와의 합작이 시작되면 한민당은 이승만에 접근한다 [주석 4 ] . 양자의 연합은 독자적인 세력 만들기로 움직이고 나서 이 아래 정부 준비조직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 이후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를 발족시켰다. 이로써 미군정하에는 독촉 · 임정 · 건준 이라는 3개의 정부 조직(정부 준비 조직)이 존재하게 되어 서울 은 대혼란에 빠졌다.
이와 한민당의 연합은 '건준'으로 세력을 자랑했던 좌파와 그 외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신자들과 대항해 미군정 개시 직후 서울정계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주석 5 ] .
전조선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는 5.10 단독선거를 막기 위해 열렸다. 4월 19일부터 평양 모란봉 극장 연석회의에서 남한 41개 정당·사회단체와 북한 15개 정당·사회단체에서 선출된 695명의 대표자가 참석한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 남북을 모든 좌·우 세력의 대부분을 망라하고 있었다. 실제로 남조선에서는 남조선노동당·근로인민당 등 좌익계열의 정당뿐만 아니라 한국독립당·민족자주연맹 등 우익계열의 정당도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박헌영·백남운·김구· 김규식 ·趙素昻등 유명인 등 좌익 및 우익도 참석했다.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이 가장 싫은 좌파 배제에 성공한 이승만과 한민당은 1948년 5월 10일 열린 국제연합 감시하 총선거 에 임했다 ( 초대 총 선거 ). 이 선거는 “미소 양군 철수→남북요인회담→총선거라는 순서로 정부수립”의 3단계 방안에 위배되며, 한반도의 남북분단을 고정화한다는 이유로 민족 파 의 금 9나 중도파 의 김규식 들의 유력자도 포함한 대반대 속에서 강행되어 각지에서 반대파에 의한 무장투쟁이 전개되었다 [19] .
남조선 단독으로의 초대선거에 이르는 과정에서 일어난 가장 비참한 사건이 ‘ 제주도 4·3사건’ 이다. 1948년 4월 3일 에는 조선 의 남북분단을 고정한다는 이유로 남조선 단독으로 총선거 실시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이 사건이 발생하여 적어도 3만명의 섬민이 남조선 국방경비대나 그 후 몸의 대한민국 국군 , 남조선의 민간 우익 등에 의해 학살당했다. 이 사건은 앞으로 제주도만은 섬민의 의사로 움직이려는 운동을 북한의 개입으로 보고 남쪽 군부와 자경단이 섬민을 학살한 것이다. 제주도는 나중에 대한민국 의 영토가 됐다. 이 사건에 의해 일본으로 도망친 것으로, 현재의 재일 한국·조선인이 된 자가 많다 [20] .
총선거에 따라 이와 한민당은 제헌의회의 다수를 제압했다. 거기서 제정된 제일공화국 헌법 은 의회가 대통령을 선출한다고 정했다.
1948년 8월 15일 에, 미국의 후원하에, 한반도 남부만을 실효 지배 하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언했다 [21] . 이는 의회 다수의 지지를 얻어 초대 대통령 으로 취임했다. 이정권은 지주 · 자본가 및 대일본제국 통치하의 조선인 관료 [주석 6] 를 세력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건국 다음달 9월 9일 한반도 북부를 실효 지배하던 북한인민위원회를 모체로 한반도 북부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이 건국됐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남조선)과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건국 후 대한민국의 이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조선민주주의인민 공화국 의 금일 성 총리는 ' 국토완성 '을 주창하고 각각이 서로를 병음하는 형태로 한반도 통일안을 제시했다 [22] .
대한민국 건국 직후의 정치적 갈등 [ 편집 ]
이승만은 실각 순간까지 독재적으로 행동했다. 한국 국내는 정치적 갈등으로 계속 흔들렸다. 대립은 종종 '체제파와 반체제파', '여당과 야당'의 논쟁보다는 오히려 '이와 의회 정치가들'의 갈등이었다.
대한민국 건국 직후인 1948년 9월에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어 이 법에 따라 1949년 1월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창설되어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 친일반민족행위자 '가 법적 에 인정된다 [23] [24] . 또 1948년 발생한 여수·순천사건을 계기 로 대한민국 국내 남조선노동당원 등 반이승만 좌익 ·친북세력 제거를 목적으로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 제정 하고 있다 [25] .
1949년 1월 5일에 아사히 신문을 통한 일본에 대한 신년 메시지에서는 과격한 반일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거기서는 「일본의 여러분 신년 축하. 한국인은 일본인이 한국인에게 안고 있는 것과 같이 선량한 여러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망도 없다」, 「과거 40년, 한국인이 받은 통증 손은 일본의 군국주의자의 죄였고, 일본인 역시 정부와 마찬가지로 피해를 입었다. [26] .
한국 정부 내부의 첫 대립은 대통령제를 계속 채택할지 의원 내각제를 채용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대통령제의 유지를 목표로 하는 이에 대해 이를 지지하고 있던 한민당의 다수 는 의원 내각제의 채용을 원했다. 이 두 사람의 갈등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꽂지 못하게 되었다. 일본 통치 시대에 보성전문학교(현재 고려 대학교 에서 호남재벌의 일원) 교수를 하고 서울 대학교 교수를 겸무하던 유진오· 헌법 기초위원회 회장은 한민당의 의향을 받아 대통령 를 형식적인 원수로 하는, 의원 내각제에 가까운 헌법 초안을 기초하고 있었지만 이에 의해 뒤덮여 대통령 중심제로 전환된다 [27] .
초대 내각조각 때에도 한민당과의 대립은 일어났다. 한민당은 김성수를 국무총리로 추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이준영을 국무총리로 임명, 27대 120의 큰 차이로 부결된다. 그러나 승만은 이어 이범녀를 국무총리로 임명, 110대 84로 가결. 초대 내각에서는 한민당은 거의 배제되어 김도연이 재무부 장관에게 맡겨졌을 뿐이었다.
1949년 에는 반승만세력이 단결되어 정계재편이 일어나 민주국민당 (민국당)이 태어났다. 민국당에는 임시정부 출신자의 일부도 더해져 신익희 , 조병구 등이 리더가 됐다. 민국당은 개헌안을 상정했지만 재석자 중 3분의 2의 찬성을 얻지 못하고 개헌안은 부결됐다.
또한 1949년 6 월 26일 에는 우파 진영에서 이승만 최대의 정적이었던 김구가 안두희 에 의해 암살 되고 있다 [28] . 안두희는 반공단체의 서북청년회 의 전 회원으로 사상적은 이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29] .
조선전쟁 [ 편집 ]
이승만은 제2회 총선에서 지지모체인 대한국민당이 참패했기 때문에 북한에 대해 '북진통일'과 강경한 자세를 보임으로써 구심력을 얻으려고 했다 . 1949년 2월에는, 미국 육군 장관과의 극비 회담 속에서, 군비를 증강한 뒤 멀지 않고 북한에 병사를 진행하고 싶다고 표명했지만, 장관으로부터 묶여 미국을 궁지에 빠지는 것 같은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강요당하고 있다 [30] . 또 이로써 미국의 불흥을 사게 되면서 경제·군사 양면 지원이 중단됐다. 북한은 한국과는 대조적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군사력 증강을 하고 있었다 [31] .
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이 대한민국 (남조선)에 압도적인 전력으로 공격을 시작, 조선전쟁이 발발 했다. 농번기를 이유로 한 병사의 휴가, 총선거에 의한 경계태세의 해제, 장비·전력의 차이(특히 대전차 장비의 부족), 같은 해 6월에 행해진 인사 이동 등 다양한 이유로부터[32 ] [ 33] [34] , 압도적인 조선인민군 (북한군)과의 인원·전력·장비의 차이로부터 대한민국 국군 (한국군)은 순식간에 총 무너졌다.
이승만은 개전 2일 후인 6월 27일 오전 3시에 특별열차로 서울에서 도망했고, 한국에서는 현재도 비판되고 있다 [35] . 6월 28일 수도 서울은 함락했다 . 그 때 북한군의 진행을 늦추기 위해 후조덕 소장의 명령 에 따라 한강 에 걸리는 다리가 폭파되어( 한강인도교 폭파사건 ) 많은 군인·민간인을 두고 떠나는 결과가 되었다. 또 이승만은 미군 과 대한민국 국군 상층부와 꽉꽂이를 온 등 넉넉한 성가신 취급되게 됐다. [ 요출전 ]
수도 서울의 함락 후, 리는 정부를 수원 으로 옮기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는 대구 에 도망하는 [ 요출전 ] 도 서울 북방의 방어전으로 북한군을 막고 있다는 정보를 받아 대전까지 돌아왔다. 그러나 7월 1일 대구와 대전에도 북한 게릴라가 침투하고 있다는 정보를 받아 지프와 열차로 목포까지 향한 뒤 해군 경비정에 승선하고 다시 도망 했다 [ 요 출전 ] . 다음 7월 2일 낮 전, 부산 에 도착했다 [36] .
또 부산 함락에 대비해 일본 야마구치현에 6만명 규모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망명정부를 건설하려고 하고 일본 측에 GHQ를 통해 요청을 했다 [37] .
1950년 7월 7일 국제 연합안보이사회 에 의한 유엔군 창설 결의안 결의 후 미국 해리 ·S·트루먼 대통령의 지명에 의해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가 7월 10일 초대 유엔군 사령관에 임명된 뒤 7월 14일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군 의 지휘권을 유엔군 사령관으로 이양했다 [38] .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에 의한 ' 인천상륙작전 '에 의해 형성이 역전되어 9월 26일 유엔군이 탈환하고 9월 28일 북한군 소토를 거친 후 9 월 29일 리는 부산에서 서울로 수도를 재천도했다 [39] .
유엔군의 서울 탈환 후 개전 이전 남북 양 정부의 사실상 국경선이었던 북위 38도선을 유엔군이 북상하는 것은 소련이나 중화인민공화국 등 공산권 의 개입 을 초래 하지 않을까 유엔군 내부에서 문제가 됐지만 ' 북진통일'을 바라는 이 대통령은 정일권 참모 총장에게 대한민국 국군의 38도선 북상을 지시했기 때문에 한국군은 38도선을 넘어서 [40] 이미 유엔 군사령관의 맥아더 원수도 38도선 돌파를 결의한 적도 있어 이 대한민국의 독단돌파는 사후 추인됐다 [41] .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은 한반도 의 북진을 이어 1950년 10월 19일 에는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의 수도기능이 존재한 평양 에 입성하고 [42] 10월 26일 숲 도미자 와 대령 이 이끄는 대한민국 육군 제6사단 제7연대 는 초산 을 공략, 중조 국경의 압록강 에 도달했다 [43] .
그러나, 이 1950년 10월 이후의 대한민국군, 및 유엔군의 38도선 북상에 즈음해, 모택동 주석이나 주은래 총리 등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상부는 대만 으로 도망친 중국 국민당 의 담 개석 총통 이끄는 중화 민국 의 점령 보다 또한 조선전쟁을 중시하는 관점에서 중국인민지원군 (항미원조의용군)의 참전을 결의하고 있으며, '보가위국, 항미원조'의 표어 아래 1950년 10 월 19일 에는彭徳懐司令관율하는 항미 원 조의용군 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 들어갔고, 10월 25일 부터 본격적으로 유엔군과 충돌했다 [44] . 유엔군은 이 항미 원 조의용군의 인해 전술 에 패배를 거듭 [45] , 12월 5일 에는 점령한 평양 에서 철수하고 [46] , 같은 해 12월 중에 중조연합군은 38도선까지 남하 , 다음 1951년 1월 4일 에 중조 연합군은 서울을 재점령하기에 이르렀다 [47] . 1951년 1월 10일 , 리는 트루먼 아메리카 대통령 앞으로 소비에트 연방 수도 에 원자폭탄을 사용한 민간인 대량 살육을 시사하는 [ 요출전 ] 서한을 보내고 있다 [48] .
이렇게 중화인민공화국 의 직접 개입 후 조선전쟁은 동서 냉전 하의 대리전쟁 의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이승만의 존재감은 서서히 희미해져 “이승만이 조선인민군에 잡혔다”는 소문까지 가 흐르는 시말이었다. [ 요출전 ]
조선전쟁기의 정쟁 [ 편집 ]
조선전쟁 중에도 이는 야당의 약체화를 고려해 야당 민국당 의 스폰서 적 존재였던 호남재벌의 핵심 경성 방직 (京紡)의 예금인출을 중지한다 . 이 때문에 경방은 이파로 자금공급처를 변경하고 민국당은 강력한 경제적 기반을 잃게 된다 [49] .
1952년 1월 18일에는 이승만 라인을 선언했다. 이 라인이 철폐(일한 기본조약) 되기까지의 13년간에 일본 어선의 포획 사건 등에 의한 일본인 억류자는 3929명, 사상자는 44명을 세고 인간으로서 만족스러운 생활을 할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아 가족이 보내 주는 편지조차도 한국 경찰 에 의해 내용물이 빼앗겨 닿지 않았기도 했다 . 당시 리가 말한 "미국은 너무 믿지 말아라. 소련의 놈들에게는 속지 마라. 일본은 반드시 재기한다. 주의하라!"가 한국에서 유행어가 되었다[50 ] .
같은 해에는 다시 의회와의 대립이 격화했지만 정부는 부산으로 도망하고 있었다 [ 요출전 ] . 임기마감을 앞두고 있던 리는 헌법 재선 금지를 철폐하기 위해 3선까지 허용하는 개헌안을 제출했다. 이에 맞서 야당은 의원 내각제안을 제출했다. 이는 전시하 부산에 계엄령을 포고하고 야당의원을 대량으로 검거했다( 부산 정치파동 ).
1952년 7월 4일 , 국회가 경찰에 포위되고 있는 가운데, 여당 의원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국회에서, 개헌안은 가결되었다. 대통령 선출은 직선제가 됐다. 이 무렵까지 이파는 자유당을 조직하고 있다. 이 시기 미국은 전시하에 의회와의 대립을 해소할 수 없는 이의 배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국민방위군 사건 이나 거창양민학살 사건 에 의해 대한민국 육군 본부에서는 이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다 [51] .
조선전쟁 초기에 대한민국에 침입한 조선인민군 병사는 이후 한국 내에서 파르티잔 투쟁을 반복했다. 같은 조선민족 에 의한 파르티잔 투쟁의 충격은 강하게 꼬리를 당겼다. 또 이가 상병병의 위문으로 한 병원을 방문했을 때 그 안에 한국 출신의 재일조선인 의용병 이 섞여 있었다 .
한편 리는 1953년 1월 5일 부터 1월 7일 까지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와이 클라크 대장의 초청의 형태로 비공식적으로 방일해 [주석 7] 1월 6일 에 클라크의 공저에서 요시다 시게루 총리와 약 1시간 대담했다. 내용은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험악한 교환이었다고 한다 [주석 8] .
1953년 전황이 교착한 조선전쟁에 대해 국제연합 주도에 의한 휴전 제안이 나오기 시작하면 리는 '정전반대, 북진통일 ', '휴전은 국가적 사형'을 입으로 끝까지 휴전에 반대하며, 북진통일론 '에 근거한 한반도 대한민국의 통일을 고집했다. 그러나 국제연합은 숙달하게 휴전으로 가는 길을 만들어 6월 8일 양군의 포로송환협정이 체결되었다.
6월 18일 리 는 미국에 아무 예고도 없이 포로수용소 감시원에게 포로의 석방을 지령해 억류하던 조선인민군 포로 2만5000명을 북으로 송환하지 않고 한국 내에서 석방하는 [주석 9] 라는 사건을 일으켰다.
정식으로 정해진 협정을 반고로 하는 폭거였기 때문에, 국제 여론의 비난이 높아진 데다, 북한내의 중국인 의용병(항미원 조의 용군)의 전면 철병을 리는 요구해, 조기 휴전 을 바란다 유엔군과 미군과 격렬하게 대립했다. 7월 16일 소련 신문 '소련 뉴스'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지난 3년이라는 것은 이승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3년 동안 남조선의 모든 문제는 미군사령관만에 의해 지령되고 있어 이승만은 부산 안쪽에 있는 미군의 뒤뜰 근처에 참석했다. …… 그런데 지금 갑자기 이승만은 너무 강대하고 강력하기 때문에 “유엔군 사령관도 미국 대통령도, 또 미국 의회도 그와는 검을 칠 수 없다”고 발표되고 있다. 엄청난 차방극이 상연되고 있는 것이다.— 가미야 후지『조선전쟁』
그러나 너무 존대하고 강한 이는 건 포로석방 사건으로 고립되게 됐다.
이는 부득이하게 휴전에 동의해, 1953년 7월 27일 , 대한민국의 정부 요인이 서명하지 않은 채, 중조 연합군 대표의 남일 조선 인민군 대장 과 유엔군 대표 의 윌리엄 해리슨 주니어 미군 중장이 조선 전쟁휴전협정 에 서명 했다.
조선전쟁 휴전 이후에도 이는 미국 의회 에 나서 다시 ' 북진통일 '을 호소했지만 더 이상 그의 말에 귀를 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요출전 ] .
조선전쟁휴전 이후 [ 편집 ]
1954년 10월 14일에는 “한국의 학생들에게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성과 그 한국에의 악의를 가르치도록 명령했다. 이것은 한국 경제를 독점을 바라는 일본의 음모에의 대항 조치로 교사· 대학교수에게 명령하여 학생을 격동시키려는 것”이라고 발표시켰다 [26]
1954년 당시의 헌법에서는 대통령의 임기는 2기까지로, 3선은 할 수 없는 일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평생 대통령을 바라는 이승만 및 여당 자유당 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 3선 금지 규정을 철폐한다”는 개헌안을 제출했다. 11월 27일 국회 투표에서는 의원 203명 중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 무효표 1표라는 결과가 됐다. 가결에는 의회의 3분의 2에 이르는 135.33표 이상, 즉 136표가 필요했다. 따라서 불과 1표 닿지 않았고 개헌안은 부결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파 국회의장은 “135.33표와는 사회통념상의 개념인 반올림을 이용하면 135표이며 개헌에 필요한 3분의 2를 넘고 있다”며 개헌안의 가결을 선언 했다( 반올림 개헌 ).
1956년 80세를 넘은 리가 3선을 노린 대통령 선거에 있어서 민국당을 중심으로 하는 야당 세력은 '할 수 없는, (정권을) 바꿔보자'를 슬로건으로 통일전선을 짜고, ' 민주당 '을 결성했다. 한편 자유당은 '바꿔도 변함없이 장로(이 대통령)가 낫다'는 슬로건으로 대항했다.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로 신익희 , 부대통령 후보로 장면 , 자유당은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 부대통령 후보로 이기호 라는 포진이었다.
선거 직전인 5월 5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신익희가 유설을 향한 도중 열차 속에서 뇌충혈로 쓰러져 급사한다는 트러블이 있어 민주당은 부대통령 후보만 선거를 강요당했다. 관헌의 개입도 있어, 선거의 결과, 이승만은 대통령 3선을 완수했지만, 부대통령의 이기호는 민주당의 장면에 패배. 대통령이 여당, 부대통령이 야당이라는 일종의 비틀림 현상이 일어났다( 1956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참조).
고령의 이승만에 만일의 사태가 일어나면 부대통령의 민주당의 장면이 앞당겨 대통령이 되는 데다 다음 대통령선에서 이가 당선할지조차도 수상해져 자유당은 위기감을 안았다 . 같은 해 9월 28일 에는 퇴역 군인에 의한 장면 부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 [주석 10] 을 일으켰고, 1959년 4월 30일 에는 장면계의 야당지 ' 쿄고 신문 '을 폐간 처분시켜 같은 해 7 달에는 전년에 진보당 사건으로 체포 된 주봉암 · 진보당 당수를 처형 [ 52] 하는 등 이는 철저한 정적 붕괴를 실시했다.
리는 25세 연하인 프란체스카 부인과의 사이에 친자가 없었기 때문에, 원연에 해당하는 측근에서 부 대통령 후보이기도 한 이기호의 장남 이강석(이강석)을 아이로 맞이 했다 . 강석은 1957년 서울 대학교 에 입학을 했지만, 그 입학이 특혜조치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소동이 되었다. 그러나 승만의 독재 하에서는 비판을 할 수 없는 것 같고, 안의 정 ‘독재자의 아들’은 종종 문제를 일으키며 [주석 12] 조선일보사 ‘한국 현대사 119 사건’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 | 1957년 8월, 9월은 이승만 정권의 절정기. 이강석은 거리의 무법자가 되어 경찰관을 때리거나 파출소의 기물을 부수고 걸어도 아무도 고발하거나 처벌할 일은 없었다. | " |
이 풍조에 편승하는 모습으로, 1957년 8월말에 강성무늬라는 22세의 남자가 강석이 되어, 「아버지로부터 밀명으로 공무원의 부정을 조사하고 있다」라고 지방의 도지사나 경찰 서장 등을 속아 두꺼운 접대를 받거나 금품을 요구한다는 사건을 일으켰다. 사건 발각 후 경주지사의 '귀하신 분이 혼자 계셨으니까'라는 발언이 사로잡히고, 일찍부터 강석에 대한 무법한 반감이나 정권 불만감에서 '귀하신 분'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주석 13] .
1959년 12월 4일 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 공화국 (북한)의 남일 외상의 호소에 응한 일본정부에 의한 재일조선인의 북한으로의 귀환사업을 저지하기 위해 이승만 정권 는 비밀리에 일본에 민단 소속의 재일한국인 과 협력해 '북한 귀환 저지 공작원 '을 보내 니가타 닛카이 센터 폭파 미수 사건을 일으켰다.
4월 혁명으로 인한 실각 [ 편집 ]
1960년 이승만이 4선을 노린 대통령 선거에 즈음해 야당의 대통령 후보 조선옥이 미국에서 질병 요양이 길어지고 있다(동년 2월에 객사) 것을 짐작해 리는 선거 기간을 앞당겼 다 . 야당은 '슬픔을 거두고 또 전장으로'를 슬로건으로 국민에게 동정을 호소했지만, 여당은 '케치 붙이지 말고 건설하다'는 슬로건으로 대항했다.
이 선거에서는 여당의 부정공작은 지난 대통령 선거보다 철저했다. 복심 이기호 의 부대통령 당선을 확실히 하기 위해 공무원 선거운동단체를 조직하고 경찰이 그것을 감시하게 하는 등 부정공작·부정투표 등이 횡행했다(1960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참조 ) .
1960년 3월 15일 대통령 이승만 부대통령 이기호의 당선 이 보도되면 특히 부정이 심했던 경상남도 마산에서는 민주당 마산지부 가 '선거포기'를 선언했다. 그것은 즉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로 발전해, 이에 시민도 참가. '시위는 공산당주의자의 선동'을 주장하는 당국이 시위대에 발포해 8명 사망 50명 이상이 부상이라는 참사가 됐다.
같은 해 4월 11일 , 이 시위를 구경에 가서 그대로 행방불명이 되어 있던 고교생·김주열이, 마산의 해안에서 머리에 최루탄을 박힌 상태로 시신에서 발견 되었다 . 시민·학생 등은 당국에 그의 사인을 규명하는 요구를 내걸고 다시 시위를 했지만 당국은 다시 “시위는 공산당주의자의 선동”이라고 이를 진압해 시위의 주도자를 체포했다 (마산 사건).
마산 사건에 항의하는 시위는 순식간에 한국 속에 날아오르고, 4월 18일에는 고려대학과 서울시립 대학 학생들 이 국회 앞에서 앉는다 다) 다음 4월 19일 에는 서울에서 수만명 규모의 시위가 열렸다. 각 주요 도시에서도 학생과 경찰대가 충돌해 186명의 사망자를 냈다( 4·19 학생혁명 ).
같은 해 4월 20일 월터 패트릭 마카나기 주한 미국 대사 가 경무대를 방문해 “민중의 정당한 불만에 부응하지 않는다면 드와이트 디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한 을 중지 하고 대 한경제 원조를 재고한다. 일시적인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며 이승만에 대해 사실상의 최후통패를 찔러 부탁의 줄다리던 미국 까지까지 놓쳐진 형태가 된다. 4월 23일 에는 '행정책임자의 지위를 떠나 원수의 지위에만 머무른다'며 완전히 지위에서 물러나는 것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고 민중의 분노는 최고조에 이른다.
정부는 각 주요 도시에 비상계엄령을 포고했다. 시위는 약 1주간 지속되며 같은 해 4월 25일 에는 서울대 를 중심으로 한 전국 27대 교수단이 호소한 ‘이승만퇴진’을 요구하는 항의 시위가 발생, 서울 시민 3만명이 일어난다. , 한국 전역에 단번에 퇴진 요구의 목소리가 퍼졌다. 이때 학생 대표 5명과 회견한 이는 “젊은이가 부정을 보고 일어나지 않으면 망국이다. 정말 부정선거라면 너희들의 행동은 맞다. 나는 사직해야 한다. 의 정도를 나타냈다(김대중 '내 자서전'). 다음 4월 26일 에는 파고다 공원 에 있는 이의 동상이 넘어져 복심인 이기호 부대통령의 저택이 습격되는 사태까지 발전. 국회에서도 대통령의 즉시 사임을 요구하는 결의가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이를 받아 오전 중에 승만은 라디오에서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고 선언해 점차 시모노했다. 건국 이후 12년간 이어진 독재 체제는 드디어 붕괴하게 됐다. 2일 뒤인 4월 28일 양자인 이강석이 일가 심중을 도모해 이기호 일가(실부모와 친동생)를 사살, 스스로도 목숨을 끊었다.
이승만은 1960년 5월 29일 새벽 아내와 함께 김포공항 에서 미국 하와이 로 망명 했다. 한국에서 이의 배송에 방문한 것은 대통령 대행이 된 허정 외무부 장관 뿐이었다.
1965년 7월 19일 리는 하와이의 양로시설에서 90년 생애 막을 닫았다. 임종에 만난 것은 아내의 프란체스카 도너 와 입양이었다 [53] . 프란체스카는 승만 몰후 고향인 오스트리아를 거쳐 1970년 5월 16일 한국으로 돌아와 1992년 3월 19일 서울에서 92세로 사망했다.
경제정책 [ 편집 ]
한국 병합 시대에 일본이 건설한 중화학 공업 시설의 대부분은 광물 자원이 비교적 풍부한 반도 북부에 집중하여 입지했고, 남방에 있어서는 그 대부분이 농지와 산림에서 차지되어 일본이 건설했다. 사회 인프라(항만이나 다리·교통망)가 정비됐다고는 해도 공업시설은 섬유산업 등 경공업이 중심이었다. 이 때문에 건국 직후 한국은 매우 어려운 스타트를 강요당하고 경제력으로는 북보다 열악했음에도 불구하고 반공정책이 우선되는 가운데 경제진흥책은 등반되어 있었다. 거기에 조선전쟁이 쫓는 모습이 되어 공장 건물의 44%, 기계시설의 42%, 발전설비의 80%가 피해를 입는 등 농지의 황폐나 공장시설이나 사회 인프라의 파괴를 초래했다 . ] .
조선전쟁의 휴전을 동의(서명은 끝까지 거부)함에 있어서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의 경제지원을 요구해, 조선전쟁 휴전 후의 1953년 10월 1일에 미한 상호방위조약 이 서명 된 것을 계기로서 미국으로부터의 대대적인 경제 지원이 시작되었다. 자급할 수 있는 자원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미국의 경제지원을 원자로 하는 ‘삼백산업’( 제분 · 제당 · 방적 )이 주요 산업이 되어 ‘실수요자제’에 따라 원조물자가 할당되는 건전이었다. 그러나 실제 수요자 중에서도 정치력 있는 업체 단체가 독점적으로 배분을 나누고, 게다가 그 중에서도 압도적인 재력을 자랑하는 재벌계 기업이 독점적으로 매입하는 것이 늘었다 . 게다가 실세율에 비해 공정환율로 달러가 과소평가(즉 원의 과대평가)된지 얼마 안되는 저금리 정책에 따라 정권과 유착한 재벌이 큰 이익을 얻게 된다.
이러한 까다로운 보호를 받은 재벌계 기업에 의한 '삼백산업'은 압도적인 속도로 공업화해 1957년에는 경제성장률은 8.7%에 달했지만 정권 말기가 되면 과잉설비 투자 가 현재 화 원조 감축으로 심각한 불황이 일어났다. 또 상공업이 활발해진 것과는 달리 농업 정책 은 거의 무책과 같았다. 인플레이션 억제의 일환으로 (또한 '삼백산업'의 발전을 이루기도 하고) 미가는 저가로 억제되었지만, 결과적으로 농업 종사자의 수입의 저하·불안정화를 초래해, 봄궁 농민이 증대화하게 됐다. 이승만 정권 말기에는 춘궁농민이 농업종사자의 절반에 이른 [ 요출전 ] . 이러한 경제정책의 무책도 있어 1961년 박정희 정권 성립까지 1인당 GNP 도 80달러 전후에 멈추게 된다. 다만 한국경제가 해방·분단·전쟁 과정을 거쳐 1953년 부터 1955년 에 있어서의 1인당 실질소득 이 거의 1910년대 수준으로까지 후퇴하고, 이것이 1940년대 수준으로 회복되는 것은 1965년 를 기다려야 했다는 상황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55] . 이승만 정권기부터 박정희 정권기 1970년 전후까지 남쪽의 대한민국보다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쪽이 경제적인 체력으로는 이기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러한 상황은 어디까지나 북한이 일본에서 받은 물질적인 유산이 풍부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어 1930년대 후반부터 추진된 군수공업화의 결과 해방 후 1946년 당시 북한에서는 약 800곳 이상의 대규모 공장이 가동 중이며 제철 , 정련 , 전기 , 화학 등 당시 세계의 첨단 수준의 공장군이 존재했다. 1939년 이후 일본에서 가져온 전기·화학공업의 대규모 공장은 종업원수가 3000, 혹은 6000을 넘는 경우도 있어, 현재 확인된 것만으로도 200개소를 넘는다. 북한에 깔린 철도망 은 1인당 철도 길이로는 일본 내지보다 높은 수준에 있었다. 1인당 발전량도 북한에서는 일본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반면 남조선이 일본에서 이어받은 물질적인 유산은 가난했다. 남한에서 가장 큰 산업은 쌀 곡 의 수출이었다. 공업시설은 양조소 ·정미소와 같은 식품가공업이나 인쇄업 ·도자기업과 같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56] .
이러한 경제 상황을 반영하거나 당시 한국에서는 설탕 이 힘든 고급품으로 되어 있으며, 외국인 기자단과의 회담 도중 커피와 각설탕이 내보내져 외국인 기자 들이 자국 에서 가는 대로 여러 뿔 설탕을 커피 속에 넣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고, “당신들의 나라에서는 커피 속에 설탕을 넣는 것 같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설탕 속에 커피 를 넣는다 ”고 자신이 자학적으로도 취할 수 있는 농담을 발언한 적이 있다 [57] . 일본으로부터의 다액의 무상원조나 차관에 의한 급속한 경제발전을 달성한 박정희와 비교해 경제의 정체 를 해소할 수 없었다고 한국내의 평가는 매우 낮고, 「한강의 기적」에 상징되는 약진 1960 년대 와는 대조적으로, 정체의 1950년대 로 파악되는 경우가 많다 [주석 14] .
대일정책 [ 편집 ]
조선의 독립운동에 병합 전후부터 관여했던 경력에서 이승만은 일본을 격렬하게 싫어했다. 미국 체재 중에는 병합 이전의 이조를 '동양의 이상 국가'였다고 적극적으로 언론 활동을 전개하고, 이것이 허스트계 신문에 의해 선전된 '일본=야만 국론'의 일부가 되어, 미국이 동아시아 에 정치 개입하는 정책의 근거가 되었다.
또 이승만은 조선이 일본 통치하에 있었던 시기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나 일본인이라는 것을 스테레오타입으로 추상적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고 반일정책을 장난으로 부추기기 로 이어졌다 . 혹은 지적되고 있다. 게다가 권위주의 정권으로서 기초의 취약이었던 것, 보도 연맹 사건 , 제주도 4·3 사건 , 국민 방위군 사건 과 같은 실정으로부터 국민의 눈을 돌리기 위해 오늘도 이승만의 민족주의 적정책 의 영향은 뿌리 깊게 남아 있으며 일본과 한국 사이에 누워 있는 문제의 대부분이 이승만 시대에 끝을 내고 있다.
이승만 라인과 일본선권포 [ 편집 ]
대표적인 대일정책의 하나로 1952년 일방적인 해양주권 선언, 이른바 ' 이승만 라인 설정'이 있다. 전후 1945년 9월 27일, GHQ(연합 국군 최고 사령관 총사령부 )는 전후의 불안정한 아시아 국가 상황과 잠정 통치의 사정상에서 일본 어선에 관련된 조업 구역을 제한한 통칭 ' 맥카서라인 '을 나타냈다. GHQ가 일본에 촉구한 맥아더라인은 1949년과 1950년에 재검토가 진행되어, 1951년 9월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한 일본국의 주권 회복을 거쳐 다음해인 1952년 9 월 에 폐지 된다 .
일본측의 잠정적인 어선 조업 범위가 국제적인 기준으로 되돌아가는 강화조약의 발효 전인 1952년 1월, 이승만은 대통령령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을 공표하고 자국 의 해양 경계선 ' 이승만 라인 '을 주장했다. 동시기는 조선전쟁이 대체로 사실상 휴전이 되어 진해에 사관학교 가 창립된 때이기도 하다. 유엔 해양법 조약 과 배타적 경제 수역이 성립되기 전에 맥아더 라인을 대체하는 것으로 설정하려고 한 것으로, 풍부한 수산 자원의 어장 확보를 목적으로 국제 협력을 무시하고 이승만이 실시 한 조치였다.
이라인을 넘어 조업하고 있는 일본 어선은 종래는 공해로 여겨지고 있는 영역 이라도 나포되어 장기간에 걸쳐 억류되거나 한국 관헌에 의한 폭행이나 총격에 의해서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44명의 사상자를 내고 있다. 이 정책에서 한일 기본조약이 잇는 13년 사이에 한국 측이 나포한 일본 어선은 328척, 어부 3929명이 한국 측에 구속된다는 사태가 된다.
이승만 실각시인 1960년 4월 27일에는 더글러스 맥아더 2세 주일 미국 대사 가 국무성을 향해 기밀전문 3470호를 송신했다 [58] . 그 가운데 그는 이승만 정권이 힘차게 일본의 어민을 구속하고 있는 것을 비난하고, 인질이 된 어민들을 “이승만에 의한 잔혹하고 야만적인 행위를 겪었다”[59 ] 라고 표현해, 이승만 재임중의 8년간 일본인은 이승만의 옹호할 수 없는 점령주의적 수법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60] ,라고 보고하고 있다 [61] .
또 이라인의 목적의 하나로는 다케시마 ( 한국도 : 독도 ) 를 자국령으로 받아 들인다는 것이 있었다. 정한 것 등, 지금까지의 경위를 무시하는 모습이 되었다. 이라인의 설정으로 한국의 실효 지배하에 놓이게 된 다케시마의 처우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일의 현안 문제가 되고 있다.
대일관계는 영토문제나 이라인 얽힘 이외에서도 자주 대립이 일어나고, 북송사업( 북한 귀국운동) 에 관해서는 두 번에 걸친 통상관계 중단 [주석 15] 이나 예정되어 있던 한일회담을 “일본 는 인도주의의 이름 밑에 북한 傀儡 정권의 공산주의 건설을 돕고자 한다”고 비난하고 중지(1959년 8월)하는 등 격렬하게 반발했다. 그뿐만 아니라 공작 부대를 밀항 시켜 북송 사업을 주도하고 있던 일본 적십자사 시설의 파괴나 일본측 담당자의 암살 , 귀국선이 입항하는 니가타항 에 통하는 철도망의 파괴를 모았다 [ 62] 니가타 니치 레드 센터 폭파 미수 사건 ).
대일정책과 그 영향 [ 편집 ]
이승만의 일본에의 반감은 머무르는 것을 모르고, 1954년 의 FIFA 월드컵·예선 아시아 예선 에서는 “식민지 지배한 일본인을 영토에 넣을 수는 없다”라고 적지 일본에서 2경기 싸우는 것을 조건에 축구 대한민국 대표 의 참가를 허용하고 당시 대표 감독에게 “만약(일본에) 졌다면 현계탄에 몸 을 던져라”고 말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63] . 출전을 결정했을 때에는 환영식과 축하 퍼레이드가 열렸다 [64] . 일본의 대중문화는 '공서양속에 반하는 표현'으로서 규제를 받아 [ 요출전 ] , 교육면에서도 반일교육 을 철저히. 일제 시대를 그리워하는 것을 공개하는 것조차 공산주의자 등의 반정부 분자와 마찬가지로 정치범이 되고 [ 요 출전 ] 약 35년간의 투옥자 수를 넘을 정도였다.
전후에는 일본의 조선통치 시대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한국 국민이 대다수였지만, 이러한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지금의 한국에서는 친일파로서 단죄되는 것이 사회적으로 말살되는 것과 같아 졌다 버렸다 [ 요출전 ] . 한편 일제 시대에 관료로 맡고 있던 엘리트 나 적지 않고 국책에 협력하고 있던 재벌이나 기업은, 그 대부분이 독립 후에도 이정권하에서 중용되거나 정권의 지지 기반이 되는 등, 독립 직후 에 구부러진 친일파 처분은 불충분하게 끝났다. 그 때문에 오늘의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이승만 정권은 반공에 철저히 철저하게 친일파의 처분이 불충분했다」라고 하는 취지의 기술 이 있어 [ 요 출전 ] [ 요출전 ] ) , 친일파의 규명은 현대의 한국에서 주요한 정치의제가 되고 있다(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참조).
이후 박정희 정권은 일본과의 타협점을 모색해 1965년 사토 에이사쿠 총리와 의 사이에 ' 한일 기본조약 '을 비준했다. 박정희 정권은 일본으로부터의 다액의 무상경제 원조와 차관을 얻는 동시에 대일무역이 경제발전의 유일한 방법으로 적극 추진했다. 이러한 박정희 정권의 정책과 대비하여 이승만 정권의 대일정책과 1950년대 경제침체의 인과관계가 지적되고 있다 [65] .
또 일본 대중문화 유입 제한을 한 것도 결과적으로 그 현수와 해적판 등 지적재산권 침해가 횡행하는 사태에 빠졌다. 나중에 대한민국에서도 저작권 의 개념이 침투하고, 또 김대중 정권 이후 단계적으로 일본의 대중문화 개방이 이루어지게 된 적도 있어 오늘날에는 점차 개선되고 있다.
평가 [ 편집 ]
이승만의 정책은 그의 개인의 반공산주의를 축으로 한 '반공에 집심해서 전혀 보이지 않는' 물건으로, 우선 남반부에 의한 단독정권을 수립하고 나서 군사력에 의한 북반부의 병권을 구상 했다( 북진 통일론 ). 1948년 8월 5일 대한민국 건국의 다음 9월 9일 건국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한반도 북부의 반국가단체에 의한 불법 점거 ' 라고 한 뒤 대한민국 는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적인 국가라고 하며 국제연합도 이에 따랐다.
조선전쟁 전후부터 반공정책· 프로파간다 는 격렬함을 더해 격렬한 전쟁을 경험한 한국사회에는 공산주의자를 적시하는 강한 반공의식이 싹트고 거의 국민적 합의가 되었다 . 하지만 북한의 침공을 받은 한국이 혼란스러워 반도 남단 부산 으로 까지 따라잡을 정도의 추태를 드러낸 것은 이승만 개인의 자질에 따른 곳이 크다 [66] . 열세에 빠지면 독립운동의 동료였던 신익희 , 장자와상 , 조봉암 등 한국 국회의장단과 함께 누구보다 빨리 도망쳐, 수도 서울이 북한에 침공되고 있는 가운데 거짓 녹음방송을 하고 서울에서 도망쳐 도강파라고 비판되고 있다. 자신은 주한미 군기지로 피난하면서도 피난민으로 대혼란 상태의 한강 다리를 불문하고 폭파, 희생자를 내는 뿐만 아니라 많은 비전투원이 남아 버렸다. 도망친 것에 대한 대국민사죄문을 발표할 것을 권유하자 “나는 당나라 의 종종 인가?”라고 사죄를 거부했다. 반대로 방송이나 명령을 믿고 서울에 남은 한국의 잔류파에게 사죄도 위로하지 않고 '정실과 관용과 탈락이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공포의 '반역자 처벌'을 벌였다[67 ] . 한국 측이 우세해졌다고 보니 누구보다 눈에 띄려고 선두에 서, 인천 상륙 작전에서 북한군의 소토가 성공하고 있을 때 연합군으로서의 규율을 무시하고 대한민국 국군 부대 를 마음대로 서울에 선행시켰다. 한국에서 38도선을 넘은 북한으로의 역진공이 감행된 것도 유엔군의 맥아더 사령관의 의도도 있었지만, 최초로 그것을 결정한 것은 이승만의 독단 전행이었다 [ 66 ] .
이승만은 평생 대통령을 바라며 점차 비민주적·권위주의 적인 성격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주석 16] . 대통령이기 위해 헌법 개정의 강행과 선거에 대한 부정 개입을 반복하고, 국회에서의 정적이나 선거의 민주화·부정의 진실을 요구하는 민중을 「용공적」 「북쪽의 스파이」 「평화통일론을 주창했다” “파르겐이(공산주의자의 칭칭)” 등과 베기 버리고 격렬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결국 그를 대통령의 자리·건국의 아버지의 자리에서 쫓아내게 된 것은 4·19 학생혁명 에서의 민중의 힘이었다.
이승만 정권하의 혼란을 관찰한 그레고리 헨더슨 [주석 17] 은 일본에 의한 대일본 제국 통치의 역사는 조선의 정치의식·구조를 바꾸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이승만 정권은 조선의 전통적 정치 체질을 계승하는 것으로 지적했다.
이승만은 조선국(이씨 조선) 마지막 왕위 계승자 이구 와 그 부인 이방자 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왕정복고를 의심했다는 측면도 있지만 이승만에는 한반도의 두 차례 지배(일본에 의한 병합, 미군에 의한 군정)에서 대한민국이라는 독립국가를 시작한 자존심이 있었다. 이씨 조선시대의 잔재, 특히 종속국주의 [ 주석 18] 등은 가장 먼저 기만해야 하며, 그것을 지지하고 있던 왕실의 인간이나 친일파 등은 자신이 세운 독립국가에 존재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정치·경제에 관한 실무 능력이 있는 인간이 자파에 전무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일본 시정하에서 관료로서 일하거나 사업가로서 치부를 위한 인간에 의존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 심지어 세계 최저 최빈국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가난한 재정기반에서는 미국의 뒤 방패나 원조 없이는 국가의 운영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에 놓여진 후에는 대한민국을 운영할 수 있다 사라지고 결국 망명에 이르렀다. 또 이승만에는 대청황제 공덕비를 부끄럽다고 묻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승만과 그 밖의 정치가와의 대립을 과거의 이씨 조선시대에 있어서의 왕(군주)과 양반(관료 - 귀족층)의 권력 싸움에 비유하는 논자, '조선 왕조 마지막 군주'로 한다 논자도 다수 존재한다. 사실 이승만의 정권은 문치국가였던 이씨 조선의 계보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그 계보가 끊어진 것은 다음 독재자 의 것이다 .
현대 한국에서 이승만은 ‘ 건국의 아버지 ’라는 평가와 ‘민중을 공포로 몰아낸 독재자’라는 것으로 나뉜다.
주한미군사령관 존 리드호지는 이승만을 “요코시마로 정서불안정, 냉혹으로 부패하고 어려운 날씨가게”라고 생각했다 [68] .
2023년 6월 28일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가 발족. 관민 합동으로 기념관 건설을 추진하게 됐다.
저서 [ 편집 ]
각주 [ 편집 ]
주석 [ 편집 ]
- ↑ 이것은 조선왕위(한국황제위) 계승권을 가진 방계왕족의 한 사람임을 의미한다.
- ↑ 나중에 내부 대립으로 탄핵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 ↑ 이 시기의 조선에서는 최대의 조선인 자본 이며 , 경성 방직을 중심으로 전전 이미 만주 에의 진출을 완수하고 있다. 동아일보 · 고려대학교 등도 계열하.
- ^ 한민당의 임정과의 결렬에서 이승만으로의 접근에 이르는 과정은 기무라 간, '한국에서의 '권위주의적' 체제의 성립-이승만 정권의 성립' 미네르바 서방, 2003, 제 2 장 제 4절에 상세하다.
- ^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리더 로운운은 좌우 양익에 의한 통일전선의 유지에 부심해, 재조선 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이 좌파 · 공산주의자의 배제를 의도하고 있는 것을 의식하고, 스스로는 중도파 로서 행동해, 「건준」의 노선도 중도로 전환하려고 했다.
- ↑ 대 일본제국 통치하 관료는 현재 한국에서 말하는 ' 친일파 '에 해당한다.
- ↑ 그 이전에도, 1948년 10월 19일과 1950 년 2월 16일 의 두번에 걸쳐, 비공식적으로 일본을 방문하고 있다.
- ^ 요시다 시게루 의 저서 『회상 10년』 등에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싫어하는 인물 이 3 명 있다 . "라고 가까이 있던 인물에게 말했다고 한다. [ 요출전 ]
- ^ 같은 포로의 해방이라고는 해도 '송환'이라면 한국이 스스로의 책임을 가지고 포로를 북쪽으로 귀환시키는 반면, '석방'이라면 포로의 본국으로의 귀환이 의무화되지 않는다[ 요 출전 ] . 이로서는 북한 체제에 부정적이었던 포로는 자국에 멈추고 지지 기반에 더하고 싶었다고 한다. [ 요출전 ]
- ↑ 이승만 정권붕괴 후에 정권상층부가 관여를 인정하고 있다.
- ↑ 1958년 1월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 나중에 스파이 혐의로 전환.
- ^ 이 후의 대통령인 박정희 의 아들도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지만, 박 자신은 감히 아들에서도 특별한 취급은 없었을 뿐 친척을 수도 서울에 살게 하는 것을 금지했을 정도였다.
- ^ 풍자 4컷 만화가의 금성환은 연재중인 '코바우 영감'에서 “ 경무대 의 주민이 귀한 분이라면 배뇨를 운반하는 사람도 귀한 쪽”이라고 야유한 것으로부터 당국에 4 일간 구류되어 국가 전 수모 죄로 벌금 450팬을 치르게 됐다.
- ↑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단절뿐만 아니라 연속성의 관점에서 경제면에서의 이승만을 재평가하는 기운이 1990년대부터 서서히 높아지고 있지만, 그것은 이승만이 시작한 반일 정책 을 평가 하는 것에 머물고 있다. - 이종원 '동아시아 냉전과 한미일 관계'( 도쿄대학 출판회 , 1996년. 김삼수 '한국자본주의 국가의 성립과정 1945-53년 정치체제·노동운동·노동정책' 도쿄대학 출판회, 1993년 기무라 간, 전 게시.
- ↑ 1955년 8월 – 1956년 1월과 1959년 6월 – 1960년 4월. 다만 이 통상관계의 중단은 외화 유출을 막는 의도도 있었다.
- ^ [1] 우리 대통령 (우리 대통령)이라는 이 대통령을 칭찬하는 노래가 있다.
- ↑ 미국 점령군의 통역으로도 일한 조선 정치 연구의 선구자. 일본어 번역 저서에 『조선의 정치사회 - 소용돌이형 정치구조의 분석』(스즈키 사오・오츠카 참중역, 사이멀 출판회, 1973년)이 있다.
- ↑ 이씨 조선은 소국주의를 관철해, 책봉 체제를 집행했다.
출처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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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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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항목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 기무라 간「이승만과 한국 내셔널리즘 : 대한민국을 생각한다」(2001년)
- ' 이승만 ' - 코트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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